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파인트 폰 슈린
제론은 유적 로비 한가운데에 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이곳은 다른 유적과 조금 달랐다. 로비가 무척 좁았다.
다른 유적의 로비는 과장 조금 보태서 기간트를 소환해 움직여도 넉넉할 정도로 넓었는데, 이곳은 그냥 혼자 검술 수련을 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였다.
"특이하군."
제론은 일단 로비를 잠깐 살피다가 지하로 이동했다. 유적의 진정한 힘을 보려면 지하로 내려가야 한다. 다른 유적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면 가장 아래층에 통제실이 있을 것이다.
이 유적의 통제실은 지하 4층에 있었다.
다른 곳과 달리 생활공간이나 수련실은 따로 없었다. 3층은 텅 비어 있었는데, 그곳의 용도는 창고였다.
공간 확장 마법이 걸려 있었기에 겉으로 보이는 용량보다 훨씬 많은 양의 물건을 보관할 수 있었다. 웬만한 아공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지하 2층을 가득 채운 마티는 참으로 반가웠다. 이제부터 이 근방의 정보를 싹싹 긁어 올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이 유적의 경우 정보 수집 반경이 다른 유적에 비해 현저히 짧았다.
고작 베어크 영지와 근방의 산을 간신히 커버하는 정도였다. 당연히 마티의 수도 적었다.
하지만 제론은 전혀 불만이 없었다. 이 유적의 지하 1층에 있는 아티팩트 때문이었다.
이곳의 아티팩트 역시 수도 유적의 폴타와 마찬가지로 층을 꽉 채우고 있었다. 그 정도로 복잡하고 거대하며 막대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아티팩트였다.
이곳의 아티팩트는 놀랍게도 물질 변환 장치였다. 당연히 상당히 큰 제약이 있었고,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그 아티팩트는 유적이 잠든 동안에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작동했다. 물론 정상적으로 작동한 게 아니라, 상당히 느리고 정교함도 떨어졌지만 말이다.
제론은 이 지역에 왜 철광산이 다섯 개나 있는지 이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유적이 철광석을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리고 왜 거리에서 곧장 유적 로비로 이동했는지도 알아냈다. 이곳에는 고대 유적이 없었다. 다른 초고대 문명의 유적과 달리 이 유적에서는 에너지가 외부로 분출되지 않았다. 아티팩트가 지속적으로 작동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막대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아티팩트였다. 주변의 지력까지 일부 끌어다 쓸 정도였다. 그로 인해 베어크 영지의 농사가 신통치 않았다. 지력이 모자라니 작물이 제대로 자랄 리가 없었다.
어쨌든 제론은 이 유적의 주인이 되었다. 중앙 유적과의 통로는 당연히 개통되었다. 앞으로 제론은 원하면 언제든 이곳에 올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유적에서 밖으로 나갈 때 사람들의 시선을 조심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물론 마티가 있으니 그 문제는 비교적 수월하게 해결이 가능했다.
게이트를 열어 주는 아티팩트인 폴타라도 있으면 더 좋았겠지만 철광석 생성 아티팩트가 있는데 그것까지 바랄 수는 없었다.
대로 한가운데라서 건물을 지어 감추는 것도 불가능했다. 아예 영지 자체를 뜯어고치지 않는 한, 그저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이제 아티팩트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볼까?"
아티팩트가 움직이고 있긴 했지만 완전하지는 않았다. 사실 발생시키는 철광석의 양도 좀 더 많아야 했고, 지금처럼 사방으로 철광석이 뻗어 나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 철광산이 발견된 곳은 다섯 군데지만, 사실 더 많은 광맥이 존재했다. 그중 대부분이 지하로 이어져 있었고, 일부만 위로 뻗어 나가 산을 파고들었다.
아무리 대단한 아티팩트라 하더라도 그냥 돌을 철광석으로 바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베어크 영지는 그 조건에 가장 부합하는 영지였다.
그리고 그 조건 때문에 영지 한가운데가 아닌 주변 산으로 광맥이 뻗어 나간 것이었다.
