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화 (65/217)

Chapter 7 난민 수송 작전

"예? 영주님께서 직접 지휘하시겠다고요?"

바이스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외쳤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 위험한 일에 어찌 영주가 나선단 말인가. 영주는 영지에 가만히 있어 주는 것이 모두에게 이로웠다.

"당분간 영지전이 벌어질 일도 없잖아."

"그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뭐가 문젠데?"

"너무 위험합니다!"

난민을 여기까지 대체 어떻게 끌고 오겠다는 말인가. 설마 그 많은 난민을 텔레포트 게이트를 통해서 데려오는 건 아닐 테고 말이다.

"너무 오래 영지를 비우시게 됩니다. 영지 운영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다들 잘하잖아. 솔직히 내가 영지 운영에 대해 지금까지 신경 쓴 게 있었나?"

"그래도 영주님께서 계시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바이스는 한 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성공할지 실패할지조차 알 수 없는 계획이었다. 그런 일에 영주를 밀어 넣을 수는 없었다.

중간에 내전 중인 병력이라도 만나면 교전할 가능성도 있었다. 너무 위험했다.

"내가 가야 성공할 수 있어."

바이스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제론을 바라봤다.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 파악한 다음 말을 해도 늦지 않는다.

"기간트를 이용해서 거대한 마차를 끌고 이동할 생각이야."

바이스가 헛숨을 들이켰다. 확실히 기간트를 이용해 마차를 끌게 하면 시간을 대폭 단축시킬 수 있을 것이다. 기간트는 보폭도 넓다. 또한 지치지도 않는다.

제대로 이용할 수만 있다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난민을 나를 수 있을 것이다.

"교대조를 만들어서 24시간 쉬지 않고 이동만 할 계획이야. 목표는 한 달. 한 달 안에 거기서 여기까지 난민을 옮긴다."

"그렇게 빨리 이동이 가능하겠습니까?"

"어차피 힘은 기간트가 쓰는데 당연히 가능하지."

제론은 자신만만했다. 아마 기간트 라이더도 계속 걷다 보면 실력이 늘어날 것이다.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는 거지만, 그걸 통해 움직임의 군더더기를 없앨 수 있다.

"2만 명의 난민을 날라야 하니, 기간트 몇 기를 동원해야 할지부터 계산해야겠군."

"마차의 크기가 먼저 결정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차는 강철로 만든다. 영지의 대장장이를 몽땅 동원해서 만들어. 기간트를 동원하면 좀 더 빠르게 제작이 가능할 거다."

제론은 바이스를 한 번 쳐다보고는 말을 이었다.

"마차 한 대에 난민 400명을 태운다. 굉장히 커야 할 거야."

400명을 태우려면 어마어마하게 커야 한다. 그런 마차를 만들려면 강철도 많이 필요했다.

"철은 내가 준비해 주지. 보관해 둔 게 있으니까. 아마 모자랄 일은 없을 거야."

제론은 계획을 점검하며 하나하나 문제점을 해결해 나갔다.

일단 쉬지 않고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음식을 조리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마른 음식을 잔뜩 준비하기로 했다. 주로 육포였다.

화장실은 마차 구석에 구멍을 뚫어 따로 만들면 된다. 씻는 게 문제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 달만 버티면 된다.

사실 한 달을 끊임없이 이동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적당한 기간을 정해서 몇 시간 쉬어 주지 않으면 버티지 못한다.

하지만 그걸 최소화하면 된다. 일단 하루라도 빨리 에어스트 백작령에 도착하는 게 좋다. 위생은 그 뒤에 챙기면 된다. 혹시 병에 걸렸어도 그때 고쳐 주면 된다.

한 달은 길어 보이지만 상당히 짧은 시간이었다.

계획이 정리되자, 바이스는 울며 겨자 먹기로 준비에 들어갔다. 제론은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았다.

제론이 유적의 창고에서 가져다 준 철괴를 이용해 마차가 제작되었다. 처음 계획대로 4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마차였는데, 워낙 크기가 크다보니 바퀴를 좌우 각각 30개씩 달았다.

바퀴의 크기를 작게 해서 안정성을 높였고, 안전을 위해 이중 구조로 겹쳐 벽을 만들었다.

바이스는 철 마차 제작을 감독하면서도 찜찜했다. 일단 마차를 끌고 중립 지역까지 가야 하는데, 그걸 어떻게 해결할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영지의 모든 대장장이가 나서고, 기간트까지 동원하니 철 마차 제작은 순조롭고 빠르게 이뤄졌다.

2만 명을 실어 나르려면 400명을 태울 수 있는 마차 50대가 필요했다. 하지만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서 마차는 모두 60대를 만들었다.

시간은 충분했다. 이걸 제대로 옮길 수만 있다면 말이다.

바이스가 그렇게 마차를 제작하는 동안 카이트는 라이더를 선발했다.

