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4화 (55/217)

Chapter 8 루바인 상단

클레는 슬슬 파인트를 만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도 시간이 많지 않았다. 빨리 이곳의 일을 마무리해야 다른 일을 할 것 아닌가.

사실 조금 더 시간을 끌려고 했다. 하지만 몇몇 상단이 파인트에게 접근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더 시간을 끌기가 곤란해진 것이다.

상단의 움직임 뒤에 파인트의 수작이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루바인 상단과 자리를 만들어 봐야겠어요."

클레의 말에 옆에 붙어 있던 수행원이 대답했다.

"연락을 넣도록 하겠습니다."

"광산의 매장량은 다시 확인해 봤나요?"

"예. 마찬가지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전에 딴소리를 하던 자들도 말을 바꿨습니다."

클레가 차갑게 웃었다. 그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필요 없었다. 뒷돈을 받는 걸 막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상단에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면 그걸 다 토해 내게 만들어야만 한다.

"아무리 뒤에서 수작을 부린다고 해도 다른 상단이 움직인다는 건 분명히 이유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들도 매장량을 다시 확인한 건가요?"

"그렇습니다."

"루바인 상단이 이번에 아주 작정을 하고 우리 상단에 물을 먹였네요."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이미 벌어진 일을 다시 되돌릴 수는 없었다. 클레도 그것을 알기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알았어요. 일단 그쪽에 연락을 넣어서 약속을 잡아 줘요."

"알겠습니다."

수행원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물러나려고 할 때, 다른 수행원이 다급히 들어왔다.

"아가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제론 폰 에어스트 백작님께서 오셨습니다."

제론이 왔다는 말에 클레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파인트를 만나기 위해 나가려는 수행원을 불렀다.

"기다려요!"

수행원이 걸음을 멈추고 의아한 표정으로 클레를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젓는 클레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일단 에어스트 백작님을 만난 다음에 다시 결정을 내리겠어요."

수행원은 그녀가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일단은 명령을 따라야만 했다. 그래서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한쪽으로 물러나 조용히 섰다.

잠시 후, 제론이 시종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들어왔다. 이곳은 최근 디아만트 상단에서 만든 지부였기에 건물을 관리하는 시종이 따로 있었다.

제론은 방에 들어서며 주위를 슥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훌륭한 건물이었다. 디아만트 상단에서 새로 지은 건물이니 당연했다.

건물의 외형이나 내부, 그리고 건물을 관리하는 시종과 시녀를 보면 디아만트 상단에서 이곳 베어크 영지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

제론은 여기까지 오면서 그것을 확인한 것이다.

"설마 여기에서 다시 만날 줄은 몰랐네요, 에어스트 백작님."

클레의 의미심장한 말에 제론이 빙긋 웃었다.

"이 영지에 재미난 일이 있다는 얘기를 들어서 왔소."

"그 재미있는 일이 우리 디아만트 상단을 골탕 먹이는 것인가요?"

"그럴 리가 있겠소?"

"하면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은 뭐죠? 백작님 덕분에 광산주가 아주 신 난 것 같던데요."

"어차피 루바인 상단의 돈이 나간 건데 디아만트 상단이 손해 볼 일은 없지 않소?"

클레가 어이없는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정말로 몰라서 말씀하시는 건가요? 루바인 상단이 그 광산을 운영할 것 같나요? 우리에게 그걸 팔 거라는 사실은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알 거예요!"

"그걸 왜 디아만트 상단이 산다는 거요?"

"안 살 거면 대체 제가 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세요?"

클레는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저런 말을 할 거면 대체 왜 찾아왔단 말인가. 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론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굳이 그 광산을 살 필요가 있소? 매장량도 확실치 않은 광산을 말이오."

클레가 입을 쩍 벌렸다.

"그럼 대체 백작님은 왜 그걸 사려고 하셨나요?"

제론이 씨익 웃었다.

"그때야 괜찮은 광산인 줄 알았으니까."

"예?"

클레는 갑자기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 제론을 바라봤다. 지금은 괜히 열을 낼 때가 아니었다.

"왠지 설명이 더 필요한 것 같네요."

제론은 그녀의 변화를 보며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큰 상단을 이끄는 사람다웠다.

