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 네이드 후작령
에어스트 백작령의 약진은 상당히 많은 곳에 긴장감을 조성했다. 그중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인 건 당연히 네이드 후작가였다.
네이드 후작령은 에어스트 백작령과 인접했다. 사실 그동안은 아예 신경도 안 썼다. 하지만 최근 제론이 활발히 움직이면서 위상이 달라지고 나니, 뒤통수가 근질거렸다.
네이드 후작령도 사실은 변방의 영지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전 젤레 영지를 비롯한 네 영지와는 달리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했기에 상업이 상당히 발달한 곳이었다.
일단 지금의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가려면 반드시 네이드 후작령을 지나야만 했다.
네이드 후작령은 이런 식으로 영지와 영지를 이동할 때 반드시 지나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더구나 네이드 후작령에는 텔레포트 게이트가 있었기에 그걸 이용하는 사람의 수도 엄청났다.
네이드 후작령은 그를 이용해 막대한 돈을 갈퀴로 쓸어 담았다. 그저 통행세만 조금 받아도 돈이 우수수 쏟아졌으니 영지가 부유해질 수밖에 없었다.
네이드 후작은 심각한 얼굴로 집무실에 앉아 가신들을 둘러봤다.
"어떻게 생각하나? 에어스트 백작령이 이대로 가만히 있을 것 같은가?"
"그래도 세 개나 되는 영지를 병합했으니 그걸 안정시키는 것만 해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분간은 안전하다 이건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제가 보기에 에어스트 백작은 결코 호전적인 인물이 아닙니다. 그저 지금의 영지를 지키기만 할 공산이 큽니다."
"맞습니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농지가 어찌나 거대한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왕국의 식량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한데 굳이 전쟁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과연 그럴까?"
가신들의 설득에도 네이드 후작의 표정에 어린 근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걸 본 가신들은 누군가 후작에게 불안감을 조성했다는 것을 알아챘다.
"에어스트 백작령에 기간트가 몇 기나 있는 줄 아는가?"
다들 대답하지 못했다. 알려진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네이드 후작은 굳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무려 백 기 가까이 있다고 하네."
"예? 백 기란 말입니까?"
"어떻게 그런!"
다들 믿을 수가 없었다. 일개 백작령에 기간트가 백 기나 있다니 그걸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백 기의 기간트라면 작은 공국 수준의 무력이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이래도 위험하지 않단 말인가?"
다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여전히 에어스트 백작이 전쟁을 일으킬 리가 없다고 판단했지만, 저런 무력을 갖추고 있다면 위험했다.
"자, 이제 대책을 말해 보게."
"백 기라면 심각한 수준입니다. 왕궁 쪽에 먼저 보고를 하는 게 어떻습니까? 반역과 잘 엮으면 뭔가 그림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럼 그놈들은 가만히 있을 것 같나?"
"예?"
"기간트를 미리 빼돌리지 않겠냐는 말일세. 나라면 그렇게 할 것 같은데?"
의견을 꺼냈던 가신은 본전도 못 찾고 입을 다물었다.
"기간트의 수에 대한 건 우리도 자유롭지 않네. 우리도 그런 식의 대비책을 만들어 놨는데, 기간트를 백 기나 가진 영지가 그 정도 대비도 안 해 놨을 것 같은가?"
네이드 후작의 말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다가 가신 한 명이 다른 의견을 냈다.
"에어스트 백작령으로부터 기간트를 구입하는 건 어떻습니까?"
네이드 후작이 어이없는 눈으로 그 말을 꺼낸 가신을 노려봤다.
"자네라면 기간트를 팔겠는가?"
"제가 팔도록 만들어 보겠습니다. 에어스트 백작은 분명히 호전적 인물이 아닙니다. 불필요한 분쟁의 가능성을 어필한다면 틀림없이 수긍할 것입니다."
네이드 후작이 그제야 솔깃한 눈으로 가신을 바라봤다. 나머지 가신도 관심을 갖고 주목했다.
"어느 정도 수준으로 구입하면 되겠나?"
"일단 우리는 돈이 많습니다. 다다익선 아니겠습니까? 최대한 많이 구입해 오겠습니다. 최소 삽십 기 이상 구입해야 안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네이드 후작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어느 정도 안심할 수 있었다. 네이드 후작령이 보유한 기간트의 수가 육십 기였다. 거기에 삽십 기를 추가하면 무려 구십 기가 된다.
"하지만 에어스트 백작이 바로 그 전장의 붉은 학살자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누군가 나서서 그렇게 말하자, 네이드 후작의 표정에 또 불안감이 깃들었다.