계속 교대하면서 마차를 끌려면 최소한 150명의 라이더가 필요했다.

마차를 60대 제작했으니 그것까지 고려하면 180명이 필요했다. 라이더야 얼마든지 있었다. 한데 어떤 수준의 라이더를 뽑느냐가 문제였다.

분쟁 지역을 통과해야 하니 실력이 뛰어난 라이더를 보내야 하나, 아니면 훈련을 겸해서 그보다 좀 급이 낮은 라이더를 보낼지도 결정해야 한다.

카이트는 사실 라이트닝 기사단 전원을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제론이 대번에 결정을 뒤집었다.

영지를 지키려면 라이트닝 기사단이 필요했다. 그들이 떠나면 네이드 후작령이 혹시라도 다시 영지전을 벌이려 할 때 큰 곤욕을 치를 수 있었다.

물론 제론이 당장 달려오면 되지만 말이다.

어쨌든 제론은 카이트에게 실력이 좀 처지는, 즉, 경험이 부족한 라이더를 뽑도록 지시했다.

그래서 카이트도 찜찜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영주의 명령이니 지켜야만 했다.

그렇게 200명의 라이더를 뽑았다. 견습 라이더에 더 가까웠다. 아마 그들은 이번 여정이 끝나면 제법 괜찮은 실력을 갖게 될 것이다.

중간에 혹시 전투라도 겪으면 훨씬 높은 실력을 갖게 될 것이다. 실전보다 훌륭한 연습은 없었다.

어쨌든 그런 식으로 준비가 차곡차곡 진행되었다.

말레피 후작가와 벨루스 백작가에는 미리 연락을 해서 난민을 인도받을 날짜를 정했다. 그들은 그 시기에 맞춰 준비를 할 것이다.

어쩌면 소문을 듣고 주변의 다른 영지에서도 난민을 보낼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미리 협의가 되어 있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점에 대해서도 두 가문에 확실하게 얘기를 해 뒀다.

☆ ☆ ☆

달빛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깜깜한 밤이었다. 제론은 조용히 거처를 빠져나갔다.

60대의 철 마차가 오늘 완성되었다. 낮에 마차의 상태를 확인했는데, 고작 며칠 만에 만든 마차 치고는 상당히 잘 나왔다.

400명을 실어 나를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인지라 기간트가 아니면 아예 나를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제론은 조용히 어둠을 타고 마차가 늘어서 있는 벌판으로 향했다. 마차를 놓을 마땅한 공간이 없어서 아직 건물이 올라가지 않은 땅에 세워 놓았다.

60대의 거대한 마차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제론은 그것을 다시 한 번 일일이 확인했다. 잘 만들어진 마차였다, 강행군에도 아마 끄떡없을 것이다.

제론은 첫 번째 마차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것을 허리띠의 아공간에 넣었다. 아공간은 상당히 넓었기에 마차를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 계획에 제론이 꼭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아공간을 이렇게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사람은 제론이 유일했다. 아마 전 대륙을 뒤져 봐도 제론보다 큰 아공간을 가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허리띠의 아공간은 30개나 된다. 제론은 일단 아공간 하나에 마차 하나를 실었다. 아공간이 워낙 넓어 마차를 넣고도 공간이 상당히 많이 남았다.

제론은 마차 하나를 더 아공간에 넣어 보았다. 너끈히 들어갔다. 하지만 3개는 넣을 수 없었다.

30개의 아공간이 마차로 꽉 찼다. 무려 60대의 마차를 제론이 혼자 든 것이다.

이동이야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면 되니 모든 문제가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건 중립 지대로 가서 난민을 마차에 실어 데리고 오는 것뿐이었다.

제론은 2만의 인구를 한꺼번에 얻을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내친김에 수도의 빈민도 함께 데려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인에게 연락을 해 봐야겠군."

수도의 난민은 폴타를 이용하면 언제든 외부로 빼돌릴 수 있었다.

마차가 10대나 남으니 4천 명은 더 데려올 수 있었다. 그걸 수도의 빈민으로 채우면 된다.

빈민의 경우 바인이 선별을 했을 테니 오히려 난민보다 훨씬 능력이 뛰어나거나 성실할 것이다. 쓸모가 많다는 뜻이다.

제론은 중립 지대에서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오는 경로를 조금 수정했다. 수도 근방을 지나도록 할 생각이었다. 그 근처에서 잠깐 쉬면 된다.

그동안 폴타를 이용해 빈민을 데려오면 된다. 마차를 그때 꺼내면 되니 아무 문제도 없었다.

제론의 얼굴에 기분 좋은 미소가 떠올랐다.

다음 날,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기껏 만들어 놓은 철 마차가 몽땅 사라져서 난리가 났다.

