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5화 (56/217)

Chapter 9 흔들기

제론은 곧장 영지로 복귀했다. 당분간은 베어크 영지에 갈 일이 없었다. 물론 유적은 얘기가 다르다. 유적 창고에 보관한 철괴가 필요하면 언제든 가 볼 것이다.

유적을 통해 영지에 도착한 제론은 일단 지하 수련장에서 나갔다. 한데 생각보다 성에 활기가 가득 차 있어서 놀랐다.

사실 과도한 업무량에 밀려서 다들 허덕이고 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막상 와서 보니 예상과 전혀 달랐다.

제론은 일단 바이스부터 찾아갔다. 영지의 총관이니 그것이 순서였다.

"영주님! 드디어 오셨습니까!"

바이스는 예상대로 제론을 크게 반겨 주었다. 한데 그의 얼굴에도 화색이 돌았다. 업무량에 짓눌리던 시절과는 완전히 달랐다.

"좋아 보이는군?"

제론이 의아한 눈으로 묻자, 오히려 바이스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영주님께서 일할 사람을 잔뜩 보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덕분에 요즘 다들 한시름 놨습니다."

"일할 사람?"

제론은 더 의문이 들었다. 일할 사람을 보내다니. 자신이 언제 그랬단 말인가. 게다가 바이스를 도울 정도면 상당한 고급 인력이라는 뜻이다. 그런 사람을 잔뜩 보낼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뭔가 이상해 알아보려던 제론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설마 바인이?'

제론은 바이스와 대화를 나누는 둥 마는 둥 하고 서둘러 집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바인에게 연락을 취해 확인했다. 역시 바인이 추진한 일이었다.

"대단하군. 사람 하나는 제대로 얻었어."

제론은 혀를 내둘렀다. 바인은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몇 배나 더 뛰어났다. 알아서 인재까지 찾아 보내 주니 말이다. 바인이 보낸 사람들이니 뒷조사도 확실히 끝냈을 것이다.

게다가 업무 처리량이 엄청났다. 정보에 관한 한 따라올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인재를 찾으면서 영지로 영입할 빈민을 고르고, 그러면서 슈린 공작가의 빈틈까지 찾고 있으니 말이다.

마음이 좀 편해졌다. 이젠 좀 더 자주 영지를 비워도 괜찮을 테니까.

제론은 마음을 가다듬으며 책상에 쌓여 있는 서류를 집어 들었다. 당분간은 영지 일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이것만 다 처리한 다음 다시 수도로 올라갈 것이다.

제론은 서류에 집중했다. 이내 집무실에는 사락사락 서류 넘기는 소리만 남았다.

제론은 급한 서류를 모두 처리한 후, 영지를 한 바퀴 둘러봤다. 영지가 워낙 넓어져 다 돌아보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나마 제론이 혼자서 빠르게 다녔으니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한 달이 넘게 걸렸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제론이 한창 영지를 돌아보고 있을 때, 에어스트 백작령에 손님이 들이닥쳤다.

제론은 한창 채석장을 둘러보다가 그 소식을 듣고 급히 성으로 돌아갔다. 그를 기다리던 손님은 클레였다. 제론은 그녀가 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기에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얼마 전의 일은 정말로 고마워요. 덕분에 일이 아주 잘 풀렸어요."

클레는 진심으로 제론에게 고마워했다. 제론이 아니었다면 텅텅 빈 광산을 막대한 돈을 주고 샀을 것이다. 디아만트 상단에 아무리 돈이 많아도 1,500만 골드는 상당히 부담이 되는 액수였다.

그뿐 아니라 어마어마한 매장량을 가진 광산을 구입할 수 있었다. 비록 2,000만 골드라는 돈이 나갔지만, 충분히 그 값어치를 하고도 남았다.

"덕분에 우리 영지 사업도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게 되었으니 서로 좋은 일이오."

"영지 사업이요? 또 뭔가 하시는 일이 있나요?"

클레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녀의 과도한 관심에 제론은 한발 물러나며 대답했다.

"항구를 건설 중이오."

"항구요?"

클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항구 건설을 마치 어린애가 모래성을 쌓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제론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다.

"항구를 건설하려면 들어가는 자재가 만만치 않을 텐데요."

제론은 굳이 그 말에 대해서 답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자재야 당연히 많이 들어간다. 자재뿐 아니라 인력도 엄청나게 필요했다.

하지만 다 해결할 수 있었다.

일단 석재야 암석 지대에서 조달하면 된다. 그곳의 돌을 모두 합하면 항구를 백 개는 지을 수 있었다. 또 목재는 주변 산맥에서 베어 오면 된다. 기간트를 이용하면 된다.

게다가 강철도 잔뜩 있었다. 유적의 창고에 얼마나 많은 철괴가 쌓였는지 헤아릴 수도 없었다. 그걸 다 쓰는 것도 일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걸 굳이 클레에게 시시콜콜 얘기해 줄 필요가 없지 않은가.

"항구를 보러 여기까지 온 거요?"

제론의 물음에 클레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살짝 눈을 흘겼다. 자신을 앞에 두고도 이렇게 빈틈 하나 내보이지 않는 걸 보니 왠지 얄미웠다.

"아뇨. 농지를 보러 왔어요."

"갑시다."

제론은 더 말을 섞지 않고 돌아섰다. 여기서 굳이 쓸데없는 얘기를 하며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이거 말고도 할 일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제론이 성큼성큼 걸어가자, 클레가 어이없는 눈으로 제론의 등을 바라봤다.

"하아. 원래 저런 사람이었나요?"

그녀의 질문에 안슈트가 고개를 저었다.

"저도 적응이 안 됩니다. 워낙 가벼운 모습만 봐서……."

사실 가벼운 모습만 본 건 아니었다. 체른산 방어군에서 대결을 하는 광경을 똑똑히 지켜봤으니까. 그때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기사 열 명의 목숨을 날려 버리는 광경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이해했다. 거기는 전쟁터였으니까. 또한 상황이 그랬으니까. 그래서 더 제론의 가벼운 모습만 기억에 남았는지 모른다.

물론 그 역시 붉은 학살자라는 정체를 감추기 위해 만들어진 모습이었지만 말이다.

"아가씨. 출발하셔야 합니다."

