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2/217)

Chapter 4 소드 마스터를 만드는 검술

"황당하군."

슐린 후작은 창밖으로 보이는 광경에 어이가 없었다. 난민이라니.

"어떻게 생각하나?"

슐린 후작의 물음에 뤼게 백작이 공손히 대답했다.

"영지 사정이 얼마나 나쁜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모습입니다."

"영지 사정이 나빠? 이런 멋진 성을 가졌는데? 보아하니 돈도 제법 있는 것 같고."

"하지만 인구가 모자라지 않습니까. 영지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람입니다. 영지민이 없는 영지의 한계는 명확한 법이지요."

"그래? 그럼 사람으로 거래를 하면 되겠군. 얼마나 동원이 가능하지?"

"후작님께서 제대로 힘을 한번 써 주시면 단번에 20만 명은 데려올 수 있습니다."

물론 그 20만 명 안에 뤼게 백작이 키운 정보원이 최소 200명은 섞이겠지만 굳이 그 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20만 명이라…… 그 정도면 여기 영주가 제법 반응을 보이겠지?"

"아마 결코 거절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 아주 기대되는군."

20만 명을 동원하는 건 사실 슐린 후작이나 뤼게 백작의 입장에서 지극히 간단한 문제였다.

레늄 왕국에 압력을 넣으면 된다. 난민이 얼마나 많겠는가. 분쟁 지역의 난민을 대충 모아도 20만은 훌쩍 넘어갈 것이다.

그들이 안전하게 이동할 방도를 마련해 주면 다들 이곳으로 모여들 것이다. 난민에 대한 정책이 다른 곳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니까.

슐린 후작은 충분히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 능력이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협상을 자신했다.

"한데 생각해 보면 말이야, 자그마치 소드 마스터야. 게다가 보통 기사를 소드 마스터로 키워 내는 검술을 알고 있는 자야. 그런 자를 쉽게 포기할까?"

"글쎄요."

"내가 여기 영주라면 결코 포기하지 못할 거야. 아, 그러고 보니 여기 영주도 소드 마스터일 가능성이 있었지?"

"예, 아마 그럴 확률이 높습니다. 베샤이덴 경과 슈빅 경의 도움을 받았다면 누구보다 먼저 소드 마스터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슐린 후작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확실히 그래. 이것 참, 정말로 기대되는군."

슐린 후작은 자신이 그 검술을 익히면 어떻게 될지 상상해 봤다. 짜릿했다. 어쩌면 자신이 대륙의 모든 소드 마스터 위에 군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에어스트 백작인지 뭔지는 왜 코빼기도 안 보여? 이거 너무 예의가 없는 거 아냐?"

뤼게 백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슐린 후작의 급한 성격을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참은 것만 해도 대단했다. 이제 슬슬 억눌렀던 뭔가가 터질 시점이 되긴 했다.

"그래도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지요. 아마 난민들 때문일 것입니다. 난민에게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할 정도로 절박하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뤼게 백작이 은근히 달래자, 슐린 후작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협상이 더 쉬워질 거라는 뜻이기도 하니 참아야지. 젠장, 지겹군."

뤼게 백작은 속으로 어서 빨리 에어스트 백작이 오기만을 빌었다. 자칫하면 불똥이 자신에게 떨어질 수도 있었다. 지금 상태를 보니 길어야 몇 시간이었다.

'아니, 어쩌면 지금 당장이라도 폭발할지 모르지.'

뤼게 백작이 두려움이 떨고 있을 때, 함께 온 기사 하나다 안으로 들어왔다.

"에어스트 백작이 찾아왔습니다."

그 말에 뤼게 백작이 반색했다.

"오! 어서 안으로 모시게. 아니, 우리가 나가지. 아무래도 사람을 만나려면 응접실이 나을 테니까."

그들이 묵는 숙소에는 방이 따로 몇 개나 딸려 있고, 응접실과 샤워실, 화장실도 있었다. 초일류 호텔에 가도 이보다는 덜 편하고 덜 화려할 것이다.

뤼게 백작은 슐린 후작을 바라봤다. 슐린 후작도 어서 에어스트 백작을 만나 협상을 마무리하고 싶어서 몸이 달아 있었다.

"뭐 하나, 어서 나가지 않고."

슐린 후작이 성큼성큼 앞장섰다. 그 뒤를 쓴웃음을 지은 뤼게 백작과 기사가 따라갔다.

응접실에는 슐린 후작의 기사단이 눈을 부라리며 험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담담한 표정을 유지한 제론이 서 있었다.

솔직히 제론은 이들이 너무나 가소로웠다. 진짜 소드 마스터가 된 자신의 힘을 손톱만큼도 파악하지 못하니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정작 제론이 손만 한 번 휘둘러도 모조리 목이 잘려 쓰러질 자들이 말이다.

"오오, 어서 오게. 정말 오래 기다렸다네."

