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7/217)

Chapter 9 강행군

다들 입을 쩍 벌렸다. 너무 놀라면 말문이 콱 막힌다. 지금이 딱 그랬다.

엄청난 크기의 강철 마차 25대가 나란히 늘어선 광경은 그야말로 굉장했다.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

난민은 물론이고 미리 알고 있던 견습 라이더들 조차 쉽게 다가가지 못했다.

특히 연락을 받고 달려온 벨루스 백작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경악한 표정이었다.

"대체 저걸 어디서 가져온 건가!"

벨루스 백작의 물음에 제론은 그저 빙긋 웃기만 했다. 저걸 모두 아공간에 담아 왔다고 하면 절대 믿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나온 아공간 아티팩트는 한계가 분명했다. 그것이 설사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유물 중에서도 아공간 아티팩트는 상당히 귀했다. 그렇기에 값을 측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쌌다.

현재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가장 큰 아공간이 바로 기간트 장비였다. 10미터가 훌쩍 넘는 기간트를 보관하기 위해 만든 아공간이니 엄청난 크기였다.

하지만 그 아공간에는 기간트 외에 다른 물건을 거의 담을 수 없었다. 기간트 하나만 담아도 공간이 꽉 차기 때문이었다.

기간트의 마나 코어를 이용해 아공간을 만드는 건데, 그 한계를 적당히 정해야지 안 그러면 마나 코어가 자칫 망가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출력이 낮은 실바의 경우 아공간을 만드는 게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실바는 아공간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실바도 잘 만들기만 하면 또 뭔가 편법을 동원하면 아공간을 만들 수 있었다.

어쨌든 아공간은 그만큼 희귀했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서 아공간에 대한 얘기를 해 봐야 믿기도 어렵고, 또 득 될 것도 없었다.

아공간의 존재를 믿으면 그걸 욕심내는 사람이 반드시 나올 것이다. 그건 정말로 귀찮고 위험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저 크고 무거운 마차를 대체 어떻게 끌고 갈 생각인가? 설마 말을 구해 달라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론은 그렇게만 말하고 견습 라이더들을 쳐다봤다.

그 눈길에 견습 라이더들은 서둘러 움직였다. 일단 난민을 가까이 모았고, 적당히 인원을 나눠 마차에 태웠다.

강철 마차는 넓었지만 쾌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최대한 안전과 속도에 맞춰서 제작한 마차였다. 불편함은 감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아드보 수액이 담긴 물, 아드보 워터로 해결해야만 한다.

"대체 뭘 어쩔 생각인지……!"

벨루스 백작은 그렇게 말하다가 문득 난민을 통솔하는 견습 라이더들을 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설마 하는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설마 저기 저 기사들이 몽땅 라이더는 아니겠지?"

견습 라이더의 복장은 일반적인 라이더와는 많이 달랐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라이더가 타는 기간트는 장비부터 달랐다.

일단 상체는 가죽 갑옷이었고, 허리춤에 찬 롱소드와 양팔에 찬 팔찌, 그리고 손가락에 낀 반지 하나가 전부였다.

기존의 기간트 장비가 철로 이루어진 흉갑과 방패를 기본으로 하는 걸 생각하면 정말로 파격적인 변화였다.

게다가 검도 롱소드인 경우가 거의 없었다. 상당히 컸다. 보통은 양손검이었고, 좀 괜찮은 기간트의 경우 양손검보다는 작지만 그래도 롱소드보다는 훨씬 큰 검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니 누구도 제론이 데려온 견습 라이더가 기간트를 가지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기간트 라이더는 자신의 장비를 정말로 아낀다. 한데 제론의 견습 라이더는 그러지도 않았다.

기본적으로 상당히 튼튼하게 제작이 되었고, 파손 방지 마법진이 추가되어 있기에 아무리 험하게 다뤄도 목숨 걸고 싸우지 않는 한, 망가질 확률이 제로에 가까웠다.

벨루스 백작이 심각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사이 난민이 모두 강철 마차에 올라탔다.

강철 마차는 성인 400명을 기준으로 제작되었기에 실제로는 공간이 살짝 넉넉했다. 아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마차 안에는 생리 현상을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이 구석에 있었고, 마차 앞부분 위쪽에 라이더가 쉴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만들어져 있었다.

