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준비
저녁 만찬은 제론의 예상대로 그리 편한 시간이 되지 못했다. 끊임없이 견제하는 후작가의 아들들 때문이었다.
말레피 후작에게는 5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바이스가 빠지면서 4명만 남았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바이스가 후계자 자리를 포기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들은 바이스가 에어스트 백작가의 힘을 등에 업고 후작가의 가주가 되려 한다고 여겼다.
날 선 말을 몇 번이나 던졌지만 제론은 담담하게 응대했다. 사실 별로 신경을 쓸 필요도 없고, 관심도 없었다.
제론이 한 번도 발끈하지 않자 다들 짜증이 났다. 뭔가 넘어오는 기색이라도 보여야 할 맛이 나는데 그게 안 되니 짜증만 쌓였다.
반면 밀레나는 그것을 보며 또 마음이 식었다. 그녀가 보기에는 담대한 게 아니라 속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분위기를 말레피 후작이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당장 나서서 정리할 수는 없었다. 자칫하면 네 아들의 자신감을 꺾을 수도 있었고, 또 말을 잘못하면 제론과의 관계도 나빠질 수 있었다.
말레피 후작은 아들들에게 따로 언질을 주지 못한 걸 후회했다. 사실 훨씬 좋은 분위기로 저녁 만찬을 마쳐야 향후 말레피 후작가의 행보도 유리해진다.
말레피 후작은 에어스트 백작령이 폭풍의 핵이라고 판단했다.
바이스가 가문에 보내는 포로스의 주인이 바로 제론이라는 걸 이미 파악했다. 어쩌면 제론에게는 더 대단한 지식이나 유물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걸 생각하면, 또 현재 에어스트 백작령의 상황을 생각하면 무조건 제론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 바이스 덕분에 상당히 좋은 관계였는데, 그래서 너무 방심했다.
'나중에 따로 언질을 줘야겠군. 그나저나 좀 달래 줘야 할 텐데…….'
말레피 후작은 살짝 걱정스런 표정으로 제론을 힐끗 쳐다봤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밀레나를 바라봤다.
'쯧쯧.'
밀레나의 표정을 보니 벌써 글렀다는 걸 깨달았다. 밀레나에게 눈치를 줘서 제론을 위로하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이래서야 아무 소용없었다.
결국 말레피 후작은 제론의 눈치를 살피며 식사를 서둘렀다. 이 자리는 빨리 끝내는 게 서로를 위해 좋았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제론이 처음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나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말레피 후작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만일 오늘 만찬에서의 일 때문에 제론이 앙금을 가지고 이런 결정을 내린 거라면 향후 어떤 걸림돌로 작용할지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미리 벨루스 백작령으로 가서 난민의 상태를 확인해야 할 것 같습니다."
"허어."
말레피 후작은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난민의 상태를 확인한다는데 가지 말라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그나저나 정말로 저 난민을 다 데려갈 생각인가?"
"물론입니다."
다들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제론을 바라봤다. 제정신이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 많은 난민을 데리고 언제 에어스트 백작령까지 간단 말인가.
"설마 그들을 모두 텔레포트 게이트로 이동시키실 생각은 아니시죠?"
텔레포트 게이트는 하루에 이동할 수 있는 최대 인원이 정해져 있었다. 그러니 1만 명이나 되는 인원을 보내는 것도 문제였고, 금액도 문제였다.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는 데에는 돈이 든다. 그것도 상당히 비싸다.
"당연히 아니죠.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렇게 쓸 생각은 없습니다."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속으로 텔레포트 게이트에 대한 생각을 했다.
'우리 영지에도 슬슬 텔레포트 게이트가 필요하겠군.'
텔레포트 게이트를 설치하려면 마탑의 협조를 받아야 한다. 그것도 크란 제국 마탑의 협조를 말이다.
텔레포트 게이트에 대한 마법적 기술은 크란 제국 마탑이 독점했다. 그들은 그 마법에 관한 지식을 결코 유출하지 않았다.
텔레포트 게이트는 크란 제국 마탑에 막대한 부를 안겨 주는 고부가가치 사업이었다.
일단 게이트 설치에 막대한 비용이 든다. 무려 30만 골드라는 설치 비용이 든다.
그게 끝이 아니다 텔레포트 게이트는 크란 제국 마탑이 직접 운영한다. 즉, 게이트에 내는 비용은 마탑으로 흘러간다는 뜻이었다. 물론 영지에 세금은 낸다.
세금만 해도 엄청난 금액이었다. 하지만 마탑으로 가는 돈은 세금의 몇 배나 된다.
그러니 얼마나 막대한 돈을 벌겠는가.
각 영지는 게이트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효과를 보기에 그런 식으로라도 게이트를 설치했다. 게이트를 통해 들어오는 세금도 짭짤했고 말이다.
