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3화 (64/217)

Chapter 6 유적의 기간트

물자 부족이라는 영지의 문제를 단숨에 해결한 제론은 곧장 유적으로 향했다. 당분간은 영지 일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사람이 좀 부족하긴 하지만, 그건 항구가 완성되면 금방 해결이 가능했다.

이젠 내전이 어떻게 되나 지켜보면서 내실을 다지는 시간이 되었다.

유적 로비에 서서 잠깐 과거를 회상하던 제론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스쳤다.

13층을 클리어하는 동안 단 하나도 만만한 곳이 없었다. 매 층이 새롭고 어려웠다. 하지만 그로 인해 얻은 힘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그렇게 얻은 힘 중 가장 굉장한 것은 역시 테오스였다. 그리고 다음이 검술이었다. 소드 마스터가 된 다음에야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 수 있었다.

제론은 손바닥의 아공간에서 새로 얻은 은빛 검을 뽑았다.

슈아악!

은가루가 흩날리며 검이 나타났다. 검과 함께 나타난 은가루는 마나의 결정이었다. 그것들은 제론의 몸으로 순식간에 흡수되었다.

제론의 몸이 단숨에 최상의 상태로 변했다. 은가루의 효용이었다. 마치 포션으로 샤워라도 한 것 같았다. 아니, 포션의 바다에 몸을 푹 담갔다가 꺼낸 듯했다.

"굉장하군."

어떻게 이런 검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검을 뽑을 때 흩어진 은가루는 검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것도 아공간 안에서 말이다.

검을 아공간에 보관하는 동안 마나의 결정을 생성하고, 검을 뽑을 때마다 그것을 흩날려 주인의 몸을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검을 들 때마다 마나 샤워를 하는 셈이었다.

이는 소드 마스터에 이른 제론에게도 충분히 대단한 효과를 준다. 다음 경지로 나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역시 유적의 선물은 대단했다. 그 성능이나 효과가 상상을 초월하지 않는가.

제론은 검을 몇 번 휘둘러 본 뒤, 유적 14층으로 이동했다. 드디어 새로운 층에 도전하는 것이다.

14층에 내려온 제론은 빠르게 주위를 둘러봤다. 환경을 보면 대충이나마 어떤 식으로 훈련이 진행될지 알 수 있었다.

거대한 공간이었다. 마치 검투장 같았다.

"상대와 싸우는 건가?"

제론의 중얼거림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렬한 섬광과 함께 상대가 나타났다.

빛이 사라지고 모습을 드러낸 적을 보면서 제론은 눈을 크게 떴다.

"기간트?"

이번 상태는 기간트였다. 물론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태였다. 새하얀 색의 기간트였는데, 상당히 덩치가 컸다. 마치 우락부락한 근육이 덕지덕지 붙은 것 같았다. 물론 기간트이니 실제로 근육일 리는 없지만 말이다.

제론은 망설임 없이 테오스를 소환했다. 테오스의 장점이자 가장 큰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소환 시간이 찰나에 불과하고 소환과 동시에 탑승한다는 점이었다.

테오스를 소환한 제론은 즉시 검을 뽑았다.

슈우우욱!

검을 뽑은 제론은 깜짝 놀랐다. 테오스의 검이 바뀐 것이다. 테오스는 은빛 검을 들고 있었다. 제론이 13층을 클리어하고 얻은 검과 똑같이 생긴 검이었다.

제론은 확신할 수 있었다. 검의 재질도 능력도 똑같다는 것을 말이다. 이 검은 제론의 검을 그대로 크기만 키워 놓은 것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건지는 몰랐지만 잘된 일이었다. 강력한 무기를 얻었으니 말이다.

테오스가 곧장 하얀 기간트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꽈앙!

하얀 기간트는 덩치에 걸맞지 않게 동작이 상당히 민첩했다. 테오스의 일격을 간단히 피한 뒤 어느새 꺼낸 거대한 도끼를 크게 휘둘렀다.

후우우웅!

꽈앙!

테오스의 검이 그 도끼를 막아 냈다. 힘이 어찌나 강한지 테오스가 뒤로 쭉 밀려났다.