슐린 후작이 반가운 마음을 담아 말했다. 어서 빨리 베샤이덴과 슈빅을 내놓으라는 뜻이기도 했다. 물론 그 얘기를 제론이 아는지 모르는지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제론은 가볍게 인사했다. 살짝 예의가 모자라 보일 수도 있지만, 또 그걸 걸고넘어지기에는 좀 애매했다. 한마디로 아슬아슬한 선을 타는 느낌이었다.

"일단 이쪽으로 앉지."

슐린 후작은 자연스럽게 제론에게 하대하며 분위기를 만들어 갔다. 하지만 그걸 가지고 뭐라 하기에도 애매했다. 슐린 후작은 나이가 제론보다 훨씬 많았으니까.

세 사람이 각자 자리에 앉았다. 한동안 침묵이 맴돌았다. 제론은 이들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 알기에 얘기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슐린 후작과 뤼게 백작은 나름대로 머릿속을 정리했다.

가장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슐린 후작이었다. 체질적으로 뭔가를 참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빙빙 돌리는 건 나랑 안 맞으니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하지."

슐린 후작은 제론을 향해 강하게 기세를 쏘며 말했다.

"베샤이덴 경과 슈빅 경을 넘기게."

만일 슐린 후작이 이런 요구를 할 거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상당히 놀라고 화가 났겠지만, 예전부터 알고 있었기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제론은 오히려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베샤이덴 경과 슈빅 경은 기사이지 물건이 아닙니다."

순간 슐린 후작은 말문이 막혔다. 결국 참았던 성질이 확 치솟았다.

"내가 한 말이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도 모르나?"

"근간에 그런 생각이 깔려 있으니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슐린 후작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진득한 살기가 물안개 깔리듯 촥 퍼졌다.

뤼게 백작만 중간에서 안절부절못했다. 금방이라도 슐린 후작이 검을 뽑을 것만 같았다. 만일 그렇게 되면 일이 좀 커진다.

솔직히 이런 변방 왕국의 보잘것없는 백작 하나 죽인다고 슐린 후작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문제는 자신이었다.

뤼게 백작이 함께 있었으면서 그런 사태를 막지 못했다면 모든 불똥이 뤼게 백작에게로 튈 것이다. 그런 상황은 결코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후작님, 조금 흥분을 가라앉히시는 것이…… 지금 중요한 건 베샤이덴 경과 슈빅 경 아니겠습니까?"

살기등등한 슐린 후작의 시선이 뤼게 백작에게로 향했다. 뤼게 백작은 다리가 후들거리고 두려움이 왈칵 밀려왔지만 애써 의연한 태도를 유지했다.

이럴 때는 그렇게 하는 편이 슐린 후작을 달래기 좋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랜 경험과 사람을 다루는 능력, 그리고 직감이 아우러져 만들어 낸 결과였다.

"좋아. 일단 백작의 얼굴을 봐서 내가 잠깐 참지."

슐린 후작은 살기를 살짝 가라앉혔다. 그리고 제론을 노려봤다.

"이제부터는 어휘 선택이 아주 중요할 거야. 내 다시 한 번 말하지. 베샤이덴 경과 슈빅 경을 넘겨."

이젠 숫제 말을 놓고 있었다. 상당히 무례한 일이었지만 슐린 후작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물론 제론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따위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다만 그 사이에 있는 뤼게 백작만 신경을 잔뜩 곤두세웠다. 그는 속으로 연신 욕을 해댔다.

'이런 미친놈 같으니라고. 소드 마스터면 다야? 뭐 이리 안하무인이야! 그리고 저 머저리 백작 놈은 또 왜이래? 그냥 죽여 달라는 거야, 뭐야?'

뤼게 백작이 속으로 갖은 욕을 하는 줄도 모르고 슐린 후작은 여전히 살기를 완전히 지우지 않은 채 제론을 노려봤다. 여차하면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듯한 기세였다.

"그 두 사람은 왜 원하는 겁니까?"

제론이 담담하게 물었다. 슐린 후작은 그 담담함이 마음에 안 들었다. 자신이 흘리는 살기와 기세 속에서 태연하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억지로 참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 마음에 안 들었다 힘든 티라도 좀 내면 마음이 풀릴 것 같은데, 전혀 그럴 기미가 안 보였다.

"몰라서 묻나?"

"고작 소드 마스터이기 때문입니까?"

"고작? 지금 소드 마스터를 고작이라고 했나? 그것도 내 앞에서?"

뤼게 백작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모든 게 끝났다. 슐린 후작의 자긍심은 하늘을 찔렀다. 그 모든 자긍심이 그가 소드 마스터라는 것에서 시작한다. 즉, 그는 자긍심의 근본을 무시당한 것이다.

이보다 수위가 약했어도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이제 사태는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치달았다.

