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9화 (70/217)

Chapter 2 새로운 난민

쿵쿵쿵쿵쿵!

붉은 실바가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제론은 이대로 적을 모두 잡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방법이 있었다.

제론은 즉시 붉은 실바를 아공간으로 돌려보냈다. 조종석을 열고 뛰어내리면서 아공간에 넣는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동작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냈다.

그와 동시에 테오스를 불러냈다.

제론은 채 땅에 착지하기도 전에 테오스에 탑승했다. 불러냄과 동시에 탑승하는 방식이었기에 땅에 내려설 필요도 없었다.

쉬아악!

테오스가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달리는 게 아니라 거의 날아가다시피 했다.

이동하는 테오스의 주위에 각종 마법진이 희미한 빛을 뿌리며 떠올랐다.

마법진이 하나씩 떠올랐다가 사라질 때마다 테오스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테오스가 펼친 마법은 바람을 불렀고, 몸을 가볍게 만들었다. 또한 더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도록 앞에 있는 공기를 좌우로 갈라 버렸다.

잠깐 달렸을 뿐인데 벌써 라쿠스 하나를 따라잡았다. 게다가 그는 이번에 온 라쿠스 부대의 리더였다.

테오스에 탑승한 제론의 기감은 소드 마스터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었다. 소드 마스터가 되면서 테오스의 진짜 힘 중 일부를 쓸 수 있게 되었는데, 기감의 영역이 확장된 것이 바로 그중 하나였다.

제론은 정확히 적의 리더를 파악하고 뒤쫓았다. 그가 가장 빨랐기에 먼저 잡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라쿠스 부대의 리더는 우연히 뒤를 힐끗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시커먼 뭔가가 쏜살같이 달려오고 있었다. 어찌나 빠른지 어어 하는 사이 다가와 등에 손을 대는 게 아닌가.

꽝!

굉음과 함께 온몸이 뒤흔들리는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정신을 잃어버렸다.

꽈득!

테오스의 손이 라쿠스의 조종석을 뜯어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리더는 살려 둘 생각이었다. 그에게서 뭔가 얻어 낼 게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제론은 통째로 뜯어낸 조종석을 그대로 땅에 박아 버렸다.

퍽!

리더를 태운 채 땅에 깊이 들어간 조종석은 테오스가 다시 오지 않으면 꺼내기 힘들어 보였다.

제론은 라쿠스의 잔해를 벨트의 아공간에 담은 뒤, 다시 몸을 날렸다.

테오스가 두 번째 라쿠스를 잡은 것은 리더를 땅에 묻은 지 채 1분이 되지 않아서였다.

그때부터는 자비가 없었다. 아주 간단하게 조종석을 검으로 꿰뚫고 지나갔다. 사방으로 흩어진 라쿠스를 모두 잡기 위해 최적화된 경로를 잡았고, 테오스는 전혀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모든 라쿠스를 격멸했다.

라쿠스들이 워낙 멀리 도망쳤기에 그들을 쓰러뜨리기만 하고 수거는 안 했다. 결국 제론은 나중에 다시 경로를 되짚어 돌아가면서 하나하나 수거해야만 했다.

벨트의 아공간은 상당히 커서 쓰러진 라쿠스를 모두 담아도 충분히 공간이 남았다.

제론은 마지막으로 땅에 박아 놓은 리더의 조종석을 뽑아냈다. 리더는 여전히 정신을 잃은 채였다.

일단 테오스를 돌려보낸 제론은 검으로 조종석을 썩썩 그었다.

철컹! 철컹!

빛나는 마나를 두른 검은 특수한 공법에 의해 만들어진 금속을 마치 종이를 잘라 내듯 갈라 버렸다.

털썩.

제론은 리더를 끌어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그제야 리더가 정신을 차리고 신음을 흘렸다.

"끄으응."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 리더는 간신히 눈을 뜨고 앞을 확인했다. 그리고 무심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제론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랐다.

"에, 에어스트 백작?"

제론은 리더를 향해 한 발 다가갔다. 리더가 엉덩이를 질질 끌며 뒤로 물러났다.

