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화 (61/217)

Chapter 3 개전

제론은 유적에서 나오자마자 준비를 해서 네이드 후작령으로 향했다. 바이스나 카이트가 알면 당장 뜯어말릴 것이 분명하기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단출하게 혼자서 말을 타고 이동한 제론은 네이드 후작령과 에어스트 백작령의 경계에 도착했다.

그곳은 삼엄한 감시망이 펼쳐져 있었다. 당연히 네이드 후작령 측에서 만든 감시망이었다. 에어스트 백작령 쪽은 그다지 경계가 심하지 않았다. 평소와 전혀 다름이 없었다.

제론은 일단 에어스트 영지의 경계병에게 다가갔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병사인 만큼 제론의 얼굴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는 제론을 보자마자 큰 소리로 예를 취했다.

"백작님을 뵙습니다!"

제론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준 다음 다가가 물었다.

"동태는 좀 어떤가?"

"아직 별다른 일은 없습니다. 다만 조금 전부터 병사의 움직임이 약간 달라졌습니다."

"움직임이 달라져?"

"병력이 이동하는 걸로 보입니다."

제론은 병력 이동이라는 말에 네이드 후작령 쪽을 쳐다봤다. 과연 병사들이 바삐 움직이는 게 보였다.

슬슬 전쟁이 시작될 조짐이 보였다. 허가가 떨어지는 즉시 진격할 속셈인 듯했다.

허가가 떨어지면 곧장 에어스트 백작령으로도 통보가 가니 따로 선전포고를 할 의무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관례는 형식적이나마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었다.

"깨끗하게 싸울 생각이 없다는 거로군."

아직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럴 공산이 컸다. 그렇다면 제론도 그에 걸맞은 준비를 해야만 한다.

그전에 네이드 후작을 꼭 한번 만나 보고 싶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들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뒤에 슈린 공작가가 있는지, 혹시 그들이 뒤를 찔러서 영지전으로 내몰린 건 아닌지 확인하고자 했다.

"네이드 후작령에 다녀올 테니 그렇게 알고 있도록."

제론은 그 말을 남기고 걸어갔다. 병사가 당황했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어디에서든 자기 몸 하나는 뺄 자신이 있었다. 설사 수백 기의 기간트 사이에 떨어지더라도 말이다.

그 당당함에 멍하니 제론의 등을 바라보던 병사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우왕좌왕하며 정신없이 움직이다가 영주성에 소식을 보냈다.

제론은 그렇게 될 거라는 사실을 미리 예상했다. 아마 영지가 발칵 뒤집힐 것이다.

그리고 전쟁 준비를 조금 더 서두를 것이다.

어느새 제론이 네이드 후작령 진영으로 들어섰다. 경계병이 긴장한 눈으로 제론을 향해 창을 겨눴다.

"난 에어스트 백작이다. 네이드 후작님을 뵈러 왔으니 안내해라."

제론의 말에 병사는 물론이고 후다닥 달려온 기사들마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언제 영지전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 적 영지의 영주가 찾아온다고 말하면 대체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제론의 당당함이 마음에 걸린 기사들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결국 수석 기사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에어스트 백작님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실 수 있습니까?"

제론이 팔을 들어 올려 팔찌를 보여 줬다. 에어스트 백작가의 상징이자 인장이었다. 물론 기사에게 그걸 알아볼 안목이 없다면 아무 소용없는 물건이기도 했다.

그것을 본 기사들이 눈짓을 통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상대는 혼자였다. 혼자서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따라오십시오. 제가 모시겠습니다."

기사 한 명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나머지 기사 중 하나가 황급히 막사로 달려갔다. 후작성에 연락을 해서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제론은 느긋하게 기사의 뒤를 따랐다.

여기서 후작성까지는 생각보다 멀지 않았다. 네이드 후작령 자체가 영지에서 나는 곡물이나 특산물보다는 지리적 특성을 이용해 돈을 버는 영지였기에 넓이가 그리 넓지 않았다.

기사는 마차로 제론을 안내했다. 제론은 전혀 망설이지 않고 마차에 올라탔다. 그 담대한 배포에 기사는 혀를 내둘렀다.

만일 딴 맘을 먹었다면 마차를 이상한 곳으로 끌고 가서 해코지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적 영주라면 더더욱 그런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도 제론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할 테면 해 보라는 듯 당당했다. 그러니 오히려 쓸데없는 짓을 할 마음이 싹 사라졌다.