제론은 아티팩트 조작법을 아주 간단히 익혔다. 통제실과 태블릿을 연결하면 외부에서도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했다. 물론 물질을 변환하는 것이었기에 아티팩트를 통해 그것을 이루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하기는 했다.
이 유적에 대해 모두 파악한 제론은 씨익 웃었다. 드디어 파인트를 무너뜨릴 방법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정답은 유적 3층 창고에 있었다. 이 창고의 용도는 너무나 간단했다. 바로 철을 보관하기 위한 곳이었다. 3층 창고는 놀랍게도 그냥 보관만 하는 게 아니라 자동으로 제련이 가능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지하 곳곳으로 뻗어 나간 광맥을 통해 철광석을 채굴한 다음, 곧장 제련해서 철괴를 만들어 창고에 차곡차곡 쌓을 수 있었다. 놀랍게도 이 모든 것이 자동으로 이뤄진다.
채굴 방향은 통제실에서 마음대로 조절이 가능했다. 채굴한다고 그냥 구멍이 뻥 뚫리는 게 아니라 제련하고 남은 찌꺼기와 다른 곳에서 끌어온 흙과 돌을 채우기 때문에 그저 철광석만 사라지는 시스템이었다.
제론은 다섯 산 쪽으로 동시에 채굴을 시작했다. 채굴 속도는 마음대로 조절이 가능했다. 처음에는 상당히 빠른 속도로 철광석을 채굴하고 그것을 녹여 철괴를 뽑아냈다.
하지만 이곳의 모든 철광석을 뽑아 먹으면 곤란했기에 제론은 속도를 낮췄다. 아직 어느 광산을 파인트가 구입할지 모르기에 다섯 광산을 동시에 채굴했다.
나중에 파인트에게 더 큰 손해를 안기려면 미리 작업을 시작해 두는 것이 나았다.
모든 준비를 마친 제론은 마티를 베어크 영지에 모두 풀었다. 그리고 틈을 봐서 아무 시선도 없을 때, 유적에서 나갔다.
당분간은 이 유적을 이용해 베어크 영지에 오는 일은 자제할 생각이었다. 너무 신경이 많이 쓰였다. 확실히 대로에 유적 입구가 있으니 상당히 불편했다.
제론은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급할 이유가 없었다. 며칠 기다리며 파인트가 광산을 구매하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 ☆ ☆
파인트가 루바인 상단을 이끌고 베어크 영지에 들어섰다. 제론이 유적을 얻은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디아만트 상단은 어떻게 되었느냐?"
파인트의 다급한 질문에 미리 베어크 영지에 와서 사전조사를 하고 있던 상단의 직원이 즉시 대답했다.
"열 명의 직원이 조사 중입니다."
"클레는?"
"아직입니다."
파인트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한발 빨리 왔다. 그러니 광산을 얻을 확률도 높았다.
"조사한 내용을 읊어 봐."
파인트의 명에 직원이 즉시 서류 한 장을 공손히 내밀었다. 파인트가 그것을 받아 들여다보자, 직원이 보고를 시작했다.
"다섯 광산 중 구입 가능성이 있는 것은 세 개입니다."
"세 개? 나머지는?"
"나머지는 직접 운영하기로 정해졌습니다."
"뭐, 그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지."
광산을 개발하기만 하면 그때까지 들어간 자금을 모조리 회수하고도 어마어마한 돈을 벌 수 있었다. 굳이 광산을 유지하느라 골머리를 앓을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직접 운영하면 그것을 파는 것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물론 한꺼번에 벌지는 못한다. 대신 꾸준히 돈을 벌 수 있다.
둘 중 어떤 걸 선택하든 자유였다. 보통 광산 개발에 뛰어드는 자들은 전자를 선호했다. 영지 내의 광산을 개발해 영주에게 파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베어크 영지에서는 드물게도 다섯 개의 광산이 동시에 개발되었다. 그것도 매장량이 거의 비슷한 광산이었다. 지리적인 조건도 똑같으니 광산의 가격도 비슷하게 형성되었다.