"하면 오십 기로 하지. 가능하겠나?"
네이드 후작의 물음에 처음 말을 꺼냈던 가신은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일단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통행을 금지시키는 건 어떻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네이드 후작이 또 솔깃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협상하러 가기로 한 가신이 다급히 말렸다.
"그건 안 됩니다! 그건 오히려 전쟁의 빌미를 제공하는 꼴이 됩니다."
듣고 보니 그렇다. 네이드 후작은 일단 여기서 회의를 마무리했다.
"좋아.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지. 자네는 당장이라도 에어스트 백작령에 가 보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가신이 물러가자 네이드 후작은 피곤한 듯 의자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서서히 잠들었다.
"하여튼 꼭 저런 놈이 있단 말이야."
깁스 남작은 피식 웃으며 사절단을 꾸려 막 떠나는 마차를 쳐다봤다.
"준비됐나?"
"예."
깁스 남작은 손짓을 하고는 돌아섰다. 여기 더 있어선 안 된다. 이제부터 이 근방은 전쟁터가 될 테니까.
"레늄 왕국에서 너무 오래 있었어. 이렇게 끈질길 줄이야. 쯧쯧."
깁스 남작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텔레포트 게이트로 향했다. 여기서 볼일은 다 끝났다. 아마 에어스트 백작령과 네이드 후작령은 격렬하게 싸울 것이다.
그리고 뒤에서 조금만 정보와 소문을 조작하면 내전으로 크게 확장시키는 일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가만 있자…… 그럼 네이드 후작령 쪽에 2왕자를 붙이면 되나?"
각각 왕자가 하나씩 붙으면 내전은 걷잡을 수 없이 퍼질 것이다.
깁스 남작이 기분 좋게 웃으며 텔레포트 게이트에 몸을 실었다.
"영주님은 대체 어디로 가셨지?"
바이스는 다급한 목소리로 성 곳곳을 돌아다니며 제론을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찾을 수가 없었다.
"하아. 하필이면 이럴 때……."
갑자기 네이드 후작령에서 격렬한 항의가 들어왔다.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보낸 사절단이 박살 났다는 것이다.
바이스의 입장에서는 그걸 왜 에어스트 백작령에 따지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따름이었다. 그래서 상식적인 선에서 대응을 했다.
한데 난데없이 네이드 후작령에서 영지전을 선포하겠다고 협박을 해 왔다. 전쟁이 싫다면 보상을 하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 보상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라는 점이었다.
네이드 후작령에서는 에어스트 백작가가 소유한 기간트 중 칠십 기를 팔라고 했다. 차라리 제대로 돈을 지불하겠다고 했으면 고려라도 했을 것이다. 한데 가격을 후려쳐도 너무 후려쳤다.
반값에도 훨씬 못 미치는 가격에 그걸 가져가겠다고 하니, 이건 생떼를 쓰는 거나 다름없었다.
바이스는 한편으로는 이번 일에 대해 조사를 명령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영지전을 준비했다.
솔직히 네이드 후작령과 전쟁을 벌이면 압도적으로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영지의 라이더 육성 계획이 궤도에 오르면서 당장이라도 기간트를 몰고 전력에 도움이 될 수 있을 만한 수습 라이더가 대거 늘어났다.
물론 진짜 라이더처럼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또한 기간트 기동 시간도 다른 라이더에 비해 턱없이 모자랐다.
하지만 다른 베테랑 라이더의 지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에어스트 백작령에는 그 어느 영지보다 뛰어난 라이더를 보유하고 있었다. 군대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라서 집단전에 특히 강했다.
그런 라이더에게 훈련을 받았으니 아무리 수습 라이더라고 하지만 기본적인 기간트 전술에 밝았다.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단숨에 동원 가능한 기간트의 수가 무려 백삼십 기였다.
그러니 네이드 후작령이 아무리 전력을 몽땅 이끌고 온다 하더라고 얼마든지 막아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낙관적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네이드 후작령에 다른 세력이 붙은 것이다. 바로 슈린 공작가였다.
슈린 공작가는 이번 일을 기회로 여겼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기만을 호시탐탐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현재 자금 사정이 안 좋으니 그걸 단번에 만회할 수단이 될 수도 있었다.
어쨌든 여러모로 슈린 공작가에는 이번 사태가 호기로 작용했다.
만일 슈린 공작가가 네이드 후작령을 전적으로 지원한다면 아무리 에어스트 백작령에 기간트가 많아도 절대 이길 수 없었다.
