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유적탐사
제론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벨루스 백작령이었다. 그곳에 있는 유적은 분명히 아드보 나무와 관계가 있었다. 그걸 확신했기에 가장 먼저 찾아가기로 한 것이다.
당연히 벨루스 백작가에는 알리지 않았다. 혼자 몰래 와서 유적만 확인하고 떠날 생각이었다.
"확실히 아드보 나무가 지천에 널려 있긴 하군."
이곳에 있는 아드보 나무라면 상당히 많은 아드보 워터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아드보 워터는 꾸준히 마셔야 효과가 좋다.
그러려면 이 정도 나무로는 고작 몇 개의 영지를 커버하는 게 전부였다. 레늄 왕국 전체, 더 나아가 전 대륙에 아드보 워터를 퍼트리려면 이것의 수만 배는 필요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아드보 워터를 마시는 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제론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 효능을 나눠 주고 싶었다.
조금씩이나마 꾸준히 마시면 분명히 효과를 볼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라도 아드보 워터를 판매할 때, 비싼 가격을 받을 생각이 없었다. 또한 에어스트 백작령에 오면 아드보 워터를 공짜로 마음껏 마실 수 있도록 할 계획이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실현되기 어려운 꿈같은 얘기였지만 말이다.
제론은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했다. 하지만 바로 벨루스 백작령의 게이트로 가지 않았다. 옆 영지의 게이트로 나와 벨루스 백작령까지 이동했다.
텔레포트 게이트를 크란 제국 마탑에서 관리하긴 하지만, 거기에 오가는 사람은 반드시 기록하게 되어 있었다. 그 기록은 영주라면 누구나 열람이 가능했다. 아니, 매일 같은 시간에 게이트를 이용한 사람의 명단과 시간이 기록된 보고서를 영주에게 제출하게 되어 있었다.
제론은 자신이 벨루스 백작령에 왔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또한 앞으로도 자신의 행적이 되도록 노출되지 않게 조치할 작정이었다.
일단 인적이 없는 곳으로 가서 푸르투나를 불러내 날아가면 된다. 또한 소드 마스터의 탁월한 육체와 마나의 힘으로 달려도 된다.
텔레포트 게이트보다야 훨씬 느리겠지만 그래도 말이나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보다는 빨랐다.
그런 식으로 이동한 제론은 생각보다 금방 벨루스 백작령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제론의 목적지는 벨루스 백작령에서도 상당히 외진 곳에 위치한 산이었기에 눈에 띌 염려는 없었다.
"이거 변장이라도 해야 하나?"
사실 제론을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혹시 모를 일이니 미리 준비를 하는 게 좋았다.
대단한 변장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 후드가 달린 로브를 준비해서 입고 옷차림을 조금 평범하게 바꾸는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첫인상이 귀족처럼 보이지 않으면 제론을 알아봐선 안 되는 자들은 대부분 주목할 이유가 없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제론이 영지를 나와 여행 중이라는 정보는 돌아다닐 것이다.
정보조직의 예리한 눈을 피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제론이 원하는 건 최대한 방해받지 않고 유적을 찾아다니는 것이었다.
일단 첫 목표는 레늄 왕국을 완전히 문두스의 영향력 아래에 놓는 것이었다. 모든 유적을 다 발굴하면 어떻게든 가능할 것 같았다.
바인이 이끄는 문두스는 이미 수도의 정보 조직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제 수도의 모든 정보는 문두스의 손을 거쳐 가게 되어 있었다.
바인은 문두스를 맡은 그 짧은 시간 동안 정말로 많은 성과를 얻어 냈다.
이제 그런 바인과 문두스에 더 큰 날개를 달아 줄 때가 되었다.
제론은 빠르게 산에 올랐다. 사방이 아드보 나무 천지였다. 아드보 나무는 목재로 쓰기에도 적합하지 않았기에 그저 그대로 방치하는 것 외에는 정말로 쓸모가 없었다.
하지만 아드보 나무가 나는 곳도 드물었다. 레늄 왕국에서는 벨루스 백작령이 유일했고, 어떤 왕국에는 아예 아드보 나무가 나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특이한 나무였다. 서식지에 규칙이 없었다. 아무나 갖다 심는다고 자라는 나무도 아니었다. 그 서식지 외에는 자라지도 않는다. 물론 그런 시도를 할 사람도 없겠지만 말이다.
