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아벤드
아벤드의 밤은 화려했다. 암시장이 열린다는 사실은 너무 유명해서 이젠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사실 암시장의 꽃은 경매였다. 하지만 경매를 이용하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제론은 예전의 기억을 더듬어 봤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과연 암시장의 경매를 이용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때 제론의 뇌리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놈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펠젠이었나?"
펠젠은 예전 제론이 테페룸 동전을 경매로 팔아 치울 때 함께했던 용병이었다.
솔직히 암시장에 대해서 제론이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예전에 펠젠과 함께 왔던 경험이 전부였다.
"지금 옆에 있으면 상당한 도움이 될 텐데."
제론은 문득 펠젠에게 마법을 걸어 두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당시 펠젠에게 추적 마법을 걸었는데, 그것을 굳이 없애지 않고 남겨 두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든 제론은 마나링을 가속시켜 추적 대상을 확인하는 마법을 펼쳤다. 제론 고유의 마나를 심어 두었기에 언제든 확인 마법을 펼치면 대략적인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다.
"음?"
제론이 눈을 빛냈다.
완전히 예상 외였다. 펠젠은 지금 이곳 아벤드 안에 있었다. 멀리 도망가지 않고 아벤드에 자리를 잡았거나, 아니면 볼일이 있어서 아벤드에 들른 모양이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펠젠이 이곳 아벤드에 있고, 또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제론은 마법의 흐름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멀지 않은 곳에 있기에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주변을 더 잘 살피는 것이 중요했다.
아벤드는 상당히 번화한 도시였다. 또한 환락가도 많았다. 대로변에 늘어선 건물 중 술집이 절반 이상이었다. 암시장 덕분에 성장한 도시다웠다.
번화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우범 지대가 나온다. 아벤드는 암시장 덕분에 돈이 많이 흘러 다녔고, 그 돈을 쫓아 움직이는 범죄자들도 많았다.
그래서 아벤드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은 되도록 대로를 통해 다녔다. 대로에 대한 치안은 확실했다. 최소한 그 정도는 관리해 줘야 암시장이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아벤드에서 가장 위험한 곳은 당연히 빈민가였다. 대로에서 안으로 들어가면 우범 지대가 나오고 거기를 지나 더 변두리로 가면 빈민가가 나온다.
빈민가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이 죽어 나갈 정도로 위험하고 거칠었다.
제론이 가려는 곳은 바로 그 위험한 빈민굴이었다.
대로에서 안으로 접어든 순간 주변 기운이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제론은 자신을 주시하는 시선을 여럿 느꼈다. 당연히 신경 쓰지 않았다.
제론이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자, 슬그머니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길목을 막아 퇴로를 차단했다. 그리고 단검을 던졌다 받으며 위협이 담긴 미소를 지으며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은 그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여기만 빠져나가면 펠젠이 있는 곳이었다. 펠젠은 우범 지대와 빈민가의 경계에 있었다.
이미 펠젠은 제론의 감각 안에 있었다. 이젠 추적 마법이 필요가 없었다. 제론은 마법을 해제한 다음 주위를 슥 둘러봤다.
고작 13명이었다. 이 정도 인원으로 길을 막았다는 건 실력에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아니면 상황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미리 만들어 뒀던가.
"아이고, 나리. 이거 어쩝니까? 길을 좀 잘못 든 모양인뎁쇼?"
사내 하나가 손바닥을 비비며 말했다. 그의 눈빛과 표정에는 앞으로 벌어질 살육과 약탈에 대한 기대감이 한껏 떠올라 있었다.
"그래서?"
제론의 시큰둥한 말에 사내들이 긴장했다. 경험적으로 이런 상황에서 침착할 수 있는 사람은 상당히 강하다는 걸 알기에 조심해야만 했다.
"서로서로 돕고 살자, 뭐, 그런 말입니다요. 더도 덜도 말고 딱 가지신 것만 내놓으시면 아주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모셔 드릴 텐데, 생각이 좀 있으십니까?"
"거의 다 왔으니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은데? 나도 사람 만나러 와서 굳이 피를 볼 생각이 없으니 그냥 돌아들 가라."
"허어, 이 손님이 아직 상황 판단이 안 되시는 모양이네.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좋은 말로 할 거라고 생각하시면 오산입니다요."
제론이 피식 웃었다.
"나야말로 언제까지 말만 할 생각은 없다."
그 말이 끝난 순간 제론의 몸이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퍼버버벅!
순식간에 4명이 쓰러졌다. 그리고 고통에 몸부림쳤다. 제대로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그저 데굴데굴 구르며 표정으로 고통을 호소할 뿐이었다.
다들 크게 긴장했다. 제론이 움직이는 모습을 아예 보지도 못했다. 진짜 실력자였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사내 중 하나가 작은 주머니 하나를 휙 던졌다. 제론을 향해 천 주머니가 날아갔다. 제론은 그것을 보며 씨익 웃었다. 무슨 생각이고 어떤 작전인지 훤히 알 수 있었다.
제론의 손이 휙 움직였다.
화악!
강렬한 바람이 불며 주머니가 왔던 궤적을 고대로 되짚어 돌아갔다.
"으헉! 피해!"
주머니를 던진 사내가 외쳤다. 하지만 주머니가 날아가는 속도는 그들의 반사 신경을 월등히 앞설 정도로 빨랐다.
