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3/217)

Chapter 5 페쿠니아 상단의 도약

레늄 왕국이 내전에 휩싸인 것과 달리 에어스트 백작령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물론 그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기간트 병력을 네이드 후작령과의 경계에 깔아 놓을 수밖에 없었다.

바이스는 아예 그곳을 기간트 훈련장으로 이용했다. 간단한 편의 시설을 만들어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한 다음, 그곳에 기간트를 몰아넣었다.

네이드 후작령과 에어스트 백작령의 경계에는 항상 100기가 넘는 기간트가 훈련을 했다. 이것은 사실 네이드 후작령 입장에서는 상당한 압박이었다.

하지만 네이드 후작은 그 압박을 무시하려 애썼다. 어쨌든 시간이 지나도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니까.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가장 바쁜 사람은 단연 세나였다.

세나에게 주어진 업무는 지난 전투로 포획한 200기의 기간트를 수리하는 것과 제론이 새로 내놓은 기간트의 수리, 그리고 기간트 설계도를 손보는 것까지 있었다.

손이 열 개라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충실감도 대단했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점점 늘어나는 기간트의 수와 점점 발전하는 설계도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뿌듯해졌다.

카이트는 기간트 훈련을 맡아서 매일 신입 라이더를 굴렸다. 지난번 전투에 참여했던 경험이 예비 라이더에게 큰 자신감을 주었다.

그들의 실력이 일취월장하면서 새로운 신입 라이더를 모집했고, 그들에게도 차근차근 기간트를 지급했다.

바이스는 영지를 전반적으로 정비하면서 농지 확장 준비를 했다. 아직 일부분밖에 쓰지 못하는 거대한 평원을 내년부터는 제대로 이용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했다.

그리고 훈련하지 않는 기간트를 돌려 암석 지대의 암석을 옮겼다. 암석 지대를 정리해 그곳을 개간할 준비를 함과 동시에 그 암석을 이용해 항구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아직 영지에 건물이 제대로 들어서지 않았기에 그 공사도 함께 진행했다.

덕분에 에어스트 백작령에는 연일 일거리가 끊이지 않았다. 공사가 끊임없이 있으니 인력을 아무리 수급해도 모자라기만 했다.

문제는 인력만이 아니었다. 물품도 모자랐다. 일단 상단이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오지 않으니 물품 반입이 뚝 끊겨 버렸다.

이대로 한 달 정도만 지나도 영지민의 생활이 참담해질 것이다.

바이스는 그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하겠다면서 사라진 제론이 떠올라 고개를 저었다. 아직도 알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 ☆ ☆

제론은 수도에 도착해 거리를 거닐었다. 내전이 활발히 진행되면서 수도는 더욱 활황이 되었다.

누구도 수도를 건드리지 않기에 대부분의 물자가 수도로 모였다. 그리고 그것을 사고팔기 위해 사람도 함께 모였다.

"역시 여기가 답이었어."

물자를 사서 나르는 건 문제없었다. 제론에게는 아공간이 있었으니까.

벨트에 빈 아공간이 무려 30개나 있었다. 하나하나가 기간트를 넣고도 남을 정도로 큰 아공간이었다. 거기에 물품을 가득 채워서 돌아가면 아마 당분간은 물자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흥정 따윈 필요 없었다. 그냥 사서 가면 된다. 상단이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물품을 운송하는 비용이 오히려 더 든다.

수도에서 사면 상단이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판매하는 것보다 훨씬 싸게 살 수 있었다.

만일 나중에 에어스트 백작령이 더 발전해서 수많은 상단이 드나들고 인구가 훨씬 더 늘어나면 얘기가 좀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랬다.

제론은 상점가는 물론이고 사방에서 몰려와 좌판을 펼친 상인들까지 싹 돌면서 닥치는 대로 물건을 사들였다.

물건은 몽땅 수도에 있는 커다란 창고로 보내졌다. 제론이 직접 나르는 게 아니라 계약만 하고 그쪽으로 물건을 가져오라고 지시해 쌓아 두는 방식이었다.

창고는 수도 외곽에 있었는데 제법 규모가 컸다. 제론이 거리를 한 번 지나갈 때마다 창고에 쌓일 물건이 산더미처럼 늘어났다.

물품의 종류를 가릴 필요도 없었다. 그저 몽땅 사 두면 누군가에게는 쓸모가 있을 테니까. 영지민에게 공짜로 푸는 것도 아니고 판매를 할 테니 지출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오늘도 제론은 대충 거리를 다 훑은 뒤, 좌판으로 향했다. 좌판을 펼친 상인도 제법 많은 물품을 가진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 상인과 제대로 계약하면 값싸게 많은 물건을 확보할 수 있었다.

좌판을 슥 둘러보며 걸어가던 제론은 갑자기 눈에 이채를 띠었다. 사람이 우글거리는 좌판을 발견한 것이다. 저렇게 사람이 많은 것은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제론은 망설이지 않고 그곳으로 향했다.

'사람이 많을 만하군.'

