Chapter 6 배후 캐기
일단의 무리가 아벤드로 들어섰다. 30명으로 이루어진 무리였는데, 하나같이 존재감이 희미했다.
그들을 이끄는 사람만이 뚜렷한 존재감을 뿌려 댔는데, 표정이 싱글벙글이었다.
"내게 이런 좋은 기회가 올 줄이야."
아벤드 지부장은 그의 경쟁자 중 하나였다. 한데 그로부터 도움 요청이 들어온 것이다. 거절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나저나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기에 타격대가 무너진 거야?"
아벤드 지부장은 타격대가 절반 이상 무너지는 바람에 지원을 요청했다.
출발하기 전에 기본적은 정보는 조사를 했다. 현재 아벤드는 난장판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된 이유가 펠젠 때문이라는 것 외에는 알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사내는 이번 일을 금방 끝낼 수 있다고 여겼다. 사내가 데려온 자들은 암살에 관해서는 최고의 실력을 갖고 있었다. 애초에 펠젠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그만 사라지면 모든 일이 제자리를 찾지 않겠는가.
"굳이 시간을 끌 필요가 없지."
사내는 곧장 펠젠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타지로 원정 와서 동료와 합류하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는데 아무 생각 없이 합류했다가 몰살이라도 당하면 완전히 끝장 아닌가.
이럴 때는 상황을 좀 더 냉철하고 넓게 살피며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이렇게 곧장 목표를 정해서 달려드는 것도 마찬가지로 바보짓이었다.
하지만 사내는 그걸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펠젠에 대해서는 이미 자세히 분석했다. 그간의 자료와 최근의 세력 판도에 관한 정보까지 싹 훑었다.
그걸 토대로 계산한 바에 따르면 실패할 리가 없었다. 사실 정보를 통해 파악한 펠젠의 실력이나 세력을 고려하면 너무 많은 인원을 데려왔다.
지금 사내가 데려온 30명의 암살자는 그가 가진 최고의 패였다. 사내에게 부족한 것은 직접 정보망을 관리하는 자들보다 정보력이 약하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만일 이번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다면 그 부족함을 단번에 메울 수 있게 된다.
정보망을 관리하는 지부장은 그 지역의 정보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좀 더 폭넓은 정보를 위해 대륙 곳곳에 자신만의 세력과 정보원을 심어 놓는다.
잘하면 그 모든 걸 단번에 꿀꺽 삼킬 수 있었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이런저런 상념과 계획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부지런히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펠젠의 건물에 도착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펠젠의 건물은 다가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수많은 암시장의 상인들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암시장의 상인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펠젠을 돕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사내는 품에서 수정이 달린 스틱 하나를 꺼내 건물을 가리키며 빙글빙글 돌렸다.
수정에 붉은빛이 점멸했다.
"완전히 거저먹기로군."
수정에서 점멸하는 붉은빛은 목표로 한 지점에 있는 사람들의 상태를 가리킨다.
붉은빛이 점멸한다는 것은 마나를 품은 사람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푸른빛이 점멸하면 마나가 밖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는 뜻이다. 즉, 익스퍼트가 있다고 보면 된다.
건물 안에는 20명쯤 되는 실력자가 있었고, 2명의 익스퍼트가 존재했다.
그 정도라면 그냥 정면으로 들어가 싸워도 30분 안에 몰살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사내는 더 조심스러운 선택을 했다.
"일단 안에 펠젠이 있는지부터 확인한 다음 움직인다. 알아서 근처에 은신해."
사내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30명의 암살자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은 마치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근처에 은신한 것이다.
사내도 조용히 움직이며 근방에 몸을 숨겼다. 펠젠의 동태를 파악하고, 허점을 파고들어 죽이는 데까지 길어야 3일이면 충분했다.
그리고 그 3일 동안 사내를 비롯한 암살자들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에 몸을 최상의 상태로 만드는 게 가능했다. 그들에게는 그렇게 만들어 주는 비약이 있었다.