교대한 라이더는 최대한 편안히 쉬어야 한다. 그래야 강행군이 가능할 테니까. 마차를 제작할 때 그 부분도 상당히 신경을 썼다.

"준비해라."

제론의 명령이 떨어졌다.

견습 라이더는 임시 단장을 중심으로 알아서 모든 일을 상의했다. 그들은 각각 조를 나눠서 교대할 타이밍을 정했다. 제론은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첫 번째로 선발된 견습 라이더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즉시 마차에 올라탔다. 라이더를 위한 자리는 휴식 공간이기도 했지만, 마차 안을 감시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마차의 윗부분에 매달리듯 붙은 자리였기에 앉아서 고개만 돌려도 아래가 쫙 내려다보였다. 위에서 아래를 보면 대부분의 상황이 눈에 들어오기 마련이었다.

현재 라이더의 수는 총 150명이었다. 6인 1조를 이뤘고, 5명이 마차에 타고 남은 한 명은 마차 앞에 서서 기간트를 소환했다.

25대의 기간트가 불쑥불쑥 나타났다. 기종은 카타락타였다.

벨루스 백작은 물론이고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설마 정말로 기간트가 나올 줄은 몰랐다.

"기간트로 마차를 끌 생각을 하다니, 누구나 떠올릴 수 있지만 실행할 마음을 먹기 어려운 일이로군."

벨루스 백작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역시 제론이 아니라면 쉽게 떠올리거나 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 자신이 같은 입장에 있었다면 저 방법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벨루스 백작이 감탄 어린 시선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정말 대단해. 이번 일 성공할지도 모르겠어. 그나저나 함께 데려온 기사가 전부 기간트를 가지고 있는 건가?"

"그렇습니다. 말레피 후작령에 50명이 남아 있으니 총 200명의 라이더를 데려온 셈이군요."

다들 혀를 내둘렀다. 200명의 라이더라니. 그 정도 라이더를 언제 키웠단 말인가. 게다가 다들 기간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즉, 기간트가 200기나 있다는 뜻이었다.

"대체 기간트가 총 몇 기나 있는 건가?"

제론은 빙긋 웃었다. 대답해 줄 수 없는 질문이었다. 물론 벨루스 백작도 답을 들으려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저 놀람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뿐이었다.

"이번 일, 성공하겠군."

"그럴 생각입니다."

"다만 난민이 버틸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네."

"그 부분도 이미 대책을 마련해 뒀습니다."

"설마 그 대책이 아드보 나무는 아니겠지?"

벨루스 백작의 말에 제론은 또 빙긋 웃었다. 그는 아드보 나무에 대해 제론이 해 준 말을 믿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이런 질문을 이 타이밍에 하는 것 아니겠는가.

"아무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말레피 후작령의 난민도 실어 날라야 해서."

벨루스 백작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아, 참. 그건 그렇고 고철 기간트는 실었나?"

"예. 그건 미리 조치를 취했습니다."

언제 조치를 취했는지 모르겠지만, 벨루스 백작은 왠지 더 고민하기가 싫었다. 그는 손을 한 번 내저었다.

"그럼 됐으니 이만 가 보게. 시간도 없을 텐데."

"보여 주신 호의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훌쩍 몸을 띄워 가장 앞에 있는 마차에 올라탔다. 라이더의 자리였는데, 제론은 그 위에 위태롭게 섰다. 물론 보기에만 위태로울 뿐이었지 실제로 제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출발!"

제론의 외침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자 25기의 기간트가 일제히 걸음을 옮겼다.

쿵! 쿵! 쿵! 쿵!

25개의 강철 마차가 부드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이것이 바로 기간트의 힘이었다.

처음에는 천천히 걷던 기간트들이 점점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쿵쿵쿵쿵!

달리지는 않았다. 아직 달리기에는 숙련이 모자랐다. 달리라고 제론이 명령하면 그래도 달릴 수는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정확히 줄을 맞춰 이동하지는 못하겠지만 말이다.

제론의 목표는 한 달 안에 이들이 빠른 속도로 줄을 맞춰 달릴 수 있을 정도의 실력과 감각을 갖추는 것이었다.

충분히 가능한 목표였다.

