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 하이쓰 산맥의 유적
제론은 익숙한 광경에 미소 지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유적의 로비는 이제 너무 익숙해서 별다른 감흥도 없었다.
대부분 같은 디자인에 비슷한 규모였고, 또 시설도 대동소이했다.
"자, 일단 여긴 몇 층짜리인지부터 확인해 볼까?"
제론은 곧장 가장 아래층에 있는 통제실로 향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이 유적은 무려 29층짜리였다.
"대체 뭘 하는 곳이기에 이렇게 깊은 거지?"
제론은 통제실을 태블릿에 연결한 다음 곧장 각층을 살폈다. 통제실 위는 생활공간이자 수련공간인 것은 다른 유적과 같았다.
하지만 그 위는 완전히 달랐다. 27개 층이 몽땅 뭔가 특별한 입체 마법진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각층의 마법진은 독립적이면서도 유기적으로 작동했다.
제론은 27개 층을 꽉 채울 정도로 대규모 마법진으로 과연 무엇을 하는 건지 궁금했다.
그리고 경악했다.
"이건 큰 태블릿이잖아?"
기능은 태블릿과 똑같았다. 다만 크기가 다를 뿐이었다. 크기가 다르니 당연히 성능도 달랐다.
제론은 일단 태블릿에 등록을 했다. 제론이 가진 태블릿으로 이 마법진을 이용할 수 있었다.
대체 이런 거대한 마법진을 어디에 쓸까 고민했는데, 그 답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태블릿에 바로 쓰임새 몇 가지가 나왔다.
이 마법진을 이용해 어마어마하게 복잡하고 어려운 마법을 분석하거나 구성하는 것이 가능했다.
아무리 천재적인 머리를 가진 사람이라도 몇 년이 걸려야 간신히 한 번 계산할 수 있을까 말까 한 마법을 고작 몇 분 만에 분석하고 재조립할 수 있을 정도로 굉장한 아티팩트였다.
"그나저나 마티는 없네?"
마티가 없는 것이 참으로 아쉬웠다. 하지만 태블릿을 통해 유적의 아티팩트를 더 살펴보던 제론은 이곳에 왜 마티가 없는지 알 수 있었다.
"이런 것도 가능한 거야?"
제론은 망설임 없이 유적 1층에 있는 아티팩트를 작동시켰다. 그것은 유적의 모든 마법진과 연계되어 있으면서도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아티팩트였다.
후우웅!
가벼운 마나의 바람이 불었다. 아티팩트가 제대로 작동했다는 뜻이었다. 아티팩트를 유적 밖으로 공간을 열고 날려 보낸 것이다.
제론은 태블릿을 조작해 아티팩트의 위치를 확인했다. 아티팩트는 순식간에 구름보다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제자리에 멈췄다.
제론은 능숙하게 태블릿을 조작해 아티팩트의 시야를 공유했다. 그러자 지상의 모습이 쫙 펼쳐졌다. 태블릿을 간단히 조작하는 것만으로 지상의 모습을 크게 확대해서 확인하는 것도 가능했다.
마티보다야 못하지만 엄청난 아티팩트였다. 유적을 중심으로 상당히 넓은 공간을 지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으니 말이다.
제론은 산맥을 한 번 쭉 훑었다. 일단의 무리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라우의 뒤를 쫓아 움직이는 후속 지원 부대였다.
"한 300명은 되겠는데?"
이 아티팩트의 단점은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 점에서 마티보다 상당히 불편했다. 하지만 이 아티팩트가 갖는 장점이 분명히 있었다.
"저 정도 속도로 이동하면 대충 이틀이 걸린다 이거지?"
유적의 거대 아티팩트와 연계되어 있기에 이런 식으로 원하는 계산을 단번에 해 버린다. 이동 속도도 측정이 가능했고, 그걸 토대로 언제 여기 도착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또한 다른 여러 가지 변수를 고려한 복잡한 계산도 가능했다. 만일 이 아티팩트를 국소 날씨 조절 아티팩트와 함께 사용하면 재미있는 일을 할 수도 있었다.
