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 추격대
"끄으응."
예거는 깨질 것 같은 머리를 감싸며 몸을 일으켰다.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그냥 두통만 있는 게 아니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눈을 떠도 시야가 열리지 않았다. 눈물이라도 찬 것처럼 눈앞이 흐렸다. 뿌연 시야를 되찾으려 몇 번이나 눈을 비볐지만 여전히 그대로였다.
"너무 애쓰지 마. 수면 가루의 부작용 중 하나니까.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오히려 회복에 도움이 돼."
예거는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하지만 이내 그것이 제론의 목소리라는 걸 기억해 내고는 시키는 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나저나 왜 말을 놓는 거지?'
하지만 더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뭐가 어떠냐는 생각도 들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론은 그래도 된다. 그는 예거의 은인이자 루이네의 은인이었고, 또 아베티스 가문의 은인이기도 했다.
예거는 가만히 앉아서 멍한 머리를 추스른 다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제론이 한 말 중 하나가 갑자기 마음에 턱 걸렸다.
"수면 가루?"
"호흡을 통해 받아들이면 최소 8시간은 절대 깨지 않고 자게 해 주는 약이지. 아니, 독이라고 하는 게 더 나으려나?"
"대체 그걸 왜 내가 마셨습니까?"
"왜긴, 잠자는 동안 용병들이 가루를 뿌렸으니까 마셨지."
순간 예거의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예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야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균형감이 흐트러져 잠깐 비틀거렸지만 이내 똑바로 서서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봤다.
"용병들이 배신했습니까?"
제론은 대답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살펴봤다. 나머지 두 기사도 슬슬 일어날 기미가 보였다. 하지만 루이네는 일어나는 것이 쉽지 않아 보였다.
수면 가루를 너무 많이 마신 것이다. 수면 가루라는 것이 잠을 재우는 약초이긴 하지만, 부작용이 심각해서 많이 흡입하면 결코 좋지 않았다.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었다.
제론은 마나를 흘려 루이네를 한 번 씻어 주었다. 사실 이들을 지켜보면서 몇 번이나 마나로 몸을 씻어 주었다. 용병들이 수면 가루를 너무 많이 썼다.
만일 제론이 그렇게 해 주지 않았다면 예거도 아직 못 일어났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루이네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잠시 후, 나머지 사람들도 다 깨어났다. 그리고 예거는 완전히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유적 안이로군요."
예거의 말에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 내버려 두면 죽을 것 같더라고."
예거는 유적 입구로 걸어갔다. 그리고 유적 밖에 펼쳐진 참상에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밖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용병들이 얼마나 처참하게 죽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오우거로군."
오우거가 습격한 것이다. 하지만 대체 왜 습격을 한단 말인가. 모닥불로는 몬스터의 습격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예거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제론이 다가왔다.
"저쪽에 있는 구슬 혹시 보이나?"
제론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본 예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큰 구슬이라서 예거의 눈으로도 확인이 가능했다.
"빛을 하늘로 쏴 주는 아티팩트야. 이제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겠지?"
예거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모든 일이 구슬에 실을 꿰듯 짜 맞춰졌다. 이 모든 일의 뒤에는 분명히 나베 공작가가 있을 것이다.
"큰일이로군요."
예거의 얼굴에 걱정과 실망이 드리워졌다. 자신이 자는 동안 나베 공작가의 추격대가 얼마나 열심히 이쪽으로 이동했겠는가. 이젠 그나마 남았던 시간마저 다 사라져 버린 셈이었다.
잠시 후, 루이네와 두 기사가 다가왔다. 그들 역시 심한 두통 때문에 얼굴을 펴지 못했다.
"어떻게 된 일인가요?"
제론은 대답대신 예거를 한 번 쳐다봤다. 예거가 한숨을 내쉬더니 천천히 설명을 해 주었다.
