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권 - 58화 (59/217)

6권

Chapter 1 영지전

에어스트 백작령이 발칵 뒤집혔다. 1왕자가 방문한 것이다.

사실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오려면 반드시 네이드 후작령을 거쳐야 한다. 그래서 지금 네이드 후작령은 에어스트 백작령 쪽으로 가는 길을 완전히 봉쇄한 상태였다.

하지만 아무리 네이드 후작이라도 1왕자가 직접 움직이는데 그 길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1왕자는 물자를 잔뜩 실은 마차 10대와 함께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들어왔다.

전쟁을 하려면 물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에어스트 백작령은 네이드 후작령에서 길을 꽉 막은 상태라 물자를 들일 수가 없었다.

그 문제를 1왕자가 어느 정도 해결해 준 것이다. 물론 그건 1왕자의 생각일 뿐이었다.

사실 에어스트 백작령은 외부의 도움이 별로 필요치 않았다. 제론이 있다면 말이다. 유적을 통해 물자를 얼마든지 이동시킬 수가 있었다.

현재 에어스트 백작령에 쌓인 물자의 양도 엄청났다. 몇 달 정도는 새로운 물자 유입 없이 충분히 전쟁을 치를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달이면 네이드 후작령 하나 무너뜨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외부의 세력이 개입하지 않고, 제론이 건재하다면 말이다.

하지만 제론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에어스트 백작령의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바이스가 정중히 예를 취했다. 1왕자는 그것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주위를 둘러봤다.

"에어스트 백작이 안 보이는군?"

1왕자의 시선이 살짝 불쾌해졌다. 감히 왕자가 방문했는데 영주가 코빼기도 비치지 않다니, 이런 불충이 어디 있단 말인가.

"죄송합니다."

바이스는 그 말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왕자에게 영주가 실종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사실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1왕자쯤 되면 독자적인 정보망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다. 아마 며칠 안으로 에어스트 백작령의 상황을 파악할 것이다.

'황당하겠지.'

어찌 안 그렇겠는가. 영주가 실종되었는데. 바이스는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가 아는 제론은 결코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연락도 없이 사라졌다면 분명히 그에 상응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그런 상황이 뭐가 있겠는가.

"영지전 준비는 잘되고 있나?"

"일단 되도록이면 전쟁을 막아 보려 애쓰고 있습니다."

바이스의 소극적인 대답에 1왕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은 이런 걸 원하고 오지 않았다. 이번 영지전을 통해 많은 것을 얻을 생각이었다.

"기간트가 100기나 있다고 하는데, 그 정도면 충분히 해 볼 만하지 않나?"

"100기라니. 당치 않습니다. 영지전을 통해 포획한 50기의 기간트가 전부입니다. 이미 왕궁에 보고 드린 대로 말입니다."

1왕자가 피식 웃었다.

"기간트를 단 1기도 보유하지 않은 영지에서 50기를 포획했다니 대단하군."

바이스는 비꼬는 말에도 침착하게 대응했다. 어차피 증거로 남지 않은 이상 얼마든지 발뺌이 가능했다.

"당시 기간트를 대여하고 용병의 힘을 빌렸습니다."

당연히 1왕자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더 추궁해 봐야 얻을 게 없기 때문에 그쯤에서 마무리했다.

"알겠네. 아무튼 기간트를 좀 더 모으더라도 제대로 영지전을 하는 게 낫지 않겠나? 내가 보기에는 네이드 후작령쯤이야 얼마든지 이길 수 있을 것 같은데."

1왕자의 말에 바이스가 대답을 아꼈다. 어떤 대답을 하든 얘기가 길어질 것이고 그러다 빈틈이라도 보이면 곤란했다. 보아하니 그런 걸 노리고 찾아오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조심해서 나쁠 게 없었다.

"일단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바이스의 말에 1왕자가 빙긋 웃었다. 마치 다 이해한다는 듯했다. 하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았다. 짜증이 났다. 대체 영주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이래서야 일이든 대화든 진행이 제대로 되겠는가.

"후우, 피곤하군. 쉴 곳으로 좀 안내해 주겠나?"

바이스가 정중하게 1왕자를 안내했다. 그 뒤로 1왕자를 호위하기 위해 따라온 근위 기사들이 우르르 따라갔다.

1왕자는 바이스의 뒤를 따라가는 내내 감탄했다. 그동안은 눈여겨보지 않았는데, 이렇게 따라가며 보니 상당히 잘 만든 성이었다.

"호오. 저건 마법등인가?"

마법을 이용해 밝히는 등이 복도 곳곳을 비추고 있었다. 그 모양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생각해 보니 응접실도 상당했던 것 같았다.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말이다.

방에 도착한 1왕자는 또 감탄했다. 이 방은 왕궁에 있는 자신의 침실보다 훨씬 대단했다.