하지만 제론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힘이 강할 거라는 사실은 충분히 예상했다. 한번 그 힘을 가늠해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또한 테오스의 힘도 점검하고 말이다.

"예상보다 훨씬 힘이 강하군. 역시 초고대 문명의 기간트야."

힘뿐 아니라 속도도 상당했다. 물론 테오스에 비하면 느렸다. 문제는 대체 누가 저 기간트를 조종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사람이 남아 있을 리는 없다. 초고대 문명은 수천 년 전의 시설이니까. 그렇다면 뭔가 다른 존재라는 건데, 대체 그게 무엇일지 짐작이 안 갔다.

어쨌든 지금은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제론은 즉시 몸을 날렸다.

테오스가 눈부신 속도로 화려하게 움직였다. 마치 검이 수십 개로 늘어난 것처럼 쏟아져 나갔다.

쩌저저저정!

꽝! 꽝! 꽝!

하얀 기간트의 도끼가 절반 정도는 막아 냈지만 나머지는 속절없이 몸에 얻어맞았다.

테오스의 검이 몸에 꽂힐 때마다 장갑이 푹푹 찌그러졌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테오스는 더욱 빠르게 움직였고, 검속도 훨씬 빨라졌다.

꽈과과과과광!

하얀 기간트가 볼품없이 찌그러졌다. 그리고 기동이 중지되었다. 테오스가 이긴 것이다.

솔직히 제론은 의아했다. 이렇게 간단할 리가 없었다. 각 층에서 고생한 걸 생각하면 이건 너무 쉬웠다.

기본적으로 테오스의 성능이 월등했다. 하얀 기간트가 10기는 동시에 덤벼야 뭘 어떻게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거로도 모자랐다.

테오스와 하얀 기간트의 격차는 그 정도로 심했다.

슈아아악!

강렬한 빛과 함께 하얀 기간트가 사라졌다. 보아하니 아공간에 수납된 것 같았다.

제론은 테오스에 탄 채로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유적은 그때까지 정적에 휩싸였다.

제론은 테오스를 돌려보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상황을 보면 클리어 조건은 명백했다. 그 하얀 기간트를 이기면 되는 것이다. 한데 이겼는데도 아무 변화가 없었다. 즉, 클리어하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제론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지금은 더 이상 여기서 기다려 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으니 로비로 올라가는 게 나았다.

로비로 올라온 제론은 한가운데에 앉아 조용히 마나 호흡을 하며 생각에 잠겼다.

이제 마나 호흡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 어떤 자세에서도 가능했고, 심지어는 잠자면서도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마나 호흡을 하며 딴생각을 하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제론은 하얀 기간트를 떠올렸다. 대체 그걸 어떻게 이겨야 14층을 클리어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테오스가 너무 강력해서 일대일로는 상대가 안 된다.

"가만, 테오스로는 안 돼?"

제론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제야 14층 수련의 클리어 조건을 알 수 있었다.

대체 왜 13층 수련이 그런 식이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은 14층 수련을 위한 것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제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검을 뽑았다.

슈우우욱!

검이 나오며 은가루 몇 개가 흩날렸다. 검을 수납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은가루가 몇 개 안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제론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피로가 말끔히 사라졌고, 몸에 활력이 샘솟았다.

"정말 그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이 걸려 있을까? 아니, 그게 가능하긴 한 거야?"

제론은 그러면서도 가능할 거라고 믿었다. 자신은 소드 마스터였다. 그것도 초고대 문명이 인정한 진짜 소드 마스터 말이다.

"후욱."

제론은 숨을 훅 내쉬고는 다시 14층으로 이동했다. 일단 시도라도 해 볼 생각이었다.

14층에 도착한 제론은 눈을 빛내며 검을 앞으로 겨눴다. 그리고 몸과 마음을 가다듬었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다.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어떤 꼴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눈부신 빛이 솟아났다. 그리고 그 빛이 사라짐과 동시에 거대한 기간트가 나타났다. 불과 조금 전 싸웠던 그 하얀 기간트였다.

"이름이라도 알았으면 좋겠군."

근육이 잔뜩 붙은 것 같은 새하얀 몸체는 상당히 멋졌다. 뚱뚱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고, 강력하다는 느낌만 전해지는 모습이었다.