쿵쿵쿵쿵!

강철 마차를 뒤에 매단 25기의 기간트가 빠른 속도로 나아갔다. 그들이 가는 방향에는 말레피 후작령이 있었다.

☆ ☆ ☆

대륙에 알려진 소드 마스터의 수는 총 3명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비밀리에 계획적으로 육성된 소드 마스터도 존재했고, 소드 마스터가 되어 은둔의 삶을 사는 경우도 있었다.

알려진 세 명의 소드 마스터 중 2명은 크란 제국에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란체 왕국에 있었다.

란체 왕국은 전통적으로 검을 숭상하는 왕국이었다. 그렇기에 환경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소드 마스터가 나오기 적당한 곳이었다.

기간트가 전장을 지배하는 현실 앞에서 소드 마스터는 상징적인 의미가 강했다.

하지만 반드시 상징만 남은 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라이더의 검술 실력은 기간트를 타는 데 큰 도움이 안 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소드 마스터는 아니었다.

소드 마스터가 되면 기간트 실력이 월등히 높아진다. 물론 그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소드 마스터 본인이거나 아니면 그들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만 알고 있었다.

기간트 실력이 어느 정도로 늘어나느냐 하면, 예민한 감각과 마나에 대한 감응력으로 인해 보통 라이더는 불가능한 일까지 해낼 수 있었다.

즉, 소드 마스터가 되면 자동으로 기간틱 마스터가 된다.

제론이 전쟁에서 실바를 타고 엄청난 전공을 올릴 수 있었던 것도 사실 그 영향이 컸다. 제론은 이미 그때 현재 말하는 소드 마스터가 된 상황이었으니까.

사실 소드 마스터가 되려면 제대로 된 마나 호흡법과 마나 운용법을 익혀야 한다.

한데 현재의 소드 마스터는 그런 것 없이 마스터가 되었다. 물론 엄밀히 따지면 익스퍼트였지만, 현재 누구도 그게 원래는 익스퍼트라는 것을 몰랐다.

그냥 무조건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러서 나름의 깨달음을 얻고 마나에 대한 감응력을 키워 벽을 부순 것이 현재의 소드 마스터였다.

그게 가능하려면 엄청난 재능이 필요했다. 검에 대한 재능도, 또 마나에 대한 재능도.

그리고 검에 미칠 정도로 몰두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눈곱만큼의 가능성이 열린다.

현재의 소드 마스터는 바늘구멍만 한 가능성을 통과해 경지를 이뤄낸 자들이었다.

당연히 성격도 범상치 않았다.

란체 왕국의 소드 마스터는 공작이었고, 크란 제국의 소드 마스터는 후작이었다.

그리고 크란 제국의 소드 마스터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관철시키는 걸로 유명했다. 그들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은 크란 제국의 황제와 크란 제국 마탑의 주인밖에 없었다.

그런 두 사람의 귀에 변방의 여러 나라 중 하나인 레늄 왕국과 벨룸 왕국의 전쟁에 관한 얘기가 들어갔다.

크란 제국의 소드 마스터 중 하나인 슐란 후작은 흥미로운 눈으로 보고서를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다.

"재미있군. 이놈 소드 마스터일 확률이 높아."

슐란 후작은 그렇게 말하며 불같은 질투심에 사로잡혔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 제론이라는 놈은 아직 30살도 되지 않았다.

"내가 소드 마스터가 된 게 몇 살 때였지? 52였나?"

현재 슐란 후작의 나이는 무려 65세였다. 그런데도 아직 정정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결코 그 나이로는 보지 않는다. 고작해야 40대 중반 정도로 볼 뿐이었다.

그는 소드 마스터가 되면서 성격이 상당히 급해졌다. 그리고 가끔 피를 갈구하기도 한다.

신분을 속이고 다른 왕국의 전쟁에 용병으로 참여하기도 하는 건 다 그런 이유였다.

슐란 후작은 질투심과 함께 살의가 치밀어 올랐다.

"이번에는 몰래 가면 문제가 생기려나?"

신분을 숨기고 용병일하는 거야 문제가 될 것도 없었다. 그저 깽판이나 한 번 치고 마는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비록 변방의 왕국이라 하지만 백작과의 일이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제법 전통 있는 가문이었다.