퍽!
주머니가 정확히 사내의 가슴에 맞았다, 그러면서 확 터졌다. 뿌연 가루가 자욱이 주변을 감쌌다.
"으아아아악!"
사내가 처절하게 소리쳤다. 이 가루는 치명적인 독이었다. 그것도 당한 사람을 지독하게 괴롭히는 극악한 독이었다.
독을 온몸에 뒤집어쓴 사내는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몸부림쳤다. 하지만 독 기운은 사내의 몸을 조금씩 녹여 갔다.
빠르게 녹이면 차라리 나을 텐데 워낙 느리게 녹여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제론이 손을 휙 내저었다. 그러자 바람이 한 번 더 일어 사내 근처에 있던 독 가루를 하늘로 높이 올려 버렸다. 제론이 그쪽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지이잉!
마법진 하나가 떠올랐다.
화르륵!
마법진이 사라지며 불길이 뿜어져 나가 독 가루를 몽땅 태워 버렸다.
제론은 빙긋 웃으며 다시 주위를 둘러봤다. 사내들이 몽땅 얼어붙은 채 딱딱한 표정으로 제론을 바라보고 있었다.
"또 준비한 게 있으면 써먹어 봐. 제법 재미는 있군."
다들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며 물러났다. 하지만 제론이 그들이 도망가게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먼저 도망치는 놈부터 잡을 거다."
그 말과 동시에 제론의 몸이 사라졌다. 그리고 막 뒷걸음질 치던 사내 앞에 나타났다.
퍼억!
"꾸웨에에엑!"
사내가 배 속의 모든 걸 토해 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그 역시 다른 동료와 마찬가지로 데굴데굴 구르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표정만 봐도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 수 있었다.
제론은 어느새 원래 자리에 서 있었다. 언제 이동했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게 더 무서웠다. 아예 대응이 불가능했다. 손을 쓸 수 없는 무기력한 상황이었다.
제론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멀쩡한 사내들이 일제히 달려와 제론 앞에 섰다.
퍼버버벅!
제론의 주먹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움직였다. 제론 앞에 선 사내들이 일제히 바닥을 뒹굴었다. 다들 고통에 몸부림쳤다.
제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시간이 약간 지체되긴 했지만 펠젠은 그대로 있었다.
빈민가로 접어든 제론은 망설임 없이 그 경계에 있던 건물로 들어갔다. 빈민가에 있는 다른 건물과 달리 비교적 크고 깨끗했다.
5층짜리 건물이었는데, 들어가니 우락부락한 사람들이 잔뜩 보였다.
제론은 그들을 보며 눈에 이채를 띠었다. 그들의 몸에서 제법 상당한 마나가 느껴졌다. 익스퍼트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나에 관계된 수련을 한 자들이었다.
"뭡니까? 여긴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닌데?"
덩치가 가장 큰 사내가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펠젠을 찾아왔다."
"마스터는 무슨 일로 찾으십니까?"
사내들은 펠젠이라는 이름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하루에도 펠젠을 만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수십 명이었다. 그들은 제론도 그런 자들과 마찬가지로 여겼다.
"도움을 좀 받으려고."
도움이라는 말에 사내가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죄송하지만 마스터는 바쁘십니다. 거래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면 돌아가 주십시오."
사내의 태도가 워낙 정중했기에 돌아가라고 말하는데도 크게 기분이 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론은 전혀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펠젠한테 가서 전해. 테페룸 동전이라고. 그래도 안 만나 주겠다면 그때 다시 얘기하자고."
제론의 말에 사내가 인상을 썼다. 하지만 왠지 테페룸 동전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테페룸 동전이라니. 테페룸은 가공이 극도로 어려운 금속이었다.
그걸 동전 모양으로 가공하려면 대체 얼마나 대단한 노력이 들어가야 할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그런 굉장한 물건을 언급했으면 그에 상응하는 뭔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일단 사내는 그렇게 판단했다.
"전해 드리겠습니다."
사내가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돌아서서 위층으로 올라갔다.
펠젠은 이 건물 5층에 있었다, 그곳에서 펠젠의 기척이 느껴졌다. 추적 마법이 걸려서 그런지 기운이 참으로 친숙했다.
제론은 근처에 보이는 의자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내부를 슥 둘러봤다. 우락부락한 덩치들이 계속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든 일이 틀어지면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론은 그들의 마나가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뿜어지는 투기를 느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사람은 잘 구했군.'
물론 그래 봐야 싸움꾼들이었다. 전문적으로 검을 수련한 기사와 비교하면 어른과 아이 정도의 차이었다. 다만 마나를 수련했으니 더 시간이 지나면 기사와 비슷한 힘을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잠시 후, 위로 올라갔던 사내가 내려왔다. 그는 참으로 난감한 표정으로 제론에게 다가갔다.
사실 오늘 그는 신선한 경험을 했다. 지금까지 함께하면서 펠젠이 그렇게 놀라는 모습은 처음 봤다. 한동안 펠젠은 안절부절못했다.
펠젠은 언제나 당당했고, 강했다. 한데 그런 약한 모습을 보니 눈앞의 사내에 대한 궁금증이 불같이 일어났다.