"난 다른 사람들과 매장량을 확인하는 방법이 약간 다르오."

클레의 눈이 반짝 빛났다.

"한데 내 방법으로 그 광산의 매장량을 확인해 보니 별로 대단치 않더란 말이오."

"그걸 제게 알려 주시는 이유가 뭐죠?"

제론이 씨익 웃었다.

"혹시 괜찮은 광산 하나 살 생각 없소?"

클레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광산이라니. 그럼 제론이 광산을 개발했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정보는 어디에서도 들은 적이 없었다.

"아, 정확히는 광산이 아니라 광맥이라고 해야 하나?"

"과, 광맥이요?"

"괜찮은 철광맥을 하나 발견했는데, 그걸 개발하자니 시간과 인력이 만만치 않아서 말이오."

클레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광맥을 발견하는 게 그렇게 쉬우면 누가 광산 개발에 큰돈을 들이겠는가.

광산 개발이 힘든 이유는 광맥을 찾기 어렵기에 엉뚱한 곳을 파헤치기 일쑤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 번 땅을 파헤칠 때마다 돈이 무더기로 나간다.

그래서 광산 개발에 돈이 많이 드는 것이다. 한데 광맥을 발견했다면 그냥 개발만 하면 된다. 엄청난 돈이 절약된다.

아니, 광맥만 정확히 짚을 수 있다면 차라리 광산을 살 필요 없이 직접 개발하면 된다. 수만 골드 선에서 해결이 가능하니 말이다.

그럼 대체 얼마나 많이 남는 장사인가.

"정말인가요?"

"물론이오. 매장량은 장담컨대, 이곳에서 발견된 그 어떤 광산보다 많을 거요. 거의 2배에 가깝소."

클레는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제론은 그녀가 고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얼마에 사겠소?"

클레는 즉시 가격을 책정해 주었다. 물론 사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광맥을 정확하게 짚어 줄 수 있고, 매장량이 확실하다면 2,000만 골드는 되겠죠."

"2,000만 골드라. 엄청나군."

매장량이 이곳에서 발견한 광산의 2배라면 수십 년에 걸쳐서 캐야 하긴 하지만 수억 골드는 될 것이다. 그걸 2,000만 골드에 사는 것이니 비싼 건 아니었다. 하지만 확실해야만 한다.

"아직 사겠다고 결정한 건 아니에요."

제론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결정되면 알려 주시오. 3일 내로 결정을 내렸으면 좋겠소. 안 사면 다른 상단에 팔아야 하니까."

제론은 그 말을 남기고 일어났다. 클레는 그를 배웅할 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이 점점 헝클어졌다. 그러다가 결국 아무 생각도 못할 정도로 혼란스러워졌다.

그것은 제론의 얘기를 함께 들은 클레의 수행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제론은 호텔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피로가 몰려왔다. 최근 너무 신경을 많이 썼다. 몸은 힘들지 않은데 정신적으로 지쳤다.

"아, 이것부터 처리해야지."

제론은 품에서 디아만트 상단의 채권을 꺼냈다. 그리고 심장의 마나링을 가속시켰다.

화르륵!

채권이 몽땅 불에 타 버렸다.

불꽃과 함께 재가 되어 흩날리는 채권을 가만히 쳐다보던 제론은 피식 웃으며 눈을 감았다.

이 채권은 제론이 만든 가짜였다. 제론에게 1,200만 골드나 되는 돈이 있을 리 없었다. 이것은 그저 파인트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위한 소품에 불과했다. 이젠 필요 없었다.

워낙 정교하게 만들어서 자세히 살펴도 가짜라는 사실을 쉽게 알아채지 못하지만 사용할 수는 없었다. 디아만트 상단의 채권은 마법적 처리와 일련번호를 통해 진위 여부를 반드시 확인한다.

어쨌든 채권을 처리한 제론은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잠든 제론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어렸다.

☆ ☆ ☆

파인트는 점점 초조해졌다. 당장이라도 연락이 올 것 같던 디아만트 상단이 너무 조용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곤란했다. 빌린 돈 300만 골드에 대한 이자도 문제였고, 상단 운영자금도 문제였다.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지?"