"모르긴 해도 광산이 바닥날 때까지 채굴하면 1억 골드까지도 벌 수 있을 것입니다."
"살 떨리는 금액이로군."
역시 광산이었다. 벌어들이는 액수가 어마어마했다. 순간 광산을 사서 직접 운영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파인트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가져갔다. 그것을 확인한 직원이 보고를 이어 갔다.
"각 상단에서는 아직도 광산의 매장량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한두 푼도 아니고 확실하지 않으면 쉽게 들어갈 수 없겠지. 몇 개나 되는 상단이 참여할 것 같나?"
"돈 좀 있는 상단은 모두 모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 정도 매장량을 가진 광산은 사실 드물기 때문에 다들 눈독을 들이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도 직접 철광산을 하나 운영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
"철광산을 직접 운영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존에 해 왔던 대로 철광석이나 철을 유통하는 것이 낫습니다."
직원의 말에 파인트가 살짝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본 직원이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우리가 광산을 확보한 뒤, 그것을 디아만트 상단과 계약을 맺고 넘기는 방식을 쓰면 훨씬 안전하게 이익을 창출할 수 있습니다."
디아만트 상단과 계약을 맺는다는 말에 파인트의 안색이 환하게 펴졌다.
"그 부분 자세히 얘기해 봐라."
어차피 어떤 식으로든 디아만트 상단과 엮이려 했다. 클레와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가려면 이런 부드러운 방법이 좋았다.
"우리가 광산을 먼저 확보한 뒤, 구입한 가격으로 디아만트 상단에 넘기는 것입니다. 단, 철광석의 유통을 우리 루바인 상단이 맡는다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파인트가 눈을 번득였다. 그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계획 아닌가. 안정적으로 철광석을 받을 수 있으니 좋고, 또 광산을 클레에게 넘기면서 살짝 빚을 지운 느낌을 줄 수도 있었다.
거기에 만일 광산의 매장량이 예상보다 훨씬 낮더라도 손해를 볼 일이 없으니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훌륭해. 그렇게 진행하도록."
파인트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계획을 허락했다. 직원은 사기가 충천한 표정으로 물러갔다. 크게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였다.
직원이 문을 닫고 나가자, 파인트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서류를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었다.
"잘하면 완벽하게 엮을 수도 있겠어. 그나저나 광산의 예상 낙찰 가격이 1,200만 골드라니, 정말 엄청나군."
베어크 영지의 현 상황을 핵심만 짚어 잘 정리되어 있었다. 그저 서류를 한 번 읽어 보는 것만으로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단숨에 파악할 수 있었다.
파인트는 서류를 몇 번이고 읽으며 클레를 엮어 그녀의 아름다운 몸을 어떻게 유린할지 머릿속으로 그리고 또 그렸다.
클레는 베어크 영지에 들어서며 수행원의 보고를 받았다. 그녀의 뒤에는 안슈트가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따라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상단이 많이 모였네요. 경쟁이 만만치 않겠어요."
"하지만 누구도 우리보다 많은 액수를 제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전조사는 어떻게 되었나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매장량을 측정하고 있습니다. 다 같은 결과가 나오는 걸로 봐서 거의 확실합니다."
"현재 가격이 어떻게 형성되어 있나요?"
"일단 1,200만 골드 정도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위기에 따라 300만 골드 정도 더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매장량이 어마어마한 만큼 그 정도 가격이 될 거라 생각했다.
"일단 두 군데는 사전에 담합이 이루어져서 구입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클레가 인상을 찡그렸다.
"담합? 무슨 말인지 자세히 말하세요."
"광산 하나에 여러 상단이 붙었습니다."
"그러니까 상단 여럿이 자금을 모아 광산을 사서 지분을 나눈다는 말인가요?"
"예. 두 곳은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그들을 압도할 수 있지 않나요?"
"굳이 과도한 자금을 투자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나머지 한 곳만 확보해도 충분합니다."