바이스를 따라온 시종으로부터 방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들은 1왕자는 완전히 홀딱 반해 버렸다.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이 성은 모든 것을 마법으로 해결했다. 등도 마법이었고, 물을 긷는 것도 마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또한 화장실도 마법을 통해 처리된다.

창으로 다가간 1왕자는 성 한가운데에 높이 솟아 있는 탑을 보고는 나직이 탄성을 흘렸다.

"호오, 굉장하군."

뭘 하는 탑인지 모르지만 높이를 보니 저 위에 서 있으면 영지가 한눈에 다 들어올 것 같았다.

인간의 편의를 극대화시켜 만든 성이었다. 또한 너무나 아름다운 성이기도 했다. 1왕자는 갑자기 욕심이 났다. 자신도 이런 성을 갖고 싶었다.

"이 성을 누가 설계해서 만들었는지 알아봐야겠군."

1왕자가 중얼거린 순간, 그를 항상 따라다니던 수행원 한 명이 조용히 움직였다. 그는 1왕자가 원하는 것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고 뛰어다녀 어떻게든 얻어 내는 사람이었다.

일단 그가 움직였으니 곧 성의 설계도가 손에 들어올 것이다. 1왕자는 물론이고 근위 기사들 또한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일이 착착 풀리지 않아 짜증이 좀 나는구나."

1왕자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이제 알아서 움직일 것이다. 그가 데려온 수행원과 근위 기사들이라면 얼마든지 원하는 대로 일을 만들어 낼 수 있을 테니까.

원래 목표는 에어스트 백작을 충동질하고 자신이 조금 힘을 보태서 영지전을 크게 확대시킬 생각이었다.

에어스트 백작령에 관한 소문은 다양했다. 거의 확실한 소문도 있었고, 신빙성이 떨어지는 소문도 많았다.

1왕자가 진위를 비교적 자세히 확인한 소문은 에어스트 백작령의 기간트가 100기에 육박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 에어스트 백작령행을 결정했다.

현재 네이드 후작령에는 2왕자가 가 있다. 또한 슈린 공작가에서 상당한 힘을 실어 주었다.

만일 이 영지전을 크게 확대시킨다면 슈린 공작가의 힘을 조금이라도 깎아 내는 게 가능해진다. 또한 2왕자의 힘도 갉아먹을 수 있었다.

자신은 많이 움직이지 않고 힘도 소진하지 않으면서 적을 약화시킬 수 있는 훌륭한 계획이었다.

에어스트 백작령이 무너져도 상관은 없다. 어차피 전쟁의 포화 속에서 폐허가 될 영지 따위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 아닌가.

또 이기면 좋다. 이렇게 미리 선심을 써 놨으니 나중에 힘이 되어 줄 테니까.

☆ ☆ ☆

"아아. 정말 미치겠구나."

바이스는 양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모든 열쇠는 제론이 쥐고 있었다. 제론이 와야 뭐든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는 제론의 안위가 가장 걱정이었다.

"제발 무사하셔야 할 텐데."

"누굴 말하는 거야?"

"그야 우리 영주님이지 누군 누구……."

바이스는 무의식중에 질문에 대한 답을 하다가 흠칫 놀랐다. 이곳은 자신의 집무실에서도 가장 비밀스러운 공간이었다. 누구도 허락 없이 들어오는 것이 불가능했다.

"누, 누구냐!"

바이스가 몸을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봤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품에 감췄던 마나 스틱을 겨눴다. 언제든 마법을 통해 상대를 공격할 수 있도록 마나 스틱을 가동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호오. 그 바쁜 와중에도 마법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은 모양이로군."

바이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눈앞에 꿈에서라도 보고 싶은 사람이 서 있었다.

"영주님!"

"하하하. 좀 늦었지?"

"좀 늦은 정도가 아닙니다! 지금 영지가 발칵 뒤집혔단 말입니다!"

"미안, 일이 좀 있었어."

그렇게 말하는 제론의 눈빛이 너무나 당당하고 힘이 넘쳐서 바이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참으로 느낌이 기묘했다.

"영주님?"

"왜? 내가 좀 달라 보여?"

바이스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뭐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말로 표현을 할 수 없었다.

"감이 좋은데? 아무튼 영지가 뒤집혔다니 무슨 말이야?"

오기 전에 태블릿으로 상황을 살폈으면 다 파악했겠지만 제론은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된 것을 알기에 최대한 서둘렀다.

곧장 성 지하에 있는 중앙 유적으로 이동한 다음 바로 올라왔다.

"네이드 후작령에서 영지전을 선포했습니다."

"영지전? 거기서 왜 영지전을 걸어?"

"네이드 후작령의 협상단을 우리가 몰살시켰다고 주장하더군요."