"이, 이러지 마시오!"

"내가 뭘 할 줄 알고?"

"날 죽이면 에어스트 백작령이 무사할 것 같소? 이러지 않는 게 좋을 거요!"

리더의 말에 제론이 피식 웃었다.

"그럼 살려 주면 내 영지를 건드리지 않겠다 이건가?"

리더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절대 에어스트 백작령은 건드리지 않겠소."

"그걸 결정할 능력은 되고? 네가 싫다고 해 봐야 위에서 명령하면 따라야 할 것 아닌가. 예를 들어 슈린 공작의 명령도 듣지 않을 생각인가?"

제론의 말에 리더의 눈이 급격히 커졌다. 대체 자신이 슈린 공작가에서 왔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라쿠스는 아직 슈린 공작가 내부에서도 공개되지 않은 기간트였다.

제대로 공개하기 전에 이런 비밀스러운 임무를 처리할 때 쓰기로 계획하고 다방면에서 큰 활약을 하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오늘 임자를 제대로 만났고 말이다.

"그, 그걸 어떻게 알았소?"

제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이자를 살려 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너무 많은 것을 본 사람이다. 아마 이대로 돌아가면 큰 해악을 끼치리라.

"이제부터 생각나는 게 있으면 뭐든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이런 고통을 당하기 싫으면."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 손가락으로 리더의 가슴을 쿡 찍었다.

그 순간 리더가 눈을 까뒤집었다. 그리고 온몸을 비틀며 괴로워했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데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제론은 무심한 눈으로 그것을 지켜봤다.

3분이 지났을 때, 제론은 다시 리더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찔렀다.

"크허허헉! 허억! 허억! 허억! 허억!"

리더가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맹세코 태어나서 이런 고통은 처음이었다. 다시 이 고통을 겪으라면 차라리 죽을 것이다.

"아직 생각나는 게 하나도 없는 모양이군."

제론의 말에 리더가 화들짝 놀랐다. 뭔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말문이 막히는 법이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리고 제론의 손가락이 리더의 가슴에 닿았다.

다시 지옥과도 같은 3분의 시간이 지나갔다. 리더는 완전히 널브러져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고, 입을 놀렸다. 놀랍게도 두 번째는 첫 번째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고통의 끝이라고 여겼는데, 그보다 더한 고통이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세 번째는 그보다 더할지도 모른다. 그 공포가 리더의 마음과 정신을 완전히 짓눌러 버렸다.

"전 슈린 공작가의 비밀 기사단입니다!"

제론이 막 손가락을 들었을 때, 리더가 처음 외친 말이었다. 물론 여전히 손가락은 든 채였다. 리더는 다급히 새로운 말을 떠올렸다.

"에어스트 백작이 이끄는 난민을 죽이고 기간트를 탈취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리더는 그 뒤로 생각나는 말을 마구 떠들었다. 제론은 그것을 가만히 서서 듣기만 했다. 물론 그냥 들은 건 아니었다. 태블릿을 이용해 리더가 하는 말을 하나도 남김없이 기록하고 있었다.

한창 그의 말을 듣던 제론은 문득 의아해졌다. 대체 이들의 기습을 왜 미리 파악하지 못한 걸까?

슈린 공작가의 저택은 수도에 있다. 즉, 바인이 슈린 공작가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이들의 기습을 몰랐다.

이는 바인이 실수를 했거나, 아니면 실제로 이들에게 명령을 내린 사람이 슈린 공작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제론은 즉시 바인에게 연락을 했다.

―주군, 어쩐 일이십니까?

바인은 항상 제론과 연락할 때면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에게 진짜 날개를 달아 준 사람이 제론이라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좀 알아봐야 할 것이 있다."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바인의 자신만만한 말에 제론은 일단 오늘 있었던 습격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습격을 당했단 말입니까? 그것도 슈린 공작가의 비밀 기사단에게?

바인은 크게 당황했다. 슈린 공작가에서 벌어진 이런 중요한 일을 자신이 놓쳤다고 생각하니 등줄기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얼른 알아보고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서두르지 말고 확실히 알아봐라."