제론은 아드보 나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며 순식간에 산꼭대기에 도착했다.
"이거 설마 초고대문명의 마법 공학으로 만들어 낸 건 아니겠지?"
제론은 아드보 나무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정보를 알게 될지도 몰랐다.
태블릿으로 검색을 하면 어떻게든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건 나중 일이고, 지금은 숨겨진 유적을 찾아야만 했다. 예전에는 시간이 모자라서 못 찾았지만 지금은 자신 있었다.
제론은 정상에서 지그시 눈을 감았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이 뺨을 간질였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잊고 유적을 찾을 때의 그 느낌에 집중했다.
처음에는 잘 잡히지 않았다. 한데 오랫동안 집중력을 잃지 않으니 살금살금 느낌이 다가왔다. 제론은 집중력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그 느낌을 조금씩 잡아냈다.
'됐어!'
제론은 잡아낸 느낌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느낌이 오는 곳으로 의념을 보냈다. 한데 너무 깊었다. 그 유적은 땅속 깊은 곳에 있었다.
아무래도 초고대문명이 끝난 뒤 이 산이 새로 생긴 모양이었다. 이렇게 깊은데 과연 유적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혹시 땅을 파내야 하는 건 아닐까?
거기까지 생각한 제론이 일단 정령을 불러냈다.
"아네모스."
밑져야 본전이다. 시도해 보고 안 되면 땅을 파든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든 하면 되지 않겠는가.
휘류루루루룽!
아네모스가 나타나 제론의 의념에 따라 팔찌에 스며들었다.
번쩍!
제론은 그대로 빛에 휩싸여 아래로 쑥 내려갔다.
성공이었다.
하지만 과연 다음에도 그냥 아네모스만 부른다고 유적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는 장담 못 한다. 어쩌면 여기에 들어올 때마다 감각을 총동원해야 할지도 모른다.
제론은 감았던 눈을 떴다.
익숙한 광경이 보였다. 역시 초고대유적이었다.
―마스터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콜로니의 통제실은 10층에 있습니다.
여기서는 바로 가장 아래층으로 가는 것이 최고다, 거기에 가면 어떤 아티팩트가 있고, 무슨 능력을 가진 유적인지 즉시 알 수 있었다.
제론은 최하층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무려 10층짜리 유적이었다. 당연히 기대감이 커졌다. 제론은 태블릿을 꺼내 차근차근 유적을 확인했다.
이곳도 다른 유적과 마찬가지로 수련실과 생활공간이 있었다. 9층과 8층이 그것이었다. 그리고 7층부터 5층까지가 마티를 보관하는 공간이었다.
마티의 수가 상당히 많았다. 그래서 마티가 커버하는 범위도 엄청났다. 벨루스 백작령을 넘어서 그 주변 영지까지 싹 파악이 가능했다.
이건 상당한 성과였다. 아마 이를 이용하면 문두스의 힘이 두 배는 늘어나리라.
그리고 가장 중요한 4층부터 1층까지는 아드보 나무를 키우는 온실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것을 가공하고 특별한 처리까지 해서 아드보 수액을 만들고, 정확한 비율로 물을 섞어 아드보 워터를 만들어 내는 공정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었다.
"이렇게 아드보 워터를 만들었군."
대충 계산해 보니 여기서 만들어 내는 아드보 워터의 양이 상상을 초월했다. 또한 그 효능도 제론이 만든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뛰어났다.
제론은 기분이 좋아졌다. 시작이 산뜻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유적을 찾게 될지 모르지만, 처음부터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나머지도 잘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앞으로 여기는 유적 간 텔레포트를 이용해서 와야겠군."
유적 위에 너무 높은 산이 있어서 오기가 쉽지 않았다. 또 그냥 팔찌에 아네모스를 넣는다고 바로 올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이럴 때는 확실한 방법으로 오는 것이 최고였다.
"자, 그럼 다음 유적을 찾아가 볼까?"
제론의 목표는 레늄 왕국에 알려진 모든 고대유적을 찾아가 확인하는 것이었다. 아마 그 모든 유적의 아래에 초고대문명의 유적이 있을 것이다.
또한 할 수만 있다면 고대유적과 이어지지 않은 초고대문명의 유적도 싹 찾아내고 싶었다.
