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4/217)

Chapter 6 하이쓰 산맥에서 생긴 일

하이쓰 산맥은 엄청나게 높은 산들로 이루어진 산맥이었다. 게다가 험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몬스터도 상당히 많아서 산맥 주변에는 마을도 없었다. 수시로 험악한 몬스터가 산맥에서 내려오는데 어떤 마을이 버틸 수 있겠는가.

기간트라도 보유하고 있다면 모르겠지만 산골 마을이 기간트를 소유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제론은 하이쓰 산맥을 오르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막막하구나."

살펴야 할 범위가 너무 넓었다. 대충 위치는 찍었는데, 그게 너무 대충이라서 산맥을 완전히 뒤집어엎어야 할 판이었다.

몬스터는 두렵지 않았다. 굳이 기간트를 소환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검을 휘두르기만 해도 웬만한 몬스터는 두 동강이 나서 쓰러졌다.

하이쓰 산맥이 무서운 이유는 이곳이 오우거의 서식지이기 때문이었다.

산 하나에 오우거가 수십 마리는 살았다. 그러니 그곳에 잘못 발을 들이면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기간트라도 가지고 있지 않는 한 말이다.

설사 기간트를 타고 있더라도 오우거는 상대하기 쉬운 몬스터가 아니었다. 자칫 혼자서 포위되면 아무리 기간트라도 크게 당할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제론은 오우거도 두렵지 않았다. 예전 유적을 클리어하기 위해 싸웠던 변종 오우거라면 모를까, 일반 오우거는 제론의 식후 운동 거리도 되지 않았다.

아니, 그 변종 오우거라 하더라도 제론을 어찌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제론은 강했다.

벨루스 백작령에서는 산에서 감각만으로 유적을 찾아냈지만, 그건 산이 비교적 낮았고, 위치가 한정되었기에 쓸 수 있었던 방법이었다.

또한 운도 많이 따랐다. 아마 다시 하라고 하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하이쓰 산맥에서 유적을 찾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이런 식으로 막막한 곳이 하이쓰 산맥을 제외하고도 5군데가 남는다. 물론 제론은 그 모든 장소에 유적이 있을 거라고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모든 유적을 찾았을 때 분명히 뭔가 새로운 성과를 얻을 거라는 예감은 어렴풋이 들었다.

제론은 산맥을 그냥 오르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샅샅이 훑으면서 다녔다. 일단 체력이 받쳐 주니 엄청난 속도로 산을 타는 것이 가능했다.

제론은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해서 산을 하나하나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뭔가 기묘한 느낌이 없나 정신을 집중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상당한 밤낮이 후딱 지나갔다.

제론은 이대로라면 유적을 찾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한참 걷던 제론이 문득 멈춰 섰다. 그리고 한쪽을 쳐다봤다.

"여기도 사람이 들어오긴 하나?"

만일 유적의 흔적을 발견해 영지나 국가 차원에서 노리고 오는 거라면 대규모 인력이나 기간트가 동원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수가 적었다. 고작해야 15명 정도였다. 용병의 거친 느낌을 가진 자들이 11명이었고, 조금 다른 느낌을 가진 사람이 4명이었다.

제론은 발걸음을 그쪽으로 돌렸다. 뭔가 느낌이 왔다. 저 정도 인원으로 여기에 들어온 목적이 무엇이겠는가.

설마 오우거 사냥을 온 건 아닐 것이다. 오우거의 부산물이 비싸긴 하지만 그래도 이곳 하이쓰 산맥에서 그걸 찾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하이쓰 산맥의 오우거는 다른 지역의 오우거에 비해 너무 개체 수가 많았다. 자칫 두 마리를 동시에 만나기라도 하면 봉변당하기 딱 좋았다.

제론은 서둘러 이동했다. 일단 저들을 조금 살펴보기로 결정을 내렸다. 어쩌면 유적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 ☆ ☆

루이네는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조금 전 오우거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이네뿐 아니라 나머지 일행도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너무 긴장할 거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기간트가 있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예거의 말에 루이네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확실히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고마워요. 예거 경."

"별말씀을."

예거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그렇게 대답하고는 날카로운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용병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용병들은 아무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오우거의 울음소리가 너무 가까이서 들렸다. 아마 십중팔구는 이리로 올 것이다.

예거는 용병들이 언제든 싸울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신과 함께 온 두 기사를 쳐다봤다. 그들 역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긴장하지 않은 사람은 루이네뿐이었다. 예거가 일부러 그렇게 만든 것이다.