제론을 태운 마차가 빠르게 달렸다. 소식을 받은 네이드 후작성이 한바탕 뒤집어진 상태였다. 네이드 후작을 비롯한 가신들이 최대한 서두르라고 압박까지 했다.

제론은 마차에 앉아 창을 통해 네이드 후작령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역시 유동 인구가 많은 영지답군.'

네이드 후작성으로 가는 길은 잘 닦여 있었다. 마차 두 대가 나란히 오갈 수 있을 정도로 넓었고, 사람이 다니는 길은 따로 있었다.

수많은 마차와 사람이 정신없이 다니는 모습을 보니 에어스트 백작령과 참으로 비교가 되었다.

하지만 제론은 실망하거나 부러워하지 않았다. 결국은 에어스트 백작령은 이보다 훨씬 발전할 것이다. 아직은 기반을 다지는 단계일 뿐이었다.

'조만간 영지의 인구가 이보다 훨씬 많아질 것이다.'

네이드 후작령과의 영지전이 마무리되면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가는 길이 더 크게 열릴 것이다. 네이드 후작령을 차지하면 그쯤이야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었다.

일단 바인이 추진하는 빈민 이동 사업이 탄력을 받게 될 것이다. 네이드 후작령을 통과하는 일이 훨씬 수월해질 테니 말이다.

네이드 후작령은 통행세를 통해 부를 축적한다. 어마어마한 수의 빈민을 이동시켜야 하는 에어스트 백작령의 입장에서 보면 통행세만 해도 만만치 않은 액수였다.

네이드 후작령을 제론이 차지하게 되면 통행세 걱정 없이 빈민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또한 정책적으로 에어스트 백작령 쪽으로 가는 길의 통행세를 낮추거나 없앤다면 수많은 상인의 관심을 끌게 될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유동 인구의 증가로 이어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정착 인구 역시 차츰 늘어나는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다.

제론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마차는 네이드 후작성 안으로 들어갔다. 후작성 역시 상당한 규모를 자랑했다. 물론 에어스트 백작성보다야 훨씬 못했지만 말이다.

이윽고 마차가 멈췄다. 문이 열리자 제론이 마차 밖으로 나갔다.

기사단 하나가 마차를 포위하듯 둘러싸고 있었다. 제론은 그들을 슥 훑어봤다. 자연스럽게 몸으로 마나를 흘리는 자가 30명의 기사 중 10명이나 있었다.

물론 제론은 아무런 감흥도 의미도 없었다. 사실 에어스트 백작령의 기사는 이들보다 훨씬 강하다.

군부 출신이라서 검술이 살짝 떨어졌는데, 제론이 전해 준 라이트닝 소드를 익히면서 빠르게 실력이 늘어 지금은 대부분 익스퍼트가 되었다. 물론 현실을 기준으로 한다면 말이다.

만일 에어스트 백작령이 안정을 찾아 시간을 두고 치열하게 훈련을 하면 결국 다들 소드 마스터가 될 것이다. 그 어떤 영지나 왕국에서도 기사단 전원이 소드 마스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에어스트 백작령의 기사단은 분명히 그렇게 될 것이다.

"내게 볼일이 있나?"

제론이 기사단장을 쳐다보며 물었다. 모두 복장이 똑같았기에 단번에 기사단장을 찍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제론은 단번에 그렇게 했다. 그가 가장 강했다.

"후작님께 안내해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기사단장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단 성안에 있는 응접실로 데려가야 했다. 응접실은 성의 중심에 위치한다. 무슨 일이 있을 때 상대를 억류하기 가장 좋은 위치였다.

"그럼 안내하도록."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옮겼다. 기사들이 우르르 움직여 호위하는 척 포위망을 구성해 따라갔다. 그리고 기사단장은 가장 앞에서 그들을 이끌었다.

"호오."

기사단에 포위된 채로 걸어가던 제론은 눈을 빛냈다. 포위망을 이룬 형태가 참으로 특이했다. 아니, 형태가 특이한 게 아니라 포위망으로부터 특별한 힘이 느껴졌다.

익스퍼트에 오른 기사를 중심으로 이뤄진 진형이었다. 그들은 특수한 방법으로 마나를 계속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흘러나온 마나가 뒤섞이며 묘한 작용을 일으켰다.

이건 기사의 마나를 이용해 마법진을 만드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마법진의 중심에 제론이 있었다.

기사들은 제론의 상대적 위치가 변하지 않도록 최대한 애썼다.

'마나를 억제하는 효과가 있군.'