제론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감돌았다.
☆ ☆ ☆
나베 공작가에서 보낸 유적탐사대는 하이쓰 산맥을 거침없이 행군했다. 기간트를 무려 10기나 보유하고 있기에 어떤 몬스터도 두렵지 않았다.
또한 인원이 인원인지라 웬만한 몬스터나 맹수는 아예 다가올 생각도 못했다.
유적탐사대의 책임자인 크릭은 속도를 조금씩 높였다. 아무래도 빨리 유적을 보고 싶었다. 이번 탐사와 발굴을 제대로 해내면 자신의 입지가 어떻게 변할지 알기에 기대가 컸다.
"음?"
크릭은 갑자기 주위가 어둑어둑해져서 하늘을 바라봤다. 시커먼 먹구름이 보였다.
"젠장, 낭패로군."
우르르릉!
천둥까지 쳤다. 그리고 바로 비가 쏟아졌다.
쏴아아아!
"일단 비를 피할 곳부터 찾아라! 조금 쉬었다가 간다!"
300명이나 되는 대인원이 한꺼번에 비를 피할 수 있는 장소가 산에 있을 리 없다.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각자 알아서 비를 피했다.
쏴아아아!
비가 점점 더 많이 내렸다.
크릭은 걱정스런 눈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비가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았다. 한데 계속 하늘을 살피던 크릭은 뭔가 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응? 구름이 왜 여기만 있는 거지?"
먹구름이 잔뜩 끼긴 했는데, 왠지 머리 위에만 있는 것 같았다. 가만히 거리를 가늠해 보니 오히려 빨리 이동하면 비가 내리지 않는 곳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살다 보니 이런 경우도 다 있군."
크릭은 주위로 명령을 전달했다. 빠르게 비가 오는 지역을 벗어나라는 지시였다. 물론 목적지 방향으로 가야만 했다.
다만 지금까지처럼 제대로 줄줄이 늘어서서 이동하는 건 불가능했다. 각자 최대한 빨리 이동하는 방식이었다.
가장 먼저 움직인 사람은 크릭이었다. 일단 방향을 잡아 줘야 하기 때문이었다. 크릭이 빠르게 산을 타고 이동했다. 그러자 그 뒤를 기사들이 따랐다.
크릭과 기사가 가장 강한 전력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우르르 뒤를 따라 달렸다.
사실 크릭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조금만 더 이동하면 비가 내리는 지역을 벗어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 생각이 틀렸다는 건 몇 시간을 이동한 뒤에야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오래 이동했는데도 비가 내리는 지역을 벗어날 수 없었다.
괜히 비를 맞으며 이동하는 바람에 체온이 떨어져 다들 덜덜 떨기만 했다. 결국 크릭은 이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쏴아아아아!
비가 줄기차게 내렸다. 마치 세상 모든 걸 다 씻어 내겠다는 듯이.
크릭은 이왕 젖은 김에 적당한 장소를 찾았다. 비를 피하기 좋은 크고 깊은 동굴이었다. 300명이나 되는 인원을 다 수용하고도 남을 정도로 커다랬다.
다들 우르르 동굴로 들어갔다. 그리고 서둘러 불을 피웠다. 일단 젖은 몸부터 말려야 했다. 그래야 몸이 많이 상하지 않는다.
여기저기 모닥불이 피어올랐다. 그래도 비가 오는 와중에 미리 준비한 마른 장작이 젖지 않도록 지켰기에 불을 잔뜩 피울 수 있었다.
타오르는 모닥불 근처에 사람들이 모여 앉았다. 그리고 일부는 부산스럽게 식사를 준비했다. 일단 비가 오는 동안 먹고 자면서 푹 쉬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다들 식사까지 끝나고 마무리를 하자, 여기저기 널브러졌다. 그동안의 강행군으로 쌓인 피로를 한시라도 빨리 풀고 싶었다.
