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추격
제론은 아베티스 영지를 떠났다. 목표는 아벤드였다. 사실 푸르투나를 이용해 날아가면 훨씬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단 미행하는 놈들은 처리해야지."
제론은 그들에게 조금도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적이었다. 가문을 무너뜨리고 아버지를 죽인 적 말이다.
속도를 일부러 늦췄는데도 미행하는 자들은 나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제론은 그들이 뭘 원하는지 알아냈다. 그들은 유적을 원하는 것이었다.
"뭐, 굳이 나설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지."
솔직히 조금 아쉽긴 했다. 이럴 때 마티가 있다면 그들에게 하나씩 붙여서 배후를 캐낼 수 있을 것 아닌가.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제론은 조만간 아베티스 영지 근방에 있다던 유적에 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걸음을 멈췄다.
감각 안에 들어온 사람의 수는 총 30명이었다. 지척에서 따라오던 사람이 5명이었고, 나머지는 좀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앞선 자들이 의도적으로 남긴 흔적을 확인하고 따라오는 자들이었다.
당연히 뒤에 쫓아오는 놈들은 조심성이 아예 없었다. 아마 제론의 감각이 얼마나 예민한지 알았다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조심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겠지만 말이다.
제론은 천천히 돌아섰다. 근처에는 몸을 숨길만한 장소가 많지 않았다. 20미터쯤 떨어진 곳에 나무 세 그루가 있었는데, 미행자는 거기 숨어 있었다.
제론이 나무를 보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이만 나오는 게 어때?"
제론의 말에도 그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들켰다고 믿지 않은 것이다. 가끔 신중하고 조심성이 지나친 사람의 경우 전혀 확신을 가지지 않은 상황에서 저런 말과 행동을 하곤 한다.
그 심리전에 말려들면 바로 모습을 드러내거나 도망치게 되어 있었다. 제론을 미행하는 자들은 그쯤에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 미숙하지 않았다.
또한, 제론이 정말로 알아차렸다는 것을 단숨에 파악할 정도로 능숙하지도 않았다.
제론이 피식 웃으며 돌멩이 하나를 주웠다.
"안 나오면 후회할 거다."
그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움직이지 않자, 제론은 나무를 향해 돌멩이를 휙 던졌다.
아무리 가볍게 던졌다지만 소드 마스터의 힘이 깃든 돌멩이였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간 돌멩이는 그대로 나무에 틀어박혔다.
꽝!
쩌저적!
나무에 돌멩이가 콱 틀어박혔다. 그리고 그곳을 중심으로 나무가 쩍쩍 갈라졌다. 그렇게 갈라진 틈으로 숨어 있던 자들이 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놀라서 경직된 표정으로 멍하니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이 그들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나머지 한 손으로는 돌멩이 5개를 던졌다 받으면서 말이다. 말을 안 들으면 당장이라도 돌멩이를 던지겠다는 협박이었다.
5인의 사내가 쭈뼛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 나무가 갈라졌을 때 모습이 드러난 건 2명뿐이었지만 나머지도 기세에 눌리고 공포에 질려 알아서 기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제론에게 다가갔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맹렬히 생각했다. 여기서 죽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왠지 그냥 죽을 것 같지도 않았다.
만일 죽이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벌써 죽였을 것 아닌가. 분명히 원하는 게 있으니 살려 뒀을 것이다. 그것만 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거기 앉아 봐."
제론의 말에 다섯 사내가 즉시 쪼그려 앉았다.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을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건 최선을 다해 대처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했다.
"뒤로 돌아."
다섯 사내가 쪼그려 앉은 채 뒤뚱뒤뚱 뒤로 돌았다. 제론은 그것을 보며 빙긋 웃었다.
이들을 죽일 마음은 이미 사라졌다. 이들을 이용할 계획이었다. 생각해 보면 제론은 굳이 마티가 없더라도 이들을 얼마든지 감시할 수 있었다.
제론에게는 마법과 태블릿이 있었다.
심장의 마나링이 가속되었다.