"죄송합니다. 현재 마스터께서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러니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제론이 빙긋 웃었다. 참는 건 여기까지면 충분했다.
"그럼 이제부터는 내 방식대로 해도 되겠군."
제론의 말에 사내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자 건물 곳곳에서 마법진이 빛을 뿜어냈다.
"호오, 상당하군."
제론은 단번에 그것들이 어떤 마법을 담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최근 마나의 흐름을 통해 마법진을 분석하는 수련을 계속하고 있었기에 이런 건물에 있는 간단한 마법진 정도는 단숨에 파악이 가능했다.
"자, 그럼 이런 건 어떨까?"
제론은 가볍게 발을 굴었다.
퉁.
하지만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제론의 발을 중심으로 마나의 동심원이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 동심원에 닿는 마법진이 하나하나 무력화되었다.
마법진이 담고 있는 마나의 흐름을 중간에서 딱딱 끊어 버렸기에 다시 마법진이 제 기능을 하려면 제론이 마법진의 흐름을 끊을 때 쓴 마나를 회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더 할 건가?"
제론의 말에 사내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방금 전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그가 안 것은 건물의 모든 마법진이 박살 났다는 것뿐이었다.
'저걸 새기느라 얼마나 많은 돈이 들었는데…….'
사내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제론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펠젠에게 안내하면 마법진은 원래대로 돌아갈 거야. 어때? 이제 좀 생각이 바뀌었나?"
사내가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제론은 씨익 웃으며 사내의 뒤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런 제론의 뒷모습을 실내에 있던 모든 사내들이 멍하니 바라봤다. 물론 그들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자신들의 대장이 왜 저렇게 극진한 태도를 취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을 뿐이었다.
5층은 하나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제론은 5층에 오르자마자 펠젠을 볼 수 있었다.
제론이 반갑게 손을 흔들어 주자 펠젠이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인사를 했다.
"오, 오셨습니까? 사, 상당히 오랜만인 것 같습니다만……."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렇게 찾아올 생각은 없었는데, 도움이 좀 필요해서 말이야."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제가 뭐든 발 벗고 나서서 도와 드리겠습니다."
"뭐, 별건 아니야. 암시장을 좀 이용하고 싶어서."
"아, 암시장 말입니까?"
펠젠은 어이가 없었다. 고작 암시장을 이용하려고 자신을 찾았단 말인가. 그쯤이야 대로에 나가 지나가는 누구를 붙들고 물어도 알 수 있었다.
"물건이 좀 커. 그런 것도 팔 수 있나?"
펠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건의 크기가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내 그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서, 설마 기간트를 가져오셨습니까?"
제론이 고개를 끄덕이자, 펠젠은 물론이고 이곳까지 제론을 안내한 사내도 경악어린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기, 기간트라니. 확실히 절 찾아오시길 잘하셨습니다."
펠젠의 눈이 번득였다. 기간트를 판다면 얼마나 많은 돈이 남겠는가, 아마 수수료만으로도 한몫 단단히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돈이 될 만한 얘기가 나오자 펠젠의 기질이 변했다. 펠젠은 돈 때문에 슈린 공작가의 테페룸을 털었던 사람이다. 그런 기질이 세월이 지났다고 변했을 리 없었다.
"몇 기나 있으십니까?"
"일단 카타락타 3기를 팔아 봐. 나머지는 그다음에 다시 얘기하지."
제론의 말에 펠젠의 눈이 욕망으로 번득였다. 시작이 카타락타 3기라면 나중에는 대체 어떤 기간트를 내준단 말인가.
"으하하하하! 정말 잘 찾아오셨습니다! 이렇게 오랜만에 뵈니 정말 좋군요! 으하하핫!"
펠젠이 기분 좋게 웃었다. 언제 껄끄러운 표정을 지었느냐는 듯한 웃음이었다.
"한데 기간트는 어디 있습니까? 일단 그것부터 확인을 해야……."
"아벤드에서는 기간트 소환이 불가능하지 않나?"
"불가능하죠. 그러니 아벤드를 벗어나서 확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론이 피식 웃었다.
"내가 널 속이기라도 하는 것 같나?"
"예? 그, 그건 아닙니다만……."
"그럼 가서 팔기나 해."
"하지만 그러려면 물건이 있어야……."
"물건은 내가 가져갈 테니 넌 팔기나 해."
펠젠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물건을 보지도 않고 어떻게 판단 말인가. 아무리 믿을 만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안목까지 믿을 수는 없었다.
"나중에 경매장까지 이용할 테니까 알아서 잘 준비해 두도록."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섰다. 그리고 순식간에 건물에서 나가 버렸다.
펠젠은 제론이 남긴 말 때문에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경매장까지 쓴다고? 이거 아무래도 정말로 큰 건인 모양인데?"
펠젠의 뇌리에 황금빛 미래가 스쳤다. 어쩌면 이번에 제대로 팔자를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펠젠은 욕망이 잔뜩 스며든 눈으로 씨익 웃었다.
"자아, 그럼 열심히 일을 해 볼까?"
한동안 바쁠 것이다. 그리고 바쁜 시간을 보낸 만큼 돈이 들어올 것이다. 펠젠은 진심으로 기분 좋게 일을 찾아 나섰다.