설명을 모두 들은 루이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제 다 끝났다고 여긴 것이다. 이 많은 유물을 눈앞에서 빼앗긴다고 생각하니 심장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이제 어쩌죠?"
루이네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딱히 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라, 그저 한탄과 푸념에 가까운 혼잣말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그 푸념에 답을 해 주었다.
"여기서 기다리면 돼."
"예?"
"여기서 기다렸다가 싹 해치워 버리면 된다는 뜻이야."
루이네가 멍하니 제론을 바라봤다.
"그게 말이 되나요?"
제론은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는 거지?"
"유적이죠."
"그래. 유적이지. 그리고 우리는?"
루이네가 답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대체 제론이 뭘 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유적의 주인이지."
"예?"
"유적의 주인을 유적이 어떻게 지키는지 한번 확인해 봐."
제론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더 이상 설명해 주지 않고 그저 유적 입구를 통해 밖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니 루이네도 제론을 따라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몰라 불안에 떨면서 말이다.
☆ ☆ ☆
나베 공작가에는 굳은 일을 처리하는 비밀 기사단이 존재했다. 이름조차 없는 기사단이었는데, 그라우는 그 비밀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무려 30명의 기간트 라이더로 이루어진 기사단이었는데, 모두 출력 1.8의 기간트인 몰레스를 가진 강력한 기사단이었다.
현재 그라우가 이끄는 비밀 기사단은 기간트를 타고 열심히 하이쓰 산맥을 달리는 중이었다.
어젯밤에 본 새하얀 빛줄기가 있던 곳을 향해 이동 중이었는데, 밤새 달리느라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후욱, 다들 멈춰!"
그라우는 명령을 내린 뒤, 기간트를 돌려보냈다. 그러자 나머지 기사들도 기간트를 돌려보내고 그라우를 중심으로 모였다.
"일단 거의 다 왔으니 여기서 충분히 쉬고 이동한다."
제대로 쉬고 몸 상태를 끌어 올리지 않으면 작전에 차질이 빚어질 수도 있었다.
현재 후속군이 따라오고 있었다. 300명이나 되는 대인원이었다. 기간트를 보유한 라이더도 10명 정도 섞여 있었는데, 그들은 굳이 기간트를 소환하지 않고 도보로 속도를 맞춰 오는 중이었다.
하이쓰 산맥의 몬스터를 상대하려면 그 정도 기간트는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그라우는 수하들이 잠드는 것을 확인하고 누워 눈을 감았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몬스터에 대비해 기간트를 소환한 라이더 몇 명이 불침번을 섰다.
그렇게 내리 8시간을 자 버렸다. 그래도 시간은 충분했다.
잠과 식사를 통해 체력을 회복한 그라우는 다시 기간트를 소환해 이동했다. 거의 근처에 도착한 채로 쉬었기 때문에 빛기둥이 있던 곳까지 가는 데 1시간이면 충분했다.
쿵쿵쿵쿵쿵!
그라우는 공터가 나오자 속도를 높였다. 바로 유적 입구가 보였다. 너무나 훤히 드러난 유적이었다.
"난장판이로군."
유적 주위의 참상을 본 그라우의 감상은 간단했다. 물론 거의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차피 30기나 되는 기간트가 날뛰면 이곳의 지형 자체가 달라질 텐데, 핏자국이나 시체 조각 정도는 흔적도 남지 않을 것이다.
"유적 안쪽에 사람이 보입니다!"
수하의 보고에 그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적 입구는 기간트가 충분히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랬다.
"일단 유적 안으로 들어간다. 유적 내부의 유물이 부서지지 않게 조심해라!"
그라우의 명령에 수하들은 일제히 대답하고 천천히 움직였다. 갑자기 달려가면 안 된다. 유적으로 들어갈 때도 조심스럽게 발을 옮기지 않으면 유물이 부서질 위험이 있었다.
그들은 최대한 부드럽게 움직여 유적 입구에 도착했다.