광산은 지금 채굴도 안 하고 있었다. 원래의 광산주가 인부와 장비까지 싹 수거해 갔기 때문이었다. 이는 당연한 관례였다. 자신이 직접 구한 사람과 장비를 써야 믿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기에 1,500만 골드나 되는 돈을 넣은 상태로 이자만 나가고 있었으니 손해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손해는 디아만트 상단이 나서는 순간 싹 메워진다.

철광석을 독점으로 공급받으면 그로 인한 이득은 엄청나다. 루바인 상단은 이번 일을 계기로 쭉쭉 성장할 것이다.

한데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디아만트 상단이 너무나 잠잠했다. 베어크 영지에 지부까지 만들었는데 움직이지 않는단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디아만트 상단에 대해 알아보겠다고 나간 놈들은 아직도 안 들어왔느냐?"

파인트의 호통에 직원 하나가 슬그머니 눈치를 살폈다. 그들이 빨리 돌아오지 않으면 불똥이 자신에게 튄다. 벌써 몇 번이나 불벼락을 맞았는지 모른다.

방 안이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파인트는 씩씩거리며 방 안에 서 있는 3명의 직원을 둘러봤다. 파인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움찔 목을 움츠렸지만,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시선을 돌리면 더 곤욕을 치른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파인트가 막 폭발하려는 순간, 문이 벌컥 열렸다.

꽝!

"큰일 났습니다!"

부서져라 문을 열고 들어온 직원이 그렇게 외치며 파인트를 바라봤다.

파인트는 눈살을 찌푸리며 덜렁거리는 문과 직원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리고 이를 갈았다.

문짝까지 부순 놈을 용서할 수는 없었다. 만일 별것 아닌 일이라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며 직원을 향해 턱짓을 했다. 말해 보라는 뜻이었다.

"크, 큰일 났습니다. 디아만트 상단이 다른 광산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뭐?"

파인트는 눈을 부릅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쫙 흘러내렸다. 이건 아니다. 만일 정말로 디아만트 상단이 다른 광산으로 눈을 돌리면 난리가 난다.

광산을 파는 거야 문제 될 게 없다. 어차피 가치에 맞는 가격을 주고 샀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게 문제였다.

루바인 상단에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 아니, 거의 임박했다. 300만 골드나 되는 빚을 계속 끌고 갈 수는 없었다. 또한 상단을 돌릴 시기도 살짝 늦었다.

만일 여기서 더 지체하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손해를 보게 될 것이다.

"똑바로 보고해! 디아만트 상단이 다른 광산으로 눈을 돌렸다는 게 무슨 말이야!"

"주변 인물을 이용해 우리 상단이 보유한 광산을 처분할 거라는 소문을 흘렸습니다. 한데도 꿈쩍 않는 것이 이상해서 위험을 감수하고 디아만트 상단에 접근했습니다."

파인트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그랬더니 내부적으로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지 뭡니까. 무슨 일로 그리 바쁜지 알아보니……."

"다른 광산을 매입할 준비를 한다 이거냐?"

"그, 그렇습니다."

파인트는 지체하지 않고 즉시 움직였다.

"디아만트 상단으로 가자!"

최대한 서둘러 걸었다. 함께 있던 직원 전원이 그 뒤를 따랐다.

디아만트 상단까지 가는 길은 참으로 멀게 느껴졌다. 마음은 조급했지만 그래도 달리지는 않았다. 괜히 급한 모습을 보여서 좋을 게 없었다.

"후욱."

디아만트 상단 지부에 도착한 파인트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마침 바쁘게 움직이고 있던 클레와 눈이 마주쳤다.

"여긴 어쩐 일이신가요?"

클레가 놀란 눈으로 묻자, 파인트는 잔잔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광산 문제로 상의드릴 게 있어서 찾아왔소."

클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한 번쯤 그 문제로 찾아올 거라 생각했다.

"일단 이쪽으로 오시지요."

클레는 파인트를 자신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파인트에게 적당한 자리를 권한 후, 자신도 그 앞에 앉았다. 그녀의 뒤에는 안슈트가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

"자, 이제 얘기를 해 보세요. 광산 문제라고요?"