제론은 마탑에 게이트 설치를 의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크란 제국 마탑은 게이트를 설치해 운영하면서 돈뿐 아니라 정보까지 얻어 간다.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해 대륙 전체를 암중에 휘어잡고 있는 셈이었다.
제론은 최근 태블릿을 이용해 텔레포트 게이트에 대한 지식을 조금씩 얻고 있었다.
만일 잘되기만 하면 대륙에 나왔던 그 어떤 텔레포트 게이트보다 훌륭한 게이트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럼 저들을 다 데리고 전장을 관통할 생각인가? 아니면 산맥을 탈 생각인가?"
"전장을 관통할 생각입니다."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레피 후작마저도 그 일은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저 난민은 싹 죽겠군.'
모두 그렇게 판단했다. 말레피 후작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저 많은 난민을 다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냥 내게 적당한 돈을 지원하는 건 어떤가?"
제론이 말레피 후작을 쳐다봤다. 후작은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저 난민을 다 죽일 수는 없지 않은가. 나도 적당히 돈을 투자해 저들을 받아들이겠네."
난민이 수백 명이었다면 이런 결정을 내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1만 명은 너무 많았다.
제론이 빙긋 웃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제론이 이렇게까지 말을 하니 말레피 후작도 더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걸 지켜보던 밀레나는 결국 한 마디 툭 던지고 말았다.
"흥, 조언을 하면 들을 줄도 알아야 진짜 훌륭한 남자 아닐까요?"
말레피 후작은 엄한 눈으로 밀레나를 쳐다봤다. 밀레나는 그 눈길에 움찔 놀랐다. 하지만 후작이 나무라거나 하지 않자 말을 덧붙였다.
"1만 명을 데리고 전장을 관통한다는 게 말이 되나요?"
제론은 밀레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손가락 두 개를 펼치며 말했다.
"1만 명이 아니라 2만 명입니다. 벨루스 백작가에서도 1만 명을 인도받기로 했죠."
밀레나는 어이가 없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가? 1만 명이든 2만 명이든 무슨 상관인가. 그들을 데리고 전장을 관통한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내기 좋아합니까?"
제론이 밀레나를 보며 물었다. 밀레나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어쩌면 이건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좋아하죠."
"그럼 내기 할까요? 내가 난민을 데리고 무사히 영지로 돌아가는지 아닌지."
밀레나가 말레피 후작을 바라봤다. 허락해 달라는 듯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말레피 후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더 쉽게 제론을 엮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난민 몇 명을 살릴 수 있는지부터 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 난민을 모두 살려서 데려갈 수는 없지 않나요?"
그 부분은 제론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2만 명이나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아무리 통제를 제대로 한다고 해도 싸우다 죽을 수도 있고, 또 병으로 죽을 수도 있었다. 불의의 사고가 날 수도 있다.
제론은 그런 모든 상황을 다 고려해도 거의 모든 난민을 살려서 데려갈 계획이었다. 자신도 있었다.
"1000명으로 하죠."
제론의 말에 밀레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장난 하시나요? 2만 명을 데려가면서 고작 1000명만 살리겠다고요?"
다들 어이없는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하지만 제론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오해를 하셨군요. 1000명을 살리겠다는 게 아니라, 희생자가 1000명을 넘지 않을 거란 뜻입니다."
이번에는 다들 입을 꾹 다물었다. 누가 들어도 불가능했다. 어떻게 1000명의 희생으로 2만 명이 전장을 통과할 수 있단 말인가.
그건 세상 누가 와도 불가능했다.
"정말 그 조건으로 하시겠어요? 난민은 그 먼 길을 걸어가면 체력이 모자라서 죽을 수도 있어요."
이동 자체가 힘든 일이었다. 밀레나는 제론이 그조차 고려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 부분을 얘기해 주었다. 하지만 제론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 부분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그럼 뭘 거시겠습니까?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말레피 후작을 쳐다봤다. 사실 뭔가 큰 것을 걸 생각은 없었다. 그저 너무 무시하는 것 같아 말을 꺼냈을 뿐이었다.
아마 결과를 보고 나면 이들 모두가 에어스트 백작령을 결코 함부로 판단하거나 무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글쎄…… 뭐가 좋을까."
말레피 후작은 얼른 떠오르는 게 없어서 잠시 고민했다. 제론은 그의 고민을 단숨에 해결해 주었다.
"제가 지정하는 상단의 세금을 면제해 주십시오."
"상단의 세금 면제? 상단도 가지고 있었나?"
"관계를 가진 상단이 하나 있습니다. 그들의 편의를 좀 봐주고 싶습니다."
말레피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어려울 게 없었다.
제론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가 졌을 때는 강철 3만 톤을 드리겠습니다."