☆ ☆ ☆
제론은 펠젠과 함께 암시장을 둘러봤다. 기간트는 벌써 팔았고, 이제부터는 진짜 목적을 하나씩 해결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아직 예정된 날짜가 되려면 보름이 넘게 남았다. 그동안 암시장을 충분히 겪으면서 다음부터는 굳이 펠젠이 없더라도 이용이 가능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분명히 나중에 또 암시장을 이용할 일이 생길 것이다. 그때에도 또 펠젠을 들들 볶아 데리고 다닐 수는 없지 않은가.
"제법 규모가 크군."
암시장은 지하에 마련되어 있었다. 상당히 넓은 공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거래를 했다. 방식도 각양각색이었다.
좌판을 깐 사람도 있었고, 그럴듯한 부스를 마련해서 유리관 안에 물건을 진열한 사람도 있었다. 또한 물건이 없이 목록과 그림만을 들고 다니는 사람도 있었다.
제론이 노리는 건 좌판에 깔린 물건과 진열된 물건이었다. 완전히 쓰레기나 다름없는 물건이 절반 이상이었다. 하지만 이곳이 아니라면 구하기 어려운 물건도 상당히 많았다.
제론은 그중에서 유물에 관심을 뒀다. 이곳에 오는 유물은 그 경로가 뻔하다. 장물일 확률이 높았다. 아니면 유적 발굴을 공개적으로 알리지 못해서 그걸 처분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제론처럼 유물을 빨리 처리해야 할 때에도 암시장을 찾았다.
"보아하니 오늘 여기는 별로인 거 같으니 대충 보시고 다음으로 가시죠."
펠젠의 말에 제론이 눈을 빛냈다. 그의 말대로라면 이 정도 규모의 암시장이 또 있다는 뜻 아닌가.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아벤드는 암시장으로 이름이 높다. 대륙에서 아벤드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 정도로 이름이 높아지려면 그에 상응하는 뭔가가 있어야만 한다. 그러니 이 정도 규모의 암시장이 여러 개 있다는 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제론은 남은 기간 동안 다른 암시장도 싹 돌아보기로 했다. 나와 있는 유물 중 쓰임새가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들을 위주로 구입해 확실한 사용법을 알아내 되팔면 엄청난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암시장에 돌아다니는 유물의 규모가 엄청나군.'
흔하게 좌판을 깐 사람들도 상당한 유물을 가지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상인들은 다들 부자인 셈이었다. 물론 대부분이 상인보다는 범죄자에 더 가깝겠지만 말이다.
유물만 있는 게 아니었다. 보석에서부터 테페룸까지 없는 게 없었다. 심지어는 사람과 몬스터도 있었다.
제론은 찬찬히 둘러보다가 어느 좌판 앞에 섰다. 유물이 잔뜩 있었다.
"개당 100골드. 가격 협상은 없소."
그리 비싸 보이지 않는 물건이었는데도 개당 100골드라면 상당한 폭리였다. 아무리 유물이라고 해도 마법이 깃들지 않은 물건은 그리 비싸지 않았다.
하지만 제론이 원하는 게 바로 이런 유물이었다. 파는 사람이 전혀 가치를 모르는 유물 말이다.
집중해서 살피니 각 유물에 깃든 마나의 흐름이 보였다. 놀랍게도 이곳에 있는 모든 유물이 마법 아티팩트였다. 문제는 어떤 마법이 새겨졌느냐에 따라 그 값어치가 현저히 달라진다는 점이었다.
제론의 눈이 빛났다. 아주 특별한 아티팩트를 발견했다. 마나의 흐름으로 보건대 아공간 마법이 새겨진 아티팩트였다.
작은 상자였는데, 겉에 새겨진 세공도 상당히 훌륭했다. 그저 유물의 고고학적 가치만으로도 수십 골드는 호가할 만한 명품이었다.
제론은 망설임 없이 그것을 집었다.
"안목이 있으시군. 다른 것도 골라 보쇼."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제론은 이 좌판에서만 무려 10개의 물건을 샀다. 1000골드나 지출했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아마 여기서 산 물건은 경매장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개당 수천 골드는 받아 낼 수 있었다.
좌판을 떠나며 제론이 중얼거렸다.
"돈 버는 거 아주 간단하군."
제론은 그 뒤로도 펠젠을 끌고 다니며 암시장 곳곳에서 물건을 사들였다. 다들 특별한 마법이 새겨진 아티팩트였다.
그렇게 암시장을 샅샅이 훑은 제론은 다음 암시장으로 향했다.
생각보다 암시장을 둘러보는 속도가 빨라서 이대로라면 오늘 중에 모든 암시장을 다 돌아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기능이 알려지지 않은 아티팩트도 챙기고 말이다.
모든 암시장을 돌면서 제론이 구입한 물건의 수는 100개가 훨씬 넘었다. 이제부터는 좀 더 자세히 분석해서 정확한 사용법을 알아내야만 했다. 그래야 경매에 넘길 수 있을 테니까.
'이번 기회에 동전도 몇 개 더 팔아볼까?'
지난번에 10개의 동전을 무려 150만 골드에 팔았다. 그 돈은 제론에게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일단 돈 걱정 없이 어떤 일이건 진행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아직 제론의 아공간에는 테페룸 동전이 엄청나게 많이 남아 있었다. 그중에 10개쯤 더 팔아도 티조차 안 날 정도였다.