오우거가 나타나면 용병들이 루이네를 지키는 동안 예거와 두 기사가 기간트를 타고 물리쳐야 한다.

오우거가 한 마리만 오면 별것 아니지만 만일 두 마리나 세 마리가 오면 문제가 상당히 심각해진다. 그때는 정말로 희생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

오우거는 덩치에 걸맞지 않게 상당히 민첩했다. 아무리 기간트가 3기나 있더라도 빠른 몸놀림으로 이리저리 뛰다가 사람들만 기습해서 낚아채 갈 수도 있었다.

용병들은 그때를 대비해 데려왔다. 물론 용병들도 자신이 그런 역할이라는 것을 알고 따라왔다. 의뢰비가 엄청나게 비쌌으니까.

"크워어어!"

괴성과 함께 오우거가 불쑥 나타났다.

루이네는 기겁을 했다. 하지만 두 손으로 입을 꽉 막고 비명을 참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되도록 방해가 되기 싫었다.

"아가씨. 이쪽으로 오십시오."

용병대장이 루이네를 불렀다. 루이네가 서둘러 용병들에게 다가갔다. 곧 10명의 용병이 그녀를 빙 둘러쌌다. 그리고 용병대장이 눈을 번득이며 검을 뽑고 주위를 둘러봤다.

나타난 오우거는 두 마리였다. 그 정도는 예거와 기사들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

키이이이이잉!

순식간에 기간트 3기가 나타났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대응도 상당히 빨랐다.

예거는 살짝 안심했다. 만일 오우거가 더 많이 나타났다면 정말로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두 마리 정도는 문제없었다. 기간트 하나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나머지 둘이 오우거를 해치우면 된다.

그렇게 마음을 놓은 순간 어딘가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일행을 확 덮쳤다.

"막아!"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루이네 근처에 있던 기간트가 반사적으로 몸을 날리며 방패를 확 들이밀었다.

꽈앙!

오우거 한 마리가 방패에 맞아 나가떨어졌다. 물론 큰 충격을 받은 건 아니었기에 벌떡 일어났다.

예거의 눈에 순간 절망이 어렸다. 새로 나타난 오우거는 한 마리가 아니었다. 몸을 날려 덮치던 오우거 외에 두 마리가 더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모두 다섯 마리의 오우거였다. 이들과 싸워 이기는 건 문제 없지만 그 사이 루이네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다른 무엇보다 루이네의 안전이 중요했다.

그래서 예거는 순간 어떻게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때, 어딘가에서 돌멩이 하나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왔다.

쐐애애액!

마치 바람을 찢어발기기라도 하듯 엄청난 소리를 동반하며 날아온 돌멩이는 정확히 오우거의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빠악!

"크워어억!"

오우거가 머리를 부여잡고 괴로워했다. 하지만 이내 흉성이 폭발해 두 손으로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쾅쾅쾅쾅!

"크워어어어어어어!"

오우거가 난리를 피우고 있을 때 돌멩이가 또 날아왔다.

쐐애애애액!

빠아아악!

이번에는 또 다른 오우거의 이마를 때렸다.

"크워어어억!"

당연히 그 오우거도 분노를 폭발시켰다. 흉성이 폭발해 방방 뛰고 난리도 아니었다.

예거는 흉성이 폭발한 오우거가 그냥 앞뒤 재지 않고 한꺼번에 달려들까 봐 적지 않게 긴장했다. 그리고 누군지 모르지만 이런 장난은 이제 그만하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의 외침이 오우거를 자극할 수도 있었다. 그건 곤란했다.

그 뒤로도 돌멩이는 계속 날아왔다.

쐐애애액!

빠악!

"크워억!"

돌멩이는 하나같이 오우거의 이마나 관자놀이를 때렸다. 다섯 오우거가 모두 방방 뛰고 난리가 났다.

그리고 돌멩이를 던진 자가 나타났다. 한 손으로 돌멩이를 던졌다 받으면서 말이다. 자기가 돌멩이를 던졌다고 광고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를 발견한 오우거들의 눈빛이 붉게 물들었다.

"크워어어어어!"

다섯 오우거가 동시에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엄청난 반사 신경이었고 점프력이었다.

단숨에 거리를 없앤 오우거들이 일제히 팔을 휘둘렀다.

부우우우웅!