다들 헉 소리와 함께 눈이 커졌다. 강철 3만 톤이라니. 실로 어마어마한 양 아닌가. 그걸 내걸었다는 것은 그걸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니 제론이 새삼 다시 보였다.
"그게 정말인가?"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제가 이길 내기입니다. 뭘 걸든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말레나가 냉큼 나섰다.
"그럼 강철을 가지고 있지도 않은데 내기로 걸었다는 뜻인가요? 그건 도의에 어긋나는 일 아닌가요?"
제론이 피식 웃었다.
"강철을 가지고 있든 아니든 내기에서 지면 드리면 되는 거 아닐까요? 돈으로 사서라도 드릴 테니 걱정 마십시오."
제론의 말에 밀레나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새치름한 눈으로 제론을 째려봤다. 정말 얄미웠다.
"알았어요. 기대하죠."
"그럼 내기 성립이로군요."
말레피 후작이 박수를 치며 주위를 환기시켰다.
짝짝!
"자, 이제 슬슬 만찬을 끝내도록 하지. 내일 일찍 떠나려면 자네도 준비할 게 있을 것 아닌가."
말레피 후작의 말에 금세 자리가 끝났다. 다들 일어나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제론도 배정된 숙소로 돌아갔다. 딱히 준비할 건 없었다. 하지만 휴식은 꼭 필요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텔레포트 게이트로 간 제론은 미리 나와서 준비하고 있는 견습 라이더들을 확인했다. 모두 150명이었다.
벨루스 백작령의 난민이 1만 명이니, 6교대로 강행군이 가능한 숫자였다.
말레피 후작령과 벨루스 백작령은 그래도 비교적 가까운 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난민이 걸어서 이동하려면 보름은 잡아야 할 거리였다.
하지만 제론은 이틀 만에 주파할 생각이었다. 충분히 가능했다. 6교대로 달리면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로 끊임없이 달릴 수 있다.
아직 단체로 달리는 일이 제대로 적응되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세운 계획이었다.
따로 연락을 하지 않았는데도 벨루스 백작은 알아서 사람을 게이트 근방에 상주시키며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사람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당연히 제론 일행이 게이트에서 나오니 눈에 띄었고, 그들도 알아봤다. 이른 아침이었는데도 다들 긴장한 상태로 기다리는 중이었다.
게이트에서 기다리던 사람은 철사자 기사단이었다. 가장 먼저 제론을 발견한 사람은 부단장인 펠이었다. 펠은 아직도 예전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받은 충격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제론을 보니 당시의 감정이 순식간에 되살아났다. 펠은 마치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벽 앞에 선 기분이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환영합니다. 에어스트 백작님."
펠이 먼저 정중히 인사하자, 기사단장이 그제야 제론을 알아보고 황급히 예를 취했다. 예전이야 어쨌든 이제는 백작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할 사람이었다.
제론을 본 기억이 있는 철사자 기사단 전원이 일제히 예를 취했다. 마치 벨루스 백작이 게이트에서 나온 걸로 착각할 정도의 태도였다.
사실 제론도 이런 대접을 해 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는지라 살짝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이곳은 세나의 가문이었다. 그렇다면 이 정도 대우는 받아도 된다. 제론은 그렇게 편히 생각했다.
"아직 영주님께서는 기침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다리시는 동안 쉬실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기사단장이 나서서 말하자, 제론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이 시간에 백작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난민이 있는 곳으로 갑시다."
"예?"
기사단장이 놀란 눈으로 반문하자. 옆에 서 있던 펠이 나서서 대답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제론은 고개를 끄덕이고 펠을 따라갔다. 기사단장은 그 뒤를 따라가며 고개를 저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난민의 상황이 많이 좋지 않습니다."
펠의 말에 제론이 고개를 저었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좋소. 벨루스 백작님께서 신경을 많이 쓰신 모양이오,"
벨루스 백작령의 난민은 그래도 말레피 후작령의 난민보다 훨씬 상태가 좋았다.
이른 아침이었는데도 잠을 자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배가 고프니 잠도 잘 못 자는 것이다.
"일단 좀 먹이고 씻겨야겠군."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펠을 쳐다봤다. 펠이 움찔 놀라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음식을 좀 준비해야겠소. 도와주시겠소?"
"무, 물론입니다."
펠이 대답하자, 제론은 견습 기사단의 임시 단장을 불러 펠에게 붙여 주었다. 견습 기사단의 임시 단장은 모두 4명이었다. 말레피 후작령에 남은 사람을 제외하고 3명이 이곳에 있었는데, 그중 가장 선임이었다.
견습 라이더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그리고 그들을 도와 철사자 기사단도 함께 다녔다.
제론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봤다.
한 번 경험이 있어서인지 순식간에 준비가 끝났다. 난민들이 정신없이 움직였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상태였다.
난민들은 씻고 청소하고 먹었다. 자던 사람도 깨서 우르르 모여들었다.
