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왕국의 분열
"그래도 우리 병력도 제법 대단하지 않아?"
제론의 말에 옆에 서 있던 카이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우리는 고작 50기에 불과하고 저쪽은 200기인데 너무 여유 넘치시는 거 아닙니까?"
제론이 힐끗 카이트를 쳐다봤다.
"그래서 두려워?"
카이트가 씨익 웃었다.
"그럴 리가요. 200기 아니라 300기가 몰려와 봐야 저런 오합지졸로는 우리를 상대할 수 없습니다."
제론도 씨익 웃었다.
카이트의 말대로 적은 오합지졸이었다. 여러 가문에서 보낸 기간트가 뒤섞여 있어서 유기적인 작전 수행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붉은 학살자를 볼 수 있겠군요. 다들 기대 중입니다."
카이트의 말에 제론이 피식 웃었다. 사실 제론도 기대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함께 싸우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으니까.
"그나저나 기간트 장비가 아주 간단하군요."
"세나가 애 좀 쓴 거 같아."
"우리도 어떻게 좀 안 되겠습니까?"
"새 기간트를 설계 중이니까 좀 기다려 봐. 아마 좋은 소식이 있을 거야."
새 기간트라는 말에 카이트가 눈을 빛냈다.
사실 카이트는 거의 기간트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그가 모는 기간트는 발굴형 기간트 중에서도 상위 기종인 아우틈이었다.
발굴형 중 최상위 기체인 히엠스를 주겠다면 당연히 사양하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히엠스를 간절히 원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새로 기간트를 설계한다는 말에는 눈을 빛내지 않을 수 없었다.
"성능은 어느 정도가 될 것 같습니까?"
"글쎄. 최소한 베르보다는 낫지 않겠어?"
카이트의 입이 쩍 벌어졌다. 베르보다 낫다니. 베르는 무려 출력이 2.8이나 된다. 발굴형이 아닌 기간트의 경우 출력 2.3이 벽으로 알려져 있었다.
크란 제국 최강의 기체인 켈룸이 2.3의 출력을 가진다. 켈룸은 양산형이긴 하지만, 출력 2.3의 마나 코어를 만드는 것이 워낙 까다로워서 확실히 양산이라고 말하기가 힘든 기종이었다.
한데 2.8이라니. 아니, 베르보다 낫다고 했으니 어쩌면 그 위일지도 모른다. 대체 그런 기간트를 어떻게 만든단 말인가.
"세나가 만든 겁니까?"
카이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런 셈이지. 나도 곧 시간을 내서 도울 거야. 바이스도 아마 좀 도와야 할 것 같고."
카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세나의 나이를 생각하면 새 기간트를 설계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그녀가 뛰어난 천재라 하더라도 말이다.
카이트가 묘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세나의 능력만으로 될 리 없다. 또, 바이스가 힘을 보탠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모든 것은 제론 덕분이었다.
제론이 나섰기에 가능한 일이고, 제론이기에 이 영지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이렇게 보고 있으니 참으로 신비로웠다. 체른산 방어군에서 함께할 때부터 지금까지 가만 생각하면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불가능한 일을 연달아 이루면서 달려왔다.
"자, 나중에 다시 얘기하기로 하고 이젠 눈앞의 싸움에 집중해야지."
"알겠습니다."
카이트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200기에 달하는 기간트가 지축을 울리며 다가오는 광경은 엄청난 압박감을 주었다. 하지만 카이트 입장에서는 큰 감흥이 없었다.
체른산 방어군에 있을 때는 훨씬 많은 적을 상대로 싸운 적도 있었다. 물론 승리했다. 카이트는 이번 싸움도 반드시 승리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예비 기간트 부대는 얼마나 준비되어 있지?"
"일단 1차로 100기를 준비했습니다."
"그럼 2차도 있나?"
"예. 50기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카이트는 그렇게 대답하고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1차로 준비한 예비 부대는 어느 정도 전투가 가능합니다. 3기가 모여 합공하면 본대의 기간트 1기를 상대할 수 있습니다."
제론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정말로 훌륭한 실력이었다. 본대의 라이더는 최소 10년이 넘게 군부에서 구른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그런 베테랑을 고작 3기로 막을 수 있다면 엄청난 훈련을 쌓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2차 예비 부대는 말 그대로 기초 과정을 마친 라이더 중 실력이 뛰어난 순으로 뽑았습니다."
그 정도라면 전쟁에 나가면 박살이 나겠지만, 승리가 확정된 전투에 후발로 투입해 경험을 쌓게 하면 훨씬 빨리 발전할 가능성이 생긴다.
"본대로 한바탕 휘저은 다음 1차 예비 부대를 투입하면 되겠군."
"일단 작전은 그렇게 짰습니다. 한데 그렇게 하면 부서지는 기간트가 많아질 겁니다. 아무래도 경험이 부족한 놈들이 많으니까요."