슈린 공작가를 따르는 수많은 가문이 있었다. 그들 역시 어떻게든 한손 거들고자 할 것이다. 그러면 네이드 후작령에 모이는 기간트의 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사태는 절대 바이스 혼자서 막아 낼 수 없었다. 제론이 있어야만 한다. 그런데 영주인 제론을 아무리 찾아도 없으니 속이 타들어 가다 못해 새까맣게 재가 되어 버렸다.
바이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떼, 성의 행정 요원 하나가 다급히 달려왔다.
"총관님! 큰일입니다!"
바이스가 긴장한 눈으로 행정 요원을 쳐다봤다.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워낙 큰일이 연달아 터지니 저런 말만 들어도 절로 긴장되었다.
"무슨 일이냐?"
"2왕자 전하께서 네이드 후작령에 도착하셨다 합니다!"
"2, 2왕자 전하께서?"
바이스의 눈이 커다래졌다. 2왕자가 직접 후작령에 도착했다는 건 이번 영지전을 지원하겠다는 뜻이다. 사실 이는 정치적으로 워낙 민감한 사항이라서 잘 하지 않는 짓이다.
한데 2왕자는 그렇게 했다.
"하아. 정말 물불 안 가리는군."
바이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보기에 2왕자는 생각이 깊지 않았다. 충동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예전 체른산 유적을 발굴하는 문제도 그렇다. 솔직히 왕자나 되는 사람이 전쟁터에 와서 직접 유적을 발굴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골치 아프게 됐군. 몸만 온 건 아니겠지?"
"호위로 근위 기사와 근위병이 함께 왔습니다."
"그들까지 영지전에 참여시키면 일이 정말로 커지겠군. 설마 끼어들지는 않겠지?"
"그저 구경만 할 셈인 것 같습니다. 대신 제법 많은 물자를 챙겨 왔습니다."
"일단 무조건 경계에서 막아야 돼. 우리 영지로 전투가 넘어오면 곤란해."
경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곳은 낮은 언덕이 몇 개 있는 황무지였다. 그곳을 지나서 안으로 들어와야 비로소 에어스트 백작령이 있었다.
예전 젤레 영지를 비롯한 뤼그너 남작령 등이 맞닿아 있는 곳이기도 했다. 거기를 지나야 비로소 새로 조성된 곡창지대가 나온다.
한데 그 거리가 매우 짧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만일 적이 안으로 밀고 들어오면 농지가 완전히 망가질 수도 있었다.
"영주님은 아직이십니까?"
바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이럴 때 제론이 있었다면 전쟁에도 큰 도움이 될 텐데 정말 아쉬웠다.
붉은 학살자가 전쟁에 참여한다면 적이 아무리 많아도 해볼 만했다.
'게다가 그 신형 기간트…….'
그걸 꺼낼 수 있다면 아마 훨씬 더 전쟁이 유리해질 것이다. 물론 제론이 그렇게까지 할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일단 난 영주님의 행적을 좀 수소문해 볼 테니까 적의 동태에 각별히 신경을 써라."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아직 확실치는 않지만 묘한 소문이 있습니다."
"소문?"
"1왕자 전하께서 이쪽으로 오고 계시다는 소문입니다."
"1왕자 전하?"
바이스의 눈이 커다래졌다. 만일 그 소문이 진짜라면 이건 일이 생각 이상으로 커지게 된다. 그야말로 고래 싸움에 끼어든 꼴이 된다.
'만일 내전으로 이어지면…….'
상상도 못할 결과가 만들어진다. 전쟁의 상처를 간신히 보듬은 레늄 왕국에 지울 수 없는 흉터가 질 것이다. 어쩌면 국력이 급격히 약화되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을 수도 있었다.
바이스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슈린 공작가를 떠올렸다. 어쩌면 이번 일도 그들이 깊게 개입했을지 모른다. 아니, 그럴 확률이 컸다.
왕권이 약화되어 영향력이 떨어지면 슈린 공작가는 대번에 공국을 선포할 수도 있었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주변 영지를 탐욕스럽게 집어삼키면서 말이다.
"후우. 이러다가 왕국이 갈기갈기 찢어질 수도 있겠군."
솔직히 그런 상황이 되면 가장 유리한 곳이 바로 여기 에어스트 백작령이었다.
영토는 다른 어떤 영지보다 컸다. 새로 조성된 곡창지대만 해도 보통 후작령보다 넓었다. 거기에 암석 지대는 어떤가. 거기가 정리되면 그것 역시 백작령 정도의 크기였다.
