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0화 (71/217)

Chapter 3 도착

해가 중천에 떠올랐다. 워낙 잘 먹고 푹 쉬었는지라 다들 표정이 밝았다.

특히 새로 합류할 난민의 경우는 상태가 제법 좋아졌다. 고작 하루 먹고 쉬었을 뿐인데 그래도 사람다운 표정이 생겨났다. 다 죽어 가던 자들 같지가 않았다.

그래도 아직 멀었다. 몸은 부실했고, 의욕도 크지 않았다. 그저 약간의 희망이 생겨난 것뿐이었다.

제론은 그들을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때가 되었다.

"모아라."

제론의 명령에 간만에 푹 쉬고 체력을 보충한 견습 라이더들이 우르르 움직였다.

200명이나 되는 기사가 나서니 2천 명의 난민을 통제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들은 새로운 난민을 한데 모았다. 다들 불안한 눈을 감추지 못했다.

그것은 기존의 난민 역시 마찬가지였다. 불과 얼마 전에 동료가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처참히 죽는 걸 목격했다. 한데 또 이상한 분위기가 만들어지니 두려움이 왈칵 솟았다.

"이쪽으로 서라."

"거기서 움직이지 마!"

견습 라이더들은 미리 명령을 받은 대로 살짝 거친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들은 가볍게 하는 말과 행동이었지만 받아들이는 난민의 입장에서는 두렵기 그지없었다.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라이더들은 그들이 섣부른 행동을 하지 못하게 주변에 서서 날카로운 눈으로 감시했다.

난민들은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라이더들과 제론의 눈치를 살폈다.

제론은 불안에 떠는 난민을 보며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계속 눈치를 살피고 있던 난민의 시선이 일제히 제론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곳에는 높은 기둥 위에 묶인 프로인트가 있었다. 어찌나 높은지 만일 떨어지기라도 하면 그대로 즉사할 것만 같았다.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다들 웅성거렸다. 제론은 목소리에 마나를 담아 담담히 말했다.

"나눠 줘라."

제론의 명령에 난민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고, 라이더들은 굳은 표정으로 커다란 강철 상자를 들고 움직였다. 강철 상자는 모든 난민에게 주어졌다. 상당히 무거웠다.

나이를 고려해서 무게에 차등을 주긴 했지만 다들 가만히 들고 있는 것만도 힘들었다. 그만큼 무거운 상자였다.

"그걸 들고 저 기둥으로 가라."

제론의 말에 다들 아연실색했다. 이 무거운 걸 들고 어떻게 저기까지 간단 말인가. 이건 몸이 건강했을 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데 지금은 힘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들이 있는 곳에서 프로인트가 묶인 기둥까지는 수백 미터가 넘었다.

"상자를 떨어뜨려선 안 된다."

다들 입을 벌렸다. 더 불가능한 주문이었다. 상자는 지금 당장 떨어뜨릴 것 같았다.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중간에 포기해도 된다. 포기하면 휴식과 음식이 주어질 것이다."

이번에는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거면 이런 일은 대체 왜 시킨단 말인가. 생각해 보면 갑자기 제론이 이러는 것도 이상했다. 밑도 끝도 없이 이런 걸 왜 시키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제론의 말에 다들 머릿속이 하얗게 날아가 버렸다.

"한 명이라도 포기하면 프로인트는 죽는다. 그걸 명심하도록."

난민들의 팔에 저절로 힘이 꽉 들어갔다. 이걸 놓치면 프로인트가 죽는다니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며 손과 팔에 힘을 준 것이다.

"시간이 많지 않다. 곧 떠나야 하니 서둘러라. 그 상자를 놓고 프로인트를 꺼내 오든 아니면 중간에 포기하고 그를 죽이든 선택은 너희들의 몫이다."

제론은 그 말을 끝으로 손을 내저었다. 부드러운 바람이 난민들을 한 차례 휘감고 사라졌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난민들이 서둘러 움직였다.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그에 대해 자세히 생각을 가질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저 지금은 움직여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만은 않았다.

