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루이네의 선택
나베 공작가는 헥서 왕국에서도 손가락에 꼽히는 가문이었다. 금전적 부유함은 물론이고 권력도 엄청났다. 꼭 레늄 왕국의 슈린 공작가 같은 곳이었다.
또한 그 성향도 비슷했다.
나베 공작은 수하들의 보고를 쭉 들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유적을 찾을 가능성은?"
"반반입니다."
"반반? 가능성이 그렇게 높아? 하이쓰 산맥이 그리 만만치는 않을 텐데?"
"하지만 기간트를 동원할 수 있으니 가능성이 제법 높습니다."
"그건 곤란해. 추적은 하고 있나?"
"산맥에 들어간 지점을 확인했습니다."
"인원을 넉넉하게 준비해서 바로 추격해. 유적을 찾으면 우리가 가로챈다."
"알겠습니다."
나베 공작은 물러가는 수하들을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아베티스 가문을 지워 버릴 수 있겠군. 속이 다 후련해. 흐흐흐흐."
나베 공작은 아베티스 영지를 꿀꺽 삼킬 생각을 하니 마음이 꽉 차는 것 같았다. 아마 당분간은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리라.
또한 유적을 발굴하면 거기에서 나올 유물도 엄청날 것이다. 거기서 어떤 기간트가 얼마나 나오느냐가 중요하겠지만 고대 문헌을 통해 얻은 정보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최상급 기간트가 다수 있을 확률이 높았다.
만일 그걸 얻게 되면 나베 공작가는 날개를 달 것이다.
그것만 생각하면 나베 공작은 가슴이 떨려 왔다. 만일 자신의 계획대로만 된다면 왕이 될 수도 있었다. 설사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왕국에서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권력을 다질 수 있었다.
나베 공작은 느긋하게 소파에 몸을 묻었다. 상당한 전력을 투입할 계획이었다. 이제부터는 그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나베 후작의 입가에 지극히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 ☆ ☆
다음날 아침, 제론은 일행 중 가장 먼저 일어났다. 제일 훌륭한 잠자리에서 편안하게 잤기에 피로를 싹 풀 수 있었고, 또 소드 마스터가 된 이후로 잠이 상당히 줄어들었다.
온몸을 휘도는 마나 덕분에 피로가 잘 쌓이지 않았고, 체력이 잘 소진되지 않았다.
잠자리를 깨끗이 정리한 제론은 가볍게 검을 수련한 다음 네로를 이용해 몸을 씻었다.
더없이 상쾌한 기분이 되어 루이네 일행이 잠든 곳으로 향하려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뭐지?"
소드 마스터의 감각을 건드리는 뭔가가 있었다. 근처에 누군가 숨어 있는 건 아니었다. 암살자는 암살자 특유의 음습한 살기를 갖고 있었기에 근처에 다가오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설사 암살자가 아니더라도 소드 마스터인 제론의 감각을 속이고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제론의 감각을 건드린 것은 아주 멀리 있었다. 제론은 그걸 확인하고 잠깐 당황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능력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감각이 어디에서 기인하는 건지 알아차렸다. 기간트였다.
"확실히 기간트 쪽으로 능력이 특화된 기분이야."
다른 건 몰라도 기간트가 얽히면 제론은 가진 능력 이상을 발휘한다. 지난번 소드 마스터인 슐린 후작과의 대결도 비슷했다.
제론은 당시 실바로 소드 마스터가 모는 히엠스를 이겼다. 그것도 아주 깔끔하게 말이다.
사실 그건 제론의 능력이 대단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당시 제론의 감각이 평소 이상으로 날카로웠기 때문이었다. 그 대결을 통해 제론의 능력이 살짝 올라갔을 정도였다.
"그나저나 기간트가 여긴 웬일이지?"
누군가 기간트를 가동해 산맥을 들쑤시고 있었다. 아마도 산맥의 오우거와 싸우는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하긴, 생각해 보면 슈린 공작 같은 놈이 순순히 유적을 찾게 놔둘 리가 없지."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아마 슈린 공작이었다면 훨씬 빨리 손을 썼을 것이다. 그것도 아주 잔혹하게.
제론은 잠시 고민했다. 저들을 과연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결론은 간단했다. 서둘러서 먼저 유적을 찾으면 된다.
유적만 찾으면 저들의 움직임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 수 있게 된다. 또한 국소 날씨 조절 아티팩트를 이용하면 저들에게 재앙을 내릴 수 있었다.