그렇게 하나둘 잠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크릭은 잠이 오지 않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분명히 자신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비가 오는 범위가 상당히 좁았다. 그래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한데 아무리 이동해도 거기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마치 먹구름이 자신을 쫓아오는 것 같았다. 당연히 말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상했다.
"젠장. 비가 그칠 생각을 않는군."
쏴아아아아아!
비는 오히려 더 많이 내리는 것 같았다. 크릭은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리는 산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만일 산사태라도 일어나면 완전히 끝장이었다.
"설마……."
그런 일이 그리 쉽게 일어날 리 없었다. 더구나 산사태가 꼭 이 동굴을 덮칠 확률도 그리 높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슬며시 차오르는 불안감은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아무리 산사태가 일어나 동굴이 막힌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빠져나가는 게 가능했다.
탐사대에는 기간트가 있었다. 그것도 무려 10기나. 사실 어떤 상황이 와도 상관없었다.
쏴아아아아아!
끊임없이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크릭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비가 그쳤다. 크릭이 걱정했던 것처럼 산사태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비가 워낙 오랫동안 내려서 길이 엉망이었다.
"다들 조심해라!"
바닥이 젖어 있어서 발을 디딜 때마다 미끄럽기 그지없었다. 조심해서 걷지 않으면 산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갈 판이었다.
당연히 속도가 날 리 없었다. 또한 땅이 굳었을 때에 비해 몇 배나 더 힘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서둘러야만 했다. 비 때문에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
크릭은 앞장서서 걸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끌면 성과가 퇴색된다.
"쯧. 이제는 유적을 정말로 잘 발굴하는 것 외에는 답이 없군. 부디 그라우 경이 유적을 많이 부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라우의 기사단이 아베티스 가문의 기사와 싸우면서 유적이 손상될 확률이 높았다. 양측 모두 기간트를 동원할 것이니 말이다.
유적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싸우면 괜찮겠지만, 가까이서 싸우면 유적 곳곳이 부서질 것이다.
부서진 유적을 조심스럽게 발굴하는 것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었다. 크릭은 벌써부터 골치가 지끈거렸다.
"이상한 소리 못 들으셨습니까?"
크릭은 뒤에서 따라오다가 갑자기 옆으로 다가와 말을 건 기사를 힐끗 쳐다봤다.
"소리? 무슨 소리 말인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소리가 커진다고?"
크릭의 눈이 번득였다. 소리가 점점 커진다는 건 뭔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젠 크릭의 귀에도 소리가 들려왔다.
우르르르르르.
크릭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반사적으로 산의 위쪽을 바라봤다.
"헉!"
나무들 틈새로 누런 토사가 달려드는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모두 피해!"
"기간트를 소환해!"
크릭과 기사가 거의 동시에 소리쳤다.
산사태였다. 어째 비가 오랫동안 온다 싶더니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차라리 동굴에 있을 때였다면 안전하게 기다렸다가 빠져나가면 되는데, 이렇게 훤히 드러난 곳에 있으니 피할 길이 막막했다.
꽈르르르르릉!
쏟아지는 토사물이 점점 힘을 얻어 이젠 나무까지 싹 뽑으며 쏟아지고 있었다.
키이이이잉!
기간트가 일제히 소환되었다. 일부는 탑승에 성공했고, 일부는 채 탑승하기 전에 산사태가 일행을 덮쳤다.
꽈르르르르르릉!
대부분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토사물에 휩쓸렸다. 산사태가 워낙 광범위하게 일어나서 피하고 자시고 할 틈도, 숨을 곳도 없었다.
그나마 제대로 움직일 수 있는 건 기간트뿐이었다. 탑승에 성공해 움직이는 기간트는 고작 4기에 불과했다. 나머지 6기는 토사물과 함께 아래로 쓸려 내려갔다.
