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권
Chapter 1 슐린 후작과 카이트
슐린 후작은 마나를 확 풀었다. 거대한 마나의 해일이 훈련장을 덮쳤다.
훈련을 중지한 라이트닝 기사단의 기사들을 향해 막대한 마나가 쏟아졌다.
슐린 후작은 그들이 전부 쓰러질 거라 믿었다. 한데 멀쩡했다. 너무나 의연히 그 막대한 압력을 버텨 냈다.
슐린 후작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놈들 봐라?"
자신이 마음먹고 마나를 뿜어내면 웬만해서는 결코 버티지 못한다. 설사 버틴다 하더라도 괴로워하기 마련이다. 마나가 온몸을 짓누르면 엄청난 고통을 느낀다.
슐린 후작이 직접 가르친 기사들조차 그걸 버티기가 쉽지 않았다. 한데 이들은 너무나 쉽게 거기서 벗어났다.
"마나를 흘려?"
슐린 후작은 흥미로운 눈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일단 손을 섞어 봐야 저들의 정확한 상태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더 다가갈 수가 없었다. 카이트가 그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슐린 후작은 카이트를 보며 으르렁거렸다.
"소드 마스터가 이런 궁벽한 시골에서 기사를 키우고 있었나? 구질구질하게 말이야."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허! 이젠 시치미까지? 가관이군."
슐린 후작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가 보기에 카이트는 의심할 여지없는 소드 마스터였다. 한데 저렇게 천연덕스럽게 발뺌을 한단 말인가. 그것도 같은 소드 마스터인 자신 앞에서.
"그럼 네가 익스퍼트라고 주장할 셈이냐? 그 몸에 강물처럼 도도하게 흐르는 마나는 무엇으로 설명할 생각이냐?"
세간에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소드 마스터가 되면 익스퍼트와 뭐가 다른지 스스로 명확히 알게 된다.
그중 하나가 정체되지 않고 도도히 흐르는 마나였다. 몸에 마나의 통로가 있고, 그 안을 마나가 거침없이 흘러 다니는 것이다.
그것은 몸에 활력을 주고, 힘을 준다. 익스퍼트가 마나의 힘을 이용해 더 강해지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소드 마스터가 되면 마나에 대한 감응력이 높아진다. 그러니 상대의 몸에 자리한 마나가 흐르는지 아닌지 정도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슐린 후작이 보기에 카이트의 몸에서는 마나가 흘러 다녔다. 그것은 그에게 커다란 힘을 주고 있을 것이다. 또한 기간트를 탈 때도 큰 도움이 되고 말이다.
"흥, 이건 멍청해도 정도가 있지……."
슐린 후작은 그렇게 비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카이트가 몸으로 막고 있는 라이트닝 기사단을 바라보던 슐린 후작의 표정이 조금씩 묘해졌다.
"저놈들은 또 뭐야?"
워낙 마나의 양이나 흐름이 미약해서 얼른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지만 자세히 관심을 가지고 보니 뭔가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집중했더니 너무 놀라서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설마 너희들도 전부 소드 마스터인가?"
슐린 후작은 자신이 말을 하고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일단 마나의 양이 형편없이 적었고, 흐름도 약했다. 소드 마스터와 비슷했지만 소드 마스터에 비하면 너무 약했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슐린 후작은 카이트를 노려봤다. 집중을 유지한 상태로 다시 한 번 확인한 것이다.
"이것 봐라?"
자세히 살피니 확실히 이상했다. 크란 제국에는 소드 마스터가 둘이나 있다. 당연히 서로 교류를 한다. 검을 섞는 일은 드물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즉, 소드 마스터의 특징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소드 마스터가 되면 몸에 꽉 차 있던 마나가 자연스럽게 온몸을 휘돌며 흐른다. 그러니 그 양이 얼마나 많겠는가.
한데 카이트의 몸에 흐르는 마나는 절대 그렇지 않았다. 흐르긴 흐르되 그 양이 턱없이 적었다. 보통 소드 마스터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다. 고작 그 양으로 저런 흐름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러고 보면 카이트가 아닌 다른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렇게 적은 마나를 가지고 어떻게 흐름을 만들어 낼 수 있단 말인가.
마나 호흡법의 중급 단계에 나오는 마나 운용에 대해 모르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게 당연했다.
어쨌든 슐린 후작은 이대로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이들이 가진 마나의 흐름에 대한 비밀을 알아내고야 말겠다고 정했다.
슐린 후작은 마음먹은 일은 반드시 이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설사 타인의 죽음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말이다.
"너, 따라와라."
슐린 후작은 카이트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가장 마나의 양이 많은 사람을 확인하는 것이 뭔가를 알아내는 데에 가장 편할 거라 판단했다.
카이트로서는 상당히 난감한 상황이었다. 크란 제국의 후작이 말하는데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따라가면 분명히 좋은 꼴은 못 볼 것이다.
"내가 계속 기다려야 하나?"
슐린 후작이 살기를 담아 말했다. 당장 따르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뜻을 확고히 한 것이다. 그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결국 카이트는 자신이 따라가서 일을 마무리 짓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잘하면 자기 선에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럴 때 영주님이 안 계신 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만일 제론이 있었다면 결코 이런 상황을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제국의 후작과 척을 져야만 한다.