"이제 사람이 검을 든 시대는 지나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 하더라도 기간트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너무 당당하게 말하니 오히려 힘이 빠졌다. 당연히 옳은 얘기다. 아무리 슐린 후작이라도 기간트를 상대로 이길 수는 없었다.

상대가 기간트 중 가장 약하다는 실바를 상대로 해도 마찬가지였다. 절대 이길 수 없었다.

하지만 소드 마스터의 힘은 검술과 육체 능력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기간트 운용에 있어서도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능력을 갖는다.

"소드 마스터가 기간트를 타면 어떤 능력을 발휘하는지 너라면 알 텐데? 소드 마스터를 둘이나 휘하에 두고 있는데 그것도 모르나?"

제론이 피식 웃었다. 순간 슐린 후작은 하마터면 검을 뽑아 목을 날릴 뻔했다. 그만큼 그 웃음이 거슬렸다. 너무나 명백한 비웃음이었으니까.

"후작님이 보기에 전 소드 마스터입니까?"

슐린 후작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익스퍼트다."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슐린 후작이 보기에 제론은 마나로 온몸이 꽉 차 있었다. 이는 익스퍼트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만일 소드 마스터가 된다면 저 마나가 일정한 흐름에 따라 움직일 것이다.

또한 흐름을 가진 마나는 점점 압축되어 가느다랗게 변한다. 이것이 소드 마스터와 익스퍼트의 차이였다.

그리고 처음 슐린 후작이 카이트를 비롯한 라이트닝 기사단을 봤을 때, 얼핏 소드 마스터로 착각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몸 안에 가느다란 마나의 흐름을 갖고 있었다. 문제는 너무 가늘어서 소드 마스터의 힘을 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어쨌든 슐린 후작이 보기에 제론의 몸은 마나로 꽉 차 있었다. 그것도 밀도가 옅은 마나였다.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 검술을 배우지 않은 모양이군. 아니면 관심이 없었거나."

제론은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굳이 그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이 제국의 소드 마스터를 돌려보내야 한다. 마찰을 최소로 해서 말이다. 그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제론은 슐린 후작의 자존심에 승부를 걸었다.

"소드 마스터가 되면 라이더로서의 능력이 얼마나 향상됩니까?"

"극도로."

슐린 후작은 확신을 담아 말했다.

"라이더로 오를 수 있는 정점에 도달한다."

실제로 그는 스스로가 그러하다고 믿었다. 기간트를 타고 싸웠을 때, 자신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건 같은 소드 마스터밖에 없다고 확신했다.

"그럼 제가 그들을 가르친다고 하면 못 믿으시겠군요?"

"가르쳐? 뭘? 설마 기간트를?"

"그렇습니다."

슐린 후작은 멍하니 제론을 바라봤다. 그러다 이내 크게 웃었다.

"푸하하하하하핫!"

한참이나 배를 잡고 웃던 슐린 후작이 싸늘한 표정으로 제론을 노려봤다.

"장난은 사절이다."

"장난이 아닙니다."

슐린 후작이 으르렁거렸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용납할 수 없었다. 제론은 계속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짜증이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다.

"하면 시험해 보시겠습니까?"

"시험? 어떻게 말이냐? 기간트로 싸워 보자고? 그런 의미 없는 짓을 내가 왜 해야 하지?"

제론이 빙긋 웃었다.

"왜 의미가 없습니까? 합법적으로 짜증 나는 상대를 박살 낼 수 있을 텐데요."

그 말에 슐린 후작이 혹했다.

그리고 옆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뤼게 백작의 가슴이 싸늘히 식었다.

'이놈 처음부터 이걸 계획했군!'

확실하다. 기간트 승부로 몰아갈 작정을 하고 온 것이다. 하지만 뤼게 백작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왜? 그냥 화풀이나 하라고?'

만일 정말로 그걸 원했다면 상대를 잘못 파악했다. 슐린 후작은 지금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아마 기간트 승부를 보는 중에 기회를 만들어 제론을 죽일 것이다.

두 눈에 감도는 살기를 보면 확실했다.

'좋은 기간트를 가지고 있나? 설마 그 새로운 발굴형 기간트를 쓰겠다는 건가? 그건 끝까지 감추고 싶을 텐데?'

만일 소드 마스터인 슐린 후작을 상대로 이길 수 있다면 대체 얼마나 뛰어난 기간트란 말인가. 슐린 후작이 히엠스를 보유했다는 건 이젠 얘깃거리도 되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한데 히엠스를 탄 슐린 후작을 소드 마스터도 아닌 사람이 이기려면 대체 얼마나 성능이 뛰어난 기간트를 타야 한단 말인가.

그걸 생각하니 뤼게 백작의 입매가 가늘어졌다. 만일 그 기간트를 확인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압력을 넣어서 빼앗을 것이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말이다.