"이제 암시장은 다 돌아봤습니다. 슬슬 돌아가시는 게……."
펠젠의 말에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유물의 진짜 가치를 파악해야만 했다. 그리고 내일쯤 그 유물을 다시 팔아 치울 것이다. 경매를 통해서.
"가자."
제론은 펠젠을 데리고 아벤드 대로변에 위치한 호텔로 향했다. 제론은 그 호텔에서 가장 좋은 방을 잡고 안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펠젠은, 내일 기간트 10기를 더 팔 수 있게 해 준다는 제론의 말에 희희낙락하면서 거처로 돌아갔다.
제론은 이곳에서 70기쯤 되는 기간트를 팔 계획이었다. 세나가 수리한 기간트 중 세나식 개조를 거치지 않은 것들이었다.
이제 제론의 창고에도 슬슬 남은 기간트가 떨어져 가고 있었다. 앞으로는 그 기간트만으로 버티면서 새로 설계한 기간트를 생산해야만 했다.
그러려면 테페룸이 필요했다.
제론은 이런 식으로 암시장에서 테페룸을 구입해서 쓸 생각이 전혀 없었다.
"테페룸 광산을 찾아가 봐야겠어."
왠지 테페룸 광산을 찾아가면 그 근처에서 뭔가 특별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일 테페룸이 자연스럽게 생긴 광물이 아니라, 초고대문명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라면, 테페룸 광산 근처에 그것에 관계된 유적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어쩌면 초고대에도 테페룸을 만들어 내는 장치 따위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저 그때는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을 정도로 테페룸이 많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론은 왠지 자신의 예상이 맞을 것 같았다. 만일 정말로 그것을 발견한다면 그때부터 정말로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초고대문명에는 테페룸을 가공해서 만들어 낸 물질이 아주 다양했다. 포로스도 그중 하나였다. 초고대에는 그보다 훨씬 대단한 물질이 많았다.
그것을 지속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면 에어스트 백작령은 전혀 다른 위치로 올라서게 될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떨렸다. 제론은 방에 앉아 오늘 산 유물들을 쭉 늘어놨다. 일단 오늘은 이게 먼저였다.
제론이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아공간이 새겨진 상자였다. 사실 고대에도 아공간 마법은 굉장히 어려운 마법이었다.
방식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기에 제한도 많았고, 효율도 많이 떨어졌다.
이 상자는 고대 마법의 정점을 찍을 정도로 대단했다. 어쩌면 초고대의 마법이 약간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었다. 그 정도로 뛰어났다.
그렇기에 아무도 이 상자에 아공간 마법이 새겨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아벤드는 기간트 소환이 금지되어 있었다. 당연히 도시 곳곳에 아공간 탐지 마법진이 깔려 있었고, 아공간 물품을 가지면 누구든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이걸 고작 100골드에 팔았다는 건 아공간 마법을 탐지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제론은 상자의 아공간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상당히 복잡했지만 제론 특유의 능력을 동원해 마나의 흐름을 가닥가닥 분해할 수 있었다.
아공간 마법이 깃들어 있으니 아공간을 열 수 있는 열쇠가 필요했다. 보통 그것은 시동어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 상자는 조금 특이했다.
"진짜 열쇠가 필요한 거였어?"
상자에 맞게 제작된 열쇠가 따로 존재하는 형식이었다. 그 열쇠를 꽂고 돌리면 아공간이 열리게 되어 있었다.
상당히 정교한 방식이었다. 열쇠에도 따로 마법진이 새겨져 있고, 마법진과 마법진이 맞물려 돌아가면서 진짜 마법진이 완성되어 펼쳐지게 된다.
"음? 열쇠?"
제론은 문득 얼마 전 유적을 클리어하고 받은 선물이 떠올랐다. 그 선물이 바로 열쇠였다.
어쩌면 그 열쇠도 이 아공간 상자와 같은 방식일지도 모른다. 제론은 열쇠를 꺼냈다.
아공간 상자의 열쇠 구멍에 열쇠를 살짝 대 보았다. 구멍보다 열쇠가 조금 더 큰 듯했다. 이래선 아예 들어가지도 않는다.
한데 제론은 갑자기 묘한 느낌을 받았다. 왠지 열쇠가 들어갈 것 같았다. 그래서 열쇠를 구멍에 대고 슥 밀었다. 그러자 마치 원래 이 상자의 열쇠인 것처럼 쑥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제론은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열쇠를 빙글 돌렸다.
철컥.
열쇠가 돌아가며 뭔가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상자가 열렸다. 열쇠를 통해 연 상자의 안은 그냥 열었을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상자 안에 아공간으로 이어진 통로가 있었다.
상당히 세심하게 만들어진 아공간이었다. 안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 목록을 띄워 보여 주었다.
제론은 반사적으로 마나의 흐름을 파악해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진 아공간인지 확인했다.
복잡했지만 파악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제론은 마법을 완전히 분해한 후, 차근차근 분석했다.
이 아공간은 목록의 이름이나 그림을 손가락으로 끄집어내면 물건이 나오게 만들어져 있었다.