―예, 알겠습니다.

바인이 통신을 끊자, 제론은 여전히 주절주절 떠들고 있는 비밀 기사단의 리더를 쳐다봤다. 두 번의 고통을 겪으며 정신이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이대로는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으리라.

제론은 깔끔히 검을 휘둘러 리더의 목을 쳤다. 그리고 마법을 이용해 땅을 파고 그의 시신을 깊이 묻었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남은 건 천천히 이동하면서 바인의 연락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뭔가 이상해.'

예전에는 그렇게 거대해 보이던 슈린 공작가가 이제는 마치 누군가의 꼭두각시처럼 느껴졌다.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그쪽으로 크게 기우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 모든 일의 원흉이 슈린 공작가 뒤에 버티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만일 그렇다면 정말로 거대한 적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 생각을 떠올린 제론의 입가에 미소가 매달렸다.

강한 적을 떠올리니 오히려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미지의 적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슴이 떨렸다.

그게 누구든 박살을 내 버릴 것이다. 제론은 주먹을 꽉 쥐며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 일행이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밤은 더욱 깊어 갔고, 어둠 또한 점점 짙어졌다.

☆ ☆ ☆

그날 밤, 제론이 도착함과 동시에 강철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피비린내 나는 싸움터에서 굳이 쉴 이유가 없었다. 휴식은 하루를 더 이동한 뒤에 취하기로 했다.

꼬박 하루를 이동한 뒤, 넓은 황무지에 자리를 잡은 일행은 분주히 움직였다. 천막도 치고 모닥불도 피웠다. 그리고 불 위에 솥도 걸었다.

오랜만에 뜨거운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다.

제론은 강철 마차 위에 앉아, 삼삼오오 모여 뜨거운 스프가 든 그릇을 후후 불어 가며 마시는 난민의 모습을 구경했다.

조만간 에어스트 영지의 백성이 될 사람들이었다. 철저히 관리를 해서 한 명도 죽지 않은 상태로 영지에 데려갈 작정이었다.

'그나저나 벌써 800명이 죽었군.'

앞으로 200명이 더 죽으면 내기에서도 진다. 제론은 그걸 알면서도 그들을 단호히 죽였다.

앞으로는 더 철저한 관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라이더들에게 각별히 지시를 내려 뒀다.

사실 분위기가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 동료인지도 모를 800명이 순식간에 죽어 버렸다. 그 일을 겪은 지 고작 하루 지났는데 분위기가 좋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제론은 벨트를 쓰다듬었다. 그 안에 32기의 기간트가 들어 있다. 물론 테오스를 제외하고 말이다.

그들이 타던 기간트를 몽땅 벨트의 아공간에 담았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처리하느라 상당히 애를 먹긴 했지만 그래도 성공했다.

"그나저나 슬슬 바인한테 연락이 올 때가 되었는데……."

바인의 자존심을 생각하면 연락이 와도 벌써 왔어야 한다. 그런데도 아직 연락이 없다는 건, 그만큼 상대가 대단하다는 뜻이었다.

"하긴, 그러고 보니 저번에도 그런 적이 있었지."

예전에도 중간의 연결 고리를 전혀 찾지 못한 경우가 있었다. 그때도 슈린 공작가와 관계된 일이었다. 분명히 뭔가가 있었다.

그러고 있을 때, 마침 연락이 왔다. 바인이었다. 제론은 즉시 통신을 연결했다.

"어떻게 됐지?"

―죄송합니다. 못 찾았습니다.

제론은 깜짝 놀랐다. 바인이 이렇게 긴 시간을 들이고도 못 찾았다니!

"못 찾았다고? 네가?"

―누군지 모르지만 대단한 놈입니다. 연결 고리를 남기지 않고 제삼자를 동원해서 명령을 전달했습니다. 슈린 공작가에서는 비밀 기사단이 동원된 사실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제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게 사실이라면 지금까지 제론이 짐작한 것이 다 맞다는 뜻이었다. 누군가 슈린 공작가를 교묘히 이용하고 있었다.

"시간을 더 들여서 확실히 알아내. 배후에 누가 있는지. 또 그놈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무조건 찾아내겠습니다.