물론 비약을 쓸 일은 없을 것이다. 펠젠을 처리하는 데 비약까지 쓸 일이 있겠는가. 그저 지나가다가 칼만 한 번 휘둘러도 모든 게 끝난다.
그렇게 몸을 숨기고 펠젠의 건물을 유심히 살피던 사내는 갑자기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깜짝 놀랐다.
하지만 행동은 반사적으로 나왔다. 그동안의 충실한 훈련에 따라 허리춤의 단검을 뽑음과 동시에 내질렀다.
슉!
단검이 복면을 쓴 사람의 목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복면을 본 사내의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자신이 여기에 오기를 노린 것이 분명했다.
공격에 실패해서 다음을 대비하려는 찰나, 복면인이 순식간에 다가왔다. 미처 대응을 할 수가 없었다.
빠악!
"크윽!"
엄청난 격통이 일었다. 마치 얼굴이 온통 뜯겨 나가는 것만 같았다. 어딜 맞았는지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저 얼굴 어딘가를 맞았고, 워낙 아파서 얼굴 전체가 아프다는 게 그의 뇌리에 떠오른 전부였다.
희미한 시야에 또 날아오는 주먹이 보였다. 순간 극심한 공포로 인해 정신줄이 훅 날아가 버렸다.
빠악!
격통과 함께 의식이 사라졌다. 그리고 희미하게 깜빡이는 의식을 통해 수하 암살자들이 우르르 몰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마지막 순간에 웃을 수 있었다.
복면을 쓰고 사내를 제압한 사람은 당연히 제론이었다. 제론은 일이 이런 식으로 흘러갈 것을 미리 예상했다. 이젠 자연스럽게 이놈을 살려 보내는 일만 남았다. 물론 그 전에 몸에 마법진을 심어야겠지만 말이다.
제론은 다가오는 기척을 낱낱이 파악했다. 빠르게 다가오는 사람은 총 10명이었다. 암살자가 30명이었는데, 그중 10명만 오는 것이다.
'신호는 보냈겠지.'
제론은 자신의 감각 안에 30명의 암살자를 모두 가뒀다. 그렇기에 그들이 어디 있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20명은 각자의 자리에서 건물을 감시하고 펠젠의 동태를 살피는 중이었다. 나머지 10명만 다가왔는데, 사내를 시야에 두고 있던 자들이었다.
제론은 일단 그들을 처리하기로 했다. 마법을 몸에 심는 광경이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었다.
일단 가장 먼저 한 일은 사내의 손에 쥐어진 단검을 빼앗는 일이었다. 단검을 쥔 채로 기절했기에 손가락이 굳어서 잘 빠지지 않았지만, 제론에게는 마치 어린아이 손목 비트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었다.
단검을 손에 쥔 제론은 그것을 몇 번 휘둘러 봤다. 그것만으로 단검이 손에 익어 버렸다.
제론은 단순하게 단검을 좌우로 한 번 그었다.
사아악!
긴 마나의 끈이 채찍처럼 튀어나와 세상을 둘로 갈라 버렸다.
촤아아악!
단번에 10명의 암살자가 피를 뿌리며 죽었다. 겉으로 모습을 드러낸 채 달려오던 자뿐 아니라, 몸을 숨긴 채 은밀히 이동하던 자들까지 몽땅 당했다.
제론은 빠르게 마나링을 가속시켰다.
푸르게 빛나는 마법진이 겹겹이 떠올랐다. 몇 번의 실전을 통해 이젠 아주 능숙해졌다. 이번에 펼친 마법은 예전에 쓴 것보다 더 발전시킨 것이었기에 마법진의 수도 많았고 마법진 자체도 훨씬 복잡했다.
사내의 몸에 마법진이 스며들었다. 마법이 마무리될 즈음, 남은 20명의 암살자가 이동을 시작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은 느낌에 각자 알아서 움직인 것이다.