몇 발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상자는 엄청나게 무거웠다. 당장 놓쳐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난민들은 아무도 상자를 쥔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그들의 표정에 절박함이 어렸다.

지금까지 한 번도 희망의 눈빛을 보여 주지 않은 자들조차 그랬다. 그들도 필사적으로 이를 악물고 걷고 또 걸었다.

뛰지는 않았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뛰다가 자칫 상자를 놓치기라도 하면 프로인트가 죽을 것 아닌가.

제론은 깊이 가라앉은 눈으로 그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저들이 다 도착하지 않으면 프로인트를 죽이겠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건 그저 동기부여의 일환이었다.

자신을 여기까지 이끌어 준 프로인트의 목숨마저 가벼이 여긴다면 그는 굳이 데려갈 필요가 없었다. 최소한의 의욕이나 의지조차 없는 사람은 분위기만 흐린다. 오히려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사실 제론은 저들이 한 명도 기둥에 도착하지 못할 거라고 예상했다. 그만큼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얼마나 의욕을 보이고 독기를 품는지는 볼 수 있었다. 그것만 확인해도 데려갈 사람과 남겨 둘 사람을 가려낼 수 있었다.

제론은 눈을 번득이며 상자를 들고 열심히 걸어가는 난민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제론도 방심할 수 없었다. 2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모두 확인해야 한다. 그건 제론에게도 새로운 도전이었다.

난민들은 이유도 모른 채 그저 걸었다.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지만 아무도 포기하지 않았다.

제론은 그 모습을 보며 눈에 이채를 띠었다. 처음 생각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이들 중 최소한 절반은 데려가 봐야 살 의욕이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한데 지금 보니 그렇지 않았다.

제론은 좀 더 지켜봤다. 아직은 아니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아마 판가름이 날 것이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야 사람의 진가가 나타나는 법이다.

점점 속도가 줄어들었다. 다들 괴로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절반쯤 갔을 때, 한 명이 주저앉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상자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든 다시 일어나려고 애썼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지만 이미 한계를 훌쩍 넘어 버린 몸은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았다.

그 사람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높은 기둥에 묶여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프로인트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괴성을 지르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으아아아아!"

놀랍게도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힘겹게 다시 걸음을 옮겼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지만 어쨌든 프로인트를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 뒤로도 계속 주저앉는 사람들이 나왔다. 하지만 누구도 포기하지 않았다. 단 한 명도.

제론은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봤다. 이미 마음은 정했다. 하지만 끝을 보고 싶었다. 저들이 저 일을 끝냈을 때 얻을 성취감을 빼앗고 싶지 않았다.

처음에는 아무도 성공하지 못할 거라 여겼는데, 이제는 누구도 실패할 것 같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여전히 저들의 상태는 좋지 않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속도가 느려졌다. 그리고 중간에 주저앉는 횟수가 늘어났다.

그때 구경하던 난민 중 하나가 외쳤다.

"힘내!"

그 말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저기서 응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주저앉지 마!"

"이제 얼마 안 남았어!"

"할 수 있어! 힘을 내라고!"

2만 명에 가까운 사람이 동시에 하는 응원은 정말로 대단했다. 벌판이 온통 응원 소리로 가득 찼다. 그 응원 안에는 날카로운 눈으로 감시하던 200명의 라이더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론은 그것을 보며 씨익 웃었다.

이건 기대 이상이었다. 새삼스러운 눈으로 프로인트를 쳐다봤다. 프로인트의 표정이 분명히 보였다. 웃고 있을 거라고 여겼지만 그는 울고 있었다.

이윽고 처음으로 기둥에 도착한 사람이 나왔다. 그는 상자를 기둥 아래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으로 걸어가 그대로 누워 버렸다. 다른 사람이 상자를 쌓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그 뒤로 연이어 사람들이 도착했다. 그들 역시 처음 도착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상자를 놓고 멀리 떨어진 곳에 누웠다.

그야말로 초인적인 힘이었다. 그것도 2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두 그런 힘을 발휘했다. 어느새 2천 개의 상자가 차곡차곡 쌓였다.