이 진형에 갇히면 마나의 유동이 극도로 느려진다. 물론 그건 제론이 보통 기사였을 때 해당하는 얘기였다. 제론은 소드 마스터였다. 그것도 초고대 문명을 기준으로 하는 소드 마스터였다.

초고대 문명에서는 소드 마스터쯤 되면 기간트와 싸우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다. 한데 고작 이런 진형 하나 못 깨겠는가.

실제로 이 진형은 제론의 마나를 거의 억압하지 못했다. 제론의 마나에는 소드 마스터의 의념이 녹아들어 있었다. 함부로 외부의 힘이 다룰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제론이 순순히 따라가니 기사들의 긴장이 살짝 풀렸다. 별다른 어려움 없이 후작에게 데려갈 수 있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성의 응접실에 도착한 제론은 기사단장의 안내에 따라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긴장감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모습에 기사단 전원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담대하다 하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제론은 기사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등을 기댄 채 눈까지 감고 편안히 휴식을 취했다. 제대로 쉬어 둬야 나중에 급히 움직일 때 힘을 낼 수 있을 테니까.

기사단장의 눈짓에 기사들이 조용히 움직여 이동할 때와 똑같은 진형을 갖췄다. 마나의 묘한 흐름이 제론의 몸에 있는 마나에 간섭을 시작했다. 물론 아무 소용없었다.

"후작님은 언제 오시나?"

"이제 곧 오실 겁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기사단장은 그렇게 대답했지만 후작이 언제 올지 장담할 수 없었다. 아마 후작은 에어스트 백작을 초조하게 만들고 흥분시키기 위해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올 것이다.

사실 그건 제론도 익히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예 눈을 감은 채 마법 수련에 빠져들었다.

현재 제론의 심장에는 8개의 마나링이 맴돌고 있었다. 그중 8번째 마나링은 기연을 통해 얻은 것이었기에 확실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했다.

8번째 마나링까지 완벽하게 쓰기 위해 지속적으로 수련을 할 필요가 있었다. 깨달음 없이 얻은 걸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깨달음을 얻을 가장 좋은 방법은 꾸준히 노력을 해서 8번째 마나링을 효과적으로 쓰도록 훈련하는 것이었다.

훈련량을 통해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깨달음이 따라오게 되어 있었다.

어차피 깨달음을 통해 마나링을 만들었어도 그걸 쓰려면 충분한 연습이 필요했다. 그때 할 노력을 미리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편했다.

제론은 8개의 마나링을 동시에 가속시켰다. 그리고 주변 마나를 움직여 마나를 컨트롤하기 시작했다.

특별히 마법을 쓰는 건 아니었다. 그저 마나를 원하는 방식으로 움직이고 고정시킬 수 있기만 하면 된다. 물론 쉽지 않았다.

제론의 심장에서 8가닥의 마나가 실처럼 뽑혀 나왔다. 그 마나는 제론을 맴돌며 주변 마나를 끌어들이고 마음껏 조작했다.

제론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마법 수련에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8개의 마나링을 한꺼번에 조작하는 게 너무나 어려웠지만 하면 할수록 조금씩 감각이 생기면서 익숙해졌다.

일단 조금 익숙해지고 나니 너무나 재미있었다. 그동안 할 수 없었던 게 하나씩 가능해지니 새로운 것을 익힌다는 즐거움에 가슴이 뛰었다.

제론이 마법 수련을 하는 동안 그 옆에서 지켜보던 기사들은 질린 표정으로 혀를 내둘렀다.

앉은 자세를 보면 자는지 아닌지 알 수 있다. 한데 그들이 보기에 제론은 그냥 눈만 감았을 뿐이지 결코 잠들지 않았다.

벌써 몇 시간째 기다리는지 모른다. 한데 그 긴 시간 동안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아니,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정말 대단한 인내심이었다.

'아마 내가 저 자리에 앉아 있었다면 벌써 10번은 뛰쳐나갔을 것이다.'

모든 기사가 같은 생각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긴장이 더 풀려 이제는 마나를 압박하는 진형도 조금씩 흐트러지고 있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러갔다.

날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응접실 문이 열렸다. 그때는 이미 대부분의 긴장감이 사라진 상태였다. 진형도 제법 많이 흐트러져서 더 이상 마나를 압박하지도 못했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제론은 여전히 소파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다른 데로 관심을 돌릴 생각이 아예 없을 정도로 마법 수련에 푹 빠진 것이다.

