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권
Chapter 1 아베티스 영지
하이쓰 산맥을 내려가는 여정은 상당히 빨랐다. 함께 이동하는 인원이 적으니 당연했다. 루이네를 예거가 등에 업고 이동해서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산맥에 서식하는 그 어떤 몬스터도 그들에게 다가오지 않았다. 제론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들었다. 사방으로 퍼트린 강력한 마나에 접한 몬스터는 다들 겁을 집어먹고 달아났다.
워낙 넓은 범위에 마나를 깔아 놨기에 그들은 몬스터를 구경도 할 수 없었다.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하이쓰 산맥에서 중간에 제론을 만나 유적까지 가는 건 너무 힘들고 고되어서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로 신기했다. 어떻게 하이쓰 산맥에서 몬스터를 단 한 마리도 만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식이면 오늘 중으로 산맥을 벗어날 수 있겠네요."
루이네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예거의 등에 업혀 가기만 하면 되니 크게 힘들지도 않았다. 이대로라면 산맥을 벗어나도 쌩쌩할 것 같았다.
"산맥을 벗어나 봐야 마을도 없잖아. 어차피 똑같아. 거기라고 몬스터가 안 나타날 것 같아?"
제론의 말에 루이네가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그 말이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대놓고 면박을 줄 건 또 뭐란 말인가. 루이네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산맥을 벗어났다. 아침 일찍 유적에서 출발해서 해가 지기 전에 산에서 완전히 내려와 노숙이 가능한 곳에 도착했다.
"오늘은 여기서 쉬고, 아침 일찍 다시 출발하지. 영지가 여기서 먼가?"
루이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멀었어요.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는 게 빨라요."
"당연히 그게 빠르겠지. 내일 중으로 아베티스 영지에 도착하는 걸로 정하자고."
제론의 말에 루이네와 예거가 멍하니 제론을 바라봤다. 그리고 두 호위 기사도 입을 쩍 벌렸다. 그런 무지막지한 일정을 어떻게 소화한단 말인가. 여기서 가장 가까운 영지로 가려 해도 며칠이 걸릴 것이다.
텔레포트 게이트가 있는 영지까지 가려면 더 오래 걸린다. 한데 대체 무슨 수로 하루 만에 아베티스 영지에 도착한단 말인가.
제론은 네 사람의 시선을 완전히 무시한 채, 노숙 준비를 했다. 일단 준비를 시작하자, 두 호위 기사와 예거가 서둘러 제론을 도왔다.
순식간에 잠자리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모닥불이 타올랐다. 모닥불 위에서 커다란 솥이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겼다. 제론이 만든 특제 스프였다.
루이네를 비롯한 네 사람은 걸신들린 듯 스프를 먹어 치웠다. 이렇게 따뜻하고 맛있는 음식은 유적탐사를 위해 길을 떠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전혀 먹지 못했다.
그러니 얼마나 맛있겠는가. 제론이 스프를 넉넉히 끓였기 때문에 그들은 끝도 없이 스프를 먹고 또 먹었다.
제론은 근처 바위에 걸터앉아 스프 한 그릇을 비운 후, 조용히 마나 호흡법을 수련하며 명상에 잠겼다.
이번 유적을 얻으며 소드 마스터 아르뭄과 싸운 건 제론에게 큰 행운이었다.
소드 마스터는 검술의 끝이 아니었다. 진짜 검술의 또 다른 시작일 뿐이었다. 그걸 알기에, 또 그 위로 오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제론은 이번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르뭄과의 대결은 제론에게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탄탄한 발판을 제공했다. 이제 그 발판을 제대로 딛고 오르기만 하면 된다. 물론 그것 역시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제론이 명상을 하는 사이 나머지 일행이 스프를 모두 먹고 뒤처리까지 깨끗이 마무리했다. 이제 잘 시간이 되었다.
예거가 대표로 제론에게 다가갔다.
"불침번은 어떻게 할까요?"
고작 5명밖에 안 되는 일행이었다. 게다가 하나는 여자다. 즉, 4명이 번갈아 불침번을 서야 한다. 그 시간을 아무렇게나 정할 수는 없었다.