그건 에어스트 백작령으로서는 상당히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카이트가 막 대답하려고 할 때, 그의 뒤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단장님! 이게 무슨 일입니까!"
카이트는 목소리를 듣고 반색했다. 그들은 현재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가장 강한 두 기사, 베샤이덴과 슈빅이었다.
베샤이덴과 슈빅은 단숨에 몸을 날려 카이트 앞을 막아섰다. 그리고 두 사람을 보는 슐린 후작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영지인지 모르겠군."
베샤이덴과 슈빅은 슐린 후작이 보기에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는 소드 마스터였다. 마나의 양도 다른 소드 마스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약간 많은 듯했다.
게다가 마나의 흐름은 자신보다도 더 빠른 것 같았다. 소드 마스터 사이에도 실력과 힘의 격차가 있다. 슐린 후작은 냉정하게 판단했다.
'나보다 강한 놈들이야.'
충격을 받았다. 자신보다 강한 소드 마스터가 이런 궁벽한 영지에 둘이나 있을 줄은 몰랐다. 이건 절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저 둘을 놓고 판단하니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진다. 나이가 어려 보이긴 하지만 소드 마스터는 겉모습만으로 나이를 판단할 수 없다.
슐린 후작은 베샤이덴과 슈빅을 가만히 살폈다. 그들의 기세가 은은히 느껴졌다. 가슴이 떨릴 정도로 강한 자들이었다.
"자네들이 이들을 키웠나 보군."
베샤이덴과 슈빅은 갑작스런 슐린 후작의 말에 잠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들을 왜 자신이 키운단 말인가. 이들은 카이트가 키웠다. 주군이 내려 준 검술과 마나 호흡법을 통해서 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카이트의 눈짓에 표정을 지웠다. 눈짓의 의미는 상대가 오해를 하는 것이 나쁘지 않은 상황이라는 뜻이었다.
"정말 궁금하군. 어떤 방법으로 이들을 키웠는지 말이야. 내가 보기에 충분히 시간만 들이면 이들 모두 소드 마스터가 될 것 같은데. 아닌가?"
슐린 후작의 말에 놀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처음 검술과 마나 호흡법을 배우면서 들은 정보였다.
카이트는 기사들을 모아 놓고 3개월 안에 익스퍼트가 된다고 장담했다. 그리고 카이트의 말대로 되었다.
검술에 별다른 재질도 없었는데 다들 2개월 만에 익스퍼트가 되었다. 정말로 경악할 만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 검술과 마나 호흡법을 꾸준히 수련하면 언젠가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도 놀라지 않았다. 당연하다고 여긴 것이다.
베샤이덴과 슈빅은 최근에도 기간트 훈련에 매진했기에 영지 돌아가는 사정에 어두웠다. 지금도 갑작스러운 마나 유동 때문에 온 것이지 아니었다면 계속 기간트를 타고 있었을 것이다.
"단장님이 소드 마스터가 되신 줄 알고 달려왔는데, 이거 참 묘한 상황이로군요."
베샤이덴이 그렇게 말하며 슐린 후작을 노려봤다. 베샤이덴의 몸에서 불같이 일어난 마나가 슐린 후작을 덮쳤다.
슐린 후작의 몸에서도 마나가 뿜어져 나와 베샤이덴의 마나를 중화시켰다.
"크란 제국에서 오신 손님이다. 무례하지 마라."
카이트의 말에 베샤이덴과 슈빅이 흠칫 놀랐다. 두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카이트에게로 향했다.
"슐린 후작님이시다."
슐린이라는 이름은 검을 든 기사라면 누구나 아는 이름이었다. 베샤이덴과 슈빅은 설마 하긴 했지만 정말로 슐린 후작일 줄은 몰랐기에 약간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지웠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슐린 후작도 이들의 언행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다른 문제로 머리가 꽉 차 버렸다.
"자네들 내게로 오지 않겠나?"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일세. 우리 크란 제국으로 오라는 말일세. 이런 궁벽한 영지보다 훨씬 제대로 대우해 주겠네. 아마 작위도 받을 수 있을 걸세. 내가 최소한 백작 이상이 되도록 힘을 써 주지."
무려 소드 마스터가 둘이나 된다. 이들을 자신이 영입할 수 있다면 제국에서의 위상이 얼마나 올라가겠는가.
그걸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슐린 후작은 당연히 허락할 거라 생각하고 두 사람을 바라봤다.
"우리는 이미 영주님께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슐린 후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겠지. 그러니 기사가 된 것 아닌가. 그런데 그게 뭐? 무슨 문제라도 되나?"
"그럼 우리 보고 지금 주군을 배신하란 말입니까?"
베샤이덴과 슈빅의 얼굴이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슐린 후작은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 말했다.
"내가 언제 배신하라고 했나? 배신하지 않고도 우리 제국인으로 살 수 있네. 내가 그렇게 만들어 주지."
"주군을 협박하겠다는 뜻입니까?"