물론 그 기간트는 슐린 후작의 소유가 되겠지만 뤼게 백작은 충분히 실리를 얻을 자신이 있었다.

뤼게 백작이 한창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제론의 말이 이어졌다.

"그냥 싸우는 건 재미가 없으니 내기라도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내기? 말해 봐라."

"후작님이 이기시면 그 검술을 내 드리죠."

"검술?"

"베샤이덴 경과 슈빅 경이 익힌 검술 말입니다. 라이트닝 소드라고 부르는 검술입니다."

슐린 후작의 얼굴에 놀람이 어렸다. 베샤이덴과 슈빅을 얻는 것도 좋지만 그들이 익힌 검술을 얻어 내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다.

만일 두 기사를 얻을 수 없다면 검술만이라도 가져가야만 한다. 그래야 수지 타산이 맞는다. 그 검술을 이용해 수많은 소드 마스터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슐린 후작가의 위상이 수직으로 상승할 것이다.

"그거 구미가 당기는 조건이군. 거기에 그 두 기사도 함께 주는 건 어떤가? 그저 자유기사로 풀어 주기만 하면 되네."

어느새 슐린 후작의 말투가 달라졌다. 조금 전 화가 났을 때는 반말을 찍찍 하더니 이젠 말끝을 살짝 높였다. 마음이 제법 풀어졌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하죠. 한데 후작님이 지셨을 때는 어쩌시겠습니까?"

슐린 후작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원하는 걸 말해 보게. 뭐든 해 주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르는 듯한 자신감이었다. 하지만 누구라도 지금 상황을 보면 그럴 만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만큼 소드 마스터인 슐린 후작의 힘은 대단했다.

비단 검뿐 아니라 기간트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소드 마스터가 되면 자동으로 기간틱 마스터가 된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말이다.

"그냥 돌아가 주십시오. 그리고 향후 10년 동안 우리 에어스트 백작령에 대한 어떤 행동도 하지 말아 주십시오."

슐린 후작이 피식 웃었다.

"뒤를 좀 봐 달라 이건가?"

"관심을 끊어 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건 슐린 후작님뿐 아니라 함께 오신 뤼게 백작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기사들도 그렇게 했으면 합니다."

슐린 후작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하지."

제론이 뤼게 백작을 쳐다봤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망설였다. 그러자 슐린 후작의 호통이 날아갔다.

"날 못 믿겠다는 뜻인가!"

뤼게 백작이 '아, 뜨거' 하면서 얼른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물론 속마음은 좀 달랐다. 만일 정말로 제론이 이긴다면 계속해서 이 영지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 무조건 그렇게 할 것이다.

'새로운 발굴형 기간트를 그렇게 쉽게 놓칠 수야 없지.'

뤼게 백작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는 동안 제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나가실까요? 괜히 시간을 끌어 봐야 좋을 게 없잖습니까."

"화통하군. 좋네."

제론이 서둔 이유는 간단했다. 시간이 아까웠다. 이런 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게 싫었다.

세 사람은 곧장 기간트 훈련장으로 향했다. 에어스트 백작성에는 기간트 훈련장이 무려 7곳이나 있었다. 그중 4곳 정도는 항상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는 종종 비어 있었는데, 그중 한 곳으로 갔다.

"훌륭하군."

슐린 후작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에어스트 백작성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기간트 훈련장까지 이렇게 훌륭하니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이 성 나한테 팔 생각 없나? 내 아주 후하게 값을 쳐주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알면서도 얘길 꺼낼 정도로 성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저 순수한 감탄이었다.

"기간트를 꺼내시죠."

제론의 말에 슐린 후작이 입매를 비틀며 자신의 기간트인 히엠스를 소환했다.

13미터에 달하는 새하얀 기간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슐린 후작은 소드 마스터답게 제자리에서 훌쩍 뛰어 조종석에 안착했다.

제론은 슐린 후작이 기간트에 탄 것을 확인한 다음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실바 한 기가 훈련장에 들어왔다.

쿵! 쿵! 쿵!

실바는 제론 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조종석이 열렸다. 안에서 내린 사람은 카이트였다.

카이트는 걱정스런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정말로 괜찮겠습니까?"

제론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슐린 후작의 방을 나서며 바로 카이트에게 연락을 했다. 실바 하나를 가져 오라고 말이다.

비록 세나가 손을 봤다고는 하지만 그래 봐야 실바였다. 이걸로 히엠스를 상대하는 건 아무리 제론이라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카이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제론의 저 자신감을 조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더구나 상대는 소드 마스터인 슐린 후작이었다.

그냥 라이더가 히엠스를 타도 쉽지 않은데, 소드 마스터가 탔다. 소드 마스터는 즉 기간틱 마스터이기도 했다.

그걸 알기에 더더욱 제론의 결정이 무모해 보였다. 막말로 영지에 기간트가 없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최소한 베르라도 갖다 써야 제대로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걱정 말고 돌아가. 아, 보고 가도 상관없고."