공기를 찢으며 오우거의 주먹과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돌멩이를 든 사내는 어느새 오우거의 사정거리 밖에 서 있었다. 여유를 잃지 않은 채로 여전히 돌멩이를 던졌다 받으면서 말이다.

"크워어어어어!"

오우거들이 다시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사내도 견디기 어려웠는지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굉장히 빨랐다. 오우거들은 우르르 사내를 쫓아갔다.

장내에는 순식간에 루이네 일행만 남았다. 다들 얼빠진 눈으로 멀어져 가는 오우거를 바라봤다.

"뭐, 뭐가 어떻게 된 거죠?"

루이네의 질문에 비교적 냉정함을 잃지 않은 예거가 대답했다.

"아마 오우거들을 유인해 간 모양입니다."

"그럼 저분이 위험하잖아요?"

루이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하자, 예거는 쓴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마 괜찮을 겁니다. 아까 돌 던지는 실력 보셨지 않습니까. 웬만해서는 그런 돌멩이로 오우거에게 고통을 주지 못합니다."

"그럼 우리를 도와주시려고 일부러 오우거를 끌고 가신 거로군요."

"그렇습니다."

다만 예거는 과연 오우거를 따돌릴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오우거는 집요한 몬스터였다. 저런 경우 지쳐 쓰러질 때까지 쫓아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들의 걱정스런 시선이 한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이내 평소의 표정을 되찾은 예거가 박수를 쳐 주위를 환기시켰다.

짝짝!

"자, 다들 정신을 차리시기 바랍니다. 여기 그냥 있는 건 자살행위입니다. 일단 이동이 먼저입니다."

예거의 말에 용병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루이네는 그럴 수가 없었다.

"안 돼요! 어떻게 우리를 위해 오우거를 유인해 간 사람을 두고 떠날 수 있나요? 최소한……."

"최소한 그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말씀입니까?"

"맞아요! 혹시 다치기라도 했으면……."

예거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만 이번에는 아가씨의 말씀을 따를 수 없습니다."

"어째서요?"

루이네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예거를 바라봤다. 하지만 예거는 여전히 단호했다.

"그가 다시 이리로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또한 다른 오우거가 또 우리를 노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일단 안전한 장소를 찾아가야 합니다."

루이네는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도 바보가 아니었다. 결국 예거의 말에 따라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알았어요, 가죠."

루이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들 이동을 시작했다. 이미 준비는 마쳤는지라 떠나기만 하면 된다.

멀리서 오우거 울부짖는 소리가 아련히 들려왔다. 그들은 그 소리가 부디 슬프고 잔인한 일로 인한 것이 아니기를 바라며 걸음을 서둘렀다.

"이쯤이면 어느 정도는 안전할 것 같습니다."

예거의 말에 루이네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들을 위해 오우거를 유인해 간 사내의 모습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나이도 많지 않아 보였다. 기껏해야 이십 대 초중반?

그 사람은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그리고 이 험한 하이쓰 산맥에는 왜 온 걸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렇게 루이네가 생각에 잠긴 동안 나머지 사람들은 잠자리를 준비했다.

이곳은 산에서 보기 드물 정도로 넓은 평지였다. 야영을 하기에는 딱 좋은 위치였다. 기습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고, 트랩을 준비하기에도 좋았다.

하지만 마음을 놓을 순 없었다. 하이쓰 산맥에서는 마음을 놓는 순간 죽는다. 이곳은 언제 오우거가 들이닥쳐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는 장소였다.

혹시 몰라 모닥불을 피울 수도 없었다. 모닥불의 불빛을 보고 오우거나 다른 몬스터가 오면 안 된다.

"그래도 이 물건이 있어서 정말 다행 아닙니까?"

용병대장이 품에서 휴대용 마법등을 하나 꺼냈다. 그는 빛이 멀리 퍼질 것을 우려해 천으로 등을 잘 감싼 다음 스틱을 빙글 돌려 등을 켰다.

딸깍.

천으로 가려져 희미해진 빛이 주위를 밝혔다. 아예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마음도 편해졌다. 이 정도 빛이라면 멀리까지 퍼지지도 않으리라. 또 연기도 없으니 냄새가 퍼질 염려도 없었다.

그들은 대충 끼니를 때우고 각자 자리에 앉아 쉬었다. 잠을 자고 싶었지만 아직 흥분이 다 가시지 않아 잠이 오지 않았다.