"그렇소. 우리 루바인 상단이 구입한 광산에 관심을 가진 걸로 알고 있소."

클레가 빙긋 웃었다. 파인트는 그 미소를 보니 더 그녀를 갖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관심을 가졌던 건 맞아요. 하지만 지금은 관심이 사라졌어요."

"관심이 사라졌다고? 왜 그렇게 된 거요?"

"일단 값이 너무 비싸요. 최소한 1,500만 골드를 줘야 매입이 가능한데, 그 정도 돈을 투자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어요."

파인트의 얼굴이 굳었다. 우려했던 사태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매장량을 생각하면 1,500만 골드에 사도 충분히 이득이었다. 한데 가치가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알려진 매장량의 절반만 해도 손해는 아닌 듯하오만."

"지속적으로 들어가는 비용을 생각하면 꼭 그렇지도 않아요."

파인트는 클레를 노려봤다. 누가 봐도 값을 깎겠다는 수작이었다. 하지만 지금 칼자루를 쥔 사람은 클레였다. 파인트가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500만 골드에 합시다. 한 푼도 안 남기고 넘겨 드리겠소."

클레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뭔가 오해를 하신 모양이네요. 그 광산은 구입할 생각이 없습니다."

"하아. 알겠소. 그럼 1,400만 골드로 합시다."

지금은 손해를 보고서라도 팔아야 할 시점이었다. 하지만 만일 파인트가 더 능숙했다면 결코 이렇게 나서서 값을 깎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스로 약자라는 것을 말해 주는 꼴이었으니까.

"관심이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1,300만 골드! 더 이상은 곤란하오."

클레는 파인트의 모습에서 다급함을 읽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설사 500만 골드를 부른다 하더라도 응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공짜로 준다고 해도 생각해 봐야 할 문제였다.

"우리 상단에서는 이미 그 광산을 포기하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대체 왜 그런 결정을 했단 말이오! 그럼 1,200만 골드로 합시다! 어차피 디아만트 상단도 그 정도 가격에 사려고 하지 않았소!"

파인트는 클레의 태도에 다급해졌다. 그가 보기에는 정말로 광산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무리한 액수를 불렀다.

하지만 클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파인트에게 자신이 가진 정보 하나를 알려 주었다.

"그 광산의 매장량을 정밀하게 조사해 보는 건 어떤가요?"

파인트의 표정이 변했다. 광산의 매장량 문제가 나온다는 건 자신이 몇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사전 작업 때문이었다.

"매장량에 대한 소문은 다 헛소문으로 밝혀졌습니다. 광산의 매장량에는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클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말을 듣고 말고는 파인트의 문제였다.

"그럼 저도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네요. 그 광산은 매입하지 않겠습니다."

클레의 말이 워낙 단호했는지라 파인트가 크게 당황했다.

"1,000만 골드!"

파인트는 그렇게 외치고 클레의 표정을 살폈다. 1,000만 골드까지 깎았는데도 전혀 표정 변화가 없었다. 파인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거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오? 상도의라는 것이 있는데."

"상도의라뇨?"

"가격을 너무 후려치는 것 아니냔 말이오. 이쯤 했으면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니오?"

"여전히 오해하고 계시는군요. 전 정말로 광산을 매입할 생각이 없습니다."

"나도 더 이상 팔고 싶지 않소."

파인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그렇게 하면서도 내심 클레가 잡아 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클레는 오히려 반색했다.

"가겠소."

파인트가 돌아서자, 클레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살펴 가세요. 바쁜 관계로 멀리 나가지 못합니다."

클레의 말과 행동에 파인트는 이를 갈며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상념이 휘몰아쳤다. 일이 완전히 꼬여 버렸으니 큰일이었다.

열흘이 지났다. 파인트는 볼이 홀쭉해졌다. 거기에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웠다. 맘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가격을 낮춰 다른 상단과 접촉했는데, 그 어떤 상단도 광산을 사려고 하지 않았다. 별의별 방법을 다 써 봤는데도 통하지 않았다.

베어크 영지에는 이미 루바인 상단의 광산은 매장량이 거의 없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결국 파인트는 매장량을 다시 조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는 정말로 놀라웠다. 매장량이 거의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철광석에서 철만 쏙 빼 간 것 같았다.

