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경매
"예? 경매를 100건이나 내놓으시겠단 말씀이십니까?"
"왜? 어렵나?"
"그, 그건 아니지만…… 기간트는 경매에 올리지 않고 그냥 파는 것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습니다만……."
"걱정하지 마라. 기간트는 그냥 팔 테니까. 내가 경매에 올리려는 것들은 좀 특별해. 예를 들면 이런 거 말이야."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목걸이 하나를 탁자에 올렸다. 펠젠은 그 목걸이를 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대체 이게 뭡니까? 고대 유물쯤 될 것 같기는 한데……."
"맞혀 봐."
"예?"
펠젠이 황당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대체 이게 어떤 물건인지 어떻게 맞힌단 말인가. 설명도 안 듣고 말이다.
사실 고대 유물 중에는 그래서 가치가 제대로 책정되지 않은 물건도 상당히 많았다. 우연히 사용법이 발견되는 바람에 가치가 수백, 수천 배나 상승한 유물도 있었다.
"그걸 할 수 있으면 제가 여기 있겠습니까? 유물 장사를 해서 떼돈을 벌죠."
제론이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집어서 들어 올렸다.
"이 목걸이, 내가 100골드에 산 거야."
"100골드? 어디서…… 아! 설마 그때?"
펠젠도 제론이 이걸 어디서 샀는지 기억이 났다. 암시장 좌판을 돌아다니면서 유물을 잔뜩 사더니 이게 바로 그거인 모양이었다.
"한데 고작 100골드짜리를 경매에 내놓으신단 말씀이십니까?"
"이게 100골드짜리로 보여?"
"예? 분명히 100골드라고……."
"내가 산 게 100골드지, 이 유물의 가치가 100골드일 리가 없잖아."
"예? 그게 무슨……."
제론은 씨익 웃으며 목걸이를 움켜쥐고 한마디 중얼거렸다.
"밸로스."
쉬아아악! 꽝!
"으허헉!"
펠젠은 화들짝 놀라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갑자기 빛나는 화살 하나가 날아왔기 때문이다.
빛으로 이루어진 화살은 펠젠이 채 반응하기도 전에 머리 옆을 지나가 벽에 부딪쳤다. 펠젠이 물러난 건 두려움으로 인한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펠젠은 억지로 고개를 돌려 빛의 화살이 부딪친 벽을 쳐다봤다. 그리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허억!"
벽에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복도를 지나 있는 벽에도 금이 쫙쫙 갔다. 굉장한 위력이었다.
"그, 그게 대체 뭡니까?"
"뭐긴, 고대에 만들어진 아티팩트지. 하루에 빛의 화살 10발을 쓸 수 있게 해 주는 목걸이야."
"하, 하루에 10발입니까?"
"그래.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하나씩 충전되고."
펠젠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정도면 경매로 팔면 수천 골드는 받을 수 있었다. 아니, 잘만 받으면 1만 골드를 넘기는 것도 가능했다.
고대 유물 중에서 이렇게 공격에 관계된 물건은 흔치 않았다.
"어때? 경매에 올릴 만해?"
"무, 물론입니다! 이런 게 경매에 가는 거죠!"
"좋아. 그와 비슷하거나 더 좋은 물건이 100개 있으니 그거 싹 올려."
펠젠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 모습에 제론이 씨익 웃으며 덧붙였다.
"일 할은 수수료로 떼어 가."
"예? 정말입니까?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래야 제대로 일할 거 아냐."
펠젠이 벌떡 일어나 제론에게 허리를 푹 숙였다.
"감사합니다!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기간트도 계속 팔아야지? 일단 10기 더 줄 테니까 팔아 봐. 그거 파는 거 봐서 앞으로 어떻게 할지 결정하지."
펠젠은 허리를 더 아래로 굽혔다. 머리가 거의 땅에 닿을 듯했다.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가치가 좀 덜 나가는 유물도 내줄 테니까 잘 팔아 봐. 수수료는 일 할인 거 알지?"
쿵!
펠젠의 이마가 땅에 닿았다.
"잘하겠습니다!"
제론은 그런 펠젠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확실히 보통 놈은 아니었다.
"그럼 일단 경매부터 시작해 봐."
제론은 그 말을 남기고 방에서 나갔다. 그리고 펠젠이 미리 마련해 준 건물 내의 거처로 갔다.