좌판을 펼친 상인이 굉장한 미인이었다. 그러고 보니 좌판을 둘러싼 사람들은 몽땅 남자였다. 그들은 저마다 어떻게든 미녀의 환심을 사 보고자 애쓰고 있었다.

당연히 물건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가져온 양이 상당한데도 눈에 띌 정도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제론은 가만히 서서 물건을 확인했다. 품질도 나쁘지 않았다. 괜찮은 품질에 미모를 이용한 상술이 결합되어 이런 결과를 내는 것이다.

"자, 오늘 치는 이제 모두 끝났습니다! 내일 다시 와 주세요!"

여인의 외침에 대부분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물건을 다 팔면 칼같이 사라지는 여인이었다. 오늘은 더 이상 미녀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안타까웠다.

서둘러 좌판을 정리하는 여인의 모습에 입맛만 다시던 사내 몇 명이 갑자기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서로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제론은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과연 저 여인이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궁금해졌다.

생각해 보면 이런 일이 자주 있었을 게 분명했다. 저런 미녀가 좌판을 여는데 날파리가 꼬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좌판을 다 정리한 여인이 서둘러 어딘가로 향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몇몇 사내들이 조용히 뒤쫓았다.

제론은 살짝 거리를 두고 그들을 따라갔다. 못 봤다면 모를까, 어쨌든 이런 일을 목격했으니 나중에라도 구해 줄 생각이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여인이 반갑게 손을 흔들며 외쳤다. 그러자 저 멀리서 십여 명의 사내들이 마주 손을 흔들었다.

그 광경에 뒤쫓던 사내들이 걸음을 멈추고 망설였다. 고작 4명이 쫓아왔는데, 보아하니 상대는 10명이 넘었다.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여인이 발걸음을 빨리했다. 뒤쫓던 사내들은 입맛을 다시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제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저런 동료들이 있으니 이렇게 당당히 장사를 한 것이었다.

한데 그 순간, 모두를 황당하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그녀가 갑자기 방향을 옆으로 꺾어 골목으로 쏙 들어가 버린 것이다.

뒤쫓다가 걸음을 멈춘 사내들이 사태를 얼른 파악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다가 화들짝 놀라 달려갔다.

그리고 골목을 확인했다. 이미 그녀는 사라지고 없었다. 골목은 말도 못하게 복잡했다. 아마 몇 번만 꺾어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결국 사내들은 포기하고 돌아갔다.

제론은 그녀에게 마주 손을 흔들어 주던 사내들은 대체 누군지 궁금해졌다.

제론은 그들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헛웃음을 지었다. 그들도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충 무슨 상황인지 파악했지만 그래도 확인하고 싶어서 물었다.

"조금 전 그 여자, 누군가?"

사내들은 제론을 바라봤다. 척 보기에도 높은 귀족이 분명했기에 바로 눈을 깔았다.

"저희도 모릅니다."

"한데 왜 손을 흔들었나?"

사내들이 당황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자칫 그 여자와 이 귀족 사이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다면 자신들이 몽땅 딸려 들어가 치도곤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 그게 그냥 예쁜 여자가 손을 흔들어 주니 그만……."

제론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섰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대단한 임기응변이로군. 아니면 미리 파악했던 건가?'

그 여자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게 들었다. 제론은 여자가 들어간 골목으로 걸어갔다. 다른 사람이라면 못 찾겠지만 제론은 찾을 수 있었다. 마티는 이럴 때 정말로 유용했다.

즉시 태블릿을 꺼낸 제론은 마티를 조종해 근방의 골목을 몽땅 뒤졌다. 그리고 씨익 웃었다.

"여기로군."

제론은 마티 하나를 그녀 옆에 붙였다. 그리고 느긋하게 걸어갔다. 찾았으니 이제 남은 건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이렇게 호기심을 자극하는 사람은 바인 이후로 처음이었다.

제니는 골목을 돌고 돌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곳은 그녀가 구입한 창고였다. 아니, 창고로 쓰기 위해 마련한 집이었다.

원래는 가정집으로 쓰이던 건물이었는데, 제니가 구입해 창고로 개조했다.

창고로 들어간 제니는 길게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오늘도 무사히 잘 끝났네."

제니는 뿌듯한 얼굴로 품에서 돈주머니를 꺼냈다. 폭리를 취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제법 비싸게 받는 편이었다. 그걸 몽땅 팔았으니 이익이 얼마나 났겠는가.

쫘르륵!

돈주머니를 거꾸로 들어 안에 든 돈을 단번에 쏟아 버린 제니는 환한 얼굴로 바닥에 떨어져 쌓이는 돈을 바라봤다. 하루 중 이때가 가장 즐거웠다.

"오늘은 얼마나 벌었으려나……."

얼마 벌었는지는 사실 명확했다. 돈을 셀 필요도 없었다. 제니는 어떤 물건을 얼마나 가져갔고, 그것을 얼마에 팔았는지 모두 기억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합이 계산되었고, 그러면 돈을 얼마나 벌었는지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하지만 그래도 매일 돈을 세고 또 셌다. 돈을 세는 자체가 정말로 즐거웠다.