바인은 그렇게 보고한 뒤 통신을 끊었다. 아마 이제부터는 상당히 바빠질 것이다.

제론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마티가 더 필요해. 아무래도 유적 발굴을 서둘러야겠어.'

바인에게 더 폭넓은 정보를 안겨 주면 아마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능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리고 벨루스 백작령에도 은밀히 가 봐야 한다. 그곳에 있는 것이 분명한 유적을 찾아야 하니 말이다.

'당분간 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겠군.'

이렇게 바쁘니 유적 14층을 클리어하는 것도 미뤄야만 했다. 물론 미루지 않는다 하더라도 쉽게 클리어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초고대문명의 기간트는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대등한 싸움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리고 좀처럼 그 벽이 깨지지 않았다.

어쩌면 이럴 때일수록 차분히 시간을 두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제론은 긍정적으로 상황을 받아들였다. 어쨌든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새로운 유적을 발굴하는 일이었다.

이번 기회에 레늄 왕국의 모든 유적을 확인해 보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숨겨진 유적까지 몽땅 찾고 싶었다.

'베어크 영지에서처럼 광맥을 만들어 내는 유적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그게 아니라면 테페룸에 관계된 유적이라면 더 바랄 게 없을 듯했다.

초고대문명에 대해 알아 갈수록 테페룸이 얼마나 대단한 금속인지 깨닫게 된다. 초고대문명은 테페룸으로 시작해서 테페룸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다는 것은 테페룸에 대한 특별한 비밀이 있다는 뜻이다. 철 광맥을 만들어 낸 것처럼 테페룸 광맥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테페룸이 넘쳐 나지 않으면 그런 문명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테페룸이 넘쳐 나려면 그것을 만들어 내는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제론은 그렇게 판단했다. 그것이 그동안 초고대문명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한 결과였다.

그렇게 하루가 또 지나갔다.

다음 날부터 제론은 더욱 이동 속도를 높였다. 상당히 무리가 가는 일이었지만 차라리 시간을 단축시키는 게 나았다.

더 일찍 영지에 도착하면 이들에게 훨씬 양질의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할 수 있었다. 그게 오히려 살아남는 데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난민의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아무리 충분히 먹이고 아드보 워터를 이용해 체력을 보전한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오랫동안 난민 생활을 하며 나빠진 건강이 문제였다.

더구나 아이나 노인의 경우는 더 심각했다.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번째 희생자가 나올 것이다. 그리고 제론은 그걸 원하지 않았다.

그나마 수도에서 보충한 인원은 상태가 상당히 괜찮았다. 바인이 고르고 고른 빈민이었고, 미리 준비를 했기에 건강 상태도 제법 양호했다.

수도에서 바인이 준비한 빈민의 수는 무려 2000명이었다. 그들은 각각 5대의 마차에 나눠 타고 있었다.

가끔 마차가 멈춰 휴식을 취할 때마다 그들이 나서서 난민들을 도와줬다. 덕분에 난민의 상태가 완전히 최악으로 빠지는 걸 막을 수 있었다.

제론은 마차의 가장 높은 곳에 서서 앞을 바라봤다. 항상 감각을 최대한 열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상황에 대비했다.

5일째 되는 날, 제론의 시야에 뭔가가 들어왔다. 제론은 경각심을 가지고 감각을 최대한 날카롭게 갈았다. 그리고 멀리 퍼트렸다.

제론의 시야는 엄청났다. 기간트가 30분은 달려야 도착할 거리를 눈으로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난민?'

그들의 앞을 가린 자들의 정체는 난민이었다. 어쩌면 소문을 듣고 미리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제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전혀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어떻게 자신들이 가는 길을 정확히 알고 거기서 기다린단 말인가. 저들에게 정보를 제공한 누군가가 있었다.

제론은 혹시 있을지 모를 기습에 대비했다. 일단 감각에 더욱 집중해 기간트가 숨어 있지 않은지 확인했다. 굳이 기간트를 소환하지 않아도 기간트를 가졌는지 아닌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현재의 아공간 기술은 워낙 뒤떨어지고 비효율적이라서 거기에 들어가는 에너지가 엄청나다. 그 에너지를 감지하기만 하면 기간트의 유무를 알 수 있었다.