어쩌면 방법이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 더 확실한 것부터 해결하는 것이 먼저였다. 제론은 태블릿에 레늄 왕국의 지도를 띄우고, 바인으로부터 얻은 유적에 관한 정보를 그 옆에 함께 띄웠다.
그리고 다음 타겟을 신중하게 골랐다. 순서도 중요했다. 텔레포트 게이트를 거의 이용할 생각이 없었기에 최단 경로를 찾아 움직여야만 했다.
물론 유적 간 텔레포트는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사실 유적 간 텔레포트가 있어서 이렇게 마음 놓고 돌아다니는 것이다. 혹시라도 영지에 무슨 일이 생기면 곧장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건 제론의 마음을 크게 안정시켜 주었다. 그래서 더 냉정하고 효율적으로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여기서 제일 가까운 곳은 이쪽인데…… 과연 여기서 그냥 나갈 수 있을까?"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천장을 쳐다봤다. 꽉 막혀 전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제론은 자칫 유적을 나가려다가 저 흙더미 안에 갇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불안감을 안고 굳이 나갈 이유가 없었다.
"그럼 일단 유적 간 텔레포트로 이동해서 가야겠군."
수도로 가는 것이 제일 나았다. 어쨌든 왕국의 중심에 위치해서 어디로든 편히 갈 수 있었다. 게다가 수도에 가면 폴타를 이용해 이동 게이트를 열 수 있었다.
수도에서 100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는 이동이 가능하니 그걸 이용해서 다음 유적에 최대한 가까이 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하면 시간이 대폭 절약될 것이다.
"그럼 수도에 거점을 두고 계속 폴타를 이용하면 되겠군."
제론은 그런 식으로 계획을 세우고는 바로 수도 유적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레늄 왕국의 유적을 탐사하기 시작했다.
☆ ☆ ☆
생각보다 유적탐사에 걸리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대체 왜 지금까지 이걸 하지 않고 미뤄 뒀는지 후회가 될 정도였다.
레늄 왕국에는 에어스트 백작령의 중앙유적까지 합해서 총 24개의 고대유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유적 모두 아래에 초고대문명의 유적이 존재했다.
제론은 그 모든 유적을 싹 등록했다. 이제 레늄 왕국 곳곳을 유적 간 텔레포트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마티를 이용해 유적 근방의 정보를 싹 확인하는 게 가능해졌다.
물론 고작 24개라서 왕국 전역을 커버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중요한 지역은 대부분 확인이 가능했다.
이제 남은 건 고대유적과 연결되지 않은 초고대문명의 유적을 얻는 일이었다.
제론은 중앙유적의 로비에 앉아 레늄 왕국의 지도를 태블릿에 띄워 놓고 그것을 유심히 살폈다.
현재 제론이 소유한 유적은 총 26개였다. 고대유적 아래에 있던 유적이 24개였고, 그와 상관없는 유적이 베어크 영지와 벨루스 백작령에 각각 하나씩 2개가 있었다.
새로 얻은 유적은 대부분 마티만 보유한 정보 수집용 시설이었다. 베어크 영지의 유적처럼 광맥을 만든다거나 벨루스 백작령의 유적처럼 아드보 워터를 만드는 식의 유용한 생산형 유적은 없었다.
다만 폴타를 보유한 곳은 몇 군데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한계가 너무나 명확해 당장 유용하게 쓰기가 어려웠다.
제론은 태블릿에 뜬 지도를 손으로 살짝 움켜쥐듯 해서 허공에 휙 뿌렸다. 그러자 허공에 거대한 입체 지도가 나타났다. 태블릿이 구현한 레늄 왕국의 정밀 지도였다.
그 안에 산맥은 물론이고 건물까지 모두 있었다. 물론 마티로 확인이 가능한 영역만 정교했고, 그 외의 부분은 대충 선만 이은 정도였다.
그 지도는 제론의 손짓에 따라 이리저리 회전하고 움직였다. 제론은 지도를 조작하면서 유적의 위치를 유심히 살폈다.
그곳에는 마티의 정보 수집 범위까지 명확히 구분되어 있었다.
"딱 이 지점에 하나쯤 있으면 좋겠군."