돈을 모두 센 다음 그것을 구석에 있는 궤짝에 넣은 제니는 내일 장사할 준비를 시작했다.

물건은 잔뜩 있었다. 모두 좌판에서 팔기 적당한 물건들이었다.

장사 준비를 끝낸 제니는 일단 몸을 씻었다. 집 뒤에 우물이 있었는데, 거기서 물을 길어다 통에 담아 목욕을 했다. 물을 긷는 게 쉽지 않았지만 하루도 목욕을 거른 적이 없었다.

목욕 역시 그녀가 즐기는 소소한 행복 중 하나였다.

목욕을 마친 그녀는 궤짝 옆에 놓인 탁자에 앉았다. 그리고 커다란 종이를 펼쳤다.

그 안에는 앞으로의 계획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제니는 그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일부를 수정했다.

어찌나 세세하게 작성되어 있는지, 그 큰 종이에 깨알 같은 글씨로 써 있었는데도 향후 10년 치 계획이 전부였다.

계획을 모두 점검한 제니는 탁자 밑에 쌓인 책 중 하나를 꺼냈다. 하루도 독서를 거른 적이 없었다. 자기 전에 꼭 한 페이지라도 읽고 잤다.

독서와 공부는 그녀를 지탱하는 원동력 중 하나였다.

책을 읽은 그녀는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려면 너무 늦게 자면 안 된다.

순식간에 잠들었고 아침이 되자 바로 깨어났다. 언제나 그 시간에 일어나기에 이제는 저절로 눈이 떠졌다.

제니는 미리 준비한 물건을 들고 집을 나섰다. 이렇게 아침 일찍 움직이는 이유는 누구도 자신이 그곳에 가는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나저나 슬슬 그 자리도 위험해졌네. 내일이나 모레쯤 옮겨야겠어."

자리를 옮기는 건 쉽지 않았다. 사전에 철저한 조사가 필요했다. 장사가 잘될지, 또 숙소 겸 창고와는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그리고 지형은 어떤지.

그 모든 걸 파악하고 움직이는 동선까지 계산해야만 했다. 그래야 장사하면서 벌어지는 불상사에서 잘 빠져나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발걸음도 가볍게 걸어가 자신이 항상 장사하던 자리에 도착한 제니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먼저 와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제니는 주위를 둘러봤다. 워낙 이른 시간이었기에 아무도 없었다. 아마 조금 더 있으면 하나둘 모여 순식간에 바글바글해질 것이다.

지금 자리를 잡지 않으면 저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다. 그곳은 제니가 계속 장사를 해 온 곳이었다. 즉, 제니를 보고 싶은 사람은 일단 그곳부터 찾아온다는 뜻이었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은 장사에서 매우 중요했다. 제니는 그것을 알기에 자신의 미모를 이용했고, 또, 한 자리를 고수했다.

한데 그 자리에 자신보다 먼저 나온 사람이 서 있는 것이다. 게다가 분위기를 보니 장사를 할 사람 같지가 않았다.

'저런 복장은 보통 귀족인데…….'

허리춤의 검을 보면 기사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상대하기가 껄끄러운 사람이었다.

제니는 조심스럽게 그 사람에게 다가갔다.

"저……."

제니의 자리에 서 있던 사람, 제론이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제니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을 이었다.

"죄송하지만, 그 자리에 좌판을 깔지 않으실 거면 양보해 주실 수 있나요?"

제니의 물음에 제론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조건이 있는데, 들어 볼 텐가?"

제론의 말에 제니는 표정이 살짝 굳었다. 다짜고짜 조건이라니. 제니는 슬그머니 한 발 물러났다. 왠지 잘못 엮이면 큰일 날 것 같았다.

사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한 번도 없었던 건 아니었다. 상황과 방법이 달라진 걸 고려하면 무수히 많은 경험이 있었다.

제니의 미모는 상당했다. 그 미모를 탐해 어떻게든 수작을 부려 보려던 귀족이나 기사가 꽤 많았다.

지금까지는 슬기롭게 대처해 왔지만 왠지 오늘은 힘들 것 같았다. 일단 주위에 도와줄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만일 사람이 많았다면 이런 식으로 다가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조건이나 들어 보고 도망쳐도 늦지 않을 것 같은데?"

제론의 말에 제니의 발이 순간 멈췄다. 머릿속에서는 도망치라고 말하는데, 제론의 말에 담긴 진한 돈 냄새가 그녀의 이성을 조금씩 갉아먹었다.

"뭐, 뭐죠?"

"팔고 싶은 물건이 좀 있는데, 그걸 대신 팔아 줬으면 해서. 이익금의 3퍼센트를 수수료로 챙겨 주지."

제니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어떤 물건인데요?"

"별거 아냐. 이런 것들이지."

제론이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팔뚝만 한 스틱 끝에 어린아이 주먹만 한 구슬이 달린 물건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물건에 관심이 생긴 제니가 한 걸음 다가갔다. 마음속에 단단히 걸어 잠갔던 의심의 빗장 하나가 딸깍 풀렸다.