그들은 피바다 속에 쓰러진 동료의 시체를 보고는 지체 없이 움직였다. 물론 신중함을 기했다. 저렇게 동료들이 허무하게 당했다면 상대가 얼마나 강할지 능히 짐작이 가능했다.
제론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였다. 자연스럽게 마법진을 흡수한 사내를 살려서 돌려보내야 하는데, 이보다 더 좋은 상황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그냥 도망치지만은 않았다. 어쨌든 돌아가게 만들어야 하니 최대한 피해를 가중시켜야만 했다.
암살자 5명이 무리를 이룬 곳을 향해 달려간 제론은 단검을 휘두르며 그들을 뚫고 지나갔다.
퍽퍽퍽퍽퍽!
단검은 정확히 암살자들의 급소를 살짝 빗겨 파고들었다. 당장 죽지는 않겠지만, 즉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출혈 과다로 결국 죽을 것이다.
제론은 빠르게 몸을 뺐다. 암살자들은 더욱 속도를 높여 쫓아갔지만, 결국은 놓칠 수밖에 없었다.
남은 15명의 암살자는 아직 죽지 않은 동료를 수습하고, 얼굴이 퉁퉁 부은 채 기절한 그들의 수장을 데리고 빈민가를 빠져나갔다.
☆ ☆ ☆
아벤드 지부장은 황당한 눈으로 수하를 바라봤다. 수하 역시 황당한 눈치였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들을 돕기 위해 왔던 자들이 연이어 큰 피해를 입고 돌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놈들 대체 뭐하자는 거지? 아벤드에 왔으면 일단 나부터 봐야 할 거 아냐?"
"아무래도 각자 처리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끄응."
할 말이 없었다. 그들의 생각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도움을 요청했다면 좀 더 깊이 생각했어야만 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 역시 위로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이었다. 혼자 해결할 수 있었다면 어떤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알아서 했을 것이다.
"몇이나 당했나?"
"열다섯입니다."
지부장이 고개를 저으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도움을 요청한 놈들이 몽땅 당해서 돌아갔다. 이래서야 자신이 조직을 뒤흔든 거나 다름없었다.
"그놈들 어디 있지?"
"일부는 돌아갔고, 일부는 근처 호텔에 머물고 있습니다. 제가 관리하고 있습니다."
"잘했다. 일단 그놈들만이라도 불러라. 힘을 모아서 대항해야겠다."
"알겠습니다."
수하가 물러가자 지부장은 힘없이 자리에 앉았다. 일이 계속 꼬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이렇게 만들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정보망이 망가지지 않았다면 무슨 일인지 좀 더 확실히 알아낼 수 있을 텐데, 그게 불가능하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사실 지금도 정보망 곳곳이 무너지는 상황이었다. 제대로 보고를 못 받아서 그렇지 실시간으로 보고를 받을 수 있다면 아마 오래지 않아 뒷목 잡고 쓰러질 것이다.
펠젠의 저력은 무서웠다. 아니, 암시장 상인들이 대단했다. 그들 하나하나는 별것 아니었는데, 일단 모이니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암시장 상인 하나가 정보원 하나만 알고 있어도 그 수를 다 합하면 대체 몇 명인가.
게다가 암시장 상인들은 정보원 하나 발견했다고 끝내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새로운 정보원을 찾아냈다.
"암시장 상인들을 몽땅 죽여 버릴 수도 없고……."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암시장이 유지되어야 아벤드가 유지된다. 그리고 그래야 아벤드 지부장이라는 자리에 의미가 있었다.
"대체 어떤 놈이지?"
지부장은 펠젠이 이 모든 일을 주도했으리라고 믿지 않았다. 펠젠에게는 그 정도 역량이 없었다. 누군가의 하수인이라면 모를까, 이런 상황을 이끌어 나가는 건 그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했다.