산맥에서 혹독한 날씨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똑똑히 확인할 기회이기도 했다.
제론은 걸음을 서둘렀다.
모닥불은 불씨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 루이네 일행이 옹기종기 붙어서 잠들어 있었다.
그나마 루이네는 유일한 여자이기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예거와 호위 기사들이 준비한 잠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물론 그래 봐야 불편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제론은 진득한 마나를 강하게 흘려보냈다.
화아악!
마나가 파도처럼 루이네 일행에게 쏟아졌다.
가장 먼저 잠에서 깬 것은 예거였다. 예거는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 주위를 경계했다. 제론이 흘린 마나는 차가운 성질을 가졌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일어났다.
루이네는 가장 나중에 일어났다. 고민하느라 밤을 새우고 조금 전에 깊이 잠들었기에 반응이 가장 늦었다. 하지만 그녀도 일어난 즉시 정신을 번쩍 차렸다.
제론은 루이네에게 다가갔다.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적이 여기까지 들이닥치기 전에 서둘러 움직여야만 했다.
물론 당장 오지는 못할 것이다. 차근차근 추적해 오면 최소한 이틀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유적을 찾으려면 서둘러야만 했다.
"선택은?"
제론의 물음에 루이네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요. 도와주세요."
루이네는 자심의 감을 믿기로 했다. 제론은 결코 약속을 어길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리고 다행히 제론은 그녀가 충분히 믿어도 되는 사람이었다.
"좋아. 그럼 빨리 정리하고 출발하지. 다들 정리하는 동안 넌 정보를 말해."
루이네가 주위를 둘러보며 눈을 빛냈다.
"다들 들었죠? 서둘러 주세요."
용병들은 루이네의 말에 서둘러 주변을 정리했다. 하지만 예거와 호위 기사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가씨, 이게 무슨 일입니까?"
예거가 제론을 노려봤다. 이건 명백히 저자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우리 아가씨께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결코 용납지 않겠소. 이건 아가씨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아베티스 가문의 문제요."
제론이 눈살을 찌푸리며 루이네를 쳐다봤다.
"그 정도 권한도 없었어?"
"말을 가려 하시오!"
예거가 불같이 화를 내며 앞으로 나섰다. 그의 몸에서 투기가 넘실댔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켰다.
제론은 예거 쪽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예거 같은 사람 100명이 달려들어도 제론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었다.
예거는 이제 갓 익스퍼트가 된 기사였다. 제론의 입장에서는 익스퍼트도 아니었다. 그저 견습 기사 정도에 불과했다.
견습 기사 수백 명이 달려들어 봐야 소드 마스터를 당해 낼 수는 없었다.
"이쯤에서 확실히 하지. 솔직히 도와주고 싶긴 한데, 시간이 많지 않아."
루이네는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모든 결정 권한은 제게 있어요. 그렇지 않은가요? 예거 경?"
루이네의 말에 예거가 흠칫 놀라며 뒤로 한 발 물러났다. 그의 투기는 벌써 사라지고 없었다. 예거는 당황한 표정으로 루이네를 바라봤다.
"아가씨……."
"예거 경, 이번에는 절 믿어 주세요. 그러실 수 있으시죠?"
루이네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어쩌겠는가. 예거는 정중한 자세로 가슴에 주먹을 대고 살짝 허리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아가씨. 전 아가씨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고마워요."
루이네가 생긋 웃었다. 그리고 제론에게 자신이 가진 모든 정보를 넘겼다. 사실 별건 없었다. 하지만 제론은 그걸 듣고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로 범위를 좁힐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유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감각에 의지해 초고대유적으로 텔레포트하지 않고 그저 에너지의 흐름만 파악해서 고대유적을 찾는 것도 가능했다.
"서두르지."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산맥에 들어선 기간트의 움직임이 점점 활발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제론은 엄청난 강행군을 했다. 솔직히 혼자서 움직였으면 도착해도 벌써 도착했을 것이다. 하지만 10명이 넘는 일행이 따라붙으니 그들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따라가는 자들은 그야말로 죽을 지경이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꼴딱 넘어갈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제론이 멈추질 않으니 기절 일보 직전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아침 일찍 출발했는데,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그동안 한 번도 안 쉬었으니 얼마나 지독한 강행군을 했는지 알 수 있다.