"그게 뭔가요?"

"이런 거지."

제론은 스틱의 아랫부분을 잡고 빙글 회전시켰다.

딸깍.

뭔가가 걸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 순간 구슬이 환하게 빛났다.

제니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 아, 아티팩트!"

이건 마법 아티팩트였다. 그것도 일반적인 마법등보다 훨씬 작고 가벼운 마법등이었다. 제니가 보기에 이건 마법등의 혁명이었다.

"휴대용 마법등이라니!"

이런 마법등은 여행 중에 정말로 편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공급만 확실하다면 수요는 무조건 따라붙게 되어 있었다.

"이, 이걸 얼마에 판매하실 건가요?"

"3골드쯤?"

"예에? 그렇게 싸게 판단 말인가요?"

일반적인 마법등의 가격은 최소 100골드였다. 아티팩트 중 가장 싸고 보편적인 것이 마법등이었는데도 그랬다.

한데 고작 3골드라니. 이 정도면 거저나 다름없었다. 이 가격이라면 귀족이나 돈 많은 부자가 아니라도 어떻게든 구입이 가능했다.

'만일 대량 생산이 가능하다면……!'

상상만으로도 짜릿했다. 이걸 전 대륙에 걸쳐 판매할 수만 있다면 떼돈을 벌게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대륙 제일의 부자가 될 수도 있었다.

제니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이걸 어떻게 팔지에 대해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제론이 말을 걸어 그녀의 생각을 끊었다.

"싫은가 보군. 그럼 어쩔 수 없지."

그 말에 퍼뜩 상념에서 벗어난 제니가 다급히 소리쳤다.

"아뇨! 싫지 않아요! 무조건 할게요! 제가 꼭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제론이 빙긋 웃었다. 그가 파악한 제니라면 이런 기회를 절대 놓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 이걸 팔아 보도록."

제론은 품에서 마법등 10개를 꺼내 내밀었다. 제니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그리고 기대감 어린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뇨. 그런데…… 이게 전부인가요?"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 다 팔아도 30골드야."

확실히 30골드면 적은 돈이 아니었다. 제니가 지금 가져온 물품을 모두 팔아도 30골드를 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전부라면 뭔가가 아쉬웠다.

"그래도 더 있으면 좋을 텐데……."

제니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좌판을 깔았다. 어쨌든 이거라도 팔 수 있는 게 어딘가. 제론은 3골드에 팔라고 했지만 그렇게 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이건 최소 10골드는 받을 수 있는 물건이었다.

'100골드!'

10골드에 10개를 팔면 100골드다. 그중 30골드를 넘긴다 하더라도 무려 70골드가 남는다. 제니는 환한 표정으로 서둘러 좌판을 깔았다.

자신이 가져온 물품도 당연히 진열했고, 마법등은 하나만 꺼내서 손에 들고 나머지는 잘 감춰 두었다.

한창 준비를 하는 그녀를 지켜보던 제론이 한 마디를 던졌다.

"딱 3골드만 받아라."

제니의 행동과 표정이 딱 굳었다. 그녀는 억지로 고개를 들어 제론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죠? 전 더 비싸게 팔 수 있어요! 좋아요! 그럼 제가 개당 4골드 드릴게요! 아니, 5골드 드릴게요!"

제론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손가락 3개를 폈다.

"3골드. 그 이상도 이하도 안 돼."

그렇게 말한 제론은 단호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제니는 멍하니 제론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힘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하아, 그럼 그렇지. 그렇게 쉬울 리가 있나."

제니는 한숨과 함께 좌판을 마저 펼쳤다. 이내 장사 준비가 끝났다. 이제부터는 사람이 오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문득 제니는 주위를 둘러봤다. 슬슬 사람이 모이고 있었다. 여기저기 좌판이 깔렸고 좌판 위에 물건이 진열되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제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로 돌아간 것이 분명했다.

제니는 갈등하고 고민했다.

어차피 보지 않으니 그냥 10골드에 팔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건 신용 문제였다.

의뢰인은 반드시 3골드에 팔라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본적인 신용을 저버리는 꼴이 된다.

장사하면서 신용을 모두 지키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이번 일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아우, 몰라!"

제니는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그 때 한 사람이 다가왔다. 손님이었다.

"그 손에 든 건 뭔가?"

제니가 정신을 차리고 손님을 바라봤다. 아직 이른 시간인지라 물건을 사기 위해 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눈앞에 선 손님은 나이가 살짝 있어 보이는 남자였다.

일단 손님의 얼굴이 낯익었다. 몇 번 이곳에 찾아온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제니는 즉시 얼굴에 생글생글 미소를 지었다.

"이거요? 아마 보시면 깜짝 놀라실 만한 물건이지요."

제니는 그렇게 말하며 스틱 하단을 빙글 돌렸다. 직접 쓰면서 느끼는 거지만 간단하고 실용적이었다.

딸깍.

구슬에 빛이 들어왔다. 손님으로 온 노인은 깜짝 놀랐다. 설마 마법등일 줄은 몰랐다. 이런 좌판에서 아티팩트라니!