카이트는 지켜보기로 했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사태에 대비하고, 또 혹시라도 정말 제론이 이긴다면 그 대결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제론은 그렇게 정리한 다음 뤼게 백작에게 다가갔다.

"이 대결의 공증을 맡아 주십시오."

"그걸 제가 맡아도 되겠습니까?"

뤼게 백작의 말에 제론이 빙긋 웃었다.

"믿습니다."

뤼게 백작은 제론이 멍청한 건지 똑똑한 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자신은 슐린 후작과 같은 편이었다. 한데 공증을 제대로 맡을 리가 있겠는가.

제론은 뤼게 백작에게 그 말을 남기고 실바로 다가가 조종석에 천천히 탑승했다.

뤼게 백작은 그것을 멍하니 지켜봤다.

'이건 뭐지?'

어쨌든 공증을 맡기로는 했는데, 뭔가가 찜찜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공증이 있건 없건 상관없다는 걸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렇게 고개를 갸웃거리던 뤼게 백작의 눈에 카이트의 모습이 보였다. 카이트는 커다란 수정구를 들고 있었다. 그걸 본 뤼게 백작의 눈이 번득였다.

'영상 저장구?'

정보를 전달하는 방법 중 하나로 쓰는 아티팩트였다. 하지만 거의 쓰이지 않는다. 가격에 비해 쓸모가 별로 없기 때문이었다.

그 이유는 저장할 수 있는 영상의 시간이 너무 짧기 때문이었다. 저런 커다란 수정구에 고작 30초 정도 저장이 가능했다.

처음 개발될 때만 해도 마법의 혁명이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사장되기 직전의 아티팩트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체…… 이건 뭐지?'

뤼게 백작은 더 생각을 이어 갈 수가 없었다. 훈련장을 뒤흔들 정도로 쩌렁쩌렁 울리는 슐린 후작의 호통 때문이었다.

"지금 날 우롱하는 것이냐!"

히엠스가 강하게 발을 굴렀다.

꽈앙!

훈련장 바닥이 우르르 흔들렸다. 하지만 놀랍게도 조금도 부서지거나 금이 가지 않았다.

물론 그걸 발견하거나 신경 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 그들이 신경을 써야 할 것은 훈련장 바닥이 아니라 슐린 후작의 분노였다.

"고작 실바로 날 상대하겠다고? 최선을 다하지 않고 패배해 핑계를 만들 셈인가?"

슐린 후작은 진정으로 분노했다. 하지만 제론은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애초에 전 실바가 제일 편합니다. 색이 붉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 점이 좀 아쉽군요."

히엠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슐린 후작의 분노가 가득 담긴 주먹이었다. 그는 제론이 자신을 놀린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지금까지 가만둔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꽈앙!

히엠스가 바닥을 차고 달려 나갔다.

쿵쿵쿵쿵쿵!

엄청나게 빠른 속도였다. 과연 발굴형 기간트 중 최고인 히엠스다웠다. 또한 소드 마스터가 모는 히엠스다웠다.

실바는 히엠스가 달려오는데도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마치 그냥 서 있다가 얻어맞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당연히 그런 건 아니었다.

제론은 냉정한 눈으로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자신의 마나로 실바를 모두 장악했다. 그것만으로도 이 실바는 그냥 실바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성능을 갖게 되었다.

부우웅!

히엠스는 거의 몸을 날리다시피 주먹질을 했다.

실바가 고개를 까딱이며 옆으로 상체를 살짝 휘었다.

콰우우!

실바의 상체가 있던 곳을 히엠스의 주먹이 거칠게 훑고 지나갔다.

그리고 주먹이 적당히 속도가 줄어든 순간, 실바의 두 팔이 움직였다.

콰드득!

실바는 두팔로 히엠스의 팔을 감쌌다. 주먹질이 채 끝나지 않은 상황이기에 히엠스도 별다른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물론 그건 그야말로 찰나의 순간이었다.

실바가 히엠스의 팔을 확 당겼다. 주먹질을 하던 방향으로 당기는 바람에 힘이 더해져 순간적으로 히엠스의 균형이 무너졌다. 그 역시 찰나의 순간이었다.

너무나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그 타이밍이 아니었다면 아마 히엠스는 순식간에 반격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타이밍이 절묘했기에 히엠스는 채 어떤 행동을 취하지도 못했다.

균형이 무너진 히엠스의 옆구리에 실바의 허리 부분이 닿았다.

쩡!

그리고 그와 동시에 실바가 다리를 위로 힘껏 차올리며 허리를 앞으로 숙였다.

꽈앙!

꽈드득!

균형을 잃은 히엠스의 발목에 정확히 실바의 발끝이 닿았고, 그 순간 히엠스가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히엠스의 팔을 휘감은 실바의 양손에 더욱 강한 힘이 들어갔다.