예거를 비롯한 두 호위 기사는 제론에게 모든 선택권을 맡겼다. 제론이 시키는 대로 할 생각이었다. 설사 제론이 자신은 안 할 테니 알아서 하라고 해도 수긍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제론의 대답은 그들의 예상을 아득히 벗어났다.
"불침번은 필요 없다."
"예? 하지만 이곳은 아직 위험합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자라. 내일 어떤 강행군이 기다리고 있는지 조금이라도 예상이 된다면 내 말에 토를 달 상황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텐데?"
"아, 알겠습니다."
예거는 진저리를 치며 물러났다. 상상만으로도 토할 것 같았다. 유적을 찾아갈 때 얼마나 고생했는지 떠올랐다. 하지만 내일은 그보다 몇 배는 더 힘들 것이다.
'게다가 난 아가씨까지 업고 가야 하니…….'
벌써부터 걱정이 시작되었다. 아마 내일은 거의 죽음을 눈앞에서 마주할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렇게 될 것이다.
예거의 말을 전해 들은 나머지 일행은 군소리 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잡담을 할 시간도 아까웠다. 얼른 자고 빨리 쉬어서 체력을 만들어야만 했다.
순식간에 어둠이 찾아왔다. 그리고 네 사람은 채 어둠이 찾아오기도 전에 잠들어 버렸다.
제론은 바위에 걸터앉은 채로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샤아아아.
손가락 끝에서 작은 마법진 하나가 떠올랐다. 그 마법진은 은은한 빛을 뿌리다가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고 그렇게 부서진 은빛 가루가 주변에 스며들었다.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알람 마법이었다.
순간 바닥이 환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 빛이 커다란 동심원을 그리며 넓게 퍼져 나갔다.
제론은 빛의 동심원이 얼마나 넓게 퍼지는지 확인했다. 아마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어디까지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제론은 빛의 원이 어디까지 갔는지 정확히 파악했다. 사실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마법을 구성할 때, 거기까지 다 계산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알람 마법의 범위는 반경 1킬로미터에 달한다. 1킬로미터 안으로 뭔가가 들어오면 알려 주는 방식이었다. 물론 아무거나 다 알려 주는 건 아니었다. 제론은 딱 오우거에 한정했다.
오우거가 들어오면 제론이 잠에서 깰 정도의 소음이 울린다. 아마 다른 사람은 소리가 들렸는지도 모르고 잘 것이다.
이곳에서 제론이 조심해야 할 몬스터는 오우거가 유일했다. 물론 혼자였다면 이런 알람도 필요 없었다. 하지만 루이네 일행을 지키려면 이 정도 조치는 해 줘야 안심할 수 있었다.
알람 마법을 설치한 제론은 바위 위에 누웠다. 잠을 오래 잘 필요도 없었다. 소드 마스터가 된 이후, 잠깐만 눈을 붙여도 몸의 피로가 싹 사라졌다.
제론의 몸은 항상 마나가 흐른다. 외부의 마나가 몸에 자유롭게 들락거린다. 마치 마나의 통로가 된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몸의 피로를 날려 버리고 활력을 불어 넣는 역할을 했다.
"한 시간만 잘까?"
제론은 말과 동시에 눈을 감았고 바로 잠들었다. 이 역시 자신의 몸을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는 소드 마스터가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론은 순식간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점점 밤이 깊어 갔다.
☆ ☆ ☆
4기의 기간트가 밤의 적막을 깨뜨리며 걷고 있었다.
쿵! 쿵! 쿵! 쿵!
그중 하나의 손에 크릭이 있었다. 크릭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멍하니 앞만 바라봤다. 결국 산사태에 휩쓸려 떠내려간 기간트조차 찾지 못했다.
산사태가 너무 심했고, 기간트들이 몽땅 토사물에 깊이 파묻혀서 어디에 있는지 위치를 잡지 못했다. 토사물을 몽땅 걷어 낼 수는 없지 않은가.
일단 지금은 유적에 먼저 가 봐야만 했다.
"오늘은 이만 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기사 하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크릭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한 자리를 찾아보게. 잠깐 눈을 붙이도록 하지."
오늘, 내일만 고생하면 유적에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빛기둥이 올라왔던 곳은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대충 거리를 가늠해 보면 내일 밤에는 도착이 가능했다.
"크르르르르."
막 잠자리를 준비하려는 순간 어딘가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크릭의 등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다들 전투 준비! 오우거다."