'일단 기간트는 없고…….'

기간트가 없다고 위험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일단 기간트만 없으면 어떤 상황이든 유리하게 이끌어 나갈 수 있었다. 이쪽에는 기간트가 무려 200기나 되니까.

게다가 난민의 상태를 보니, 무슨 짓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지만 하루 이틀은 절대 아니었다.

먹을 것이 있을 리 없으니 오랫동안 굶주렸을 것이다.

"일단 먹이긴 해야겠군."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뒤를 돌아봤다. 생각해 보니 강행군을 시작한 이후로 제대로 오랫동안 쉰 적이 없었다. 이번 기회에 잠깐 쉬었다가 가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오랜만에 음식다운 음식을 먹이는 것도 괜찮겠군.'

몇 번의 특식을 먹이기 위해 요리 재료를 충분히 준비했다. 그걸 이번에 풀면 될 듯했다. 아마 그걸로 힘과 희망을 얻어 버틸 만한 여력을 만들 수 있으리라.

"앞에 누군가 있습니다!"

임시 기사단장이 외쳤다. 그도 나름대로 검술과 마나 호흡법을 통해 수련을 쌓은 자였다. 게다가 기간트에 타고 있으니 제법 멀리까지 확인이 가능했다.

"난민이다. 그러니 속도를 천천히 늦춰라. 저들 앞에서 멈춘다."

마나를 담은 제론의 음성이 각 기간트 라이더의 귀에 스며들었다. 마치 옆에서 말하고 있는 듯 또렷한 음성에 다들 놀랐지만 그러려니 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영주인 제론은 이미 인간이 아니었다. 만일 이 상태에서 누군가가 조금만 작업을 하면 제론을 신격화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쿵쿵쿵쿵쿵!

강철 마차를 끄는 기간트의 수는 총 53기였다. 원래 50기였는데, 수도에서 5기가 추가되었고, 다시 반란으로 인해 2기가 사라져 53기만 남은 것이다.

53기의 기간트가 일제히 속도를 줄였다. 아주 조금씩 속도를 줄이고 다들 거기에 딱 맞추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들 무리 없이 그걸 해냈다. 그동안 꾸준히 달리면서 조종 실력이 월등히 향상된 결과였다.

앞으로 집단전 훈련을 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어쩌면 군부의 기간트 라이더와 비슷한 실력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쿵쿵쿵! 쿵쿵! 쿵! 쿵! 쿵!

기간트 부대와 난민이 급격히 가까워졌다. 기간트의 속도가 조금 더 빨리 줄어들었다. 그리고 이내 멈췄다. 그들과 난민 사이의 거리는 고작 30미터 정도에 불과했다.

다시 움직이면 몇 초 안에 몽땅 밟아 버릴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니 그들을 보는 난민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다들 벌벌 떨었다.

제론은 두려움에 떠는 난민을 차분히 훑어봤다. 2천 명쯤 되는 수였는데, 다들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상태가 나빴다.

"후우. 이거 정말로 난감하군."

저들을 실어 나르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아직 아공간에는 마차가 7대나 남아 있었다. 산술적으로 2800명은 더 데리고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저들은 강철 마차를 탈 상태가 아니었다. 아마 마차에 태워 기간트로 끌고 가면 며칠 버티지 못하고 죽어 나갈 것이다.

난민 대부분은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는데, 그중 한 명이 비척비척 일어나 앞으로 걸어 나왔다. 분위기를 보니 그가 난민을 이끄는 자였다.

제론은 눈살을 찌푸리며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바닥에 가볍게 내려선 다음 난민에게 다가갔는데, 앞으로 나온 사내의 눈빛이 보였다. 비록 몸은 다 죽어 가고 있지만 눈빛은 형형하기 그지없었다.

절대 죽어 가는 사람이 낼 수 있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는 희망을 갖고 있었고, 의지력을 갖고 있었다.