안슈트의 말에 클레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가, 가요."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 클레를 보며 안슈트가 나직이 한숨을 흘렸다.

두 사람은 빠르게 멀어져가는 제론을 열심히 쫓아갔다.

클레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쩍 벌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푸른 물결이 촤르륵 지나갔다.

굉장했다. 다른 곳에 비해 작물의 키가 달랐다. 너무나 풍성했다. 아직 알곡이 맺히지는 않았지만 이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건 그냥 풍년이 아니었다.

"엄청나군요."

끝이 없었다. 푸른 지평선이 보일 지경이었다. 높은 탑에서 보고 있으니 시작이 영주성 뒤쪽이라는 건 알 수 있었지만 끝이 어딘지, 또 양옆으로 얼마나 넓게 펼쳐졌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제법 넓죠?"

"제법이라고요? 이 정도로 넓은 농지는 아마 우리 왕국 안에 몇 개 안 될 걸요? 아니, 어쩌면 제일 넓을지도 모르겠네요."

살짝 흥분한 클레의 말투에 제론이 씨익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아직 다 개간한 게 아니오. 내년에는 저것의 10배를 생각하면 될 거요."

클레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10배라니!

저것만 해도 왕국 제일의 곡창지대가 될 수 있는데, 그 10배라니. 대체 그럼 얼마나 많은 곡물이 나온단 말인가.

"그 절반을 디아만트 상단에 주시겠다는 건가요?"

"힘들면 줄여도 되오."

클레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뇨. 다 할 수 있어요."

확실히 말로 정보를 듣는 것과 눈으로 직접 보는 것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었다. 이렇게 코앞에서 푸른 물결을 보고 있으니 앞으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혔다.

클레가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대체 감추고 있는 게 얼마나 많은지 볼 때마다 새로웠다.

"관리를 정말로 잘 하셔야겠어요."

"그럴 생각이오."

제론이 대충 대답한 티가 확 나자, 클레는 못마땅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중요한 문제였다.

"앞으로 이곳 에어스트 백작령은 레늄 왕국의 중심이 될 거예요. 이 정도 곡물이라면 왕국을 들었다가 놓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이곳을 노리는 사람이 많아질 거라는 뜻이에요."

클레는 그렇게 말하며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의 무심한 표정에 울컥했지만 그래도 이 말은 꼭 해 줘야만 했다.

"곡물 자체를 노리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이 영지를 노리는 사람도 있을 거예요. 조심하셔야 해요."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겠소."

또 건성이다. 클레는 발끈해서 소리쳤다.

"사람이 말을 하면 좀 진지하게 들어줘요! 전 그래도 걱정이 되어서 그러는데, 호의를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건가요?"

"누가 무시했다고 그러는 거지? 난 진지하게 들었고, 신중하게 대답한 거요."

"하아. 알았어요."

클레는 더 할 말이 없었다. 본인이 어떻게 받아들이든 그건 클레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정말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

이와 비슷한 광경을 너무나 많이 봐 왔기에 더 걱정이 되었다. 이렇게 눈앞에 보이는 결과에 취해 나중을 대비하지 않으면 백이면 백 크게 무너졌다. 세상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가겠어요."

클레는 토라진 표정으로 돌아섰다. 어차피 볼 건 다 봤다. 향후 몇 년간은 함께 일할 수 있겠지만, 그 이후는 무너질 공산이 컸다. 그 준비를 지금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제론은 돌아선 클레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려갑시다."

이곳은 성 한가운데 세워진 탑이었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마탑이기도 했다. 백작령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고, 넓게 펼쳐진 농지를 확인하는 데 이보다 좋은 장소는 없었다.

한 가지 문제는 너무 높아서 오르내릴 때 힘들다는 점이었다. 올라올 때 워낙 힘들었기에 내려갈 일이 막막했다. 클레는 아래로 쭉 펼쳐진 계단을 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한숨을 푹 내쉬고는 걸음을 내디뎠다.

클레가 계단을 내려가자 제론이 얼른 그 옆에 붙었다. 혹시라도 발을 헛디뎌 구르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물론 그래도 사고는 생기지 않는다. 마탑을 설계할 때 그런 대비도 충분히 해 두었다.

하지만 그런 광경을 외부인이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에어스트 백작령에 대한 정보를 모두 외부로 내보여선 안 된다.

올라오는 것만큼이나 내려가는 것도 힘들었다.

클레는 숨이 차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지만 한 번도 제론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오히려 멀쩡한 척 연기까지 했다.

제론도 그걸 다 알지만 모른 척해 주었다. 그리고 탑을 절반쯤 내려왔을 때, 대화를 시도했다.

"혹시 아츠나 남작령에 대해 좀 아는 게 있소?"

"아츠나 남작령이요? 당연히 알죠. 약초로 유명한 곳이니까요."

클레가 고개를 돌려 제론을 바라봤다. 의아한 표정이 가득했다.

"그건 왜 물으시죠?"

"아, 재미난 얘기를 하나 들어서 말이오."

"재미난 얘기요?"

"그곳에 약초가 남아돈다는 거 혹시 알고 있소?"

"예? 그럴 리가요. 그곳의 약초는 대부분 하일렌 상단이 쓸어가다시피 하는데."

"뭐, 그럼 일시적인 현상인 모양이오. 아무튼 그런 얘기를 들었소."

클레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제게 그런 말씀을 해 주시는 이유가 뭐죠? 설마 그 말만 듣고 우리 상단이 그곳의 약초를 구입할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제론은 빙긋 웃었다. 분명히 그런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안 해도 상관은 없었다. 제론이 가서 사면 되니까.

약초의 경우 보관이 문제가 된다. 하지만 제론은 얼마든지 보관할 수 있었다. 말릴 필요도 없었다. 아공간에 쓸어 담으면 된다. 제론의 벨트에는 무려 30개나 되는 빈 아공간이 있었다.

지금 제론이 클레에게 말한 것은 오늘 보여 준 호의에 대한 보답이었다. 또한 디아만트 상단을 살짝 끌어들여 자신의 싸움에 도움이 되도록 만들려는 목적도 섞여 있었다.

어찌 되었건 상관없는 일이었다. 보아하니 클레는 움직이지 않을 모양이니까.

"약초가 남아돌면 순간적으로 가격이 좀 떨어지긴 하겠네요."