그때, 발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저벅! 저벅!

적막한 산속에 울리는 거침없는 발소리는 그들의 귀에 천둥처럼 들려왔다.

용병들이 먼저 후다닥 일어나 싸울 준비를 했다. 예거를 비롯한 기사들은 만일의 사태에 루이네를 지키기 위해 예기를 가다듬었다.

용병대장이 발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불빛을 비췄다. 빛이 약해 멀리까지 닿지 않았지만 공터에 누군가 들어오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내의 모습을 가장 먼저 확인한 건 당연히 예거였다. 예거가 가장 수준 높은 익스퍼트였기에 누구보다 눈이 밝았다.

"아! 아까 그분이시군요."

예거의 말에 루이네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리고 속으로 몇 번이고 다행이라고 중얼거렸다. 만일 만나지 못했으면 굉장한 죄책감에 시달렸으리라.

저벅, 저벅.

사내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러자 다들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낮에 경황이 너무 없어서 사내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루이네는 확실히 기억했다.

"아! 맞네요. 그분이에요."

루이네의 얼굴이 조금 더 밝아졌다. 이제 정말로 안심할 수 있었다.

"불도 안 피웠소?"

사내는 제론이었다. 제론은 다들 깜깜한 곳에서 땀에 전 옷을 말릴 생각도 못하고 모여 앉은 걸 보고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았는데 냄새가 확 풍겼다.

"일단 불부터 피우고 씻는 게 어떻소?"

제론의 제안에 다들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누군 그렇게 하기 싫은 줄 아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여건이 안 되지 않는가.

일단 최대한 몬스터의 시선을 끌지 말아야 했다. 또한 씻고 싶어도 근처에 물이 없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제론은 일단 공터 한가운데에 뭔가를 우수수 쌓았다. 놀랍게도 바짝 마른 장작이었다.

제론은 능숙하게 장작을 쌓고는 거기에 불을 붙였다.

화르륵!

단번에 장작에 불이 붙어 타올랐다. 마법을 이용한 점화였다. 하지만 누구도 제론이 마법을 쓴 것을 보지 못했다. 제론의 실력이 워낙 많이 늘어서 이젠 허공에 떠오르는 빛나는 마법진을 감출 수 있었다.

갑자기 불이 타오르자, 다들 경악했다.

"이게 무슨 짓이오!"

용병대장이 소리쳤다. 용병들은 생존에 대해 가장 민감했다.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했다.

"불을 안 피우면 과연 몬스터가 오지 않을까?"

제론의 말에 용병대장이 입을 다물었다. 불을 안 피운다고 몬스터가 안 오지는 않을 것이다.

"확률은 줄어들겠지."

제론이 피식 웃었다.

"몬스터는 시각보다는 다른 감각이 훨씬 발달했지. 특히 후각이."

제론은 일행을 슥 둘러보고는 말을 이었다.

"몬스터에게는 이런 불빛 보다는 오히려 다른 걸 조심해야 돼. 예를 들면…… 땀 냄새 같은 것 말이야."

다들 멍하니 제론을 바라봤다. 생전 처음 듣는 말이었다. 대체 누가 저딴 소리를 했단 말인가. 하지만 왠지 그럴듯해 보였다.

"그 말을 나보고 믿으란 거요?"

용병대장이 으르렁거리며 나직하게 물었다. 말투에는 상당한 위협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제론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기 들어온 지 얼마나 됐지?"

"사흘이오."

제론이 씨익 웃으며 자신의 가슴을 엄지로 가리켰다.

"열흘."

용병대장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떴다.

"열흘? 설마 열흘 동안 하이쓰 산맥에 있었다는 거요?"

제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 이제 누구 말이 맞을 확률이 높을까?"

용병대장은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 이런 방식으로 열흘이나 살아남았다면 정말로 그렇다는 뜻 아닌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용병대장 대신 루이네가 나섰다.

"정말로 불을 피웠는데 한 번도 몬스터의 습격이 없었나요?"

제론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한 번도 없었으니 걱정할 거 없소."

제론은 모닥불에 약초 가루를 뿌렸다. 그러자 청량한 향이 확 퍼졌다.

"그게 뭔가요?"

"냄새를 없애는 약초요. 이 근방에는 땀 냄새가 너무 많아서 몬스터가 올 위험이 있거든."

제론의 말에 루이네의 뺨이 새빨개졌다. 자신의 몸에서 나는 냄새가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씻지를 못하는데 어쩌란 말인가.