매장량이 엄청나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아마 당분간은 레늄 왕국 내의 철광석 가격이 상당히 떨어질 가능성이 컸다. 막대한 철광석이 쏟아져 나올 테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디아만트 상단은 훨씬 유리했다. 대륙 각지에 지부가 있으니 이곳의 철광석을 다른 왕국에 내다 팔아도 되고, 또 자금이 풍부하니 쌓아 놨다가 나중에 가격이 안정되면 내다 팔아도 된다.
"이 서류에 정리해 두었습니다."
수행원이 내민 서류를 받은 클레는 그것을 단숨에 읽었다. 워낙 정리가 잘 되어 있었기에 상황을 파악하는 건 간단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의 말 대로였다. 역시 유능한 직원을 많이 보내 놨더니 확실했다.
"좋아요. 그럼 이렇게 추진하는 걸로 하죠."
클레는 일이 잘 풀릴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감히 누가 디아만트 상단과 돈으로 겨룰 수 있겠는가. 고작 레늄 왕국 안에서 말이다.
☆ ☆ ☆
제론은 화려한 호텔방에 앉아 태블릿을 통해 루바인 상단이 무슨 짓을 하는지, 또 다른 상단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확인했다.
"드디어 디아만트 상단이 등장했군."
제론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현재 진행 상황으로 보면 디아만트 상단과 루바인 상단이 광산 하나를 놓고 싸우게 되어 있었다.
상식적으로 보면 루바인 상단은 결코 디아만트 상단을 이길 수 없었다. 동원 가능한 자금을 봐도 그렇고, 정보력을 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루바인 상단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곳이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비열하고 잔인한 수법도 서슴지 않고 써먹는 곳이었다.
"이번에는 아주 재미있을 거다."
제론은 씨익 웃으며 태블릿을 조작해 철광석 채굴 방향을 바꿨다. 다른 곳은 중지시키고, 루바인 상단이 구입하려는 광산에 이어진 광맥의 채굴 속도를 높였다.
철광석 매장량이 차근차근 줄어들었다. 그와 동시에 유적의 창고에 철괴가 차곡차곡 쌓였다.
제론은 태블릿으로 몇 가지 정보를 더 확인한 뒤, 그것을 아공간에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격적으로 움직일 때가 되었다.
"어떻게 되었느냐?"
"성공했습니다."
"잘했다. 으하하하핫!"
파인트는 통쾌하게 웃었다. 일이 이렇게 잘 풀릴 줄은 몰랐다. 사실 이 방법이 안 되면 더 심한 방법을 동원해야 하는데, 그건 위험부담이 컸다. 상대가 디아만트 상단이니 말이다.
"지금 다들 매장량을 다시 측정한다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렇겠지. 결과가 들쭉날쭉하면 아마 혼란스럽겠지. 큭큭큭큭."
파인트는 아주 간단한 방법을 택했다. 매장량을 측정하는 자들을 매수한 것이다. 매수된 자들 중에는 디아만트 상단에 속한 사람도 몇 명 있었다.
모두를 매수한 건 아니었지만 최소 절반 이상을 매수해 광산의 매장량이 실제로 그리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정보가 돌게 만들었다.
지금 베어크 영지는 그에 관한 소문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사실 파인트가 의도한 것보다 소문이 훨씬 빠르고 격렬하게 퍼져서 좀 놀랍긴 했다. 잠깐 손을 썼을 뿐인데 소문이 들불처럼 번졌다.
어쨌든 원하던 대로 되었다. 이제 남은 건 디아만트 후작가가 투자의 상한선을 낮추도록 부추기기만 하면 된다. 물론 그건 클레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알아서 해 줄 것이다. 그중 한 명을 매수했으니 시작은 그가 하겠지만 말이다.
세상 어디나 빈틈은 있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디아만트 상단처럼 큰 곳은 더더욱 그런 법이다.
"자, 그럼 슬슬 분위기를 보러 갈까?"