―이스히스.

제론이 눈에 이채를 띠었다. 유적 시스템이 이렇게 이름을 알려 줄 줄은 몰랐다.

"이스히스라……."

제법 괜찮은 이름 아닌가. 그리고 딱 어울리는 이름이기도 했다.

제론은 검을 겨누며 눈을 빛냈다. 상대는 강하고 빨랐다. 기다리는 건 바보짓이었다. 그 생각과 함께 즉시 몸을 날렸다.

쉬익!

바람을 가르며 엄청난 속도로 날아가던 제론이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까앙!

손이 저릿저릿했다. 역시 그냥 검만 휘둘러서는 그 어떤 타격도 입힐 수 없었다.

막 검을 회수하며 다시 공격을 하려는데, 순간 눈앞이 어두컴컴해졌다. 거대한 발이 자신을 짓밟기 직전이라는 걸 알아냄과 동시에 몸을 날리며 굴렀다.

쿵!

제론은 균형을 잡으며 빠르게 움직였다. 역시 예상대로 이스히스의 발이 또 내리꽂혔다.

쿠웅!

제론은 더욱 빠르게 이스히스에게서 멀어졌다. 이스히스는 그런 제론을 향해 도끼를 내리찍었다.

슈와악!

공기를 찢으며 떨어지는 도끼의 날이 섬뜩하게 빛났다. 저걸 맞았다간 살점도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꽝!

도끼가 바닥을 찍었다. 제론이 옆으로 이동하며 피한 것이다. 하지만 이스히스의 공격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이스히스가 앞으로 걸으며 도끼를 뽑았다. 그의 발이 제론을 향해 어마어마한 속도로 날아갔다. 몸의 중심을 이동시키며 발로 바닥을 쓰는 어려운 동작이었다.

기간트를 타고 저런 동작을 할 수 있는 라이더는 손에 꼽을 것이다. 하지만 이스히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걸 해냈다.

후웅!

제론이 몸을 옆으로 구르며 발을 피했다. 그와 동시에 도끼가 또 떨어졌다.

꽝!

정신이 없었다. 도끼와 발이 번갈아 날아오는데, 피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가끔 손이 올 때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몸에 무리가 갈 정도로 힘겹게 움직여야만 했다.

일단 놓친 승기는 다시 찾기가 어려웠다. 제론은 그렇게 기력이 바닥날 때까지 피하고 또 피했다. 어떻게 공략해야 할지 방법을 찾는 것도 어려웠다.

쩡!

결국 바닥을 쓸 듯 휘두른 도끼에 맞고 말았다. 제론은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쿵! 쿵! 쿵쿵! 쿵쿵쿵!

바닥에 통통 튀기며 날아간 제론은 온몸의 뼈가 부서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정신을 잃었다. 이렇게 죽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젠장, 저걸 어떻게 이겨?'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정신을 잃는 와중에도 그냥 보통 기간트라면 이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제론이 다시 깨어난 곳은 로비였다. 정신을 잃으면 로비로 이동하게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일어난 제론은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어차피 검을 한 번 뽑으면 다시 최상의 상태로 회복될 테니까.

"그래도 그 무식한 도끼에 맞았는데 죽지 않고 정신만 잃은 게 어디야."

제론은 어렴풋이 유적의 힘이 개입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도끼에 맞은 순간 무언가가 그 힘을 사방으로 분산시켰다. 그렇지 않았다면 제론은 죽음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 다시 시작해 볼까?"

제론은 검을 뽑았다.

슈우우욱!

검은 어느새 아공간에 들어가 있었다. 수많은 은가루가 흩날리다가 제론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순식간에 통증이 사라졌다.

"정말 굉장하군."

정말로 신기했다. 통증까지 사라진 걸 보면 내상도 나았다는 뜻이었다. 이는 생명을 하나 더 얻은 거나 다름없었다.

몸이 가뿐해지니 투기가 용솟음쳤다. 제론은 즉시 14층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끊임없이 이스히스와 싸우고 또 싸웠다.

☆ ☆ ☆

내전은 점점 심해졌다. 수많은 영지가 피폐해졌다. 또 어마어마한 사람이 죽었다. 그리고 난민이 발생했다.