앞으로는 이곳에서 생활할 계획이었다. 적 조직이 계속 도발할 것이다. 그걸 막아 내다 보면 적의 힘을 약화시키고 펠젠을 키울 수 있었다.
펠젠을 믿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통제가 가능했기에 차라리 어설프게 믿을 만한 사람보다는 훨씬 나았다.
이곳 아벤드는 펠젠에게 맡기기로 결정을 내렸다.
☆ ☆ ☆
거처에 도착한 제론은 침대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명상을 시작했다.
유물은 펠젠이 처리할 테니, 제론은 그것을 기다리면서 9번째 마나링을 만드는 데 모든 심혈을 기울일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바인이 유적에 대한 정보를 주면, 유적을 찾아 나서고 말이다.
제론이 이렇게 9번째 마나링을 서두르는 이유는 텔레포트 게이트 때문이었다.
최근 텔레포트 게이트를 영지에 설치하기 위한 준비를 조금씩 하고 있었는데, 그걸 정확히 설치하기 위해선 9개의 마나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렇지 않아도 설치는 가능하지만, 그런 경우 실패율이 존재했다.
그걸 없애기 위해선 마법진의 구성이 정교해야 하는데, 그 정도로 정확하려면 9개의 마나링이 필요했다.
초고대에는 정교함을 높이기 위한 아티팩트가 따로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구할 수 없었다. 그 아티팩트를 만들기 위해선 11개의 마나링이 필요했다.
제론은 명상을 하다가 눈을 떴다. 마법 실력을 높이기 위한 새로운 방법 하나가 떠올랐다.
"내가 직접 아티팩트를 만들어 볼까?"
마법등 같은 저급한 아티팩트가 아니라, 고대 유물 급의 고급 아티팩트를 만들어 본다면 분명히 마법 실력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아티팩트를 만드는 것은 그냥 마법진을 그려 마법을 펼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안 그래도 아티팩트를 만들어 상단을 통해 판매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판매할 아티팩트는 기존의 상단이 취급하던 것과 비슷한 것들이었다.
물론 초고대문명의 지식이 포함된 아티팩트였기에 제작 단가가 훨씬 낮고, 성능이 뛰어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마탑을 통해 제작이 가능한 아티팩트였다.
하지만 유적에서 발굴한 아티팩트는 완전히 달랐다.
사실 현재의 마법이 그렇게 수준 낮은 것은 아니었다. 일단 기간트를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수준의 마법 공학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마법진은 대부분 규모가 크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것을 작은 물품에 담으려면 엄청난 압축률이 필요한데, 그것을 연구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고대 유물이 큰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현재의 마법 공학으로 구현이 아직까지 불가능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그것이 가능했다. 아니, 초고대문명의 지식과 마법을 이용하면 고대 유물보다 훨씬 대단한 마법 아티팩트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문제는 그것을 위해 마법에 대한 더 깊은 공부와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초고대나 고대에는 아티팩트 마법 공학이 따로 존재했다. 그것을 기초부터 차근차근 공부해야만 하는 것이다.
일석이조였다. 마법 경지도 올리고, 아티팩트를 만들어 돈도 벌고 말이다. 또한 쓸 만한 아티팩트의 경우 영지의 가신에게 나눠 주면 전력 상승도 꾀할 수 있었다.
마나링이 11개로 늘어나면 아티팩트를 대량생산할 방도가 열린다. 어쩌면 그 전에 유적을 통해 그 방법을 얻을지도 모른다.
'그럼 걱정이 몽땅 사라질 텐데.'
돈과 무력을 갖췄는데 뭐가 무섭겠는가. 천천히 인구를 늘이며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물론 그 와중에 슈린 공작가는 부숴야겠지만 말이다.
제론은 곧장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다. 일단 아티팩트를 만들기 위해서는 마법진을 물건에 정교하게 새길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다.
"일단 작은 것부터 차근차근 만들어 갖춰 나가야겠군."
본격적으로 아티팩트를 제작하려면 그 전에 준비해야 할 것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제론은 일단 시작하기로 했다. 가장 먼저 하기로 한 것은 기초 장비 제작이었다.
☆ ☆ ☆
아벤드가 술렁였다. 아벤드의 밤을 지배하는 세력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세력이 흔들리면서 그 아래 숨죽이고 있던 세력들이 반기를 든 것이다.
펠젠도 거기에 슬그머니 발을 걸쳤다.