상자는 계단을 이뤘다. 체력이 없어 상자를 높이 쌓는 게 문제가 되자, 라이더 중 하나가 나서서 상자 쌓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 순간 다들 흠칫 놀라 제론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제론이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다른 라이더들도 우르르 달려들어 상자 쌓는 것을 도왔다.

결국 2천 명이 모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그걸 지켜보던 사람들이 전부 눈시울을 붉히며 만세를 외쳤다. 어마어마한 함성이 벌판을 가득 메웠다.

제론은 그들이 쌓은 상자로 천천히 걸어갔다. 제론이 움직이자 함성 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다들 침을 꿀꺽 삼키며 제론을 바라봤다.

강철 상자로 만들어진 계단은 제법 견고했다. 제론은 그 계단을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그리고 기둥에 묶인 프로인트를 손수 풀어 주었다.

"고생 많았다."

프로인트가 고개를 저었다.

"제게도 보람되고 충실한 시간이었습니다.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제론은 프로인트와 함께 계단을 내려왔다. 그리고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며칠 더 쉰다. 제대로 몸을 만들어 두도록."

제론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일제히 환호성이 울렸다. 다들 만세를 외치며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다시 축제가 이어졌다.

제론은 한 발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지켜봤다. 오늘의 일은 아마 남은 여정에 거대한 추진력을 만들어 줄 것이다. 짐 덩이가 될 뻔한 이들이 이젠 연료가 되었다.

"재미있군."

이래서 세상이 재미있는 것 아니겠는가. 제론은 강철 마차 위에 올라가 앉았다. 그곳에서 축제를 벌이느라 난리가 난 난민들을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무려 사흘이었다. 제론은 사흘 동안 이동을 멈추고 휴식을 취했다. 일정이 늘어나겠지만 충분히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

새로운 난민 2천 명은 곳곳에 섞이며 전체적인 단합을 유도해 냈다. 수도의 빈민들이 거기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겉돌던 사람들도 모두 하나가 되었다. 이제 한 영지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제론은 남은 식재료를 몽땅 풀어서 그들의 축제를 도왔다. 지난 사흘 동안 정말 제대로 쉬었고, 체력을 상당히 비축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이동 속도가 더 빨라졌지만 다들 무리 없이 버텨 냈다.

물론 아드보 워터의 힘이 가장 컸다. 아무도 죽지 않았고, 라이더들의 몸에 쌓이는 마나의 양도 점점 늘어났다.

이동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나중에는 모두의 한계를 넘나들 정도로 강행군을 이어 갔다.

그로 인해 10일이 더 지났을 때에는 쉬었던 사흘의 시간을 보충해 냈다.

제론이 말레피 후작가를 떠난 지 정확히 한 달이 되는 날, 난민을 태운 강철 마차가 에어스트 백작령에 들어섰다.

☆ ☆ ☆

미리 연락을 받은 바이스는 난민을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했다. 병사와 영지민을 잔뜩 동원해 난민을 씻기고 먹이고 쉴 장소를 제공했다.

워낙 준비를 철저히 했는지라 약간의 빈틈도 없었다. 바이스의 일처리는 날이 갈수록 발전했다. 그래서 지금은 웬만한 영지의 총관도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의 관록을 보여 줬다.

바이스는 어쩌면 자신이 마법사가 아니라 총관 체질이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다. 마법에 대한 열정은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새로운 총관이 필요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총관 후보가 나왔지만 다들 바이스 선에서 잘라 버렸다. 그들은 지금 행정 업무를 보고 있다.

좋은 총관이 되려면 전체를 보는 눈이 필수였다. 영지 전체를 머릿속으로 조망할 수 있어야 하고, 이 일을 처리했을 때 어디로 어떤 여파가 미치는지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타난 총관 후보들은 결정적으로 그 두 가지 능력이 전혀 없었다.

"하여튼 대단하군."

바이스는 난민을 확인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분쟁 지역을 관통해 그 많은 난민을 데려왔다고 말하면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제론은 그것을 해냈다.

물론 기간트를 잔뜩 동원하긴 했지만 말이다.