그 어느 유적의 정보 수집 범위에도 멀리 떨어진 공간이었다. 그곳에 유적이 하나 있다면 아마 상당한 부분을 커버 가능하리라.
"그리고…… 이쯤인가?"
제론은 7군데를 찍었다. 유적이 숨어 있을 확률이 높은 장소였다. 때로는 영지의 한가운데인 경우도 있었고, 또 산맥 중앙인 경우도 있었다. 어느 곳은 호수 한가운데였다.
"어쩌면 새로운 고대유적도 발굴 가능할지 모르겠군."
산맥이나 호수에는 아직 현재의 문명이 발굴하지 못한 고대유적이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만일 그걸 발굴하면 또 그건 그것대로 상당한 돈이 될 것이다. 발굴형 기간트가 우수수 쏟아질 테니 말이다.
"암시장에도 가야 하고, 정말 바쁘구나."
다른 건 몰라도 암시장은 꼭 가야만 했다. 이번에는 정말로 조심해서 일을 진행해야만 한다. 이번에 팔 것은 엄청난 위험을 수반하는 물건이었다.
"과연 이걸 누가 사게 될까?"
제론이 품에서 두꺼운 책자 하나를 꺼냈다. 완전히 빳빳한 새 종이로 만들어진 책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책이었지만 펼치면 기절초풍할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라쿠스의 설계도였다.
마티를 이용해 바인이 은밀히 복사한 설계도였다. 설계 도면은 제론과 바이스, 세나가 함께 이미 확인했다.
제론이 얻으려 했을 때는 그렇게 힘들었는데, 바인은 말을 꺼내기 무섭게 그걸 얻어 냈다. 확실히 정보에 관한 한 누구보다 믿을 만했다.
기간트 설계도의 가격은 책정이 불가능하다.
고작 실바 한 기의 가격이 무려 4만 골드였다. 상위 기체로 가면 갈수록 가격은 급격히 높아진다.
발굴형은 최소 100만 골드가 넘는 가격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히엠스 같은 것은 가격이 비싼 것도 문제지만 구하기가 워낙 어려워 부르는 것이 값이었다.
고작 기간트의 가격이 그러할진대 기간트 설계도는 얼마나 비싸겠는가.
이 설계도만 있으면 기간트를 양산할 수 있었다. 게다가 라쿠스는 수많은 마탑이 머리를 맞대고 만든 기간트였다. 출력이 1.9나 되고 그 외에도 관절이나 세세한 부품이 다른 기간트와 완전히 달랐다.
어쨌든 이 설계도의 가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게다가 수많은 세력이 이 설계도에 얽혀 있을 것이다.
뒤가 밟히면 그 모든 세력과 싸워야 한다. 그러니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제론이 원하는 그림은 이 설계도를 다른 자들에게 파는 게 아니라 슈린 공작가 측에 파는 것이었다.
라쿠스의 설계도가 암시장의 경매에 나온다는 정보를 들으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어떻게든 그것을 낙찰받으려 할 것이다.
미리 정보를 입수한 것이 슈린 공작가뿐이라면 슈린 공작가에서 가장 많은 준비를 할 것이고 결국 그들이 낙찰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슈린 공작가의 자금을 제론이 흡수하게 되는 셈이었다.
"우리 가문에서 가져간 돈의 절반도 채 안 되겠지만 일단은 그 정도로 참아 주지."
게다가 제론이 준비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설계도를 통해 라쿠스의 치명적인 약점 몇 가지를 찾아냈다.
라쿠스가 양산되어 판매를 시작하기 직전에 그 약점을 은밀히 퍼트리면 판매에도 치명적인 타격을 받을 것이다. 또한 이후에도 라쿠스를 쓰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슈린 공작가를 무너뜨리는 건 그 이후였다. 예전에는 힘이 없어서 참고 기다렸지만, 이젠 차근차근 무너뜨려 그들을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릴 힘이 생겼다.
"결코 쉽게 끝내지 않는다."
제론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지도로 돌렸다.
레늄 왕국의 지도가 허공에서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제론의 시선이 그중 한 곳에 화살처럼 꽂혔다.
바알 호수였다.
☆ ☆ ☆
바알 호수.
레늄 왕국의 북쪽 국경을 이루는 호수였다. 게다가 주변에 영지가 5개나 붙어 있었다. 그들 모두 바알 호수의 풍부한 어족 자원을 통해 살아갔다.