파인트는 느긋하게 광산으로 향했다. 다른 네 곳의 광산에 비해서 그가 찍은 곳은 한산했다. 소문이 너무 심하게 퍼지고 거기에 신빙성까지 얹히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손을 떼는 상단이 많아졌다.
광산을 개발한 사람은 울상이었다. 그도 나름대로 매장량을 조사했다. 하지만 지금 퍼지고 있는 소문은 완전히 틀렸다. 아무리 다시 조사를 해도 매장량은 어마어마했다.
난감한 기색을 떨쳐 내지 못한 광산주에게 파인트가 다가갔다.
"이제 슬슬 결정을 내리실 때가 된 것 같소."
광산주는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500만 골드는 너무 적습니다. 이 광산을 개발하느라 들어간 돈과 시간을 생각하면……."
"그래도 매장량에 비하면 제법 높은 금액 아니오?"
광산주는 입을 다물었다. 너무나 억울했다. 만일 매장량이 소문처럼 정말로 그렇다면 500만 골드는 후한 금액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지나치게 후려친 가격이었다.
"좋아. 그럼 내가 600만 골드까지 생각해 보겠소."
광산주는 갈등했다. 600만 골드라면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사실 많이 남는 장사이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억울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1,200만 골드짜리 광산이었는데, 고작 하루 만에 반 토막이 났으니 속이 쓰렸다.
한참을 갈등하던 광산주가 결국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그 순간 옆에서 치고 들어온 목소리만 아니라면 말이다.
"700만 골드."
광산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파인트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네놈이 대체 여긴 무슨 일로 온 것이냐!"
파인트는 너무 화가 나서 아카데미 시절에 하던 대로 소리쳐 버렸다.
"말이 너무 심하군.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해도 되나?"
파인트는 이를 갈며 제론을 노려봤다. 확실히 실수하긴 했다. 하지만 사과를 하기는 싫었다.
제론은 파인트가 사과를 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재차 광산주에게 말했다.
"700만 골드에 파시겠소?"
광산주의 안색이 밝아졌다. 무려 100만 골드를 더 벌 수 있는데 왜 마다하겠는가.
"팔겠습……."
"800만 골드!"
파인트가 외쳤다. 짜증이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고작 700만 골드에 이 광산을 빼앗기면 앞으로 10년 동안은 잠을 설칠 것이다.
광산주의 표정이 변했다. 왠지 분위기가 묘했다. 두 사람의 기세 싸움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이거 잘하면…….'
광산주의 눈동자에 욕심이 어렸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가격이 알아서 올라갈 것 같았다. 잘하면 훨씬 더 비싸게 파는 것도 가능했다.
"900만 골드."
제론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던졌다. 파인트는 그 망설임을 놓치지 않았다. 이제 한 번만 더 부르면 자신이 이길 것이다.
"1,000만 골드."
어차피 1,200만 골드에 사려고 했던 광산이었다. 거기에 몇백만 골드 정도는 추가로 지불할 의향이 있었다. 이 광산의 가치는 상당히 높았다.
그러니 1,000만 골드에 사도 충분히 이익이었다.
파인트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는 제론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흥. 돈이 없으면 이만 꺼져라."
그 말에 제론이 눈을 부라렸다.
"1,100만 골드!"
제론이 크게 외쳤다. 오기로 만용을 부리는 모습이 눈에 훤히 들어왔다. 파인트는 피식 웃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금액을 또 올렸다.
"1,200만 골드."
그렇게 말하는 파인트의 표정에는 우월감이 가득했다. 그리고 오만한 눈으로 제론을 노려봤다. 네깟 것이 감히 이제 어쩌겠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흐음."
제론은 뒤로 한발 물러났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봐도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파인트도 광산주도 이제 경쟁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론에게 1,200만 골드가 넘는 돈이 있을 리 없었다.
사실 말이 1,200만 골드지, 정말로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루바인 상단도 1,200만 골드를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이번에는 그렇게 쓰고서 바로 광산을 팔아 돈을 회수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에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이었다.
실제로 100만 골드면 웬만한 작은 영지 정도는 너끈히 사고도 남는다.