제론이 바이스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렇게 했나?"

"절대 아닙니다."

"그럼 네이드 후작이 억지를 쓰고 있다는 말이네. 우리 영지가 좀 탐났나?"

바이스가 고개를 저었다.

"저도 나름대로 조사를 해 봤습니다. 저쪽에서 협상단이 출발한 건 사실입니다. 또 그들이 습격을 받은 것도 맞습니다."

제론이 눈을 빛냈다.

"그렇다면 이건 누군가 개입했거나 네이드 후작가에서 희생양을 내세워 쇼를 하는 것, 둘 중 하나이겠군."

"예, 전 누군가의 개입에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이드 후작에 대해서는 대충 조사를 해 뒀다. 네이드 후작령은 중앙 유적의 마티가 커버하는 범위에 살짝 걸쳐 있었다.

후작을 직접 조사하지는 못했지만 영지를 보며 간접적으로 그의 성향을 파악했다. 네이드 후작은 그런 일을 벌일 위인이 되지 못한다.

"누굴까? 슈린 공작?"

"그일 확률이 높지 않겠습니까?"

일단 가장 가능성이 큰 사람이었다. 최근 슈린 공작가의 재정이 크게 어려워졌다. 그걸 타개하기 위해 이런 식으로 움직였을 가능성이 있었다. 겸사겸사 눈엣가시 같은 제론도 제거하고 말이다.

"영지전을 막을 방법은 없나?"

바이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방법을 찾고는 있습니다만, 지금으로서는 쉽지 않습니다. 그쪽에 붙은 세력이 너무 많습니다."

"세력이 붙어?"

"2왕자가 붙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슈린 공작가도 붙었고요. 그로 인해 그쪽 파벌의 귀족이 제법 많이 끼어들었습니다."

제론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여차하면 테오스를 공개하는 한이 있어도 이길 것이다.

어떻게 기반을 다진 영지인데 여길 빼앗긴단 말인가. 절대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물론 테오스를 공개하지 않고 이기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긴 했다. 제론은 나름대로 그 방법에 대해 고민을 해 둔 것이 있었다.

혹시 전쟁이 벌어졌을 때, 테오스의 특징을 살려 적을 유린하는 방법이 있었다. 테오스는 아공간이 다른 기간트와 완전히 다르다. 그걸 이용하면 적의 중심부를 테오스로 직격하는 것이 가능했다.

'네이드 후작령을 직격한다고 해서 전쟁이 끝날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야.'

전쟁은 산비탈을 구르는 눈덩이 같아서 일단 한번 구르기 시작하면 막기가 어렵다. 점점 불어나서 종국에는 모든 걸 삼켜 버리고 만다.

이렇게 수많은 세력이 끼어들었는데, 고작 네이드 후작성을 박살 낸다고 전쟁이 끝날 리 없었다. 그들은 아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전쟁을 이어 갈 것이다.

"오랜만에 붉은 실바를 타야겠군."

붉은 실바라는 말에 바이스가 눈을 빛냈다. 안 그래도 세나가 특별히 준비한 실바가 있었다. 색칠까지 붉게 마쳐 놓은 실바였다.

"나중에 세나를 한번 찾아가 보십시오. 아마 재미난 걸 드릴 겁니다."

바이스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하자, 제론은 대충 알겠다는 듯 빙긋 웃었다.

"자, 그럼 슬슬 영지전을 준비해 볼까?"

"아! 영주님."

바이스는 제론이 나가려 하자 막 떠올랐다는 듯 제론을 잡았다. 제론이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급히 말을 이었다.

"1왕자 전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제론은 그 말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결국 이렇게 되는군. 이거 자칫하면 내전으로 발전할지도 모르겠어."

바이스도 그걸 염려하고 있었는지라 심각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우리 왕국의 왕자이자 유력한 후계자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바이스의 집무실에서 나갔다. 그 표정이 워낙 묘했는지라 바이스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설마 무슨 일이라도 벌이시는 건 아니겠지?"

바이스는 그렇게 중얼거리곤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괜한 고민을 한 것 같아 머쓱한 표정을 지은 바이스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일에 몰두했다.

제론은 1왕자가 머무는 거처로 곧장 가지 않고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태블릿을 통해 전체적인 상황을 살폈다. 또한 1왕자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확인했다.

때로는 사소한 것 하나가 전체를 바꾸는 경우도 있다. 뭐 하나라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전쟁이라는 큰일을 앞두고 있을 때는 더더욱 그랬다.

하나하나 세심히 확인한 다음 제론은 1왕자를 방문했다.

긴 복도를 따라 걸어가니 방문을 지키는 2명의 기사가 보였다. 그들은 제론이 앞에 서자 용건을 물었다.