부우웅!

일단 허공에 떠 버린 히엠스는 속수무책이었다. 만일 제론이었다면, 아니, 사람이었다면 뭔가 다른 수가 생겼을 것이다. 어쨌든 히엠스의 라이더는 소드 마스터인 슐린 후작이었으니까.

하지만 허공에 떠오른 것은 히엠스였다. 히엠스는 그렇게 허공을 한 바퀴 빙글 돌아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꽈아아아아앙!

그냥 쓰러진 것과는 차원이 다른 충격이 히엠스를 덮쳤다. 더구나 실바는 마지막 순간 내던지듯 손을 놓아 버렸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과부하가 걸리긴 했지만 기체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히엠스는 바닥에 대자로 누운 채 일어나지 못했다. 라이더의 몸에 충격을 받은 건 아니었다. 사실 히엠스는 라이더를 워낙 철저히 보호하는지라 충격이 거의 가지 않았다.

문제는 정신적인 충격이었다. 슐린 후작은 자신이 모는 히엠스가 고작 실바에게 내동댕이쳐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게다가 그 말도 안 되는 기술은 또 뭔가. 생전 처음 봤고, 처음 당해 봤다. 만일 히엠스가 아니라 베르 정도였다면 그 거대한 충격을 완전히 흩어 내지 못하고 라이더가 다쳤을 것이다.

기간트는 엄청나게 무거운 만큼 이런 경우 받는 충격 또한 상상을 초월하는 법이었다.

히엠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실바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마치 일어날 때까지 기다려 주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이윽고 히엠스가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내가 널 너무 얕봤다. 네 실력을 인정하마. 하지만 이젠 다를 것이다."

히엠스가 검을 뽑았다. 조금 전과 달리 삼엄한 기세가 느껴졌다.

"검을 뽑아라. 이번에도 날 이긴다면 군소리하지 않고 돌아가지."

슐린 후작의 결의가 느껴졌다. 절대 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검에 담겨 번득였다.

제론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담담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전혀 흥분하지도 않았다. 그저 물처럼 고요히 다음 싸움을 준비할 뿐이었다.

실바가 검을 뽑았다.

그러자 히엠스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며 실바의 주위를 맴돌았다. 상대를 자신보다 강하다고 인정하고 빈틈을 찾으려 애쓰는 것이다.

평소의 슐린 후작이라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슐린 후작이 제론을 인정했다는 뜻이었다.

히엠스가 실바의 좌측으로 돌았다. 검을 든 오른손에서 멀어지는 것이 더 유리했기에 취한 행동이었다. 한데 실바가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상대가 측면으로 돌면 방향을 바꿔 정면이 향하게 해야 한다. 저렇게 가만히 있는 건 공격해 달라고 애원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완전히 왼쪽을 점했다. 오른손에 있는 검을 휘둘러 방어하기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히엠스는 즉시 몸을 날렸다.

꽈앙!

거의 점프에 가까운 돌진이었다. 살짝 발이 허공에 뜬 채, 앞으로 쭉 나아갔다.

콰우우!

히엠스의 검이 그대로 실바의 허리를 갈라 갔다.

그 순간, 실바가 한 걸음 옆으로 걸었다. 한데 히엠스에게서 멀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히엠스 쪽으로 다가갔다.

그것이 히엠스가 휘두른 검의 타점을 완전히 어긋나게 만들었다.

그와 동시에 달려든 히엠스를 자신의 사정거리 안에 둘 수 있게 되었다.

그야말로 타이밍의 승리였다.

워낙 절묘한 타이밍을 찔렀는지라 슐린 후작은 이번에도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없었다.

실바가 히엠스의 팔을 휘감았다. 그리고 검을 휘두르던 방향으로 힘껏 히엠스를 당겼다.

히엠스의 균형이 어긋난 순간 슬쩍 발을 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꽈과광!

히엠스가 꼴사납게 나동그라졌다. 균형을 잃은 상태에서 발까지 걸리니 허공에 떠올랐고, 그 순간 실바가 힘주던 방향을 약간 아래로 틀어 버렸기에 제대로 착지를 할 수 없었다.

바닥을 구르던 히엠스가 억지로 균형을 잡으며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실바를 놓쳐 버렸다. 찾을 수가 없었다. 슐린 후작은 갑자기 머리를 짓누르는 듯한 느낌에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실바의 커다란 발바닥을 보았다.

꽈광!

실바가 높이 점프해서 발로 히엠스를 내리찍었다. 히엠스는 채 균형을 되찾기도 전에 또 나동그라져야 했다.

콰득!

바닥에 쓰러짐과 동시에 실바의 검이 히엠스의 목에 박혔다. 히엠스의 목을 감싼 철갑이 종잇장처럼 찢어져 버렸다.

실바는 검을 그대로 꽂은 채 뒤로 훌쩍 물러났다.