예전 슈린 공작가가 테페룸 100킬로그램을 잃어버리고 그걸 다시 암시장에서 사느라 재정 상태가 잠깐 흔들린 적이 있었다.
테페룸 100킬로그램을 정상적으로 사기 위해선 100만 골드 정도 한다. 암시장에서 사려면 150만 골드에서 200만 골드 정도 한다.
즉, 300만 골드 때문에 재정 압박을 받은 것이다. 물론 그때와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그때는 신형 기간트를 개발하느라 돈이 말랐을 때였다. 어쨌든 그 일을 생각하면 1,200만 골드가 얼마나 막대한 액수인지 알 수 있다.
파인트는 상단 운영자금의 대부분을 가져왔다. 만일 이대로 이 돈을 잃으면 루바인 상단은 그대로 망한다. 물론 그럴 일이 없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자, 이제 됐으니 계약합시다."
파인트가 광산주를 보며 득의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광산주도 그러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제론이 한마디를 던졌다.
"1,300만 골드."
파인트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이놈은 뭔가를 아는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1,300만 골드나 되는 돈을 이런 광산에 투자할 리가 없었다.
"지금 장난하나? 과연 그 돈을 지불할 능력이 되는지 증명하는 게 먼저일 거 같은데?"
제론이 머뭇거리자, 파인트가 으르렁거리며 다가갔다.
"이놈 봐라? 그럼 지금까지 가격을 올리기 위한 수작을 부렸단 말이냐? 만일 정말로 그렇다면 절대 가만있지 않겠다."
파인트는 그렇게 말하며 뒤에 손짓을 했다. 그를 따라온 호위 기사들이 제론을 크게 에워쌌다. 도망가지 못하게 길을 막은 것이다.
제론은 그 모습을 보며 품에서 뭔가를 꺼냈다. 종이 뭉치였다. 그것을 파인트가 보기 좋게 앞에서 쫙 펼쳤다.
"채, 채권?"
무려 100만 골드짜리 채권이었다. 그것도 신용이 가장 확실한 디아만트 상단의 것이 뭉치로 있었다. 제론은 한 장 한 장 세며 일일이 확인시켜 주었다. 정확히 13장이었다.
파인트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이대로는 저 광산을 빼앗기고 만다. 어쩌면 제론의 뒤에 디아만트 상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굳이 저 채권을 돈 대신 들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자, 이제 1,300만 골드보다 더 많은 돈을 제시할 수 없다면 물러가는 게 어때? 꼬리를 말 수 있는 기회는 그리 자주 오는 게 아닌데 말이야."
제론의 유치한 도발에 파인트는 그대로 넘어갔다. 다른 사람이 같은 말을 했다면 코웃음을 쳤을지도 모르지만, 제론은 파인트에게는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사람이었다.
"1,500만 골드!"
파인트가 부를 수 있는 최대한의 금액을 불렀다. 상단의 운영자금 1,200만 골드에 빚으로 만든 300만 골드를 합한 금액이었다. 그것은 혹시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몰라 준비한 돈이었다.
제론은 채권을 다시 품에 넣었다.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었다. 아쉬운 표정으로 한발 물러났다.
파인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계약을 해도 될 것 같군."
계약은 순식간에 이뤄졌다. 파인트는 계약을 해냈다는 기쁨에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제론은 파인트가 계약하는 걸 확인한 뒤에야 조용히 자리를 떴다. 만면에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로.
☆ ☆ ☆
클레는 눈살을 찌푸리며 광산이 파인트에게 팔렸다는 얘기를 들었다.
"1,500만 골드? 예상하고 너무 다른데?"
대충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따지지 않고 또 광산 매입에 나서지 않은 건, 루바인 상단이 결국 자신에게 광산을 팔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루바인 상단은 결코 광산을 직접 운영하지 않는다. 그건 상단의 구조만 파악해도 금방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즉, 사서 되팔겠다는 뜻이었다.
루바인 상단이 가격을 후려쳐서 광산을 샀으니 처음 예상보다 더 저렴한 가격에 광산을 구입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기다린 거였다.