"물을 준비할 테니 다들 좀 씻는 게 어떻겠소?"

"물이 있나요?"

루이네는 머뭇거리며 물었다. 물이 있더라도 어떻게 여기서 씻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씻어 봐야 소용이 없었다. 어차피 냄새나고 더러운 옷을 입으면 몸도 함께 물들어 버릴 테니까 말이다.

"갈아입을 옷은 있소?"

루이네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하이쓰 산맥에 들어오면서 갈아입을 옷까지 가져오겠다고 하면 아마 다들 배를 잡고 웃을 것이다.

"그럼 옷도 빨아야겠군."

제론은 일단 도와주는 김에 확실히 도와주기로 했다. 자기 전에 목욕을 하고 옷만 갈아입어도 위험이 대폭 줄어들 것이다.

제론은 모닥불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갔다. 모닥불의 불빛이 잘 미치지 않는 곳이었기에 어두웠다. 다들 뭘 하려고 저러나 하며 제론을 바라봤다.

펄럭!

어둠 속에서 뭔가가 펄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론이 뭘 하는지 확실히 볼 수 있는 사람은 예거뿐이었다. 예거는 그 광경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제론은 지금 천막을 치고 있었다. 한데 대체 어디서 천막이 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천막은 상당히 컸다. 제론은 천막을 다 치자 일단 루이네부터 손짓으로 불렀다.

"저, 저요?"

루이네는 주춤주춤 제론에게 다가갔다. 예거가 혹시모를 위험에 대비해 뒤를 따랐다.

"이 안에 준비했으니 들어가시오."

"저…… 혼자서요?"

"그럼 같이 목욕하고 싶은 사람이라도?"

제론의 말에 루이네의 얼굴이 불에 탈 것처럼 달아올랐다.

"아, 아뇨!"

루이네가 황급히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즉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어머!"

루이네는 눈을 의심했다. 천막 안은 너무나 밝았다. 천막 위에 마법등이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천막 한가운데에 커다란 목욕통이 놓여 있었다. 깨끗한 물이 찰랑거렸다.

루이네는 머뭇거리다가 이내 옷을 벗었다. 그리고 준비된 탁자 위에 옷을 올려놓고는 목욕통 안에 몸을 담갔다.

놀랍게도 물은 따뜻했다.

피로가 싹 날아가는 것 같았다. 이대로 마음을 놓으면 그냥 잠들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일단 씻어야만 했다.

루이네가 천막 안에서 씻는 동안 천막 밖에서도 안과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리 보고 여기서 씻으란 겁니까?"

예거가 강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제론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끼리 뭐 문제라도 있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서 뭘 어떻게 씻으라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어쩔 셈이란 말인가.

"이쪽으로."

제론은 그 말을 남기고 어딘가로 향했다. 다들 눈치를 살피다가 제론의 뒤를 따랐다. 예거만 빼고 말이다.

예거는 루이네를 혼자 두고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어쨌든 루이네를 지키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멀리 갈 거 아니니까 따라오시오."

제론의 말에 예거는 머뭇거렸다. 제론도 더 권하지 않았다. 나중에 따로 씻으면 되니 말이다.

사람들은 제론을 따라 공터에서 나가자마자 깜짝 놀랐다. 놀랍게도 그곳에 제법 큰 샘이 있었다. 대체 아까는 이걸 왜 발견하지 못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을 정도로 큰 샘이었다.

더 이상은 제론이 말하고 안내할 필요도 없었다. 다들 훌렁훌렁 옷을 벗고는 샘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들도 한동안 씻지 못하고 땀과 먼지도 뒤덮여서 찝찝하기 그지없었다.

제론은 그들을 뒤로하고 천막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예거를 그곳으로 보냈다. 처음에는 고개를 젓던 예거도 자신 때문에 몬스터가 올 수도 있다는 말에는 어쩔 수 없었다.

예거가 씻으러 가자, 제론은 천막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천막 안에서 루이네의 옷이 쑥 빠져나왔다. 한창 목욕 중인 루이네는 당연히 그런 일이 벌어진 줄도 몰랐다.

"크으, 지독하군."

아무리 아름다운 여자의 옷이지만 냄새가 너무 지독했다. 제론은 망설이지 않고 정령을 불렀다.

"네로."

쏴아아아!