클레는 그렇게 말하고는 묵묵히 계단을 내려갔다. 그렇게 두 사람은 탑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클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에어스트 백작령을 떠났다.

☆ ☆ ☆

"아가씨. 정말로 아츠나 남작령으로 가실 겁니까?"

"약초가 남아돈다는데 가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굳이 거기까지 가서 살 이유가 있습니까? 우리 상단과 거래하는 곳도 제법 많습니다."

클레는 수행원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다. 굳이 그곳에 가서 약초를 살 필요는 없었다. 한데 감이 참으로 묘했다.

"그리고 어차피 그곳에 가 봐야 사기 어려울 겁니다. 하일렌 상단이 아츠나 남작령의 약초를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하일렌 상단은 슈린 공작가의 것입니다."

슈린 공작가라는 말에 클레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일시에 머릿속에 꽉 찼던 안개가 싹 사라지는 것 같았다.

"역시 보통 사람이 아니야."

아무리 다른 데 정신이 팔렸다고 하지만 거기까지는 생각도 못했다. 아니, 그럴 리 없다고 판단했다는 게 맞다.

사실 루바인 상단이 어떤 꼴인지 알면 슈린 공작가 산하의 상단이 어떤 사정인지 대충 답이 나온다. 아마 일시적으로 자금 흐름이 나빠졌을 것이다.

루바인 상단을 죽인다 하더라도 그걸 이끄는 사람이 파인트였다. 가문의 후계자를 내다 버릴 리 없다면 그가 저지른 일은 다 처리를 해야만 한다. 설혹 나중에 후계자 자리에서 내친다 하더라도 말이다.

"당장 가겠어요!"

"예?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치면 우린 바보에요."

"예에?"

수행원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더 놀라고 있을 틈이 없었다. 클레가 거의 뛰다시피 멀어져 갔다.

"아, 아가씨!"

수행원이 다급히 클레를 뒤따랐다. 그렇게 그들은 아츠나 남작령으로 갔다.

"뭣이? 약초를 선점당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슈린 공작의 호통에 하일렌 상단을 책임지는 몰트 폰 슈린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억울했다. 이건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슈린 공작이 노려보자 몰트가 서둘러 설명을 덧붙였다.

"디아만트 상단이 갑자기 나타날 줄은 몰랐습니다."

"디아만트 상단? 그놈들이 아츠나 남작령에는 왜 나타났단 말이냐? 설마 내부 정보가 새 나간 건 아니겠지?"

슈린 공작이 불같이 노해 소리쳤다.

디아만트 상단이 그곳에 갔다는 것은 아츠나 남작령을 책임지는 하일렌 상단의 자금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는 뜻이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하일렌 상단과 장기 계약을 맺은 곳에 가서 약초를 쓸어 갈 이유가 없었다.

슈린 공작의 표정이 굳었다. 생각하기 싫은 가정 하나가 떠올랐다.

"똑바로 얘기해라. 약초만 선점당한 게 확실한 것이냐?"

"예?"

"멍청한 것! 아츠나 남작이 딴 맘을 먹은 건 아니냐는 뜻이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언제까지 계약되어 있느냐?"

"내년까지 계약이 되어 있습니다."

"내년? 하면 그 이후에는?"

"그건 금년 거래를 마친 다음에 하기로……."

말을 하던 몰트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그걸 보는 슈린 공작의 눈빛이 더없이 차가워졌다.

"아츠나 남작과 미리 얘기가 된 것이냐?"

"그, 그건 아닙니다."

"제대로 머리가 달려 있긴 한 것이냐? 이번에 계약을 어기면서까지 무리를 했는데, 계약도 확인을 안 했다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몰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게 모두 파인트 때문이었다. 루바인 상단이 운영자금을 몽땅 날려 버리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벌어질 이유도 없었다.

아츠나 남작령은 비교적 다루기가 쉬운 곳이었다. 그래서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이번에 일방적으로 계약을 어기며 대금 지급일을 한 달이나 뒤로 미루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그 일은 철저히 비밀로 했다. 그걸 아는 사람은 슈린 공작과 몰트 자신, 그리고 몰트의 최측근 하나가 전부였다.

그러니 비밀이 새 나갈 일은 없었다. 이건 그저 운이 나빴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몰트가 생각하기에는 그러했다.

하지만 슈린 공작의 생각은 달랐다. 이건 아무리 우연이라고 해도 너무 심하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몇 가지나 연달아 벌어졌다.

아츠나 남작령은 10년이 넘게 하일렌 상단과 거래를 해 왔다. 이젠 웬만한 상단에서는 그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약초 상단은 좀처럼 그곳을 찾지 않는다.

한데 디아만트 상단이 그곳에 찾아갔다. 그것도 일부러.

하일렌 상단이 워낙 오랫동안 거래했기에 장기 계약이 되었다는 사실은 아주 잘 알려져 있고, 또 다들 초장기 계약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한데 디아만트 상단은 마치 그것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물론 그 부분은 확인을 해 봐야 하지만 말이다.

만일 디아만트 상단이 아츠나 남작령과 계약이라도 맺었다면 하일렌 상단은 그 타격을 피할 수 없었다.

"하일렌 상단의 자금이 빠져나갔다는 걸 모르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느냐?"

"그, 그렇습니다."

몰트는 그저 반사적으로 대답을 했다. 반대 의견이라도 냈다가는 큰일 날 분위기였다.

"가서 아츠나 남작이 계약을 했는지부터 확인해라."

슈린 공작은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돌렸다. 꼴 보기 싫다는 뜻이었다.

몰트는 주눅이 잔뜩 든 얼굴로 조용히 물러갔다.

결과적으로 슈린 공작의 예상이 맞았다. 아츠나 남작령은 오랜 거래 상대를 바꿔 버렸다. 사실 그동안 하일렌 상단으로부터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했기에 그들로서도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어쨌든 그로 인해 당장 하일렌 상단에 문제가 생겨 버렸다.

하일렌 상단은 아츠나 남작령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약초를 받아 팔았다. 아츠나 남작령의 약초가 워낙 특별했고 양도 많았기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필요가 없었다.

그게 문제가 되었다. 하일렌 상단은 거래 규모에 비해 인원이 적었다. 상단 자체가 약초의 운송과 처리에 맞춰져 있었다.