"버텨!"
기간트 하나가 크릭을 낚아채서 손에 들고는 소리쳤다. 나머지 기간트는 그럴 틈도 없었다. 그나마 크릭을 구한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가 이번 유적탐사대에 참여한 기사단의 책임자였다. 기사단장은 아니었고, 선임 기사였다.
어쨌든 크릭은 살았다. 하지만 나머지 사람은 아무도 구하지 못했다. 토사물에 뒤덮여 아래로 쓸려 내려갔는데, 어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크릭은 기간트의 손에 잡힌 채 이를 악물고 산사태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바라봤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산사태라니! 그것도 하필이면 지금.
산사태가 완전히 지나갔다. 물론 토사물은 아직도 아래로 계속 내려가고 있었다. 주변을 완전히 초토화시키면서 말이다.
"재앙이 따로 없군."
재앙이었다. 더구나 크릭 입장에서는 대재앙이나 다름없었다. 막막했다. 대체 이제 뭘 어쩌면 좋단 말인가. 만일 이대로 돌아가면 목숨을 부지할 수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천재지변이라지만 실패는 실패였다.
"어떻게 할까요?"
크릭이 멍하니 산사태가 쓸어가 폐허가 된 자리를 바라보고 있을 때, 크릭을 구한 기사가 물었다.
"후우우."
크릭은 대답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뭘 어쩌겠는가. 어쨌든 시작을 했으니 끝을 봐야지.
"유적으로 가야지. 일단 우리라도 가 보세. 공작님께는 나중에 연락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먼저 유적 상태를 파악하고 대책을 세워 보겠네."
크릭의 말에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냥 갈 수는 없었다.
"산사태에 휩쓸린 기간트를 먼저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크릭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세."
기간트를 다시 아공간으로 돌려보내면 아공간 장비만 남게 된다. 그럼 충분히 다 수거해서 나를 수 있었다. 만일 기간트를 통째로 움직여야 했다면 생각할 것도 없이 포기했을 것이다.
쿵! 쿵! 쿵!
4기의 기간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제 함께 온 사람도 없으니 속도에 신경을 쓸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일단 산사태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따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갔다.
☆ ☆ ☆
제론은 유적의 통제실에 앉아 태블릿을 통해 산사태가 크릭 일행을 휩쓸고 지나가는 장면을 확인하면서 감탄을 거듭했다.
"정말 대단하군."
하이쓰 산맥의 날씨를 바꾼 건 제론이었다. 국소 날씨 조절 아티팩트를 이용해 크릭 일행이 비를 맞도록 조작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산의 땅을 무르게 만들었다. 유적의 아티팩트를 이용해 산사태를 일으킬 방법을 계산했고, 특별한 포인트에 정확히 벼락을 떨어뜨려 지반을 흔들었다.
놀랍게도 산사태의 방향과 시간까지 조절이 가능했다. 또한 이동하는 일행의 속도까지 감안해 정확한 타이밍까지 잡아냈다.
쓰면 쓸수록 유적 아티팩트의 성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국소 날씨 변환 아티팩트의 경우 유적 아티팩트의 계산 능력이 더해지면서 훨씬 정교한 조절이 가능해졌다. 또한 다른 마법과 연계해서 이용하는 것까지 할 수 있었다.
이 유적의 유일한 단점은 마티가 없다는 것이었는데, 그조차 하늘로 쏘아 올린 아티팩트를 통해 어느 정도 커버가 가능했다.
"좋아. 그럼 다 처리했으니 슬슬 나가 볼까?"
유적도 등록했고, 태블릿과 유적 아티팩트도 연결했으니 더 이상 이곳에서의 볼일은 없었다. 제론은 통제실에서 로비로 올라갔다.