슐란 후작은 일단 나서면 피를 안 보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그럼 외교적 문제가 생긴다. 물론 크란 제국이 그깟 외교 문제에 눈 하나 꿈쩍할 리 없지만, 문제는 슐란 후작이었다.

그 일을 빌미로 입지가 줄어들 수도 있었다. 이제야 권력의 맛을 조금씩 알아 가는 중인데 그걸 잃어버리기는 싫었다.

이럴 때의 해결책은 간단하다. 그 일을 잘 처리할 사람을 하나 대동하면 된다. 슐란 후작은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적당한 인물을 물색했다.

"뤼게 백작이 좋겠군."

슐린 후작은 곧장 저택을 나섰다. 뤼게 백작은 아마 황궁에 있을 것이다. 수도에 자리를 잡은 고위 귀족은 할 일이 있건 없건 황궁에서 시간을 보낸다. 사실 이 시간에 저택에 있다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다.

황궁으로 향하는 슐린 후작의 눈에서 위험한 빛이 번득였다.

☆ ☆ ☆

집무실에서 몇 가지 사안을 확인하던 말레피 후작은 갑작스런 기사단장의 방문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인가?"

"기간트 부대가 영지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순식간에 말레피 후작의 안색이 굳었다. 지금의 레늄 왕국은 전쟁으로 미쳐 돌아가고 있다. 아무리 중립 세력이라지만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공격할 가능성도 있었다.

"몇 기나 되나?"

"25기 정도인 것 같습니다."

"25기?"

"예. 한데……."

"뭔데 망설이나? 말해 보게."

"기간트들이 뭔가 커다란 것을 끌고 있습니다."

"커다란 것?"

"마차를 크게 키워 놓은 모양입니다. 아직 멀어서 제대로 확인은 못했습니다."

말레피 후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뭔가 심상치가 않았다. 그 커다란 마차 같은 것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지 않은가.

"일단 전령을 보내긴 했습니다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전령이 그들의 목적이나 소속을 물어보러 갔지만 만일 그들이 적이라면 전령의 목을 칠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곧장 전투에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하게. 일단 기사단을 준비시키게. 나는 주변 영지에 이 사실을 알리겠네."

어쩌면 이건 중립 지역의 영지를 다시 묶을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 적 앞에서는 하나로 뭉치기가 훨씬 쉬운 법이니까.

그렇게 결정하고 막 움직이려는 찰나, 기사 하나가 다급히 들어왔다.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뭐라던가?"

말레피 후작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전령이 도착했다면 막무가내로 전투를 벌이지는 않을 거란 뜻이다. 즉, 준비할 시간이 늘어났다고 보면 된다.

"그게…… 에어스트 백작님이었습니다."

"뭐라고?"

말레피 후작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에어스트 백작이라니, 그가 왜 기간트를 끌고 온단 말인가.

"기간트가 끄는 마차에 난민을 잔뜩 태우고 왔습니다. 벨루스 백작령의 난민이라고 합니다."

순간 말레피 후작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쾅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기간트로 거대한 마차를 끌고 갈 생각을 하다니!

"허어. 이거 한 방 먹었군. 생각해 보니 그렇게 하면 분쟁 지역을 지나가도 거의 문제가 없겠어."

기간트 수십 기가 동시에 이동하는데 누가 괜히 건드리겠는가. 이동 경로에 있는 영지들은 혹시라도 공격할까 봐 전전긍긍할 것이다.

가끔 길을 열어 주지 않는 영지도 있을 수 있지만, 그거야 미리 경로를 잘 짜면 된다. 강력한 힘을 가진 영지 외에는 결코 길을 막지 않을 테니까.

"25기라고 했나?"

"예. 일단 25기인데, 우리 영지의 난민까지 다 데려가기 위해 총 50개의 강철 마차를 준비했다고 들었습니다."

"50개의 강철 마차라……."

그럼 기간트로 50기가 있다는 뜻이다. 이 정도면 웬만한 영지는 그냥 납작 엎드려야 한다.

설사 전력이 그보다 월등하더라도 섣불리 건드릴 수가 없다. 50기의 기간트와 싸우려면 피해를 감수해야만 한다. 내전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전력을 깎아 먹는 바보짓을 누가 하겠는가.