게다가 중간상 역할이었기 때문에 판매는 다른 상단에서 전담했다. 그래서 이번 일로 붕 떠 버렸다.

이대로는 상단을 유지하는 의미가 없었다. 새로운 공급처를 찾아내 계약하지 않는 한 말이다.

게다가 하일렌 상단이 약초를 공급한 판매처가 바로 슈린 상단이었다. 당장 슈린 상단의 매출이 하락하게 생겼다. 그것도 큰 폭으로 말이다.

고작 약초 하나였다. 하지만 그 여파가 만만치 않았다. 디아만트 상단은 새로운 약초 공급처와 계약을 하면서 약초 시장의 절대 강자로 거듭났다.

지금까지는 슈린 공작가와 경쟁 관계였는데, 그 균형이 단번에 무너진 것이다.

물론 그것은 레늄 왕국 내에서의 일이었다.

☆ ☆ ☆

"카프만입니다."

제론은 이마가 땅에 닿을 듯 인사하는 사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바인으로부터 소개받은 사람이었다.

바인은 제론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해결해 주었다. 상단을 하나 만들 생각이라니 대번에 사람을 찾아 보내 준 것이다.

카프만은 평민이었다. 하지만 상재가 제법 뛰어났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믿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처음부터 제론은 그렇게 요구했다. 뛰어난 사람보다는 사람됨이 더 중요하다고 말이다.

제론은 바인을 믿었다. 하지만 안전장치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혹시라도 바인이 뒤통수를 치면 상당히 곤란했다. 바인을 통해 유입한 사람이 제법 많았다. 또한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그를 통해 인재를 구할 것이다.

카프만은 생각보다 젊었다. 고작해야 30살쯤으로 보였다. 고생을 많이 한 걸로 보이니 어쩌면 그보다 더 어릴 수도 있었다.

"27살입니다."

카프만은 제론이 뭘 궁금해하는지 안다는 듯 먼저 나이를 밝혔다. 역시 겉으로 보는 것보다 더 어렸다. 경험은 적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경험이야 지금부터 쌓으면 되니까. 또, 능력이나 경험이 좀 모자라도 성공할 확률이 높았다. 정보를 틀어쥐고 있으니까.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들은 얘기는 있나?"

"장사를 하게 될 거라 했습니다."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들었다. 경험은 좀 있나?"

"어릴 때 슈린 상단의 심부름꾼으로 일을 하다가 향후 독립해서 작은 점포 하나를 운영했습니다."

"슈린 상단?"

제론은 바인이 왜 슈린 상단 사람을 추천했는지 얼른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카프만의 말에 금방 그 뜻을 이해했다.

"그 점포가 슈린 상단의 방해로 망해 버렸습니다. 제가 상단에서 독립한 게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 말을 하는 카프만의 눈에 독기가 절절 흘렀다. 다른 건 몰라도 슈린 상단에 대한 원한은 대단했다.

"그 뒤로 열 개가 넘는 상단을 전전했습니다. 경험이야 많이 쌓았습니다만, 그게 과연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론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만족스러웠다. 나중은 몰라도 슈린 공작가와 싸우는 동안은 확실히 믿을 만했다. 물론 바인이 뒷일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을 뽑지는 않았을 것이다.

"작은 상단을 하나 만들려고 한다."

"상단 말입니까?"

카프만이 눈을 빛냈다. 과연 그 상단에서 자신이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되는 모양이었다. 처음으로 상단의 중심에서 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늘부터 네가 상단의 책임자다."

"예에?"

카프만의 눈가가 하마터면 찢어질 뻔했다. 너무 놀라서 자신이 얼마나 눈을 크게 떴는지도 인지하지 못했다. 다짜고짜 만나자마자 상단을 책임지라니.

"제, 제, 제가 말입니까?"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는 말로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없었기에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초기 자본금으로 일단 10만 골드를 주겠다."

"10만 골드!"

카프만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10만 골드라니. 사실 상단을 책임지라는 말에 자본금으로 생각한 돈이 1천 골드 정도였다. 한데 그의 예상을 무려 100배나 넘어 버렸다.

꿀꺽.

카프만은 침을 삼켰다. 뺨이라도 꼬집어 보고 싶었다. 만일 이게 생생한 꿈이라면. 그래서 깨기라도 한다면 아마 지독한 상실감에 자살할지도 모른다.

두근두근 미칠 듯이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제론을 바라본 카프만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론의 표정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에게 10만 골드를 건네주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 일로 들뜨고 정신을 못 차린 것은 자기 혼자였다. 카프만은 이를 악물고 들떠 하늘로 날아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대로는 안 된다. 제론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건 자본금이다. 그걸로 알아서 상단을 꾸려 봐라. 도움이 필요하면 어디로 연락해야 하는지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바인은 카프만과의 연락책을 만들어 두었다. 물론 뒤를 잡힐 일이 없도록 신경을 써서 만든 연락책이었다.

"그리고 이걸로 쿠라티오 뿌리를 싹 구매하도록."

카프만은 제론이 건네는 돈을 받고는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이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대, 대체 얼마나 많이 사라는 말씀이십니까?"

"닥치는 대로 싹."

"다, 닥치는 대로 말입니까?"

카프만은 멍한 눈으로 제론과 손에 든 돈을 번갈아 바라봤다. 무려 300만 골드였다. 자신에게 상단을 만들라고 준 돈의 30배나 되는 거금이었다.

이 정도 돈이면 수도 인근의 쿠라티오 뿌리는 몽땅 사고도 남았다. 쿠라티오 뿌리가 비교적 흔하긴 하지만 그만큼 가격이 낮았다.

'무섭도록 가격이 치솟겠군.'

만일 그걸 사재기한다면 가격이 엄청나게 오를 것이다.

쿠라티오 뿌리는 포션을 만들 때 반드시 필요한 재료였다. 포션의 주재료는 아니었지만 주재료인 거대 몬스터들의 독성을 제거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가졌다.

신성의 힘이 약화된 지금 시대에 포션 제조는 어마어마한 부가가치를 가졌다. 그렇기에 그 제조법도 엄격히 관리되었다.

슈린 상단의 주력 품목이 바로 포션 제조와 유통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매년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다.

