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 소드 마스터
네이드 후작은 제론이 떠나간 뒤에 잠시 시간을 두고 기다렸다. 제론이 영지에 없을 때 일을 처리해 버리면 훨씬 간단했다. 어쨌든 제론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밀어붙일 수 있으니 말이다.
100만 골드를 준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내전 때문에 예전 같지는 않지만 여전히 네이드 후작령은 교통의 요지라는 이점을 이용해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으니까.
"에어스트 백작령에 연락하라는 일은 어찌 되었느냐! 왜 소식이 없어!"
네이드 후작의 호통에 행정관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그리고 결과를 가져왔다.
"연락되었습니다! 언제든 후작님께서 원하실 때 만날 수 있게 조치를 취해 뒀습니다."
"잘했다. 그럼 지금 당장 가자."
"예? 지금 당장 말입니까?"
네이드 후작이 씨익 웃었다.
"원래 이런 일은 틈을 주면 안 돼.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밀어붙여야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법이다."
네이드 후작은 곧장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향했다. 수행원과 기사를 잔뜩 이끌고 말이다.
200명이나 되는 라이더가 빠져나간 상황이었다. 이럴 때 기간트를 보유한 기사를 잔뜩 데려가 압박을 주면 더 쉽게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네이드 후작은 상당히 서둘렀다. 에어스트 백작령이 뭔가 다른 수작을 부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만일 정말로 고철 100개를 내놓으면 큰일이니 말이다.
후작은 엔지니어를 비롯한 기간트 전문가를 10명이 넘게 데려갔다. 혹시라도 에어스트 백작령이 꼼수를 써서 고철 기간트를 급조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서두른 덕분에 네이드 후작은 엄청나게 빠르게 에어스트 백작령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백작성으로 향했다.
절반쯤 갔을 때, 백작성에서 네이드 후작을 맞이하기 위해 보낸 사람을 만났다. 그들의 당황한 얼굴을 보는 네이드 후작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어렸다.
'완전히 적중했군.'
네이드 후작은 성공을 예감하며 에어스트 백작령의 관리와 기사들을 재촉해 길을 서둘렀다. 거의 순식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백작성에 도착했다.
성문 앞에 바이스가 나와 있었다. 네이드 후작은 기분 좋게 웃으며 바이스에게 다가갔다.
"어서오십시오. 후작님."
바이스가 최대한 정중히 인사를 했다. 네이드 후작은 살짝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군. 반갑네."
"너무 갑작스러운 방문이라 많이 당황했습니다."
"하하하하. 당황스러울 건 또 뭔가. 어차피 할 일이니 미루고 싶지 않아서 왔을 뿐이라네."
"한데 정말로 고철을 사실 겁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믿어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바이스의 표정에 드러난 감정을 정확히 캐치한 네이드 후작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네. 이미 에어스트 백작과는 얘기가 다 끝났네."
"언제 물건을 받으시겠습니까?"
"지금 물건을 받아 가겠네. 그러려고 이렇게 서둘러서 많이 데려온 것 아닌가."
네이드 후작이 그렇게 말하며 뒤에 도열해 있는 기사들을 슥 둘러봤다. 네이드 후작이 데려온 기사는 무려 50명이나 되었다. 전부 라이더였다.
"자, 이제 자네 차례네. 망가진 기간트를 가져오게. 정확히 100기면 되네. 그걸 주고 이 돈을 가져가면 되네."
네이드 후작이 워낙 강하게 나오는지라 바이스는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잠시 시간이 지나니 바이스의 얼굴이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하면 계약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공증인을 세워도 되겠습니까? 마침 디아만트 상단에서 파견된 분들도 있으니 말입니다."
이쪽에 뭔가가 있다는 걸 강하게 어필하는 말이었다. 네이드 후작은 그 말에 속으로 크게 웃었다. 디아만트 상단의 사람이 에어스트 백작령에 있다는 건 미리 조사를 통해 알아봤다.
그리고 그렇게 조사할 때 몇 번이나 기간트 상황에 대해서 조사했다.
네이드 후작이 심은 끄나풀은 영지전에서 수거한 기간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담당했다. 부서진 것도 많지 않았고 전부 고쳤다는 것이 일관된 보고였다.