하지만 그 소동은 제론이 직접 나서서 잠재웠다. 영주가 다른 곳으로 치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물론 몇몇이 이상하게 생각하긴 했다. 하지만 그동안 제론이 벌인 일이 어디 하나 평범한 게 있었는가.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할 뿐이었다.

바이스와 카이트도 원래는 안 그랬는데, 이젠 그렇게 되어 버렸다. 최소한 제론을 상식과 연결해 판단하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카이트는 미리 준비한 200명의 라이더를 제론 앞에 대령했다. 라이더 200명의 눈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중요하고 위험한 임무를 받았다는 사실이 그들을 흥분시켰다.

"좋아. 이 정도면 쓸 만하군."

"영주님과 함께 제대로 전투를 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카이트는 걱정 어린 눈으로 제론과 200명의 라이더를 번갈아 바라봤다.

훈련을 받긴 했지만 붉은 학살자와 함께 싸우는 건 그동안 했던 훈련과 상당히 다르다. 만일 뒤에서 제대로 제론을 받쳐 주지 못하면 자칫 제론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카이트가 걱정하는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200기나 되는데 시비를 걸 생각이나 들겠어?"

그건 확실히 그렇다. 더구나 나르는 것이 귀중품이 아니라 난민이다. 괜히 싸워 이겨 봐야 얻을 게 없었다. 그렇다고 난민을 싹 죽이지도 못할 테니 괜히 짐을 떠안는 셈이 된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것이 꼭 상식적으로, 또 논리적으로 흐르는 것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걱정이 되었다.

"식량은?"

제론은 바이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더 이상 카이트의 걱정을 받고 싶지 않았다.

"이쪽에 준비해 뒀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양이 좀 됩니다."

무려 2만 명이 한 달 동안 먹을 식량이었다. 양이 좀 되는 정도가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대부분 육포였고, 그냥 씹어 삼킬 수 있는 곡물도 좀 있었다. 상황이 되면 곡물을 넣고 죽이라도 끓일 수 있으니 준비를 해 둔 것이었다.

양이 어찌나 많은지 이곳에 있는 200명의 라이더가 나눠서 옮길 수도 없을 정도였다. 이걸 다 나르려면 최소한 인원이 지금의 3배는 되어야 할 듯했다.

"좋아. 이건 내가 나르지."

제론의 말에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체 무슨 수로 혼자 저 많은 짐을 나른단 말인가.

하지만 이어지는 제론의 행동에 다들 눈이 찢어질 정도로 커졌다. 제론은 쌓인 식량 앞에 서서 손을 내밀었을 뿐인데, 그 모든 짐이 깨끗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 이게 뭡니까?"

"뭐긴, 아공간이지."

"아, 아공간이 얼마나 크기에 이 많은 짐이……."

바이스는 눈을 빛내며 제론의 손을 바라봤다. 분명히 손을 뻗었다. 즉, 아공간 아티팩트가 손에 있다는 뜻이었다. 그의 눈에 제론의 팔찌가 보였다.

"그 팔찌, 에어스트 가문의 인장이 아니로군요?"

에어스트 가문의 인장도 팔찌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팔찌는 반대쪽 손에 채워져 있었다.

제론이 피식 웃으며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유적에서 얻은 아티팩트야."

유물이라는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능력을 가진 아티팩트는 확실히 유물뿐이었다. 하지만 아공간의 크기를 생각하면 유물 중에서도 상당히 희귀한 아티팩트가 분명했다.

"굉장하군요."

제론은 끝없이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준다. 이번 아공간 아티팩트도 그렇다. 거기까지 생각한 바이스가 눈을 크게 떴다.

"아! 그럼 철 마차도……!"

입이 떡 벌어졌다. 그 커다란 철 마차 60대를 모두 담을 수 있는 아공간이라면 대체 얼마나 거대하단 말인가.

사실 오해였지만 제론은 굳이 그 오해를 풀지 않았다. 어쨌든 아공간에 보관한 것이 맞으니 말이다.

"그럼 다녀오지. 걱정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주기적으로 연락을 할 테니까."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 걸음을 옮겼다. 200명의 라이더가 그 뒤를 따랐다. 상당한 인원이었다.

바이스와 카이트는 심각한 눈으로 멀어져 가는 그들을 바라봤다.

"그나저나 세나는 아예 안 나왔군."

"요즘 바쁘니까요."

"바빠?"

"새 기간트를 설계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새 기간트?"

카이트가 눈을 빛냈다. 새 기간트를 만들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진척이 얼마나 되었는지 궁금했다.

"일단 시제품을 만들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성공할지 실패할지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호오, 빠르군."

바이스가 씨익 웃었다.

"빨리 만들어야 영주님이 좋아하실 거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

카이트도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내 두 사람은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어느새 제론 일행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다. 상당히 빠른 속도였다.

"부디 무사하셔야 할 텐데……."

"무사할 거다. 알잖아. 얼마나 대단한지."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카이트의 표정에도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 ☆ ☆

제론은 200명의 라이더를 이끌고 네이드 후작령으로 넘어갔다.