당연히 잘사는 영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걱정도 없었다. 바알 호수는 엄청나게 넓었다. 그뿐 아니라 호수 너머에는 광활한 숲이 펼쳐져 있었다.
그곳을 넘어 침략을 하려면 엄청난 부담을 안고 시작해야 한다.
당연히 아무도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다. 덕분에 바알 호수에 인접한 영지는 비교적 평화롭게 살아갔다.
제론은 한밤중에 하늘을 훌쩍 날아 호수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심호흡을 했다.
호수에서 올라오는 물 냄새가 코에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삽질을 시작해야 한다. 될지 안 될지 모르면서 무작정 부딪쳐서 결과를 만들어 낼 시간이 되었다.
가능성이 높은 곳을 찍긴 했지만, 그곳에 반드시 유적이 있다고 확신할 수 없다. 만일 유적이 없다면 상당한 시간을 날리게 될 것이다.
오히려 유직이 있으면 더 쉽다. 제론이 어느 정도는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감이라고 여겼지만 이제는 그게 아니라는 걸 안다.
그건 유적에서 흘러나오는 특별한 파장의 에너지였다. 그 에너지에 워낙 오랫동안 접해서 이제 몸이 거기에 익숙해진 것이다.
같은 파장의 에너지를 만나면 몸이 먼저 반응하는데, 제론은 그 특별한 느낌으로 유적을 찾아냈다.
이번에는 아마 더 힘들 것이다. 물속이기에 유적에서 흘러나오는 에너지의 파장이 바뀔 가능성이 높았다. 만일 그렇다면 정말로 오랫동안 이 호수 안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포기할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이 호수 아래에 있는 유적에 정말로 필요한 것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 일단…… 네로."
쏴아아아아!
호수에서 물줄기가 솟아올랐다. 제론이 부른 물의 정령 네로였다.
제론이 손을 내밀자 물줄기가 빙글 휘어져 제론의 손바닥에 올라섰다. 제론은 그 상태로 눈을 감았다. 제론은 네로를 통해 호수와 연결되었다.
물론 지금부터는 온 정신을 집중해 네로와 함께 호수 전체를 훑고 다녀야 할 것이다.
제론의 의념을 등에 짊어진 네로가 바알 호수로 스며들었다. 네로는 물의 정령, 즉, 호수 전체를 자신의 의지 하에 둘 수도 있었다. 의지력이 그 정도로 강대하다면 말이다.
네로는 호수 바닥을 쭉 훑으며 지나갔다. 일단 유적의 흔적부터 찾아보고자 했다. 만일 고대유적이 호수에 존재한다면 바닥에 조금이라도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고대유적이 없다면 정말로 심한 고생을 각오해야만 한다. 호수 밑바닥에 들어가서 감각만으로 유적을 찾아내는 방법이 유일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불가능했지만 제론은 가능했다. 소드 마스터였으니까.
어쨌든 제론은 네로를 통해 호수 바닥을 샅샅이 살폈다. 바알 호수는 엄청나게 넓었기에 아무리 네로를 이용한다 하더라도 쉽지 않았다.
제론은 최대한 빨리 호수 중앙을 향해 네로를 이동시켰다. 물론 샅샅이 훑으면서 갔다. 조금 대충 보긴 했지만 말이다.
유적은 호수 중앙에 있을 거라는 감이 왔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뭔가 느낌이 확 왔다.
중앙으로 갈수록 제론의 표정이 묘해졌다. 제론은 마티를 이용해 레늄 왕국의 입체 지도를 구성하면서 바닥의 고저를 뇌리에 새기며 모양을 유추하는 능력을 얻었다.
'이건 마치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 같은데?'
호수의 모양이 그랬다. 거대한 운석이 떨어져서 생겨난 모양 같았다.
제론은 네로를 더 빨리 이동시켰다. 바닥을 훑는 건 더 이상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리고 찾아냈다.
'유적의 흔적만 남았군.'
유적 위에 거대한 뭔가가 떨어져 유적 자체가 박살 난 듯했다. 곳곳에 유적의 잔해가 있었다.
거기까지 확인한 제론은 곧장 호수로 뛰어들었다.
촤악!