"이곳은 왕자 전하께서 머무시는 곳이오. 용건을 말하시오."

상당히 고압적이었다. 제론은 이와 비슷한 일을 예전에도 겪어 봤다. 근위 기사는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에어스트 백작이 찾아왔다고 알려라."

제론의 말에 근위 기사가 흠칫 놀랐다. 그리고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는 다시 나와 문을 연 채 조용히 옆으로 비켜섰다.

제론은 굳은 얼굴로 들어갔다. 여기에 와서까지 이따위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배알이 뒤틀렸다.

"왕자 전하를 뵙습니다."

제론은 일단 정중히 예를 취했다. 상대는 왕자였다. 더구나 자신의 가디언으로 설정된 2왕자가 아니라 1왕자였다.

만일 2왕자가 이리로 왔다면 분명히 뭔가를 더 시험해 봤을 것이다. 가디언을 과연 어디까지 통제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상대는 1왕자였다. 긴장을 풀어선 안 된다. 그는 에어스트 백작령을 이용해 먹기 위해 왔다. 또 여기를 있는 대로 뜯어먹으려는 하이에나 같은 사람이기도 했다.

"좀 늦었군."

"일이 있어서 외부에 나가 있었습니다."

"영지전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던가?"

"관련된 일이었습니다."

"무슨 일인지 말해 보게."

제론은 1왕자를 쳐다봤다. 완전히 명령조였다. 대답을 강요하는 그의 표정은 일말의 거리낌도 없었다. 그저 그게 당연하다는 걸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린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모습이었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감히!"

1왕자는 가만히 있었는데, 뒤에 서 있던 근위 기사가 앞으로 성큼 나서며 소리쳤다.

"왕자 전하께서 묻는 말에 어찌 싫다는 말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제론이 서늘한 눈으로 근위 기사를 쳐다봤다. 소드 마스터가 가지는 자연스러운 기세가 근위 기사를 단숨에 압박했다.

"자네는 누군가?"

제론의 물음에 근위 기사는 창백해진 얼굴로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 근위 기사단장인 몰트요."

"근위 기사단장이면 백작인 내게 함부로 해도 되는 건가?"

"그, 그건 아니오. 하지만……."

제론이 손을 올려 그의 말을 막았다.

"됐다. 더 이상 끼어들지 마라.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몰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1왕자는 몰트와 제론의 대치를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솔직히 상황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제론이 자신의 말을 거절한 것도 이해 불가였고, 그것 때문에 나선 몰트가 저렇게 얌전히 물러난 것도 그의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었다.

"자네는 내가 왕자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한데도 내 말에 대답을 하지 않겠단 말인가?"

"전하의 말씀을 제가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뜻입니까?"

"그럼 그러지 않을 생각인가?"

1왕자의 입가가 살짝 올라갔다. 제대로 생각이 박힌 사람이라면 여기서 척을 져선 안 된다는 걸 알 것이다. 그렇기에 1왕자는 느긋하게 제론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해할 수가 없군요. 제가 알기로 전하께서는 아직 왕위에 앉은 게 아닌데 꼭 그런 것처럼 행동하시니 말입니다."

제론의 말에 방 안이 한차례 술렁였다. 1왕자가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고, 그에 응답이라도 하듯 방 안 곳곳에 서 있던 근위 기사들이 강렬한 기세를 내뿜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했다.

하지만 제론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근위 기사 100명이 덤벼 봐야 그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기간트를 소환해 달려들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선을 넘었군."

근위 기사단장 몰트가 이를 악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아직도 얼굴이 창백했다. 그리고 두려웠다. 하지만 제론을 이기지 못한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차하면 기간트를 불러내면 된다. 현재 근위 기사는 전원 기간트 장비를 착용한 상태였다. 근위 기사 전용 기간트인 크라테르를 말이다.

현재 1왕자의 호위로 따라온 근위 기사는 무려 30명이나 된다. 그들이 일제히 기간트를 소환하면 아무리 에어스트 백작령에 기간트가 많아도 절대 쉽게 막아 낼 수 없다. 장소의 특수성 때문이었다.

성안에서 기간트를 소환해 닥치는 대로 부수며 제론을 인질로 잡으면 절대 막아 낼 수 없을 것이다. 몰트는 자신 있었다.

1왕자의 생각도 몰트와 비슷했다. 대체 제론이 뭘 믿고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제론이 강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 개인의 강함이라는 건 한계가 있는 법이다.

설사 제론이 소드 마스터라 하더라도 기간트에는 안 된다.

"기간트 소환 방어 마법진이라도 깔아 놨나?"

1왕자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몰트를 바라봤다. 몰트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보통 왕궁이나 공작가의 저택, 혹은 공, 후작령의 영지성에는 기간트 소환 방어 마법진을 설치해 놓는다.