그라우는 자신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루이네 일행이 안에서 혹시라도 기간트를 소환한 채 있다가 기습할 위험이 있었다.
그러니 가장 실력이 뛰어난 그라우가 앞장서는 것이 나았다.
"음?"
그라우는 인상을 찡그렸다. 뭔가에 막힌 듯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그그그그긍!
기간트의 관절 부분이 비명을 질렀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마치 강력한 바람이 불어 몸을 밀어내는 것 같았다.
그라우는 더욱 기간트의 움직임에 집중하며 힘을 주었다. 그라우뿐 아니라 다른 기사의 기간트 역시 마찬가지로 유적 입구에 들어가지 못했다.
"대체 이게 뭐지?"
너무나 황당했다. 아무것도 없는데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니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30기의 기간트가 4기씩 번갈아 유적 입구로 몸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아무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유적 입구가 제법 크긴 했지만 기간트 4기가 나란히 서서 걸으면 꽉 찰 정도였다.
그라우는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코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보였다. 목표인 루이네였다.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걸 못 하고 있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다들 비켜 봐라."
그라우는 달려가는 힘을 이용해 유적 입구를 막고 있는 무언가를 단번에 부수거나 돌파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기간트들이 뒤로 그리고 좌우로 비켜섰다. 그라우는 뒤로 한참을 물러난 뒤 눈을 빛내고는 다리에 힘을 꽉 주었다.
쿵쿵쿵쿵쿵!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그라우가 탄 기간트가 빠르게 달려갔다. 그라우는 입구에 도착하기 직전에 자세를 살짝 낮추며 어깨를 앞으로 했다. 숄더차지였다.
콰우우!
그라우의 기간트가 입구를 파고들었다. 물론 완전히 들어가지는 못했다. 3미터 정도 밀고 들어갔지만 그게 한계였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기간트의 마나 코어가 비명을 질렀다. 코어가 마나를 마구 발산했다. 그리고 그렇게 발산한 마나가 고스란히 입구를 막고 있는 마나 장막으로 흡수되었다.
퉁!
그라우의 기간트가 입구에서 뒤로 휙 날아갔다. 마치 새총으로 돌멩이를 날린 것 같았다.
꽈과과광!
그라우의 기간트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뒤에 늘어서 있던 동료 기간트들을 덮쳤다. 어찌나 강력하게 덮쳤는지 관절이고 몸통이고 찌그러지고 부서지고 난리가 났다.
다들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봤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라우의 기간트는 물론이고 바닥에 쓰러진 기간트들 모두 다시 일어나기 어려울 정도로 망가져 버렸다.
다들 질린 눈으로 유적 입구를 바라봤다. 들어갈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부서진 기간트 속에서 간신히 나온 그라우가 명령을 내렸다.
"굳이 입구로 들어갈 필요 없다! 일단 유적 주변을 부수고 파헤쳐라!"
그라우의 명령에 남은 기간트가 일제히 움직였다.
일부는 입구로 가서 조심스럽게 힘을 썼고, 나머지는 입구 주변을 주먹으로 치고 땅을 파헤치는 일을 했다.
땅을 얼마 파헤치지도 않아 유적의 표면이 조금씩 드러났다. 유적은 특이한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왠지 그걸 부수면 입구로 들어갈 수 있을 듯했다.
가장 먼저 금속 표면을 발견한 기간트가 주먹을 꽉 쥐고 높이 치켜들었다.
꽈앙! 꽈광!
강렬한 폭음과 함께 기간트의 팔이 떨어져 나갔다. 그렇게 뜯어진 팔이 허공을 날아 다른 기간트의 가슴을 때렸다.
꽝!
쿵쿵쿵!
어찌나 세게 맞았는지 뒤로 몇 걸음이나 물러났다. 그리고 팔이 날아간 기간트를 바라봤다. 모두의 작업이 일제히 멈췄다.