해가 완전히 졌다. 깜깜해서 코앞도 분간이 안 됐다. 사람들은 이제야 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뇌리에 휴식이라는 두 글자가 스쳐 지나간 순간 밝은 빛이 확 터져 나왔다.
"마, 마법등……."
제론이 휴대용 마법등을 켰다. 그것도 하나가 아니라 무려 5개나 켰다. 주변이 환해졌다. 제론은 멈추지 않고 걸었다.
예거는 가는 내내 루이네를 신경 썼다. 사실 일행에서 가장 힘든 사람은 루이네였다. 다들 건장한 사내들이었지만 루이네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루이네는 예거의 생각과 전혀 달랐다. 그녀는 누구보다 강단이 있었고, 인내력이 뛰어났다. 루이네는 묵묵히 이를 악문 채, 걷고 또 걸었다.
사내들도 나가떨어질 상황에 루이네는 멀쩡해 보였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결국 걷다가 밤이 지나가 버렸다. 환하게 날이 밝아 왔다. 그리고 드디어 제론이 걸음을 멈췄다.
"다들 수고했다. 지금부터 푹 쉰다."
제론의 말에 다들 일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대로 누워서 눈을 감았다. 20명이 넘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루이네는 물론이고 예거까지 잠들어 버렸다. 그만큼 힘든 강행군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온 덕분에 적과의 거리를 상당히 벌릴 수 있었다.
"그럼 슬슬 찾아볼까?"
여기까지는 딱 루이네의 정보를 토대로 찾아온 길이었다. 이제부터는 제론의 감각으로 유적을 찾아내야만 한다. 제론은 감각을 예리하게 가다듬었다.
그간 수도 없이 연습과 실전을 거쳐서 그런지 순식간에 초감각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제론의 입가에 길다란 미소가 걸렸다. 정말로 제대로 찾아왔다. 루이네가 가진 정보는 진짜였다. 그것도 상당히 정확했다.
초감각의 영역에 들어가자마자 희미한 에너지의 흐름이 느껴졌다. 익히 경험한 적이 있는 패턴의 에너지였다. 이것이 바로 초고대유적의 에너지 흐름이었다.
제론은 조심스럽게 에너지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며 걸음을 옮겼다. 에너지가 흘러나오고 있는 장소를 찾아내면 바로 거기가 고대유적일 것이다.
어렵지 않았다. 워낙 첫 위치를 잘 잡았기에 유적을 찾아내는 데 2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그나마 유적 입구를 찾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모했다. 만일 유적 입구를 바로 찾았다면 30분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게 간단히 찾을 수 있는데 말이야."
제론은 새삼 유적에 대한 정보를 모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인에게 말하면 알아서 해결해 줄 것이다. 문득 바인에게 과부하가 걸리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뭐 힘들면 얘기하려나? 아니, 알아서 해결하려나?"
바인은 충분히 알아서 그런 걸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제론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정보에 대한 또 다른 재능을 가진 사람에게로 흘러갔다. 바로 프로인트였다.
프로인트는 그림자의 정령 스키아를 가지고 정보 수집을 했다. 또한 그렇게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원하는 것을 정확히 집어냈다. 그것은 분명히 재능이었다.
'프로인트를 바인한테 보내 볼까?'
어쩌면 둘이 조화만 잘 이루면 훨씬 큰 힘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제론은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유적 입구를 가리고 있는 커다란 바위를 옆으로 치워 버렸다.
쿠구구구궁!
바위는 기간트를 동원하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무거웠지만, 제론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다.
제론은 조금 힘겹긴 했지만 크게 어렵지 않게 바위를 치워 버렸다. 유적 입구는 거대한 철문으로 막혀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루이네와 함께 들어가는 것이 좋을 듯했다.
"괜한 오해를 받을 필요는 없으니까."
어차피 유적 안에 있는 유물에는 관심이 없었다. 제론에게는 유적 아래에 있는 초고대유적이 중요했다. 그 안에 어떤 선물이 있을지가 훨씬 더 궁금했다.
제론은 위치를 확인하고는 서둘러 일행이 잠든 곳으로 돌아갔다.
"예? 차, 찾았다고요? 벌써요?"
루이네는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건 다른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실 그 정보만으로 유적을 찾는 건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적어도 몇 달은 탐색을 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루이네는 각오를 다지고 왔다. 어떻게든 1개월 안에 승부를 보겠다고 말이다.