게다가 에어스트 백작령의 엔지니어들은 기간트 수리 능력이 엄청나다고 한다. 아마 완벽하게 수리되었을 거라는 보고를 불과 어제 받았다.
네이드 후작은 기대감 어린 눈으로 바이스를 바라봤다. 어서 기간트를 가져오라는 압박이었다.
"좋네. 그럼 그렇게 하지. 하지만 난 지금 당장 물건을 받아야겠네. 그러니 즉시 준비해 주게."
"공증을 끝내면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고철이 없으면 제대로 된 기간트라도 내와야 하네. 알고 있겠지?"
"그것이 계약이니까요.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철이야 얼마든지 준비할 수 있으니까요."
그 말에 네이드 후작이 서늘한 눈으로 바이스를 노려봤다.
"만일 날 속이려 하면 가만두지 않겠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일단 공증인부터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바로 공증인이 도착했다. 놀랍게도 디아만트 상단에서 상당히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남작의 작위까지 가졌다.
막상 거기까지 가니 네이드 후작은 겁이 덜컥 났다. 만일 자신이 바이스 입장이라면 이쯤해서 계약을 포기했을 것이다. 그리고 약간의 위약금으로 상황을 끝내려 했을 것이다.
한데 이건 너무 많이 왔다. 더구나 이렇게 되고 보니 공증인도 바이스가 미리 준비한 것 같았다.
'이거 내가 된통 당하는 거 아냐?'
그렇게 겁이 나니 섣불리 계약서에 서명을 할 수가 없었다. 아직 계약을 정식으로 한 게 아니다. 우기면 위약금 따위 없이 그냥 계약을 없던 일로 돌릴 수도 있었다.
그 순간 바이스의 다리가 보였다. 우연이었다. 한데 바이스가 아주 약하긴 하지만 다리를 부르르 떨고 있었다. 극도로 긴장했다는 뜻이었다.
네이드 후작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것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바이스가 대동한 기사들이 어딘가 주눅이 들어 보이는 점, 그리고 공증인으로 따라온 사람의 눈빛이 어두운 점, 마지막으로 아직 표정을 숨기기에는 경력이 부족한 젊은 행정관들의 얼굴이었다.
"좋아. 서명하지."
네이드 후작은 멋지게 사인을 마쳤다. 그리고 바이스에게 계약서를 슥 밀었다. 그리고 어서 서명하라고 눈짓을 보냈다. 네이드 후작 뒤에 선 기사들이 강렬한 눈빛으로 압박을 보낸 건 덤이었다.
결국 바이스는 서명을 했다. 공증인이 계약서를 확인하고는 자신의 서명까지 거기에 넣었다.
"이로써 계약이 완료되었습니다. 양측은 계약을 이행하십시오."
공증인의 말에 네이드 후작은 즉시 품에서 100만 골드를 꺼내 계약서가 놓인 탁자에 내려놓았다.
바이스는 그것을 챙기며 뒤에 늘어선 기사들을 향해 명령했다.
"가져와라!"
기사 몇 명이 기간트를 소환했다. 사실 그들은 아직 정식 기사가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지독한 훈련을 받다가 바이스의 호출로 여기까지 온 견습 기사였다.
그들은 이번 일이 실패하면 지금까지의 훈련은 애들 장난처럼 여겨지는 지옥 같은 훈련을 시키겠다는 카이트의 협박을 받고 왔다.
그러니 어딘가 주눅이 들고 자신감이 없어 보이는 건 당연했다. 만일 이들이 좀 더 경험이 많은 견습 기사였다면 조금 태도가 달랐을 것이다.
네이드 후작은 뭔가 낌새가 이상해 당황한 눈으로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봤다. 그의 시선이 행정관들에게로 향했다. 다들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깜짝 놀랐네.'
행정관의 표정을 보니 자신의 판단에 확신이 들었다. 네이드 후작은 느긋한 마음으로 바이스를 바라봤다. 그리고 서둘러 어딘가로 향하는 기사들을 보며 씨익 웃었다.