파인트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매일 매장량을 다시 조사했다. 한데 조사를 할 때마다 매장량이 줄어들었다.

매장량이라는 것이 정확히 측정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에 몇 가지 방법으로 대략적인 양을 추측하는 방식이었다.

한데 방법을 바꿀 때마다 매장량이 달라졌다. 파인트는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지난 열흘 동안 계속 광산에 매달렸다. 하지만 결론은 매장량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광산 개발자를 족치고자 했지만, 그것도 불가능했다. 낌새를 눈치채고 도망친 것이다. 사실 그에게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광산이라는 게 원래 그런 것이니 말이다.

애초에 매장량을 제대로 측정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뭔가 이상했다.

고민에 잠겨 있는 파인트에게 직원 한 명이 머뭇머뭇 다가갔다.

"무슨 일이냐?"

"저…… 슈린 상단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슈린 상단은 슈린 공작가가 거느린 상단의 중심이 된다. 루바인 상단과 비슷한 규모의 상단을 여럿 거느리는 구조였다.

그리고 슈린 상단의 책임자는 당연히 파인트의 아버지인 슈린 공작이었다. 가문의 재력을 한 손에 움켜쥐기 위한 방식이었다.

"뭐라고 하더냐?"

"광산 전문가를 보냈다고 했습니다."

파인트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결국 슈린 공작의 귀에 이번 일이 들어간 것이다. 사실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젠장. 미스트 드래곤은 뭘 하고 있는 거야. 그놈을 정리했으면 이런 곤욕을 치를 필요도 없었을 것을!'

만일 제론이 당시 나서지 않았다면 광산을 헐값에 살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손해를 크게 보긴 했어도 상단이 망할 지경은 아니었을 것이다.

"언제 온다더냐?"

"오늘 중으로 도착한다고 합니다."

파인트는 소파에 기대 눈을 감았다. 이제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여기서 고용한 사람들도 전문가였다. 가문에서 사람이 오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루바인 상단은 끝났다. 문제는 그냥 루바인 상단만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상단 운영자금이라는 것은 미리 받은 물품에 대해 지급할 대금도 포함된 것이다. 1,200만 골드 중, 300만 골드는 조만간 지급해야 할 돈이었다.

'빚이 300만 골드에 지불 대금이 300만 골드라…….'

그나마도 빚은 고리의 사채를 썼다. 매일 나가는 이자가 엄청났다. 결국 파인트에게 남은 길은 딱 하나였다.

"슈린 상단으로 가자."

파인트는 힘없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치욕으로 물든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이번 일로 인해서 후계자 자리가 흔들릴지도 모른다. 그건 루바인 상단을 날려 먹은 일보다, 또 광산이 텅텅 빈 것보다 훨씬 더 짜증 나는 일이었다.

☆ ☆ ☆

제론은 태블릿을 통해 그 모든 상황을 지켜봤다. 또한 한편으로 유적에서 채굴과 제련을 통해 창고에 철괴가 쌓이는 것도 확인했다.

공간이 확장된 창고의 크기는 어마어마했다. 한데 그 창고의 절반이 철괴로 꽉 차 버렸다.

나머지 광맥은 유적에서 가까운 부분만 싹 정리하고 산으로 뻗은 것들은 그냥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그래야 그들도 광산에서 철광석을 캘 테니까.

제론은 유적 아래로 뻗어 나간 광맥의 채굴을 시작했다. 루바인 상단의 광산을 말려 버린 것처럼 빠르게 하지는 않았다. 속도를 느리게 조정했다.

철광맥을 만드는 데에는 막대한 시간이 필요했다. 유적이 지독히도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기에 광맥이 이 정도로 만들어졌지,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많은 광맥을 만드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나마 제대로 광맥 제조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광맥이 이 정도였지 만일 제대로 돌아갔다면 이 근방은 모조리 철광석으로 뒤덮였을 것이다.

유적은 그 정도로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자, 그럼 새 광산은 어떻게 돼 가는지 볼까?"

제론은 태블릿을 조종해 디아만트 상단이 새로 개발하는 광산을 확인했다.