그 모습을 본 네이드 후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 네이드 후작은 제론을 계속 지켜봤다. 응접실 위층에 아래를 확실히 살필 수 있도록 몇 가지 장치를 만들어 두었다.

그래서 나갈 타이밍을 계속 재고 있었다. 제론이 흥분했을 때 나가서 정신을 쏙 빼 놓을 생각이었다.

한데 실패했다. 설마 제론이 이렇게 오랫동안 평정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이제는 네이드 후작이 더 기다릴 수 없었다.

상대를 흥분하게 하려다가 자신이 흥분해 버린 것이다.

그렇게 흥분한 상태로 들어왔는데, 제론이 자신을 본 척도 하지 않고 눈을 감고 있으니 더 화가 났다.

"크흠!"

네이드 후작은 헛기침을 해서 주위를 환기시켰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일제히 후작에게 예를 취했다. 그래도 제론은 눈을 뜨지 않았다. 마법 수련이 한창 절정에 달해 있었기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네이드 후작의 눈썹이 세차게 꿈틀거렸다.

보다 못한 기사단장이 나섰다. 그는 제론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도 몰랐다. 왠지 조심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은 제론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더 짙어졌다.

"저……."

기사단장은 극도로 조심스럽게 제론을 불렀다. 그 모습을 지켜본 나머지 기사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동안 봐 왔던 기사단장이 아닌 것 같았다. 그냥 얼굴만 같은 다른 사람인 듯했다.

기사단장도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쑥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도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어서 좀 답답했다.

"백작님, 일어나십시오."

기사단장이 조금 더 강하게 말했다. 하지만 제론은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백작님!"

기사단장이 큰 용기를 내서 소리쳤다. 그러자 제론이 눈을 번쩍 떴다.

"헉!"

기사단장은 제론이 눈을 뜬 순간 갑자기 뭔가가 온몸을 옭아매는 듯한 느낌에 깜짝 놀랐다.

제론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걸렸다. 수련이 절정일 때, 기사단장이 일깨우는 바람에 마나링으로 뽑아낸 마나가 일제히 기사단장을 옭아맸다.

8가닥의 마나가 실처럼 뻗어나가, 기사단장의 몸에서 가장 마나가 충만한 곳을 정확히 짚어 마나 자체를 꽁꽁 감싸 버렸다.

그 한 번의 움직임으로 작은 깨달음 하나를 얻었다. 덕분에 제론은 8개의 마나링을 다루는 게 훨씬 능숙해졌다.

"잠시 딴생각을 하는 바람에 후작님이 온 것도 몰랐군요."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후작을 쳐다봤다.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지만 눈빛은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네이드 후작은 제론을 노려봤다.

"버릇이 없군."

후작의 말에 제론이 피식 웃었다.

"후작님이야말로 예의가 없군요."

"뭐라고?"

네이드 후작은 인상을 팍 썼다. 하지만 자신이 너무 흥분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심호흡을 통해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후우우. 좋아, 그 얘긴 나중에 따로 시간을 내서 하지. 그래, 여긴 왜 왔나?"

"얘기를 해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대체 왜 전쟁을 하려는지 궁금해서 말이죠."

네이드 후작이 코웃음을 쳤다.

"흥. 뻔한 걸 왜 묻나? 자네의 영지에서 우리 측 사절단을 몰살시켰는데도 책임을 지지 않으니 별수 있나?"

"우리는 그런 일이 없으니 그렇지요. 혹시 그쪽에서 저질러 놓고 우리에게 뒤집어씌우는 건 아닙니까?"

꽝!

"자네 말 다 했나?"

네이드 후작이 발을 구르자 대리석 바닥이 쩍쩍 갈라졌다. 네이드 후작 역시 익스퍼트에 오른 기사였다.

제론은 미끼를 던진 다음 네이드 후작을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후작의 반응을 보니 거짓된 행동으로 기만하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일 자체에 뭔가 음모가 끼어 있다는 뜻이었다.

이미 마티를 통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확인했다. 일단의 무리가 사절단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문제는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만일 그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을 때, 제론이 확인하고 있었다면 어떻게든 뒤를 쫓았겠지만 그렇지 않았기에 그저 녹화된 영상만 남았다.

"우리가 그랬다는 명확한 증거도 없지 않습니까."

"안 했다는 증거도 없지."

네이드 후작의 강경한 태도에 제론은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걸 확인했다. 네이드 후작은 처음부터 전쟁을 원했던 것이 분명했다.