둘의 분노는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하지만 슐린 후작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협박을 왜 하나? 난 그런 사람 아닐세. 그저 설득할 뿐이지. 서로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을 제시할 테니 자네들은 걱정할 게 하나도 없네."
그렇게까지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반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슐린 후작은 그 점까지 모두 염두에 두었다.
"내 장담하는데 아마 자네들의 주군은 명령을 내려서라도 자네들을 우리 제국으로 보내려 할 걸세."
"그럴 리 없습니다!"
슈빅이 외쳤다. 베샤이덴도 소리만 치지 않았지 슈빅과 똑같은 심정이었다. 절대 주군이 자신들을 버릴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은 이미 한 번 주군에게 버림을 받았다. 그것을 제론이 거둬 준 것이다. 그래서 그런 부분에 상당히 민감했다.
"그거야 두고 보면 되는 일이지. 만일 주군이 자네들을 포기한다면 날 따라가겠나?"
두 사람은 볼 것도 없다는 듯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들은 철벽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충성심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만일 제론이 그들을 포기한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제국으로 가서 이 영지에 도움이 되도록 노력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제론이 버리지 않는다면 무조건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할 것이다.
"좋아. 그럼 내가 좀 기다리지."
슐린 후작은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평소의 그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소드 마스터가 된 이후로 참고 기다리는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즐겁게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자그마치 소드 마스터가 두 명이나 된다.
"재미있겠어. 크하하하하하."
슐린 후작의 웃음이 훈련장을 가득 메웠다.
카이트를 비롯한 라이트닝 기사단은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한껏 표정을 굳혔다.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괜찮나?"
카이트의 물음에 베샤이덴과 슈빅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별일 없을 겁니다."
둘은 그렇게 말했지만 어떻게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카이트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성 한가운데에 높이 솟은 마탑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바이스를 만나 상의해 봐야 할 듯했다.
☆ ☆ ☆
쿵쿵쿵쿵쿵!
수십 기의 기간트가 강철로 된 거대한 마차를 끌며 달리고 있었다.
말레피 후작령에서 남은 난민을 싣고 출발한 지 벌써 열흘이 지났다.
처음에는 줄을 맞춰 걷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이제는 오와 열을 딱 맞춰 제법 빠른 속도로 달리는데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이번 난민 수송은 여러모로 득이 많았다. 일단 견습 라이더의 실력이 급격히 올라갔다.
그저 달리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여러 가지 능력이 상승한다. 줄을 맞춰서 달리는 건 오랫동안 집중력을 잃지 않아야 가능했다.
그것 하나만 얻어도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얻는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일단 오랫동안 기간트를 타고 달리는 건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기간트를 오래 타면 몸에 무리가 간다. 당연히 체력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금세 지칠 수밖에 없었다.
그걸 견뎌 내면 강철 같은 체력과 정신력을 얻게 된다. 이는 기간트를 타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했다.
또한 강철 마차를 끄는 일도 결코 쉽지 않았다. 양쪽으로 균일하게 힘을 주지 않으면 마차가 크게 흔들린다. 많이 흔들리면 흔들릴수록 난민이 힘들어진다. 그리고 쉬는 동료도 제대로 피로를 풀지 못한다.
당연히 서로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균형감과 힘 조절 능력이 급격히 늘어났다. 고작 마차를 끌고 달리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다양한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제론이 수시로 공급하는 물이었다.
아드보 워터는 견습 라이더들의 마나량을 꾸준히 늘려 주었다. 또한 체력과 집중력을 유지시켜 주었다.
그렇게 견습 라이더들은 차근차근 진짜 라이더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 숫자가 무려 200명이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에어스트 백작령은 한 단계 도약이 가능할 것이다.
제론은 가장 앞에서 달리는 마차에 있었다. 그 마차는 따로 특별히 제작된 마차였는데, 제론만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제론은 그 안에서 마음껏 태블릿을 확인했다.
"슬슬 시작할 때가 되었군."
수도에 도착했을 때, 제론은 마티를 이용해 난민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그리고 불온한 움직임을 감지했다.
긴 시간 있을 수 없었기에 바인의 도움까지 받아야 했다. 그래서 불온한 무리를 싹 골라낼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엔트라는 인물도 찾아냈다. 몰락 귀족의 후예였는데, 잘만 키우면 제법 밥값을 할 것 같았다.
제론은 분류한 인물들을 태블릿에 기록한 다음 이동을 멈추고 쉴 때마다 난민의 배치를 조금씩 바꿨다.
그래서 불순한 무리를 두 마차에 싹 몰아넣을 수 있었다. 괜히 선동 때문에 다른 난민이 다치거나 휩쓸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수도를 떠난 뒤로는 마티가 없어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지만 제론은 몇 가지 아티팩트를 이용해 간단히 그걸 해결했다.
태블릿과 연결해서 쓸 수 있는 초고대의 아티팩트 중에 소리를 전해 주는 물건이 있었다. 얇은 종이에 마법진을 그린 것인데, 그저 벽에 붙이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아티팩트였다.
일단 벽에 붙으면 겉으로 모습이 드러나지 않으며 지속적으로 근처의 소리를 전달해 주는 물건이었다.