한데 잠깐 자고 일어나니 벌써 유적을 찾아 놨다고 하니 믿을 수가 없었다.
"시간 없으니 빨리 움직이지."
제론의 말에 다들 멍한 얼굴로 자리를 정리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해도 가지 않았다.
다들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예거가 제론에게 다가갔다. 그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제론을 보며 물었다.
"정말로 유적을 발견했소?"
제론은 그를 힐끗 쳐다봤다. 굳이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저 사람들을 유적까지 데리고 가면 그만이었다.
제론의 머릿속은 뒤에서 슈린 공작가와 나베 공작가를 움직인 자들을 어떻게 찾아서 응징할지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예거는 눈살을 찌푸렸다.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강하게 나갈 수가 없었다. 일단 자신들을 오우거로부터 구해 준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고, 또 루이네의 말을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제론은 예거가 자신을 어떻게 쳐다보건 무슨 생각을 하건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떠날 준비가 다 끝난 것이다.
제론은 천천히 걸었다.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느긋하게 걸어도 1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다들 제론의 뒤를 따르면서도 반신반의했다. 뭔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제론을 만난 이후 겪은 일은 대부분 말이 안 되는 것들이었다.
일단 제론은 오우거들을 혼자 유인해 떼어 내 버렸다. 그건 아무리 강하고 빠른 사람이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데도 제론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해냈다.
또 제론은 일행에게 따뜻한 불과 씻을 물을 제공했다. 마치 없었던 샘이 나타난 것 같았고, 자신들이 지금까지 몬스터에 대해 정말로 무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무지막지한 행군을 통해 인간에게는 한계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게다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단 한 번도 몬스터를 만나지 않았다. 하이쓰 산맥에서 이렇게 빠르고 거칠게 이동하는데 몬스터를 만나지 않았다는 건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해 보면 어느 하나 간단한 것이 없었다. 아니, 모두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데 거기에 하나 더 추가된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넘어갈 수가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유적이었다. 유적은 아무리 드러난 곳에 위치해도 찾기가 어려웠다. 또 찾은 뒤 개발도 만만치 않았다.
한데 그걸 잠깐 자고 일어난 사이 찾아 놨다고 하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유적 개발 역시 제론의 도움을 받으면 예상과 달리 아주 간단히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묘한 기대감이 생겨났다.
1시간쯤 이동하자, 거대한 철문이 보였다. 완전히 드러나 있었다. 다들 멍하니 그걸 바라봤다. 무슨 유적이 이렇게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단 말인가
이런데도 지금까지 발견되지 못했다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었다. 하이쓰 산맥이 비록 험하고 몬스터가 무서워 사람이 잘 드나들지 않지만, 아예 인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노련한 약초꾼이나, 탐험가들은 종종 산맥을 헤집고 다닌다. 한데 이런 거대한 철문이 그들의 눈을 피해 갔다? 그건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제론에게로 향했다. 다들 같은 의문을 담고 있었다.
제론은 시선을 돌려 철문 옆에 놓인 거대한 바위를 쳐다봤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 바위로 향했다. 그렇게 잠시 바라보다가 다들 입을 쩍 벌렸다.
"설마 저 바위가 이 문을 막고 있었던 건가요?"
제론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이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제론을 바라봤다.
"기간트를 가지고 계신 건가요?"
제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기간트를 가지고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건 아직 대외적으로 대놓고 드러낼 수 없는 기간트였다. 테오스였으니까.
제론의 붉은 실바는 영지에 놓고 왔다. 붉은 실바를 타는 모습도 웬만해선 보이기 싫었다. 기간트 때문에 자신의 행적이 외부에 크게 드러나는 걸 원치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저 문을 여는 것 아닌가?"
제론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철문으로 향했다. 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다. 척 보기에도 쉽게 열릴 것 같지 않았다.
"방법을 찾아보죠."
여기서부터는 자신의 힘으로 하고 싶었다. 그래서 루이네는 예거와 상의를 했다.
"기간트의 힘으로 열면 안 될까요?"
"보통 이런 식으로 닫힌 유적은 특별한 암호 체계를 따라 열지 않으면 트랩이 발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유적에 대해 상당한 조사를 했기에 예거는 자신이 아는 내용을 줄줄 읊었다.