"슈린 공작가의 도움을 받으면 우리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슈린 공작가라는 말을 꺼내며 제론은 네이드 후작의 반응을 유심히 살폈다.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었다. 소드 마스터에 오른 뒤부터 감각이 상당히 예민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따위 도움 없어도 충분히 이길 수 있네."

네이드 후작의 말과 변화로 판단하면 뒤에서 슈린 공작가가 네이드 후작을 밀어낸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네이드 후작은 슈린 공작가의 아래에 들어간 느낌이 아니었다.

'아쉽군. 파인트가 왔다면 더 떠보기 쉬웠을 텐데.'

슈린 공작가에서 파인트를 이곳으로 파견했다는 사실을 벌써 알고 있었다. 바인의 첩보망에 걸린 정보 중 하나였다.

파인트라면 네이드 후작보다는 다루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게다가 파인트는 제론을 보면 흥분해서 금세 냉정을 잃곤 한다.

게다가 슈린 공작가에서 뭔가 수작을 부렸다면 네이드 후작에게 그걸 알릴 리 없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정보를 얻으려면 사실 파인트를 파고들어야 한다.

제론이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 네이드 후작이 냉소를 띤 채 기사단장에게 눈짓을 했다. 그리고 제론을 보며 말했다.

"한데 혼자서 여기까지 왔다는 건 나름 각오를 했다는 뜻인가?"

제론은 상념을 접고 네이드 후작을 쳐다봤다. 그리고 주변 기사들을 슥 둘러봤다.

"후작님의 인품을 믿습니다."

네이드 후작이 피식 웃었다.

"나도 내 인품이야 믿네. 하지만 난 내 인품보다는 영지가 더 소중하다네."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기사들이 움직였다. 흐트러졌던 진형을 바로잡음과 동시에 기사단장이 제론을 향해 성큼 다가갔다.

"이거 실망이군요. 날 억류할 생각이라니."

"굳이 피와 돈을 흘리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효율적인가.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이번에는 제론이 피식 웃었다.

"확실히 그렇긴 하군요. 하면 내가 여기서 후작님을 인질로 잡아 돌아가면 어떻게 될까요?"

"하하하하,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하고 싶으면 한번 해 보게. 과연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제론은 후작의 말을 들으며 다가온 기사단장을 슬쩍 노려봤다. 제론의 가슴에서 회전하는 8개의 마나링에서 일제히 마나가 뽑혀 나왔다.

기사단장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온몸을 뭔가가 옥죄고 있었다. 섣불리 움직이면 큰일 날 것 같은 기분이 등줄기를 살살 간질였다.

"침고로 날 잡아가면 내 아들이, 내 아들까지 잡아가면 가신 중 하나가 영지전을 이어 가기로 했네.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뜻이지."

네이드 후작의 말을 들은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자신을 억류하려고 해서 같은 방법을 써 주려고 했는데, 그게 소용없다면 굳이 애쓸 필요가 없었다.

'하긴, 파인트가 가만히 있지 않겠지.'

네이드 후작을 잡아가면 오히려 전쟁이 더 격렬해질 수도 있었다. 파인트가 지휘권을 잡게 될 가능성이 높으니 말이다.

"굳이 후작님을 잡아갈 필요는 없겠군요. 그럼 전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누구 마음대로?"

네이드 후작의 입가에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리고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뭐 하고 있나? 어서 잡지 않고."

후작의 명령이 떨어진 순간,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챙!

30명의 기사가 동시에 검을 겨누니 그 위압감이 어마어마했다. 물론 제론에게는 전혀 의미가 없었지만.

기사들 중 유일하게 검을 뽑지 않은 사람, 기사단장이 천천히 제론의 앞으로 걸어갔다. 동료의 위압감을 빌린 덕분인지 몸을 얽매던 뭔가도 사라진 상태인지라 기분이 제법 괜찮았다.

"굳이 피를 볼 필요 있겠습니까? 순순히 따라 주시지요."

제론은 기사단장의 말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스윽 돌려 자신을 포위한 기사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죽이는 것보다는 다치는 게 낫겠지."

일단 마음을 먹고 결정을 내린 제론은 즉시 검을 뽑았다. 허리춤에 매달린 롱소드가 소리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쉭! 푹!

기사단장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뜬 채 제론의 얼굴과 자신의 배를 꿰뚫은 검을 번갈아 쳐다봤다. 아예 보지도 못했다. 그저 검을 뽑는 모습만 어렴풋이 봤을 뿐이었다.