제론은 반항을 꿈꾸는 자들을 모아 놓은 마차에 각각 아티팩트를 설치했고, 그 모든 소리를 태블릿에 저장했다. 그리고 틈만 나면 그걸 들었다.
그들의 계획을 알아내는 건 아주 간단했다. 제론의 신체 능력은 어마어마하다. 태블릿을 통해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아무리 작은 소리라도 다 캐치해 냈다.
만일 바인이 아니었다면 거의 손도 못 썼을 것이다. 그저 정황만 파악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며 기다리기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인 덕분에 상황을 유리하게 만들 수 있었다.
"오늘 밤에 시작하는 건가? 준비를 해야겠군."
오늘 밤은 하루 쉬기로 되어 있었다. 밤에 마차를 멈추고 조용히 잠을 자기로 계획했다. 마차로 이동하느라 힘들어하는 난민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미리 고지했다.
사실 저들이 들고 일어날 기회를 주려는 의도도 섞여 있었다. 여기서 문제를 일으킬 놈들은 영지에 가 봐야 쉽게 섞이지 못한다. 계속 분란의 중심에 있게 될 것이다.
그럴 바에는 아예 처음부터 쳐내는 것이 나았다. 제론은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쿵쿵쿵쿵쿵!
기간트가 발맞춰 달리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아마 이 난민들은 나중에는 기간트 발소리만 들려도 경기를 일으킬 것이다. 얼마나 지겹고 시끄럽겠는가.
하지만 제론에게는 그저 자장가 같았다. 제론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밤에 일을 치르려면 지금 미리 잠을 자 두는 편이 좋았다.
쿵쿵거리는 발소리를 자장가 삼아 제론이 스르륵 잠들었다.
그날 저녁 드디어 기간트가 멈춰 섰다. 견습 라이더들은 일제히 기간트를 아공간으로 보냈고, 난민은 오랜만에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다들 살았다는 듯 편안한 표정으로 라이더들이 나눠 주는 아드보 워터를 마셨다.
일단 그렇게 기력을 조금 회복한 다음 서둘러 잘 준비를 했다. 마차에서 자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하라고 했는데도 다들 밖에서 찬 이슬을 맞으며 자고자 했다.
마차에 타는 것 자체가 너무 지겹고 힘들었기에 잠시만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다들 어딘가에서 천막을 꺼내 쳤다. 되도록이면 짐을 몽땅 버리라고 했는데도 조금씩 감춰 뒀다. 천막이 그중 하나였다.
제론은 그들이 그렇게 하는 걸 다 알고 있었지만 눈감아 주었다. 마차의 용량을 넘어설 정도로 많은 짐이 아니라면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통솔에 도움을 줄 거라 판단한 것이다.
다들 잠자리를 준비하느라 분주히 움직였다. 제론은 그 와중에 조금 묘한 움직임을 보이는 자들을 유심히 살폈다.
사실 이미 임시 단장들에게는 언질을 했다. 만일의 사태가 벌어지면 다들 물러나라고 말이다.
괜한 희생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보통사람 800명 정도는 제론 혼자서도 단숨에 해치울 수 있었다. 소드 마스터란 그런 존재였다.
혼자서 기간트와도 싸울 수 있는데 고작 사람이, 게다가 기사도 아닌 자들을 왜 두려워하겠는가. 지킬 사람만 없다면 그 수가 몇이든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문득 제론은 일이 너무 쉽게 풀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놈들도 생각이라는 걸 할 텐데, 상식적으로 기간트를 상대로 싸울 수 있다고 믿는 걸까?'
그럴 리가 없었다. 예전 엔트라는 자와 반란을 일으키려는 놈들의 수장이 대화하는 걸 들었을 때는 그렇게 믿고 있다고 판단했다.
한데 지금 생각하면 그건 말이 안 된다.
'분명히 뭔가 믿는 구석이 있어.'
저들에게는 변변한 무기도 없었다. 그런데도 반란을 생각한다? 대체 어떤 미친놈이 그런 일을 추진한단 말인가.
갑자기 위기감이 든 제론의 감각이 더없이 날카로워졌다. 감각의 파동이 제론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넓게 퍼져 나갔다.
극도로 집중한 소드 마스터의 능력은 굉장했다. 제론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이질적인 존재를 감지해 냈다.
'기간트!'
분명히 기간트였다. 수십 기의 기간트가 멀리 대기 중이었다. 이런 인적 없는 곳에 기간트가 있다면 이유는 딱 하나였다.
'날 노리는 놈들이로군.'
제론은 감각을 더욱 날카롭게 가다듬었다. 좀 더 정확한 정보가 필요했다.
'일단…… 32기로군.'
기간트의 종류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실바는 아니었다. 실바라면 제론이 대번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가장 익숙한 기체였으니까.
또한 기간트에서 느껴지는 힘이 범상치 않았다. 즉, 카타락타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최소한 크라테르, 아니면 그 이상의 기체일 수도 있었다.
기간트 옆에는 라이더가 긴장한 상태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지휘하는 자로부터 대단한 기세가 느껴졌다.
나머지는 별거 아니었다. 따로 병사는 없었다. 아마 반란을 일으키려는 800명의 난민이 병사 역할을 할 모양이었다.
'곤란하군.'