"후우. 일단 나가 봐야겠군."

말레피 후작이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제론과 한 내기가 떠올랐다.

물론 후작이 한 게 아니라 딸인 밀레나가 한 내기지만, 후작이 한 거나 다름없는 내기였다. 문득 제론이 과하지 않은 조건을 걸었다는 걸 다시 깨달았다.

"어차피 이길 내기라 이건가?"

말레피 후작은 헛웃음이 나왔다. 절반도 안 되는 나이를 먹은 청년에게 정말 호되게 당했다. 그리고 바이스의 선택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하긴, 그 녀석도 보통이 아닌데 누군가를 섬길 생각을 했으면 그거 하나만으로도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밖으로 나간 말레피 후작은 어느새 도착한 제론 일행을 볼 수 있었다. 역시 기간트는 기간트였다. 그 짧은 시간 만에 여기까지 오다니 말이다.

"솔직히 감탄했네. 이런 방법을 쓸 줄이야. 그나저나 기간트를 너무 많이 차출한 거 아닌가? 자칫 영지 방어에 구멍이 뚫릴 수도 있을 텐데."

"바이스가 알아서 잘하고 있을 겁니다."

말레피 후작은 머쓱하게 웃었다. 아들 칭찬을 하는데 기분이 나쁠 리 없었다.

"언제 떠날 생각인가?"

"전 바로 떠나고 싶습니다. 벌써 시간을 많이 지체해서 좀 걱정이 되는군요."

"그렇게 하게. 필요한 게 있으면 준비해 줄 테니 미리 말해 두게."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말레피 후작은 아쉬운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밀레나와 잘되길 정말로 바랐는데, 보아하니 쉽지 않을 듯했다.

"내기도 아예 지금 마무리하는 게 어떤가? 어차피 자네가 이긴 거나 다름없어 보이는데."

제론이 빙긋 웃었다.

"그래도 아직 끝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생각 외로 많은 사람이 죽을 수도 있고요."

말레피 후작은 졌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제론의 말을 방심하지 않고 긴장감을 유지하겠다는 의도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럼 전 난민을 보러 가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제론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난민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강철 마차를 꺼내야 하기에 서둘러야 했다. 일단 좀 떨어진 곳에 마차를 꺼내 놓고 기간트를 이용해 끌고 올 계획이었다.

말레피 후작은 멀어지는 제론을 보며 입맛을 한 번 다셨다. 정말로 아까웠다.

"밀레나를 다시 한 번 설득해 봐야겠군."

그렇게 중얼거린 말레피 후작은 나란히 늘어선 강철 마차를 보며 그 위압감에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확실히 이 정도 준비를 했으면 자신만만할 만했다.

"대단해……."

말레피 후작의 입에서 나직한 찬탄이 흘러나왔다.

제론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말레피 후작령을 떠났다. 난민의 상태는 상당히 좋아져 있었다. 후작령에 남아 있던 견습 라이더들이 제법 애를 써서 관리했기에 예상보다 훨씬 건강해졌다.

어차피 남은 한 달은 아드보 워터가 그들의 건강을 지켜줄 테니 크게 신경 쓸 일은 없었다.

게다가 고철 기간트도 상당히 많은 양을 확보할 수 있었다. 무려 42기의 고철 기간트를 말레피 후작이 확보해 주었다. 후작도 나름대로 애를 쓴 것이다.

이제 20기 정도만 더 구하면 네이드 후작이 얘기한 숫자를 맞출 수 있었다. 바인에게 미리 연락을 취해 뒀으니 알아서 준비할 것이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본격적인 강행군은 이제부터 시작이었으니까.

난민의 수는 2만 명이 넘었다. 그러니 별의별 사람이 다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대부분 밑바닥을 전전하며 생활하던 사람들이었지만, 개중에는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사람은 물론이고 제법 교육을 받은 사람도 섞여 있었다.

그중 엔트는 몰락 귀족의 후손이었다. 상당한 지식을 쌓았고, 또 원래는 영지를 다스릴 예정이었는지라 후계자 교육까지 받은 사람이었다.

엔트는 은연중 난민 중 일부를 이끄는 입장이었다. 처음에는 그가 원하지 않았지만 조금씩 떠밀려서 하다 보니 어느새 그를 따르는 사람이 많이 늘어나 버렸다.