제론의 몸을 네로가 감쌌다. 그러자 마치 물고기가 된 것처럼 빠르게 물속을 유영할 수 있었다. 제론은 엄청난 속도로 호수 중앙 바닥으로 향했다.
네로를 통해 확인한 것과 실제 눈으로 확인하는 건 또 달랐다. 제론의 손목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주변의 어둠을 부드럽게 밀어 냈다.
한밤중의 호수는 어둡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제론은 소드 마스터, 약간의 빛만으로도 마치 대낮에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처럼 훤히 모든 걸 볼 수 있었다.
유적의 잔해를 통해 어디가 중심인지 알 수 있었다. 제론은 그곳에 똑바로 섰다.
그리고 네로를 팔찌에 밀어 넣었다.
화아악!
네로든 아네모스든 어차피 스위치 역할을 할 수 있는 건 같았다. 제론은 빛에 휩싸여 아래로 쭉 내려갔다.
유적은 다른 곳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천장을 통해 보이는 호수의 모습이 참으로 신비로웠다. 해초가 흔들리며 물고기가 유영하는 광경이 천장 가득 펼쳐져 있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곳은 충분히 특별한 유적이었다.
제론은 다른 유적에서와 달리 곧장 통제실로 가지 않고, 한참 동안이나 천장을 바라봤다.
한밤중이라 깜깜한데도 유적에서 보니 너무나 환하게 잘 보였다. 유적의 마법이 특별한 작용을 하는 모양이었다.
"여긴 가끔 머리 식힐 때 와서 쉬다 가도 괜찮겠군."
로비를 조금 꾸미면 충분히 좋은 장소가 될 것 같았다. 느긋하게 쉬면서 호수를 구경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리라.
충분히 호수를 구경한 제론은 살짝 아쉬움이 남았을 때 고개를 내리고 통제실로 이동했다. 호수는 나중에 신물이 나도록 볼 수 있으니 지금은 할 일부터 하는 게 우선이었다.
통제실로 내려온 제론은 일단 태블릿부터 꺼내서 총 몇 층인지 확인했다.
"15층?"
태블릿에 뜬 층수에 정말로 깜짝 놀랐다. 15층이라니. 지금까지 가장 깊은 곳은 벨루스 백작령에 있는 아드보 워터를 만드는 유적으로 10층이었다.
한데 15층이라니. 대체 뭐가 있기에 이렇게 깊단 말인가.
이곳도 다른 유적과 마찬가지로 15층에 통제실이 있었고, 그 위 14층과 13층이 각각 생활공간과 수련공간이었다.
그리고 12층부터 9층까지가 마티 보관소였다. 이곳의 마티는 다른 곳에 비해 상당히 많았다. 당연히 정보 수집 범위도 훨씬 넓었다.
바알 호수를 모두 커버하는 건 너무나 당연했고, 그 주변 영지와 숲을 넘어 훨씬 먼 곳까지 정보 수집이 가능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넓이였다.
8층과 7층은 폴타를 구성하기 위한 아티팩트 보관소였다. 이 유적에는 폴타까지 있었다. 이제 이 근방은 어디든 게이트를 열어 이동할 수 있었다.
"다른 유적도 다 이러면 좋겠군."
어쨌든 이곳에서 폴타를 잘만 이용하면 호수 너머로 무역을 다니는 것도 가능했다. 호수에서 숲을 넘으면 바로 체스터 공국이 나온다.
체스터 공국은 바다에 접한 것도 아니고 물이 풍부한 나라도 아니었기에 호수의 물고기를 잡아 판매하면 아마 그 반응이 폭발적일 것이다.
제론은 빙긋 웃으며 6층에는 뭐가 있는지 확인했다. 이제부터가 새로운 것이다. 당연히 기대감이 높아졌다.
6층부터 1층까지는 딱 한 가지를 위한 시설이었다. 복잡한 입체 마법진으로 이루어진 아티팩트가 층층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것은 놀랍게도 국소 날씨 변환 마법 시스템이었다.
적게는 반경 1킬로미터에서 많게는 반경 2킬로미터까지 범위의 날씨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데, 당연히 주변 날씨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경계 지역의 날씨는 애매해진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했다.
날씨 조절 아티팩트는 지금도 작동하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바알 호수 한가운데에 비를 내렸다. 반경 1킬로미터의 지역에 한동안 폭우를 쏟아 냈다.