위이이잉!
제론은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손바닥 앞에 마법진 5개가 동시에 떠올랐다.
5명의 사내는 뒤돌아 앉은 채로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 견디기가 어려웠다.
샤아악!
5개의 마법진이 각각 5명의 등에 스며들었다. 당연히 사내들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제론은 8개의 마나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을 제법 능숙하게 다뤘다. 간단한 마법이라면 동시에 5개를 펼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마나링은 하나가 늘어날 때마다 능력이 몇 배로 늘어난다. 8개의 마나링이 할 수 있는 일은 어마어마했다.
제론이 지금 만든 5개의 마법진은 간단한 추적 마법이었다. 태블릿과 연결시키기 위한 고리를 만드는 것이 좀 복잡했지만 제론에겐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런 연결 고리를 동시에 5개나 만드는 것이 좀 복잡하고 신경이 쓰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조차 수련의 연장이라고 생각하면 즐거웠다.
제론의 손바닥 앞에 새로운 마법진 5개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내 그것도 다섯 사내의 등에 스며들었다.
그것은 도청 마법이었다. 마법 자체가 상당히 복잡했기에 5개를 동시에 만드는 건 상당히 어려웠다. 태블릿과 연결시키는 건 당연히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하지만 굳이 태블릿과 연결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첫 번째 마법에서 태블릿과 이어졌기 때문이다. 앞으로 이들 주변에서 들리는 모든 소리가 태블릿에 저장될 것이다.
위이이잉!
심장의 마나링이 더욱 빠르게 가속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보다 조금 더 큰 마법진 5개가 나타났다. 뒤이어 또 다른 마법진 5개가 처음 나타난 마법진 뒤에 떠올랐다.
제론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번 마법은 그만큼 어려웠다. 조금만 실수해도 틀어질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제론은 모든 신경을 마법진에 집중했다.
샤아아악!
2개의 마법진이 거의 겹치다시피 해서 사내의 등에 스며들었다.
이 마법은 시신경과 연결해 영상을 만들어 내는 마법이었다. 일단 시신경을 장악하는 마법진에 영상을 만드는 마법진을 덮어씌워야 했기에 그 난이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하지만 제론은 그것도 멋지게 성공했다. 제론의 얼굴에 뿌듯한 만족감이 떠올랐다.
"좋아. 다시 뒤로 돌아."
제론의 명령에 다섯 사내가 뒤뚱뒤뚱 돌아섰다. 그들의 표정은 여전히 불안했다. 그들은 자신의 몸에 마법이 깃들었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이제부터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한다. 알겠나?"
"예!"
다섯 사내가 동시에 크게 대답했다. 그들은 이것만이 살 길이라고 판단했다.
"누가 시켰지?"
"가이츠 남작입니다!"
이번에도 다섯 사내가 동시에 대답했다. 그들은 미행을 하거나 정보를 수집하는 일은 잘 했지만 굳이 의뢰인과의 의리를 지키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지금까지도 위기의 순간에는 망설임 없이 의뢰인을 팔아먹은 대가로 살아남곤 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의 진짜 배후에 있는 사람이 미리 그런 식으로 명령을 했기 때문이었지만 말이다.
"정확히 어떤 의뢰를 받았지?"
"목표를 미행하고 흔적을 남기라는 의뢰입니다!"
이번에도 다섯이 동시에 대답했다. 마치 미리 입이라도 맞춘 것처럼 토씨 하나 틀리지 않았다.
제론은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들이 뭔가를 숨긴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몇 명이 쫓아오고 있지?"
"모릅니다!"
제론은 이들에게 얻을 게 더 이상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들에게는 뭔가를 캐내려면 앞으로 시간을 더 두고 살펴보는 수밖에 없었다.
촉이 왔다. 이들의 뒤에 뭔가가 있다고 말이다.
"좋아. 너희들의 말을 믿겠다."
다섯 사내의 눈이 살짝 빛났다. 살아남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것이다.