아공간 안에는 상당히 많은 물건이 들어 있었다. 그걸 하나하나 확인하고 꺼내는 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일단 금괴가 잔뜩 들어 있었다. 또한 마나 스톤도 수백 개나 있었다. 각종 보석도 수십 개나 있었다.
보아하니 고대의 금고였던 모양이다. 안에는 금과 보석 외에도 당시에 유통되었던 채권이 잔뜩 들어 있었다. 또한 마법 서적도 들어 있었다.
제론은 마법 서적을 제외한 나머지는 다시 아공간에 넣고 열쇠를 돌려 뺐다. 다시 평범한 상자가 되자, 그것을 자신의 아공간에 넣어 버렸다.
상자에 새겨진 아공간과 제론이 가진 아공간은 만들어진 방식 자체가 아예 다르기 때문에 서로 간섭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 안에 아공간 아티팩트를 담는 것도 가능했다.
제론은 그런 식으로 다른 아티팩트도 모두 하나하나 살피고 마법을 분해해 분석했다.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제론은 이대로 조금만 더 노력하면 새로운 마나링을 만드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분석할 만한 아티팩트가 너무 적었다. 또한 실력을 키울 정도로 복잡한 마법이 새겨진 아티팩트도 없었다.
제론은 모든 정리가 끝나자 침대에 누웠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의 육체를 가지고 있다지만 정신적인 피로는 어쩔 수 없었다.
마법에 대한 공부를 계속 하다 보면 정신력이 상당히 소모된다. 제론은 그것을 다시 채우기 위해 잠을 청했다.
물론 아티팩트들은 다시 아공간에 보관한 뒤였다.
잠시 후, 제론이 잠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창문이 조금 열리며 안으로 대롱 하나가 들어왔다.
대롱을 통해 새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흘러나왔다. 그 연기는 이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시간이 지나니 연기가 점점 사라졌다. 연기가 완전히 사라지자 창문이 활짝 열렸다. 물론 조용하고 은밀했다.
열린 창을 통해 날렵한 체형을 가진 사람이 스며들어 왔다. 온몸에 짝 달라붙는 새까만 옷을 입고 복면을 쓰고 있었는데, 움직임이 어찌나 은밀한지 소리는 물론이고 공기조차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움직여 제론에게 다가갔다. 제론이 어떤 실력을 가졌는지 미리 들었기에 극도로 조심했다. 조금 전 방 안으로 흘려보낸 연기는 그냥 연기가 아니라 독연이었다.
오우거도 즉사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독이었다. 당연히 엄청나게 비쌌다. 하지만 상대가 굉장한 실력을 가졌다고 하니 그걸 쓸 수밖에 없었다.
독이 비싸긴 하지만 목숨보다 비싸지는 않았다.
독연을 마셨으면 당연히 죽었겠지만 그래도 확실해야만 한다. 사내는 미리 준비한 단검을 들었다. 이걸로 심장을 단숨에 찌르고 돌아가면 된다.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제론에게 다가간 사내는 제론이 숨을 쉬지 않고 있다는 걸 확인했다. 죽은 것이다. 하지만 사내는 추호도 망설이지 않고 단검을 높이 들었다가 그대로 내리찍었다.
턱!
사내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죽은 줄 알았던 제론이 어느새 자신의 손목을 꽉 잡고 있었다. 단검은 제론의 가슴에 딱 닿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사내는 심장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놀랐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반사적으로 미리 대비한 행동을 할 정도로 잘 훈련되어 있었다.
사내는 단검의 손잡이를 부서져라 꽉 쥐었다. 그러자 정말로 손잡이가 살짝 부서졌다.
그와 동시에 단검이 손잡이에서 떨어져 나가며 강력하게 쏘아져 나갔다.
콰직!
단검이 침대를 꿰뚫었다. 사내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대체 제론이 어떻게 단검을 피했는지 전혀 보지 못했다, 제론은 여전히 누워 있었고, 단검은 침대를 관통해 바닥에 박혔다. 마치 제론을 그냥 통과한 것 같았다.
사내가 손을 빼려고 몸부림쳤다. 하지만 마치 바위에 손이 콱 틀어박힌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부웅!
사내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꽈앙!
온몸이 부서지는 듯했다. 사내는 이를 악물고 신음을 참아 냈다. 그리고 눈을 번득이며 기회를 노렸다. 대체 어떻게 그 독연에서 살아남았는지 알 수 없지만, 결코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닐 거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기회를 봐서 빈틈을 찌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설사 상대가 엄청나게 강하다 해도 말이다.
하지만 그건 생각뿐이었다. 바닥에 어떻게 떨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아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누가 보낸 건지 대충 짐작은 하겠는데, 이거 예상보다 빠른데?"
사내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 어떤 정보도 가져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상당한 훈련을 쌓았다. 무슨 고문이 펼쳐지더라도 능히 견딜 자신이 있었다.
"설마 날 쫓아왔을 리는 없고, 여기에 따로 정보망을 마련해 둔 건가? 가이츠 남작인지 뭔지 생각보다 대단하잖아?"
사내는 추호도 흔들리지 않았다. 속으로는 상당히 놀랐지만 그걸 겉으로 내색할 정도로 훈련이 얕지 않았다.
"아니, 가이츠 남작이 아니라 나베 공작가의 정보망인가?"