아직도 경계가 심했지만 특별히 제지하지는 않았다. 다른 상단이라면 모를까 직접 에어스트 백작이 나섰는데 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시선이 집중되었다. 일단 200명의 라이더는 비록 견습이긴 하지만 어쨌든 기사였다. 200명이나 되는 기사가 거리를 지나가니 시선을 끄는 게 당연했다.

제론이 텔레포트 게이트에 도착했을 때, 그 앞을 막아서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제론은 그들이 누구인지 대번에 알아봤다.

"오랜만입니다. 후작님."

제론이 먼저 나서서 인사를 건넸다. 승자의 아량 비슷한 거였다.

네이드 후작도 그걸 느꼈기에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하지만 굳이 말을 꺼내지 않고 주위에 가볍게 눈짓을 했다. 후작과 함께 온 기사들이 일제히 제론을 노려보며 살기를 뿜어냈다.

물론 제론 입장에서는 가소로울 뿐이었다.

"설마 시비를 걸기 위해 나오신 건 아니죠?"

제론의 말에 네이드 후작의 입매가 비틀렸다.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화를 내는 것보다는 목적을 이루는 게 훨씬 중요했다.

"그럴 리가 있나. 난 그저 부탁을 하러 나왔을 뿐이네."

"부탁이라기보다는 협박에 가까운 것 같지만 일단 넘어가죠. 부탁이 뭡니까?"

네이드 후작은 제론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기간트를 돌려주게."

"무슨 기간트 말입니까?"

네이드 후작이 뿌득 이를 갈았다.

"영지전에서 포획한 우리 기간트 말일세."

"그걸 제가 왜 돌려줘야 합니까?"

"그게 도의적으로 옳지 않겠나? 전쟁은 이미 끝났네."

"그건 명백히 정당히 취득한 전리품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왜 도의적으로 옳은지 모르겠군요."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주위를 슥 둘러봤다.

"사람이 참 많군요."

네이드 후작은 제론이 갑자기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니 이게 뭔가 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내전이 한창인데도 여전히 여긴 오가는 상단이 많은가 봅니다."

제론의 의미심장한 말에 네이드 후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의도적으로 통행세를 올리긴 했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느슨한 대처였다. 적어도 네이드 후작이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많이 줄었네."

네이드 후작은 그렇게 말하고는 제론의 선택을 다시 한 번 강요했다.

"200기 전부를 돌려 달라고 하지는 않겠네. 그저 우리 후작령의 기간트만이라도 돌려주게."

제론이 빙긋 웃었다.

"후작령의 기간트는 너무 심하게 부서져서 그저 고철에 불과합니다만,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네이드 후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고철에 불과하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가. 당시 네이드 후작도 전투를 지켜봤다. 대부분의 기간트가 마나 코어의 손상 없이 쓰러졌다.

수리를 거치면 충분히 쓸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한데 고철이라니. 완전히 억지였다.

"공짜로 돌려달라는 게 아닐세. 적당한 값을 지불하겠네."

벌써 전쟁 배상금으로 100만 골드라는 거액을 지불했다. 속이 쓰리긴 했지만 2왕자와 슈린 공작가가 일부 지원을 해 줬기 때문에 넘어갈 수 있었다.

한데 이렇게 에어스트 백작이 직접 여기까지 왔다. 이런 좋은 기회를 절대로 놓칠 수 없었다.

"얼마나 주실 생각입니까?"

"100기의 기간트를 돌려주면 100만 골드를 주겠네."

제론이 피식 웃었다.

"기간트를 고작 1만 골드에 구입하시려고요? 더구나 요즘 같은 전시에? 다른 데 가서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도둑놈이라고 오해받습니다."

"뭐라? 도둑놈?"

네이드 후작이 발끈하자 제론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후작님께 하는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야 이해하죠. 하지만 남들은 이해 못 할 거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100만 골드에 팔 건가, 말 건가!"

"한데 정말로 그 고철을 100만 골드에 사실 생각이십니까?"

그 말에 네이드 후작이 멈칫했다. 어쩌면 정말로 고철로 변한 기간트를 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문의 문장을 지워 버리면 그게 어디서 난 기간트인지 알게 뭔가.

더구나 요즘 같은 시기라면 고철이 된 기간트를 구하는 건 비교적 쉬웠다. 내전이 한창이었으니 말이다. 하루에도 몇 기나 되는 기간트가 고철로 변하고 있었다.

'하지만…….'

네이드 후작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에어스트 백작령은 고립되어 있다. 그러니 고철로 변한 기간트를 구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즉,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내줄 수 있는 기간트는 지난 영지전에서 포획한 것들이 전부였다. 당시의 전투는 워낙 목격자가 많아서 상황을 비교적 명확히 파악했다.