그걸 깔아 놓는다 하더라도 기간트 소환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저 소환 마법에 노이즈를 섞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하위 기간트는 소환이 불가능했다. 크라테르나 몰레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보다 상위 기체의 경우 소환이 어려워진다. 그 경우에는 소환하는 라이더의 능력에 달려 있었다. 아공간에서 꺼낼 때 라이더의 마나를 이용하기 때문에 거기에 들어가는 의지력이 중요했다.

어쨌든 그게 깔려 있으면 현재로서는 기간트 소환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몰트는 그걸 감지하는 아티팩트를 항상 가지고 다녔다.

소환 방어 마법진을 설치하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했다. 또한 마법진의 규모가 워낙 크기에 유지 보수에도 적지 않은 비용이 들어간다.

만일 전장에서 그걸 이용할 수 있게 된다면 전쟁의 양상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었다.

어쨌든 이곳 에어스트 백작성에는 소환 방어 마법진이 깔려 있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설마 기간트를 꺼낼 리 없다고 자신하는 건 아니겠지?'

1왕자는 그 생각을 하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왠지 정말로 그것이 답인 것 같았다. 만일 그렇다면 에어스트 백작은 상대할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

제론은 가만히 서서 주위를 슥 둘러봤다. 위압감이 시선을 따라 부챗살처럼 쫙 퍼져 나갔다.

"지금 뭐 하는 건가? 설마 나랑 싸우겠다는 뜻인가?"

1왕자가 나서서 말했다. 1왕자는 실망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에어스트 백작의 그릇이 너무 작았다. 보아하니 무력과 기간트 센스만으로 여기까지 온 사람에 불과했다.

'뛰어난 사람을 가신으로 들였군.'

1왕자의 뇌리에 처음 봤던 총관이 떠올랐다. 그가 누군지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능력에 대해서는 별생각 없었다.

'역시 말레피 후작가야. 이름이 바이스라고 했던가?'

1왕자는 생각을 정리했다. 보아하니 에어스트 백작령의 미래는 없었다. 이곳은 조만간 사라질 것이다. 여기에 있느니 차라리 다른 곳으로 가서 적들의 뒤를 치는 게 훨씬 나았다.

'나중에 끌어들여야겠어.'

바이스에게 언질이라도 하고 에어스트 백작령을 떠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 보잘것없던 영지를 이렇게 크게 키운 걸 보면 능력이 정말로 대단한 모양이었다.

그런 인재를 놓칠 수는 없지 않은가.

"아무래도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닌가 보군. 이만 나가 보게."

1왕자의 축객령에 제론은 당황한 척하며 머뭇거리다가 예를 취하고 물러갔다. 사실 이 모든 것이 제론의 의도였다. 제론은 1왕자가 영지에 있는 것이 불편했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진짜 힘을 1왕자 앞에서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또한 괜한 생색으로 나중에 귀찮아지는 건 딱 질색이었다.

제론이 밖으로 나가자 1왕자가 코웃음을 쳤다.

"흥, 떠날 준비를 해라."

1왕자의 명령에 몰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로 떠나실 생각이십니까?"

"그럼 몰트 경은 여기 더 있고 싶나? 그따위 취급을 받았는데?"

"그, 그건 아닙니다만……."

"됐네, 이 영지에는 미래가 없네. 성은 좀 탐나지만 그뿐이지. 이 성 역시 그가 지었다고 했으니 딱 한 사람만 데리고 갈 생각이야."

"그게 누구입니까?"

몰트는 대충 예상했지만 그렇게 물었다. 1왕자의 의중을 확실히 파악해 둬야 나중에 실수로 후회하지 않는다.

"알면서 뭘 묻나? 여기 총관인 바이스 폰 말레피를 데려가야겠다. 지금 당장 데려가면 좋겠지만 거절할 게 뻔하고, 나중에 기회를 봐서 채 가야겠지."

"알겠습니다. 하면 즉시 떠날 준비를 하겠습니다. 왕궁으로 돌아가시는 것입니까?"

1왕자가 고개를 저었다.

"거기 가서 뭐 하겠느냐? 둘째가 저렇게 설치는데. 난 문터 후작령으로 가야겠다."

문터 후작령이라는 말에 몰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알고 준비시키겠습니다."

몰트가 물러가자 1왕자가 빙긋 웃었다.

"여기가 아니라도 써먹을 놈은 많으니까. 문터 후작이라면 이런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겠지."

문터 후작가는 슈린 공작가에 살짝 거리를 둔 가문이었다. 그리고 최근 슈린 상단이 흔들리면서 입지를 더 탄탄히 다진 가문이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를 중심으로 힘 있는 귀족 가문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다는 점이었다.