아무도 없을 때 올라가야 한다. 제론은 천장을 쳐다봤다. 투명한 천장을 통해 유적 내부가 보였다. 쌓인 기간트의 잔해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저것도 가져와야 했다.
유적 간 텔레포트를 이용하면 순식간에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가져갈 수 있었다.
"세나가 참으로 기뻐하겠군."
당사자인 세나가 들으면 경기를 일으킬 만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린 제론은 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곧장 올라갔다.
그리고 아공간을 이용해 쌓인 몰레스의 잔해를 유적으로 옮겼다. 아주 간단한 작업이었기에 거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제론은 천천히 유적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가면서 주위를 둘러보니 그동안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유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나의 흐름이 완벽하게 보이니, 유물 중 어떤 것이 아트팩트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마법 아티팩트는 마나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않았다.
"재미있군."
제론은 마나의 흐름을 통해 어떤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인지 혹시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걸음을 멈추고 아티팩트 하나를 정해서 마나의 흐름을 좀 더 세세히 살폈다.
아주 정확히 파악하지 않으면 효능을 파악할 수 없으니 상당한 꼼꼼함이 필요했다.
마나의 흐름이 가닥가닥 분해되었다.
사실 지금 제론이 하는 것은 보통 마법사가 보면 배를 잡고 웃을 일이었다.
마법을 파악하려면 일단 발현시켜야 한다. 그렇게 해야 주변 마나가 움직이고, 처음 세팅한 길대로 마나가 흐르면서 아티팩트가 작동하는 것이다.
한데 제론은 그런 과정 없이 단번에 마법진을 분석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마법 상식에 비추면 완전히 불가능한 짓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일반적인 마법사가 아니었다. 또한 제론이 가진 마법의 기반은 현재도 고대도 아닌, 초고대의 것이었다. 당연히 보통 마법사와는 달랐고, 일반적인 마법 상식으로 재단할 수 없었다.
제론은 분해된 마나를 통해 실제 발현되었을 때의 길을 유추했다.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어떤 마법이 어느 정도 위력으로 세팅되어 있는지 파악해 냈다.
"기초적인 방어 마법이 자동 발현되도록 세팅이 되어 있군,"
설정된 범위 안에 충격이 들어오면 자동으로 방어 마법이 펼쳐지면서 그 충격을 밀어내도록 만들어진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상당히 복잡한 마법진이었고 규모가 조금 큰 편이었기에 갑옷에 새겨져 있었다. 갑옷 안쪽에 마법진을 새기고 그 위에 얇은 철판을 덧대 교묘히 감췄다.
만일 제론이 아니었다면 이 갑옷에 마법진이 새겨져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고대 유물 중에는 이런 식으로 마법진을 애써 감추는 것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나마 이 갑옷은 마법이 자동으로 펼쳐지지만, 그렇지 않고 다른 조건이 필요한 경우에는 그것이 아티팩트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넘어갈 때도 많았다.
"가만있자…… 이거 생각해 보니까 괜찮은데?"
그 가치를 모르는 유물이나 아티팩트가 상당히 많을 것이다. 그것을 찾아내 헐값에 사들인 다음 가치를 확인해 다시 팔면 어마어마한 이득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다음 코스가 암시장이었으니 거기서 한번 테스트를 해 봐야겠군."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른 아티팩트로 눈을 돌렸다. 조금 더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날 제론은 유적에 전시된 유물 대부분을 샅샅이 파헤쳤다. 물론 단 하나도 손대지 않았다. 모든 마나의 흐름은 제론의 손아귀에 있었다.
그렇게 마나를 파악하면서 제론은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마법의 다음 단계로 반걸음 들어섰다.
☆ ☆ ☆
유적 입구에는 루이네와 예거가 지친 채로 앉아서 쉬고 있었다. 그라우를 심문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시간을 들이니 어떻게든 해낼 수 있었다.
"300명이나 오고 있다니 조금 걱정이 되는군요."