아무튼 이대로는 안 된다. 상황을 반전시키려면 이쪽에서도 뭔가 수를 내야만 했다. 그게 아니라면 정말로 모든 걸 내려놓고 상부에 보고를 하거나 말이다.
"아마 파장이 만만치 않겠지."
지부장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 혼자 당하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이번에 도움 요청을 받아들인 모두에게 파장이 미칠 것이다.
조직 자체가 워낙 크고 단단해서 근간이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조직의 하부가 흔들리다 보면 결국 그런 식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지부장은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번 일이 앞으로의 거대한 해일을 알리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별의별 생각을 다 하고 있을 때, 사람들을 부르러 간 수하가 돌아왔다. 지부장은 그의 표정을 보고 일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다들 그냥 돌아갔나?"
수하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더 이상 피해를 입으면 곤란하다고……."
"멍청한 것들이로군."
지부장은 살짝 무거웠던 마음을 털어 버렸다. 이제 좀 더 홀가분하게 상부에 보고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전에 마지막 발악을 한번 해 볼 것이다.
"남은 타격대를 모아라. 그리고 운영 자금을 돌려서 용병과 암살자를 고용해."
수하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예? 하지만 그렇게 하면……."
지부장은 단호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넌 시키는 대로 하면 돼."
"아, 알겠습니다."
지부장의 박력에 수하는 별다른 이의도 제기하지 못했다.
"남은 정보원에게 명령을 하달해라. 아벤드를 한번 크게 흔들어야겠다."
"아, 아벤드를 흔든단 말입니까?"
"그래야 쥐새끼처럼 숨어 있는 펠젠이 모습을 드러낼 거 아니냐. 최소한 그놈은 죽여야겠다."
배후가 있는 것 같지만 일단 지부장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그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그걸 하다 보면 배후가 살짝이라도 드러날 거라 믿었다.
지금 지부장이 잡을 수 있는 지푸라기는 그것뿐이었다.
☆ ☆ ☆
제론은 7명에게 심어 둔 마법진을 통해 그들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태블릿에 저장할 수 있었다.
요즘은 그걸 확인하느라 상당히 바빴다. 사실 이건 그냥 바인에게 넘겨 버리는 게 제일 빠르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태블릿의 정보를 바인에게 넘기려면 태블릿을 보여 주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태블릿은 제론의 가장 큰 무기이자, 비밀 중 하나였다.
"그러고 보니 바인한테 준 아티팩트도 좀 손을 보긴 해야 하는데……."
바인에게 준 정보 수집 도구는 제론이 직접 만들어 준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과는 달리 아티팩트 제작에 대한 능력이 모자랐기에 성능이 떨어졌다.
들어가는 재료는 엄청나게 값비쌌는데, 들인 재료에 비해 나온 결과가 시원치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아티팩트였다. 지금 보면 조잡하기 그지없었지만 말이다.
"여기 일을 대충 마무리한 다음 바인의 아티팩투부터 손을 봐 줘야겠군."
제론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마법진이 점멸하듯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벌써부터 마법진 구상을 시작한 것이다.
최근에는 마법진을 구상할 때, 뇌의 일부분을 분리하듯 이용해서 따로 계산하고 마법진을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치 마음을 둘로 나눈 것처럼 말이다.
사실 그것은 마나링을 9개 만들고 그것을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키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능력이었다.
8개의 마나링과, 9번째부터의 마나링은 마치 서로 분리된 것처럼 성질이 전혀 달랐다. 그것을 자유자재로 이용하려면 뇌를 분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 이후는 다 마찬가지였다. 10번째 마나링을 만들어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 뇌를 총 3개로 나눌 수 있었다.
마나링 자체가 완전히 달랐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9번째의 마나링은 앞의 8개 마나링을 합한 것과 똑같은 능력을 발휘한다. 즉, 마나로 이루어진 손이 8개나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 9개의 마나링을 만들면 얼마나 대단한 마법을 쓸 수 있겠는가.