오우거는 결코 무시할 수 있는 몬스터가 아니었다. 이곳 하이쓰 산맥에서는 말이다. 이곳의 오우거는 무리를 지어 다닌다. 아무리 기간트에 타고 있어도 무리 지은 오우거를 상대하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더구나 이곳의 오우거는 다른 곳에 사는 오우거보다 조금 더 흉포하고 강했다.
기간트 한 기가 크릭을 가볍게 쥐고 한가운데에 섰다. 그리고 나머지 세 기간트가 주위를 둘러쌌다.
"크르르르르."
오우거 한 마리가 으르렁대며 나타났다. 그것을 본 크릭은 안심했다. 고작 한 마리라면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뒤이어 나타난 오우거를 보며 안색이 변했다. 사방에서 십여 마리의 오우거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완전히 포위당했다.
"젠장."
절로 욕이 나왔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사방을 둘러싼 오우거들 사이로 다른 오우거가 나타나 자리를 채웠다. 무려 삼십 마리가 넘었다.
크릭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그 순간 오우거 하나가 손에 든 뭔가를 휙 던졌다.
퍽!
기간트 하나의 가슴에 그것이 부딪쳤다. 놀랍게도 그건 사람이었다. 어마어마한 충격으로 인해 완전히 피떡이 되어 버렸다.
크릭은 그 사람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몸은 부서졌는데 얼굴은 멀쩡했다. 우연이었지만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우연이었다.
"그라우?"
그 얼굴의 주인은 그라우였다. 지금쯤 유적에 있어야 할 그라우가 왜 여기 있단 말인가.
"설마 오우거가……!"
대체 오우거가 얼마나 많이 나왔기에 30기에 달하는 기간트 부대가 전멸한단 말인가. 크릭은 믿을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어느새 삼십여 마리의 오우거가 일제히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크아아아앙!"
"크워어어어어!"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오우거의 날랜 몸놀림은 고작 4기의 기간트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이쓰 산맥은 정말로 무서운 곳이었다.
연이어 철판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오우거의 괴성이 뒤섞였다. 일부는 상처 입거나 죽으며 내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였다. 하지만 대부분은 흉성을 드러내며 상대를 공포에 질리게 하는 울부짖음이었다.
그렇게 4기의 기간트가 서서히 무너져 갔다.
☆ ☆ ☆
제론은 잠깐 숙면을 취하고 일어나 태블릿을 통해 하이쓰 산맥의 상황을 확인했다.
유적의 아티팩트를 통해 저장된 영상을 확인한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되었다. 유적탐사대가 모두 무너진 것을 확인했다.
이제 남은 건 유물을 챙겨 오는 것뿐이었다.
제론은 하늘을 보고 시간을 가늠했다. 그리고 잠든 일행을 확인했다.
고민이 됐다. 지금 유적으로 가서 유물을 아공간에 담아 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한 것이다. 솔직히 얼마 안 걸릴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도 그동안 이들을 위험에 노출시킨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몇 가지 방비를 해 놓고 가면 되나?"
제론은 유적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가늠해 봤다. 솔직히 푸르투나의 힘을 이용해 날아오면 거의 순식간이었다.
그게 아니라 소드 마스터의 능력만 발휘해도 금방 다녀올 수 있었다. 더구나 유적까지 가는 건 순간 이동으로 갈 수 있었다.
오는 시간만 계산하면 된다. 반경 1킬로미터 안에는 오우거가 없으니 위협이 될 것도 사실 없었다.
"좋아. 다녀오자."
제론은 그렇게 결심하고는 심장의 마나링을 가속시켰다.
샤아아아아!
허공에 수많은 마법진이 떠올라 빛났다.
마법진이 부서지며 만들어진 빛가루가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그때마다 빛의 동심원이 퍼져 나갔다.
제론은 알람 마법을 좀 더 강화했다. 예거를 단숨에 깨울 수 있을 정도로 만들었고, 보호 마법을 추가했다. 만일 오우거가 달려들더라도 한 번은 확실히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몇 개의 트랩을 깔았다. 아무리 오우거라도 걸리면 곤란할 만한 트랩이었다. 시간을 좀 더 들였다면 훨씬 그럴듯하고 강력하게 만들 수 있었겠지만, 일행이 깨기 전에 다녀오려면 시간이 많지 않았다.