몰락하긴 했어도 귀족은 귀족이었다. 그래서 아무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후계자 교육을 받으면서 상당한 검술 수련을 쌓은 것도 도움이 되었다.

사실 엔트는 어느 정도 각오를 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난민은 모두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걸 예상했기에 미리 마음의 준비를 했다.

또, 만일 정말로 그런 상황이 오면 사람들을 선동해 한번 확 뒤집는 시도라도 해 볼까 계획하기도 했다.

그래도 마지막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벨루스 백작령에 갔다. 그나마 난민을 학대하지 않는 영주라는 나름대로의 정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엔트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벨루스 백작령은 난민에 대한 대우가 다른 영지에 비해 상당히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일단 난민의 수가 너무 많았다. 벨루스 백작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가 버렸다. 또한 언제 또 난민이 더 몰려올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버틸 만했다. 엔트는 이대로 버티기만 하면 내전이 끝날 것이고, 그러면 어떻게든 살 방도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다.

한데 그 예상을 벗어나는 일이 벌어졌다. 벨루스 백작이 난민의 처리를 에어스트 백작에게 맡겨 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엔트도 나름 기대를 했다. 에어스트 백작에 대해서는 전쟁 영웅이라는 것밖에 모르지만 그래도 난민을 맡기로 한 이상, 다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에어스트 백작은 그 모든 예상을 일거에 무너뜨려 버렸다.

전쟁이 한창인 곳을 가로질러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간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절대 말이 안 되는 계획이었다. 난민을 다 죽이려는 게 아니라면 어찌 그런 일을 시도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엔트는 기회를 봐서 들고 일어나려고 준비를 했다. 어차피 목숨에 대한 미련은 버렸다. 그저 난민의 목숨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귀족들에게 경각심이라도 일으키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일이 잘되어서 에어스트 백작을 사로잡거나 무기라도 얻을 수 있다면 더 좋고 말이다.

무기를 든 난민은 더 이상 그냥 난민이 아니다. 강력한 무력 집단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런 엔트의 계획은 시작부터 산산조각 났다. 에어스트 백작이 무려 25대나 되는 기간트를 끌고 온 것이다. 게다가 난민을 거대한 강철 마차에 실어 버렸다.

엔트는 묘한 기분이 되어 강철 마차 안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래서 벨루스 백작령을 떠난 난민이 말레피 후작령에 들렀다가 수도로 출발하는데도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다.

한참 생각에 열중하고 있을 때, 엔트를 가장 잘 따르는 사내가 다가왔다.

"엔트 님,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별거 아니다. 그저 에어스트 백작이 어떤 사람일지 궁금했을 뿐이다."

"뭐, 별거 있겠습니까? 어쨌건 귀족이고 영주이니 다 똑같은 놈이겠지요."

"그래. 아무래도 그렇겠지."

엔트는 그렇게 대꾸해 주고는 또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이번에도 생각을 이어 갈 수 없었다.

"그나저나 거사는 언제 치르실 생각이십니까? 다들 명령이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크게 한바탕하고 싶어서 다들 근질근질 한가 봅니다. 흐흐흐."

그 말에 엔트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한바탕하긴 뭘 한단 말이냐. 기간트가 몇 기나 있는지 보면서도 그런 말이 나오느냐?"

엔트는 사실 정말로 놀랐다. 기간트가 교대로 마차를 끄는데, 마차의 수가 무려 50개였다. 즉, 50기의 기간트를 동시에 운용하는 것이다.

한데 기간트의 수는 50기가 아니었다. 서로 기간트에 탄 채로 이동 중에 교대를 한다. 교대한 라이더는 기간트를 아공간에 돌려보낸 후, 달려서 마차를 쫓아와 올라탄다.

즉, 최소 기간트의 수가 100기는 된다는 뜻이었다. 게다가 라이더의 실력도 굉장했다. 어떻게 달려서 기간트가 끄는 마차를 쫓아와 올라탈 수 있단 말인가.