현재 에어스트 백작령에는 엄청난 수의 기간트 라이더를 육성 중이었다. 게다가 기간트 라이더가 되기 위해 교육을 받는 사람은 처음에 실바를 이용해 연습을 할 수 있었다.

이는 거의 아카데미 수준이었다. 아카데미보다 더 많은 연습용 기간트를 보유한 셈이었다. 이 모든 것이 제론 덕분이었다.

현재 난민은 모두 성 근처에 새로 건설 중인 도시에 머물고 있었다. 처음 성을 지을 때부터 계획했던 도시라서 이젠 제법 모양새가 나왔다.

그중 완성된 건물 몇 개를 난민에게 나눠 줬다. 물론 임시였다. 나중에 그들은 자신이 살 집을 직접 짓게 될 것이다. 도시 안에 말이다.

지금은 몸부터 만들어야 했다. 난민의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하지만 참으로 신기하게도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강행군을 했는데도 말이다.

비결이 뭐냐고 묻는 바이스에게 제론은 물통 하나를 내밀었다. 물이 찰랑찰랑 담긴 물통이었는데, 처음에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다.

하지만 그 물을 마셔 보고는 이유를 차츰 이해했다. 대번에 알 수는 없었다. 물의 효과가 천천히 나타났으니 말이다.

"아드보 워터라……."

아드보 나무의 잎과 가지를 이용해 만든 물이라고 했다. 아드보 나무는 벨루스 백작령에 지천으로 깔려 있다. 구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그걸 이용해 이런 놀라운 성능의 물을 만들 수 있다니 놀라울 지경이었다.

아마 앞으로 에어스트 백작령의 영지민은 건강을 좀처럼 잃지 않을 것이다. 아드보 워터를 수시로 마실 테니까 말이다.

"애도 잘 낳겠군."

아드보 워터의 효능 중 하나가 정력 증진과 피부 미용이었다. 물을 장복하면 여자는 아름다워지고 남자는 활기가 넘칠 테니 자연스럽게 아이가 늘어날 것이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상황과 딱 맞아떨어지는 물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필요하려나……."

가장 걱정되는 것이 그것이었다. 최소한 여름이 지나기 전에는 써먹을 수 있어야 건설에 투입할 수 있었다. 또한 추수에도 동원하고 말이다.

2만 명이 넘기에 아이와 노인을 빼고도 상당히 수가 많았다. 바이스는 아드보 워터를 잘 이용하기로 했다. 영지민 전체가 먹을 정도로 양이 많지 않으니 일단 난민에게 먼저 쓰기로 했다.

"나중에 만드는 법을 배워야겠어. 아주 유용하니 말이야."

바이스는 이 아드보 워터가 에어스트 백작령의 특산물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런 효능을 가졌다면 누구든 마시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바이스는 물통에 든 아드보 워터를 한 모금 꿀꺽 마셨다. 그리고 심각한 눈으로 난민이 머무는 곳을 내려다봤다.

지금 바이스가 있는 곳은 마탑의 최상층이었다. 워낙 높아서 성 주변이 모두 보였다. 당연히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담겼다.

난민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절로 웃음이 났다. 솔직히 놀랐다.

저들은 다른 난민과 완전히 달랐다. 훨씬 의욕적이었고, 단합도 훌륭했다. 더구나 영지에 대한 애착이 벌써 형성되었다.

저런 자들은 시간이 지나고 나면 반드시 성공한다. 아마 영지에서 자리 잡는 것도 별문제가 없을 것이다.

제론에게 대체 무슨 마법을 부렸냐고 물었지만 제론은 대답해 주지 않고 웃기만 했다. 그리고 한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가만, 그때 소개한 사람이나 한번 만나 볼까? 이름이 프로인트라고 했지?"

바이스는 어렴풋이 이번 난민이 다른 이유가 바로 프로인트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위기를 보면 알 수 있었다. 난민들이 그를 얼마나 따르는지 말이다.

"어쩌면……."

바이스는 한 가닥 기대감을 갖고 마탑을 나섰다. 어쩌면 좋은 총관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음이 급해진 바이스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바이스가 프로인트를 찾아갔을 때, 그는 엔트와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확실히 우리 영주님은 보통 분이 아니십니다."