"그래도 이렇게 안전하게 경험 쌓기 좋은 기회는 드물잖아. 진행하자고. 나중에 2차 예비 부대도 투입해."
카이트가 난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기간트의 수리에는 인력만 필요한 게 아니었다. 수많은 부품도 함께 필요했다. 그리고 기간트 부품은 일반적으로 상당히 비쌌다.
"돈 걱정은 딴 사람에게 맡겨라. 우리 영지 생각보다 부자니까 신경 쓸 것 없다."
"알겠습니다."
카이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표정에 너무 많이 드러난 모양이었다.
"자, 그럼 우리도 슬슬 준비해야지? 바이스 쪽은 어떤지 확인해 봐."
"예."
카이트가 대답하고는 즉시 통신을 열었다. 그리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는 제론에게 말했다.
"준비 끝났답니다."
"타이밍 좋군. 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론의 말에 카이트가 시선을 돌렸다. 멈춰서 위압감을 뿌려대던 200기의 기간트가 다시 진군을 시작했다.
"과연 바이스의 마법이 기간트에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요?"
카이트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마법은 통상적으로 기간트에는 통하지 않는 것이 정설이었다. 하지만 카이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군 시절 직접 겪은 게 있기 때문이었다.
바이스의 마법은 전황을 단숨에 바꿔 버릴 정도로 대단했다.
"돌격 준비."
"벌써 말입니까?"
아직 마법도 펼쳐지지 않았다. 무슨 마법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당장 돌격하는 건 타이밍상 좋지 않을 것 같았다. 자칫 아군도 마법에 휘말릴 수 있으니 말이다.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카이트는 즉시 명령을 하달했다. 제론이 쓸데없는 지시를 내릴 리가 없다고 판단했다.
"돌격 준비!"
카이트의 외침에 50기의 기간트가 일제히 달릴 준비를 했다. 적과의 거리는 아직 제법 됐다. 그리고 적은 열심히 진군 중이었다.
이대로 돌격하면 적에게 틀어박혀 고사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망설이지 않았다.
"돌격!"
제론의 명령이 곧장 카이트를 통해 기간트 부대에 전달되었다.
쿵쿵쿵쿵쿵!
기간트 부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일단 명령하면 따른다. 군대에서는 항상 그래 왔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을 수행할 수 없으니까.
두 부대의 거리가 급격히 가까워졌다. 그리고 간격이 적당해졌을 때, 바이스의 마법이 펼쳐졌다.
화아아아악!
강렬한 빛이 선을 그리며 대지를 치달렸다. 순식간에 바닥에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졌다. 그 위치는 정확히 진군하는 적 기간트 200기에 맞춰졌다.
쩌저저적!
바닥이 쩍쩍 갈라졌다. 그리고 갈라진 바닥에서 거대한 바위가 불쑥 불쑥 튀어 나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카이트가 눈을 부릅떴다.
"설마 스톤에그?"
나타난 바위는 몽땅 스톤에그였다. 그리고 스톤에그는 본능에 따라 돌거인으로 변해 달려들었다.
꽝! 꽝! 꽝! 꽈앙!
네이드 후작령 측 기간트는 전부 당황했다. 갑자기 나타난 돌거인이 그들의 발을 붙잡았다.
사실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돌거인이 비록 힘이 세고 파괴력이 뛰어나긴 하지만 기간트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기간트 1기가 돌거인 10마리를 상대하는 것도 가능했다. 게다가 지금 나타난 돌거인의 수는 고작 100마리 정도였다.
200기의 기간트가 100마리 돌거인을 상대하면서 피해를 입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상대는 돌거인만 있는 게 아니었다.
돌격하던 라이트닝 기사단이 정확히 그 순간 파고들었다.
꽈과과과과광!
그대로 돌격해 적 진형을 관통하고 지나가 버렸다.
50기의 기간트가 돌격한 흔적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더구나 베테랑 중의 베테랑으로 구성된 기간트 부대였다. 돌격하면서 정확히 적 기간트의 조종석을 꿰뚫어 버린 기간트도 있었다.
네이드 후작령 측 기간트 부대는 완전히 진형이 와해되었다. 이쯤 되면 아주 손쉬운 먹잇감에 불과했다.
멀리서 그 광경을 보던 제론이 기간트를 소환했다.
"슬슬 우리도 가야지?"
제론은 단숨에 기간트에 탑승해 앞으로 달려갔다.
아무리 돌격이 성공했다지만 적은 여전히 180기 정도가 남아 있었다. 비록 진형이 와해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50기로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벅찼다.
게다가 돌거인은 몽땅 부서져 버렸다. 이럴 때일수록 적에게 시간을 줘선 안 된다. 시간을 주면 진형을 정비할 것이고, 그럼 더 싸우기 힘들어진다.