거기에 작긴 했지만 기존 남작령 세 곳이 병합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일반적인 백작령에 육박하는 넓이였다.
거기에 바닷가까지 있었다. 잘 개발만 하면 근방의 섬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영토를 갖게 될 것이다. 그냥 독립한다면 공국이 아니라 작은 왕국이라고 해도 될 정도의 규모였다.
"어쨌든 영주님부터 찾아야지. 이거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됐군."
영주도 찾아야 하고, 또 전쟁 준비도 해야 한다. 바이스는 이런 대규모 전쟁에서 그 흐름을 한 방에 바꿀 능력을 갖고 있었다.
다만 그 능력을 쓰기 위해선 미리 시간을 충분히 들여 준비를 해야만 한다. 그것까지 하려면 시간이 너무 빠듯했다.
바이스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제론이 있을 만한 장소로 향했다.
☆ ☆ ☆
영지의 상황이 그렇게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아니, 세상 모든 걸 잊은 채 제론은 하염없이 검만 휘두르고 있었다.
어느새 제론은 암석 지대 중간에 있었다. 검을 휘두르면서 조금씩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사악! 사악! 사악!
검의 궤적을 따라 푸른 초승달이 연달아 그려졌다. 소리도 거의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근처의 암석이 두부 갈라지듯 싹둑싹둑 잘려 나갔다.
그냥 잘리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제론의 움직임이 많아질수록 더 잘게 잘려져 바위가 아니라 돌멩이처럼 변해 버렸다.
그렇게 제론은 암석 지대 한가운데에서 무아지경에 빠져 검을 휘두르며 근방을 완전히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제론은 이곳에서 무려 열흘 동안 쉬지 않고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버텼다. 보통 사람이라면 죽어도 벌써 죽었어야 할 상태였다.
하지만 정작 검을 휘두르는 제론의 얼굴에서는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또한 은은한 미소마저 머금고 있었다. 정말로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했다.
사악! 사악! 사악!
검을 통해 막대한 기운이 쏟아져 나갔다. 하지만 그렇게 나간 만큼 다시 온몸의 모공을 통해 흡수되었다. 그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제론이 휘두르는 검의 흐름이 달라졌다.
스아악!
검의 궤적에 걸린 바위가 그대로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나갔다. 그동안 보였던 푸른 초승달도 없었다. 그저 검이 움직였고, 그 흐름에 따라 바위가 흩어졌다.
스아악!
검이 긴 궤적을 그리며 뻗어 나갔다. 거기에 걸린 바위가 또 가루로 변해 흩어졌다.
콰드드득!
바닥에 있던 돌멩이들이 검격에 휘말려 하늘로 솟구쳤다. 그리고 그것 역시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콰득! 콰득! 콰우우우!
제론의 주변에 일어나는 바람이 점점 강렬해졌다. 그냥 바람이 아니었다. 마나의 바람이었다.
검을 통해, 또 각종 움직임을 통해 쏟아져 나가는 막대한 양의 마나와 그를 보충하기 위해 온몸으로 유입되는 마나로 인해 일어난 폭풍이었다.
제론은 폭풍을 이끌고 검을 휘두르며 사방으로 격렬하게 움직였다. 암석 지대 한가운데에 있다가 옆으로 이동을 시작한 것이다.
제론이 뿜어내는 마나의 폭풍에 근방에 있던 스톤에그들이 우수수 깨어났다.
콰드드득!
콰드드득!
거대한 돌거인이 불쑥불쑥 일어났다. 수십 마리나 되는 돌거인이 제론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에게는 오직 움직이는 것을 공격하는 본능만 있었기에 마나 폭풍에도 두려움 없이 달려들었다.
쿠오오오오오!
제론의 몸을 중심으로 거대한 마나의 회오리가 휘몰아쳤다. 그리고 그 회오리에 달려오던 돌거인이 모조리 휘말렸다.
콰득! 콰득! 콰드드득!
돌거인 역시 다른 바위와 마찬가지 신세가 되었다.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그러면서 뭉친 마나가 자연스럽게 풀려 마나의 회오리에 흡수되었다.
회오리가 점점 더 커졌다.
그렇게 시간이 계속 흐르자, 백 마리가 넘는 돌거인이 제론의 권역에 휘말려 마나만 남기고 사라졌다.
고오오오오!
제론은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서 회오리치는 마나를 가만히 느끼며 서 있기만 했다.
막대한 마나가 제론의 몸을 들락거렸다. 제론은 그저 가만히 서서 그것을 관조했다.