난민이 향하는 곳은 뻔했다. 수도로 가거나 중립 세력이 모인 영지로 갔다.

하지만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가는 난민은 아무도 없었다.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가려면 전쟁이 한창인 지역을 몇 곳이나 거쳐야 했기 때문이었다.

에어스트 백작령 입장에서는 상당히 아까운 일이었다. 그 정도 난민이라면 고질적인 인구 부족을 단숨에 해결하고도 남을 것이다.

현재 에어스트 백작령은 특이한 상황이었다. 돈은 남아돌고 공사도 잔뜩 벌이고 있는데, 그걸 진행할 사람이 턱없이 부족했다.

농지는 어마어마하게 넓은데 농사를 지을 사람이 모자라 땅을 놀리고 있었다.

기간트까지 동원해 암석 지대를 정리하는 중인데, 그렇게 해서 땅을 확보해 봐야 그곳에 농사를 지을 사람이 없었다.

어떤 문제든 척척 해결하는 제론도 인구 문제는 단번에 해결하지 못했다.

수도의 빈민을 이주시키는 일도 당장 하기 어려웠다. 어쨌든 내전이 끝나야 뭘 해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지금으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항구를 만들고 배를 제작해서 바다를 통해 사람을 실어 나르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에어스트 백작령에는 인구 빼고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다들 열심히 하는지라 영지가 제법 잘 굴러갔다.

제론은 영지 일에는 거의 신경을 끊고 유적에서의 수련에 매달렸다.

당연히 영지의 모든 일은 바이스의 손에서 이뤄졌다.

바이스는 오늘도 산처럼 쌓인 서류를 처리했다. 워낙 벌인 일이 많았기에 결정이 필요한 사안이 매일매일 새로 생겨났다.

바이스는 그 모든 사안을 알아서 처리했다. 영주에게까지 올라가야 할 서류는 거의 없었다. 덕분에 제론은 하루에 몇 장만 처리하면 끝이었다.

서류 결재를 끝내고 잠시 쉬고 있을 때, 시종이 다급히 바이스의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바이스는 책상 구석에 있는 보석을 길게 쓰다듬었다.

덜컹.

집무실 문이 활짝 열렸다. 책상 구석에 박힌 보석들은 마법의 시동 장치였다. 방금 건드린 보석은 문을 열고 닫는 것이었고, 그 옆은 창문을 여닫는 것이었다.

조명을 켜고 끄는 것도 있었고, 시종을 호출하는 것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이 마법에 의해 움직였다. 그리고 그 마력은 성 지하 어딘가에 있는 에너지원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에어스트 백작성은 그런 식으로 편의를 생각해 만든 시스템이 곳곳에 깔려 있었다.

어쨌든 바이스는 집무실로 들어서는 시종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통신이 들어왔습니다."

"통신?"

바이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마법 통신 시스템은 자신의 집무실에도 깔려 있었다. 한데 왜 굳이 시종을 보냈단 말인가.

"통신이야 나한테도……."

막 뭐라고 하려던 바이스는 입을 다물었다. 서류를 처리할 때 방해받지 않으려고 통신 시스템을 강제로 끊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것이다.

바이스는 머쓱한 표정으로 통신 시스템을 다시 켰다. 그러자 통신을 연결하는 보석이 미친 듯이 점멸했다.

바이스는 시종에게 손을 내저었다.

"알았으니 이만 돌아가 봐라."

시종이 공손히 허리를 숙인 다음 밖으로 나갔다.

바이스는 보석을 쓰다듬어 문이 닫힌 걸 확인하고는 통신을 열었다.

그러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레피 후작가로부터 통신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벨루스 백작가로부터도 통신이 들어왔습니다!

바이스는 깜짝 놀랐다. 두 가문이 대체 왜 이렇게 갑자기 연락을 한단 말인가.

"연결해라."

―말레피 후작가부터 연결하겠습니다.

잠깐 시간이 지나자 보석이 느리게 점멸했다. 통신이 먼 곳과 연결되었다는 신호였다.

―말레피 후작가입니다. 연결된 분은 누구십니까?

"바이스 폰 말레피다."

―아, 공자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후작님께서 옆에 계십니다.