그라우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유적을 공략할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라우는 남은 기간트를 모두 동원해 유적 바닥을 파헤쳤다. 혹시라도 바닥을 통해서 들어가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실패했다. 유적의 바닥도 특이한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입구로 들어가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결국 그라우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후속 지원 부대가 도착하기를 말이다. 거기에는 마법사들이 끼어 있었다. 그들이라면 뭔가 방법을 만들어 줄 것이다.
유적 안에 있던 루이네와 예거는 정말로 깜짝 놀랐다. 유적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설마 기간트까지 막아 낼 줄은 몰랐다.
그냥 막아 낸 게 아니라 무려 4기의 기간트가 부서졌다.
"정말 대단하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런 유적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래도 어딘가에는 비슷한 유적이 또 있겠죠?"
예거가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있을 겁니다. 하지만 비밀로 하겠지요."
이 정도 힘을 가진 유적이라면 그 비밀을 파헤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지식과 기술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걸 공개할 리 없었다. 두고두고 연구하면서 끊임없이 힘을 얻을 것이다. 물론 연구하고 파헤치는 것이 결코 쉽진 않겠지만 말이다.
루이네는 슬쩍 시선을 돌려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은 어디서 구했는지 의자를 가져와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사실 그 상태로 마나 호흡을 하고 있었지만 루이네가 보기에는 졸다가 깨다가 하는 것 같았다.
"저분이 과연 이 유적을 우리가 연구하도록 허락을 해 줄까요?"
루이네의 말에 예거가 살짝 발끈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유적의 주인은 엄연히 아가씨입니다. 아니, 아베티스 가문입니다. 당연히 뭐든 하실 수 있습니다."
예거의 말에 루이네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우리 것이 아니에요. 안의 유물이야 약속에 따라 우리가 가져가겠지만…… 이 유적은 저기 앉은 제론 님의 것이에요."
"아가씨!"
루이네는 단호히 고개를 저어 예거의 말을 막았다.
"이 유적을 찾은 것도, 또 안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제론 님 덕분이에요."
루이네가 똑바로 예거를 바라봤다. 예거는 루이네의 눈빛에 흠칫 놀랐다.
"제론 님이 아니었다면 우린 수면 가루에 당해 저들에게 잡혔겠죠. 그럼 무슨 꼴을 당했을까요?"
루이네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아마 결코 곱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 운명을 제론이 바꿔 주었다. 한데 이제 와서 유적의 주인임을 주장한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우리가 이 유적의 권리를 주장한다면, 우리가 나베 공작가와 다른 게 뭐죠? 전 그건 싫어요."
"아가씨……."
예거는 안쓰러운 눈으로 루이네를 바라봤다. 가슴이 아팠다. 그 대단하던 아베티스 가문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이 유적 안의 유물도 사실 우리 거라고 할 수 없어요. 아닌가요?"
예거는 대답하지 못했다. 솔직히 그도 자신이 한 말이 억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아베티스 가문에 도움이 된다면 뭐든 못 하겠는가.
"하지만 이 유물만큼은 저도 어쩔 수 없네요. 가문을 살려야 하니까요. 다 죽을 수는 없잖아요?"
예거는 고개를 숙였다. 사실 유적을 연구하는 건 나중의 일이었다. 아직 어떻게 될지도 모를 상황을 미리 고민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우선 여기서 살아남고, 유물을 잘 챙겨 아베티스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 먼저였다.
그게 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
"하아. 그나저나 큰일이네요. 유물이 이렇게 많은데 이걸 다 어떻게 가져가죠?"
유물을 가져가는 것도 문제였지만 유적 앞에 진치고 있는 기간트들을 헤치고 무사히 돌아가는 건 더 큰 문제였다. 아무리 고민해도 방법이 없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그냥 기다려."
제론의 말에 루이네가 반사적으로 다시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은 어느새 의자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리고 유적 안쪽으로 걸어갔다.