"일인당 한 개의 정보를 내놓으면 보내 주겠다. 대신 내가 혹할 정도로 쓸 만한 정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거 굳이 말할 필요가 없겠지?"
다섯 사내는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침을 꿀꺽 삼켰다. 목숨과 비견될 만한 정보를 내놓으라는 뜻이었다. 대체 뭘 내놔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 맹렬히 고민했다.
제론은 이들이 과연 무슨 정보를 줄지 기대했다. 대단한 정보를 원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배후에 대한 실낱같은 가능성이 이들의 정보에서 나왔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저……."
한가운데에 있던 사내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제론이 그를 바라보자 그가 어색한 표정으로 양옆을 돌아봤다. 제론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좋아. 너만 따라와."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 나머지 네 사람의 목 뒤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헉!"
네 사람은 깜짝 놀랐다. 갑자기 온몸의 감각이 사라져 버렸다. 놀라서 움직이려 했지만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들은 불안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잠깐 전신불수로 만들었어. 혹시라도 도망가면 곤란하잖아. 금방 원래대로 만들어 줄 테니까 기다려."
제론의 말에 네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절대 도망가지 않겠습니다! 제발 풀어 주십시오!"
그들은 이러다가 이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까 봐 두려웠다. 죽음을 눈앞에 둔 것보다 더한 공포가 엄습했다. 몸을 덜덜 떨고 싶었다. 하지만 그조차 불가능했다. 정말 목 아래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았다.
제론은 그것을 보면서 또 한 번 씨익 웃었다. 네 사람의 눈에는 그 웃음이 악마의 미소 같았다.
제론은 처음 손을 든 사내를 데리고 조금 떨어진 곳으로 걸어갔다. 커다란 바위가 있었는데 그 뒤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제론은 사내 모르게 마법을 펼쳤다. 소리를 차단하는 마법이었다.
"자, 이제 말해 봐."
사내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조만간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전쟁? 어디에서?"
"벨룸 왕국입니다."
"벨룸 왕국?"
"예. 체스터 공국이 벨룸 왕국을 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제론은 사내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걸 어떻게 알았지? 보아하니 그건 체스터 공국 내에서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 같은데."
사내가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잠깐 체스터 공국의 수뇌부 사이에서 벌어졌던 정보전에 참여를 했었습니다."
"저들도 같이?"
"그랬다면 제가 굳이 이렇게 따로 뵐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헤헤헤."
사내가 비굴하게 웃었다. 마치 이제 좀 봐 달라고 아부라도 하는 듯했다. 하지만 제론은 그 사내의 눈빛 깊숙한 곳에서 번득이는 감정들을 명확히 짚어 냈다.
'이놈 봐라?'
이 정보를 일부러 알려 줬다. 어쩌면 그 전쟁에 어떤 변수를 만들려는 수작일 수도 있었다. 제론은 순간적으로 이들이 자신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 넌 살려 주지. 따라와라."
제론은 다시 사내를 원래 자리로 데려가 앉혔다. 그리고 목뒤를 찔러 전신불수로 만들었다. 사내가 당황해 눈을 크게 떴다.
"한꺼번에 풀어 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 다음 사내를 데리고 바위 뒤로 갔다. 그 사내도 자신이 아는 정보 하나를 내놓았다. 또한 그 역시 눈빛 깊은 곳에 음흉함을 감추고 있었다.
그렇게 다섯 사내로부터 모두 정보를 들은 제론은 그들의 몸이 다시 움직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제론이 이들의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막은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마나를 이용해 목의 신경을 잠깐 막아 놓은 것이었다. 초고대에 범죄자를 잡아 가둘 때 종종 쓰는 방법이라서 제론도 어떤 식으로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내 마음이 변하기 전에 돌아가라. 가서 실패했다고 보고하는 것 잊지 말고."
제론의 말에 다섯 사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근처에 있다가 또 잡히면 이번에는 정말로 비참한 꼴을 당할 거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몸에 새겼다.
"자아, 그럼 남은 건 날 죽이려고 쫓아오는 놈들인가?"