쿵쿵쿵쿵쿵쿵!
붉은 실바가 빠르게 달려갔다. 어찌나 빠른지 발 구름 소리가 마치 북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테오스를 타던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움직임이 제법 훌륭했다.
붉은 실바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렸다. 그리고 강하게 발을 굴렀다.
꽈앙!
붉은 실바가 높이 떠올랐다. 그 광경을 적 기간트가 멍하니 고개를 든 채 바라봤다. 비현실적인 광경을 보고 있으니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놀란 것은 아군도 마찬가지였다. 라이트닝 기사단은 군부 출신이었다. 당연히 붉은 실바가 점프하는 모습은 헤아릴 수도 없이 봐 왔다. 하지만 이렇게 높이 점프한 것은 단연코 처음이었다. 마치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 같지 않은가.
꽈드득!
붉은 실바는 정확히 적 기간트의 머리를 발로 디뎠다. 머리가 찌그러지며 푹 가라앉았다. 어찌나 충격이 컸는지 가슴도 볼품없이 움푹 파였다.
그런 충격을 라이더가 버텨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그 기간트에 탄 라이더는 피를 토하며 절명했다.
붉은 실바는 기간트를 디딘 힘으로 다시 점프했다.
후웅!
바람이 붉은 실바를 따라갔다. 그렇게 높이 올라간 붉은 실바가 다시 떨어졌다.
꽈드득!
또 한 기의 머리가 어깨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처음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기간트를 디디고 점프했기에 땅을 디딘 것보다는 높이 뛸 수 없었다.
다시 떨어진 실바가 이번에는 적 기간트의 가슴을 발로 콱 찼다.
꽈광!
기간트가 볼썽사납게 나동그라졌다. 그리고 붉은 실바는 가볍게 떠올랐다가 바닥에 내려섰다. 균형을 조금도 잃지 않은 멋진 동작이었다.
붉은 실바는 쉬지 않았다. 다시 몸을 날렸다.
쿵쿵쿵! 꽈앙!
붉은 실바의 어깨가 적 기간트의 조종석을 파고들었다. 조종석이 일그러지며 라이더가 눌려 죽었다.
붉은 실바는 빠르고 효과적인 공격으로 적을 차근차근 해치웠다. 어찌나 재빠른지 정신을 차린 후작령 측 기간트가 우르르 몰려들었지만 아무도 잡지 못했다.
그리고 그렇게 붉은 실바에게 농락당하고 있을 때, 50기의 라이트닝 기사단이 다시 돌격했다.
꽈과과과과광!
라이트닝 기사단은 빠르게 돌격하면서도 결코 진형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돌파가 목적이 아니라 적당히 파고든 다음 적을 섬멸하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돌격 속도를 적당히 조절했다.
결과는 빠르게 나타났다. 200기나 되지만 제대로 된 진형을 짜지 못한 네이드 후작령 측 기간트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쓰러지는 수가 늘어났다.
반면 라이트닝 기사단의 기간트는 움직임에 큰 지장이 없는 파손 외에는 피해가 전무했다.
"산개!"
카이트가 외치자 라이트닝 기사단이 일제히 사방으로 흩어졌다. 아직도 적이 많은 상태라서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행동이었지만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실력을 믿었다. 또한 카이트의 판단을 신뢰했다.
꽝! 꽝! 꽝! 꽝!
사방으로 흩어진 라이트닝 기사단의 기간트는 싸움을 난전으로 유도하며 점점 서로에게서 멀어졌다.
이대로 가면 수적 우위에 밀려 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잠시지만 싸움을 멀리서 지켜보던 네이드 후작령의 수뇌부도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희망은 나타난 것과 거의 동시에 사라졌다.
쿵! 쿵! 쿵! 쿵!
갑자기 에어스트 백작령 쪽에서 거대한 발 구름 소리가 울렸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연했다.
무려 100기의 기간트가 대열을 맞춘 채 진군하고 있었다. 제법 훈련을 잘 받았는지 행군 속도도 상당히 빨랐다. 그들은 그대로 난전이 벌어진 싸움터를 뒤덮어 버렸다.
꽝! 꽝! 꽝! 꽝! 꽝!
단단한 진형을 갖춘 채 차근차근 전진해 적을 공격하는 에어스트 백작령의 기간트 부대는 그야말로 엄청난 위압감을 보여 줬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네이드 후작령 측 기간트를 무너뜨리는 붉은 실바의 존재는 그들에게는 악몽 그 자체였다.
100기의 기간트가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전장에 남은 적은 그리 많지 않았다. 네이드 후작령에서 동원한 200기의 기간트 중 제대로 서 있는 건 고작 30기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여기저기 뜯어지고 부서져 제대로 서 있는 게 용해 보이는 기간트가 절반 이상이었다.