루이네와 예거는 서둘러 제론을 따라갔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예거가 소리쳤다. 제론은 에스타스 앞에 서 있었다. 마치 이 기간트를 타려고 그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럴 수는 없었다. 이게 어떤 기간트인데 그걸 제론에게 넘긴단 말인가.
제론이 슬쩍 고개를 돌려 예거를 쳐다봤다. 그 눈빛이 어찌나 무심했는지 예거는 흠칫 놀라 뒤로 주춤 물러났다.
"밖에서 기다리는 것들, 네가 치울 건가?"
"그, 그게 무슨……!"
예거가 당황하다가 입을 크게 벌렸다.
"그럼 설마 지금 밖에 있는 자들과 싸우려는 겁니까?"
제론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모합니다! 아무리 4기가 부서졌다고 하지만 무려 26기나 되는 기간트를 어찌 상대한단 말입니까! 우리는 고작 4명입니다!"
제론이 고개를 저었다.
"싸우는 건 나 혼자다. 넌 그냥 구경이나 하고 있어."
"그 무슨……!"
"대충 실력은 파악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제론이 기다린 것은 적의 실력을 대충이나마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라이더라도 상대해 이길 자신이 있었지만, 만일 그런 라이더가 떼로 모인 기사단이라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일례로 얼마 전 싸웠던 소드 마스터 슐린 후작 같은 사람이 한꺼번에 달려들면 이기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그래서 확인했고, 만족했다.
"실력이 딱 너 정도야."
예거가 발끈했다. 하지만 대꾸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보기에도 밖에 있는 기간트 하나하나가 쉬운 상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 반감이 생겼다.
"나 정도 실력이 되는 사람이 26명이나 있습니다. 그걸 정말로 혼자서 상대하겠단 말입니까? 아가씨! 아가씨도 좀……."
예거는 루이네에게 좀 말려 보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루이네의 상태가 좀 이상했다.
"아, 아가씨?"
루이네는 언제 고민했었냐는 듯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제론을 바라보며 두 손을 맞잡았다.
"그, 그럼 제가 정말로 붉은 학살자의 실력을 볼 수 있는 건가요?"
예거는 멍한 눈으로 루이네를 바라봤다. 그리고 퍼뜩 뭔가를 깨닫고는 고개를 돌려 제론을 바라봤다.
"부, 붉은 학살자?"
예거의 머리가 놀라운 속도로 팽팽 돌아갔다.
"그러고 보니 제론이라는 이름이……."
제론의 성을 들은 사람이 루이네뿐이라서 그렇지, 만일 풀네임을 들었다면 예거도 당장 붉은 학살자를 떠올렸을 것이다.
"저, 정말 붉은 학살자입니까?"
붉은 학살자는 헥서 왕국에서 기간트를 타는 라이더라면 누구나 만나기를 꿈꾸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예거를 비롯한 기사들의 눈빛부터가 달라졌다. 그리고 제론의 대답을 기다렸다.
제론은 그들에게 답을 해 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실력으로 보여 주게 될 테니까.
예거는 제론이 에스타스에게 다가가자 기대감 어린 눈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자그마치 붉은 학살자가 싸우는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붉은 학살자는 혼자서 적진을 휩쓸고 다녔다던 전설적인 라이더였다. 그런 라이더가 기간트를 몰고 싸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떨렸다.
예거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침을 꿀꺽 삼키고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은 피식 웃고는 훌쩍 뛰어 에스타스의 조종석에 바로 앉았다. 대단한 몸놀림이었다.
"역시!"
루이네와 예거는 동시에 외쳤다. 역시 붉은 학살자였다. 기간트에 탑승하는 모습부터 달랐다. 저렇게 멋지게 조종석에 앉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키이이이이잉!
에스타스가 기동을 시작했다. 눈이 빛났고 가슴의 마나 코어가 돌아가면서 온몸에 마나를 공급했다.