물줄기가 솟아났다. 그리고 한데 뭉쳤다. 네로는 제론의 명령에 따라 루이네의 옷을 말끔히 세탁했다. 그저 물로 휘감아 옷에 달라붙은 땀과 먼지를 씻어 내는 것만으로도 깨끗해졌다.

물기를 완전히 뺐기 때문에 뽀송뽀송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세탁을 막 끝냈을 때, 천막 안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내 옷!"

루이네가 목욕을 끝낸 것이다. 그녀는 당황해서 밖을 향해 물었다.

"혹시 밖에 누가 있나요?"

"옷은 내가 빨았으니 걱정할 거 없소."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 천막 안으로 옷을 휙 던졌다. 놀랍게고 루이네의 옷 뭉치는 처음 그 탁자 위에 턱 놓였다. 놀라운 힘 조절이었다. 천막 안이 보이지도 않는데 말이다.

한동안 천막 안이 부산스러워졌다. 그리고 잠시 후, 옷을 입은 루이네가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고,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제론은 모닥불 쪽을 가리켰다.

"난 이걸 좀 정리하고 가겠소."

루이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모닥불 쪽으로 걸어갔다. 제론은 즉시 천막을 정리해 아공간에 넣어 버렸다.

천막은 제론이 태블릿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방법을 통해 만든 것이었다. 물론 제론의 아이디어도 많이 들어갔다.

이 천막은 설치와 정리가 아주 간단했다.

순식간에 정리를 끝낸 제론은 모닥불로 반쯤 이동한 루이네를 향해 걸어갔다.

루이네는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봤다. 그리고 천막이 있던 곳을 확인하고는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걸 벌써 정리하신 건가요?"

깜짝 놀라는 루이네의 반응에 제론은 그저 씨익 웃기만 했다. 루이네는 멍하니 제론을 바라봤다. 사실 제론이 그 안에서 몸을 씻고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막 안 씻을 거냐고 물으려던 루이네는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제론의 몸에서 은은한 향기가 느껴졌다. 마치 조금 전에 꽃잎을 띄운 물로 목욕을 마친 사람 같았다.

"식사는 했소?"

루이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밥은 먹었다. 너무 간단해서 허기가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제론은 분위기를 확인했다. 이제 슬슬 본론을 꺼내도 될 듯했다.

"한데 이 험한 하이쓰 산맥에는 무슨 일로 왔소?"

루이네는 흠칫 놀랐다. 그리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대답할 수 없다는 생각과 제론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라는 생각이 뒤섞여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아무래도 쉽게 얘기해 줄 것 같지 않자, 제론이 먼저 나섰다.

"난 이곳 어딘가에 있다는 유적을 찾아왔소."

루이네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녀는 깜짝 놀라서 제론을 바라봤다. 그 반응을 확인한 제론은 확신을 가졌다. 이들은 유적 탐험대였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루이네가 급히 제론의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이미 늦어 버렸다.

"같이 가자고 할 생각 없으니 걱정할 거 없소. 내일 아침이 되면 난 따로 떠나겠소."

제론의 말에 루이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마치 자신이 제론을 내쫓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루이네는 문득 아직 소개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상대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전 루이네 폰 아베티스라고 해요."

"아베티스?"

생소했다.

제론이 왕국의 모든 가문 이름을 외우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에어스트 백작가가 잘나가던 시절에는 후계자 교육의 일환으로 다른 가문의 이름과 문장을 익혔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도 너무 낯설었다.

제론의 의문이 눈에 보였는지 루이네가 이채를 띠며 물었다.

"레늄 왕국 분이시로군요? 아니면 벨룸 왕국인가요?"

"그럼 헥서 왕국?"

루이네가 빙긋 웃었다.

"맞아요. 전 헥서 왕국에서 왔답니다."

헥서 왕국은 하이쓰 산맥을 경계로 레늄 왕국과 맞닿은 왕국 중 하나였다. 전통적으로 마법을 중시하는 왕국이었기에 마법 문화가 상당히 발달했다.

페쿠니아 상단에서 휴대용 마법등 판매를 시작했을 때,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곳이 헥서 왕국이었고, 그걸 가장 많이 구입한 곳도 헥서 왕국이었다.

"레늄 왕국에서 왔소."

제론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모닥불에 약초 가루를 확 뿌렸다.

치이이익!

약초 가루가 단숨에 불꽃이 되어 흩어지며 청량한 향기를 남겼다.