'라이더를 50명 데려왔으니까…… 1인당 2기씩 들고 가면 되겠군.'
그렇게 속으로 생각하는 동안 에어스트 백작령의 견습 기사들이 각각 고철을 몇 개씩 들고 왔다.
쿵! 쿵!
기간트 모양의 고철이 바닥에 놓였다. 네이드 후작은 당황해서 자신이 데려온 전문가들을 쳐다봤다. 네이드 후작령의 엔지니어들이 즉시 투입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연이어 고철 기간트가 바닥에 놓였다. 그리고 엔지니어들이 그것을 일일이 확인했다.
모두 진짜 고철 기간트였다. 격렬한 전투로 인해 부서진 기간트였다. 마나 코어가 부서져 회생이 불가능한 것들뿐이었다.
처음에는 네이드 후작도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몇 기 있던 고철일 거라고 여겼다. 한데 그 수가 하나둘 늘어날 때마다 심장이 덜컥 덜컥 내려앉았다.
이내 100기의 기간트 고철이 쌓였다.
바이스는 네이드 후작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좋은 거래였습니다."
네이드 후작은 급히 고개를 돌려 행정관들을 쳐다봤다. 그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철 기간트 더미와 바이스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당했구나!'
당해도 된통 당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이 왜 이따위 무모한 일을 벌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고철을 100만 골드에 사겠다고 먼저 나서다니. 미치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없었다.
뭔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디아만트 상단의 공증까지 받았으니 계약을 무를 수도 없었다.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단단히 걸린 기분이었다.
더 이상한 건 대체 저 고철 기간트들을 언제 어디서 구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분명히 에어스트 백작령에는 고철 기간트가 없었다. 이곳에 심어 놓은 무수한 세작들이 하나같이 그렇게 보고했다. 한데 이게 대체 무슨 꼴이란 말인가.
"피곤해 보이시는군요. 좀 쉬었다 가시겠습니까?"
바이스가 걱정 어린 눈으로 그렇게 말하자, 네이드 후작은 고개를 저으려다가 문득 든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피곤하군. 오늘 하루 쉬었다가 내일 돌아가겠네."
"며칠 편히 쉬었다가 가십시오."
바이스의 말에 네이드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이를 갈았다. 10만 골드도 안 나가는 물건을 100만 골드에 팔았으니 이 정도 호의야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그날 네이드 후작은 휘하 기사들을 은밀히 파견했다. 실력이 뛰어난 자들만 파견해 에어스트 백작령에 심어 둔 세작의 동태를 살피도록 지시했다.
그는 자신이 이런 판단을 하게 된 계기가 바로 그들이라고 여겼다. 지속적으로 세작이 보내온 정보가 계속해서 떠밀었다고 생각했다.
일부분은 맞는 얘기였다. 하지만 결국 선택은 본인이 했다. 사실 처음 제론을 만나 대화를 나눈 순간부터 일이 꼬인 것이다.
당시 제론은 은밀하게 암시 마법을 걸었다. 만일 네이드 후작이 당시 흔들리지 않았다면 마법에 걸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암시가 결국 네이드 후작을 여기까지 몰고 온 것이다. 물론 그 동안 세작이 보낸 정보가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만 말이다.
네이드 후작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너무나 억울했다. 눈 뜨고 100만 골드를 빼앗겼는데 속이 안 쓰리고 배기겠는가.
"젠장. 그 고철 더미를 어디다 써먹지?"
남은 건 부품을 하나하나 분해해 팔아먹는 건데, 네이드 후작은 그건 지독히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그냥 고철로 다른 데 넘기는 게 훨씬 나았다.
하지만 지금은 고철 값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였다. 연이은 전쟁으로 기간트가 계속 부서져 나가니 쌓이는 게 고철이었다.
그런 고철을 무려 100만 골드나 주고 샀으니 속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끙끙거리고 있을 때, 밖으로 나갔던 기사가 돌아왔다.
"어떻게 됐나?"
"돈을 주고받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돈을 주고받아?"
"정보원들에게 나눠 주라며 돈주머니를 건네더군요."