1만 명이 그렇게 움직이니 엄청나게 부산스럽고 시끄러웠다. 하지만 제론은 묵묵히 그 광경을 모두 지켜봤다.
제론이 파악하려는 것은 이들의 건강 상태였다. 체력이나 건강이 어느 정도는 되어야 이동이 가능할 테니 말이다. 벨루스 백작령에 미리 온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말레피 후작령의 난민을 나흘 내에 이동 가능한 상태로 만들라는 지시를 내리고 왔다. 그때는 대충 한 말이었는데, 지금 보니 일정이 맞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이곳의 난민은 상태가 제법 괜찮았다. 이틀 정도 철저히 관리를 해 주면 강행군에 버틸 체력을 조금이나마 만들 수 있을 듯했다.
'아이와 노인이 문제로군.'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제론에게는 남들은 모르는 다양한 방법이 있었다. 초고대 문명의 마법이나 지식에는 이런 경우에 쓸 수 있는 것도 제법 많았다.
"그럼 식수를 준비해 볼까?"
배불리 먹고 씻고 청소까지 마친 난민들은 나른한 표정으로 각자 자리에 누웠다. 잠을 통해 쌓인 피로를 풀려는 것이다.
이때는 그냥 두면 된다. 앞으로 제대로 먹이고 푹 쉬기만 해도 체력이 회복될 것이다.
남은 건 한 달의 강행군을 버틸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일뿐이었다. 제론은 그 방법을 식수에서 찾았다.
그냥 물을 식수로 쓰는 게 아니라 특별한 물을 식수로 써서 체력과 건강을 유지시킬 계획이었다.
제론이 머릿속으로 계획을 점검하고 있을 때, 철사자 기사단이 다가왔다. 가장 앞에는 기사단장과 펠이 있었다.
"지시하신 일을 마무리 했습니다."
기사단장의 보고에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백작님을 뵈러 갑시다."
제론은 철사자 기사단과 함께 벨루스 백작을 찾아갔다. 견습 라이더들은 모두 남아 난민을 통제했다.
배불리 먹여 준 그들에게 난민들은 상당히 고마워했다. 그래서 통제에는 별 무리가 없었다. 다들 지극히 협조적이었다.
난민을 모두 끌고 가겠다는 제론의 발언은 벨루스 백작가에서도 큰 반응을 이끌어 냈다. 다들 미친 짓이라고 판단했다.
누구든 제론의 말을 들으면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무려 2만 명이나 되는 난민을 데리고 분쟁 지역을 돌파하겠다니, 말도 안 되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여기서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말레피 후작가와는 달리 내기까지 하지는 않았지만 끊임없이 우려하는 말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제론은 어떤 말을 듣건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제론은 식수를 준비하는 데 온 신경을 다 쏟고 있었다.
무려 2만 명이 한 달간 마셔야 할 물이었다. 그 양이 어마어마했다.
사실 물이야 어딜 가든 있다. 하지만 아무 물이나 마시면 건강을 지킬 수가 없었다. 더구나 요즘처럼 전쟁이 벌어지고 있을 때는 더더욱 그러했다.
혹시 시체가 담겨 있던 물을 식수로 쓰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재앙이 벌어진다.
그러니 물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다. 문제는 고인 채로 오랜 시간이 지난 물은 신선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그 문제에 관해서는 걱정하지 않았다.
제론이 가진 아공간에 물을 담아 두면 오랫동안 신선함을 잃지 않고서 보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벨루스 백작가에서 제론은 이틀 동안 바쁜 시간을 보냈다. 다른 사람에게 거의 신경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뭘 하고 있다고? 아르보 잎과 가지를 모은다고? 대체 그걸 왜?"
아르보는 벨루스 백작령에서 가장 흔한 나무였다. 하지만 딱히 쓸모가 있는 나무는 아니었다. 열매가 열리는 것도 아니고, 약재로 쓸 수도 없었다.
그 나무의 잎과 가지를 대량으로 모으고 있다면 그걸로 뭔가를 한다는 뜻인데 대체 뭘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뭔가를 하는 건 분명합니다."
집사의 말에 벨루스 백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뭘 하는지 파악도 못했다는 점이 거슬렸다.
"그것 말고 하는 일은 없고?"
"물을 잔뜩 모으고 있습니다."
"물을 모아? 대체 왜?"
지천에 널린 게 물이었다. 한데 그걸 또 왜 모은단 말인가. 아르보 잎과 가지를 물에 우릴 수도 있지만 그건 아무 쓸모없는 짓이었다. 그거야 벨루스 백작령에서 벌써 오래전에 다 시도해 본 것들이었다.
아르보 나무에는 아무런 효능도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싹 뽑아 버리고 다른 유용한 나무를 심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많았다.