다만 거대 몬스터의 피를 구하는 게 쉽지 않았기에 수량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카프만이 슈린 상단에서 처음 맡은 일이 바로 포션 병을 나르는 것이었다. 거기에서 더 성장해 포션 병을 책임지는 열 명의 담당자 중 한 명의 신임을 받으며 병 조달을 맡았다.

그렇기에 슈린 상단에서 포션이 차지하는 비중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가슴이 떨렸다. 이제 제론이 뭘 하려는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슈, 슈린 상단과 싸우시려는 겁니까?"

카프만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론은 그런 카프만을 무심한 눈으로 쳐다봤다.

"두렵나?"

카프만은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이 제론에게도 느껴졌다. 하지만 두려움만 보이는 건 아니었다. 그에 못지않은 기대감도 함께 있었다.

"싸우려는 게 아니다."

순간 카프만의 눈에 살짝 실망이 어렸다. 이율배반적으로 안도감도 함께 찾아왔다.

"그들을 완전히 무너뜨릴 생각이다."

카프만은 숨이 턱 막혔다. 그리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제론의 눈빛을 바라봤다.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뭔가가 불쑥 솟구쳤다.

"가, 가능하겠습니까?"

"당연히."

제론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카프만이 보기에는 마치 주머니에 든 동전을 꺼내는 것처럼 간단하게 느껴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믿겠습니다."

카프만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제론은 지금 슈린 상단의 포션 사업을 방해하려 한다. 물론 그렇다고 슈린 상단이 잘못되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타격은 분명히 입는다.

"백작님께서 제시하신 방법에는 문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문제?"

"슈린 상단의 정보력입니다."

"우리가 쿠라티오 뿌리를 사재기한다는 걸 금방 알아차릴 거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쿠라티오 뿌리는 제법 흔합니다. 정보를 들으면 어떻게든 조달을 할 것입니다. 아니면 같이 사재기를 할 수도 있고 말입니다."

쿠라티오 뿌리는 포션 제조 외에는 아예 쓸모가 없다. 그러니 만일 사재기에 실패하면 그냥 돈만 날리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슈린 상단처럼 대규모로 포션을 만드는 상단은 거의 없다. 슈린 상단이 작정하고 그걸 사지 않으면 고스란히 손해를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쿠라티오 뿌리는 오랫동안 보관하는 게 어렵다. 조건이 조금이라도 안 맞으면 금방 썩어 버리기 때문에 사실 사재기를 할 만한 물품은 아니었다.

카프만의 지적은 아주 당연했다. 하지만 제론은 그 말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슈린 상단에서는 그걸 사재기할 여력이 없을 거다."

"예?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슈린 상단인데 돈 정도야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봐라. 네가 슈린 상단이라면 과연 어떻게 할까?"

카프만은 제론의 말대로 입장을 바꿔 봤다.

만일 누군가 쿠라티오 뿌리를 사재기한다는 말을 들으면 어떻게 할까? 당연히 화부터 낼 것이다. 하지만 냉정히 판단하면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보관이 어려우니까.

"아……! 어차피 금방 팔 거라고 생각하겠군요."

쿠라티오 뿌리는 잘 보관해 봐야 닷새를 넘기기 힘들다. 즉, 그 안에 팔아야 한다는 뜻이다. 돈을 갖다 버리지 않으려면 말이다.

카프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면 쿠라티오 뿌리를 그냥 버리실 생각이십니까?"

슈린 상단에 피해를 안기기 위해 그걸 버린다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게 된다. 카프만은 제론이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야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버릴 이유가 없지. 난 그걸 오랫동안 보관할 방법이 있다. 그러니 넌 최대한 사 모으기만 하면 된다. 어느 정도로 모아야 하는지는 알겠지?"

카프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정말로 특별한 보관법이 있다면 이 일은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일단 마차로 닷새 거리 안에 있는 쿠라티오 뿌리를 싹 쓸어 오면 된다. 쿠라티오 뿌리의 유통기한은 이쪽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저쪽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럼 당장 시작하겠습니다."

"일단 상단부터 만들어라. 적당한 창고도 하나 사고."

"예. 맡겨만 주십시오."

카프만이 터질 것 같이 거세게 뛰는 심장을 움켜쥐며 밖으로 나갔다.

제론은 그런 카프만을 보며 눈을 빛냈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었다.

☆ ☆ ☆

슈린 상단의 최고 책임자는 당연히 슈린 공작이었다. 하지만 그가 직접 나서서 일을 처리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일은 하쓰 남작이 처리한다.

하쓰 남작은 쿠라티오 뿌리를 사재기하는 무리가 있다는 보고에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뭐 하는 멍청이들이지?"

쿠라티오 뿌리에 대해 전혀 모르는 놈들이 천지 분간 못 하고 저지르는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할까요?"

직원의 물음에 하쓰 남작이 같잖다는 듯 웃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어떻게 한다……. 그냥 내버려 둬서 썩은 뿌리로 연명하게 할까…… 아니면 당장 추적해서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버릴까?"

어느 것을 선택해도 즐거운 일이 될 것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짚을 건 확실히 짚어야 한다.

"그놈들이 얼마나 사들였느냐?"

"두 개의 상점을 탈탈 털어 갔습니다."

"그래?"

수도에 쿠라티오를 취급하는 상점은 백 개가 넘는다. 당연히 각 상점마다 구비한 양이 많지 않다. 유통기한이 고작 닷새에 불과하기 때문에 딱딱 필요한 양만 갖다 놓을 뿐이었다.

물론 슈린 상단은 그런 점포의 쿠라티오를 이용하지 않는다. 계약한 상단의 것을 이용한다. 사흘에 한 번씩 필요한 만큼 상단에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당연히 수도에서 가까운 곳의 쿠라티오를 들인다. 바로 캐서 가져오는 것이다. 말리면 효과가 없기에 마르지 않은 뿌리를 흙도 털지 않고 운반했다.

하쓰 남작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수도의 상점을 이용할 일도 없을 뿐더러 사재기를 해 봐야 쿠라티오 뿌리는 오래 보관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의미가 없었다.

"그놈들이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봤으면 좋겠군. 사재기를 해도 하필이면 쿠라티오 뿌리라니. 큭큭큭큭."