바이스는 후작님이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설마 아버지가 직접 연락을 한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조금 전 말한 사람은 통신 연결을 위해 상주하는 마법사가 분명했다.

―나다. 잘 지냈느냐?

바이스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당황스럽기도 했고, 아버지가 이렇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걸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기에 놀랍기도 했다.

"아, 저, 전 잘 지냈습니다. 아버님께서도 별고 없으신지요."

―그래. 네가 고생이 많구나. 그곳에서 뼈를 묻겠다던 결심은 여전히 변함없느냐?

바이스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어린 진한 아쉬움에 잠깐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금세 다잡았다. 말레피 후작가보다 에어스트 백작령이 훨씬 발전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이미 제론에게 충성하기로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맹세했다. 그 마음이 변할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시기에 굳이 가문으로 돌아가 후계자 싸움에 뛰어드느니 여기서 영지가 발전하는 모습을 보는 게 훨씬 좋았다.

"예. 전 여기를 떠나지 않을 겁니다."

확고한 어조가 담긴 말이었다.

―알겠다. 네 결정을 존중하마.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하지만 길지 않았다. 말레피 후작이 용건을 꺼냈다.

―포로스가 더 필요하다.

"보내 드리겠습니다."

아직은 포로스에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조만간 떨어질 것이다. 이제 슬슬 부서진 마나 코어에서 나오는 진흙이 바닥나고 있었다.

하지만 내전이 한창이니 다시 많은 양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보다 내전에는 참여하지 않았더구나.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잘했다.

말레피 후작가도 중립 세력에 들어가 있었다. 그것은 벨루스 백작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일로 상의할 것이 좀 있다.

"말씀하십시오."

―우리 영지에 난민이 너무 많이 모여들었다. 이들을 처리할 방법이 없겠느냐?

바이스의 눈에 고민이 어렸다.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돌릴 수만 있다면 말레피 후작령의 모든 난민을 다 데려오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은가.

"난민이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여긴 사람이 너무 모자랍니다. 한데 현실적인 방법이 없습니다."

―방법이야 만들면 되지 않겠느냐? 한번 같이 고민해 보자꾸나.

사실 독하게 마음먹으면 난민을 추방할 수도 있었다. 명분이야 충분했다. 영지에 난민이 쌓이면 이런저런 문제가 불거지게 된다. 치안도 나빠진다.

그걸 빌미로 다 내쫓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이 난민은 중립 세력으로 들어온 난민이었다. 이들을 내쫓으면 다른 중립 세력의 영지로 갈 수밖에 없었다.

악순환이었다.

결국 그들은 산적이 될 것이다. 그러면 중립 세력 영지의 치안이 극도로 약화될 수밖에 없다.

중립 세력은 나중을 위해 힘을 키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난민 문제를 제대로 해결해야만 한다.

말레피 후작은 그걸 해결하는 사람이 자신이길 원했다. 향후 정국을 주도할 수 있도록 말이다.

"고민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부탁한다.

통신이 끊어졌다. 바이스는 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부탁한다는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아버지에게 이런 면도 있었나 싶었다.

바이스가 생각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또 보석이 점멸했다. 확인하지 않아도 어디서 온 통신인지 알 수 있었다. 벨루스 백작가였다.

그리고 무슨 내용인지 듣지 않아도 짐작이 가능했다. 아마 아버지와 똑같은 말을 할 것이다.

통신을 연결한 바이스는 벨루스 백작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다. 예상은 완벽히 적중했다. 벨루스 백작도 난민 문제를 자신이 해결하고자 연락을 했다.

바이스는 이번에도 고민해 보겠다고 말한 다음 통신을 끊었다.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은 딱 하나였다.

"영주님이 필요해."

이 모든 일을 해결할 만한 사람은 제론뿐이었다. 과연 해결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제론은 피로가 쌓일 대로 쌓여 축 늘어진 채로 지하 수련장에서 나왔다. 오늘도 이스히스를 이기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은 비교적 오랫동안 접전을 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애쓰면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다.

수련장에서 나와 곧장 침실로 이동한 제론은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눈을 감으면 바로 잠들 수 있을 듯했다. 그렇게 막 눈을 감으려는데,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누군가 문을 격하게 두드렸다.