1왕자는 그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사실 문터 후작가의 힘으로는 절대 슈린 공작가를 이기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 상황을 잘 이용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그게 가능해진다.

"그나마 에어스트 백작령이 쉽게 무너질 것 같지 않아서 다행이야."

분위기를 보니 기간트가 최소 100기는 있는 듯했다. 그 정도라면 슈린 공작가 연합군에 심각한 타격을 입힐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타격을 입은 슈린 공작가를 문터 후작가가 가만히 내버려 둘 리 없었다. 물론 사전 공작이 약간 필요하지만 말이다.

"정말 속 썩이는 녀석이라니까. 이번에는 아주 따끔하게 혼을 내줘야겠어. 섬 같은 곳에 유배라도 보내 둬야겠어. 해적이 득실거리는 곳에 보내면 정신 번쩍 차리겠지."

1왕자의 중얼거림을 들은 몰트는 가슴이 서늘하게 식었다. 저 말은 2왕자를 섬으로 유배 보내 해적의 손으로 처단하겠다는 뜻 아닌가.

형식적으로 해적 소탕이나 한 번 하면 실리는 실리대로 챙기고 생색은 생색대로 낼 수 있으니 일석이조 아닌가.

1왕자는 왕위에 앉았을 때 자신의 인기를 관리하고 여론을 움켜쥘 계획을 벌써부터 짜고 있었다.

몰트는 조용히 할 일에 열중했다. 끝까지 붙어 있기만 하면 결코 뒤통수를 칠 사람은 아니었다. 지금으로서는 그것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나저나 이 아름다운 성이 부서진다고 생각하니 좀 안타깝군."

1왕자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맴돌았다.

"대체 뭘 어쨌기에 1왕자 전하가 하루도 머물지 않고 떠나시는 겁니까?"

바이스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그의 표정에는 약간의 불안감도 겹쳐 있었다.

안 그래도 영지전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1왕자가 해코지라도 하면 정말 곤란했다.

"시키는 대로 안 한다고 토라져서 가 버리네."

"예에?"

바이스는 제론의 말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제론의 배포에는 정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이거 받아."

바이스는 의아한 눈으로 제론이 내민 팔찌를 쳐다봤다. 고풍스러운 문양이 음각된 팔찌였다. 금색으로 빛나고 있었지만 금으로 만든 건 분명히 아니었다.

"이게 뭡니까?"

"통신 장비."

"예?"

통신 마법이 새겨진 아티팩트는 에어스트 백작령에도 몇 개나 있었다. 그걸 이용해 왕국 어디든 소식을 주고받는 게 가능했다.

한데 이런 팔찌 형태의 통신 아티팩트는 존재치 않았다. 통신 아티팩트는 기본적으로 상당히 크다. 복잡한 마법진을 많이 새겨야 하니 어쩔 수 없었다.

한데 이 팔찌는 어떠한가. 마법진을 새길 공간도 없어 보이지 않은가. 이런 형태에 고난도 마법을 담았다면 고대 유물밖에 답이 없었다.

"유물입니까?"

제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만든 것이었지만 굳이 그걸 설명해 줄 필요는 없었다. 나중에 시간이 더 지나고 영지가 완전히 안정되면 바이스에게 그에 관한 지식을 알려 줄 생각이었다.

어쨌든 지금은 아니었다.

"그건 한 사람과 직통으로 연결돼."

"영주님과 통신할 때 쓰는 거로군요."

제론이 고개를 저었다.

"바인이라는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아티팩트야."

"바인? 그게 누굽니까?"

"내가 개인적으로 가진 정보 조직의 수장. 문두스라는 조직인데 제법 쓸 만하지."

"지난번 수도에 가셨을 때 만드셨다던……."

바이스의 말에 제론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정보를 주무르는 데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이니까 잘 얘기해 봐.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좋겠지."

제론은 바인의 능력을 믿긴 하지만, 그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아무리 뛰어나도 혼자서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또한 천재도 빈틈은 있기 마련이었다.

바이스라면 훌륭히 그 빈틈을 메워 줄 것이다. 또한 바인으로부터 어떤 정보를 받아서 어떻게 움직일지 계속 생각하다 보면 새로운 능력을 얻을 수도 있었다.

"정보망은 지속적으로 확대 중이긴 한데, 아직 많이 모자라니까 감안해."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바이스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사실 이 시기에 문두스와 연결시켜 준 것은 1왕자가 이 전쟁에 개입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1왕자는 에어스트 백작령을 떠나기 전에 문터 후작가에 대한 얘기를 했다. 그것만으로도 향후 이 영지전이 어떤 식으로 번져 나갈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했다.

영지전은 이제 피할 수 없었다. 기왕 싸울 거면 이기는 게 좋다. 제론은 이번에 압도적인 힘을 보여 줄 생각이었다. 물론 아직 테오스를 공개하는 건 곤란했지만 말이다.