"대신 문만 제대로 열 수 있다면 발굴이 훨씬 쉽습니다. 문을 여는 것 자체가 주인으로 인정된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도둑이 문을 열면 어쩌려고 이렇게 만들었을까요?"
"자신감이죠. 보통 이런 경우 유적의 원래 주인이 상당한 위치에 있던 인물인 경우가 많습니다. 최소한 후작 이상의 작위를 가진 사람이 만든 유적일 겁니다."
"안에 보관된 유물도 엄청나겠군요."
"보통은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문을 여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고대에는 지금보다 마법이 훨씬 발달해 있었다. 그런 곳에서 뚫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뜻이니 얼마나 열기가 어렵겠는가.
그래서 보통 이런 경우는 문을 부수고 안의 트랩을 하나하나 경험하고 제거하면서 유적을 발굴해 나간다.
하지만 그 와중에 상당히 많은 유물이 유실되곤 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얻는 유물이 엄청났지만 말이다.
"문을 부수고 차근차근 트랩을 해체하는 것이 정공법입니다."
루이네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래선 안 돼요. 우리는 그렇게 할 시간도 능력도 없어요."
사실 유적을 발굴해도 문제였다. 여기서 유물을 안전하게 아베티스 영지까지 가져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중간에 나베 공작가에서 보낸 놈들이라도 만난다면 자칫 유물을 빼앗길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럼 일단 다 문에 붙어서 문을 열 방법을 찾아보죠."
루이네는 그렇게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그리고 만일 나베 공작가 사람들이 이곳에 들이닥치면 강제로 문을 열어 트랩을 발동시키고 말이다.
다들 문에 바짝 붙어서 이것저것 만져 보고 살펴보고 난리가 났다. 하지만 제론은 조금 떨어진 곳에 가만히 서 있었다.
루이네나 예거는 오히려 그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이 문을 여는 방법까지 제론이 찾아내면 자신들은 정말 아무것도 하는 게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달리 제론은 철문 전체를 쭉 훑어보고 있었다. 소드 마스터의 시력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마치 코앞에 철문을 들이대고 보는 것처럼 자세히 확인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흐음."
제론은 눈을 빛내며 턱을 쓰다듬었다. 이 유적의 주인이 누구이고, 왜 이런 철문을 만들었는지 알아냈다.
그 이유는 아주 당당하게 철문에 한가득 써 놓았다. 그것도 직접. 유적의 주인은 검을 이용해 고대어로 그 내용을 잔뜩 휘갈겨 놓았다.
철문의 재질은 그냥 강철이 아니었다. 특수한 금속을 섞어 만든 합금이었다. 고대에도 쉽게 구하기 어려운 금속이었다.
한데 그런 금속에 아무렇지도 않게 검으로 글을 새겨 넣었다는 것은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글의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나를 이기는 자, 모든 걸 가지리라.
이보다 더 간단한 방법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누구도 성공시키기 어려웠다. 이 유적을 만든 사람은 고대에도 거의 없었던 진짜 소드 마스터였다.
'아마 기간트를 동원해도 문을 여는 게 쉽지 않겠어.'
문과 유적을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런 곳을 기간트로 간단히 부수고 들어갈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무리 봐도 알 수 없네요. 문에 쓰여 있는 글이 힌트가 될 것 같긴 한데……."
다들 어렴풋이 그런 걸 느끼긴 했다. 하지만 문에 그려진 글이 그저 단순히 문양일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루이네가 반사적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이 그녀의 시선을 받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유적의 시험을 통과하면 문을 열 수 있다고 써 있군."
루이네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설마 고대어도 읽을 수 있나요?"
"공부 좀 했지."
말도 안 된다. 공부 좀 한다고 누구나 고대어를 읽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니, 고대어를 자유자재로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은 현재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고대어는 어렵고 난해했다. 학식이 뛰어난 유명한 학자들도 버거워하고 고개를 내젓는 것이 바로 고대어였다.
고대어는 문자 하나하나가 마치 암호처럼 되어 있어서 그저 단순한 문장 하나를 해석하는 것도 어려웠다.
똑같은 문장이라 해도 몇 가지 미묘한 차이에 의해 완전히 다른 뜻이 되어 버리곤 했다.
그러니 루이네가 놀라는 건 당연했다. 아니, 루이네뿐 아니라 모두가 놀랐다. 그리고 일부는 제론이 거짓을 말했다고 생각했다. 상식에 비추어 보자면 당연히 제론의 말은 거짓이어야 한다.