제론은 나머지 난민도 확인했다. 반반이었다. 눈빛마저 죽은 자들이 반, 그렇지 않은 자들이 반. 살아갈 의지가 있다면 인간은 어떻게든 살기 마련이다.

'저들은 데려갈 수 있을까?'

사실 많이 데려가면 데려갈수록 에어스트 백작령에는 이득이었다.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가장 모자란 것이 사람이었으니까.

돈은 넘쳐 나는데 사람이 없으니 이런 식으로라도 인구를 늘리려고 하는 것 아닌가.

2천 명의 사람 중 절반이라면 1천 명이다. 그 정도만 해도 상당한 숫자였다. 건강해지면 애도 낳을 것이고, 그럼 영지의 미래를 짊어질 인구가 늘어나는 셈이었다.

제론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앞으로 나온 사내 앞에 도착했다.

사내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렸는데, 제론이 앞으로 다가오자 더없이 정중한 자세로 허리를 숙였다.

"프로인트라고 합니다. 에어스트 백작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제론의 눈빛이 깊어졌다. 역시 이들은 제론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가진 채로 기다렸다.

"누구지?"

제론의 맡도 끝도 없는 질문에도 프로인트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마치 미리 이런 상황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제겐 친구들이 많습니다. 그 친구들이 조금씩 알려 주었습니다."

"친구들?"

제론은 프로인트를 유심히 살폈다. 제법 나이가 있어 보였다. 쉰은 넘은 듯했다. 하지만 고생을 많이 하면 나이가 들어 보이니 더 젊을 수도 있었다.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잘 띄지 않는 친구들입니다."

그 말에 제론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정령?"

이번에는 프로인트가 놀랄 차례였다. 그 설명만으로 단번에 정령이라는 걸 집어내다니, 생각보다 에어스트 백작의 식견이 대단하다고 여겼다.

제론이 의아한 눈으로 프로인트를 보며 감각을 가다듬었다. 제론이 알기로 정령으로 정보를 알아낼 수는 없었다. 정령과 친해져서 놀 수는 있지만 그들과 의사소통을 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무리 감각을 집중해도 정령의 느낌이 들지 않았다. 제론은 바람과 물의 정령사이기도 했다. 또한 물의 정령과 계약할 때 정령에 대한 감각을 새로이 가다듬었다.

만일 누군가 정령을 불러내면 단번에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한데 프로인트에게는 정령의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정령을 부를 수 있나?"

제론의 물음에 프로인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자신은 이 귀족에게 잘 보여야만 한다. 그래야 뒤에 있는 2천 명의 생명을 살릴 수 있을 테니까.

"스키아."

프로인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그림자가 불쑥 솟아났다. 그림자 속에서 그림자가 형체를 가지고 나타난 것이다.

"그림자?"

"그림자의 정령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것이 정령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전 그저 그런 것 같아서 그렇게 믿고 있을 따름입니다."

제론은 묘한 눈으로 스키아를 쳐다봤다. 분명히 정령이었다. 정령의 느낌이 들었다.

한데 상식적으로 그림자에 정령이 있다는 게 말이 될까? 그 부분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림자라는 것은 빛이 가려지면서 생겨나는 현상이었다. 특정한 에센스가 깃든 것이 아니었다. 그런 그림자에 정령이 생긴다? 뭔가 좀 이상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정령이었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는데, 보면 볼수록 정령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정말로 정령이로군."

제론의 말에 프로인트가 깜짝 놀랐다.

"설마 저게 보이십니까?"

제론은 그 질문에 답을 하지 않고 궁금한 걸 물었다.

"하지만 저것만으로 내 일에 대해 알아냈다는 건 이해하기 어려운데?"

프로인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스키아가 다시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사라진 것이다.

"후우. 사실 정령을 소환하는 것은 정말로 힘든 일입니다. 전 3분을 넘기면 정신을 잃어버립니다. 더구나 요즘처럼 건강이 좋지 않을 때는 1분도 버겁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제론은 이해가 안 갔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자의 정령이 가진 특성일 수도 있었고, 또 제론의 정령이 다를 수도 있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차근차근 알아 가면 된다.