제론은 마법을 통해 조치를 취하자마자 순간 이동을 통해 유적에 도착했다. 이젠 유적 간 공간 이동을 이용하는 것도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제론은 일단 아공간에 모든 유물을 차곡차곡 담았다. 잘 정리해서 넣지 않으면 나중에 복잡해질 수도 있기에 처음부터 정리를 잘해 두었다.
모든 유물을 아공간에 수납한 제론은 서둘러 유적에서 나왔다.
"푸르투나."
휘류류류룽!
거대한 바람이 일어나 제론을 허공으로 붕 띄웠다. 이곳은 아무런 인적이 없는 하이쓰 산맥이었다. 게다가 밤이니 누군가의 시선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제론은 하늘 높이 훌쩍 날아올랐다. 일행의 위치는 이미 정확히 찍었다. 유적의 아티팩트를 통해 정확한 방향과 속도를 기반으로 가는 데 걸릴 시간까지 계산했다.
쉬이이이익!
제론이 날아가며 돌개바람이 일어났다.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이 정도 속도라면 몇 분 지나지 않아 일행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제론의 신형이 밤하늘을 가르며 날아갔다.
제론이 다녀온 그 짧은 시간 동안 별일이 있을 리 없었다. 한데 아예 아무런 일도 없었던 건 아니었다.
루이네가 깨 있었다.
"어? 깼네?"
루이네는 제론의 말에 깜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표정에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하지만 제론을 발견하고는 그 불안감이 눈 녹듯 녹았다. 그리고 그렇게 녹은 불안감은 눈물이 되어 흘렀다.
"그냥 가신 줄 알았어요."
루이네는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쉽게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그동안 겪은 일이 마음에 꽁꽁 맺혀 있다가 이번 일을 계기로 다 터져 나왔다.
제론은 굳이 위로하지 않았다. 그저 옆에 가만히 있어 주었다. 오해로 인한 것이긴 하지만, 그동안 너무 오래 참았다. 슬슬 이런 식으로 터트려 주지 않으면 속으로 곪을 수도 있었다.
날이 완전히 밝아 올 무렵 루이네는 울음을 그쳤다. 그리고 퉁퉁 부은 눈으로 제론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헤헤. 제가 좀 추태를 부렸네요. 죄송해요."
그제야 좀 그 또래의 나이다워 보였다. 그리고 왠지 밝은 느낌이 들었다.
"훨씬 보기 좋군. 이제 마음도 다 추스른 거 같으니 저 잠꾸러기들이나 깨워라."
제론의 말에 루이네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둘러 예거와 호위 기사를 깨웠다.
제론은 그사이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꺼지지 않은 모닥불을 이용해 간단히 육포를 넣은 죽을 끓였는데, 그 맛이 기가 막혔다.
루이네 일행은 또 한 번 정신없이 음식을 흡입했다.
☆ ☆ ☆
"이렇게 빨리 도착할 줄은 몰랐어요."
루이네는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안쓰러운 눈으로 예거를 바라봤다. 그저 업히기만 한 자신도 이렇게 힘이 든데, 자신을 업고 온 예거가 얼마나 힘들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예거는 시커멓게 죽은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도착했다.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 설마 이 정도로 강행군을 할 줄은 몰랐다. 이틀 만에 도착했는데, 그동안 단 한 번도 쉬지 못했다.
예거는 비틀거리며 루이네를 내려놓고는 그대로 뻗어 버렸다. 정신을 잃은 것이다.
"예, 예거 경!"
루이네가 깜짝 놀라 예거를 불렀다. 하지만 예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죽은 것 같았다.
"사람을 부르는 게 빠르지 않겠어?"
제론의 말에 루이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후다닥 영주성 쪽으로 뛰어갔다.
제론은 그런 루이네의 뒤를 느긋이 따라가며 주위를 둘러봤다.
"제법 발달한 곳이로군."
길이 잘 닦여 있었고, 길 양쪽에 늘어선 건물은 크고 높았다. 또한 사람들의 옷차림도 고급스러웠다. 영지에 돈이 제법 돌아다닌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정작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둡기 그지없었다. 영지가 어떤 상황인지 다들 알고 있기에 표정이 가라앉아 있었다.