기간트야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었다. 굳이 테오스를 꺼내지 않아도 처리가 가능했다. 라이더를 보면 역량도 느낄 수 있다. 제론은 저들 정도면 혼자서도 처리가 가능할 것 같았다.
그만큼 제론의 실력은 뛰어났다. 이번에 소드 마스터가 되면서 기간트 조종 능력도 월등히 높아졌다.
문제는 난민이었다. 저들이 군중심리를 이용해 일을 크게 벌이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된다. 제론은 절대 그건 원치 않았다.
제론은 결단을 내렸다.
"모두 마차에 타라!"
제론의 명령이 떨어지자,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머뭇거렸다. 그것이 대부분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일부는 크게 당황했다.
지금 마차에 타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다. 일이 틀어질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외부에서 대응하기로 한 기간트들이 도착했을 때, 난민이 전부 마차에 타고 있으면 거사는 무조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기간트의 수에서 상대가 되지 않으니 말이다. 결국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제론은 그를 보며 하마터면 회심의 미소를 지을 뻔했다. 상대가 너무나 손쉽게 낚여 주었다. 타이밍을 비트는 데 성공한 것이다.
"우리가 오늘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모르십니까!"
덩치가 큰 사내 한 명이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그의 뒤로 수백 명의 사내들이 운집했다. 제론은 그들의 얼굴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위험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기간트 부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자칫 싸움이 날 수도 있으니 마차 안에 들어가 있도록."
제론의 말에 곳곳에서 웅성임이 일었다. 그리고 다들 마차로 들어가려 했다. 기간트가 온다는데 여기 있다가는 밟혀 죽을 수도 있었다.
사내는 크게 당황했다. 대체 어떻게 이 일이 새 나갔단 말인가. 척후라니, 언제 그런 걸 보냈단 말인가.
"다들 움직이지 마! 거짓말이야! 우릴 농락하려는 거라고!"
사내가 발악하듯 외쳤다. 그 말에 난민 중 일부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어리둥절한 눈으로 사내와 제론을 번갈아 쳐다봤다.
"내가 왜 그딴 거짓말을 해야 하지? 그래서 무슨 이득이 있는데?"
"우리가 공포에 떠는 모습을 보면서 혼자 즐길 생각이겠지! 귀족들이 다 그렇듯이!"
사내의 말에 또 좌중이 술렁였다. 분명히 그런 귀족이 있었다. 아니, 많았다. 하지만 제론이 그런 귀족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사내가 워낙 강하게 얘기하니 다들 흔들렸다. 이 말에 이렇게 흔들리고 저 말에 저렇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니 한숨이 나왔지만 사람은 원래 그런 존재 아닌가.
제론은 단호히 말했다.
"반란을 일으킬 생각이 아니라면 마차에 타라. 너희 중에서도 빠질 사람이 있으면 미리 빠져라. 이번만은 용서해 줄 테니까."
제론의 말에 사내가 깜짝 놀랐다. 거사를 일으킨다는 걸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순간 사내의 뇌리에 엔트가 떠올랐다.
"그 겁쟁이 자식이 배신했나!"
사내가 그렇게 외치며 동료를 다독였다.
"경거망동하지 마! 절대 우리를 어쩌지 못한다. 우리가 죽으면 내기에서 질 수밖에 없어! 무려 철괴가 3만 톤이야! 그게 얼마인지나 알아? 영지 하나가 왔다 갔다 할 정도로 많은 돈이라고!"
그 말에 사내 뒤에 선 자들이 이를 악물었다. 사내의 말이 옳았다. 자신들을 다 죽이면 결코 내기에서 이길 수 없다.
이제 고작 열흘 지났을 뿐이다. 그런데도 힘들어 죽을 것만 같았다. 아마 보름이 지나면 하나둘 희생자가 나오기 시작해 20일을 전후도 우수수 죽어 나갈 것이다.
특히 아이와 노인은 누구보다 먼저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약하니 말이다.
사내가 당당한 표정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우리 서로 협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무슨 협조?"
제론은 과연 이들이 뭘 어떻게 할지 조금 더 기다렸다. 아직 기간트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일단 기간트가 달리기 시작하면 30분 안에 이곳에 도착할 것이다.
"우리에게 마차와 기간트, 그리고 식량을 나눠 주십시오. 그럼 조용히 물러가겠습니다."
제론이 피식 웃었다. 내기 걱정을 하던 놈들이 이젠 빠져나가겠다고 한다. 이들이 죽으나 사라지나 달라지는 게 없지 않은가.
제론의 생각을 안 사내가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물론 에어스트 백작령까지는 가겠습니다. 다만 뒤에서 따로 쫓아가겠습니다. 이해해 주시겠지요?"
"그러니까 내기에는 최대한 방해되지 않게 하겠다, 이건가?"
"그렇습니다. 그러니 저희를 그냥 풀어 주십시오. 돈을 좀 지원해 주시면 향후 에어스트 백작령을 위한 활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더 들을 것도 없었다. 이건 완전히 날강도였다.
"싫다면?"
"그럼 서로에게 불행한 일이 벌어지겠지요."