제론은 5명의 미행자를 쫓아온 25명의 사내들이 거의 근처에 도착하자 씨익 웃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제론의 감각 안에 있었다. 그들이 도망칠 기회는 더 이상 없었다.
제론은 그들을 한 명도 살려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오로지 가이츠 남작의 수하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 움직이는 내내 살기를 풀풀 풍겼다. 제론을 무조건 죽일 생각으로 온 자들이었다.
자신을 죽이려는 자를 살려 둘 이유가 없었다. 제론은 그 정도로 마음이 비단결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만일 저들의 배후에 가이츠 남작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있다면 조금 고려할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들은 그저 살육과 고문, 심문을 위해 키워진 자들이었다.
"그러니까 날 고문해서 정보를 싹 빼먹은 다음 난도질해서 죽이겠다 이거지?"
제론은 피식 웃으며 검을 뽑았다.
샤라라라랑!
은빛 검신에서 빛가루가 뿌려졌다. 제론은 그것을 온몸으로 흡수하며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이런 순수한 마나를 받아들이면 기분이 좋아지는 게 당연했다. 몸에 힘도 나고, 조금이나마 줄어들었던 체력도 완전히 회복되었다. 또한 약간 들었던 피로감도 싹 사라졌다.
제론은 검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천천히 걸어갔다. 제론이 향한 방향에는 25명의 사내들이 킬킬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지금 자신들을 향해 제론이 걸어오는 중이라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물론 알았다 하더라도 도망가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실력은 제법 대단했다. 상대가 아무리 대단하다 하더라도 결코 도망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 좋아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기간트 라이더도 있었다. 비록 3명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가이츠 남작이 미리 준비해 준 것이었다. 그러니 자신감이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그들의 눈에 제론의 모습이 보였다. 검을 늘어뜨리고 천천히 걸어오는 모습에서 왠지 압박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우스웠다.
"뭐지? 지금 우리랑 해보겠다는 건가?"
"큭큭큭큭. 조심해. 한가락 하는 놈일지도 몰라. 우리가 몇 명인지 딱 보고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잖아."
"허이구 무서워라. 이거 기간트라도 꺼내야 하는 거 아냐? 흐흐흐흐흐."
"일단 반응이나 좀 보자고. 누구 활 가진 사람 없어?"
그 말에 몇몇 사내가 등에서 장궁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화살을 시위에 메겼다.
쌔액! 쌔액! 쌔액!
3발의 화살이 제론을 향해 날아갔다. 제론은 전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슬쩍슬쩍 몸을 비틀고 고개를 흔들어서 화살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냈다. 마치 처음부터 겨냥을 실수해서 빗나간 것처럼 보였다.
"뭐 하는 거야? 장난해? 똑바로 안 맞춰?"
사내의 입에서 짜증이 튀어나오자, 활을 든 자들이 다시 시위에 화살을 메겼다.
쌔액! 쌔액! 쌔액!
조금 전보다 목표가 훨씬 가까웠기에 이번에는 절대 빗나가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제론은 여전히 걸었고, 화살은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대부분 화살을 똑바로 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리더의 표정이 굳었다. 제론이 화살을 슬쩍슬쩍 피한 걸 알아차린 것이다.
"보통 놈이 아니다! 제대로 싸울 준비를 해!"
저 정도 실력을 가졌다면 최소한 베테랑 익스퍼트였다. 그들을 상대하려면 절대 방심해선 안 된다. 물론 이곳에 온 동료들 중에도 익스퍼트가 있긴 했지만 그들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1조, 가서 죽여. 어설프게 살리려고 하지 마. 그냥 죽여. 알겠어?"
리더의 말에 10명의 사내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파악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 10명이 동시에 덤비면 누구든 죽일 자신이 있었다.
"사로잡지 않아도 되는 거요?"
"필요 없어. 죽여."
"남작님이 싫어하실 텐데?"
"내가 책임진다. 죽여."
그제야 사내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각자의 무기를 뽑았다. 몇몇은 롱소드였고, 몇몇은 거대한 양손검이었다. 또 도끼를 든 사람도 있었다.