"우리에겐 붉은 학살자가 있잖아요."
루이네는 그 말을 하며 눈빛이 몽롱해졌다. 며칠 전의 싸움은 아직도 그녀의 뇌리에 맺혀 사라지지 않았다. 수시로 눈앞에 그 광경이 떠오르곤 했다.
"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싸울 수 있을까요?"
"저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점프하는 거 보셨죠?"
"봤습니다. 부럽더군요."
지난번 싸움 이후로 제론을 보는 예거의 시선이 완전히 달라졌다. 예전에는 감시를 위해 제론을 쳐다봤지만 이제는 선망이 잔뜩 담겨 있었다.
꼭 그렇게 되고 싶었다. 아마 모든 기간트 라이더가 꿈꾸는 장면일 것이다.
"그래도 에스타스의 압도적인 힘이 있었기에 가능한 거였겠죠? 물론 그 힘을 그렇게 적절히 이용할 수 있는 것도 굉장한 능력이지만요."
루이네의 말에 예거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제가 보기에 에어스트 백작님은 진짜 실력을 조금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 싸움은 마치 뭔가를 연습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일정 이상의 수준에 오른 라이더였기에 예거는 제론의 의도를 약간이나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 놀랐고, 선망하게 되었다.
만일 저 사람이 진짜 실력을 드러내면 과연 어떤 놀라운 힘을 낼 수 있을 것인가. 그걸 기대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둘이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하는 거지?"
두 사람은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셨습니까."
예거가 벌떡 일어나 정중히 인사했다. 그리고 제론은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받았다.
"심문은?"
"다 끝났습니다."
예거는 심문을 통해 알아낸 사실을 자세히 보고했다. 제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예거와 루이네를 다시 봤다. 상당히 정확히 알아냈다. 제대로 심문했다는 뜻이었다.
물론 시간은 좀 걸렸지만 말이다.
"후발대는 크게 걱정할 필요 없어. 이제 슬슬 이 유물을 어떻게 나를지 계획해야지."
제론의 말에 루이네의 표정이 대번에 안 좋아졌다. 대체 이 많은 유물을 어떻게 가져간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대가 되었다. 제론이 이렇게 말을 꺼냈다는 건 대비책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다는 뜻이었다.
"아베티스 영지라고 했나?"
"맞아요."
"대충 위치가 어떻게 되지? 이 하이쓰 산맥에서 좀 먼가?"
루이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네, 상당히 먼 편이에요. 헥서 왕국의 중심부에 위치한 영지니까요."
헥서 왕국도 그리 작은 나라가 아니었다. 하이쓰 산맥에서 그 중심부까지 가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더구나 이런 막대한 양의 유물까지 가지고 가려면 몇 배가 더 걸릴지 몰랐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지."
제론의 말에 루이네와 예거가 침을 꿀꺽 삼켰다. 역시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제론이 대비책을 가져온 것이다.
"내가 알아서 그 영지로 옮겨 준다."
"예?"
루이네가 멍하니 제론을 바라봤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답이었다.
"책임도 내가 지지. 의뢰비만 확실히 지불하면 모든 걸 내가 알아서 해 준다는 뜻이다."
"그, 그럼……."
제론이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계약서였다. 루이네와 예거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대체 언제 이런 것까지 준비했단 말인가.
"나도 신용은 확실한 사람이니 계약에는 문제가 없겠지? 손실분이 있으면 확실히 청구하도록."
제론이 그렇게 말하며 계약서를 내밀었다. 루이네와 예거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 확인했다. 아주 간단한 계약이었고, 조건도 단순했다. 또한 의뢰비도 하는 일에 비하면 턱없이 적었다.
"정말 고작 이걸로 되겠어요?"
"고작이라니. 무려 에스타스인데."
제론이 책정한 의뢰비는 제론이 받아들여 사용한 에스타스였다. 만일 여기 있는 모든 유물을 손실 없이 나를 수 있다면 그 정도 의뢰비야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안 할 건가?"