사내 뒤에 서 있던 자들이 우르르 움직였다. 그들은 순식간에 제론을 에워쌌다. 일단 영주를 인질로 잡으면 저들도 자신의 조건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거라고 판단했다.
"서로에게 불행하다고? 불행한 건 너희들뿐이다."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한 번 외쳤다.
"당장 마차에 타라! 딱 1분 기다려 주겠다."
제론의 외침에 견습 라이더들이 나섰다. 그들은 남은 난민을 재촉해 마차에 태웠다.
사내는 그걸 보고는 다급히 소리쳤다.
"안 돼! 들어가지 마! 들어가면 다 죽일 거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야! 영주는 내 손에 있어! 거기 기사들 멈춰!"
하지만 견습 라이더들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이미 이런 일이 벌어졌을 때 제론의 안위를 절대 걱정하지 말라는 명령을 들었다.
"뭣들 하는 거야! 가서 막지 않고!"
사내의 외침에 제론을 에워싸지 않고 서 있던 자들이 우르르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움직일 수 없었다.
제론이 훌쩍 몸을 띄워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꽈앙!
제론이 발을 구르며 기세를 내뿜었다.
순간적으로 사내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마치 투명한 벽에 부딪히기라도 한 듯했다.
스릉!
제론이 검을 뽑았다. 그리고 바닥을 향해 쫙 뿌렸다.
촤악!
사내들 앞에 길게 선이 그어졌다.
"그 선을 넘는 놈은 죽는다."
제론의 말에 덩치 사내가 소리쳤다.
"절대 못 죽여! 그러니 가! 가서 막아! 아니, 죽여! 수를 줄여야 돼! 그래야 우리가 이겨!"
사내의 말을 들은 자들이 용기를 내서 선을 넘었다. 제론은 검을 휘둘렀다.
스아악!
선을 넘은 자들의 목에 동시에 붉은 선이 생겼다. 그리고 그대로 떨어지며 피분수가 솟았다.
촤아아악!
다들 얼어붙었다.
제론은 슬쩍 뒤를 확인했다. 난민은 모두 마차에 탔고, 남은 건 견습 라이더들뿐이었다.
그제야 다들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깨달았다. 다들 당황해 이 일을 주동한 사내를 쳐다봤다.
그 사내는 품에서 원통 하나를 꺼내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푸슉!
원통에서 불꽃이 솟아났다. 그 불꽃은 어둠이 다가오고 있는 하늘을 가르며 높이 날아갔다.
기간트를 부르는 신호였다.
제론은 더 기다리지 않았다. 어차피 다 죽이려고 시작한 일이었다. 이들은 영지에 데려가 봐야 분란만 일으킬 것이다.
스아악!
제론이 검을 길게 휘둘렀다. 검끝에서 채찍처럼 솟아난 빛줄기가 선 앞에 선 사내들을 쭉 훑고 지나갔다.
촤촤촤촤촤촤촥!
동시에 100개가 넘는 목이 떠올랐다.
다들 그 광경에 경악했다. 어찌 인간이 이런 힘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반란을 일으킨 사내들뿐 아니라 견습 라이더들도 커다래진 눈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봤다. 왠지 현실감이 없었다.
제론이 발에 힘을 꾹 주었다.
꽈득!
발을 한 번 구르니 어느새 반란자들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리고 제론의 검에는 여전히 빛줄기가 채찍처럼 매달린 채였다.
촤아아아아악!
수백 명이 동시에 죽어 나가는 모습은 지독히도 비현실적이었다. 피가 쏟아지는 가운데 그 속에 가만히 서 있는 제론의 모습은 홀로 고고했다.
반란을 주도했던 사내는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봤다. 이럴 수는 없다. 대체 왜 죽인단 말인가. 철괴 3만 톤쯤은 아무것도 아니란 뜻인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기에 사내는 당황을 넘어서서 공황 상태에 빠졌다.
"어…… 아으아……."
제대로 말이 만들어져서 나오지 않았다. 그저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만 흘러나왔다.
제론이 사내를 향해 저벅저벅 다가갔다. 반란에 가담한 자들은 몽땅 죽었다.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바닥은 피로 흥건했다. 그리고 그 피의 호수 한가운데에 자신이 서 있었다.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으면 그게 더 대단한 일이리라.
제론이 사내 앞에 서서 검을 목에 갖다 댔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사내가 정신을 번쩍 차렸다.
"이,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우리도 사람입니다! 이렇게 죽여도 되는 겁니까!"
사내가 피를 토하듯 외쳤다. 물론 제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사람이지. 800명이서 80만 명을 죽일 수도 있는 사람."
"우, 웃기지 마십시오! 우리가 왜 사람을 죽입니까!"
"그럼 여기서 기간트를 얻어 얌전히 지낼 생각이었나? 기간트를 가진 산적이라, 잘도 사람을 안 죽이겠군."
사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반박할 말은 분명히 있었다. 자신이 산적질을 할지, 사람을 죽일지 어떻게 알고 판단한단 말인가.
그렇게 막 뭐라고 말을 꺼내려는 찰나, 제론이 먼저 뭔가를 내밀었다. 둥그런 팬던트였는데, 복잡한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다.