그 와중에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50기의 기간트가 추가로 등장했다.
경험을 쌓기 위해 출격한 2차 예비 부대였다.
쿵! 쿵! 쿵! 쿵!
진형을 갖추려 애쓰긴 하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도 무려 50기나 되는 기간트였다. 질 리 없었다.
그들은 남은 적을 향해 빠르게 이동해 검을 휘둘렀다.
꽈과과광!
그렇게 전투가 막바지로 흘러갔다.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카이트가 담담하게 말하자, 제론이 피식 웃었다. 축하 받기에는 너무 싱거운 전투였다. 물론 영지전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앞으로도 이런 전투를 몇 번이나 겪어야 하리라.
"그나저나 우리 전력을 너무 많이 드러낸 거 아닙니까? 적도 그에 걸맞은 준비를 할 텐데 조금 걱정입니다."
카이트의 걱정은 당연했다. 이번이야 작전이 제대로 맞아떨어졌고 적이 아군의 병력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속절없이 무너졌지만, 다음에는 이렇게 쉽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때까지 새로운 전력을 준비해야지."
"예? 그게 가능합니까?"
"시간이 많잖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네이드 후작령은 이번 전투에서 200기의 기간트를 고스란히 잃어버렸다. 당연히 다시 싸우려면 또 기간트를 모아야 한다.
200기의 기간트를 물리친 에어스트 백작령을 압도할 만한 전력을 모아야 하니 골치가 아플 것이다.
"아예 당장 네이드 후작령을 밀어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럼 정비가 끝나면 바로 진격할까요?"
카이트는 차라리 그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굳이 피해를 입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 현재 네이드 후작령에 남은 기간트는 고작해야 수십 기에 불과했다.
그쯤이야 라이트닝 기사단만 가도 충분히 압도할 수 있었다.
"기다려. 아직 때가 아니야."
제론의 말에 카이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때가 아니라니. 대체 이보다 더 좋은 타이밍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 카이트를 보며 제론이 씨익 웃었다.
"기다리면 정말로 괜찮은 기회가 올 거야."
카이트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제론이 저렇게 자신감을 보일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었다.
제론은 카이트가 혼자 생각하게 두고는 자리를 떴다.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는 집무실로 향했다. 이제부터는 인내를 갖고 기다려야 한다.
☆ ☆ ☆
네이드 후작은 반쪽이 된 얼굴로 힘없이 앉아 있었다.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200기나……."
200기나 무너진 것보다 에어스트 백작령에 200기나 되는 기간트가 있다는 사실이 더 믿기 어려웠다. 대체 어디서 그 많은 기간트를 구했단 말인가.
"반역으로 몰아붙여?"
네이드 후작은 이제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그보다 더 많은 병력을 모아야 하는데, 그런 대병력을 언제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지금이라도 에어스트 백작이 병력을 끌고 진군하면 후작령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막을 병력이 없었으니까.
그렇게 걱정에 걱정을 거듭하는 네이드 후작의 집무실에 두 사람이 방문했다.
2왕자와 파인트였다.
"어서 오십시오."
네이드 후작은 일단 인사를 했다. 하지만 이내 힘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사실 지금은 대화를 할 기분도 아니었다.
"후작님, 상황이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파인트의 말에 네이드 후작이 자포자기한 눈으로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지금 이 상황보다 더 곤란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문터 후작이 움직였습니다."
"문터 후작? 그게 뭐 어쨌단 말이오?"
"문터 후작이 우리의 뒤를 치려고 세력을 규합했습니다."
그 말에 네이드 후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문터 후작이 왜 자신의 뒤를 친단 말인가.
"그가 왜 우리 뒤를 친단 말이오?"
파인트가 난감한 표정으로 2왕자를 바라봤다. 2왕자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앞으로 나섰다.
"그들이 슈린 공작가를 노리고 있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말을 하려던 네이드 후작은 목구멍까지 나온 말을 다시 꿀꺽 삼켰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슈린 공작가에서는 네이드 후작령을 위해 수많은 기간트를 지원해 주었다.
"그래서 제게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네이드 후작이 2왕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문터 후작의 뒤에 형님이 계시다는 걸 확인했네."
"헉!"
네이드 후작은 헛숨을 삼켰다. 정말로 놀랐다. 설마 이 일에 1왕자가 개입했을 줄은 몰랐다. 1왕자가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갔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별다른 행동도 하지 않고 돌아왔기에 별문제가 없을 줄 알았다. 한데 뒤에서 문터 후작을 움직였다니.
'이러다가 내전으로 발전할 수도 있겠어.'
네이드 후작은 지금 자신이 인생의 기로에 서 있다는 것을 대번에 깨달았다. 그의 머리가 고속으로 회전했다.
'2왕자, 그리고 슈린 공작가!'