'마치 전리품으로 제대로 된 기간트를 얻으려는 것처럼 신경을 썼다고 했지.'

하지만 섣불리 결정할 수가 없었다. 자그마치 100만 골드나 투자하려는 입장이었다. 만일 정말로 고철이 된 기간트라면 가격이 수천 골드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쓸 만한 부품을 따로 빼서 팔 수 있다는 가정 하에 그렇다.

100만 골드를 주고 고철 100개를 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완전히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아무래도 시간이 좀 필요하겠군. 나중에 다시 얘기하세."

제론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기다리겠습니다. 저야 고철을 비싼 값에 처리할 수 있으니 환영이지요. 그럼 이제 길을 좀 비켜 주시겠습니까?"

네이드 후작은 지금 당장이라도 제론을 인질로 잡을까 말까에 대해 고민했다. 하지만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고민되십니까? 절 쉽게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제론이 서늘한 눈으로 네이드 후작을 쳐다봤다. 후작은 그 눈빛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내 이를 악물었다.

여기는 네이드 후작령이다. 자신이 꿀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렇게 마음을 다잡은 후작이 막 화를 내려고 할 때, 전령 하나가 급히 달려왔다. 그는 제론의 눈치를 힐끗 살피고는 후작의 귀에 뭔가를 말했다.

네이드 후작의 안색이 싹 변했다. 그리고 심각한 눈으로 제론 뒤에 선 200명의 라이더를 바라봤다.

'설마 저게 전부 기간트 장비였단 말인가?'

네이드 후작령쯤 되면 기간트 장비의 아공간을 파악하는 아티팩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보통은 성문을 통과하면서 기간트 장비의 유무를 파악하게 되어 있는데, 그 보고가 지금 온 것이었다.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일 여기서 200기의 기간트가 일제히 날뛴다면 네이드 후작령은 끝장이었다.

'젠장. 무슨 놈의 기간트가 저렇게 많아!'

행색을 보아하니 견습 기사쯤 되어 보인다. 한데 견습 기사까지 몽땅 기간트를 지급받았다면 대체 얼마나 많은 기간트를 보유하고 있단 말인가.

네이드 후작은 그 기간트 중 일부가 자신의 것이었다고 생각하니 속이 쓰렸다.

"길을 내 드려라."

네이드 후작의 명령에 그의 기사들이 천천히 길을 열었다. 하지만 언제든 기습할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후작님, 기사 교육을 다시 시키셔야겠습니다. 주군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무슨 명령인지도 모르고 있으니 말입니다."

후작의 기사들이 내뿜는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

제론은 그걸 온몸으로 받으며 빙긋 웃었다.

"그리고 실력도 모자라는군요."

그 말과 함께 제론의 모습이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언제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보지 못했다.

퍼버버버버벅!

수십 번의 격타음이 들렸다. 그리고 언제 사라졌었냐는 듯 제론이 원래 자리에 나타났다.

네이드 후작은 깜짝 놀라 제론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경악했다. 그렇게 믿음직스럽던 기사들이 모두 바닥에 누워 있었다. 눈두덩이 시퍼렇게 멍들어서 기절한 채로 말이다.

제론은 멋들어지게 후작에게 인사를 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돌아올 때도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를 마친 제론은 빙긋 웃으며 후작을 지나쳐 텔레포트 게이트로 걸어갔다.

200명의 라이더가 그 뒤를 질서정연하게 따랐다. 아무리 견습 기사라지만 혹독한 훈련을 거친 자들이었다. 움직임 하나하나에 절도가 넘쳤다.

네이드 후작은 멍한 눈으로 그들의 뒷모습과 바닥에 널브러진 기사들을 번갈아 쳐다봤다.

텔레포트 게이트를 나서는 제론의 표정은 밝았다. 아니, 밝다기보다는 즐거워 보였다. 네이드 후작령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니 재미있었다.

아마 후작은 모든 정보력을 동원해서 에어스트 백작령의 상황을 확인하려 할 것이다.

제론은 미리 바이스에게 연락했다. 다 보여 주라고.

영지전에서 포획한 200기의 기간트는 사실 대부분 멀쩡했다. 게다가 수리도 거의 끝났다. 세나의 괴물 같은 실력이 그걸 가능케 했다.

네이드 후작은 멀쩡한 기간트 100기를 100만 골드에 구입할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할 것이다.

그리고 제론이 없을 때 기간트 구입을 진행하려 할 것이다. 그래서 바이스에게 그렇게 하라고 했다. 고철이 된 기간트는 제론이 보내 주기로 했다.

지금은 내전 중이었다. 고철이 된 기간트쯤이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물론 100기를 구하려면 좀 힘들겠지만, 바인에게 말해 놓고, 말레피 후작가와 벨루스 백작가에도 부탁을 해 놓으면 얼마든지 수를 맞출 수 있었다.