프로인트는 차분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 갔다.

"제 정령인 스키아는 그림자를 통해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저와 멀리 떨어진 곳을 보지는 못합니다. 제게 강하게 귀속된 상황이라서 그렇습니다."

제론의 눈이 빛났다. 사람이 존재하면 항상 그림자도 함께 있다. 만일 그걸 엿볼 수 있다면 굉장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거리가 지나치게 짧다는 점입니다. 1킬로미터도 채 되지 않습니다."

프로인트가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제론은 그래도 굉장하다고 생각했다. 영주성 근처에 있으면 그들에 대한 모든 것을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게다가 짧은 소환 시간은 정말로 큰 약점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정보 하나를 얻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얻어걸리는 것들은 제법 많습니다. 중요한 곳을 들여다보면 그렇습니다."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어떻게 자신에 대한 정보를 알아냈는지도 대충 알아차렸다. 몇몇 영주성 근처를 배회하며 알아낸 정보일 것이다.

프로인트의 표정은 담담했다. 제론은 그것을 보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보통 이 정도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훨씬 더 풍요롭게 살기 마련이다. 한데 이렇게 난민을 이끌며 고생을 자처하다니.

정보 몇 개 주워서 장사를 해도 이보다는 훨씬 나은 삶을 살아갈 텐데 말이다.

'게다가 자신이 정령사라는 걸 당당히 밝혔어.'

제론은 프로인트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늘어져 있는 난민들을 다시 한 번 살펴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령을 불러내고 그에 관한 얘기를 나누긴 했지만 거리가 제법 있고, 프로인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기에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나름대로 주의를 한 것이다. 즉, 자신이 정령사라는 사실을 제론에게만 말했다는 뜻이었다.

"왜 나지?"

"제가 들은 정보는 두 가지였습니다."

제론이 눈을 빛내자 프로인트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하나는 기간트를 이용해 난민을 데리고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말레피 후작가와 한 내기였습니다."

정확히는 말레피 후작가와 한 내기가 아니라 말레피 후작의 딸인 밀레나와의 내기였지만 큰 상관은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필요한 정보는 정확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백작님이라면 제 모든 걸 맡겨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받아 줄 거라고 확신하고 온 건가?"

프로인트가 씁쓸히 고개를 저었다.

"저도 제 능력이 제법 쓸 만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또 쓸모없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저 운명을 던졌을 뿐입니다. 그러니 절 쓸모없다고 죽이셔도, 또 험한 일에 이용을 하셔도 괜찮습니다."

그 정도 각오는 하고 왔다는 뜻이었다. 제론은 내심 이 사내가 마음에 들었다. 능력도 그렇고 말이다.

'어쩌면 저 그림자의 정령을 내가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제론이 부리는 정령인 아네모스나 네로는 거의 시간제한 없이 다룰 수 있었다. 소드 마스터가 되면서 더욱 부담이 가벼워져서 이제는 정령을 소환하나 그렇지 않으나 차이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만일 스키아를 제론이 얻을 수 있다면 그 효용 가치는 엄청날 것이다. 물론 마티가 있긴 하지만, 마티를 쓸 수 없는 장소도 많으니 그때마다 정말로 유용하지 않겠는가.

"일단 먹고 시작하지. 조금만 더 기다리면 다 죽을 것 같으니까."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서 숨죽인 채 지켜보고 있던 견습 라이더들을 불렀다.

일제히 기간트가 아공간으로 돌아갔고, 라이더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제론은 그들에게 지시를 내려 죽어 가는 난민을 보살피게 했다.

견습 라이더들은 능숙하게 일처리를 했다. 일단 달려가 수도에서 온 빈민을 몽땅 마차에서 나오게 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난민들을 보살폈다.

제론은 아무도 모르게 마차 뒤쪽에 식재료를 잔뜩 꺼내 놓았다. 아공간을 쓰는 모습을 괜히 들키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벌써 아는 사람이 많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번에 보여 준 제론의 행보를 유심히 살핀 사람이라면 이상한 점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아공간 하나만 끼워 넣으면 다 맞아떨어진다.