수많은 인부와 장비가 동원되어 광산을 만들고 있었다. 광맥을 너무나 정확히 짚어 주었기 때문에 광산을 만드는 건 상당히 순조로웠다. 매장량도 굉장했기에 디아만트 상단은 2,000만 골드에 광산을 산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결단력이 대단해. 감도 좋고."

제론은 클레를 그렇게 판단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결코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광맥을 정확히 짚어 준다는 말을 어떻게 믿겠는가.

하지만 클레는 제론을 믿었고, 지금의 결과를 만들었다.

더구나 새로 개발한 광산은 베어크 영지 밖에 위치했다. 베어크 영지를 벗어난 곳에 위치한 큰 산이었는데, 그곳은 왕국 직영지였다.

클레는 발 빠르게 그 산을 매입했고, 광산을 개발했다. 덕분에 베어크 영지에 지분을 빼앗길 일도 없었다.

그 지분만으로도 제론에게 준 2,000만 골드 이상의 값어치를 했다.

제론은 마티를 움직여 클레에 초점을 맞췄다. 마침 클레는 안슈트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지 않아?"

"맞습니다, 아가씨."

"이렇게 정확히 광맥을 찾아내다니. 대체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 거지?"

"운일 겁니다."

클레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운일 리가 없어요. 그동안 그 사람이 했던 일을 생각하면 뭔가 비밀을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클레의 말에 제론이 감탄을 했다.

"대단하군. 의심이 많으니 당분간 조심해야겠어."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클레와 안슈트의 대화에 집중했다.

"이곳의 일은 언제쯤 마무리됩니까?"

"얼마 걸리지 않을 거예요. 기간트를 동원해서라도 빨리 끝내야죠. 다른 광산보다 늦었으니 서두를 필요가 있어요."

안슈트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클레는 이런 일에는 아주 정확하고 냉정했다. 그리고 안슈트는 그런 클레를 지켜 주기만 하면 된다.

"이 일이 대충 마무리되면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갈 거예요."

"에어스트 백작령 말입니까?"

"안 그래도 일정에 있었는데, 좀 당겨야겠어요. 어차피 일정상으로 얼마 안 남기도 했고요."

"그럼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그 뒤로는 소소한 얘기가 이어졌다.

제론은 눈살을 찌푸렸다. 의심을 품은 클레가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오는 상황이 좀 꺼림칙했다. 하지만 막을 수는 없었다. 어쨌든 디아만트 상단과 계약을 한 상황이니까.

"상단 설립을 서둘러야겠어."

지금이야 다른 상단을 이용해 곡물을 유통할 수밖에 없지만, 나중에는 결국 그것을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제대로 된 상단을 만들어 레늄 왕국은 물론이고 대륙 전역으로 곡물을 유통할 생각이었다.

생산량은 충분했다. 일단 영주성 근방의 평지만 해도 엄청난 넓이였다. 거기에 암석 지대를 개간해서 나오는 땅까지 하면 상상을 초월하는 생산량이 될 것이다.

또한 차츰 초고대 문명의 농법을 도입하면 생산량이 더욱 늘어날 것이다.

"할 일이 많군."

할 일이 많다는 것은 돈 들어갈 구석이 많다는 뜻과도 같다. 이제 항구도 짓고 어업까지 손대려면 웬만한 돈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이번에 광산을 팔아 만든 2,000만 골드는 정말로 큰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자, 그럼 바인한테 연락을 해 볼까?"

제론은 이번 일을 여기서 그냥 끝낼 생각은 없었다. 루바인 상단을 무너뜨린 건 슈린 공작가를 흔들기 위함이었다.

바인에게 말해 놓으면 분명히 빈틈을 잔뜩 찾아낼 것이다.

루바인 상단은 결국 슈린 공작가의 것이다. 그들이 진 빚도 슈린 공작가의 다른 상단을 통해 자금을 조달해 막아야 하고, 물품 대금도 마찬가지로 처리해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다른 상단에 빈틈이 생긴다. 제론은 그것을 파고들 생각이었다. 아마 슈린 공작가는 루바인 상단으로 인해 크게 휘청거리게 될 것이다.

제론은 눈을 빛냈다. 슈린 공작가에 대한 복수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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