계약서만 똑바로 쓰고 특별한 사람에게 공증을 맡기기만 하면 네이드 후작은 빠져나갈 수가 없을 것이다.

사실 네이드 후작이 상단의 통행을 틀어막지만 않았어도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또 텔레포트 게이트 앞을 막고 협박하지만 않았어도 그냥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네이드 후작은 너무 심했다. 제론은 머릿속으로 계획 하나를 더 추가했다.

네이드 후작령을 얻을 생각이었다. 그곳은 물류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 얻어 놓으면 굳이 발전시키지 않는다 하더라도 쓸모가 무궁무진했다.

제론은 텔레포트 게이트를 나와 주위를 둘러봤다. 상당히 번화한 거리였다. 역시 말레피 후작령이었다. 하지만 부럽지는 않았다. 오래지 않아 에어스트 백작령은 이보다 훨씬 발전할 거라고 확신했다.

200명의 라이더와 함께 서 있는 제론의 모습은 눈에 확 띌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잠깐 서 있으니 누군가가 다가왔다.

"에어스트 백작님이십니까?"

중년의 사내였는데, 복장을 보니 집사 같았다. 그는 제론이 고개를 끄덕이자 한쪽 팔을 배에 대며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말레피 후작가의 집사, 퓌러입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퓌러는 정중하게 제론을 후작가로 안내했다. 가는 내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예를 다해 제론이 불편하지 않게 신경을 써 주었다.

후작가에 도착한 제론은 바로 말레피 후작을 만날 수 있었다. 후작뿐 아니라 가족들이 모두 나와서 레늄 왕국의 신성이라고 할 수 있는 제론을 보고자 했다.

사실 그들은 이렇게 제론이 직접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바이스가 와서 일을 처리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론이 직접 와서 조금 당황스러운 상태였다.

"반갑네. 안면이 좀 있지 않나?"

"어릴 때 아버지와 함께 몇 번 뵌 적이 있습니다."

"역시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군."

말레피 후작은 빙긋 웃었다. 예전의 제론은 참으로 당차고 자신만만한 아이였다. 하지만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상대는 백작가의 가주였다. 또한 커다란 영지의 영주이기도 했다.

"환영하네. 있는 동안 편히 쉬었다 가게."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제론은 정중함과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어 말레피 후작은 또 한 번 흐뭇하게 웃었다. 아들의 주군이었다. 그가 보기에 이 정도면 미래가 밝았다. 내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내 자식이라서가 아니라 바이스는 상당히 뛰어난 녀석일세."

"알고 있습니다. 이미 충분히 제게 능력을 보여 주기도 했고요."

"부탁하네."

"오히려 제가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말레피 후작은 또 흐뭇하게 웃었다. 아들이 괄시받지는 않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 뒤로 후작은 가족을 일일이 소개해 주었다. 그중에는 예전 바이스와 후계자를 자리를 놓고 다투던 형제도 있었고, 딸도 있었다.

딸을 소개하면서 후작은 은근히 기대하는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좋은 인연이 되면 서로에게 득이 될 테니 말이다.

"일단 난민부터 확인하고 싶습니다."

인사를 모두 마치고 제론이 꺼낸 말에 말레피 후작은 의외라는 듯 제론을 바라봤다. 그리고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은 이럴 때 숙소부터 찾는다.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몸에 무리가 가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단 쉰 다음 천천히 일을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한데 제론은 난민부터 보려고 한다. 그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물론 말레피 후작만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좋네. 당연히 그래야지."

말레피 후작은 흔쾌히 대답하고는 자신의 딸인 밀레나를 보며 말했다.

"네가 안내해 드리도록 해라."

밀레나는 순간 표정이 굳었지만 이내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밀레나는 바이스의 배다른 여동생이었다. 말레피 후작의 후처가 낳은 딸이었는데, 상당히 아름답고 싹싹해서 후작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말레피 후작은 내심 밀레나와 제론이 잘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는 기대감과 흐뭇함이 뒤섞인 눈으로 멀어져가는 제론과 밀레나의 모습을 바라봤다.

하지만 나머지 가족은 후작과는 많이 다른 눈빛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밀레나는 살짝 기분이 상했다. 사실 이럴 때는 남자 쪽에서 먼저 살갑게 대화를 시도하는 게 보통 아닌가. 한데 이 남자는 아예 그런 게 없었다. 심지어는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이건 자신을 정말로 안내꾼으로 여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게 기분 나빴다.

대체 어떻게 자신을 고작 길 안내나 하는 사람으로 여길 수 있단 말인가. 지금까지 만난 모든 남자는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한데 제론은 그렇지 않았다. 아예 관심이 없었다.

'흥, 관심 없는 척하겠다 이건가?'

예전에 그런 식으로 접근했던 남자도 있었다. 만일 그 남자가 조금만 배경이 좋았다면 밀레나도 넘어갔을지 모른다. 하지만 밀레나의 기준에 한참이나 못 미치는 남자였다.