히엠스는 양팔을 벌리고 바닥에 누운 채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망가진 건 아니었다. 목의 철갑이 뜯겨 나가긴 했지만 마법진이 망가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제론이 제법 신경을 써서 찌른 덕분이었다.

슐린 후작은 일어날 수가 없었다. 또 덤벼 봐야 똑같은 일이 반복될 뿐이라는 걸 알았다. 방금 목에서 빗겨 맞는 것도 사실 제론이 봐준 거라는 사실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지독한 패배감이 엄습했다.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패배를 할 수 있단 말인가. 고작 실바에게 압도적으로 졌다. 패배감이 짙어져 절망감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끼이익.

히엠스가 일어났다. 그리고 목옆에 꽂혔던 검을 뽑았다. 검을 든 히엠스가 천천히 실바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검을 내밀었다.

실바가 당연하다는 듯 검을 받았다.

"아주 깨끗이 졌군."

"좋은 승부였습니다."

제론의 말에 슐린 후작이 쓴웃음을 지었다.

"굳이 위로해 줄 필요 없네. 진 건 진 거니까. 이런 압도적인 패배는 태어나서 처음이군. 아주 좋은 약이 되었네."

슐린 후작은 벌써 패배감과 절망감을 벗어 버렸다. 그 정도 정신력이 없었다면 결코 소드 마스터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히엠스의 해치가 열렸다. 슐린 후작은 훌쩍 뛰어내린 다음 히엠스를 돌려보냈다.

그러자 제론도 해치를 열고 실바에서 내렸다.

슐린 후작의 표정은 상당히 개운했다. 조금 의외였다. 그동안 지켜본 그의 말과 행동을 보면 저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 사람 같지가 않았었다.

"약속은 꼭 지키겠네."

"후작님을 믿겠습니다."

슐린 후작이 빙긋 웃었다. 예전 같으면 이런 말을 들어도 버럭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럼 자신을 뭐라고 생각했느냐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화가 나지 않았다.

"이거, 어쩌면 내가 자네에게 고마워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이렇게 머리가 맑아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

제론도 빙긋 웃었다. 진짜 소드 마스터가 되었기에 지금 슐린 후작이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었다.

슐린 후작은 사실 그동안 약간의 마나 불균형 상태였다. 이는 육체적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 문제를 야기한다. 근본적으로 정신에서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데 이번에 지독한 패배 후, 상실감과 절망감을 느끼고 그것을 이겨 내면서 정신이 한층 강해졌다. 덕분에 불균형 상태에서 살짝 벗어났다.

아마 앞으로는 슐린 후작의 노력 여하에 따라 완전히 그 문제를 해결하고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대단하군. 솔직히 붉은 학살자라는 정보를 봤을 때는 코웃음을 쳤는데, 내가 완전히 사람 잘못 봤어."

"과찬이십니다."

슐린 후작은 그 뒤로도 한동안 제론에게 호의 어린 말을 해 주었다.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뤼게 백작은 자신의 입이 벌어진 줄도 모르고 멍하니 서 있었다.

그렇게 크란 제국 소드 마스터의 방문이 일단락되었다.

슐린 후작은 다음 날 바로 돌아갔다. 더 남아 있자고 은근히 권유하던 뤼게 백작을 향해 단호히 고개를 젓고 그를 강제로 데리고 돌아가 버렸다.

슐린 후작은 몇 번이나 반복해서 약속을 지키겠다고 다짐했다.

사실 마스터를 만드는 검술에 관심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젠 그보다 지금의 자신을 좀 더 갈고닦는 게 중요했다.

이번 일을 겪으며 어렴풋이 더 위로 올라갈 단초를 발견한 것이다. 그걸 찾아내는 것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를 검술을 새로 익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것 아닌가.

어쨌든 슐린 후작 일행이 돌아감으로 인해 에어스트 백작령은 평소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난민도 빠르게 정착되어 갔고, 진행 중인 사업도 다들 꾸준히 앞으로 나아갔다.

제론은 간만에 영지를 둘러보며 몇 가지 일을 처리했다. 내버려 둬도 상관없었지만 자신이 나서면 훨씬 빨리 처리가 가능한 것들이었다.

다른 때라면 그냥 내버려 뒀겠지만 지금은 시간을 최대한 아껴야 할 때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 ☆ ☆

제론은 영지의 일을 대충 마무리한 다음 바이스를 불렀다. 세나는 제론이 새로 내려 준 라쿠스 때문에 다시 공방에 틀어박혔고, 카이트는 실력이 대폭 늘어난 견습 라이더를 본격적으로 교육시키느라 바빴다.

"어때?"

제론의 물음에 바이스는 즉시 대답했다.

"총관 후임은 엔트가 적당합니다."

"엔트? 의외로군. 프로인트도 상당한 능력자인데 말이야."

"그림자의 정령 말입니까?"