어쨌든 제론은 9개의 마나링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좀 특별하게 뇌를 분리하는 능력을 얻어 냈다. 그리고 지금 그걸 아주 유용하게 쓰고 있었다.
"배후를 캐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겠군."
어쨌든 그들이 상위 조직과 접촉하거나 상급자와 접촉해야 마법진을 분리시켜 보내든 말든 할 것 아닌가.
당분간은 그럴 일이 없었다. 제론은 일단 아벤드부터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지부장의 상급자가 올 수도 있으니 지부장은 내버려 둔 채 조직만 싹 쓸어버릴 계획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의 중심에는 펠젠이 있었다. 제론은 펠젠을 문두스의 하부 조직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아마 바인 아래로 들어가면 펠젠은 결코 배신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바인은 슬슬 그런 식으로 하부 조직을 만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론이 거기에 도움을 주는 셈이었다.
어쨌든 마티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은 그렇게 조직을 만들어 유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돈과 인력이 많이 들어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문어발식으로 수많은 하부 조직을 만들어 두면 결국 대륙의 모든 정보를 손아귀에 쥘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제론은 바인만 손에 쥐면 끝난다. 그 부분은 자신 있었다. 이미 몇 가지 조치를 취해 두기도 했고, 또 바인의 마음이 생각보다 단단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마음은 두려움이기도 했다. 바인은 자신의 힘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지나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힘의 원천인 제론을 거의 신처럼 모셨다.
"그나저나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군."
이제 슬슬 아베티스로 돌아가 나베 공작가의 일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그쪽을 통해서도 배후 세력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진행하던 일이 실패하면 배후가 움직일 수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제론이 대충 머릿속으로 계획을 정리하고 있을 때, 방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꽈앙!
"크, 큰일 났습니다!"
들어온 사람은 펠젠이었다. 제론은 무심한 눈으로 펠젠을 쳐다봤다. 펠젠은 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자 다급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약간의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펠젠은 제론을 바라보며 차분히 말했다.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폭동?"
"예. 광범위하게 아벤드 전역에서 폭동이 일어나 지금 난리입니다."
"전역에서?"
제론은 조금 전 확인한 지부장의 영상에서 그가 남은 정보원들에게 뭔가를 지시했다는 걸 떠올렸다. 정확히 뭔지 그가 말하지 않아서 알 수 없었는데, 아마 이 폭동이 그 결과인 모양이었다.
노리는 걸 알고 있으니 대처도 편할 수밖에 없었다. 제론은 손가락을 까딱였다.
펠젠은 머뭇거리며 제론에게 다가갔다.
"이 폭동이 왜 일어난 것 같아?"
"그, 글쎄요. 혹시 적 조직이 마지막 발악으로 아벤드를 전복시키려는 것 아닐까요?"
"마지막 발악인 건 맞는데, 아벤드 전복은 불가능해. 너도 알잖아? 아벤드가 어떤 곳인지."
"그, 그야……."
아벤드는 범죄 조직이 판을 치는 곳이었다. 당연히 도시에서 강력한 병력을 육성했다. 그들을 막으려면 필수적인 선택이었다.
그 병력이 출동하면 폭동은 금세 잠재울 수 있었다. 적이 노리는 건 혼란 속에서 펠젠의 빈틈을 만들어 찌르는 것이었다.
"목표는 너야."
"예?"
펠젠이 화들짝 놀랐다. 목표가 자신이라니. 대체 왜 그런 결론이 나온단 말인가. 적 조직이 얼마나 대단한 저력을 갖고 있는지 알기에 갑자기 불안해졌다.
"아마 이번 폭동이 가라앉으면 적 조직은 회생이 거의 불가능한 타격을 입을 거야. 아벤드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펠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너무나 당연했다. 이런 폭동의 배후를 가만히 내버려 뒀다간 나중에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아벤드 측에서는 최대한 단호하고 빠르게 폭동과 주동자를 정리할 것이다.