밀레나는 이번에도 그런 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 확실했다. 그게 아니라면 말이 안 된다. 자신을 이렇게 지척에서 보고도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게 어떻게 말이 된단 말인가.

"저 문으로 나가면 난민촌이 나와요."

난민이라는 말을 꺼낸 밀레나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녀의 눈빛에 담긴 감정은 불쾌함이었다.

그들은 지저분하고 영지에 피해만 주는 족속이었다. 솔직히 보기도 싫었다. 사실 안내만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제론에 대한 호감이 조금 높은 채로 시작했다. 이 난민을 모두 해결해 주기 위해 온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제론은 성문으로 걸어갔다. 성안은 깨끗하고 보기 좋았는데, 성문으로 다가갈수록 지독한 냄새가 풍겼다. 난민이 어떤 상태로 지내는지 냄새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밀레나는 성문 앞에서 코를 막았다. 어쩔 수 없었다. 그녀 입장에서는 토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성문을 나선 제론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 모여 있는 지저분한 사람들을 발견했다. 그들이 난민이었다.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못해 앙상하고 더러웠다. 하지만 그들은 에어스트 백작령의 백성이 될 사람들이었다.

"일단 저들을 씻기고 먹여야겠군. 준비해라."

제론의 명령에 그를 따라온 200명의 라이더가 즉시 움직였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견습 라이더는 전원 평민 출신이었다. 개중에는 난민 출신도 있었다.

누구보다 저들의 상태와 기분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일부는 성으로 들어가 물을 구하러 갔고, 일부는 성 내의 시장으로 먹을거리를 사러 갔다.

라이더들이 어찌나 빨리 움직였는지 순식간에 준비되었다. 큰 천막을 두 개나 만들었고, 그 안에 커다란 통을 넣고 물을 채웠다.

견습 라이더들은 난민을 다루는 것도 잘했다. 그들은 먹을 것을 미끼로 두 천막에 남녀를 구분해서 넣었다.

일단 목욕을 하지 않으면 먹을 것을 주지 않는다는 말에 그들은 대충이라도 씻어야만 했다.

분위기가 시끌벅적해졌다. 목욕을 하랴 어느새 준비된 커다란 솥에 각종 재료를 넣고 스프를 끓이랴 다들 바빴다.

이곳의 난민은 무려 1만 명이나 된다. 수도에서는 벨루스 백작령이 더 가깝기 때문에 여기서 1차로 난민을 싣고 벨루스 백작령으로 가서 나머지 1만 명의 난민을 데리고 가기로 했다.

그 1만 명의 난민을 모두 먹이려면 엄청난 양의 음식이 필요했다. 하지만 라이더들은 차질 없이 충분한 음식을 구해 모두를 배불리 먹였다.

씻고 먹은 사람들은 주변을 청소했다. 어쨌든 먹으니 힘이 나서 뭐든 할 수 있었다.

씻고 청소까지 하고 나니 그제야 좀 사람다워졌다. 배까지 부르니 곳곳에서 쓰러져 자는 사람이 늘어났다.

지금이야 날이 따뜻하니 괜찮지만 아마 몇 달 더 지나 추워지면 난리가 날 것이다. 이들 중 대부분은 얼어 죽으리라.

제론은 그 모든 일을 지켜봤다. 그리고 밀레나는 그 옆을 지켰다.

솔직히 밀레나는 제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굳이 이런 데 돈을 쓴단 말인가. 오늘 제론이 쓴 돈만 해도 100골드가 넘었다.

하지만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계속 이런 쓸데없는 곳에 돈을 쓰는 사람이라면 곤란한데…….'

이들을 위해 돈을 쓴다고 들었다. 아마 한두 푼으로는 절대 안 될 것이다. 이렇게 한 번 먹이고 씻기는데 100골드나 든다.

그럼 이들을 몇 달 동안 지원하려면 수만 골드는 들어갈 것이다. 어쩌면 10만 골드가 넘어갈 수도 있었다.

물론 밀레나가 생각하지 못한 것도 있다. 이들이 겨울을 나려면 훨씬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머물 장소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장소를 만들려면 돈이 엄청나게 들어간다.

고작 10만 골드로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어쩌면 수백만 골드가 들어갈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였다.

그렇기에 말레피 후작도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당장 들어가는 돈이야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에서 난민에게 해 주는 대우가 소문났을 경우 정말로 큰 문제가 생긴다.

천지사방의 빈민이 몽땅 몰려올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렇기에 각 영주들은 섣불리 빈민 구제 사업을 펼치지 못했다. 이렇게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했다.

밀레나는 제론이 수시로 이런 데에 돈을 쓰는 사람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런 식이면 금세 거지가 되고 말 것이다.

'아이 참, 아버지는 왜 이런 사람이랑…….'