처음 펠젠의 세력은 보잘것없었다. 하지만 갑자기 막대한 자금이 유입되면서 단숨에 성장했다.
펠젠의 성장은 다른 세력들에게 경각심을 심어 주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아벤드를 원래 장악하고 있던 세력이 워낙 강대하고 돈과 정보를 한 손에 틀어쥐고 있는지라, 그들과 상대하려면 급성장한 펠젠이 꼭 필요했다.
펠젠은 암시장에서의 영향력도 점점 키워 갔다. 그가 경매에 내놓은 물건들은 하나같이 대단했다. 고대 유물 중에서도 손가락에 꼽히는 것들이었다.
또한 꾸준히 내다 파는 기간트 역시 뛰어난 품질을 자랑했다.
펠젠이 갈퀴로 돈을 긁어모은다는 소문과 펠젠의 뒤에 큰손이 도사리고 있다는 소문이 동시에 돌았다.
그 모든 소문과 관심의 중심에 선 펠젠은 오늘도 느긋하게 경매장으로 향했다.
매일 경매장에 들러 경매 현황을 살펴보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경매장에 도착한 펠젠은 특별 대우를 받으며 호위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펠젠에게 제공되는 자리는 물품이 가장 잘 보이며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거의 띄지 않은 곳이었다. 경매장 측에서 특별히 제작한 자리이기도 했다.
경매장 안에는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최근 경매장이 이렇게 호황을 누리는 것도 다 펠젠 덕분이었다. 아니, 펠젠의 뒤에서 물건을 공급한 제론 덕분이었다.
'으흐흐흐, 기분 좋구나.'
펠젠은 이 기분과 분위기를 만끽했다. 자신이 언제 이런 대접을 받아 보겠는가. 하지만 앞으로는 매일 이런 대접을 받으며 살 것이다. 제론의 손만 놓치지 않으면 말이다.
그걸 누구보다 잘 알기에 펠젠은 제론을 깍듯이 모셨다. 제론이 원하는 건 최대한 들어주려 애썼고, 또 제론을 속이는 일은 전혀 없었다.
제론이 일을 맡겨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지경이었다. 펠젠도 자신이 수수료를 상당히 많이 챙기는 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제론이 신경을 써 준 것이다.
경매가 진행되었다. 펠젠이 내놓은 물건은 중간중간에 섞여 있었다. 다들 특별한 마법이 인챈트된 고대 아티팩트였다.
"오, 드디어 나왔군."
펠젠이 눈을 빛냈다. 마법 화살을 하루에 10번 날릴 수 있는 특별한 목걸이가 나왔다. 저 다음에 나올 것은 마법 방패로 목숨을 구할 수 있는 반지였다.
최소 수천 골드에서 수만 골드까지 받을 수도 있는 굉장한 아티팩트였다.
목걸이나 반지에 마법을 각인시키는 건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었다. 고대 유물이 아니면 그런 물건을 찾는 건 불가능했다.
목걸이가 등장하자 사방이 술렁였다. 그리고 그중 한 사람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저건 내가 판 목걸이 같은데?"
사내의 말에 주변에 있던 몇몇이 그를 쳐다봤다. 물론 경매장이 워낙 넓고 사람이 많아 목소리가 멀리 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주변에서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 말에 약간의 관심을 가졌다.
"당신이 판 목걸이란 말이오?"
중년인 하나가 묻자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소. 내가 판 목걸이가 분명하오."
"저런 목걸이가 최근 경매에 나온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당연하지. 경매에 판 물건이 아니오. 저건…… 내가 좌판에서 100골드에 판 목걸이요."
그 말에 중년인이 피식 웃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저런 대단한 목걸이를 대체 왜 100골드에 판단 말인가. 경매에 넘기지 않아도 2천 골드는 충분히 받을 수 있는 물건을 말이다.
"잘못 본 거 아니오? 고대 유물 중에는 비슷한 모양의 장신구가 상당히 많소."
사내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기억하오. 저 목걸이에는 흠집이 하나 있는데, 그 위치가 똑같소."
그렇게까지 말하니 중년인도 흥미가 커졌다. 그리고 목걸이를 자세히 살폈다. 멀찍이 떨어져 있었지만 마나를 수련했기에 목걸이에 난 흠집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호오, 정말로 흠집이 있군."
"내가 미쳤지. 저걸 고작 100골드에 팔다니……."
사내가 멍한 얼굴로 중얼거리자 중년인이 턱을 쓰다듬으며 눈을 빛냈다.