"넌 지금부터 여기서 나와 함께 지내."
"예? 하지만……."
펠젠은 꺼림칙함과 아쉬움이 뒤엉킨 표정을 지었다. 왠지 제론이 두려웠기에 함께 있기가 무서웠다. 그리고 제론과 함께 있으면 그동안 즐기던 걸 하나도 못 하게 될 것 아닌가.
펠젠은 최근 부와 권력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한데 제론과 함께 지내면서 어찌 그런 걸 누리겠는가. 그저 납작 엎드리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싫으면 할 수 없지. 나가도 돼."
"예?"
펠젠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같이 지내자고 하더니 이젠 또 그냥 가라니. 하지만 그냥 나가고 싶은 쪽으로 마음이 슬그머니 기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신할 사람을 빨리 찾아야겠군."
제론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혼잣말이었지만 밖으로 나가려는 펠젠은 그 말을 분명히 들었다.
'대신할 사람?'
펠젠의 두뇌가 평생을 통틀어 가장 빠르고 맹렬하게 회전했다. 현재의 상황과 앞으로 벌어질 일, 그리고 제론이 한 말을 토대로 결론을 내렸다. 그야말로 눈 한 번 깜빡할 시간에 이뤄 낸 계산이었다.
펠젠은 다시 몸을 돌려 제론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헤헤 웃으며 말했다.
"잠은 어디서 잘까요?"
제론은 피식 웃으며 시선을 구석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작은 야전 침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서, 설마 저 작은 침대에서 자라는 말씀이십니까?"
펠젠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렇게 작은 침대에서 자려면 온몸을 웅크리고 자야 한다. 갑자기 그냥 나가 버릴까 하는 생각이 강력하게 스며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타이밍 좋게도 건물 밖에서 큰 소란이 일어났다.
"저 건물이야!"
"펠젠을 끌어내! 그놈이 원흉이라고!"
건물 벽을 통해서 들어오는 소리였기에 작았지만 펠젠의 귀에는 아주 똑똑히 들렸다. 당연히 깜짝 놀랐다.
"워, 원흉? 내, 내가 뭘?"
펠젠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다급히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봤다. 그리고 턱이 빠져라 입을 벌렸다.
구름처럼 사람이 모여 건물을 포위하고 있었다. 예전 암시장 상인들 정도가 아니었다. 그때의 10배가 넘는 인원이 모여들었다.
"대,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펠젠이 제론에게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건 분명히 제론이 개입했기 때문이리라.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예? 하지만 전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요?"
"난 한 것 같아?"
"그, 그야……."
제론은 계속 자신의 방을 떠나지 않았다. 뭔가를 했을 리가 없었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쉽게 나오는 답이었다.
"목표가 너라는 뜻이지. 저 폭도들 사이에 적 조직원이 숨어 있을 거야. 선동도 그들이 했을 거고."
펠젠의 입이 쩍 벌어졌다. 대체 왜 자신이 앞에 나서서 그 모진 매를 맞아야 한단 말인가. 왠지 억울했다.
"그러니 상황이 끝날 때까지 잠이나 자."
"하지만 이대로라면 저들이 건물 안으로 밀고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보아하니 벽을 타고 올라올 기세던데……."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번 일은 이제 끝났어. 버티기만 하면 돼. 적이 새로운 힘을 투입하지 않는 한."
제론의 호언장담에도 펠젠은 불안했다. 그래서 창가로 다가가 밖을 슬쩍 내다봤다.
그 순간, 바람을 찢는 소리와 함께 뭔가가 날아왔다.
쐐애애액!
"헉!"
펠젠은 반사적으로 주저앉으려 했다. 하지만 날아오는 것의 속도가 너무 빨라 그의 반사 신경을 무력화시켰다.
턱!
펠젠은 미간에 닿을락 말락 멈춘 단검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닿지도 않았는데 미간을 꿰뚫리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가, 감사합니다."