어쨌든 귀족가의 여식인 만큼 그녀도 정략결혼을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좀 번듯한 사람에게 시집을 가고 싶었다.

에어스트 백작에 대해서 밀레나가 아는 것이라고는 예전에 망한 가문이라는 것과 최근 성세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아무리 성세가 높아져 봐야 신흥 귀족일 뿐인데.'

그것이 밀레나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밀레나는 조금씩 제론에 대한 관심이 식어 갔다.

"이제 다들 괜찮아진 것 같으니 돌아가시는 게 어떨까요?"

밀레나는 기다리기가 너무 지루하고 이 불결한 분위기가 싫어서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러자 제론이 그녀를 돌아보며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밀레나는 그 표정을 보며 내심 기대를 했다.

"전 여기 좀 더 있다가 가겠습니다. 진작 모셔다 드려야 했는데 미처 신경을 못 써 드렸군요."

제론의 말에 밀레나의 표정에 쩍쩍 금이 갔다. 이게 뭐란 말인가. 하지만 제론은 그녀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라이더 한 명을 불렀다.

"네가 에스코트를 해 드리도록."

"알겠습니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견습 라이더가 언제 이런 귀족가의 영양을 에스코트해 봤겠는가.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애써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밀레나는 이 상황이 너무나 황당했다. 세상에 자신보다 이 난민이 더 소중하단 말인가?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시길."

제론은 그렇게 인사하고는 다시 난민에게 시선을 돌렸다. 난민을 보는 제론의 표정이 심각했다.

밀레나는 멍하니 제론을 보다가 이를 갈고는 휙 돌아서서 화난 표정으로 걸어갔다.

라이더가 다급히 쫓아갔지만, 신경도 쓰지 않았다. 물론 라이더는 끝까지 그녀를 보호하려 애쓰며 따라갔다.

그리고 제론은 그대로 밀레나에 대한 일을 잊어버렸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이들을 무사히 영지까지 데려가는 것이지 귀족가 꼬맹이의 사랑 놀음이 아니었다.

"시간이 좀 필요하겠군."

이대로라면 이들은 강행군을 버티지 못한다. 영양 상태나 체력이 너무 바닥이었다. 그걸 좀 끌어 올릴 필요가 있었다. 또한 위생 상태도 점검하고 병이 있는지도 확인해야만 한다.

400명이 같은 마차를 타고 간다. 만일 전염병이라도 걸리면 완전히 끝장이었다. 떼죽음을 당할 수도 있었다.

"벨루스 백작령 쪽도 마찬가지겠지."

다를 리가 없었다. 벨루스 백작가보다 말레피 후작가가 훨씬 부자다. 그런데도 손을 못 쓰고 있는데 벨루스 백작령은 오죽하겠는가.

일을 모두 처리한 라이더들이 제론에게 다가왔다. 피곤해 보였지만 그래도 표정은 다들 밝았다. 난민들을 보며 예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그때를 생각하면 잘해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 나흘을 머문다. 그동안 이들의 체력을 끌어 올려. 한 달의 강행군을 버틸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라이더들의 표정이 굳었다. 과연 고작 나흘로 그게 가능할지 벌써부터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들도 이대로 떠나면 다들 죽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일부는 남아서 난민을 지속적으로 관리해라. 앞으로는 많은 인원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이들이 스스로 나서서 일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해라."

"알겠습니다."

제론은 라이더를 쭉 둘러보며 말했다.

"나머지는 나와 함께 벨루스 백작령으로 간다. 그곳에서 난민의 상태를 호전시킨 뒤 이곳의 난민과 합류해서 떠난다."

아주 간단한 계획이었다. 라이더들은 즉시 흩어졌다.

제론이 따로 인원을 나누고 명령을 내리고 할 필요가 없었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기사는 모두 그 정도는 알아서 할 수 있도록 충분한 훈련을 받았다.

모든 일을 마무리한 제론은 견습 기사의 임시 단장 한 명을 불러 10만 골드라는 엄청난 돈을 넘겼다. 일단 그걸로 난민을 먹이고 관리하라는 뜻이었다.

엄청난 액수의 돈을 받은 견습 기사단장은 잠깐 동안 손을 떨었지만 이내 굳은 표정으로 돈을 품에 넣었다. 그리고 존경 어린 시선으로 제론을 바라보며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10만 골드라는 돈을 받으면서 신뢰를 느꼈다. 이건 돈 이상의 문제였다. 제론에게 있어서 10만 골드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그걸 한 사람에게 믿고 맡기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제론은 고개를 한 번 끄덕여 기사단장의 인사를 받고는 돌아서서 성안으로 들어갔다.

오늘 저녁은 어쨌든 말레피 후작과 함께해야만 한다. 그리고 내일 일찍 떠나겠다는 말도 미리 해 둬야 했다.

'아무래도 껄끄러운 시간이 되겠군.'

제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성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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