또한 굳이 나무가 아니라도 벨루스 백작령에는 돈이 될 만한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신경을 끄고 있었다.
한데 제론이 그걸 모으고 있다니 괜히 관심이 갔다. 벨루스 백작이 판단하는 제론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냥 뛰어난 정도가 아니라 감히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랬기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에어스트 백작령에 두고도 걱정하지 않았다. 향후 제론의 짝이 될 거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벨루스 백작은 한참동안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 상태로 고민해 봐야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보다 고철 기간트를 모으는 일은 어떻게 되었나?"
"아무래도 요즘은 구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아서 제법 많이 모았습니다. 30기가 좀 넘습니다."
벨루스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체면치레는 했군."
"얼마에 팔면 되겠습니까?"
집사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벨루스 백작이 피식 웃었다.
"무슨 돈을 받아? 그냥 주도록. 어차피 성 밖에 있는 1만 명의 난민을 해결하려면 그 수백 배의 돈이 들어갈 텐데."
"그야 그렇습니다만……."
아무리 고철이 되었다고 하지만 기간트의 값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것이 무려 30기가 넘었다. 거기에 들어간 돈은 상당했다.
하지만 백작의 말대로 난민을 해결해 준다면 그 정도 돈이야 얼마든지 투자가 가능했다. 문제는 집사가 보기에 제론이 난민을 제대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는 점이었다.
"영주님. 외람되지만 이번 일 재고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재고? 왜? 불안한가?"
"그렇습니다. 만일 난민을 데리고 분쟁 지역을 지나가다가 그들이 다 죽기라도 하면 에어스트 백작가만 타격을 받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날아올 화살도 만만치 않습니다."
집사의 말대로 만일 난민이 다 죽으면 그들을 제론에게 떠넘긴 벨루스 백작가나 말레피 후작가도 비난을 면키 어렵다.
하지만 벨루스 백작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차피 난민이야. 난민이 되었다는 건 그걸 다 각오했다는 뜻이지. 그리고 에어스트 백작을 좀 믿어 봐. 그 사람, 생각보다 대단하니까."
"하지만……."
벨루스 백작이 손을 내저었다.
"아아, 됐어. 이미 결정한 일이니 번복이 더 어렵다는 거 알잖은가. 그리고 말레피 후작가는 그런 것 하나도 생각 안 했겠나?"
집사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말레피 후작가가 이 일을 그냥 진행한다는 점이 좀 이상하긴 했다. 그들도 생각이 있을 텐데 말이다.
"난민에 대한 인식은 딱 그 정도야. 아마 그 사정을 봐주고 비난할 사람은 같은 난민밖에 없을 거고."
벨루스 백작의 말은 냉정하고 잔인했지만 집사도 그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렇게 될 것이다. 여론만 제대로 조성하면 일반 영지민이 동요할 일도 없다.
아니, 영지민은 오히려 좋아할 것이다. 지금도 난민을 다 죽여야 한다고 떠드는 과격한 자들이 종종 있었다.
그러니 난민이 떠나가면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물론 그걸 빌미로 다른 영지에서 수작을 부릴 가능성은 있었다. 하지만 벨루스 백작가나 말레피 후작가는 그런 수작을 얼마든지 타파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
"그러니 그냥 지켜보기만 하게. 그리고 뭘 하고 있는지 꼭 보고하고."
"알겠습니다."
집사는 결국 그렇게 대답하고 물러났다. 아니, 그 말을 하는 벨루스 백작의 얼굴에 떠오른 씁쓸함 때문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벨루스 백작은 집사가 물러가자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체 제론이 왜 물과 아르보 나무를 구하는지 아무리해도 알 수 없었다.
"그냥 가서 물어볼까?"
벨루스 백작은 한참을 더 고민하다가 결국 제론을 찾아가기로 결정했다. 이럴 때는 직선적으로 승부하는 것이 벨루스 백작의 방식이었다.
"33기면 적당하군. 말레피 후작도 한창 모으고 있다니 양은 충분하겠군."
바인도 수도에서 열심히 선을 대서 모은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마 모자라는 양은 바인이 몽땅 해결할 수 있을 듯했다.
베론은 산처럼 쌓인 고철 기간트를 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걸 받을 네이드 후작의 표정만 생각해도 절로 웃음이 났다.
이제 이걸 담아 갈 공간만 만들면 된다. 그건 난민을 실어 나를 강철 마차를 꺼내면 모두 해결된다.
25대의 마차를 꺼낼 예정인데, 그 공간이면 이 정도 고철은 싹 담을 수 있었다.
또한 말레피 후작령에서도 마차를 꺼낼 테니 남은 공간에 또 그곳의 기간트를 넣으면 된다.
수도에서 바인으로부터 남은 고철을 받아 합친 다음, 유적을 통해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이동시키면 모든 일이 아주 간단히 해결된다.