바이스의 집무실에서 나온 제론은 세나를 찾아갔다. 세나는 1왕자가 왔다 간 사실도 모르고 공방에 틀어박혀서 기간트만 만지고 있었다.

제론이 팔아먹겠다고 안겨 준 100기의 기간트 때문에 공방에서 나올 틈도 없었다.

사실 이번에 바인이 구해 준 인재 중에는 엔지니어도 제법 있었다. 다만 어떤 이유로든 한 번 바닥까지 무너졌던 자들이라서 다시 제 실력을 찾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그들이 있어서 절망하지 않고 일을 처리해 나가는 게 가능했다. 복잡하지 않은 일을 모두 그들에게 맡긴 것만으로도 일이 대폭 줄어들었다.

제론은 세나를 떠올리며 빙긋 웃었다. 어느새 세나의 공방 바로 앞에 도착했다. 세나의 공방은 오로지 세나만 드나들 수 있었다. 유일한 예외는 제론뿐이었다.

나머지 엔지니어는 따로 지은 기간트 공방에서 일을 했다. 성 밖에 거대한 창고를 만든 다음 그곳을 기간트 공방으로 꾸몄다.

지금도 그곳에서는 뚱땅거리는 소리가 밤새 울린다. 그들 역시 잠을 줄여 가며 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제론이 쌓아 둔 기간트가 워낙 많기에 아무리 일을 해도 끝이 없었다.

'이번에 또 100기가 넘게 생기겠군.'

영지전에서 승리하면 네이드 후작령의 기간트는 물론이고 그들을 돕기 위해 나선 가문의 기간트까지 싹 흡수할 수 있었다.

"엔지니어를 더 구해야겠어. 공방도 몇 개 더 짓고."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세나의 공방으로 들어갔다. 세나의 공방에는 따로 문이 만들어져 있지 않다. 텔레포트를 이용해서 출입했다.

공방에 도착하자마자 제론의 눈에 들어온 것은 세나가 아니었다. 평소에는 피로에 절어 기간트를 손보고 있는 세나의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피처럼 붉은 기간트 한 기가 제론의 정면에 서 있었다. 세나가 일부러 그곳에 기간트를 놔뒀음이 분명했다. 제론이 도착하면 바로 볼 수 있도록 말이다.

"이건……."

"어때요? 멋지죠? 제가 준비한 선물이에요."

붉은 기간트를 보고 있으니 아련한 기억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실바로군."

"상징 같은 거잖아요."

제론은 붉은 실바로 다가갔다. 그리고 다리를 쓰다듬었다. 겉모습은 실바였는데, 실제로는 실바가 아니었다. 제론은 그걸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소드 마스터가 되니 이런 것도 가능해지는군.'

실바의 마나 코어가 확실히 느껴졌다. 가동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그냥 실바랑은 좀 다른 거 같은데?"

제론의 말에 세나가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겉모습은 실바와 똑같다. 한데 그저 만져 본 것만으로 달라졌다는 걸 알아채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맞아요. 그냥 실바가 아니에요. 완전히 새로 만든 거나 다름없어요."

"새로 만들었다고?"

"고생 좀 했어요. 솔직히 말하면 이걸 만들면서 새로운 기간트를 설계했어요."

제론이 놀란 눈으로 세나를 쳐다봤다. 새로 설계하는 기간트라니. 대체 언제 그런 일까지 했단 말인가. 또 언제 그렇게 실력이 늘었단 말인가.

"근데 솔직히 저 혼자서는 못하겠어요. 일단 마나 코어는 완전히 손들었고요."

세나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종이 뭉치 하나를 꺼냈다. 그것은 세나가 만든 새 기간트의 설계도였다.

"아직 디자인도 완성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관절이나 부품에 대한 설계는 대부분 끝났어요. 마나 코어나 마나 로드도 어느 정도는 했는데 미진한 부분이 너무 많아요."

제론이 눈을 빛내며 설계도를 찬찬히 훑어봤다. 세나는 그 모습을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도와주세요."

제론이 고개를 들어 세나를 바라봤다. 별처럼 반짝이는 세나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녀의 눈은 열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니, 온몸에서 열정의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

"좋아, 도와주지. 하지만 이걸 완성시키는 건 어디까지나 세나가 되어야 해. 할 수 있겠지?"

세나의 얼굴이 환해졌다. 바로 그것을 원했다.

"아, 그보다 붉은 실바에 대해 설명해 드릴게요. 이건 말이죠, 베르의 마나 코어를 뜯어다가 썼어요."

"베르?"

재론의 눈에 경악이 어렸다.