한데 1,500만 골드라니. 대체 루바인 상단은 뭘 한 거란 말인가. 지저분한 짓을 하느라 루바인 상단이 뇌물로 뿌린 돈이 무려 수십만 골드에 달한다.
한데 그렇게 하고도 1,500만 골드에 광산을 사다니. 이건 거의 맥시멈에 가까운 금액 아닌가. 클레가 생각했던 최대한의 금액이 바로 1,500만 골드였으니 말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말해 봐요."
클레의 물음에 수행원이 차근차근 당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황당했다. 클레는 모든 얘기를 다 듣고도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클레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아. 그 사람 때문에 정말 곤란하게 되었네요. 1,500만 골드나 주고 샀으니 더 비싸게 팔 게 분명한데……."
"어쩌면 원가에 넘길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원하는 건 좀 다르니까요."
"그야 그렇겠죠. 하지만 그래도 너무 비싸요."
1,500만 골드까지 생각하긴 했지만 1,200만이나 1,300만 골드에서 해결을 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 물 건너가 버렸다.
"대체 그 사람은 왜 우리 일에 훼방을 놓은 걸까요?"
클레의 말에 뒤에 서 있던 안슈트가 말했다.
"우연히 끼어든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그쪽에 얼굴도 안 내밀었잖습니까."
클레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분명히 모든 걸 다 꿰고 있었을 거예요."
클레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제론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루바인 상단에 부담을 가중시키려는 의도 같긴 한데…….'
광산을 비싸게 샀으니 의도는 성공했다. 하지만 광산에서 나오는 철광석을 통해 얼마든지 손해를 상쇄할 수 있었다. 또 소문을 잠재우거나 유리하게 바꾼 뒤, 조금만 이윤을 남기고 광산을 팔아도 충분히 팔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루바인 상단으로서는 손해 볼 게 전혀 없었다. 그래서 클레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아는 제론이라는 사람은 그런 의미 없는 짓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알 수 없자, 클레는 결국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생각을 포기했다. 이제는 시간을 두고 파인트에게 접근해 광산을 구입하는 문제를 고민해야만 한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크하하하핫! 그놈이 물러날 때의 표정 봤느냐? 어찌나 통쾌하던지. 크하하하핫!"
온 방 안이 떠나가라고 웃는 파인트를 보며 상단 직원들이 쓴웃음을 지었다. 1,500만 골드나 들여서 광산을 사 놓고는 뭐가 저리 즐겁단 말인가.
그리고 이제 하루라도 빨리 광산을 되팔아야 상단을 운영할 텐데 저러고 있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디아만트 상단은 어쩌고 있느냐?"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연락이 없으면 하도록 만들어야 할 것 아니냐!"
"그, 그것이……."
"왜? 못하겠느냐?"
"아, 아닙니다. 해 보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직원이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파인트는 그것을 보며 혀를 찼다. 그리고 나머지 직원들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디아만트 상단은 시간을 끌면 우리가 곤란해진다는 걸 알고 있다. 결국 가격을 낮추겠다는 속셈이란 말이다."
직원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만일 정말로 그렇게 되면 큰일이었다. 얼마나 가격이 낮아지냐에 따라 루바인 상단이 크게 위축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이렇게 말했는데도 못 알아들은 것이냐! 어서 다들 나가서 방법을 강구하란 말이다! 클레 폰 디아만트가 직접 날 찾아오게 만들라고!"
직원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파인트는 그것을 보며 혀를 찼다.
"쯧쯧. 한심해서 원. 내가 없으면 아예 상단이 돌아가질 않는다니까."
파인트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빙긋 웃었다. 어쨌든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그 생각을 하면 절로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일이 계속 잘 풀려 클레를 단숨에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원대한 꿈에 한발 다가가게 된다. 파인트는 느긋하게 소파에 기대 눈을 감았다. 잠깐 눈을 붙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잠시 후, 파인트가 소파에 편안하게 기대 잠들었다. 밖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