네이드 후작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충분히 해 볼 만하지 않은가. 여기에 자신의 재력이 더해진다면 문터 후작가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면 제가 어쩌면 좋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아직 영지전이 끝난 것도 아닙니다."
네이드 후작의 말에 2왕자가 파인트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잠시 머뭇거리던 파인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쯤에서 영지전을 마무리하면 어떻겠습니까?"
"뭣이?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우리 측 기간트가 얼마나 저쪽으로 넘어갔는지 모르시오?"
"그러니 협상을 하자는 것 아닙니까. 협상단을 보내 저쪽에서 수거한 기간트를 돌려받는 조건으로 영지전을 끝내자고 말입니다."
네이드 후작이 어이없는 눈으로 파인트를 바라봤다. 이 애송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는 있단 말인가. 에어스트 백작령이 이 상황에서 그따위 협상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전력을 다시 채우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전력을 영지전에 쏟는 건 효율이 떨어지지 않겠습니까? 저들의 힘도 예상보다 대단하고 말입니다."
파인트와 2왕자는 에어스트 백작령이 부담되기 시작했다. 그들의 힘이 예상보다 훨씬 대단했다. 이대로라면 양쪽으로 압박을 받아 지리멸렬할 수도 있었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어쩌시겠습니까? 결정은 후작님께서 하십시오."
네이드 후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과연 저들이 협상에 응하겠소? 지난 전투는 완벽한 우리의 패배였소. 반대로 말하면 저들의 대승이었지. 한데 그런 승리 후에 수거한 기간트를 몽땅 돌려주는 것도 모자라 이길 것 같은 영지전을 포기한다고? 정말로 저들이 그 협상에 응할 것 같소?"
"물론 그냥은 안 넘어가겠지요. 그러니 당근을 제시하는 겁니다."
"당근?"
"우리 측으로 끌어들여 1왕자 전하와의 싸움에 한 팔 거들게 하는 것이지요."
파인트의 말에 네이드 후작이 입을 쩍 벌렸다. 어이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대체 지금 뭘 하자는 건가. 저들이 그런 협상에 응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서 승리를 통해 얻는 영지의 절반을 넘겨주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제야 네이드 후작도 입을 꾹 다물었다. 확실히 그 정도 조건이라면 충분히 협상에 응할 만하다. 또 힘도 빌려줄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자신이라면 그런 조건으로 내민 손을 덥석 잡을 것이 분명했다.
"시간이 없습니다. 결정을 내리시지요."
"하겠소."
네이드 후작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자신은 2왕자 측의 중심에 서게 된다. 그것은 향후 이 왕국을 2왕자가 차지했을 때, 거대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는 뜻이었다.
'그때가 되면 이깟 영지 아무것도 아니지. 그냥 버릴 수도 있어.'
네이드 후작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 에어스트 백작령의 선택은 확고히 정해졌다. 누구라도 그런 조건을 거절할 수는 없을 테니까.
"일단 난 최대한 세력을 모아 보겠소."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2왕자와 파인트가 그렇게 말하고 나가자, 네이드 후작은 차분히 생각에 잠겼다.
사태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었다. 내전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벨룸 왕국과의 전쟁도 승리로 마무리되었으니 당분간은 외침을 염려할 필요도 없었다.
아니, 벨룸 왕국의 상황도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그들도 거의 내전에 준하는 홍역을 치르고 있었다.
그러니 어쩌면 지금이 가장 좋은 상황일지도 모른다.
생각을 정리한 네이드 후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쨌든 달리는 말에 올라탔다. 이젠 자신도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야만 했다.
"일단 에어스트 백작령에 사람을 보내는 것부터 시작해야지."
2왕자와 파인트가 그 일을 처리하게 둘 수는 없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부드럽게 처리해야만 한다.
네이드 후작이 서둘러 집무실에서 나갔다. 이제부터는 정말 바빠질 것이다.
제론의 집무실에 영지 주요 인물이 모두 모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들 어떻게 생각해?"
아무도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설마 네이드 후작이 그런 제안을 해 올 줄은 몰랐기에 쉽게 판단할 수가 없었다.
"일단 내전에 참여하는 건 반대입니다. 괜히 그들의 싸움에 끼어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바이스의 말에 제론은 물론이고 세나와 카이트도 고개를 끄덕였다.
"영지전은 이쯤에서 멈추는 게 낫겠지?"
제론의 물음에 다들 잠시 고민에 빠졌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더 싸워 봐야 좋을 게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제론이 씨익 웃었다.
"지금 우리 왕국의 상황을 보면 그리 간단치가 않아."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바인이랑 연락 안 해 봤어?"
"주기적으로 하고는 있습니다만……."
"우리 영지에 관계된 정보만 얻지 말고 더 큰 그림을 그려 봐. 바인은 충분히 그 정도 능력은 되는 사람이니까."