베르의 마나 코어를 실바의 몸체에 갖다 붙이다니, 정말 대단했다. 아니, 그게 가능한 일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정말 고생 많이 했어요. 그래도 베르를 계속 뜯어서 살피다 보니 결국은 방법이 생기더라고요."

마나 코어는 딱 그 한 부분만으로 끝나는 부품이 아니었다. 온몸에 퍼진 마나 로드부터 코어 주변의 부품들, 그리고 각종 마법진까지 다 어우러진 그야말로 작품이었다.

실바는 그래도 좀 단순한 편이었다. 하지만 베르는 그 복잡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베르의 마나 코어를 실바에 적용시켰다는 건 실바의 구조 자체를 완전히 새로 만들었다는 뜻이었다.

"아직 세부 조정은 못 했어요. 한번 타 보세요."

제론은 고개를 들어 붉은 실바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단번에 뛰어 조종석에 앉았다.

세나는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실바의 조종석까지는 5미터가 훨씬 넘는다. 그걸 제자리에서 단숨에 뛰어올랐으니 놀라는 게 당연했다.

텅!

해치가 닫혔다.

키이이이이잉!

실바가 가동을 시작했다. 마나 코어가 굉음을 울리며 온몸에 마나를 공급했다.

제론은 지그시 눈을 감고 실바로부터 전해지는 진동과 마나의 흐름을 받아들였다. 단숨에 동조가 이뤄졌다.

쿵!

실바가 한 걸음 걸었다.

제론은 그 단순한 한 동작으로 실바에 응축된 거대한 힘을 느꼈다. 어마어마했다. 이 실바라면 테오스만큼은 안 되겠지만 그에 버금갈 정도의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힘과 함께 자신감이 맹렬히 솟아났다. 이걸 타고 전장을 휘저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쿵! 쿵! 쿵!

제론은 단순한 동작을 통해 실바의 움직임을 점검했다. 조율이 제법 잘되어 있었다. 무려 3년 동안이나 제론의 실바를 담당했던 세나가 만든 기간트이니 어련하겠는가.

시험 기동을 끝낸 제론이 해치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세나를 향해 엄지를 세워 줬다.

이건 정말 물건이었다. 그리고 새로 설계한 기간트에 대한 기대치가 최고조로 치솟았다. 또 어떤 굉장한 물건이 나올지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세부 조율을 해 드릴게요. 내일 다시 오세요. 참, 이건 아공간이 있는 거 아시죠? 장비는 여기 있어요."

세나가 내민 장비는 일반적인 것보다 상당히 간소했다. 겉보기에는 상체를 가리는 가죽 갑옷과 롱소드가 전부였다. 물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마법진이 촘촘히 새겨진 팔찌와 발찌를 착용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일이었다.

"더 간단히 만들고 싶은데 어렵더라고요. 새로 설계하는 기간트 장비는 꼭 크기를 줄이고 싶어요. 궁극적으로는 팔찌나 버클에 담는 게 꿈이에요."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기간트 엔지니어와 마법사라면 누구나 갖는 꿈이었다. 그리고 제론에게는 그 꿈을 실현시켜 줄 방법이 있었다.

"아, 그리고 강철이 부족해요. 기간트 부품 수급이 어려워서 하나하나 다 만들고 있거든요."

"해결해 주지. 얼마나 있으면 되지?"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요."

제론은 그 말에 세나의 공방을 슥 둘러봤다.

"이 안을 꽉 채워 주지."

세나는 그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과장이 많이 섞인 말이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세나의 공방을 꽉 채울 정도의 강철을 구하는 것만 해도 간단치 않은 일이었다.

기간트로 인해 강철 역시 수요가 많은 품목이었다. 그러니 갑자기 다량으로 구매하는 게 쉽지 않았다. 가격도 만만치 않았고 말이다.

"기대할게요."

세나가 그렇게 말하며 생긋 웃었다. 공방에서 일만 하느라고 꾸밀 시간이 없었는데도 세나의 외모는 빛이 났다. 검댕이가 얼굴 곳곳에 묻어 있었지만 제론은 그 모습이 오히려 더 아름답게 보였다.

가만히 세나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제론은 묵묵히 돌아서며 한 손을 슬쩍 들어 주었다. 그리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

세나는 제론이 사라진 자리를 아쉬운 눈으로 한동안 바라봤다. 그러다가 이내 주먹을 불끈 쥐고는 붉은 실바를 바라봤다.

"그럼 어디 해 볼까?"

심혈을 기울여서 조율할 것이다. 이 기간트라면 제론은 군대에 있을 때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아마 어떤 적이 오더라도 능히 물리칠 수 있으리라.

세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붉은 실바를 향해 다가갔다. 이 기간트가 전장을 휘젓는 장면이 훤히 그려졌다.

심장이 쉬이 진정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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