금방이라도 영지가 넘어갈 상황이니 당연했다. 영지전으로 넘어가나 빚으로 넘어가나 영지민의 처지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어쨌든 비참한 꼴을 면치 못한다.
현재 아베티스 영지의 상황은 심각했다. 아마 향후 영지민 전체가 노예 같은 삶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영지를 감시하는 병력이 대폭 늘어났다. 아베티스 영지에 돈을 빌려 준 자들이 보낸 감시병이었다.
"자아, 그럼 난 빈 창고나 좀 알아볼까?"
물론 다른 데로 가지는 않았다. 계속 루이네의 뒤를 따라갔다. 빈 창고를 얻는 일도 루이네를 통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확실할 테니까 말이다.
성에 도착한 루이네는 서둘러 병사들을 움직였다. 10여 명의 병사가 예거가 쓰러진 장소로 달려갔다. 당연히 아무 일도 없었다. 예거와 두 호위 기사는 무사히 영주성으로 옮겨져 푹신한 침대에 눕혀졌다.
제론은 집사의 안내를 받아 제법 괜찮은 방에 머물 수 있었다. 물론 이곳에서 오랫동안 지낼 생각은 없었다. 빨리 유물을 넘겨주고 떠날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결과는 확인을 해야만 한다. 아무리 아베티스 가문에 돈이 생겼다고 해도 나베 공작가가 모든 걸 수긍하고 넘어갈 리 없었다.
그 음모까지 몽땅 부숴 놔야 그들의 배후를 조금이라도 흔들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방에서 잠깐 휴식을 취한 제론은 루이네를 찾아 나섰다. 루이네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영주의 집무실에서 밀린 일처리를 하고 있었다.
현재 아베티스 영지에는 영주 대행으로 일을 처리할 만한 사람이 루이네뿐이었다.
"바쁜가 보군."
"아, 오셨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이것만 마저 처리할게요."
루이네는 손에 든 서류를 빠르게 읽고 인장을 찍었다. 그다음 한숨 돌리며 제론을 바라봤다.
"그쪽에 앉으세요. 일이 너무 밀려서 신경을 못 써 드렸네요. 죄송합니다."
"시간이 없으니 본론만 말하지. 창고가 필요해."
"창고요?"
"미리 창고를 준비해야 유물을 가져다 채울 것 아닌가?"
루이네의 표정이 굳었다. 유물을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했다. 과연 제론이 정말로 그 유물을 모두 가져올 수 있을지도 믿기 어려웠다.
"대체 어떻게 그 많은 유물을 나르시려고 하는지 알려 주실 수 있나요?"
제론이 고개를 저었다.
"나머지는 내가 모두 알아서 할 테니 넌 우선 창고부터 준비해라. 그걸 확인한 다음 움직이겠다. 시간이 별로 없는 걸로 아는데 아니었나?"
"없죠, 시간이 너무 없어서 문제죠."
이제 대금 변제일이 1개월도 남지 않았다. 지금 당장 유물이 도착해도 그것을 팔아 돈으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너무 모자랐다.
"보름 안에 가져올 수 있나요? 그게 마지막 허용선이에요."
"유물을 내다 팔 루트는 마련해 놨고?"
루이네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일단 유물이 도착하면 그걸 서둘러 팔아 봐야죠. 근처 영지나 우리 영지에 오는 상단을 통해서요."
제론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선 이미 늦지. 그들이 과연 도와줄까? 나베 공작가가 고작 그 정도 생각도 못 했을까?"
루이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생각은 자신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외에는 방법이 없지 않은가.
"그럼 이렇게 하지. 내가 판매까지 책임지지. 단, 전부는 곤란하고 일부만."
"예?"
루이네는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만일 정말로 제론이 그렇게 해 줄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빚이 얼마인지만 얘기해. 그쯤에 맞춰서 팔아 줄 테니까."
"대, 대체 어디서 어떻게요?"
"암시장에서."
"암시장이요?"
루이네는 당황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암시장이라니. 멋모르고 가면 뒤통수를 맞는 곳이 바로 암시장이었다. 그런 위험한 곳에 유물을 가져갔다간 싹 날릴 수도 있었다.
"허락할 수 없어요!"