"해, 해요! 하겠어요!"
루이네는 그렇게 외치고는 역시 제론이 내민 펜을 받아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계약이 성립되었다.
"목록은 작성했지?"
"예. 여기 있습니다."
예거가 미리 작성해 둔 유물 목록을 내밀었다. 제론은 그것을 스윽 훑어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야 한 번 읽기만 해도 외울 수 있었다.
그 다음 목록과 실제 유물을 맞춰 봐야 했다. 어쨌든 이건 계약을 통해 하는 일이었으니 확실한 게 좋았다.
확인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목록은 정확했다.
"자, 그럼 이제 돌아가는 일만 남았군."
"예? 돌아가다니요? 이 유물은 어떻게 하고요?"
제론이 피식 웃었다.
"지금 들고 가자고? 유적 발굴이 그렇게 쉬운 줄 알아? 또 산맥에 있는 유물을 가지고 내려가는데 아무 준비도 없이 가능할 것 같아?"
루이네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그 말이 옳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지금 당장 가지고 가지 않으면 자칫 영지가 넘어갈 수도 있었다.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걱정할 거 없어. 나중에 정 시간이 안 되면 내가 돈을 융통해 주지."
그 말에 루이네는 적잖게 안심했다.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돈이 필요했다. 유적 발굴을 위해 쓴 돈이 상상을 초월했다.
이 유물만 제대로 옮기면 그 정도 돈이야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당장은 목에 닿아 있는 칼이었다. 아차 하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었다.
한데 제론이 돈을 융통해 준다면 급할 이유가 없었다.
"정말인가요?"
"물론. 내가 생각보다 부자거든."
제론은 손뼉을 짝짝 쳤다.
"자, 그럼 이제 가 보자고. 다른 놈들이 유적에 눈독을 들이기 전에 빨리 준비해야지."
제론의 말에 루이네와 예거가 서둘러 떠날 준비를 했다. 딱히 할 건 없었다. 그저 마음가짐을 달리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아! 그라우는 어떻게 하죠?"
루이네의 물음에 제론이 눈살을 찌푸렸다. 설마 죽이지 않았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제론의 시선이 예거에게로 향했다. 예거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루이네 모르게 자신이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뜻이었다. 제론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아베티스 가문의 일이었다. 그라우가 죽건 말건 제론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혹시 영지 근처에 유적이 있나?"
"예? 유적이요? 그, 글쎄요……."
루이네가 머뭇거리며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자 예거가 나서서 얼른 대답했다.
"우리 영지에는 없지만 이웃 영지에 작은 유적이 하나 있습니다."
그 영지는 규모가 너무 작아서 다른 유적에 비해 발굴 후의 소득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곳이었다. 그래서 당시 시끌시끌했었다. 유적을 발굴하느라 쓴 돈을 갚느라 영주의 허리가 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예거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상당히 인상 깊은 경험이었다.
"그래? 그거 잘됐군."
"별로 볼 건 없습니다. 유물도 별로 없던 유적입니다."
"괜찮아. 내가 보고 싶은 건 유물이 아니라 유적이거든."
"유적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아주 많지. 대륙의 모든 유적에 방문하는 것이 내 꿈이야."
루이네와 예거는 그런 말을 하는 제론을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소박하다면 소박하고, 또 힘들다면 힘든 꿈이었다. 하지만 왠지 제론에게 어울리지 않는 꿈 아닌가.
'붉은 학살자의 꿈이 유적 여행이라니…….'
왠지 대륙 정복을 해야 어울릴 것 같은데 유적 정복이라니 이상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러니 이렇게 하이쓰 산맥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 아니겠는가.
'나한테는 다행인 건가?'
루이네는 실망감과 안도감이 뒤섞인 표정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루이네와 예거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제론이 유적을 모두 정복하면 대륙 정복을 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