네이드 후작은 이를 갈았다. 결국 세작들이 배신을 한 것이다. 세작을 키우느라 얼마나 돈과 시간을 들였는데, 그놈들이 배신한 것도 모자라 100만 골드나 되는 손해를 안긴 것이다.
"싹 잡아들여."
"그냥 나서서 잡는 건 에어스트 백작령과 마찰이 생길 소지가 있습니다."
"협조를 구해!"
"예? 혀, 협조 말입니까?"
네이드 후작령의 세작을 잡으려 하니 도와 달라는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기사가 당황하자, 네이드 후작이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우리 영지에서 도망친 범죄자라고 하면 되잖아! 알아도 눈감아 줄 거야! 세작이 사라지는데 당연히 협조하겠지! 어서 움직여! 도망가기 전에!"
"아, 알겠습니다."
기사들이 서둘러 방에서 나갔다. 한밤중이었는데도 그들은 막무가내로 바이스를 만나 협조를 요청했다. 물론 바이스는 흔쾌히 허락했다.
어차피 거기까지 모두 바이스가 꾸민 일이었다. 바인의 도움을 받아서 말이다.
그렇게 에어스트 백작령은 네이드 후작령의 세작을 싹 정리할 수 있었다. 또한 그 일로 인해 다른 곳에서 투입한 세작의 활동을 크게 위축시킬 수 있었다.
☆ ☆ ☆
슐린 후작은 텔레포트 게이트를 몇 번이나 타고 이동하느라 짜증이 잔뜩 난 상태였다. 물론 그건 자신의 선택이었지만 그건 그거고 짜증은 짜증이었다.
뤼게 백작은 그런 슐린 후작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조용히 따라가기만 했다. 이럴 때 잘못 걸리면 목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아무리 후작이고 소드 마스터라지만 귀족의 목을 함부로 칠 수는 없다. 하지만 슐린 후작은 그런 걸 염두에 두고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일단 눈이 돌아가면 누구도 말리지 못한다. 그럼 그저 결과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항의라든가 하는 나머지 문제는 나중에 해결하고 말이다.
물론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렇기에 뤼게 백작은 입을 꾹 다물고 조용히 걸어갔다.
그것은 비단 뤼게 백작만 그런 게 아니었다. 호위 명목으로 함께 따라온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슐린 후작은 모두 20명의 기사를 이끌고 왔다. 당연히 자신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뤼게 백작을 지키기 위해 데려온 자들이었다.
모두 슐린 후작이 직접 훈련시켜 키운 기사들이었다. 당연히 기간틱 나이트였다. 그렇기에 슐린 후작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많이 겪어 왔고 말이다.
"여기가 레늄 왕국의 수도인가? 그럭저럭 봐 줄 만하군."
크란 제국의 수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일국의 수도답게 슐린 후작 입장에서도 볼 만했다.
문제는 아직도 다 도착한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인 슐린 후작이라도 더 이동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니 함께 따라온 사람들은 오죽하겠는가. 다들 녹초가 되어 슐린 후작의 눈치만 슬슬 살피고 있었다.
"저기서 자고 가면 되겠군."
슐린 후작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베니뉴스 호텔이었다. 수도에서 가장 좋은 호텔이었으니 슐린 후작의 눈에 드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호텔에 도착한 후작은 당연히 가장 좋은 방을 요구했다. 문제는 방이 비어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물론 슐린 후작은 자신의 의지를 관철했다.
최상층에 머물던 귀족 중 하나가 슐린 후작의 신분을 알고는 알아서 물러난 것이다. 사색이 된 얼굴로 말이다.
그렇게 한바탕 소동까지 일으킨 슐린 후작은 푹 쉬면서 텔레포트로 인한 피로를 말끔히 날려 버렸다.
하룻밤 자는 걸로 풀기에는 쉽지 않은 피로였지만 슐린 후작은 소드 마스터였다. 전혀 상관없었다. 문제는 함께 가는 일행이었다. 당연히 슐린 후작은 그들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슐린 후작은 하루 만에 생생히 살아났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짙은 다크서클을 눈에 매달고 비틀거렸다.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가장 힘든 사람은 당연히 뤼게 백작이었다.