"그럼 눈 빤히 뜨고 영지를 빼앗길 셈인가?"
루이네가 입술을 깨물었다.
방법이 없었다. 어쨌든 지금 자신은 제론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 제론이 여기서 손을 떼면 정말로 곤란했다.
"그럼 이렇게 하지. 그 유물의 가치로 생각하는 액수가 얼마인지 목록을 보고서 정해라. 액수가 적당하면 내가 사는 걸로 하지."
"예? 그, 그래도 되나요?"
"단, 값을 잘 쳐줄 수는 없다. 분명히 네 예상보다 낮을 거야. 그걸 감안하겠다면 그렇게 해라."
"그거야 당연하지요. 저도 그렇게까지 염치가 없지 않아요."
루이네는 제론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다. 사실 그게 훨씬 안전했다. 일단 영지의 위기부터 넘기는 것이 먼저였다. 나머지는 그다음에 생각할 문제였다.
"그럼 지금 정할까?"
"이렇게 갑자기요?"
"그럼 빨리 정해라. 전문가를 부르고 싶으면 부르고. 시간이 없다는 걸 명심해."
"아, 알았어요. 오늘 저녁에 정하도록 하죠."
제론은 루이네의 대답을 듣고는 돌아서서 나갔다.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창고를 얻을 필요가 없어졌으니 남은 시간 동안 유적에 다녀오거나 아니면 검술을 수련하는 것이 나았다.
자금은 충분했다. 아무리 유물의 가치가 대단하다 하더라도 제론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돈을 지불할 수 있었다.
게다가 돈을 지급하는 날짜를 조금 조정하면 암시장에 물건을 판 뒤에 그 돈으로 대금을 지불하는 것도 가능했다. 만일 그게 가능하다면 제론은 엄청난 이득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뭐, 어차피 그 유물을 발견한 게 나니까 꼭 그런 것도 아닌가?"
제론은 피식 웃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저녁까지 검술을 수련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유적에 다녀오기에는 시간이 좀 애매했다.
그날 저녁 루이네는 부랴부랴 섭외한 전문가를 대동하고 제론과 만났다.
그리고 목록에 비추어 유물의 가치를 책정했다. 물론 전문가는 루이네의 편이었지만 제론은 결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거기에 루이네는 제론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해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펼치지 못했다. 결국 유물의 가격이 상당히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운송의 문제가 남았다고는 해도 이 정도면 가격이 턱없이 낮습니다. 이래서야 유물 발굴의 의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충분해요. 지금 당장 돈을 받을 수 있다면요. 어차피 우리 힘으로 개발한 유적도 아니잖아요."
전문가로 나선 가신의 말에 루이네는 그렇게 답하고는 제론을 바라봤다.
"그렇죠?"
"맞다. 탁월한 선택이다. 돈은 언제 지불하는 것이 좋을까?"
"지금 당장 주세요."
루이네의 선택에 제론이 고개를 저었다.
"잘 생각해라. 영지가 처한 상황과, 그 이면에서 벌어지는 일까지 모두 고려해야 한다. 변제일이 언제라고 했지?"
"아직 1개월쯤 남았어요."
"그때까지 미루는 게 좋을 거다. 돈을 가진 사람도, 또 유물에 대한 모든 정보를 가진 사람도 나라는 사실을 잘 이용해라."
제론의 말에 루이네가 눈을 크게 떴다.
"그, 그럴 수는 없어요! 지금까지 받은 도움만 해도 갚을 길이 없는데……!"
"그만큼 위험성도 가지고 있는 셈이지.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되겠어?"
제론은 그 말을 하면서 루이네를 따라온 가신을 힐끗 쳐다봤다. 그리고 그의 눈이 번득이는 걸 놓치지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알고 있어. 변제일에는 꼭 나와 동행하고. 돈도 내가 가져갈 테니까."
루이네는 고마움과 미안함이 뒤범벅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너무 염치가 없었다. 하지만 제론의 제안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현재 아베티스 영지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이번 위기를 넘기는 데 모든 심혈을 기울여야만 했다.
"염치없지만 부탁드릴게요."
루이네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제론은 씨익 웃어 주고는 돌아서서 나갔다.
"아가씨. 저자에게 너무 저자세로 나가시는 것 아닙니까? 무엇보다 정체도 확실치 않은 자에게 너무 많은 걸 주셨습니다."