"알고 있었어? 그런데도 엔트를 선택한 거야?"

"프로인트에게 들었습니다. 제법 친해졌거든요."

바이스는 신중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 판단에는 엔트가 적격입니다. 프로인트는 좀 더 고민이 필요합니다."

"왜? 쓸모가 없나?"

바이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닙니다. 그 능력을 어디다 써먹어야 할지 감이 안 잡혀서 그렇습니다."

"감이 왜 안 잡혀? 딱 적당한 곳 있잖아."

"정보 말씀입니까? 하지만 그는 거기에도 별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프로인트도 상당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정보 쪽에서 써먹으려면 정보에 관한 재능이 따로 필요하다. 감각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프로인트에게는 그게 모자랐다.

"그래서 어쩌려고?"

"모르겠습니다. 일단 고민해 봐야죠."

바이스는 한참을 더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엔트를 총관으로 만드는 건 프로인트의 자리가 결정됐을 때 하겠습니다."

"좋도록 해."

제론은 바이스가 새 총관을 결정하는 일에 관여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는 전적으로 바이스가 원하는 대로 처리되어야 하는 사항이었다.

대충 얘기가 끝나자 제론이 폭탄 발언을 했다.

"영지를 당분간 떠나 있을 거야."

"예에에?"

바이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영지에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밖으로 나간단 말인가.

영지에 영주가 없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계속 이런 식이면 영지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다.

"처리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어."

바이스의 표정이 굳자, 제론은 말을 이었다.

"일단 아드보 나무에 관한 일을 해결하고, 암시장에 다녀올 생각이야."

"암시장 말입니까?"

바이스의 눈이 커다래졌다.

"팔려고 준비한 기간트야 이제 우리가 다시 쓴다고 해도 팔아야 할 물건들이 좀 있어."

"하지만 그런 일은……."

굳이 그 일을 제론이 할 필요는 없었다. 이제 에어스트 백작령에도 제법 사람이 많았다. 암시장에 기간트를 내다 파는 일 정도는 충분히 알아서 할 수 있었다.

"아무에게나 맡기기 좀 그런 물건이야. 적지 않은 돈도 오갈 거고. 내가 직접 가는 게 나아."

제론이 적지 않은 돈이라고 표현했다면 그건 정말로 많은 돈이리라.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맡기긴 좀 그렇다.

일례로 얼마 전 제론이 2천만 골드를 들고 온 적이 있는데, 그때는 정말로 경악했다. 만일 이번에도 그 정도 금액이 오간다면 제론이 직접 하는 게 맞다.

"그럼 이번에는 대체 언제 돌아오실 생각이십니까?"

제론이 씨익 웃었다.

"왜 그래? 나 없어도 잘 하면서. 내가 없을 때 오히려 발전 속도가 팍팍 붙는 것 같은데? 아니야?"

바이스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제론이 있으면 얼마나 유용한데. 실제로 농지에 거미줄처럼 나 있는 수로도 제론이 혼자서 판 것이고, 거기에 물을 댄 것도 제론이 한 일이었다.

"어쨌든 잘하고 있으니 이대로만 가. 우리 당분간만 내실을 다지자고."

그 말을 하는 제론의 눈이 강렬하게 빛났다. 이 시기가 지나면 크게 날아오를 거라고 암시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때가 오면 슈린 공작가는 더 이상 세상에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다.

"그나저나 요즘 포로스는 좀 어때?"

바이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게 좀 어렵습니다. 가문에서 요구하는 양은 많은데, 막상 재료가 모자라서 제대로 물량을 맞출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써야 하니까요."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문제도 확실히 해결해야만 한다. 이번 여정에서 어떻게든 알아볼 생각이었다. 해결법은 단순하다. 테페룸을 잔뜩 구하면 된다.

"시간이 없군. 서둘러야겠어. 아마 내가 다시 돌아오면 웬만한 문제는 다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 기대하고 있으라고."

제론의 자신만만한 말에 바이스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에 강한 믿음이 떠올랐다. 제론은 지금까지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었다. 이번에도 반드시 기발한 뭔가를 들고 돌아올 것이다.

"그럼 다녀오십시오. 세나에게는 제가 잘 말해 두겠습니다."

세나라는 말에 제론이 어색하게 웃었다. 솔직히 그녀에게는 상당히 미안했다. 영지의 상황이 좀 더 나아지면 더 깊은 관계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아직은 아니었다.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현재 레늄 왕국의 상황은 심상치 않았다. 제론이 예상하기에 조만간 왕국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이다. 어쩌면 이 상황 자체를 누군가가 유도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정황을 따져 보면 확실했다. 바인도 비슷한 의견을 냈다. 물론 아직 정확히 확인한 것은 아니기에 확신을 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되도록 빨리 돌아오지."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걸음을 옮기는 제론의 표정은 더없이 결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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