'이거 펠젠이라는 자의 능력이 예상 이상인 모양이야.'
만일 저 목걸이가 마법을 담고 있다는 걸 미리 알고 구입했다면 굉장한 능력을 감추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게 아니라 우연이라면 상당한 운을 가졌다는 뜻이고 말이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작은 편은 아니었기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 대화를 들었다. 그리고 조금씩 대화 내용이 옆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경매는 계속 진행이 되었다. 결국 마법 목걸이는 7천 골드에 낙찰이 되었다.
100골드에 산 목걸이가 7천 골드에 팔렸으니 경매 수수료를 제하고도 앉은 자리에서 6천 골드 이상을 번 셈이었다.
다음 경매는 마법 방패를 하루에 5번 쓸 수 있는 반지였다. 이것은 조금 전 목걸이보다 훨씬 비싼 가격이 형성될 것이다.
더 작고 아름다웠으며, 위기 상황에서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크게 받는 물품이었다.
반지가 경매장에 등장했을 때, 누군가가 놀라 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설마 내가 판 반지?"
대번에 관심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곳에는 얼빠진 표정으로 반지를 바라보고 있는 청년이 있었다.
그 청년 역시 좌판으로 고대 유물을 파는 상인이었는데, 얼마 전에 100골드를 받고 저 반지를 팔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만일 중년인과 사내의 대화가 아니었다면 그런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저 반지가 혹시 그 반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때 펠젠이 있었어!"
그 반지를 분명히 펠젠과 함께 있던 자에게 팔았다. 아니, 펠젠에게 팔았다. 즉, 저건 분명히 자신이 100골드에 판 반지였다.
청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매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확인했다.
경매가가 계속 치솟았다. 결국 반지는 2만 2천 골드에 낙찰되었다.
청년이 게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억울해 미칠 것만 같았다. 저걸 고작 100골드에 팔았다니, 이런 멍청한 짓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날 경매에 나온 물품 중, 펠젠이 내놓은 것은 총 7개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7개 물품의 원래 주인들이 경매장 안에 있었다.
그것은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펠젠이 고대 유물의 가치를 정확히 알아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아벤드에 해일처럼 퍼져 나갔다.
☆ ☆ ☆
펠젠은 있는 대로 인상을 쓴 채 창밖을 슬쩍 내다봤다. 엄어마한 인파가 건물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다.
물건을 판 사람들이 온 게 아니었다. 그거야 예전부터 드물게 있었던 일이었다. 우연히 헐값에 산 유물이 사실은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더라 하는 얘기야 얼마든지 있었다.
그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건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유물의 기능을 알아내지 못했다면 끝까지 장식품에 더 가까운 물건으로 남았을 테니 말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든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자신이 가진 유물의 가치를 알아봐 달라고 온 것이다.
당연히 펠젠이 그걸 파악해 줄 이유가 없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럴 능력이 없었다.
"젠장, 일을 이렇게 만들고서 그분은 대체 어디 가신 거야?"
펠젠의 소문이 돈 이후 암시장에 고대 유물을 파는 사람들이 자취를 감췄다.
아니, 정확한 능력이 파악되어 정당한 가치를 형성한 유물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판매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유물은 아무도 내다 팔지 않았다.
암시장에서 그렇게 흔히 볼 수 있었던 유물 좌판이 몽땅 사라진 것이다.
당연했다.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고 내다 판 유물이 혹시 수만 골드의 값어치를 갖는 아티팩트이면 어쩌란 말인가. 만일 지금 상황에서 그 일을 겪으면 그 사람은 바보 멍청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많은 유물을 다 끌어안고 갈 수는 없었다. 그걸 팔아야 돈을 만들 것 아닌가.
그래서 그들이 선택한 방법이 바로 유물을 펠젠에게 들고 가는 것이었다.
"저걸 다 어떻게 처리하지? 젠장!"
펠젠은 난감했다. 대체 뭘 어쩌란 말인가. 저들 때문에 일정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었다.
물론 좋은 점도 있었다. 습격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아직 세력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조만간 적 조직이 습격을 할 거라 예상했는데, 저들 때문에 그게 불가능해졌다.
아벤드의 암시장에서 좌판을 깔고 물건을 판다는 것은 반쯤 범죄자라는 뜻이었다. 결코 얌전한 자들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거친 자들이었고, 나름대로 실력도 뛰어났다.