하쓰 남작은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직원도 그걸 당연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닷새가 흘렀다.

하쓰 남작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갑자기 차질이 빚어졌다. 쿠라티오 뿌리의 씨가 말라 버렸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 구할 수가 없다니! 분명히 계약을 하지 않았느냐!"

하쓰 남작의 호통에 직원이 땀을 뻘뻘 흘렸다.

"하지만 쿠라티오 뿌리가 아예 없다고 합니다."

"그게 말이나 되느냐! 이놈들이 계약을 대체 뭐로 아는 게야!"

"일단 위약금을 받았습니다."

"지금 위약금이 문제냐! 어서 다른 곳에 알아봐! 포션을 제때 공급하지 못하면 우리가 물어야 하는 위약금이 대체 얼마인 줄이나 아느냐! 그깟 쿠라티오 뿌리에 비할 바가 아니란 말이다!"

하쓰 남작은 씩씩거리며 직원을 노려봤다.

"뭐 하고 있느냐! 가서 알아보지 않고!"

직원이 화들짝 놀라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모습을 노려보던 하쓰 남작이 남은 직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직원이 흠칫 놀랐다.

"넌 거기서 뭘 하는 거야! 저놈 혼자 일을 다 하게 만들 셈이냐!"

하쓰 남작은 그렇게 소리치다가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등골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 그놈들! 그놈들 어떻게 되었느냐!"

하쓰 남작의 말에 막 나가려던 직원이 슬그머니 돌아서서 물었다.

"누구 말씀이십니까?"

"쿠라티오 뿌리를 사재기하던 놈들 말이다!"

직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지, 지금 알아보겠습니다!"

직원이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하쓰 남작은 이를 갈았다.

"이놈들이 감히!"

방심하다가 완전히 당했다. 설마 정말로 그 무식한 짓을 할 줄이야. 이건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슈린 상단을 엿 먹이기 위해 벌인 짓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닷새면 썩어 없어질 쿠라티오 뿌리를 사재기했을 리가 없었다. 아마 그놈이 누군지 모르지만 돈깨나 날렸을 것이다.

잠시 후, 내보냈던 직원들이 속속 도착했다.

"어, 없습니다!"

"뭐가 없단 말이냐!"

"근방의 모든 쿠라티오 뿌리를 싹쓸이해 갔습니다! 더 이상 그걸 구할 수 없습니다."

하쓰 남작이 손으로 이마를 탁 쳤다.

"허이구. 이러다가 쓰러지겠구나. 장사하는 놈들이 그따위로 팔아?"

"이제 내년까지 기다려야 한답니다. 씨를 뿌렸으니 자라려면 1년은 걸린다고……."

"닥치고 꺼져라! 가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해와!"

직원이 후다닥 뛰쳐나갔다.

하쓰 남작이 남은 직원을 노려봤다.

"보고해."

"도, 도시의 상점을 싹 쓸어 갔답니다. 수도에는 이제 더 이상 쿠라티오 뿌리가 없습니다."

"그걸 누가 몰라? 쓸어 간 놈들을 잡아 오란 말이야!"

"하, 하지만……."

물건을 사재기한다고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특히 레늄 왕국은 상업에 대한 규제가 별로 없었다. 사재기건 뭐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은 뭐가 하지만이야! 가서 잡아 와! 그게 안 되면 알아 오기라도 해! 그놈들이 사재기를 했으면 아직 썩지 않고 남은 뿌리가 있을 거 아니냐고!"

그제야 말을 알아들은 직원이 창백한 얼굴로 달려 나갔다. 하쓰 남작은 털썩 주저앉았다.

"후욱! 후욱! 이놈들 내가 가만히 두나 봐라! 으드득!"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놈들 때문에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분노로 인해 살이 부르르 떨렸다.

지금 슈린 상단은 상당히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루바인 상단이 운영자금을 싹 날려 먹은 것도 모자라 빚까지 지는 바람에 그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다른 곳에 구멍이 숭숭 뚫려 버렸다.

하일렌 상단이 대표적이다. 그 구멍 때문에 아츠나 남작령이라는 좋은 거래처를 디아만트 상단에 빼앗겨 버렸다.

실로 치명적이었다. 그리고 그 여파는 슈린 상단에도 밀어닥쳤다. 일시적으로 자금이 말라 버린 것이다.

그래서 더 문제였다. 만일 빨리 포션을 제조해 거래처에 넘기지 못하면 당장 위약금이 문제가 된다. 그걸 치를 돈이 없었다.

잠시 후, 부서질 듯 문이 열리며 직원이 뛰어 들어왔다.

"찾았습니다!"

하쓰 남작이 벌떡 일어났다.

"어디냐!"

"페쿠니아 상단입니다."

"페쿠니아? 처음 듣는데?"

"생긴 지 이제 닷새 됐답니다."

"닷새?"

하쓰 남작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럼 상단을 만들자마자 한 일이 쿠라티오 뿌리 사재기란 말 아닌가. 갑자기 짜증이 확 올라왔다.

"어쨌든 가자. 그놈들이 사재기한 쿠라티오 뿌리, 다시 사 와야지."

하쓰 남작은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몇몇 직원과, 슈린 공작가에서 파견 나온 기사 몇 명이 그 뒤를 따라갔다.

페쿠니아 상단은 제법 큰 건물에 있었다. 하쓰 남작은 바쁘게 건물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을 보며 인상을 썼다. 저놈들이 사재기를 했다고 생각하니 다들 목을 쳐 버리고 싶었다.

하쓰 남작은 살짝 거만함을 몸에 걸치고 페쿠니아 상단 안으로 들어갔다. 이럴 때 저자세로 나가는 건 하책이었다.

힘을 과시해야 최소한의 손실로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만일 그게 안 되면 정말로 무력을 써야 할지도 모른다.

하쓰 남작은 거기까지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만큼 지금 상황이 절박하다는 뜻이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페쿠니아 상단의 말단 직원 하나가 다가와 공손히 물었다. 상단이 생긴 지 얼마 안 되어 상단 관계자가 아니면 들락거리는 사람이 없었기에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쓰 남작은 인상을 팍 썼다. 지금까지 슈린 상단에 그따위 짓을 해 놓고 자신의 얼굴도 모른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당연히 호통이 쏟아져 나갔다.