쿠웅!
에스타스가 한 발 걸었다. 제론은 그 한 번의 움직임으로 에스타스를 완벽히 자신의 감각 아래 두었다. 확실히 실바보다 훨씬 뛰어난 기체였다.
물론 세나가 새로 만들어 준 실바보다는 못했지만 말이다.
쿵! 쿵! 쿵!
에스타스가 천천히 걸어갔다. 루이네와 예거의 시선을 뒤로한 채.
그라우를 비롯한 기사들은 기간트를 돌려보내고 입구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쉬고 있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입구를 지키는 것이다.
"음?"
그라우가 벌떡 일어났다. 뭔가 미세한 진동을 느낀 것 같았다. 이건 아주 익숙한 진동이었다.
"기간트?"
그로우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또 진동이 왔다.
쿵! 쿵! 쿵!
규칙적인 진동과 함께 작은 발 구름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확인할 것도 없이 기간트가 걷는 소리였다.
"기간트가 온다! 준비해!"
그라우의 명령에 기사들이 일제히 일어나 기간트를 소환했다. 26기의 몰레스가 일제히 나타났다.
그들은 긴장한 눈으로 사방을 살폈다. 그라우는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커다란 바위 위로 올라가 주위를 둘러봤다. 소리와 진동은 느껴지는데 대체 어디서 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쿵! 쿵! 쿵!
소리와 진동이 점점 커졌다. 그라우는 이제야 기간트가 어디서 오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의 시선이 유적 입구로 향했다.
쿠웅!
유적 입구에서 에스타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에스타스!"
그라우가 외쳤다. 이 유적에 있던 기간트가 분명했다. 발굴형 기간트인 에스타스의 출력은 무려 3.0이었다. 게다가 각종 부품이나 관절의 움직임 등, 전투에 필요한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잘 갖춰져 있었다.
에스타스를 일반 기간트로 이기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렇게 수가 차이 나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뭐야? 고작 하나? 그걸로 감히 우리와 싸우겠다고?"
그라우는 에스타스에 탄 라이더가 예거라고 생각했다. 루이네를 지키는 기사 중 가장 충직한 자가 바로 예거였다. 또한 강하기도 했다.
기간트 실력은 대단치 않지만 그렇다고 어설프지도 않았다. 딱 적당한 수준이었다. 그라우가 거느린 기사단의 말단 기사 정도의 실력이었다.
그런 실력을 가진 예거가 아무리 에스타스를 탔다고 해도 26기나 되는 몰레스를 상대로 싸우는 건 불가능했다.
몰레스의 출력도 무려 1.8이나 된다. 몰레스 3기가 덤비면 에스타스라 하더라도 쉽게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한데 여기는 3기가 아니라 26기나 있다.
이건 싸우나 마나 결과가 정해져 있었다. 적어도 그라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상대가 에스타스건 히엠스건 상관없다! 우리는 수가 많아! 뭣들 하나! 어서 가서 부숴 버려!"
유적의 유물 중 하나인 에스타스가 부서지는 건 상당히 아까웠지만 그래도 기사단이 당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몰레스도 결코 값싼 기간트가 아니었다.
쿵쿵쿵쿵쿵!
26기의 몰레스가 진형을 만들며 빠르게 이동했다. 서서히 포위망을 만들며 에스타스가 움직일 길목을 하나씩 가로막았다.
제론은 에스타스에 탑승한 채로 주위를 둘러봤다. 몰레스의 움직임을 보면 집단전 훈련을 상당히 많이 한 자들이었다. 강력한 기간트 하나를 상대로 싸워 본 경험이 많은 듯했다.
물론 제론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자신감과 투지가 활활 타올랐다.
이번에는 에스타스의 강력한 출력을 확실히 이용해 볼 생각이었다. 출력 차가 무려 1.2나 난다. 에스타스는 굉장한 힘으로 몰레스를 밀어붙일 수 있었다.