제론의 말에 바이스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카이트와 세나는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영지에 자신이 모르는 비밀스러운 조직이 있는 듯하지 않은가.
하지만 굳이 거기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제론이 가르쳐 줄 거라고 믿었다.
"지금 왕국 세력 구도가 셋으로 나뉘고 있어."
제론의 말에 다들 눈을 빛내며 집중했다.
"1왕자와 2왕자가 각각 세력을 모으고 있고, 그 둘에 속하지 않은 자들은 중립이라는 명목하에 슈돌츠 후작을 중심으로 뭉치는 중이야."
"자칫 왕국이 셋으로 분열될 수도 있겠군요."
"이대로라면 그렇지."
"하지만 그 셋 중 누구도 그걸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셋 모두 왕권을 노리고 있으니 조각난 왕국을 다스리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습니다."
바이스의 말에 제론이 관심을 가지고 그를 쳐다봤다. 바이스는 자신에게 모이는 시선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말을 이었다.
"일단 1왕자는 우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지금 당장은 그렇습니다."
그 말에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에게 그런 취급을 받았는데도 문제 삼지 않고 받아들이는 건 불가능했다. 1왕자가 그럴 사람도 아니었고 말이다.
"그리고 2왕자는 말이 2왕자지 사실은 슈린 공작가의 세력에 가깝습니다."
슈린 공작가는 제론의 원수였다. 당연히 2왕자가 어떤 상황이든 그쪽에 가는 건 말이 안 된다.
"마지막 남은 것이 슈돌츠 후작인데, 그와 손을 잡기에는 거리가 너무 멉니다."
슈돌츠 후작령은 에어스트 백작령의 정반대쪽에 있었다. 레늄 왕국을 길게 가로질러야 도착하니, 거리상 손을 잡기가 힘들었다.
물론 그래도 셋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슈돌츠 후작이었다. 그나마 제대로 된 생각이 박힌 귀족 중 하나였으니까.
바이스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좌중을 한 번 둘러봤다.
"그럼 마지막으로 남는 건 딱 하나입니다."
"이대로 가만히 있자 이거로군."
바이스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그것 역시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에어스트 백작령은 네이드 후작령을 얻지 못하면 나중에 고립될 수도 있었다. 백작령으로 오려면 네이드 후작령을 반드시 지나쳐야 했다.
"일단 네이드 후작령을 얻어야겠어. 아니면 인구를 늘리기가 너무 힘들어. 안 그런가?"
제론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에어스트 백작령은 한창 성장 중이었다. 그리고 그 성장을 지속시키려면 식물에 꾸준히 물을 주듯 인구를 꾸준히 유입시켜야만 했다.
한데 네이드 후작령이 틀어 막히면 인구 유입이 거의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중립을 유지하는 게 좋겠어."
"포획한 기간트 200기는 어떻게 합니까?"
"당연히 돌려주면 안 되지."
제론의 말에 싸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어쩌면 2왕자 측은 그걸 빌미로 또 공격을 시작할지 모른다. 물론 안 그럴 확률이 훨씬 높았지만 말이다.
"괜찮겠습니까?"
"지금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나 있겠어? 그거 싹 고쳐서 우리가 쓰면 전력이 두 배로 늘어날 텐데 뭐가 걱정이야?"
세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결국 새로 포획한 200기의 기간트를 몽땅 수리해야 하는 건 자신이었다. 그 일을 생각하니 앞이 깜깜해졌다.
"그리고 내전이 끝나기 전에 새로운 기간트 생산에 들어가면 아무도 우리를 건드릴 수 없다."
"새로운 기간트?"
바이스가 놀란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세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정말입니까? 새로운 기간트를 만든다는 것이?"
"아마 성능이 제법 뛰어날 테니 기대해도 좋을 거야."
제론은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안으로 쏙 들어가서 착실하게 내실을 다지자고."
다들 입을 꾹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 만일 제론의 말대로 새로운 기간트를 생산하고 내실을 다진다면 외부의 위협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사이 항구를 완성해서 바다를 통한 교역을 하면 다른 자잘한 문제까지 싹 해결할 수 있다.
"하면 네이드 후작에게는 어떤 답을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제론이 씨익 웃었다.
"그냥 넘어가긴 좀 그렇지 않아? 적절한 보상을 받고 끝내자고."
세 사람의 입이 쩍 벌어졌다. 상대는 포획한 기간트를 돌려주는 조건으로 영지전을 끝내자고 했다. 한데 오히려 영지전을 끝내려면 보상을 하라고 하다니!
"100만 골드 정도로 끝내려고 하는데 어때? 너무 적은가?"
"예?"
"배, 백만 골드요?"