뤼게 백작도 나름대로 검술을 수련했기에 약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보통 사람과 비교할 때나 그렇고 슐린 후작이나 그의 기사들과 비교하면 당연히 크게 뒤떨어졌다.
뤼게 백작은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슐린 후작을 찾아갔다.
슐린 후작은 뤼게 백작을 보자마자 재촉했다.
"뭐 하고 있나? 이제 떠날 건데 준비하지 않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무슨 말? 해 봐."
"에어스트 백작령에 대한 정보를 좀 모았으면 합니다."
슐린 후작이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쓸데없는 짓은 왜 하는데?"
"좀 걸리는 부분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흥. 내 실력으로는 안 될 거라 이건가?"
슐린 후작의 몸에서 진득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뤼게 백작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게 아닙니다! 기간트에 관한 정보가 있어서 좀 더 알아보고자 할 뿐입니다!"
"기간트?"
슐린 후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화는 상당히 가라앉았다. 슐린 후작도 라이더였다. 당연히 기간트에 관심이 많았다.
다만 슐린 후작의 기간트는 히엠스였다. 발굴형 기간트 중에서도 최고의 성능을 자랑하는 기간트였기에 상대적으로 관심이 조금 덜하긴 했다.
"에어스트 백작령에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기간트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입수했습니다."
"전혀 새로운 기간트? 새로 만들었다는 뜻인가?"
"아닙니다. 정황상으로 보면 발굴형 기간트임이 분명합니다."
"발굴형이라고?"
그제야 슐린 후작이 크게 관심을 가졌다. 새로운 발굴형 기간트가 기존의 것보다 뛰어나다는 보장은 없었지만 어쨌든 관심을 가질 만한 일이었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해 봐. 어떤 기간트가 나타났다는 거지?"
"지금까지 나왔던 그 어떤 기간트보다 뛰어난 것 같습니다."
슐린 후작이 크게 흥분했다.
"그럼 지금 당장 가야지! 그런 기간트를 그냥 내버려 두는 건 죄악이야!"
슐린 후작은 마치 그 기간트가 자신의 것이라도 되는 양 말했다. 그의 표정에 다급함이 어렸다.
"그래서 정보를 확인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예전에 그 기간트를 찾기 위해 레늄 왕국의 귀족 하나가 에어스트 백작령을 들쑤신 적이 있습니다."
"뭐라고? 그래서? 그걸 찾은 거야?"
뤼게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못 찾았습니다."
"그럼 얼른 가야지! 가서 내가 찾아야지!"
"당시 그 귀족은 아공간 감지 아티팩트를 들고 온 영지를 뒤졌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못 찾았다고?"
"그렇습니다. 그러니 좀 더 확인이 필요합니다."
슐린 후작의 표정이 그제야 좀 가라앉았다.
"좋아. 여기서 며칠 더 쉬지. 대신 확실히 해야 할 거야."
"여부가 있겠습니까."
뤼게 백작은 한숨 돌리며 방에서 나왔다. 이제야 좀 쉴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뒷감당이었다. 이제는 더 확실히 정보를 얻어야만 했다. 사실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다. 에어스트 백작령에 새로운 기간트가 있는 건 확실했다.
크란 제국의 정보망은 대륙 전체에 촘촘히 퍼져 있었다. 그 정보망으로부터 확인한 정보였다.
"일단 한숨 자고 시작하자. 너무 피곤해서 돌아 버릴 것 같군."
뤼게 남작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꼬박 하루 밤낮을 자고 일어났다.
그 뒤로 열심히 정보를 모았다. 물론 그가 한 일은 많지 않았다. 그저 크란 제국의 정보망을 이용해 정보를 들여다본 것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많은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슐린 후작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텔레포트 게이트를 탔다. 뤼게 백작으로부터 딱 성격에 맞는 답을 들었다. 그냥 윽박지르고 우기면 된다고 하니 얼마나 쉬운가.
뤼게 백작은 새로운 발굴형 기간트가 에어스트 백작령에 있다고 확신했다. 또한 그 기간트는 영주인 제론 폰 에어스트 백작이 따로 관리하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에어스트 백작을 만나 무작정 기간트를 내놓으라고 윽박지르는 것이 가장 편한 방법이었다.