그게 아니라면 암시장에 들락거릴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언제 죽어 나갈지 모르는 곳이 바로 이곳 아벤드의 암시장이었다.
그런 자들이 건물을 빙빙 둘러치고 있으니 적 조직이 섣불리 달려들 리 없었다.
그것 하나 빼고는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펠젠은 저들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뾰족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을 때, 방문이 벌컥 열렸다. 펠젠은 짜증 나는 얼굴로 문을 바라봤다. 노크도 없이 들어오다니, 가만두면 기강이 해이해질 것이다.
당장 주먹부터 날리려던 펠젠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당연히 표정도 굳었다. 물론 순간적인 일이었다. 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은 무서우면서도 반가운 사람이었다.
"드디어 오셨군요!"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제론이었다. 제론은 혼자서 암시장을 둘러보러 갔다가 고대 유물 좌판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대체 이게 무슨 난리야?"
"제발 도와주십시오."
펠젠이 울상을 지으며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설명을 모두 들은 제론의 표정이 묘해졌다.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제론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씨익 웃었다. 이런 건 이용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제법 잘 써먹을 수 있는 자들 아닌가.
"해 준다고 해."
"예? 하지만 그렇게 되면 소득이 급감하지 않겠습니까?"
"수량을 한정하면 돼."
"예? 그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다들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이걸 쓰면 돼."
제론이 유리 상자 하나를 꺼냈다. 제법 큰 상자였다. 마치 유물 같은 것을 안에 넣어 두는 보관함 같이 생겼다.
"이게 뭡니까?"
"유물의 가치를 측정하는 아티팩트야."
펠젠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게 가능합니까?"
"이것도 고대 유물이야. 당연히 가능하지 않겠어?"
펠젠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보물이었다.
"그걸로 유물의 가치를 측정하면 되겠군요. 어떻게 쓰는 겁니까?"
"안에 유물을 넣으면 어떤 마법이 각인되어 있는지 확인이 가능해. 잘 봐."
제론은 유리 상자의 뚜껑을 연 다음 미리 준비한 반지 하나를 안에 넣었다.
뚜껑을 닫자 유리 상자가 희미하게 빛났다. 그 빛이 가운데로 모여 유물을 한 차례 감쌌다가 떨어져 나와 뚜껑에 달라붙었다.
이내 그 빛은 글자가 되었다.
"자, 보이지? 이게 바로 안에 각인된 마법에 대한 설명이야. 이게 마법의 종류. 이게 충전 횟수. 이게 충전까지 걸리는 시간, 그리고 이게 시동어."
펠젠이 멍하니 뚜껑에 나타난 글자를 바라봤다. 읽을 수가 없었다. 아니, 읽을 수 있는 게 있긴 했다. 숫자였다.
뚜껑에 나타난 글은 모두 고대어였다. 즉, 고대어를 모르면 이용할 수 없는 상자였다.
"고, 고대어를 모르면 쓸모가 없는 물건 아닙니까?"
"배우면 되지. 여기 쓰인 고대어 자체가 많지 않아서 금방 외울 수 있을 거야."
"그, 그렇습니까?"
"마법의 종류랑 시동어만 알면 되잖아? 다 간단해. 다만 이 아티팩트로도 알아낼 수 없는 물건들이 존재해. 그건 나도 어쩔 수 없지."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유리 상자의 옆에 길게 그어진 검은 선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 선 보이지?"
"예. 이게 뭡니까?"
"이 아티팩트의 수명."
수명이라는 말에 펠젠이 화들짝 놀랐다. 검은 선은 면의 절반을 조금 넘는 길이었다.
"쓸 때마다 이 선이 조금씩 줄어들어. 완전히 사라지면 수명도 끝이지."
"이, 이 정도면 얼마나 쓸 수 있습니까?"
"글쎄? 그건 해 봐야 알겠지?"
"그, 그런 무책임한……."
펠젠은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가 다급히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리고 슬그머니 제론의 눈치를 살폈다.
"다 오픈해."
"예?"
"능력을 다 오픈하라고. 한계까지. 그럼 저들도 더 이상 뭐라고 못 할 거 아냐."
"그, 그야 그렇습니다만……."
"그리고 아티팩트의 수명 문제가 있으니 수수료를 받아."
그제야 펠젠의 표정이 밝아졌다. 만일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이번에도 상당한 돈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돈으로 받을 생각하지 말고 다른 걸로 받아."