그 향을 맡으며 가만히 서 있던 루이네가 고민을 거듭하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

"말씀하시오."

"아까 얼른 대답하지 못해 죄송해요. 저희도 유적을 찾아왔어요."

제론이 빙긋 웃었다. 왠지 느낌이 좋은 여자였다. 물론 그렇다고 이성으로서의 관심이 생긴 건 아니었다. 그저 그게 전부였다.

"유적을 찾아야 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소?"

제론의 물음에 루이네의 눈이 커다래졌다. 보통 그런 질문은 함부로 하지 못한다. 한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얘기를 들으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내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 보면 그런 걸 가릴 이유가 없었다.

"가문을 일으켜 세우려고요."

제론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아련함이 떠올랐다. 그 얘기를 듣고 나니 루이네의 처지가 마음에 확 와 닿았다.

"이 유적탐사로 인해 가문에서 진 빚이 상당해요. 아마 이번 탐사에 실패하면 우리 가문은 다시 일어나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저도 어딘가로 팔려 가겠죠."

귀족가의 여식이 다른 가문에 혼인을 빙자해 팔려 가는 건 흔한 일이었다. 더구나 몰락한 가문의 여식이라면 그 처지가 오죽하겠는가.

일단 말문이 터지자, 루이네는 조금 더 편하게 얘기를 했다. 속으로만 꽁꽁 싸매고 있었기에 그동안 너무 답답했다.

"사실 전 처음에는 반대했어요. 굳이 유적 따위 안 찾아도 우리 가문은 제법 살 만했거든요. 왕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는 들어가는 가문이었으니까요."

루이네의 표정이 아련해졌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어요. 솔직히 아직도 좀 의심스러워요. 나베 공작가가 함께 유적을 찾자고 말한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어요. 그들이 뭐가 아쉽다고……."

얘기를 듣던 제론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갔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스토리 아닌가. 이건 에어스트 백작가와 슈린 공작가 사이에 벌어진 일과 상당히 흡사했다.

"아버지는 무사하오?"

제론의 물음에 루이네의 눈이 동그래졌다. 깜짝 놀랐다.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 대체 어떻게 안단 말인가. 고작 그 얘기를 듣고서 말이다.

"아뇨. 심각한 부상을 당하셨어요. 사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유적을 찾아 나설 생각은 없었어요. 하지만 나베 공작가의 압박이 계속 들어와서 피하기가 어려웠어요."

"유적을 못 찾으면 곤란한 상황이오?"

"빚이 많아요. 유적에 대한 정보를 찾는다는 명목으로 나간 돈이 상당하거든요. 자체적으로 조사도 했고요."

"나베 공작가인가 하는 곳은 손 놓고 있었소?"

"유적을 찾으면 발굴은 그쪽이 맡기로 했어요."

제론이 피식 웃었다.

"손도 안 대고 코를 풀겠다는 의도로군."

"처음 정보를 그쪽에서 댔거든요."

"처음 정보? 어떤 거?"

"하이쓰 산맥에 유적이 있다는 정보요. 고대 문헌을 뒤져 찾아낸 확실한 정보죠."

루이네는 의아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당신은 여기에 유적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아냈죠? 아,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도 모르네요."

제론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유적을 찾아다닌다는 건 아직 알려져선 안 되는 비밀이었다. 그리고 소개를 거짓으로 하기도 싫었다.

잠시 고민하던 제론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떠랴. 일단 비밀로 하고, 비밀이 퍼지면 나중에 대책을 세우면 된다.

아니, 그때쯤이면 대책을 세울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 정도의 아성을 구축했을 테니까 말이다.

"제론 폰 에어스트요."

"에어스트?"

루이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에어스트 백작가의 그 제론 님이신가요?"

루이네의 과한 반응에 제론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루이네의 눈이 반짝거렸다.

"정말 보고 싶었어요. 설마 당신께서 그 유명한 붉은 학살자일 줄은 몰랐어요."

"그 소문이 거기까지 퍼졌소?"

"우리 왕국에서 기간트에 가지는 관심은 상상을 초월해요. 전쟁에 대한 소문도 빠르게 퍼지는 편이죠. 아마 제가 붉은 학살자를 만났다는 걸 알면 다들 난리가 날 거예요."

루이네는 선망 가득한 시선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은 기간트에 관심을 가진 사람에게 있어선 신화적인 존재였다. 고작 실바로 그런 대단한 성과를 얻어 냈으니 말이다.