그들이 우르르 달려가는데도 리더의 표정은 한껏 굳어 있었다.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리더의 시선이 옆의 사내에게 돌아갔다.
"기간트 준비해. 언제든 소환해서 움직일 수 있도록."
리더의 말에 사내가 깜짝 놀랐다. 그는 이 일행의 기간트 라이더 중 한 명이었다. 리더의 말을 듣고 시선을 돌려 제론을 다시 확인했다.
"저놈이 그렇게 대단합니까?"
"최소한 내가 보기엔 그렇다. 웬만한 익스퍼트들보다 훨씬 무서운 놈이야."
"그럼 기간트를 준비해야죠. 소드 마스터쯤 되면 좋을 텐데. 아무리 기간트로 죽이는 거지만 소드 마스터를 죽이는 영광은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게 아닌데. 안 그렇습니까?"
리더는 어느새 사내의 눈에 나타난 광기를 보고는 혀를 찼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든든했다. 일단 이렇게 조금이라도 돌아 버리면 이놈을 상대할 만한 자는 거의 없었다.
리더는 전방의 싸움에 신경을 집중했다. 그리고 입을 쩍 벌렸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파악하지 못했다.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10명의 조원이 그대로 몰살당했다. 무기 한 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한 것이다.
"기간트를 꺼내!"
리더의 외침에 바로 옆에 있던 사내가 가장 먼저 반응했다. 당장 기간트를 소환했다.
카타락타가 나타났다. 사내가 거기에 타자, 그제야 2기의 기간트가 더 나타났다. 둘 모두 카타락타였다.
하지만 그 둘은 기간트에 탑승하지 못했다. 어느새 제론이 지척에 다가온 것이다.
서걱! 서걱!
목 2개가 핏줄기를 뿌리며 허공에 떠올랐다. 기간트 라이더가 죽은 것이다. 기간트는 라이더를 잃은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제론은 다시 검을 휘둘렀다.
촤촤촤촤촤촤악!
근처에 있던 사내들이 일제히 도륙당했다. 남은 건 기간트에 탄 라이더와 리더뿐이었다.
제론은 리더를 보고 씨익 웃었다. 몸에 피 한 방울 튀지 않아 깨끗했다. 사방이 피바다인데 홀로 고고한 모습은 그 자체로 기괴하기 그지없었다.
리더가 주춤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게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어느새 제론은 리더의 뒤에 나타나 그의 목을 쿡 찔렀다.
리더가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전신불수가 되어 버린 것이다.
"뭐, 뭐야!"
리더는 당황했다. 제론은 그런 리더를 번쩍 들어 한쪽으로 휙 던졌다.
털썩!
수십 미터나 날아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 리더는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아 두려움에 떨었다. 마치 몸이 사라진 것 같았다.
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바닥에 누운 채 하늘만 하염없이 바라봤다. 볼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리더가 그렇게 누워 있는 동안 제론은 카타락타 앞에 섰다. 제론의 눈에서 광채가 일어났다. 실전에서 기간트와 싸우는 건 처음이었다.
"어디 얼마나 하나 볼까?"
무조건 이길 자신이 있었다. 제론은 유적의 기간트인 이스히스와도 거의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다. 이스히스는 출력이 최소 4.0이 넘는 엄청난 기간트였다.
그런 기간트와도 싸우는데 고작 카타락타쯤이야 얼마든지 이길 수 있었다.
문제는 이스히스와 달리 카타락타에는 라이더가 타고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라이더가 없다고 해서 이스히스가 싸움에 대한 센스나 지능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선입견이라는 것은 무섭다. 제론은 아무리 그래도 라이더가 탄 카타락타가 좀 더 싸우기 까다로울 거라고 여겼다.
제론과 카타락타가 마주섰다.
먼저 움직인 것은 카타락타였다. 일단 광기에 빠져든 라이더가 분위기 파악 같은 걸 할 리 없었다.
카타락타의 거대한 검이 제론이 있던 자리에 휙 떨어졌다.