"예? 다, 다른 거라니요? 차라리 돈을 받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저들은 돈 빼고는 볼 게 하나도 없는 놈들입니다."
"그래도 적을 방치하는 것보다는 낫지."
펠젠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생각해 보면 수수료라고 해 봐야 고작 푼돈에 불과하다. 돈이야 좀 벌겠지만 제론이 주는 물건을 경매로 파는 것보다 훨씬 못할 것이다.
"정보나 타격으로 수수료를 대신하면 되겠군요?"
제론이 씨익 웃었다. 거기까지 생각해 냈으면 나머지는 알아서 맡길 수 있었다. 펠젠은 결코 멍청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똑똑한 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곳에서 이렇게 자리를 잡지 못했을 것이다.
암시장에서 좌판이나 깐다고 무시하면 안 된다. 그들도 나름대로의 정보가 있고, 힘과 인맥이 있었다. 그게 없으면 이곳 아벤드에서 오랫동안 살아남는 건 불가능했다,
그걸 이용해 적을 제거하는 방식이었다. 아마 제대로 먹히기만 하면 적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이다.
제론은 생각에 잠긴 펠젠을 두고 방에서 나갔다.
"드디어 할 일이 또 생겼군."
펠젠이 활약을 시작하면 적 조직이 크게 흔들릴 것이다. 흔들림은 곧 빈틈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제론은 그 빈틈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이곳 지부장에게 마법진을 심어 두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다.
지부에 위기가 닥치면 외부에 도움을 청할 것이다. 그때를 노려서 외부 인물에게도 마법진을 심는 것이 제론의 목표였다.
또한 외부에서 오는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타격을 줘서 그들이 이곳 아벤드를 포기하게 만들 셈이었다. 과연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제론은 자신의 방으로 가서 태블릿을 꺼냈다.
이제부터는 지부장을 잘 관찰해야 한다. 그리고 시간을 잘 살펴야 한다. 자칫 여유를 부리다가 아베티스 영지의 변제일을 잊으면 곤란하니 말이다.
아벤드를 흔들고 아베티스 영지를 흔든다. 그리고 레늄 왕국의 내전이 마무리되면 슈린 공작가를 흔들 것이다.
제론은 그것을 통해 적의 실체를 어느 정도 밝혀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알아내고 말 것이다. 가문을 몰락시킨 진짜 원흉을.
☆ ☆ ☆
아벤드의 정보를 총괄하는 지부장은 골치 아픈 표정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짜증이 확 일어났다. 최근 조직이 받은 피해는 이만저만 심각한 게 아니었다.
정보망의 절반이 무너졌다. 그 틈을 다른 조직이 파고들어 망 자체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게다가 타격대는 대부분 거동이 불가능했다.
지부장은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있는 펠젠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펠젠이 아니었다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사태를 반전시켜 조직을 더 크게 키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그 정도 역량은 있다고 믿었다. 한데 펠젠 때문에 그 모든 것이 무너져 버렸다.
펠젠이 가진 힘은 엄청났다. 고대 유물의 가치를 측정하는 아티팩트라니. 대체 그게 어디서 났단 말인가.
사용 한계가 명확한 아티팩트였기에 그걸 이용하려는 암시장 상인들의 움직임은 지나칠 정도로 격렬했다. 그리고 그 격렬한 움직임에 조직이 조금씩 무너져 갔다.
그렇게 무너진 조직의 빈틈을 펠젠이 야금야금 파고들었다. 아마 이대로 두면 펠젠의 조직이 아벤드를 장악할 것이다. 그리고 예전 지부장이 누렸던 모든 것이 펠젠에게로 갈 것이다.
"그렇게 둘 수야 없지."
결국 지부장은 결단을 내렸다. 자신의 입지가 한없이 좁아지겠지만, 그래도 지금 결단을 내리지 않아 죽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돌이킬 수 있을 때가 가장 빠른 것이지."
지부장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금고를 열었다. 그 안에는 어린아이 주먹만 한 수정 구슬이 몇 개 들어 있었다. 지부장은 그중 하나를 꺼낸 뒤 금고를 닫았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다음, 수정 구슬을 바닥에 세차게 던졌다.
퍼석!
수정 구슬이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반짝이는 빛이 안에서 튀어나왔다. 빛은 주위를 몇 번 휘감더니 위로 휙 올라갔다.
지부장은 멀어져 가는 빛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점점 착잡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