처음 그 얘기를 꺼냈을 때부터 이 계획을 세웠다. 네이드 후작은 아마 계약서를 찢어 버리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공증으로 세울 디아만트 상단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또 이용하게 됐군."
디아만트 상단의 클레에게는 몇 번이나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조만간 그 빚을 모두 갚을 수 있을 것이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식량을 판매할 수 있게 되면 아마 디아만트 상단은 단숨에 위로 치고 올라갈 테니 말이다.
제론은 고철 더미를 뒤로 하고 성을 나섰다. 이제 식수를 만들 시간이었다.
그동안 물은 충분히 확보했다. 물이야 어디에 가든 잔뜩 구할 수 있었다. 우물에서 퍼도 되고 흐르는 시냇물을 떠도 된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물을 담을 거대한 통을 몇 개나 준비했고, 그 안에 물을 꽉 채웠다. 이제 그 물을 아드보 잎과 가지를 이용해 변화시킬 시간이었다.
아드보 잎과 가지의 효용은 현재 전혀 알려진 부분이 없었다. 하지만 초고대 문명에는 상당히 유용하게 쓰이던 약재였다.
중요한 건 숙성이었다. 그것도 엄청나게 긴 숙성이 필요했다. 최소 50년은 숙성해야 필요한 성분이 조금씩 생겨난다.
그러니 아무리 연구를 해도 알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현재는 그렇다. 하지만 초고대 문명에는 엄청난 마법 지식이 있었다.
특별한 마법을 이용해 긴 시간 숙성하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낼 수 있었다. 제론이 쓰려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여기 아드보 나무가 굉장히 많군?"
초고대 문명에서는 아드보 나무를 계획적으로 육성했다. 당시의 사람들은 그냥 맹물을 마시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대부분 아드보가 섞인 물을 마셨다.
아드보는 그저 흔한 나무가 아니었다. 비록 요즘에는 흔히 볼 수 있지만 그건 초고대 문명이 남긴 흔적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런 아드보 나무가 이렇게 많이 자라는 곳은 사실 왕국 전체를 놓고 봐도 거의 벨루스 백작령이 유일했다. 이곳은 유난히 아드보 나무가 많았다.
제론은 한 가지 가능성을 점쳤다. 어쩌면 이곳이 초고대에 아드보 나무를 육성하던 곳이 아니었을까?
"이걸 어떻게 확인하지?"
베어크 영지의 유적은 길을 지나가다가 기이한 느낌을 받아서 찾아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즉, 존재하더라도 아주 먼 곳에 있다는 뜻이었다.
만일 이곳에 거점을 하나 만들 수 있다면 정말로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벨루스 백작령은 향후 좋은 관계를 유지해 나가야 할 곳이었다.
"일단 이것부터 하고 꼭 찾아봐야겠군."
제론은 아드보 나뭇잎과 가지를 커다란 통에 넣었다. 물과 섞을 때는 적당한 비율이 매우 중요했다. 2만 명이 한 달 동안 마실 물이니 나뭇잎과 가지도 엄청나게 많이 필요했다.
통에 그것을 모두 담은 뒤 물을 가득 채웠다. 깨끗한 물이 중요했고, 또 숙성시킬 때, 반드시 섞여야 하는 몇 가지 재료도 중요했다. 그것 역시 정확한 비율에 맞춰야 한다.
초고대 문명에서는 이 모든 것을 자동으로 진행시키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다.
아드보 나무를 키우고, 번식시키고, 거기서 잎과 가지를 채취하는 것에서부터 그걸 정확한 비율로 섞어 숙성시키고 또 물에 넣는 과정까지 인간의 손이 전혀 닿을 필요가 없었다.
제론은 그 시스템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물만큼은 꼭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통을 밀봉한 제론은 가볍게 손을 대고 마나를 흘려 넣었다. 제론의 심장에서 맴돌던 마나링이 급격히 가속했다.
우우우웅!
손바닥에서 튀어나온 마법진이 통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은은한 빛이 통을 한 번 휘감고 사라졌다.
이제 숙성 마법이 시작되었다. 이미 마법진은 통 바닥에 새겨져 있었다. 지금 제론이 한 것은 마법진을 활성화시키고, 자신의 마력을 이용한 숙성의 가속이었다.
이제 이대로 내버려 두기만 하면 된다. 정확히 7시간 후에 아드보 수액이 완성된다. 물론 더 지나도 된다. 시간이 지나면 마법진이 자동으로 사라지게 세팅해 뒀다.
이제 남는 시간에 유적을 찾아보면 된다. 그 전에 이걸 지킬 사람이 필요했다. 아공간에 넣을 수는 없었다. 아공간에 넣으면 숙성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제론이 견습 라이더 몇 명을 데려올까 생각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그곳으로 다가왔다. 일단의 무리가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오고 있었다.