한데 이렇게 배를 꿰뚫렸다. 격렬한 통증이 배 한가운데에서 시작해 온몸을 헤집었다.

"크으으으! 쿨럭!"

결국 피를 토하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제론은 기사단장의 배에 꽂은 검을 가볍게 뽑고는 옆으로 한 걸음 움직였다.

마치 순간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제론의 몸이 기사 한 명 앞에 나타났다.

쉭! 푹!

"크으으으! 쿨럭!"

기사단장과 똑같은 모습으로 무릎을 꿇은 기사가 불신 가득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미 제론의 모습은 그 자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쉭! 푹! 쉭! 푹!

검을 찌르는 소리와 배를 꿰뚫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그리고 그렇게 소리가 날 때마다 어김없이 기사가 피 흘리는 배를 움켜쥐며 무릎을 꿇었다.

30명의 기사가 모두 쓰러지는 데에는 불과 1분도 걸리지 않았다.

네이드 후작은 이 비현실적인 광경에 멍하니 서 있었다. 응접실에 서 있는 사람은 제론과 그가 유일했다.

"치료를 잘 하면 죽지는 않을 겁니다."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네이드 후작을 무심한 눈으로 쳐다봤다. 네이드 후작은 그 시선에 움찔 놀랐다.

"나, 날 어쩔 셈이냐? 아까도 말했듯이 날 죽이거나 사로잡아도 소용이 없다!"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럴 생각도 없었다.

"이들이나 잘 치료하십시오. 무리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굳이 네이드 후작을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 기사들은 부상이 심각해서 치료하는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릴 것이다. 마나를 안에 심어 헤집었기에 포션도 소용이 없었다.

네이드 후작은 공포에 질려서 제론이 유유히 응접실을 나가는데도 붙잡거나 하지 못했다.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성 전체에 비상을 걸 생각도 못 했다. 만일 성 전체의 병력을 움직였다면 제론도 이렇게 쉽게 성을 빠져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제론은 응접실 문을 열고 슬쩍 고개를 돌려 네이드 후작을 노려봤다. 그리고 바닥에 쓰러진 기사단의 상태를 다시 확인하고는 미련 없이 나가 버렸다.

텅!

응접실 문이 닫혔다. 그걸 신호로 네이드 후작이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허억, 허억. 이 무슨……!"

당해 놓고도 믿을 수 없었다. 네이드 후작도 익스퍼트에 오른 지 제법 오래된 기사였다. 한데도 공포에 옥죄어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제론과 시선을 마주친 것 하나만으로 말이다.

네이드 후작의 시선이 바닥에 쓰러진 기사들에게로 향했다. 하나같이 무릎을 꿇은 채 정신을 잃었다. 배에서 꾸역꾸역 피를 흘리면서 말이다.

"누, 누구 없느냐!"

네이드 후작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이끌고 응접실을 나섰다. 그리고 잠시 후, 일단의 병사가 우르르 들어와 기사들을 하나하나 밖으로 옮겼다.

네이드 후작성에 한바탕 폭풍이 몰아쳤다.

제론이 네이드 후작령의 경계에 도착할 즈음, 후작성이 발칵 뒤집혔고 비상이 걸렸다.

즉시 명령이 전달되었고 감시가 더욱 강화되었다.

경계에 도착한 제론은 마치 벽을 친 듯 쭉 늘어서서 길을 막고 있는 병사와 기사를 볼 수 있었다.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저 저들을 어떻게 요리해야 최대한 피해를 가중시킬지를 고민했다.

후작성에서 기사단을 죽이지 않고 굳이 부상만 입힌 이유도 그들을 이용해 전력을 더욱 약화시키기 위함이었다.

일단 그들을 살리려면 포션을 들이부어야 한다. 또한 지속적으로 관리를 해야 하기에 죽인 것보다 더 많은 인력을 소모시킨 셈이 되었다.

포션 장사를 하는 슈린 상단에서 최근 포션 제조를 못 하고 있기에 포션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중이었다. 그러니 포션을 쓰면 쓸수록 재정적 부담이 가중될 것이다.

'병사에게까지 포션을 쓰지는 않겠지.'

병사보다 포션이 더 비쌌다. 당연히 병사를 위해 포션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제론은 병사들 틈새에 끼어 있는 기사를 확인했다.

제론은 가장 기사가 많이 모인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휘이익!

바람을 가르며 달려가는 제론의 모습에 다들 깜짝 놀랐다. 그리고 긴장하며 무기를 꽉 쥐었다.