―기간트를 10기만 얻으면 돼. 그럼 우리 앞날은 탄탄대로라고!
팬던트에서 나오는 소리에 사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주변이 쩌렁쩌렁 울렸다. 아마 마차에 탄 난민들도 모두 그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아, 안 돼!"
―그리고 분위기를 봐서 여기 난민을 탈취하는 거야. 이놈들을 잘 구슬려서 노예처럼 부리는 거지. 잠잘 곳과 먹을 것만 주면 얼마든지 시키는 대로 할걸?
사내가 다급히 팬던트를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소드 마스터인 제론이 그것을 빼앗길 리 없었다.
퍽!
제론의 발이 사내의 배에 가볍게 틀어박혔다. 사내는 배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팬던트에서는 커다란 목소리가 우렁우렁 쏟아져 나왔다.
―우리도 왕처럼 살 수 있어! 마음껏 즐기면서 돈을 쌓아 두고 당장이라도 여자를 매일 갈아치우면서 살 수 있다고! 여자가 어디 있냐고? 잘 살펴봐. 여기에도 조금만 꾸미면 제법 쓸 만한 것들이 많으니까.
사내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제론이 손에 든 팬던트를 바라봤다. 고통 때문에 무릎을 꿇은 채로 움직이지도 못했다. 그저 바라보며 점점 절망에 빠져 갔다.
―어때? 이제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가장 좋은 방법은 영주를 인질로 잡는 거야. 기간트가 무섭지 않냐고? 그런 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니까? 나만 믿어.
사내는 이제 절망에 휩싸여 고개를 툭 떨궜다.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설마 저런 물건을 준비해 뒀을 줄 몰랐다.
제론은 사내의 목덜미를 꽉 쥐고 걸어갔다. 일단 이 피바다 속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마차들이 늘어선 곳으로 온 제론은 사내를 휙 던졌다.
털썩!
사내가 마차들이 늘어선 한가운데에 떨어졌다. 바닥에 온몸을 부딪친 고통 때문에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나머지는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
제론이 누구에게 한 말인지는 명확했다. 잠시 후, 마차 안에서 성난 눈을 한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그리고 절망에 빠진 사내를 자근자근 밟았다.
제론은 그들을 뒤로하고 계속 걸어갔다. 제론의 뒤로 55명의 견습 라이더가 따라왔다.
"기간트를 소환해라."
키이이이이잉!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기간트가 일제히 나타났다. 견습 라이더들은 기간트에 탑승해 긴장한 눈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너희가 나서서 싸울 필요는 없다. 너희는 뒤로 빠지는 적을 막아라. 내가 혼자서 다 막을 수는 없으니까."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기간트를 소환했다.
붉은 실바가 나타났다. 제론은 실바의 다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은 후, 훌쩍 몸을 띄워 조종석에 들어갔다.
키이이이이잉!
강렬한 굉음을 토해 내며 붉은 실바를 중심으로 마나가 휘몰아쳤다.
조종석에 탄 제론은 실바의 힘을 고스란히 느꼈다. 세나가 얼마나 신경을 써서 만들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쿵쿵쿵쿵쿵!
굉음에 가까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숨어 있던 기간트가 달려오는 것이다.
붉은 실바도 달리기 시작했다. 55기의 기간트가 나란히 서서 강철 마차를 보호했다. 아마 웬만해서는 이 기간트의 벽을 뚫지 못할 것이다.
쿵쿵쿵!
붉은 실바의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양측이 급격히 가까워졌다. 제론은 상대 기간트를 순식간에 쫙 훑어봤다. 몽땅 전혀 새로운 기체였다. 하지만 제론은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라쿠스!'
슈린 공작가에서 양산을 시작한 신형 기간트 라쿠스였다. 즉, 이번 일의 배후에 슈린 공작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잘됐군."
제론은 더욱 힘이 났다. 이번 기회에 라쿠스를 세나에게 넘겨줄 생각이었다. 아마 새 기간트를 설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꽈앙!
강렬한 굉음이 울렸다. 그리고 붉은 실바의 특기가 펼쳐졌다. 붉은 실바는 밤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검붉은 기체의 특성 때문에 일단 깜깜한 허공에 떠오르니 마치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듯한 착각을 불러왔다.
꽈과광!
허공에서 내리꽂는 발차기는 거의 피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밤이라서 잘 보이지도 않으니 그냥 맞는 수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3기의 라쿠스가 나동그라졌다.
붉은 실바의 움직임은 너무나 부드럽고 자연스러웠다. 어느새 뽑은 검을 바닥에 쓰러진 라쿠스의 조종석을 쿡쿡 찔렀다.
능력이 향상된 붉은 실바의 힘은 엄청났다. 게다가 제론은 다른 라이더와 차원이 달랐다. 자신의 힘을 기간트에 약간이나마 전이시킬 수 있었다.
붉은 실바의 검이 조종석을 찌르는 순간 미약한 빛이 번득였다. 마나가 검을 타고 흐른 것이다.
마치 칼로 두부를 찌르듯 간단하게 조종석이 꿰뚫렸고, 그렇게 3기의 라쿠스가 빛을 잃었다.