만일 조금이라도 허튼 수작을 부리면 다들 죽은 목숨일 것이다. 엔트는 그래서 그 계획을 그냥 접었다. 한데 계획을 함께하기로 한 사내들은 그렇게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에이, 기간트에 타야 강한 거지. 기간트에 타지만 않으면 다들 똑같은 사람 아닙니까. 게다가 우리 숫자가 몇인데 그러십니까? 설마 겁먹으신 거 아니죠?"

엔트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저 라이더들은 전부 기사다. 그것도 상당한 실력이다. 아마 100명이 달려들어도 혼자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사내가 피식 웃었다.

"그럼 우리가 먼저 저 영주를 잡으면 되죠. 대장이 잡혔는데, 설마 우릴 다 죽일 수나 있겠습니까? 그리고 혹시 압니까? 영주를 잡고 협박하면 기간트라도 내줄지."

엔트는 너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너무 쉽게 생각하는구나."

"쉽죠. 들어 보니 저 영주가 말레피 후작이랑 내기를 한 모양입니다."

"내기?"

"예. 우리를 에어스트 백작령까지 데려가는 동안 1000명이 넘게 죽으면 지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1000명?"

엔트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희생자를 1000명 이하로 줄일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강행군을 계속하면 난민의 체력으로는 결코 버틸 수가 없었다.

엔트가 판단하기에 아무리 잘 해도 5000명은 죽어야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후하게 잡은 숫자였다. 어쩌면 절반 이상이 죽을 수도 있었다.

한데 고작 1000명 이하라니. 엔트는 직감적으로 제론의 목표가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내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느꼈다.

'대단한 자신감이로군. 하긴, 이런 일을 태연히 추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다른 대책도 세웠겠지.'

문득 자괴감이 들었다. 한없이 초라해졌다. 자신은 왜 고작 이것밖에 안된단 말인가.

"즉, 에어스트 백작은 우리를 쉽게 죽이지 못한다 이겁니다. 이번에 거사에 동참하기로 한 인원이 무려 800명입니다. 그걸 다 죽이면 내기에 이길 수 있겠습니까?"

사내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 내기에 걸린 게 무려 강철 3만 톤이랍니다. 그러니 쉽게 내기를 포기할 리도 없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그렇다. 엔트는 사내가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일을 치르려고 나서는지 충분히 이해했다. 그가 보기에는 성공할 확률이 높은 것이다.

하지만 엔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에어스트 백작은 결코 만만하거나 허술한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튼 엔트 님은 반대라 이겁니까?"

"그래. 난 생각 없다. 그리고 너희들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에어스트 백작은 네 생각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이다. 이런 일도 예상 못 했을 리가 없어. 아마 시작도 하기 전에 당할 거다."

사내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그거야 겁먹은 엔트 님 생각이고요. 제 생각은 많이 다릅니다. 아마 우리는 기간트까지 보유한 산적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사내는 위험한 말을 서슴지 않고 했다.

"혹시 압니까?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 힘을 조금만 가져도 우리만의 나라를 세울 수 있을지."

엔트는 사내의 눈에 감도는 욕망과 야망을 보고서 입을 다물었다. 더 얘기해 봐야 소용없는 상태였다.

"그래도 함께 하지 않을 겁니까?"

엔트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사내가 왜 자신을 끌어들이려 하는지 충분히 알기에 더 동참하기 싫었다. 이용당하는 건 여기까지였다.

"겁쟁이."

사내는 그렇게 말하고 엔트를 떠나갔다. 그리고 조용히 돌아다니며 거사에 동참하기로 한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계획을 맞췄다.

함께 일을 벌일 사람은 무려 800명이었다. 하지만 그중 300명만 이 마차에 탔고, 나머지는 다른 마차에 섞여 있었다.

그러니 일단 틈을 만들어야만 했다. 기회가 와야 일을 벌여도 벌일 테니까 말이다.

엔트는 팔베개를 하고 누워 버렸다. 더 생각하기도 싫었다. 하지만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반란을 일으켰다가 죽는 사람도 마음에 걸렸고, 혹시라도 에어스트 백작에게 무슨 일이 생겨 이 일 자체가 무산될까 봐 두려웠다.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구나.'

더욱 깊은 자괴감이 들었다. 엔트는 뻥 뚫린 천장을 통해 보이는 파란 하늘을 보다가 질끈 눈을 감았다. 왠지 저 맑은 하늘을 보기 싫었다.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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