프로인트의 말에 엔트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보통 분이 아니시죠. 그러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가능하게 만드신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솔직히 전 믿지 않았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찾아가긴 했지만, 정말로 그 일을 성공할 줄은 몰랐습니다. 게다가 한 명도 안 죽고 도착했지 않습니까."

그게 더 놀라웠다. 물론 한 명도 안 죽은 건 아니다. 무려 800명에 달하는 사람이 죽었다. 그것도 성인 남자로만. 하지만 그건 불가항력이었다.

지금은 엔트도 인정했다. 만일 그때 그들을 죽이지 않았다면 이 여정은 결코 성공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이제 우린 뭘 하게 될까요?"

"글쎄요."

두 사람의 말에 대답해 준 것은 마침 나타난 바이스였다.

"조만간 각자가 살 집을 짓게 될 겁니다. 이 건물은 사실 상단을 위해 만든 거라서 이대로 이용이 불가능하거든요."

프로인트와 엔트의 시선이 돌아갔다. 두 사람은 바이스를 발견하고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인사했다. 이 영지의 총관이자, 말레피 후작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기에 더없이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했다.

"아!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냥 앉아 계십시오."

바이스가 빙긋 웃으며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엔트에 대해서도 미리 제론에게 얘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걸 보며 더욱 관심이 생겼다.

"제가 여기 온 것은 두 분께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이스의 말에 프로인트와 엔트가 긴장했다. 이런 고위직의 관심을 받아서 좋을 게 없다는 걸 경험으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평소보다는 긴장감이 살짝 덜했다. 바이스가 시종일관 웃으며 얘기했고, 정중함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보통은 이러기가 쉽지 않다. 바이스는 후작가의 자식인 데다가 에어스트 백작령의 총관이었다. 또 듣기로 백작령의 수석 마법사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이렇게 정중한 태도를 유지하니 당연히 호감이 생겨났다. 그 호감이 긴장감을 조금이나마 완화시킨 것이다.

바이스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빙긋 웃었다. 원하는 대로 분위기가 나오기 시작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두 분이 상당한 능력을 가졌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영지 전반에 대한 의견을 듣고자 찾아왔습니다."

둘은 기겁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당치 않습니다. 능력이라니요. 저희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도 지식도 없습니다."

"하하. 아무튼 얘기를 좀 나눠 보고 싶습니다."

바이스가 그렇게까지 나오니 두 사람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할 말이 별로 많을 것 같지는 않았다. 얘기를 굳이 많이 할 생각도 없었고 말이다.

하지만 일단 대화가 시작되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바이스에게는 열정이 있었고, 그것이 두 사람을 서서히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바이스는 열정을 가지고 대화에 임했지만 마법사의 특기를 발휘해 머리는 항상 냉정함을 유지했다. 그리고 차분히 객관적으로 두 사람을 분석했다.

처음에는 프로인트에게 관심이 갔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엔트에게로 관심이 옮겨 갔다.

엔트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시야도 넓었다. 게다가 직관력도 뛰어났다. 그야말로 바이스가 딱 원하던 총관상이었다.

'문제는 얼마나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건데…….'

바이스는 내심 차기 총관 적임자로서 엔트를 찍었다. 이제 자신은 저 높은 마탑의 주인으로 살아갈 때가 되었다.

반면 프로인트는 참으로 묘했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었고, 정도 깊었다. 하지만 이런 사람에게는 총관 자리를 맡길 수 없었다.

정이 너무 깊으면 맺고 끊는 것이 어려울 때가 많다. 프로인트는 딱 그럴 사람이었다.

바이스는 고민이 되었다. 대체 이 사람을 어디에 써야 할지 찾기가 어려웠다. 분명히 능력은 뛰어난데, 그 능력이 필요로 하는 곳이 얼른 떠오르지 않았다.

어쨌든 세 사람은 참으로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서로의 지식과 능력, 열정에 깊이 감탄했다.

나이도 모두 제각각이었고,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그들은 깊은 친분을 나누었다. 아마 서로 마음을 터놓기만 한다면 나이와 지위를 떠나 정말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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