콰직!
제론은 피하지 않고 그것을 맞받았다. 원래는 가볍게 흘리려고 했는데, 막상 막아 보니 예상보다 훨씬 충격이 약해 정면으로 부딪쳐 버렸다.
"이거 괜찮은데?"
온몸으로 충격이 왔다. 하지만 몸속 마나를 마구 회전시켜 충격을 뒤로 흘려 버렸다.
이런 경험은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순수히 마나의 힘만으로 충격을 분산시키려면 몸으로도 그걸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스히스와 싸울 때는 그게 불가능했다. 워낙 출력이 높고 강해 마나로 분산시키는 충격만으로는 버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괜찮았다. 카타락타가 주는 충격 정도는 마나의 힘으로 충분히 분산이 가능했다.
"자, 와라!"
제론이 호기롭게 외쳤다.
이건 수련의 기회였다.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오겠는가. 실전으로 카타락타와 싸울 수 있는 기회가 말이다.
제론이야 신났지만 정작 카타락타의 라이더는 놀라 턱이 빠질 지경이었다. 어떻게 인간이 기간트의 검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위에서 아래로 내리치는 일격이었다.
하지만 놀랐던 것도 잠시 라이더의 광기가 폭발해 버렸다.
"감히 막아? 어디 이것도 막아 봐라! 크아아아!"
카타락타가 마구 검을 휘둘렀다. 그 거대한 몸을 움직이며 검을 휘두르는데, 상당한 균형감을 갖고 있었다.
"호오!"
제론은 나직이 감탄하며 검을 들었다.
라이더의 실력이 제법이었다. 하지만 놀랄 정도는 아니었다. 저 정도 실력을 가진 라이더는 에어스트 백작령에 가면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았다.
꽝! 꽝! 꽝! 꽝!
연달아 휘두르는 검을 제론이 침착하게 막아 냈다. 당연히 몸속 마나를 회전시키면서 충격을 분산시키고 뒤로 흘려 버렸다.
제론은 한 발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검만으로 카타락타의 모든 공격을 막아 냈다.
기간트의 공격을 막아 낸다는 건 일반 기사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사 익스퍼트에 이른 사람이라도 말이다. 아니, 소드 마스터라도 불가능했다. 이는 오로지 제론이 진짜 소드 마스터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정작 제론을 상대하는 카타락타의 라이더는 얼마나 속이 타겠는가. 그는 점점 더 미쳐 날뛰었다.
"크아악! 죽어!"
카타락타가 발을 들어서 그대로 찍었다.
쩌어어어엉!
제론은 발바닥을 검으로 찔렀다. 강력한 일격이 카타락타의 발바닥에 들어갔다.
순간적으로 발이 들린 카타락타가 균형을 잃었다.
끼이익! 쿠웅!
카타락타가 뒤로 넘어졌다. 그리고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제론은 그것을 보며 잠시 기다려 주었다. 조금 전 일격을 머릿속으로 다시 그리면서 말이다.
조금 전의 일격에는 마나가 실렸다. 하지만 소드 마스터만이 낼 수 있는 그런 일격이 아니었다. 익스퍼트의 실력으로도 충분히 낼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순수하게 마나에 관한 점만 그랬다. 실제 그 안에 들어간 검의 흐름이나 마나의 흐름은 웬만한 사람은 흉내도 낼 수 없을 정도로 고도의 기술이었다.
"뭐 하나? 일어나서 날 좀 더 즐겁게 해 줘야지?"
제론의 말에 카타락타가 억지로 일어났다. 하지만 전의는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두려움에 빠지자 그때까지 날뛰던 광기가 죽은 것이다.
"다, 당신은 누굽니까? 서, 설마 드, 드래곤?"
드래곤은 전설에나 나오는 존재였다. 실제 초고대에도 전설로 남은 존재가 바로 드래곤이었다. 그래서 제론은 그건 이야기 속에서나 나오는 가상의 존재라고 판단했다.