"대, 대체 그거 얼마인가?"

노인이 아는 마법등의 가격은 최하가 100골드였다. 100골드짜리 물건을 시장의 좌판에서 보게 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놀라셨죠? 하지만 아직 놀랄 일이 더 남아있답니다. 이 놀라운 아티팩트의 가격이 단돈 3골드! 어때요? 믿기 어려우시죠?"

노인의 입이 쩍 벌어졌다. 3골드라니. 그 가격에 이걸 살 수 있다면 거저나 다름없었다. 3골드에 사서 더 비싸게 팔아도 팔린다.

"그거 내가 사겠네."

제니가 빙긋 웃었다.

"탁월한 선택이에요."

노인은 마법등을 받아 들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떠났다. 평소 같았으면 흥정도 하면서 제니를 더 오랫동안 훔쳐봤을 텐데, 오늘은 그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여기서 기다리다가 가격을 잘못 알았다고 제니가 돌려 달라고 할까 봐 최대한 서둘러 사라졌다.

손님이 오자마자 반사적으로 마법등을 3골드에 판 제니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에이, 나도 모르겠다."

이왕 3골드에 팔기 시작했으니 앞으로도 그렇게 하기로 했다. 다 같은 손님인데 누구한테는 3골드에 팔고 누구한테는 10골드에 팔 수는 없지 않은가.

제니는 다른 마법등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켜 자신의 얼굴을 비췄다. 각도를 잘 맞춰서 가장 예쁘게 보일 수 있도록 얼굴의 음영을 조절했다.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것도 장사 기법 중 하나라고 철석같이 믿었기에 이런 일은 아주 능숙했다.

별다른 말을 외치지도 않았는데, 수많은 사람이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물론 대부분 남자였다.

제론은 숙소에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봤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여자였다.

적어도 장사에 관한 수완은 정말로 대단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도덕성도 있었다. 완전히 믿을 수는 없지만, 능력을 보면 그 정도는 충분히 감안할 수 있을 정도였다.

"슬슬 상단의 규모를 키울 때가 되었는데, 적당하군."

페쿠니아 상단을 이끄는 카프만의 능력은 제법 뛰어났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사실 믿을 수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 중책을 맡겼다.

아직까지는 페쿠니아 상단이 그저 그렇지만 앞으로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이제부터 슬슬 상단을 통해 경제적 영향력을 만들어 갈 때가 되었다.

결국 제니는 마법등뿐 아니라 가지고 온 모든 물건을 싹 팔아 치웠다.

물건이 다 떨어졌는데도 사람들에 둘러싸여 빠져나오지를 못했다. 그걸 본 제론의 표정이 굳었다.

모인 사람 중 절반 정도가 마법등 때문에 온 것이다. 그들은 아마 마법등의 출처를 밝히거나, 제니가 마법등을 더 내놓기 전까지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제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슬슬 제니를 영입할 시간이 되었다.

숙소에서 나간 제론은 즉시 제니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소드 마스터가 된 제론의 속도는 무시무시할 정도로 빨랐다. 게다가 어찌나 은밀하고 교묘하게 움직이는지 누구도 제론이 달리는 걸 발견하지 못했다.

제니를 찾는 건 아주 간단했다. 원래 위치도 알고 있을 뿐더러 사람이 가장 많이 모인 곳이었으니 그냥 척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제론은 그들 틈으로 스며 들어갔다. 지나갈 틈도 없이 빽빽했지만, 제론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몸에서 마나를 흘려 사람과 사람 사이를 벌렸다. 그리고 그 안으로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제론이 제니 옆에 서는 건 순식간이었다. 제론이 그곳에 설 때까지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지."

제니는 갑자기 옆에서 들리는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제론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아직 사람들이 달려들지는 않았지만 곧 달려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데 제론을 발견하니 왠지 마음이 턱 놓였다.

"여, 여기 있으면 위험해요."

제니의 말에 제론이 빙긋 웃었다.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보여 주면 그만이니까.

제론은 제니의 허리를 확 끌어당겼다. 제니가 깜짝 놀라 코앞으로 다가온 제론의 얼굴을 바라봤다. 제론의 잘생긴 얼굴이 커다랗게 뜬 눈에 한가득 들어왔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고 숨이 가빠졌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제론은 제니의 허리를 안은 채 위로 휙 뛰어올랐다. 아니, 그냥 뛰어오른 게 아니었다. 숫제 날았다.

그렇게 날아오른 제론은 제법 멀리 떨어진 건물의 지붕에 가볍게 내려섰다. 그리고 즉시 한 번 더 뛰었다. 건물이 촘촘히 세워진 곳으로 뛰었기에 아무도 제론이 어디까지 뛰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제론과 제니가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남은 사람들은 망연한 얼굴로 두 사람이 사라진 건물 지붕만 바라봤다.

제니는 흥분이 가시지 않아 상기된 표정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두 사람은 지금 제니의 집에 있었다. 제니는 제론이 자신의 집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제게 뭘 원하시는 거죠?"