단검을 멈춘 것은 제론이었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날아온 단검을 가볍게 손으로 잡은 것이다. 펠젠이 죽기 일보 직전에 말이다.
펠젠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하마터면 오줌을 지릴 뻔했다.
"그러니까 가서 자라고 했잖아. 괜히 저 자리에 저만한 침대를 놓은 줄 알아?"
펠젠은 그제야 침대를 다시 바라봤다. 위치와 크기를 보니 제론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완벽한 사각이었다. 창을 열어도 저 침대가 있는 곳을 단번에 공격하는 건 불가능했다.
펠젠이 무릎걸음으로 엉금엉금 기어서 침대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위에 웅크리고 모로 누워 눈동자만 굴렸다.
제론은 그것을 보고는 씨익 웃었다. 그리고 창가로 다가갔다.
밖을 내다보니 성난 군중이 보였다. 하지만 전혀 걱정하지는 않았다. 저들은 절대 이곳에 들어올 수 없었다. 벌써 마법진을 잘 깔아 뒀다.
이 건물에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몸에 마나를 지닌 사람뿐이었다.
모든 사람을 막는 건 훨씬 높은 수준의 마법이 필요했다. 어쨌든 아무도 들락거릴 수 없게 만들어선 안 되고, 일처리를 위해 건물을 나가는 사람이 분명히 생긴다. 그들까지 선별하려면 굉장히 특별하고 복잡한 마법진이 필요했다.
하지만 단순하게 마나의 유무로 인원을 걸러내면 훨씬 간단히 마법진을 구성할 수 있었다.
마법진을 각인시키기 위해서는 마나 스톤의 가루가 필요했다. 이 건물에 마법진을 새기기 위해 쓴 마나 스톤의 가루는 상당한 양이었다.
아마 더 복잡하게 마법진을 구성했다면 10배가 넘는 마나 스톤이 필요했을 것이다.
"꾸역꾸역 잘도 몰려오는군."
사람들이 건물에 들어오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다가오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건물의 마법진이 발하는 특유의 역장이 사람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또한 가까이 다가오다 보면 꺼림칙한 기분이 들어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곤 했다.
건물에 당당히 다가올 수 있는 사람은 수련을 통해 마나를 품게 된 자들뿐이었다.
제론은 그렇게 건물에 다가오는 자들을 보며 눈을 빛냈다. 그런 식으로 선별하면 이런 점이 편했다. 다가온 자들 대부분이 적의 조직원이었다.
"그럼 마무리를 해 볼까?"
슬슬 시간이 다 되어 간다. 빨리 이곳의 일을 마무리하고 아베티스 영지로 돌아가야만 했다. 아마 지금쯤 루이네는 잠도 못 자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제론의 손가락 끝에 작은 마나의 구슬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단단하게 뭉쳐진 마나의 구슬이 다가오는 적 조직원을 향해 날아갔다.
소리도 없고 기척도 없었다. 마나의 구슬은 날아가면서 투명해졌다. 주변 마나와 동화하면서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마나에 담긴 힘 자체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것은 목표의 머리를 그대로 꿰뚫었다.
피슉!
당한 사람조차 자신이 뭘 어떻게 당했는지 몰랐다. 피가 튀지도 않았다. 그저 자연스럽게 움직이다가 서서히 힘을 잃어 갔다. 그리고 힘없이 주저앉았다.
외상도 거의 없어서 대체 왜 이러는지도 알지 못했다. 동요가 일어났다. 처음에는 작았지만 그런 식으로 쓰러지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나니 점점 커졌다.
그리고 그 동요는 시간이 지나며 서서히 공포로 바뀌어 갔다.
모든 것은 제론이 원하던 대로 이루어졌다.
☆ ☆ ☆
폭동이 완벽하게 제압되었다. 아벤드의 영주는 자신이 가진 모든 역량을 동원해 폭동을 제압하고, 배후를 박살 냈다.