"감히 날 조롱하는 것이냐! 가서 상단주를 불러와라!"

"예?"

말단 직원의 몸이 바짝 굳었다. 저렇게 당당하고 오만하게 말하는 사람은 귀족뿐이었다. 또한 최근 페쿠니아 상단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에 상대가 누군지도 금방 눈치챘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말단 직원이 서둘러 카프만을 부르러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하쓰 남작의 호통이 그의 발을 묶었다.

"어딜 가느냐! 날 이렇게 세워 놓을 작정이냐!"

"헉! 죄, 죄송합니다!"

말단 직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크게 당황했다. 그때 다른 직원 하나가 다가왔다.

"넌 가서 상단주님께 손님이 왔다고 알려라."

그는 그렇게 지시를 내린 후, 고개를 돌려 하쓰 남작을 바라봤다.

"제가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이리로 오시지요."

하쓰 남작은 자신을 안내하는 페쿠니아 상단의 직원을 눈여겨보았다. 자신을 대하는 태도나 또 직원을 부리는 솜씨를 보면 상단에서 제법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게 분명했다.

기사와 직원을 데리고 응접실에 도착한 하쓰 남작은 방 안을 한 번 쭉 둘러봤다. 갑자기 생긴 신생 상단치고는 상당히 기품이 있었다.

"이거 어쩌면 그냥 우연히 벌어진 일이 아닐 수도 있겠군."

하쓰 남작은 눈을 빛내며 상단주를 기다렸다. 보통 이런 경우 기 싸움을 한답시고 시간을 끄는 경우가 많았기에 일단 조급한 마음을 싹 버렸다.

잠시 후, 카프만이 응접실로 들어섰다. 카프만의 얼굴을 본 하쓰 남작의 표정이 묘해졌다. 상당히 낯익었다.

'저놈을 어디서 봤더라?'

슈린 상단에서 일하는 직원은 수백 명에 달한다. 그들의 얼굴을 일일이 다 기억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슈린 상단은 오랫동안 일하는 직원이 많지 않았다. 일하다 그만둔 사람까지 다하면 천 명도 넘을 것이다.

"절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하쓰 남작은 거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삐딱하게 꺾으며 카프만을 노려봤다.

"내가 누군지 알겠지?"

"슈린 상단의 하쓰 남작님 아니십니까?"

"흥. 역시 알고 있었군. 그럼 얘기도 빠를 테지. 쿠라티오 뿌리를 넘겨라."

"없습니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카프만의 태도에 하쓰 남작의 얼굴이 그대로 구겨졌다.

"지금 장난하자는 것이냐? 네놈들이 쿠라티오 뿌리를 사재기했다는 걸 모를 줄 아느냐?"

카프만은 여전히 당당했다.

"쿠라티오 뿌리를 사긴 했지만 저희도 의뢰를 받았을 뿐입니다."

"지금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말이냐?"

"믿지 않으셔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상단의 자본금은 고작 10만 골드에 불과합니다. 그 많은 쿠라티오 뿌리를 다 샀다간 파산을 열 번도 넘게 했을 겁니다. 저희는 그저 의뢰와 돈을 함께 받아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하쓰 남작이 카프만을 노려봤다. 페쿠니아 상단의 자본금이 고작 10만 골드라는 사실 자체를 믿을 수 없었다. 적어도 수백만 골드 이상일 것이다. 그래야 쿠라티오 뿌리를 사재기할 수 있을 테니까.

게다가 의뢰라니. 그런 거금을 전혀 모르는 사이에 턱 맡긴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내게 믿음을 줘야 할 것이다. 아니면 이 상단은 오늘부로 문을 닫을 테니까."

"그건 횡포입니다."

하쓰 남작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 잘했다. 맞다. 횡포다. 그러니 네 속을 다 까발려라. 내 횡포를 감내하기 싫다면 말이다."

카프만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슈린 상단은. 이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절망을 맛봤던가. 하지만 이제는 그걸 돌려줄 시간이었다.

"좋습니다. 뭘 원하십니까?"

"쿠라티오 뿌리."

"그건 없습니다."

하쓰 남작의 눈에서 살기가 번득였다.

"그럼 내가 찾아낸 건 그냥 가져가도 되겠느냐?"

조금 전까지는 그래도 정당한 거래를 할 생각이 있었다. 물론 싱싱하지 않다는 이유로 가격을 상당히 후려쳤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기가 싫어졌다. 너무 건방졌다. 감히 누구 앞에서 고개를 뻣뻣이 들고 대꾸한단 말인가.

"뒤져라."

하쓰 남작은 카프만이 허락하기도 전에 명령을 내렸다. 슈린 상단의 직원과 기사들이 쏜살같이 움직였다. 그들은 각각 작은 아티팩트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포션 반응을 체크하는 아티팩트였다.

포션은 과다 복용하면 오히려 몸에 해롭다. 그래서 함부로 포션을 먹여선 안 된다. 그걸 파악하기 위해 만든 아티팩트였다.

포션에 끝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쿠라티오 뿌리 추출액이었다. 이 아티팩트는 그걸 체크하는 기능을 가졌다.

'내가 생각해도 기발해.'

하쓰 남작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아티팩트를 들고 흩어진 직원과 기사를 바라봤다. 저것이 쿠라티오 뿌리를 찾는 데 쓰이리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페쿠니아 상단의 창고에도 사람을 보냈으니 딴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카프만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마 저들은 사람을 잔뜩 풀어 수도 전역을 뒤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뒤져 봐라. 그게 나오나.'

이미 쿠라티오 뿌리는 제론이 싹 수거해 갔다. 카프만은 제론이 나중에 쿠라티오 뿌리의 가격이 폭등했을 때 천천히 물량을 풀어 나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론의 말을 듣고는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론은 그걸 이용해 새로운 포션을 만들겠다고 했다. 슈린 상단과 정면으로 부딪치겠다는 뜻이었다.

카프만은 여전히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맴돌았다.

하쓰 남작은 카프만의 미소를 보고 있으니 갑자기 불안해졌다. 그리고 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차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보아하니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은데."

하쓰 남작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프만은 여유롭게 차와 쿠키를 준비했다.