"그 해석, 확실합니까?"
예거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론은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서는 말했다.
"누가 먼저 시험에 도전할 건가? 방법은 내가 알려 주지."
제론의 말에 예거가 나섰다. 제론은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철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철문의 이음새 한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길 검으로 찌르면 시험이 시작된다. 시험이 어떤 건지는 나도 몰라.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다. 각오는 되어 있나?"
제론의 말에 예거가 가슴을 쫙 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아가씨를 위해 죽을 각오는 언제든 되어 있습니다."
예거는 어느새 자신이 제론에게 공손한 말투를 쓰고 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했다. 너무 긴장한 것이다.
"후우욱."
예거는 심호흡을 한 뒤, 제론이 말한 이음새에 검을 힘껏 찔러 넣었다.
슈아악!
예거는 깜짝 놀랐다. 갑자기 주위 환경이 확 바뀌어 버렸다. 바닥에는 푸른빛을 띤 돌판이 촘촘히 깔려 있었고, 나머지는 새하얀 공간이었다.
돌판 한가운데에서 검을 들고 서 있었다.
예거는 긴장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분위기를 보니 누군가와 대결을 해야 할 듯했다.
화아아악!
강렬한 빛기둥이 솟구쳤다. 그리고 빛이 사라지며 멋진 복장으로 서 있는 중년인 한 명이 나타났다. 그 역시 검을 들고 있었는데 너무나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흐음. 오랜만의 시험이라 잔뜩 기대를 했는데, 이거 아주 실망이로군. 견습 기사만도 못한 놈이 오다니 말이야."
사내의 말에 예거가 발끈했다. 자신은 당당한 기사였다. 그것도 익스퍼트에 오른 기사였다. 한데 그런 자신이 견습 기사만도 못하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가.
"날 모욕하지 마시오!"
예거가 사내를 향해 검을 겨눴다.
사내는 담담히 예거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난 아르뭄이라고 하네. 자네를 모욕할 생각은 없었네. 하지만 스스로의 실력을 인정하고 돌아볼 줄 알아야 진정한 기사 아니겠나?"
"크윽."
할 말이 없었다. 예거는 이를 악물었다. 이럴 때는 실력으로 보여 주면 된다. 말이 필요 없었다.
"하압!"
예거가 몸을 날렸다. 그리고 단번에 아르뭄을 두 동강 내 버릴 듯이 검을 내리쳤다.
그것이 예거가 기억하는 마지막이었다.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더니 의식이 사라져 버렸다.
"끄으응."
"예거 경! 괜찮으신가요? 정신이 들어요?"
예거는 루이네의 목소리에 억지로 눈을 떴다. 눈이 뿌옇게 흐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시야가 점차 돌아왔다.
"아가씨?"
루이네는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다행이에요. 무사하셔서. 흐윽."
루이네는 울음을 참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예거는 온몸이 부서질 듯한 통증을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사방에 펼쳐진 참상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루이네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모두 정신을 잃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죽은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숨을 쉬고 있었다.
"다들 시험에 실패했어요."
예거는 쓴웃음을 지었다. 아르뭄이 뭘 어떻게 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그럴진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겠는가.
억지로 몸을 일으킨 예거의 눈에 아직 멀쩡히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제론이었다.
"아직 시험을 시도하지 않은 사람도 있군요."
"예, 제가 하지 말라면 안 하겠대요."
예거는 눈에 이채를 띠었다. 마치 시험에 도전하면 성공할 자신이 있다는 듯한 말 아닌가.
"자신만만한 사람이로군요."
루이네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감이라기보다는 뭔가를 기대하는 것 같아요. 말씀해 주세요. 시험이 어떤 건가요?"
"아주 강한 사람을 상대로 이겨야 하는 모양입니다."
"그렇게 강한가요?"
예거가 씁쓸하게 고개를 숙였다.
"움직임을 보지도 못했습니다. 엄청나게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환상 속에서 싸우는 모양이군요. 어쩌면 아예 시험 자체가 눈속임 아닐까요?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그러지도 모르지요. 그러니 저 사람도 시험에 도전하라고 말씀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젠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루이네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마지막까지 제론의 도움을 바라게 되었다.
잠시 후, 기쁜 표정의 제론이 문의 이음새에 검을 푹 꽂았다.
그리고 제론의 주위로 강렬한 빛기둥이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