"그런데 정말로 기간트를 타고 점프를 하셨나요?"

질문과 대화의 방향이 단숨에 기간트로 바뀌어 버렸다. 하지만 제론은 그걸 원하지 않았다. 뭔가 냄새가 났다. 아주 지독한 음모의 냄새가.

"그보다 나베 공작가에 대한 애기를 좀 더 해 보죠."

루이네는 살짝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나베 공작가에서는 계속해서 자금을 지원해 줬어요. 물론 공짜는 아니었죠. 이자가 비싸지는 않았지만 기한이 정해진 빚이었어요."

루이네의 표정에 다시 근심이 어렸다.

"기한이 이제 얼마 안 남았네요. 기한까지 돈을 갚지 못하면 담보가 넘어갈 거예요."

"설마 영지를 담보로 잡았소?"

루이네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더 유적을 찾아야만 했다.

"한데 유적을 찾으면 다 끝나는 거요? 유적 개발은 나베 공작가가 맡지 않았소? 그들이 개발을 차일피일 미루면 곤란해지는 건 마찬가지일 것 같은데?"

루이네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다 해결했어요."

"어떻게?"

"처음 제공한 정보에 대한 값을 치르고 계약을 파기해 버렸어요."

제론이 눈을 크게 떴다. 모르긴 해도 아마 그 정보의 값으로 상당한 돈을 요구했을 것이다.

"물론 그것도 다 빚으로 남았지만요. 이제 유적을 찾지 못하면 전 끝장이에요."

"유적을 찾기만 하면 끝나는 게 아니라 발굴까지 마쳐야 끝나는 거 아니오?"

루이네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런데 정말 시간이 잘 가네요. 이제 제게 남은 시간은 고작 한 달이에요."

"한 달이면 충분하지."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눈을 빛냈다. 아무래도 나베 공작가인지 뭔지의 뒤에 누군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슈린 공작가를 뒤에서 쥐고 흔든 자와 동일인, 혹은 동일 단체일 확률이 높았다.

'그놈들 뜻대로 이루어지게 놔둘 수야 없지.'

제론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루이네를 보며 말했다.

"대충 어디쯤에 유적이 있는지는 알고 있소?"

루이네가 고개를 저었다.

"그랬으면 벌써 찾았겠죠. 제가 아는 건……."

루이네가 말을 흐렸다. 이 정보는 어마어마한 돈을 통해 만든 것이었다.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지만 그걸 그냥 말해 주는 건 마음에 걸렸다.

"유물은 다 가져도 되니까 말해 봐요. 내가 찾는 걸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예에?"

루이네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그 말을 어찌 믿겠는가. 게다가 제론도 유적 때문에 왔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루이네의 반응에 제론이 피식 웃었다.

"몇 살이오?"

"예? 스, 스물셋이요."

"내가 한참 위군. 말을 놔도 되겠지?"

"그, 그러세요."

루이네는 제론의 박력에 밀려 버렸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말 안 해도 유적은 내가 먼저 찾을 수 있어. 다만 시간을 절약하자는 차원이지."

그건 사실이었다. 제론은 루이네 일행이 이동한 흔적을 확인했다. 그들의 이동 경로를 확인하면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 이동할지 파악이 가능했다.

그걸 토대로 유추하면 대충 저들의 목표가 어디쯤인지 알 수 있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이 넓고 긴 하이쓰 산맥에서 더 이상 삽질할 필요가 없었다.

그 정도로 범위를 좁혀 놓으면 제론이 가진 특별한 감각을 통해 초고대문명의 유적을 찾아내는 게 가능했다. 그러면 아주 자연스럽게 고대유적도 발견할 수 있고 말이다.

"믿을 수 없어요!"

"믿든 말든 그건 네 자유지. 일단 생각할 시간을 주지. 내일 아침에 난 떠날 테니까 그때까지 결정을 해."

제론은 그 말을 남기고 모닥불에서 멀어졌다. 루이네는 복잡한 심정을 담은 눈으로 제론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잠시 후, 샘으로 씻으러 갔던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그들은 옷까지 빨아서 온통 젖어 있었다. 옷을 입은 채로 말리는 수밖에 없었다.

커다란 모닥불 주위에 옹기종기 모인 사내들이 불을 쬐며 물기를 말렸다.

그렇게 밤이 지나갔다.

그리고 아침이 될 때까지 루이네는 한잠도 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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