하지만 제론은 그조차도 믿기 어려웠다. 나베 공작가의 힘을 냉정히 파악하면 레늄 왕국의 슈린 공작가보다 못하다. 적어도 몇 등급은 떨어진다.
한데 슈린 공작가도 갖지 못한 정보망을 나베 공작가가 가졌다니,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게다가 이곳 아벤드는 정보 조직을 정착시키기 상당히 어려운 곳이었다. 아벤드 자체에서 운영하는 정보 조직이 워낙 튼튼했고, 이곳에서 정보를 얻기 위해 극복해야 할 문제가 너무 많았다.
아벤드의 범죄자들은 잔혹했고, 돈을 밝혔다. 또한 빈민가는 더 위험했다. 진짜 정보를 얻기 위해선 그들을 다 포섭해야 하는데, 그걸 위해 필요한 돈과 인력이 지나치게 많았다.
그걸 극복하려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자금력이 필요했다. 한데 굳이 그런 자금력을 투자할 정도로 이곳 아벤드가 매력적인 장소는 아니었다.
차라리 아벤드가 자체적으로 키운 정보 조직에 돈을 주고 정보를 받는 편이 훨씬 편하고 저렴했다.
하지만 그것은 일장일단이 있었다. 지금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특정 인물을 추적하는 일은 참으로 곤란했다. 못 하는 게 아니라, 하는 데 들어가는 돈이 너무 많았다.
그러니 이렇게 정확히 제론의 행적을 추적해 낼 수 있다면 이곳에 자체적인 정보망을 깔았다는 뜻이 된다. 그것도 아벤드가 운영하는 정보 조직과 비슷하거나 더 뛰어난 조직을 말이다.
그런 조직을 나베 공작가에서 만들어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자금도 능력도 모자랐다. 더구나 그들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여유가 별로 없었다. 안 그래도 국내에 벌인 일이 버거울 정도로 많았다.
제론은 직감적으로 나베 공작가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조직이 개입되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 사내 역시 그 조직의 일원이리라.
"너 정확한 소속이 어디지?"
사내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제론은 사내가 대답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나베 공작가는 아닐 거고, 그 뒤에서 국면을 쥐고 흔드는 놈들이 분명한데……."
사내는 속으로 뜨끔했지만 여전히 내색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론은 그 반응을 정확히 잡아냈다. 제론은 사내의 마나가 어떻게 흔들리는지 끊임없이 살펴봤다.
조금 전 그 흔들림이 살짝 커졌다. 동요했다는 뜻이었다.
"슈린 공작가를 흔든 것도 모자라 나베 공작가까지 흔든 걸 보면 보통 놈들은 아닌데 말이지."
사내의 마나가 거세게 흔들렸다. 설마 이렇게까지 잘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사실 사내가 아는 것은 딱 거기까지였다. 조직의 손길이 닿은 귀족가는 그보다 훨씬 많다는 걸 알지만 사내에게 허락된 정보는 딱 거기까지였다.
또한 사내가 나서서 처리해야 하는 일도 딱 그 두 공작가에 한해서였다.
이번에 나베 공작가에 제대로 힘을 실어 주기 위해 한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서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나선 적은 거의 없었다.
또한 일단 나섰다면 무조건 성공했다. 이번이 첫 실패였다.
"그 일까지 알고 있는 걸 보면 생각보다 거물일 수도 있겠는데? 대체 그런 거물이 왜 직접 나선 거지? 수하도 많을 텐데."
사내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면서 직접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수하가 왔다면 본거지까지 탈탈 털렸을 것이다.
"혼자 죽고 수하들은 다 살리겠다, 뭐, 그런 생각인가?"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사내에게 다가갔다. 그런 식으로 꼬리를 잘라 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들과 관계된 것은 철저히 박살 낼 것이다.
그것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제론이 사내의 목을 꽉 잡아 들어 올렸다. 사내의 몸이 힘없이 끌려 올라갔다. 제론은 망설임 없이 복면부터 벗겼다.
"크윽!"
사내가 몸부림 쳤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 미동도 할 수 없었다. 복면이 벗겨진 사내의 얼굴은 상당히 준수했다.
제론은 다시 사내를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복면을 벗긴 것은 단지 사내를 감추고 있던 껍질 하나를 벗기는 의미였다.
사람은 보통 얇은 꺼풀로 모습을 가리면 더욱 거침이 없어진다. 또 용기를 넘어선 객기를 부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에 익숙해진 사람은 꺼풀이 사라지면 한없이 작아진다.
"자, 이제 다시 얘기를 해 볼까? 내가 묻는 질문에 딱 하나만 제대로 대답해 주면 깔끔하게 보내 주지. 어때? 이제 좀 구미가 당기나?"
사내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제론을 노려봤다. 이제 조금씩 몸이 움직였다. 하지만 그래 봐야 억지로 기는 수준이었다. 제대로 기습을 하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날 감시한 정보 조직의 말단 조직원 하나만 알려 줘. 어때? 별로 어렵지 않지?"
순간 사내의 눈빛이 흔들렸다. 정말로 어렵지 않다. 정보 조직의 말단 조직원은 조직에 접할 수 있는 부분이 상당히 제한적이었다.
그 하나 없어진다고 해도, 또 은밀히 감시한다고 해도 별다른 성과를 얻기 어려웠다.