쾅쾅쾅쾅쾅!

"영주님! 안에 계십니까! 영주님!"

바이스의 목소리였다. 제론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침대 근처에 있던 보석을 손가락으로 톡 두드렸다.

덜컹.

문이 활짝 열렸다. 그러자 바이스가 득달같이 달려왔다.

"영주님.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제론은 그런 바이스의 모습을 잠시 멍하니 쳐다봤다. 침실까지 찾아와 보고를 하겠다는 걸 보면 급한 일인 모양이었다. 한데 지금까지의 바이스가 아닌 것 같아서 조금 기분이 묘했다.

"무슨 일인데?"

"조금 전 말레피 후작가와 벨루스 백작가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제론은 눈을 빛냈다. 바이스와 세나의 가문 아닌가. 그들이 괜한 일로 연락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이스는 그들과 연락했던 내용을 그대로 보고했다. 보고를 모두 들은 제론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건 기회였다. 하지만 현실적인 방법이 없었다. 그 많은 난민을 어떻게 여기까지 데려온단 말인가.

가만히 생각하던 제론은 대체 그 두 사람이 왜 그 얘기를 여기에 했는지 알아차렸다.

'결국 돈을 달라는 얘기였군.'

난민을 해결하려면 돈이 무한정 들어간다. 하지만 그렇게 돈을 쏟아서 버텨 낼 수만 있다면 그 많은 사람을 인구로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많은 인구는 곧 힘이 된다. 경제력은 물론이고 군사력을 키우려고 해도 사람이 필요하다.

그들이 원하는 대로 돈을 지원하면 에어스트 백작령이 얻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공짜로 돈을 달라고 하는 건 아니었다. 막대한 돈을 빌리는 셈이 될 것이다. 당연히 이자도 낼 것이다. 하지만 높은 이자를 받아 낼 수는 없었다. 어쨌든 난민을 위하는 일이었다, 거기에 이득을 결부시킬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무조건 그들을 데려와야만 한다. 제론은 과연 어떤 방법이 있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잘 이용하면 단숨에 도약할 수 있는 기회였다.

"난민이 몇 명이나 되지?"

"일단 우리가 데려올 수 있는 수는 각각 1만 명 정도입니다."

"그럼 총 2만 명이로군."

제론은 턱을 쓰다듬었다. 2만 명은 어마어마한 수였다. 그들을 먹여 살리는 일만으로도 막대한 돈이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일단 데려오기만 하면 어마어마한 노동력으로 변한다. 아직 에어스트 백작령은 건물도 제대로 다 짓지 못했다.

그들을 건설에만 투입해도 엄청난 속도로 건물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중립 지역에서 에어스트 백작령까지 이동하는 데에도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이동 속도는 느려지기 마련이다. 어쩌면 이동 시간만 1년이 넘을 수도 있었다.

배를 이용하면 좋겠지만, 중립 지역에는 바다에 닿은 곳이 없었다.

이래저래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제론은 포기하지 않았다. 무려 2만 명이나 된다. 그리고 방법을 하나만 만들어 놓으면 다른 영지의 난민까지 쓸어 담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직접 이동 외에는 방법이 없군."

아무리 생각해도 기발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 남는 건 직접 이동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거기에도 적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

난민은 보통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법이다. 그러니 그들이 직접 걸어서 이동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더구나 전장을 지나가야 한다.

"가능하겠습니까?"

바이스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제론은 의외로 자신만만했다.

"가능하게 만들어야지."

제론은 바이스를 보며 말을 이었다.

"세부적인 계획을 세워서 줄 테니까 일단 돌아가 있어. 혹시 기발한 생각이 떠오르면 즉시 얘기하고."

"알겠습니다."

"누가 좋은 생각을 해낼지도 모르니까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아이디어를 구해 보는 것도 좋겠군."

"그것도 처리하겠습니다."

바이스는 그렇게 대답하고 물러갔다.

제론은 침대에 누워 일단 잠을 청했다. 피곤할 때는 생각도 잘 안 나는 법이다. 이럴 때는 일단 푹 잔 다음 맑은 정신으로 다시 고민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빠른 방법이었다.

제론은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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