한껏 긴장한 제니는 곧장 본론부터 꺼냈다. 여러 가지 상황이 맞물리니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사실 조금 전 거의 하늘을 날다시피 여기까지 와서 아직 정신이 없었다.

"목표가 어디까지지?"

"목표요?"

제니는 난데없는 질문에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이내 차분히 머릿속을 정리할 수 있었다. 자신의 목표에 대해 생각하니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100만 골드요."

"100만 골드?"

"네. 100만 골드를 버는 게 제 목표에요."

제론은 내심 당황했다. 생각보다 목표가 너무 낮았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따지고 보면 100만 골드는 일반인이 결코 함부로 손에 쥘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제니가 지금 하는 것처럼 돈을 벌면 평생 일해도 수만 골드를 손에 쥐는 것조차 어려울 것이다.

"냉정하게 따져서 100만 골드를 벌 수 있을 것 같나?"

제니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녀는 실망하거나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눈을 빛내며 말했다.

"힘들겠죠. 하지만 어떻게든 해내고 말 거예요."

제론은 그 자신감과 열정이 좋았다. 장사를 하는 그녀의 모습은 반짝반짝 빛이 났다.

그 뒤로 제론은 소소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제니는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긴장이 풀어져 제법 많은 얘기를 했다.

제론은 제니와 대화하면서 그녀의 품성을 조금 더 알아봤다. 나쁘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끌어들여도 괜찮다고 판단했다.

대화가 잠시 소강상태에 들었다. 얘깃거리가 떨어진 건 아니었다, 그저 대화와 대화 사이에 가끔 찾아오는 간극이었다. 그리고 그 틈을 이용해 제론이 화제를 바꿨다.

"혹시 페쿠니아 상단이라고 들어 봤나?"

"아! 페쿠니아 상단! 당연히 알죠. 최근 두각을 나타내는 상단이니까요. 아마 그 상단 때문에 슈린 상단이 제법 애를 먹었을 걸요?"

제니도 대충 상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고 있었다. 아무리 좌판을 깔고 장사를 한다지만 상계의 동향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돈을 벌기 어려워진다.

"알고 있으니 잘됐군. 거기서 일해 볼 생각 없나?"

"예?"

제니는 멍하니 제론을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페쿠니아 상단에서 나오신 건가요?"

페쿠니아 상단의 주인인 카프만은 제니도 한 번 만나 본 적이 있었다. 잠깐의 대화였지만 깊은 인상을 받았다.

제니의 눈빛에 도는 호의를 확인한 제론은 내심 감탄했다. 그녀의 반응을 토대로 카프만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카프만과 만나 봤나?"

"네. 그저 몇 마디 대화를 나눈 게 전부지만요."

"어떻게 생각하지?"

"뭘요?"

"카프만이 과연 페쿠니아 상단을 어디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나?"

그 말에 제니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글쎄요. 쉬운 질문은 아니네요. 하지만 이거 하나는 확실히 말할 수 있어요. 페쿠니아 상단은 절대 대륙 제일이 될 수는 없어요."

"이유가 뭐지?"

"그야 상단주님이 너무 좋은 분이니까요."

"그게 이유가 되나?"

"그럼요. 대륙 제일이 되려면 피를 밟고 서야 해요. 다들 그렇게 하거든요. 혼자만 안 하고 있으면 뒤쳐질 수밖에 없죠."

제니가 손가락 하나를 세우며 눈을 빛냈다.

"이유는 또 있어요."

제론은 흥미로운 눈으로 제니의 말을 들었다. 제니도 누군가 자신의 말을 열심히 들어 주니 더 흥이 났다.

"냉정히 판단하면 카프만 님의 능력이 대륙을 아우를 정도가 되지 않아요."

"그럼 어떤 사람이 대륙을 아우를 수 있지?"

제니가 생긋 웃으며 자신을 가리켰다.

"저쯤은 되어야겠죠?"

"고작 미모를 이용해 남자들의 주머니는 터는 상재로 말인가?"

제론의 말이 폐부를 찔렀을 텐데도 제니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을 지었다. 오히려 살짝 미소까지 지으면서 손가락 하나를 흔들었다.

"에이, 그건 아니죠. 그건 훌륭한 장사 기법 중 하나일 뿐이에요. 좀 더 굴리는 돈 규모가 커지면 훨씬 대단한 일도 얼마든지 할 자신이 있다니까요?"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정말로 그럴 것 같았다. 사실 자신의 미모를 장사에 이용하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물론 그때도 외모를 잘 이용하면 훨씬 좋은 성과를 낼 수 있고요."

그 말에도 제론은 동의했다. 이미지라는 것은 정말로 중요했다. 초고대 문명의 지식을 많이 쌓았기에 당시의 생활상도 잘 알고 있었는데, 이미지에 대한 학문이 있을 정도로 중요하게 취급했다.

"그나저나 페쿠니아 상단과는 무슨 관계죠? 상단주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걸로 봐서 상단 직원은 아닌 것 같은데……."

"실질적인 주인이지."