그 여유가 너무 마음에 걸렸다. 하쓰 남작은 차를 마시면서 계속 카프만의 표정과 행동을 살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하쓰 남작은 왠지 점점 초조해졌다. 반면 카프만은 처음보다 훨씬 여유 넘쳤다. 카프만의 여유가 하쓰 남작에게 초조함을 넘기는 듯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다. 카프만은 그동안 몇 가지 소소한 업무를 처리했다. 그러면서 하쓰 남작과 가벼운 대화까지 나누었다.

하쓰 남작은 그 모든 광경을 지켜봤다. 카프만의 능력이 딱 눈에 보였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밑에 두고 싶은 사람이었다.

저런 사람은 한 번 마음을 주면 좀처럼 배신하지 않는다. 수십 년 동안 갈고 닦은 눈과 감이 그렇게 말해 주고 있었다.

"자네 내 밑에서 일해 볼 생각 없나?"

하쓰 남작의 난데없는 제안에 카프만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예전에 슈린 상단에서 일할 때는 내쫓는 것도 모자라 독립해서 연 점포까지 무너뜨리더니. 이제 와서 영입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물론 하쓰 남작은 자신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도 못하겠지만 말이다.

"죄송합니다. 전 지금이 좋습니다."

"드래곤 꼬리보다는 뱀 머리인가? 내가 뱀 머리보다는 더 크게 키워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떤가?"

"거듭 죄송합니다. 전 지금의 상단을 혼자서 더 키워 보고 싶습니다."

하쓰 남작은 딱 거기까지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만 먹으면 끌어들일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일단 뒤에서 조금 손을 써 페쿠니아 상단을 무너뜨리고 난 다음 손을 내밀어도 된다.

"뭐, 좋을 대로 하게. 혹시 나중에라도 생각이 변하면 얼마든지 날 찾아와도 좋네."

"잘 새겨 두겠습니다."

하쓰 남작은 그 정도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딱 그렇게 대화가 마무리되었을 때, 슈린 상단의 직원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왔느냐? 어찌 되었느냐?"

영입은 영입이고 일은 일이다. 하쓰 남작은 쿠라티오 뿌리에 대한 일을 빌미로 카프만을 영입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못 찾았습니다."

하쓰 남작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뭐라고?"

"일단 상단 건물에는 없습니다. 감출 공간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창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목재와 곡물만 잔뜩 쌓여 있었습니다."

"아티팩트 반응은?"

"없었습니다."

하쓰 남작의 표정이 더 무너졌다. 그때 기사들도 들어왔다. 그들의 표정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병사들까지 동원해서 뒤졌지만 성과가 없었습니다. 점포 두어 군데에서 반응이 왔는데, 그건 판매하는 뿌리였습니다."

옆에 서 있던 직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거라도 일단 구입할까요?"

"닥쳐! 지금 그게 문제더냐!"

직원이 찔끔 놀라 뒤로 다급히 물러났다. 하쓰 남작은 카프만을 노려봤다. 이젠 카프만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누가 시켰지?"

하쓰 남작의 물음에 카프만이 고개를 저었다.

"돈과 의뢰만 받았을 뿐이라 나도 모릅니다. 철저히 자신의 비밀을 지키는 사람이었다는 것만 알 수 있었습니다."

"그 말을 믿으라고?"

"제가 지금까지 하나라도 속인 것이 있었습니까?"

하쓰 남작이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카프만은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그가 말했던 대로였다.

"후우. 알았다. 그러니 일단 네가 알고 있거나 짐작하는 것만이라도 말해라. 안 그러면 폭발할 것 같으니까."

하쓰 남작은 핏발 선 눈으로 카프만을 노려봤다. 카프만은 그 무시무시한 모습에 살짝 위축되었지만, 꿀릴 게 없었기에 담담하려 애썼다.

"일단 찾아온 사람은 누가 봐도 의심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아마 그가 선금을 내놓지 않았다면 저도 이번 일을 맡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쓰 남작이 카프만을 노려봤다. 의뢰를 받았던 어쨌건 그가 나서서 이 일을 만들어 낸 것은 분명했다.

"사실 제가 받은 의뢰는 수도에 있는 쿠라티오의 뿌리를 돈 되는 대로 사라는 것뿐이었습니다."

"수도에 있는 것만 사라고 했다고? 그런데 왜 수도 인근의 것까지 싹 매입했나?"

카프만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쓰 남작을 바라봤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 그저 수도의 물건만 사들였을 뿐입니다. 그것만으로도 100만 골드가 훨씬 넘는 돈이 들었습니다. 그 일을 해 주고 저희 상단이 받은 수수료가 무려 2만 골드였습니다."

하쓰 남작은 누군가 망치로 뒤통수를 세게 후려치는 것만 같았다. 멍하니 카프만을 바라봤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수, 수도의 물건을 다 샀다고?"

"솔직히 돈이 모자라서 다 살 수 없었습니다. 반 정도 사니까 어떻게 소문이 퍼졌는지 가격을 올려 받더군요. 아마 뒤져 보면 남은 게 제법 있을 것입니다."

'당했다!'

상대는 페쿠니아 상단을 눈가림으로 이용했다. 그것도 100만 골드나 되는 거금을 던져 주고서 말이다.

하쓰 남작이 벌떡 일어났다. 카프만은 그 모습을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다.

"남작님?"

"급한 일이 생각나서 이만 가 보겠네. 오해한 건 미안하네. 하지만 앞으로 다시 그따위 일을 벌이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테니 각오하게."

"아…… 예. 저, 저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아까 내가 한 제안은 아직도 유효하니 잘 생각해 보게."

"알겠습니다."

하쓰 남작은 바람 소리를 내며 돌아섰다. 그리고 거의 뛰다시피 페쿠니아 상단을 떠나갔다. 그와 함께 왔던 자들 모두 서둘러 그 뒤를 따라갔다.

카프만은 한동안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지자,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망할 상단에 내가 왜 들어가? 제 앞길도 모르고 설쳐 대는군."

카프만은 손을 탁탁 털고는 돌아섰다.

"자, 그럼 열심히 일을 해 볼까?"

이제부터 진짜 바빠질 것이다. 슈린 상단은 크게 흔들릴 것이다. 어쩌면 무너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될 것을 미리 알고 있으면서도 기회를 놓치는 건 직무 유기였다.

카프만의 눈동자에 자신감이 가득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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