우드득! 우드드득!
제론의 뼈와 근육이 뒤틀렸다. 마나의 압력이 너무 강해서 몸이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 몰아쳤다.
코에서 피가 터졌다.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다. 속에서 울컥울컥 피가 올라와 입으로 쏟아져 나갔다.
입고 있던 옷이 모조리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제론의 몸에 남은 것은 초고대 문명의 유적에서 얻은 물품들뿐이었다.
지이이잉!
팔찌와 허리띠, 그리고 반지가 제론의 몸이 폭발하지 않도록 도움을 주었다.
우득! 우득! 우드드득!
하지만 여전히 온몸의 근육과 뼈가 뒤틀렸다. 핏줄이 터질 것같이 부풀었고, 장기가 곤죽이 되어 물처럼 출렁거렸다.
놀라운 건 그렇게 만신창이가 되었는데도 살아 있다는 점이었다. 더구나 정신은 말도 못하게 명료했다. 그 어느 때보다 머릿속이 맑았다.
제론은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을 우연으로 치부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검을 휘둘렀고, 그로 인해 이런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 마나의 회오리는 결국 자신의 마나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 모든 걸 명확히 인식한 순간, 의념이 강하게 섰다. 마치 정수리에서 발끝을 관통하는 기둥이 선 느낌이었다.
콰아아아아아아!
회오리가 더욱 빨라졌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휘도는 마나가 그대로 제론의 온몸을 찢어 버릴 것 같았다.
순간적으로 제론도 그렇게 생각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순간은 지극히 짧았다. 제론은 자신이 세운 의념의 기둥에 모든 걸 집중했다.
마나의 회오리가 조금씩 제론의 몸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느릿느릿 들어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쿠오오오오!
회오리를 이루고 있던 그 막대한 마나가 모조리 제론의 몸에 스며들었다. 제론은 터질 것처럼 고통스러웠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 냈다.
직감적으로 지금이 가장 중요한 순간임을 알아차렸다.
쩌적! 쩌저저적!
제론의 피부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갈라졌다.
우득! 우득! 우드드득!
뼈와 근육이 뒤틀리며 모양을 잡아갔다.
제론의 피부가 몇 번이나 벗겨지고 새로 나기를 반복했다. 그동안에도 뼈와 근육은 마치 물처럼 출렁출렁 움직였다.
이내 모든 것이 사라지고 적막이 찾아왔다.
제론은 똑바로 선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물론 벌거벗은 채였다.
아기처럼 뽀얀 피부에 키도 자랐고, 몸에는 적당한 근육이 자리 잡았다.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이 서 있는 듯했다.
번쩍!
제론이 눈을 뜨자 마치 번갯불이 사방으로 쏟아져 나가는 듯했다. 광채가 주위를 한차례 휘감았다가 사라졌다.
"후우우욱!"
제론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맑은 기운이 호흡을 통해 들락거렸다. 전혀 새로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익숙했다. 모든 걸 지극히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양팔을 벌렸다. 세상을 꽉 채운 마나가 달려드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실제로 그러고 있었다. 온몸을 휘도는 거대한 기운이 명확히 느껴졌다.
단전을 꽉 채운 기운은 분명히 마나였다. 예전보다 몇 배나 더 많아졌다. 하지만 그건 그저 단편적인 변화일 뿐이었다.
마나의 질이 완전히 달라졌다. 예전보다 훨씬 적은 양의 마나로 수십 배의 위력을 낼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제론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것이 소드 마스터로구나."
드디어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 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왜 그렇게 벽이 높고 단단했는지. 또 어떻게 소드 마스터로 오르는 그 높은 계단을 오를 수 있었는지.
말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이건 오롯이 깨달음의 문제였다. 다만 암석 지대에서 암살자의 습격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는 건 분명했다.
장소가 달랐으면 이렇게 되지 못했을 것이다. 암석 지대의 스톤에그가 작지만 큰 역할을 했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마나가 더해지면서 벽을 넘어설 수 있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제론은 훨씬 더 오랜 시간을 검에 매달려야 했을 것이다. 적어도 수십 년 이상을 말이다.
제론은 영지 쪽을 바라봤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영지 쪽에서 스멀스멀 흘러오는 전쟁의 기운이 느껴졌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쟁의 투기를 느끼다니 말이다.
이것이 바로 소드 마스터였다.
제론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리고 천천히 영지를 향해 걸어갔다.
걷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러다가 이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그렇게 제론이 다시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돌아갔다.
진정한 소드 마스터가 되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