'기껏해야 정보 조직의 한 귀퉁이가 날아가는 정도?'
그것도 엄청난 노력을 동반해서 차근차근 정보를 모으고 파고들어야 가능했다. 그래서 조직원 하나 알려 주는 건 정말로 어렵지 않았다.
"근데 네 말을 어떻게 믿지? 정보만 듣고 날 보내 주지 않으면 그만 아닌가."
"그럼 난 네가 제대로 된 정보원을 알려 줬는지 어떻게 믿지?"
"그건……."
"다 그런 거야. 일단은 그냥 서로 믿는 수밖에 없는 거지. 또 알아서 상대의 거짓을 눈치채야 하는 거고."
사내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확실히 그렇다. 사내가 결정을 내렸다. 어차피 그 정도면 조직의 입장에서는 타격도 아니었다. 여기에 모험을 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했다.
"좋아. 한 명만 얘기해 줄 테니 잘 들어라."
사내가 신상 명세 하나를 읊었다. 제론은 그것을 잘 들으며 마나링을 가속시켰다. 미끼 하나를 던져 월척을 줄줄이 낚으려면 준비가 철저해야만 한다.
제론이 사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거침없이 발길질을 날렸다.
퍽!
"끄윽!"
사내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휙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그 순간 제론의 손에서 3개의 마법진이 연달아 튀어나왔다. 그리고 산산이 부서져 사내의 등으로 스며들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사내가 소리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이제 됐지? 가 봐. 다음번에 다시 잡히면 더 이상의 목숨 연장은 없다."
사내는 복잡한 눈으로 제론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훌쩍 날려 창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호텔 최상층이었기에 상당히 높은 곳이었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제론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이내 침대로 가서 앉았다.
"여기도 적당한 유적 하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아벤드에 유적이 있다면 정말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곳에서야말로 정보가 곧 돈이고 힘이었다.
제론은 일단 감각의 날을 세웠다. 그리고 주변으로 감각을 넓게 퍼트렸다. 누군가 자신을 감시하는 게 아닌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이곳은 호텔이었다. 그것도 정체불명의 조직이 정보를 장악한 도시의 가장 좋은 호텔이었다. 뭔가 정보 수집에 관한 조치가 취해져 있을 게 분명했다.
제론은 유리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거기에 손바닥을 댔다. 제론의 손바닥을 통해 마나가 꾸역꾸역 밀려 나왔다.
"호오."
제론이 눈을 빛냈다. 이곳에도 있었다. 소리를 모아 어딘가로 보내는 장치가 말이다. 어딘지 모르지만 정말로 대단한 조직이었다.
미리 확인했다면 조금 전 사내와의 대화도 유출되지 않게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금 늦어 버렸다.
"뭐, 상관없지."
제론은 마나를 더욱 많이 흘렸다. 그리고 조금 더 섬세하게 조종했다. 가느다란 실을 따라 제론의 마나가 흘러갔다.
마나의 흐름에 따라 제론은 정확히 이곳에서 나간 소리가 어디로 가는지 알아냈다. 일단 알아낸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조심은 해야지."
정보 수집 장치의 특성상, 아직 이곳에서 벌어진 일이 상부로 보고되었을 리는 없었다. 아마 며칠, 혹은 몇 시간 더 기다려야 제대로 된 보고가 올라갈 것이다.
그 전에 그곳을 싹 정리하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감시하는 자의 눈도 속여야 한다. 제론은 그 부분에서 사실 조금 놀랐다.
누가 감시하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어떤 특별한 방식의 정보망을 이용해 감시하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지나다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정보원일 수도 있었다.
예전 빈민가에서 바인이 제론을 파악했던 것과 비슷한 방식일 가능성도 있었다.
어쨌든 제론은 그들의 눈을 피해야만 했다.
제론은 일단 방의 커튼을 모두 쳤다. 하지만 밖에서 안을 감시하지 못하게 하려면 커튼만으로는 안 된다. 이 커튼 역시 특별한 소재로 만들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제론의 마나링이 맹렬히 회전했다. 그리고 마법진이 나타나 산산이 부서지며 커튼으로 스며들었다. 이제 커튼에 어떤 특별한 조치가 취해졌든 안을 살펴볼 수는 없을 것이다.
제론은 아공간에서 병을 하나 꺼냈다. 은빛 액체가 가득 채워진 병이었다. 그것은 특별한 마법진을 그릴 때 쓰는 시약이었다.
제론은 그 시약을 이용해 바닥에 마법진 하나를 정성껏 그렸다. 온 신경을 집중해 그려야 할 정도로 복잡한 마법진이었다.
바닥에 마법진을 그린 제론은 시약에 마나를 담아 허공에 선을 그었다.
스윽.
놀랍게도 허공에 그림이 그려졌다.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을 기반으로 입체 마법진이 구현되었다.
마법진이 완성되자 제론은 시약을 다시 아공간에 담았다.
방 한가운데에 그려진 마법진은 은은한 빛을 내뿜고 있었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은빛 선으로 이루어진 입체 마법진에는 안으로 들어가는 문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제론은 그 문을 통해 마법진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마법진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이 마법진 자체를 완전히 뒤덮어 버렸다. 한순간 강렬해진 빛이 사라지자,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빛도, 제론도, 그리고 은빛 선으로 이루어진 마법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