아마 생각이 좀 있는 사람이라면 제론에게 특별한 아공간 아이템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물론 알아봐야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순식간에 잔치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제론이 꺼내 놓은 식재료는 신선하고 풍부했다.

고기에서부터 야채까지 없는 게 없었다. 조미료와 향신료까지 있었다.

그들은 오랜만에 포식을 했다. 물론 지금까지 굶은 난민들에게 갑자기 음식을 먹이면 죽을 수도 있기에 빈민들이 한 사람씩 붙어서 조절을 시켰다.

음식은 충분했기에 강제로 조절해도 발작이 일어나거나 유혈 사태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제론은 그곳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번 기회에 충분히 쉬면서 체력을 보충하기로 한 것이다.

시간을 오래 지체하는 건 결코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아무리 기간트를 200기나 보유하고 있다지만 1왕자나 2왕자 진영이 마음먹고 나서면 바람 앞의 등불처럼 흔들릴 것이다.

또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면 그 와중에 난민이 휩쓸릴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렇게 되면 몇이나 살아남겠는가. 난민 수송의 의미 자체가 사라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이동도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다.

고민에 잠긴 제론의 곁에 프로인트가 다가왔다. 그의 표정은 시종일관 정중함을 잃지 않았다. 또한 눈빛에는 언제나 존경을 담았다.

"그쪽에 앉지."

제론이 손으로 가리킨 곳에 넓적한 바위가 있었다. 프로이트는 고개를 숙인 뒤 그곳에 가서 앉았다. 이제 대화를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다.

"일단 내가 저들을 받아들일지 아닐지가 제일 궁금하겠지?"

프로이트가 당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도 백작님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제론은 시간을 끌지 않았다.

"일부만 받아들일 생각이다."

프로인트의 표정에 실망감이 감돌았다. 일부만 받아들이겠다는 건 몸 상태가 비교적 괜찮은 사람들만 데려가겠다는 뜻 아닌가. 미리 죽을 사람을 골라내겠다는 건데, 기껍게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기준은 건강 상태입니까?"

제론이 고개를 저었다.

"의지다."

"예?"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프로인트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의지라니. 그걸 대체 어떻게 구분한단 말인가.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오전에 그걸 가려낼 생각이다."

"대체 어떻게 말입니까?"

"합리적인 방법으로."

프로인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난민을 모두 끌고 가는 건 솔직히 바보짓이었다. 아니, 자살행위였다.

죽는 사람이 나오느냐 마느냐는 이런 강행군에서 상당히 중요한 요소가 된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하면 남은 사람들은 어찌 됩니까? 모두 저 하나만 보고 따라왔습니다. 그냥 버릴 수는 없습니다."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걸 이용할 생각이다. 과연 정말로 너 하나만을 보고 여기까지 왔는지. 아니면 그냥 따라왔는지."

프로인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남은 자들에게는 충분한 물과 식량을 나눠 줄 것이다. 이번 일로 뭔가를 깨달은 사람이 있다면 끝까지 살아남겠지."

어떻게 보면 무책임한 말이었다. 하지만 프로인트는 제론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자신이라면 저보다 더한 결정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2천 명에 달하는 난민을, 그것도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난민을 데리고 먼 길을 떠난다는 건 그냥 모험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그 대답으로 결정이 끝났다. 제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의 준비를 하기 위함이었다.

프로인트는 바쁘게 걸어가는 제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결정은 제대로 내렸다. 하지만 과연 자신이 몇 명이 될지도 모를 난민을 내버려 두고 떠날 수 있을까?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어쩌면…… 난 여기 남을지도 모르겠군.'

벌써 몇 달을 함께 해 왔다. 그동안 정이 듬뿍 들어 버렸다. 어려운 시간을 함께 보내서 더 돈독해졌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것이다. 지금까지는 이런 관계를 유지한 사람이 거의 없었으니까.

나름 마음의 결정을 내린 프로인트가 홀가분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렇게 된 이상, 잔뜩 먹고 푹 쉴 생각이었다.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음식이 끓는 솥으로 걸어가는 프로인트의 표정이 더없이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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