사실 그 방법은 슐린 후작이 아니라면 결코 쓸 수 없었다. 슐린 후작의 성격과 실력이 딱 맞아떨어지기에 성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어쨌든 게이트를 두 번이나 타고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가장 가까운 네이드 후작령에 도착한 슐린 후작 일행은 더 기다릴 것도 없이 곧장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향했다.
아직 에어스트 백작이 영지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영지의 귀족들에게 슐린 후작이 어떤 사람인지 충분히 알려줄 시간이 필요했기에 그냥 왔다.
슐린 후작에게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제론이 영지에 없다는 사실도, 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 주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가장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방법이었다.
슐린 후작 일행이 에어스트 백작령에 들어섰다. 당연히 발칵 뒤집혔다.
슐린 후작이 누구인가. 대륙에 3명밖에 없다는 소드 마스터이자, 크란 제국의 후작이었다.
그런 거물이 에어스트 백작령에 들어섰는데 영지가 조용할 리 없었다.
당연히 그중 가장 바쁘게 움직인 사람은 바이스였다. 그리고 잔뜩 기대감을 안고 있는 사람은 카이트였다.
카이트는 과연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궁금했다. 제론이 준 라이트닝 소드는 정말로 열심히 익혔다. 가끔 기간트 훈련에 소홀할 정도로 검술에 빠져들었다.
그 덕분에 지금은 오히려 라이더로서의 능력도 크게 향상되었다. 검술이 기간트 조종에 도움을 준 것이다.
어쨌든 영지가 발칵 뒤집힌 채로 슐린 후작 일행을 맞이할 준비를 서둘렀다.
"호오. 이거 기대 이상인데?"
슐린 후작은 에어스트 백작성을 보고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로 대단한 성은 크란 제국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이걸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내 성도 짓게 해야겠어."
슐린 후작은 너무나 간단히 결정을 내렸다. 뤼게 백작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가 결정을 내린 이상, 그것은 반드시 이뤄질 것이다.
슐린 후작 일행을 정중히 맞이한 바이스는 일단 쉴 공간을 제공했다. 당연히 슐린 후작은 크게 만족했다. 에어스트 백작성은 외관보다 내부가 훨씬 훌륭했다.
바이스가 한창 연회를 준비하고 있을 때, 슐린 후작은 자기 멋대로 방에서 나와 성을 돌아다녔다.
이런 성을 지을 생각이니 내부를 잘 돌아보자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성의 정원 근처에 있는 훈련장에 아주 자연스럽게 도착했다.
슐린 후작은 소드 마스터이다. 검술을 수련하는 자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또 거기에 끌리는 게 당연했다.
"호오. 기사들도 제법이잖아?"
슐린 후작이 눈을 빛냈다. 기사들이 수련하는 검술이 상당히 특이했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던 검술이었다.
"그만!"
슐린 후작이 검술에 관심을 가지고 막 집중을 하려는 찰나 커다란 외침과 함께 기사들의 수련이 멈췄다. 슐린 후작의 얼굴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화가 치민 슐린 후작에게 누군가가 다가갔다. 카이트였다.
"수련을 계속해라."
슐린 후작이 명령했다. 하지만 카이트는 그 명령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수련은 끝났습니다."
슐린 후작이 카이트를 노려봤다. 카이트는 그 눈빛을 담담히 받아 냈다.
한참을 노려보던 슐린 후작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는 경악 어린 눈으로 외쳤다.
"너 뭐야!"
"뭐가 말씀입니까?"
카이트의 담담한 대응에 슐린 후작이 살기를 담아 외쳤다.
"소드 마스터가 왜 이따위 영지에서 검이나 휘두르고 있단 말이냐!"
슐린 후작의 몸을 중심으로 거대한 마나의 회오리가 몰아쳤다.
카이트의 몸에서도 마나가 불처럼 일어났다. 그리고 슐린 후작의 마나와 만나 함께 소멸했다.
슐린 후작의 살기 어린 눈빛과 카이트의 담담한 눈빛이 중간에서 만나 불꽃을 튀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