붉은 실바의 움직임은 연속 동작처럼 이어졌다. 아래로 검을 푹푹 찌르며 앞으로 나아가 가장 먼저 마주친 라쿠스의 다리를 후려 찼다.
꽈앙!
라쿠스의 거대한 몸체가 순간 허공에 붕 뜨며 균형을 잃었다.
푹!
마나를 머금은 검이 허공에 뜬 라쿠스의 조종석을 가볍게 찌르고 나왔다.
빛을 잃은 라쿠스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붉은 실바는 쓰러지는 라쿠스의 목을 꽉 쥐고 옆으로 잡아챘다.
꽈과광!
옆에 있던 라쿠스들이 동료와 부딪히며 잠깐 흔들렸다. 그리고 붉은 실바는 라쿠스를 던진 힘을 이용해 방향을 바꿨다,
푹푹푹!
3기의 라쿠스가 또 빛을 잃었다. 붉은 실바는 굉장히 빨랐다. 그리고 얄미울 정도로 잽싸고 정확하게 조종석을 찔렀다.
"흩어져!"
리더의 외침이 울렸다. 그 명령에 따라 남은 라쿠스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어쨌든 그들의 목표는 난민을 무차별 학살하면 그 틈을 이용해 에어스트 백작령의 기간트를 공격하고, 기회를 봐서 제론을 죽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니 제론을 죽이는 건 불가능했다. 그러면 난민이라도 학살해야만 했다.
쿵쿵쿵쿵쿵!
일부 라쿠스가 난민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일부는 반대쪽으로 달려갔다.
제론은 그 가운데에 서서 눈을 빛냈다. 조금도 고민하지 않았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제론은 난민을 향해 달려갔다.
쿵쿵쿵! 꽈앙!
붉은 실바가 빠르게 달려가더니 점프를 했다. 낮은 점프였다. 이 역시 붉은 실바의 특기였다.
꽈과광!
난민을 향해 달려가던 기간트 하나가 등에 발차기를 맞고 꼴사납게 엎어졌다. 그리고 그 등에 가볍게 착지한 붉은 실바가 검을 등에 꽂았다.
푹!
깔끔하게 조종석을 꿰뚫은 붉은 실바가 다시 몸을 날렸다.
꽈앙! 꽈앙!
연달아 점프를 한 붉은 실바가 두 번째 라쿠스의 뒤를 잡았다.
푹! 꽈과광!
등을 꿰뚫린 라쿠스가 균형을 잃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렇게 구른 라쿠스가 동료의 다리에 충돌했다.
꽈광!
붉은 실바는 굉음과 함께 쓰러진 라쿠스에 빠르게 다가가 검을 푹 찔렀다.
그렇게 열심히 라쿠스를 처리했는데도 난민을 향해 달려가는 라쿠스가 무려 10기나 되었다.
그 짧은 시간에 붉은 실바가 처리한 라쿠스의 수는 무려 10기였다. 즉, 아직도 처리하지 못한 라쿠스가 22기나 있다는 뜻이었다.
10기의 라쿠스가 일제히 돌진했다. 그리고 좌우로 길게 늘어선 카타락타와 충돌했다.
꽈과과광!
카타락타는 당연히 라쿠스에 비해 많은 것이 모자란다. 하지만 그 모자람을 숫자로 메웠다. 또한 카타락타를 탄 견습 라이더의 정신력은 실력을 크게 웃돌았다.
"막아!"
라쿠스 하나에 카타락타 셋이 달라붙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라쿠스는 카타락타와 대등하게 싸웠다.
꽝! 꽝! 꽈광! 꽈과광!
연달아 굉음이 울렸다. 카타락타와 라쿠스가 싸우는 소리였다. 만일 싸움이 길어지면 결과가 어찌 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싸움은 금세 끝났다.
붉은 실바가 라쿠스의 뒤를 치면서 싸움이 빠르게 정리되어 갔다.
푹! 푹! 푹!
붉은 실바의 능력은 가공했다. 빠르게 라쿠스의 뒤에 붙어 검을 푹 찌르고 이동했다. 워낙 정확해서 더 찌를 필요가 없었다.
10기의 라쿠스가 순식간에 바닥에 누웠다.
제론은 상황을 단숨에 정리한 다음 돌아서서 달렸다. 단 한 기의 적도 놓칠 생각이 없었다.
아마 제법 멀리 도망갔을 것이다. 하지만 전혀 상관없었다. 제론에게는 그들을 잡을 방법이 있었다.
쿵쿵쿵쿵쿵!
붉은 실바가 빠르게 달렸다. 그리고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남은 사람들은 붉은 실바가 멀어져 간 곳을 그저 멍하니 바라봤다.
이내 적막이 찾아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견습 라이더들이 카타락타를 몰아 근처를 정리했다.
쓰러진 라쿠스를 한데 모았고, 조종석을 뜯어내 안에 든 시체를 꺼내 한곳에 모았다.
사실 땅에 묻고 싶었지만 제론이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55기의 카타락타가 움직이니 전장이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그 뒤로는 기다림의 시간이 계속되었다.
너무 갑작스럽고 격렬한 일이 있었기에 다들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흥분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그렇게 밤이 더욱 깊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