루이네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저분은 능력 하나는 확실한 분이에요. 믿을 수 있어요. 아마 잘될 거예요."
가신도 고개를 저었다.
"전 저자에게 돈이 있다는 사실도 믿기 어렵습니다. 그 많은 돈을 대체 어디에 들고 다닌다는 겁니까?"
"굳이 돈을 들고 다닐 이유가 있나요? 디아만트 상단의 채권으로 들고 다닐 수도 있잖아요?"
"디아만트 상단의 채권 말입니까?"
가신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건 생각도 못 해 봤다. 물론 그런 식으로 액수가 크면 믿을 만한 상단의 채권을 돈 대신 쓸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누가 미쳤다고 들고 다니겠는가. 특별한 일도 없는데 말이다.
"확실히 그런 걸 가지고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요. 한데 그런 생각은 어떻게 하신 겁니까?"
루이네가 빙긋 웃었다.
"제가 생각해 낸 게 아니라 들은 거예요. 돈 대신 그걸 들고 다니신다고 하더라고요."
"저자가 말입니까?"
루이네는 가신이 계속 저자라고 하는 말이 거슬렸지만 굳이 정정하지는 않았다. 제론이 자신의 신분을 비밀에 부쳐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기 때문이었다.
최소한 제론과 한 약속이라도 지키고 싶었다. 그게 루이네가 할 수 있는 전부였으니까.
루이네는 제론에 대한 고마움을 떠올리느라 가신의 눈빛이 점점 섬뜩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 ☆ ☆
아베티스 영지에 은밀한 움직임이 일었다. 그 움직임의 시작은 루이네와 함께 제론을 만난 가신이었다. 그가 몇몇 사람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전달했고, 그렇게 정보가 어딘가로 흘러갔다.
그 정보를 최종적으로 받은 사람은 나베 공작가의 사주를 받고 이곳에 감시병을 파견한 가이츠 남작이었다.
"이건 멍청한 건지 똑똑한 건지 분간이 가지 않는군."
가이츠 남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일 루이네가 돈을 받았다면 그녀의 신변이 위험했을 것이다.
지금 아베티스 영지는 상당히 위태로웠다. 이 영지를 집어 삼키기 위해 나베 공작가는 엄청난 투자를 했다. 그 투자금을 모두 회수하려면 이 영지를 삼킨 다음에도 몇 년 동안은 착취를 통해 돈을 만들어야만 했다.
모든 초점이 아베티스 영지가 빚을 갚지 못하게 하는 데에 맞춰져 있었다. 만일 빚을 갚지 못하면 이 영지는 가이츠 남작의 것이 된다.
가이츠 남작의 임무는 그렇게 영지를 얻은 뒤, 이 영지를 잘 관리해 돈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또한 향후 나베 공작가에 영지를 상납하기로 되어 있었다.
물론 영지를 상납하더라도 영지는 가이츠 남작이 계속 관리하게 될 것이다. 가이츠 남작은 그걸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다.
"돈을 가지고 있다던 놈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느냐?"
"영지를 떠날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영지를 떠나? 하긴, 유물을 갖다가 암시장에 팔아야 할 테니……."
가이츠 남작은 생각하면 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그는 제론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유적에 자주 왔다 갔다 하면서 유물을 조금씩 처분할 생각인 모양인데……."
확실히 그런 식으로 하면 큰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루이네로부터 워낙 싼 값에 유물을 구입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오랜 시간에 걸쳐 팔아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그거야 충분히 감수할 만했다. 그 정도 이득이라면 말이다.
"일단 사람을 붙여. 유적에 대해서도 알아낸 다음 죽이고 돈을 빼앗아 와."
가이츠 남작은 그렇게 명령을 내리고는 빙긋 웃었다.
이제야 끝이 보였다. 이번 일만 제대로 끝내면 더 이상 루이네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처절하게 무너져 절망을 할 때, 실낱같은 희망 하나를 던져서 낚는 것도 나쁘지 않지."
가이츠 남작은 루이네의 아름다운 외모와 몸매를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그는 조만간 루이네가 자신의 여자가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모든 상황이 순조로웠다. 그의 눈에서 음탕한 욕망이 번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