"분위기를 보니 기사인 것 같은데?"
강한 마나가 느껴졌다. 익스퍼트였다. 제론은 누가 오는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벨루스 백작이었다. 제론의 시선이 통으로 향했다.
"이것 때문에 온 모양이로군."
제론은 순간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 통을 숨기기로 했다. 생각해 보니 아주 간단한 방법이 있었다.
제론은 바닥을 향해 손을 펼쳤다.
우우우웅!
거대한 마법진이 나타났다. 그 마법진은 바닥에 스며들었다.
꽈득! 꽈득! 꽈드드득!
제론의 마나링이 끌어들인 마나가 순식간에 바닥을 파헤쳤다. 커다란 구덩이가 만들어지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드보가 든 통을 충분히 넣을 수 있을 정도의 깊이였다. 제론은 망설이지 않고 통을 그 안에 넣었다.
어차피 밀봉했고, 마법을 이용해 충격을 방지했다. 또 빈틈도 마법적 처리를 통해 메웠다. 땅에 묻는다고 해서 문제가 생길 일은 없었다.
퍽! 퍽! 퍽!
제론은 밖으로 나온 흙을 발로 차서 구덩이 안으로 밀어 넣었다. 순식간에 구덩이가 메워졌다. 제론은 소드 마스터다. 그 정도 일은 눈 몇 번 깜짝할 시간이면 끝낼 수 있었다.
땅이 평평해졌다. 누가 봐도 이곳에 그렇게 큰 통이 묻혔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잠시 후, 벨루스 백작이 기사 몇 명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났다.
"여기에 있었군. 대체 뭘 하기에 이렇게 보기가 힘든가? 하하하하."
벨루스 백작은 제론을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다른 감정을 싹 배제하고 보니 썩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다.
"잠깐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제론은 벨루스 백작을 정중히 대했다. 세나의 부모였다. 허투루 대할 수 없었다. 말레피 후작을 대할 때와는 조금 느낌이 달랐다.
"내 말 빙빙 돌리지 않고 묻겠네. 대체 아드보 잎은 왜 구한 건가?"
"물에 섞어 마시려고 구했습니다."
"그게 효과가 있나?"
"가능성이 있는 건 다 시도할 생각입니다."
제론은 자신이 아는 걸 다 말해 줄 생각이 없었다. 아드보 잎을 섞은 물은 향후 에어스트 백작령의 중요한 특산물이 될 것이다.
"흐음."
벨루스 백작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가능성이 있는 건 다 시도한다는 말이 확 와 닿지가 않았다.
"아드보 잎에 대한 건 우리 영지에서도 꽤 오랫동안 연구했네. 알고 있나?"
"그렇게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 효과도 없다는 것만 입증했네. 만일 그냥 해 보는 거라면 굳이 시간 낭비하지 말게나."
"잘 생각해 보겠습니다."
제론은 반박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였다. 어차피 준비는 다 끝났다. 이젠 기다렸다가 물에 섞기만 하면 된다. 물은 아공간에 보관할 테니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그보다 난민은 대체 어떻게 데려갈 생각인가? 아무리 고민해도 자네 생각을 알 수 없군. 설마 남들이 다 생각하는 방법으로 데려가는 건 아닐 테고 말이야."
"마차를 이용할 생각입니다."
"마차?"
벨루스 백작은 제론이 가지고 있던 비밀을 풀자 반색했다. 하지만 마차라는 말에 금세 실망했다. 대체 난민이 몇 명인데 마차로 그걸 해결한단 말인가.
"마차는 보이지 않던데……."
"곧 준비될 겁니다."
벨루스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내 생각에는 방법을 좀 바꾸는 게 나을 것 같네. 아무래도 마차로 이동하는 건 문제가 많아. 마차 몇 대로 해결이 될 만한 상황이 아닐세. 설마 마차 수천 대를 동원할 생각인가?"
제론이 빙긋 웃었다.
"물론 그건 아닙니다. 아마 내일이면 다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내일? 마차가 내일 오기로 되어 있나?"
"그런 셈입니다."
제론은 딱 거기까지만 대답했다. 벨루스 백작도 더 묻지 않았다.
"그나저나 오늘은 시간이 어떤가? 어제는 워낙 바빠 보여서 말도 못 꺼냈군. 간단하게 술이라도 마시고 싶은데 말일세."
"좋습니다. 오늘은 저도 일이 다 마무리되었습니다."
나머지 일은 견습 라이더가 알아서 하고 있으니 제론이 할 일은 딱히 없었다. 물도 준비가 끝났고 말이다.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가는 동안 쓸 식량은 말레피 후작령에 남은 임시 단장이 준비하기로 했으니 오늘은 그저 쉬면 된다.
"하하하하. 그거 잘됐군. 그럼 함께 가지."