100만 골드라니. 네이드 후작령이 아무리 부자라도 100만 골드는 결코 쉽게 만들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영주님, 나중에 일이 복잡해질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당장은 줄지도 모른다. 1왕자가 언제 뒤를 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에어스트 백작령을 뒤에 두고 싸울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내전이 끝나고 나면 당장 조치를 취할 것이다. 가장 먼저 목표가 될 영지로 확정되는 셈이었다.
다들 걱정했지만 제론은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내전이 끝나면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든 제재가 들어오게 되어 있어. 안 그럴 것 같아? 우리가 가진 식량을 어떻게든 얻어 내려고 할 걸?"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세 사람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쳤다.
"당장 네이드 후작령부터 봉쇄를 할 거야. 우리를 여기 가둬 두고 차근차근 요리하겠지."
물론 쉽게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쯤 되면 에어스트 백작령의 힘이 얼마나 커졌을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다.
"그러니 미리 실리를 취하자고. 100만 골드면 제법 도움이 되지 않겠어? 앞으로 돈 들어갈 일이 수두룩할 텐데."
그거야 확실히 그렇다. 하지만 돈이 아무리 많으면 뭐 하는가. 외부에서 뭔가를 구입해 안으로 들여오려면 네이드 후작령을 거쳐야 하는데 말이다.
그들도 생각이 있다면 네이드 후작령을 쉽게 통과하게 두지 않을 것이다.
"뭘 걱정하는지 다 아는데, 걱정할 필요 없다. 물류에 대한 건 일단 내가 싹 해결할 테니까."
바이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정말입니까?"
"내가 언제 없는 말 하는 거 봤어?"
"그건 아닙니다만……."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장담을 하니 얼른 와 닿지가 않았다. 대체 무슨 수로 물류를 해결한단 말인가.
에어스트 백작령에 식량은 많지만 나머지 물품은 현저히 모자랐다. 상단이 이곳으로 오지 않으면 그걸 해결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이참에 우리도 상단 하나 만들지. 적당한 사람을 구해 봐야겠어."
바이스는 모든 일을 저렇게 간단히 생각하고 말하는 제론의 모습에 또 한 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그만큼 믿음직스러웠다. 지금까지 제론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단 하나도 없었다. 아마 이번에도 분명히 해결해 줄 것이다. 누구보다도 멋지게.
꽝!
네이드 후작이 탁자를 내리쳤다. 탁자에 금이 쩍쩍 갔다. 하지만 후작은 그 한 번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꽝! 꽝! 꽝!
콰직!
결국 탁자가 산산조각 났다.
네이드 후작은 분을 못 참고 씩씩거렸다.
"뭐라고? 100만 골드?"
너무 화가 치밀어서 당장이라도 병력을 끌고 쳐들어가고 싶었다. 한데 그럴 수가 없으니 더 울화가 치밀었다.
네이드 후작은 몇 시간이나 분통을 터트렸다. 그렇게 한바탕하고 나니 조금 속이 풀렸다. 그렇게 화가 조금 가라앉았을 때, 2왕자와 파인트가 들어왔다.
"소식 들었습니다. 그놈들이 100만 골드를 요구했다면서요?"
"그렇소."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지금 고민 중이오. 마음 같아서야 확 쓸어버리고 싶지만……."
네이드 후작의 말에 2왕자가 나섰다.
"일단 급한 불부터 끕시다. 그쪽에 신경을 쓰느니 돈으로 막은 다음 더 중요한 것에 힘을 쓰는 게 낫지 않겠소?"
네이드 후작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말이 틀리지 않다는 걸 알지만 터져 나갈 것 같은 속은 어쩌란 말인가.
"시간은 얼마든지 있소. 우리가 대업을 마무리한 다음에는 그깟 백작령 따위 얼마든지 짓밟을 수 있지 않겠소?"
그 말에 네이드 후작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하지만 여전히 화는 남아 있었다.
"화를 풀라는 말은 하지 않겠소. 그 화를 그대로 가지고 있으시오. 결국 에어스트 백작령에 몽땅 쏟을 수 있을 테니까.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어 주겠소."
그제야 네이드 후작이 한숨을 내쉬며 2왕자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왕자 전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단, 나중에 에어스트 백작령의 처분은 제게 맡겨 주십시오. 그놈들은 제가 하나하나 직접 처리하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하. 여부가 있겠소."
2왕자는 호탕하게 웃었다. 일이 잘 풀렸으니 이제 남은 건 대업을 이루는 일뿐이었다. 그러니 어쩌 웃음이 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나저나 슈린 공작가에서 새로 만들고 있다는 기간트는 어찌 되었소?"
"이제 양산에 들어갔습니다. 이번 전쟁에 큰 힘이 될 것이라 자신합니다."
2왕자의 질문과 파인트의 답에 네이드 후작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새로 만드는 기간트라니요?"
"하하. 별것 아닙니다. 출력 1.9의 기간트의 양산을 시작했습니다. 이름은 라쿠스입니다."