당연히 지금도 다들 그런 식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라이더 입장에서는 이런 비상식을 겪었으니 어쩌면 그쪽으로 가능성을 여는 게 당연했다.
"안 덤빌 건가?"
제론이 투기를 쏘아 보냈다. 그러자 카타락타가 뒤로 주춤 물러났다.
"후우, 끝났군."
제론은 고개를 저었다.
정말 즐거운 수련이 될 수 있었는데 너무 싱겁게 끝나 버렸다. 투지를 잃은 상대를 통해 뭔가를 얻어 낸다는 건 바보짓이었다.
"그럼 이제 정말로 끝을 내야겠군."
제론은 검에 마나를 밀어 넣었다. 제론의 검이 밝게 빛났다. 그 빛이 검끝에서 쭉 밀려 나왔을 때, 제론의 몸이 위로 훌쩍 떠올랐다.
너무나 홀연했고 빨랐다. 제론의 몸이 카타락타의 조종석 앞에 도달했다.
푸욱!
밝게 빛나는 검이 마치 두부를 파고들듯 카타락타의 가슴으로 들어갔다.
제론은 잠깐 거기 매달려 있다가 이내 검을 뽑아 아래로 내려왔다. 가볍게 착지한 제론이 카타락타를 쳐다봤다.
카타락타가 서서히 뒤로 넘어갔다. 제론이 검을 뽑으며 뒤로 살짝 민 것이 이제야 반응을 보였다.
쿠우웅!
카타락타가 쓰러졌다. 라이더만 깔끔히 죽인 일격이었다. 이 기간트는 거의 망가지지 않은 셈이었다. 조종석의 구조를 명확히 꿰뚫고 있었기에 마법진이나 다른 중요한 부품은 전혀 건드리지 않고 라이더만 깔끔하게 죽였다.
아마 이대로 암시장에 갖다 팔아도 몇 만 골드는 너끈히 받아 낼 수 있을 것이다.
제론은 카타락타를 아공간에 담았다. 라이더가 채 타지 못한 카타락타까지 총 3기나 된다. 이번에 암시장이 열리는 아벤드에 가서 팔아 치울 생각이었다.
"그럼 저놈을 깨워 볼까?"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었다. 이놈들의 리더가 남아 있었다. 제론은 전신불수가 되어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리더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번쩍 들어 목뒤를 꾹 눌렀다. 순식간에 활력과 감각이 온몸에 돌았다.
제론이 다시 바닥에 리더를 내던졌다.
털썩!
"크으윽!"
아직 완벽히 몸의 통제권을 자신이 가져오지 못한 상황에서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니 극심한 통증이 엄습했다.
"배후."
제론은 길게 물을 생각도 없었다. 어차피 다 아는 걸 다시 확인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리더는 열심히 자신이 아는 내용을 설명했다.
조금 전의 그 무기력함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그 공포가 남아 제론이 묻는 말에는 뭐든 대답해 주었다.
별다른 내용은 없었다. 제론의 예상대로 배후에는 가이츠 남작이 있었고, 가이츠 남작은 나베 공작의 심복이었다.
리더는 제법 소상하게 나베 공작의 계획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제론에게 얘기해 주었다. 심지어는 나베 공작이 저지른 인간 같지 않는 짓들까지 몽땅 얘기했다. 제론이 딱히 묻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물론 그 모든 상황에 이 조직이 발을 걸치고 있었다. 이들은 나베 공작이 지저분한 일을 할 때마다 쓰는 더러운 손 같은 존재였다.
모든 설명을 들은 제론은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서걱!
리더의 목이 피를 흩뿌리며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제론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리고 아벤드를 향해 걸어갔다.
오늘은 뭔가 성과가 많은 날이었다. 왠지 재미있는 일이 계속 벌어질 것만 같았다.
잠깐 걸으며 생각을 정리한 제론은 곧장 푸르투나를 불렀다.
휘류류류륭!
거대한 돌개바람이 제론을 허공으로 훌쩍 띄웠다.
제론은 그대로 아벤드를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그날 밤, 아벤드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