벨루스 백작은 호탕하게 웃으며 제론을 데리고 성으로 돌아갔다.
그날 저녁 만찬은 길게 이어졌다. 벨루스 백작은 제론에게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사실 대화를 하면서 교묘하게 제론이 요즘 뭘 하는지, 또 어떤 방법으로 난민을 나를지 알아내고자 했다.
하지만 제론은 결코 벨루스 백작에게 넘어가지 않았다. 소드 마스터가 된 이후 원치 않으면 결코 술에 취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
다음 날, 제론은 새벽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일단 아드보 수액을 묻은 곳으로 가서 통을 땅에서 꺼냈다. 물론 아무도 모르게 했다. 너무 이른 시간이었기에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제론이 아드보 수액이 든 통을 묻은 장소는 원래 인적이 없는 곳이었다.
아공간에 미리 넣어둔 물통을 꺼내 그 안에 정량을 넣었다. 되도록 양을 정확히 맞추려 애썼다. 만일 양이 틀리면 약효가 많이 떨어진다.
물론 떨어진 약효로도 충분히 원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아드보 수액을 섞은 물은 일단 기본적인 체력 향상에 큰 효과가 있었다. 또한 신진대사를 도와 몸을 건강한 상태로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준다.
다음으로 사실 가장 중요한 능력인데, 수련 시 마나를 잘 받아들이도록 해 준다. 그렇기에 초고대 문명의 기사나 마법사의 경우 거의 필수적으로 아드보 수액이 섞인 물을 꾸준히 마셨다.
그 외 피부 미용에 효과가 좋고, 정력에 큰 보탬이 된다. 사실 이 효과가 현재로서는 다른 효과보다 훨씬 중요할 것이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찾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니 말이다.
제론은 모든 통에 아드보 수액을 섞은 다음 주위를 둘러봤다. 아드보 나무가 지천에 깔려 있었다.
아드보 나무는 본줄기가 자라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데 잎이나 가지는 잘 자라는 편이다. 그래서 가지를 뚝뚝 잘라내도 다시 자라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벨루스 백작령에 와서 매번 아드보 잎과 가지를 채취할까도 생각해 봤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유적도 찾아야 하는군."
오늘 떠날 계획이니 사실 시간도 많지 않았다. 제론은 아드보 나무가 가장 많은 지역을 우선 찾았다.
마법을 쓸 수 있으면 이럴 때 편하다. 제론은 하늘로 쭉 날아올랐다. 소드 마스터의 시력으로 하늘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쯤이야 아주 간단히 찾을 수 있었다.
"저기가 제일 의심스럽군."
벨루스 백작령은 상당히 넓었다. 그중에서 남쪽에 아드보 나무로 완전히 뒤덮이다시피 한 큰 산이 하나 있었다.
제론은 망설이지 않고 그 산으로 날아갔다. 거기 말고도 아드보 나무가 많은 곳이 군데군데 있었지만 그 산을 보니 느낌이 확 왔다.
산꼭대기에 내려선 제론은 베어크 영지에서의 느낌을 살리려 애썼다.
아래에 유적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 산에 고대 유적이 있고, 그 아래에 초고대 유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제론은 눈을 지그시 감고 감각을 집중했다.
예상은 맞았다. 예전 그 느낌이 찾아왔다. 한데 감이 너무 멀었다. 방향은 확실히 잡을 수 있었다. 바로 발아래였다.
즉, 산 때문에 감이 멀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그건 좀 이상한 일이었다.
사실 초고대 문명의 유적은 일종의 아공간에 존재하고 있다. 실제로는 유적을 코앞에 두고도 거기에 유적이 있는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니 거리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렇게 멀게 느껴진다는 건 이 산에 뭔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제론은 일단 유적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만일 그게 가능하다면 산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알아볼 방법을 만들 수 있다.
"아네모스."
휘류루루룽!
바람이 뭉치며 아네모스가 나타났다. 제론은 그것을 팔찌에 넣었다.
화아악!
빛이 일었다. 제론은 유적에 갈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나타난 결과는 완전히 의외였다.
"그대로라고?"
분명히 아네모스와 팔찌가 반응을 했다. 그런데 유적에 갈 수 없었다. 제론은 여전히 산꼭대기에 서 있었다.
이 산에 유적에 가는 것을 방해하는 뭔가가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과연 그게 무엇일까?
제론은 일단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조사할 방법은 태블릿뿐이었다. 태블릿에서 검색을 하다 보면 분명히 뭔가 정보가 나올 것이다.
어쨌든 일단은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난민을 나르는 한 달 동안 꾸준히 검색을 해서 알아내기로 했다. 이것을 알아내면 뭔가 큰 변화가 올 거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제론은 오늘 느꼈던 그 감각을 음미하며 천천히 산을 내려갔다.
이제 벨루스 백작령을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