제론은 숨김없이 대답해 주었다. 어차피 데리고 갈 사람이라면 그 정도는 말해 줘도 상관없었다. 만일 거절하면 그때 가서 얼마든지 방법을 강구할 수 있을 테니까.

제니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리고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비밀인 것 같은데 제게 말씀하신 걸 보니 거절해선 안 되는 내용이로군요."

제론은 이번에도 솔직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서는 영지의 안전이 가장 중요했다. 물론 그렇다고 제니를 죽일 생각은 아니었다. 죽이지 않고도 얼마든지 안전장치를 만들 수 있었다.

"좋아요. 하겠어요."

제니는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피할 수 없으면 차라리 즐기는 편이 나았다. 게다가 페쿠니아 상단이라면 충분히 미래를 맡길 만했다.

"그래서 제가 할 일이 뭐죠? 상단을 통째로 주실 것 같지는 않고……."

"상단을 주면 맡아 키울 자신은 있나?"

제니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에 제론은 의외라는 듯 그녀를 쳐다봤다. 항상 자신만만한 제니라면 당연히 고개를 끄덕일 줄 알았다.

"전 상단 주인 자리에는 안 맞아요. 그건 카프만 님이 훨씬 잘하실 거예요."

제니는 제론을 바라보며 생긋 웃었다.

"상단이 작을 때는 상관없는데, 커지면 사람을 한데 모으는 힘이 정말로 중요하거든요. 전 사람들을 맘껏 부려 먹는 건 잘 하지만 마음을 다독이는 건 자신 없어요. 미모로 홀리라면 모를까."

너무나 당당하고 거침없이 자신의 미모를 자랑하는 제니의 말에 제론은 피식 웃었다. 역시 사람을 잘 골랐다. 이 정도라면 카프만을 도와 페쿠니아 상단을 크게 성장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오늘부터 당장 시작하지. 이곳의 물건은 페쿠니아 상단이 인수하는 걸로 정리하고."

제니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일단 맡은 이상 대충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무조건 대륙 제일을 목표로 달릴 것이다.

'어쩌면 정말로 대륙 제일이 될지도 모르겠어.'

제론은 내심 기대가 되었다. 어쨌든 결정한 이상 여기서 시간을 끌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럼 가지."

"아, 잠깐만요!"

제론이 나가다 말고 돌아서서 제니를 쳐다봤다. 제니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마법등이요. 앞으로 페쿠니아 상단이 취급하는 건가요?"

"왜? 하고 싶나?"

"물론이죠! 그것만 꾸준히 팔 수 있다면 단숨에 왕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상단이 될 수 있을 텐데요."

"그 아티팩트에는 약점이 있다."

"약점이요?"

제니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약점이 있는 걸 모르고 팔았다. 만일 약점이 있다면 팔기 전에 그 점을 손님에게 알렸어야만 했다. 한데 그러지 못했으니 고스란히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래서 3골드에 팔라고 한 거다."

"100골드짜리를 3골드에 팔아야 할 정도로 큰 약점인가요?"

"물론. 그건 사용 시간에 제한이 있거든."

제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본래의 마법등도 사용 시간에 제한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다시 충전이 가능했다. 아티팩트에 쓴 마나 스톤에 마나가 채워지면 다시 작동하게 된다.

그리고 마나 스톤의 마나는 자동으로 채워진다. 오직 시간이 답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마법등은 반영구적이었다. 충격에 의해 깨지거나 마나 스톤의 수명이 다한 경우가 아니면 계속 쓸 수 있었다.

물론 아티팩트에 들어간 마법진이 손상되어도 안 된다. 하지만 마법진은 대부분 복구가 가능했다.

"수명이 얼마나 되나요?"

"수명은 제법 길다. 다만 사용 시간에 제한이 있을 뿐이지."

제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그거 아닌가.

"마법등의 사용 시간은 1200시간이다. 그걸 어떻게 나눠 쓰든 상관없다."

"1200시간이면…… 50일이군요."

"24시간 내내 등을 쓴다면 그렇겠지."

그제야 제니의 표정이 밝아졌다. 등을 아껴 쓰기만 하면 훨씬 오래 쓸 수 있었다. 보통 밤에만 등을 켜고 잠을 잘 때는 끄니, 실제로는 하루에 평균 6시간 정도를 쓸 것이다.

그 정도면 200일을 쓸 수 있으니 그래도 3골드 가격은 하는 셈이었다.

100골드짜리 마법등을 구입한다 하더라도 파손되기 쉬운 마법등의 특성상 그리 오래 쓰지는 못한다. 그러니 대충 가격이 맞을 것이다.

"대신 우리 마법등은 충전이 가능하다. 충전가격은 50실버지."

머릿속으로 정신없이 계산을 하던 제니의 귓가로 제론의 말이 들려왔다. 제니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50실버라고요?"

즉, 3골드짜리 마법등을 50실버에 살 수 있다는 것과 같다. 만일 그렇다면 굳이 100골드짜리 마법등을 살 필요가 없어진다.

"그게 정말인가요?"