이번 폭동으로 가장 큰 수혜를 입은 사람은 당연히 펠젠이었다. 이제 펠젠의 조직은 아벤드에서 가장 큰 조직이 되었다. 아벤드의 정보를 한 손에 쥐게 된 것이다.
이는 굉장한 힘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힘을 가진 펠젠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괴, 굉장히 뛰어난 거울이군요."
펠젠은 그렇게 말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자신의 집무실 벽에 걸린 거울이 시커멓게 일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인간의 원초적인 공포를 계속해서 자극했다.
"선물이야."
"구, 굳이 그러시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만……."
"잘 보관해야 할 거야. 거울이 깨지면 너도 죽을 테니까."
제론의 말에 펠젠이 화들짝 놀랐다. 그 무슨 무시무시한 말인가. 대체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저, 정말입니까?"
"시험해 볼까?"
펠젠이 맹렬히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저야 무조건 믿으니까요. 헤헤헤."
펠젠이 비굴하게 웃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울상을 짓고 있었다. 왠지 여생이 꼬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네가 할 일은 별거 없어. 가끔 거울이 하는 명령을 듣고, 주기적으로 정보를 모아서 보내면 돼."
"예? 보내다니요? 어디로 말입니까? 그리고 거울의 명령이라니……."
펠젠이 의문을 표함과 동시에 거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인의 목소리였다. 물론 펠젠은 그가 누군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내 명령을 들으란 말이다. 정보는 보고서 형식으로 만들어서 거울에 붙이면 된다. 내가 알아서 읽을 테니까."
펠젠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리고 거울과 제론을 번갈아 바라봤다.
불길함의 정체를 드디어 알아냈다. 다시는 엮이기 싫은 제론과 엮인 것이다.
"나머지는 하고 싶은 대로 해. 굳이 널 통제할 생각은 없으니까. 보아하니 더 위로 올라가고 싶은 것 같지도 않고."
펠젠의 표정이 대번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눈을 빛냈다. 위로 올라간다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저 이래 봬도 야망 있는 놈입니다. 위로 올라간다니, 여기서 더 올라갈 수도 있는 겁니까? 귀족도 아닌데?"
제론이 피식 웃었다.
"원하는 수준이 어디까지야?"
"그, 그야…… 아, 암시장 정도?"
펠젠은 속으로는 아벤드의 영주가 되고 싶다고 말했지만, 그걸 겉으로 표현할 수는 없었다. 엄연히 한계라는 것이 존재하니 말이다.
지금이야 아벤드의 정보를 장악했다고 하지만, 언제까지 이걸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또 영주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위태로운 조직에 불과했다.
그것을 이번에 절실히 느꼈다. 적 조직이 영주의 결정 한 마디에 완전히 박살 나지 않았던가.
물론 그 이면에는 제론의 개입이 있었지만 말이다.
"아벤드의 지배자가 되고 싶나?"
"그, 그렇게까지는……."
"왜? 안 될 것 같아? 아니면 영주를 원하는 거야?"
펠젠은 입을 다물었다. 왠지 두려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기대되었다. 어쩌면 정말 가능할지도 모른다. 아벤드의 영주가 되는 것이, 아니면 아벤드의 지배자가 되거나.
'솔직히 여기서 조금만 더 애쓰면 아벤드의 밤은 충분히 지배할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펠젠의 표정과 눈빛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제론은 단호하고 무겁게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떤 미사여구로 치장된 말보다 훨씬 믿음직스러웠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펠젠의 물음에 제론은 턱 끝으로 거울을 가리켰다. 펠젠이 검은 기운으로 일렁이는 거울을 바라봤다.
"명령에 잘 따라. 시키는 대로 하다 보면 어느새 그 자리에 앉은 자신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
제론은 그 말을 남기고 방에서 나갔다. 펠젠은 한동안 멍하니 제론이 한 말을 생각하며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거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거울에서 일렁이는 시커먼 기운이 마치 누군가가 웃는 모습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