에스타스가 움직였다. 옆으로 한 발 이동하는가 싶더니 그대로 앞으로 뛰어나갔다.
꽈앙!
에스타스가 허공에 붕 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만나면 잠깐 동안 판단력을 상실한다.
물론 찰나의 순간이기에 그걸 이용하는 건 쉽지 않았다. 하지만 기간트에 탄 제론은 그런 걸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났다.
꽈과광!
가장 앞에 있던 몰레스 3기가 바닥을 뒹굴었다. 에스타스는 가볍게 착지해 균형을 잡으며 옆에 있던 몰레스의 목을 꽉 움켜쥐었다.
꽈득!
몰레스가 당황하며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에스타스의 악력은 그 정도로 해결할 수 없었다.
에스타스는 몰레스가 좌우로 몸을 흔들자, 그 힘을 이용해 몰레스를 휙 들어 돌렸다.
콰우우!
꽈아아아앙!
옆에서 달려들던 몰레스와 에스타스가 휘두른 몰레스가 충돌했다. 어찌나 오지게 부딪쳤는지 두 기체가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건 기본이었고, 조종석도 완전히 뭉개져 버렸다.
몰레스의 목을 손에서 놓은 에스타스가 옆으로 두 걸음 빠르게 이동했다.
쿵쿵! 후웅!
에스타스가 있던 곳을 몰레스의 검이 훑고 지나갔다.
그 순간 에스타스의 검이 쭉 뽑히며 몰레스의 목을 쳤다.
철컹!
몰레스의 목이 떨어져 나갔다. 그 일격으로 몰레스가 기동을 멈췄다.
일단 검을 뽑은 에스타스는 무시무시했다.
몰레스 2기가 에스타스를 향해 각각 다른 방향에서 검을 휘둘렀다.
에스타스는 그것을 보며 빠르게 몸을 회전시키며 크게 검을 휘둘렀다.
철컹! 철컹!
몰레스의 검이 잘려 버렸다. 에스타스의 높은 출력과 제론이 가진 소드 마스터의 능력이 상승 작용을 일으켜 만들어 낸 결과였다.
에스타스가 다시 회전하며 검을 휘둘렀다.
꽝! 꽝!
몰레스 두 기의 머리가 완전히 으깨져 날아갔다. 당연히 기동은 정지되었다.
다들 에스타스의 강력한 힘에 완전히 질려 버렸다. 이런 상대와 싸우려면 힘을 흘리거나 이용해야 하는데, 그 정도 기량을 가진 라이더가 아무도 없었다.
에스타스는 그 뒤로도 압도적인 힘을 보여 주었다. 달려들어 발로 가슴을 차고 검으로 머리를 찍어 반으로 갈라 버리거나, 엄청난 힘으로 상대를 밀어붙여 벽에 붙여 놓고는 정확히 조종석을 꿰뚫어 버렸다.
그라우는 멍하니 에스타스와 수하들의 싸움을 지켜봤다. 너무나 압도적이라 오히려 후련했다. 물론 그건 잠시였고, 결국 두려움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꽝! 꽝! 꽝!
기간트가 부서지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그때마다 처참한 몰골이 된 몰레스가 바닥에 푹푹 쓰러졌다.
결국 26기의 몰레스가 다 쓰러졌다. 에스타스는 몸에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실바로 싸웠어도 이겼을 텐데 몰레스를 썼으니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에스타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라우를 향해 걸어갔다.
쿵! 쿵! 쿵!
그라우는 에스타스의 발이 바닥을 울릴 때마다 심장이 덜컥덜컥 내려앉았다.
에스타스가 손을 뻗어 그라우를 가볍게 쥐었다. 그라우는 옴짝달싹 못하고 에스타스의 손아귀에 잡혀 발버둥 쳤다.
"이거 놔라!"