제론은 말없이 품에서 둥근 홈이 파인 상자를 꺼냈다. 홈의 모양과 크기가 마법등의 구슬과 딱 맞아떨어졌다.

"충전기다. 당연히 마나 스톤이 들어가 있지."

제니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그럼 마법등에는 마나 스톤이 안 들어간 건가요?"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건 마법의 혁명이나 다름없었다. 마나 스톤 없이 아티팩트를 만들어 냈으니 말이다.

"자, 이제 이걸로 돈을 얼마나 벌 수 있을 것 같으냐?"

제니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왕국 제일 상단은 우리 거예요. 물론 디아만트 상단은 예외로 치고요."

디아만트 상단은 레늄 왕국의 상단이지만, 사실 대륙의 상단이라고 봐야 옳다. 그들은 대륙 전역에서 폭넓게 활동을 하니까.

실제로 래늄 왕국의 상단 본부가 사라져 버려도 비록 손해는 입을지언정 상단이 흔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크고 튼튼한 상단이었다.

"좋아. 거기에 포션까지 더하면?"

"예? 포션도 팔게요? 하지만 그건……."

제니의 얼굴이 살짝 창백해졌다. 포션은 슈린 상단의 주력 품목이었다. 그들은 포션 제조에 관한 수많은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슈린 상단의 뒤에는 슈린 공작가가 있었다. 현 레늄 왕국 최고의 실세 가문인 슈린 공작가 말이다. 그들과 척을 져서 좋을 게 없었다.

"그들은 굳이 걱정할 필요 없잖아? 지금 당장은."

"지금 당장이야 그렇죠.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제론이 워낙 단호히 말했는지라 제니도 결국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포션까지 우리가 장악할 수 있다면 대륙 10대 상단이 되는 것도 가능해요."

"거기에 식량까지 더하면?"

제니는 결국 질려 버렸다. 대체 뭐가 이리도 많단 말인가. 어차피 말할 거 한꺼번에 해 주면 좀 좋은가.

"알았어요! 대륙 제일이 될게요! 이제 됐나요?"

그제야 제론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제론은 그렇게 만들 생각이었다. 페쿠니아 상단은 나중에 에어스트 백작령이 도약했을 때, 하늘로 날아오르게 해 줄 날개가 될 것이다.

"좋아. 이제 됐으니 가자."

제론의 말에 제니가 먼저 일어나 성큼성큼 집에서 나갔다. 그리고 제론은 주위를 슥 둘러보고, 안에 있던 모든 물건을 아공간에 싹 쓸어 담았다.

"나중에 놀랄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중얼거리며 피식 웃은 제론은 집에서 나갔다. 이제부터 페쿠니아 상단은 진짜 도약을 시작할 것이다. 대륙 제일을 향해서.

제니가 페쿠니아 상단에 합류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사실 제니는 카프만도 영입하려고 눈여겨보고 있던 중이었다.

그래서 딱 어울리는 자리까지 준비해 둔 상태였다.

카프만은 다른 건 몰라도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최고였다. 또한 사람을 끌어들여 포용하는 능력도 뛰어났다.

제니가 단숨에 상단에 녹아드는 것을 확인한 제론은 카프만의 능력에 크게 만족했다. 또, 그런 카프만을 순식간에 발굴해 낸 바인에 대해서도 감탄했다.

어쨌든 제니는 성공적으로 페쿠니아 상단에 합류했고, 그 즉시 제론이 내놓은 마법등 판매를 시작했다.

기존의 마법등과 달리 스틱형 마법등은 그야말로 수도를 강타했다. 그리고 수도를 넘어 왕국 전역을 강타했다.

휴대가 간편하다는 점과 싼 가격이 주효했다. 게다가 기존 마법등에 비해 상당히 튼튼했다.

사실 마법등은 아티팩트의 판매보다는 충전으로 돈을 버는 구조였다. 마법등을 제조하는 데에는 돈이 들지만, 충전하는 데에는 돈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물론 충전기를 만드는 데에야 돈이 필요하지만 충전기는 말 그대로 무한히 쓸 수 있는 아티팩트였다.

스틱형 마법등의 쓰임새는 상당히 다양했다. 일단 휴대가 간편하기 때문에 병사들에게 우선적으로 지급이 되었다. 야간 순찰 시 정말로 유용했다.

그렇게 마법등이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그와 동시에 마법등 충전소가 곳곳에 생겨났다. 당연히 페쿠니아 상단에서 직영하는 곳이었다.

페쿠니아 상단은 그것 하나만으로 왕국에서 손꼽히는 상단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진짜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진짜 시작은 페쿠니아 상단이 포션을 판매하면서부터였다. 지금까지의 포션보다 훨씬 성능이 뛰어났기에 나오기만 하면 경쟁이 불가능할 것이다.

거기에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남아도는 식량까지 판매하게 되면 페쿠니아 상단은 감히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대상단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제론은 그 모든 계획을 카프만과 상의한 후, 조용히 영지로 돌아갔다. 물론 그때까지 구입한 물품을 모두 아공간에 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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