쉭!

제론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 서 있던 기사 앞에 나타났다.

푹!

기사의 배를 꿰뚫은 제론은 조금 속도를 줄이며 근처의 다른 기사를 향해 몸을 날렸다.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창을 꼬나 쥔 채 제론을 향해 달려가 팔을 쭉 뻗었다.

제론은 가볍게 몇 걸음 걸어 모든 창을 피해 내고는 검을 내질렀다.

푹!

기사 하나가 또 배를 움켜쥐고 쓰러졌다.

제론은 그런 식으로 병사를 잔뜩 끌고 다니며 기사를 하나하나 쓰러뜨렸다.

워낙 많은 병사가 모여 있었기에 처음에는 그렇게 휘저어도 포위망이 견고했는데, 기사를 20명 정도 쓰러뜨리고 나니 포위망에 구멍 몇 개가 숭숭 뚫렸다.

제론은 미련 없이 그 구멍을 향해 달려갔다. 순식간에 구멍이 메워졌다. 하지만 제론은 구멍이 사라지기 전에 그곳으로 몸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제론은 마지막으로 뒤를 향해 검을 한 번 뿌리고 그대로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넘어갔다.

쉭쉭쉭쉭쉭!

날카로운 마나의 검 수십 개가 쏟아져 나갔다. 그리고 마치 눈이라도 달린 듯 기사들을 향해 하나하나 쏘아졌다.

쩡! 쩡! 쩡!

"크악!"

"으악!"

일부는 그것을 막아 냈지만 내장이 진탕되었고, 일부는 채 막아 내지 못하고 몸에 맞아야 했다.

아수라장이 되었다. 중간에 있던 기사들이 우르르 쓰러지며 피를 토하니 제대로 제론을 뒤쫓지도 못했다.

병사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쓰러진 기사를 나르고 진형을 재정비했다.

그러는 사이 제론은 느긋하게 아군 경계병 사이로 스며들었다.

"영주님!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득달같이 달려온 바이스의 잔소리에 제론은 빙긋 웃었다. 말투를 들어 보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마음이 느껴져 괜히 웃음이 나왔다.

"네이드 후작을 한번 봐야 할 것 같아서. 진짜 전쟁을 할 마음이 있는지 확인도 해 보고 싶었고."

바이스가 입을 쩍 벌렸다. 이 무슨 어이없는 말인가. 영지전을 벌여야 하는 영주가 적진에 사실 확인을 위해 들어가다니.

"그런 표정 짓지 마. 어쨌든 무사히 돌아왔잖아. 내 실력 몰라?"

바이스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물론 영주님의 실력이야 잘 알고 있습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혼자서 적 모두를 상대하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어쨌든 당장 준비해야 할 것 같아."

"당장 말입니까?"

바이스의 눈이 살짝 커졌다. 하지만 이내 눈을 빛냈다. 영지전은 위기이기도 하지만 기회이기도 했다.

만일 네이드 후작령을 얻을 수 있다면, 혹은 그에 준하는 결과를 만들어 낸다면 에어스트 백작령의 발전에 가속도가 제대로 붙을 것이다.

"완전히 뒤집어 놨거든. 아마 선전포고도 없이 달려들지 몰라."

"영주님께서도 참전하십니까?"

바이스가 기대감 어린 눈으로 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는 제론의 모습을 보며 희열에 차 살짝 몸을 떨었다.

오랜만에 붉은 학살자의 활약을 다시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대감이 충만히 차올랐다.

"당장 카이트 경에게 알리겠습니다."

"그래, 나도 기간트를 미리 준비해야겠군."

"보셨습니까?"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훌륭하더군. 아마 기대해도 좋을 거야."

제론은 그렇게 말하면서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 실바보다는 테오스를 타고 싶었다. 만일 테오스를 움직일 수만 있다면 단숨에 승패를 결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아직은 테오스를 공개할 때가 아니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

일단 이번 영지전을 승리로 장식해야 한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이겨야 한다. 자신 있었다. 성능이 월등히 향상된 실바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군대에 있을 때는 실바로도 그런 성과를 만들어 냈다. 물론 개조가 되어 일반적인 실바와는 달랐지만 출력을 비롯한 대부분은 보통 실바와 비슷했다.

한데 이번에는 그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월등한 능력을 가진 실바였다.

'혼자서 적진을 휘저으면서 빈틈을 만드는 방식이 괜찮겠군.'