그라우의 외침에도 에스타스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아무도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이들은 슈린 공작가의 배후에 있던 놈들과 한패였다. 당연히 응징이 필요했다.
에스타스가 옆에 쓰러진 몰레스로 다가갔다. 그리고 발끝으로 조종석이 있는 곳을 강하게 내질렀다.
쩡!
그 일격에 라이더가 즉사했다.
에스타스는 그 뒤로도 몰레스를 하나하나 찾아가 발로 조종석을 차서 라이더를 죽였다.
쩡! 쩡! 쩡! 쩡!
그라우는 그 광경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두려움에 덜덜 떨었다. 이렇게 단호히 손을 써서 라이더를 죽일 줄은 몰랐다.
에스타스가 마지막으로 자기 주먹만 한 바위를 들었다. 그리고 한쪽을 향해 강하게 던졌다.
콰우우우우!
꽈아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바위가 널려 있던 곳이 완전히 박살 났다. 수많은 바위가 부서졌고, 또 바닥이 움푹움푹 파였다.
그라우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그곳은 기간트를 잃어버린 기사들이 숨어 있던 곳이었다. 한데 바위 하나에 몽땅 죽어 버렸다.
이제 남은 건 그라우 하나였다.
에스타스는 그라우를 손에 쥔 채 느릿느릿 돌아다니며 바닥에 널브러진 몰레스를 주웠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하나 유적 안으로 날랐다.
아무리 부서진 기간트였지만 이런 걸 쉽게 버릴 이유가 없었다. 세나에게 가져가면 완전히 새것처럼 고쳐줄 테니까 말이다.
잠시 후, 유적 앞 공터가 깨끗해졌다. 기간트의 잔해도 없었고, 싸움의 흔적도 모두 사라졌다. 에스타스가 돌아다니며 한 일이었다.
유적 가장 깊은 곳에 몰레스의 잔해가 쌓였다. 그리고 유적 입구에는 온몸이 꽁꽁 묶인 그라우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몸이 묶여 제대로 자세도 잡지 못했다.
"저 사람은 왜 잡아 온 건가요?"
루이네가 물었다.
제론은 루이네 옆에서 충격을 받은 얼굴로 멍하니 자신만 바라보는 예거를 향해 피식 웃어 주고는 대답했다.
"혹시 아는 게 있을지 몰라서."
"아는 거라뇨?"
"이 정도 유적을 발굴하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예? 그, 글쎄요. 그야……."
루이네는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그런 건 하나도 조사하거나 준비하지 않았다. 그저 무작정 유적을 찾아서 발굴하겠다는 마음 하나만 가지고 여기까지 왔다.
이 무슨 대책 없는 멍청한 짓이란 말인가.
"마법사도 있어야 하고, 발굴 장비도 있어야 돼. 그리고 전문가가 필요하지."
루이네의 머릿속이 환해졌다.
"그리고 많은 인력이 필요하겠군요!"
"그렇지."
"그럼……."
"그래. 저놈들 뒤를 쫓아오던 후속 부대가 분명히 있어. 그 정보를 좀 캐 봐."
"예? 제, 제가요?"
"그래. 난 좀 쉬었다가 할 일이 있어. 그러니 확실히 정보를 알아내."
제론은 그 말을 뒤로하고 유적 깊은 곳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제야 제대로 시간이 생겼다. 진짜 유적에 들어갈 시간이 되었다.
원래는 훨씬 일찍 끝냈어야 할 일인데, 계속 일이 생겨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별로 급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슬슬 궁금증을 풀 때가 되었다. 과연 이 깊은 산맥에 있는 유적에는 어떤 것이 있을지 말이다.
루이네와 예거를 비롯한 두 호위 기사는 그라우로부터 정보를 얻어 내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제론은 그것을 확인하고는 유적 깊은 곳으로 서둘러 움직였다. 자신이 초고대유적으로 가는 모습을 저들에게 보여선 안 된다. 그건 자신만의 비밀이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