그 비가 호수를 만든 모양이었다.
제론은 태블릿을 조작해 날씨 조절 아티팩트를 자유롭게 쓸 수 있는지 먼저 확인했다.
가능했다. 제론이 가진 태블릿은 정말로 대단했다.
태블릿으로 날씨를 조절할 수 있게 된 제론은 작동 범위를 살폈다. 이 근방의 날씨만 조절할 수 있다면 거의 쓸모없는 물건에 불과했다.
하지만 만일 그 범위가 최소 레늄 왕국 정도만 된다 하더라도 엄청난 가치가 있었다. 필요한 곳에 비를 내릴 수도, 또 내리는 비를 거둘 수도 있으니 그보다 더한 무기가 어디 있겠는가.
물론 국소적인 날씨만 조절이 가능했으니 파괴력은 좀 떨어질 수도 있지만 말이다.
"호오. 이건 범위가 제법 넓네?"
범위가 딱 마티 허용 범위 안이 아니었다. 원하는 위치에 씨앗 형태의 코어를 발사해서 날씨를 조절하는 형식이었다.
즉, 제론이 태블릿을 통해 마티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그걸 날릴 수 있었다.
다만 날씨 조절 코어를 만들어 내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원할 때마다 계속 코어를 날리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도 코어를 만들어 쌓아 둘 수 있기에 제법 쓸모가 있었다. 10개의 코어 보관소에 각각 하나씩 만들어 넣어 두면 되는데, 미리 명령 코드를 입력해 놓으면 거기에 관련된 날씨를 보관소가 빌 때마다 만들어 채울 수도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 모든 보관소에 비를 내리는 코어만 만들어 쌓았다. 그리고 일정 시간이 되면 호수 중앙에 코어를 쏴 올렸다.
그래서 아무리 가물어도 바알 호수는 결코 마르는 법이 없었다. 또한 가끔 비가 많이 올 때는 호수가 넘치는 경우도 있었다.
"이걸 잘만 이용하면 전장의 흐름도 바꿀 수 있겠군."
전투에 날씨는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비가 오면 길이 질척질척해져 이동이 힘들어진다. 또한 추위가 몰아치면 상당한 어려움이 생겨난다.
추위만 힘든 게 아니다. 지독할 정도의 더위도 전쟁을 힘들게 만든다. 뿐만 아니다. 적 진영에 우박을 떨어뜨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현재의 전쟁은 기간트로 한다. 하지만 결국 전쟁의 주체는 사람이었다. 사람이 버티지 못하면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다.
제론은 날씨 조절 아티팩트의 사용법을 자세히 살폈다. 마티로 정확히 계산을 해서 코어를 날리는 방법도 있지만, 마티가 없어도 쓸 수 있었다. 대충 제론이 계산을 해서 날리는 방법이었다.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면 비교적 정확히 날릴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 범위는 제한이 없었다. 이곳에서 대륙 끝에 코어를 날릴 수도 있었다.
정말 대단한 아티팩트였다.
"국소적으로 이용할 수밖에 없다는 게 좀 아쉽긴 하군."
만일 대규모로 날씨를 바꿀 수 있다면 엄청난 일이 가능해질 것이다. 코어를 수천 개 동시에 쓰면 그런 일도 할 수 있겠지만, 보관 가능한 코어의 수가 10개뿐이기에 불가능했다.
게다가 코어를 다시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이 무려 보름이었다.
10개의 코어를 한꺼번에 쓰고 다시 만들기 위해서는 5개월이 걸린다는 뜻이었다.
만능처럼 쓸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큰 무기를 얻었다. 제론은 지극히 만족스러웠다.
"과연 하이쓰 산맥에는 어떤 유적이 있을까?"
하이쓰 산맥은 레늄 왕국과 벨룸 왕국의 경계를 이루는 산맥이었다. 또한 헥서 왕국과의 경계도 이루었다. 그만큼 길고 험한 산맥이었다.
그리고 바알 호수 다음으로 높은 가능성을 가진 장소였다.
제론은 로비로 올라가 바닥에 누웠다. 흔들리는 해초 사이로 유영하는 물고기 떼가 보였다. 참으로 아름답고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조금만 쉬자, 조금만……."
제론은 그렇게 누워 호수를 바라보다가 이내 스르르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