시험 기동을 해 본 결과 충분히 그것이 가능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원래 뛰어난 기간트 센스를 가지고 있었는데, 유적의 수련을 통해 그 능력이 몇 단계나 위로 올라갔다.

예전에도 홀로 적진을 휘저었는데, 이젠 그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상대는 영지군이다. 전장에서 맞서 싸운 벨룸 왕국의 군대는 수많은 실전으로 다져진 정예였다.

영지군도 나름대로 지독한 훈련을 하겠지만, 그래도 피가 튀고 살이 갈라지는 전장을 한 번 경험한 것만 못하다.

그런 지독한 놈들과 싸우던 제론이 고작 영지군을 상대한다면 훨씬 더 큰 활약이 가능했다. 그것은 제론뿐만 아니라 에어스트 백작령의 주력인 라이트닝 기사단 역시 마찬가지였다.

라이트닝 기사단은 대부분 전쟁을 경험한 군부 출신이었다. 군부 출신 라이더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약점인 검술을 제론 덕분에 완전히 메워 버린 그들의 힘은 무시무시했다.

게다가 그들은 실전에서 제론과 손발을 맞춰 봤다. 제론이 어떻게 날뛰건 충분히 뒤를 받쳐 줄 수 있는 실력자였다.

제론은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어서 빨리 싸우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렸다.

'나도 천상 싸움꾼이야.'

4년이라는 전장의 시간이 제론의 성향을 그렇게 바꿔 버렸다. 또, 유적의 수련도 대부분 싸움의 연속이었다. 투기가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튼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 서둘러 영지를 향해 달려갔다. 물론 중간에 인적이 사라지자마자 유적으로 텔레포트했다. 지금은 일분일초가 아까운 상황이었다.

네이드 후작령이 분주히 움직였다. 그리고 이내 수많은 병력이 후작성 앞에 도열했다.

네이드 후작이 나와 짧은 연설을 했고, 개전을 선포했다. 후작은 최대한 시간을 아꼈다. 이미 왕궁으로부터 영지전 허가가 떨어진 상황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선전포고도 하고 그랬겠지만 지금은 그럴 마음도 들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에어스트 백작령을 박살 내고 그 주인인 제론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었다.

제론으로부터 시작되어 뇌리에 새겨진 공포를 잊으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소환!"

총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지자 곳곳에서 기간트가 솟아났다. 네이드 후작령은 그리 넓지 않았다. 에어스트 백작령까지는 미리 기간트를 소환해서 이동해도 힘들지 않을 정도로 짧은 거리였다.

기간트의 수는 200기가 넘었다. 슈린 공작가에서 지원한 기간트에다가 2왕자가 은밀히 손을 써서 지원한 기간트, 그리고 슈린 공작가에 선을 대고 있는 귀족가의 지원까지 받으니 그 정도 숫자가 만들어졌다.

네이드 후작은 뿌듯해졌다. 200기의 기간트라면 에어스트 백작령 정도는 돌멩이 하나 남기지 않고 몽땅 가루로 만들 수도 있으리라.

"가서 싹 부숴 버려라!"

네이드 후작의 말에 총사령관이 크게 외쳤다.

"진격!"

200기의 기간트가 일제히 걸음을 옮겼다.

쿵! 쿵! 쿵! 쿵!

기간트가 발을 맞춰 진군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 뒤를 경탄에 잠긴 표정을 지은 병사들이 뒤쫓았다. 물론 대열을 잘 맞춘 채로 질서정연하게 행군했다.

싸움은 기간트가 하겠지만 실질적인 처리는 사람이 해야 한다. 이 병사들은 그를 위해 필요한 인력이었다. 무려 5000이나 되는 병력이었다.

전쟁에 승리하면 이들이 에어스트 백작령을 장악하고 약탈을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에어스트 백작령을 속령으로 편입하거나 후작령으로 만드는 행정적 절차까지 진행이 가능한 인재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5000의 병력은 기간트 라이더가 아닌 슈린 공작가의 기사들이 맡았다. 원래는 네이드 후작령의 기사가 할 일이었지만, 제론 때문에 수많은 기사가 다치는 바람에 부득이 슈린 공작가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슈린 공작가에서 파견된 파인트는 이를 기회로 삼았다. 적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에어스트 백작령을 슈린 공작가가 꿀꺽 삼킬 생각이었다.

충분히 가능했다. 슈린 공작가가 여기에 투입한 힘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자욱한 먼지를 일으키며 200기의 기간트와 5000의 병력이 두 영지의 경계에 도착했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