"라쿠스……."
네이드 후작의 표정이 밝아졌다. 출력 1.9의 기간트를 양산할 수 있다니, 그게 사실이라면 대업은 이룬 거나 다름없었다.
줄을 잘 섰다는 생각에 네이드 후작의 기분이 크게 나아졌다. 에어스트 백작령에 대한 생각은 이제 더 이상 할 필요도 없었다.
'철저히 짓밟아 주겠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치욕을 다 안겨 주지.'
네이드 후작의 입가가 잔혹하게 비틀렸다.
2왕자 진영은 에어스트 백작령에 대한 입장을 그런 식으로 정리했다.
덕분에 에어스트 백작령은 100만 골드라는 돈을 받고, 내정에 힘쓸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네이드 후작령을 경유해서 들어오는 상단은 하나도 없었다. 네이드 후작이 통행세를 올렸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외부로 나가는 것도 쉽지 않아졌다.
그렇게 에어스트 백작령이 고립되었다.
☆ ☆ ☆
내전이 발발했다. 1왕자와 2왕자 사이의 골은 상당히 깊었다. 그걸 알기에 국왕도 내전을 말리지 않았다. 아니, 이미 국왕이 손을 댈 수 있는 상황을 넘어가 버렸다.
수많은 유력 가문이 두 진영에 연달아 붙었고, 점점 양측의 세력이 커져 갔다.
그리고 중립을 지키는 슈돌츠 후작의 세력은 단단히 문을 걸어 잠갔다. 그들은 대부분 왕국 북서부 지역에 모여 있었는데, 자신들끼리 교역을 하며 내전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수도는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다. 수도에는 여전히 국왕이 있었다. 수도를 차지하겠다고 흑심을 드러낸 순간, 명분에서 밀릴 공산이 컸다.
레늄 왕국의 내전 상황을 느긋하게 앉아 구경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커다란 벽에 정교한 상황판을 만들어 놓고는 손으로 턱을 괸 채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주 팽팽한데?"
"남작님께서 미리 공작을 해 두셨지 않습니까."
수하의 말에 깁스 남작은 살짝 웃었다.
"그야 그렇지. 그래도 이렇게 정확히 둘로 갈릴 줄은 몰랐어. 이거 내전이 제법 길어지겠는데?"
"저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럼 당분간 레늄 왕국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건가?"
"그렇지 않겠습니까? 내전이 길어지면 국력도 현저히 낮아질 테니까요."
깁스 남작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찜찜한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그나저나 에어스트 영지가 마음에 걸리는군. 영지전도 관두고 확 움츠렸단 말이지."
"그들로서도 어쩔 수 없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수긍이야 가지만……."
에어스트 백작령은 지리적 위치를 고려하면 2왕자와 손을 잡는 게 가장 쉬웠다. 그런데 2왕자 진영에는 슈린 공작가가 있었다.
"원수의 손을 잡기가 쉽지 않겠지. 하지만 이건 그놈에게도 분명히 기회일 텐데 왜 가만히 있는 거지? 그 대단한 전력을 가지고서 말이야."
무려 200기의 기간트가 확인되었다. 그 정도면 웬만한 후작령이나 공작령도 꼼짝 못 하고 당할 정도로 대단한 전력이었다.
한데 그런 힘을 가지고도 몸을 움츠리고 있다는 건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뜻이었다. 아니면 두렵거나.
"어쨌든 신경 쓰실 필요 있겠습니까? 그래봐야 일개 백작령에 불과합니다. 왕국의 일에 휩쓸리면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질 규모입니다."
깁스 남작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는 레늄 왕국 말고도 신경 쓸 것이 많았다.
"좋아, 그럼 여길 정리해라. 이제 벨룸 왕국으로 가서 공작을 마무리한 다음 체스터 공국으로 간다."
"체스터 공국 말입니까?"
"슬쩍 힘을 실어 줘야지. 그래야 내전에 빠진 두 왕국을 보며 욕심이라도 한번 부려 볼 것 아니겠느냐."
깁스 남작의 말에 사내가 즉시 고개를 숙였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수하가 밖으로 나가자 깁스 남작은 다시 벽의 상황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은 내내 레늄 왕국의 동남쪽 끝에 위치한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에어스트 백작에 붉은 학살자라…… 뭐, 변수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래봐야 일개 왕국의 백작에 불과하지."
깁스 남작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에어스트 백작령을 보고는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마치 미련을 털어 버리려는 듯이.
"자, 그럼 다음 일을 진행하러 가 볼까?"
깁스 남작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걸어서 밖으로 나갔다.
방에 남은 상황판에 불이 확 붙었다. 그 불길은 이내 방을 몽땅 태운 것도 모자라 건물까지 꿀꺽 삼켜 버렸다.
그렇게 모든 것이 잿더미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