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화 (52/217)

Chapter 5 파티

"그냥 그렇게 혼자서 가신단 말씀입니까?"

바이스가 어이없는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은 대체 무슨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 움직였다.

"혼자서 가시면 대체 누가 영주님의 시중을 들겠습니까? 최소한 시종은 몇 명 데리고 가셔야지요. 또한 호위 기사도 최소한 셋은 데리고 가셔야 합니다."

"내게 호위가 필요할 것 같은가?"

사실 제론도 바이스가 왜 이러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제론의 가문도 예전에는 슈린 공작가가 견제할 정도로 잘 나갔다. 그렇기에 외부에 보이는 것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고작 파티에 참석하는 것 때문에 몇 안 되는 기사를 영지에서 빼낼 수는 없었다.

만일 그 소식이 슈린 공작가의 귀에 들어간다면 또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었다.

가뜩이나 영지가 아직도 어수선한데, 여기서 또 수작이 들어온다면 혼란으로 치달을 수도 있었다.

"영지전에 대한 대비는 되어 있나?"

"일단 병사를 지속적으로 모집하고 있습니다. 라이더 양성도 순조롭습니다."

"그래? 잘 됐군."

"일단 기본을 갖춘 수련 기사의 경우 실바를 지급해서 심화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딱 제론이 원하던 바였다. 실바로 실력을 키운 뒤, 제대로 된 라이더가 되면 크라테르나 카타락타를 지급해서 감을 키우는 게 효과적이었다.

상대적으로 수리도 실바가 훨씬 쉬우니 말이다.

"그보다 세나가 문제입니다."

"세나가 왜?"

제론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불과 얼마 전에 세나를 만났다. 그때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세나는 여전히 열의에 불타고 있었고, 제론을 뜨거운 눈으로 바라봤다.

"기간트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보조 엔지니어가 필요한 시기가 훨씬 지났습니다."

"적당한 사람이 없나?"

"영지를 샅샅이 뒤졌는데도 없습니다. 아무래도 다른 곳에서 영입을 하거나 직접 키워야 할 것 같습니다."

엔지니어만 있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 마법사도 있어야 한다. 세나처럼 뛰어난 엔지니어면서 동시에 마법도 가능한 사람은 대륙을 통틀어도 몇 명 없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아카데미 졸업생을 영입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뛰어난 사람은 유력 귀족 가문이 싹 쓸어갈 것이다.

큰 영지를 다스리는 귀족일수록 엔지니어가 많이 필요했다. 그만큼 많은 기간트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에어스트 백작령이 보유한 기간트의 수는 엄청나다. 그걸 세나 혼자서 몽땅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일단 용병 쪽이라도 선을 대서 알아봐."

"알겠습니다."

"당장 급한 불부터 끄자고. 그리고 슬슬 우리도 아카데미 졸업생을 끌어들이는 게 좋겠어."

"성적이 뛰어난 사람은 이리로 오지 않을 겁니다."

제론이 씨익 웃었다.

"당연한 소리를. 우리가 원하는 건 그런 사람이 아니야. 가능성을 보고 투자를 해야지."

바이스는 그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까지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는데, 그 뒤에 가능성이 열리겠습니까?"

"그걸 선별하는 게 핵심이야. 걱정 마. 그 부분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예? 그걸 어떻게…… 아! 그 새로 만드신 정보 조직을 이용하실 생각이십니까?"

제론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밖으로 나갔다.

바이스는 그것을 보다가 아차 싶어서 서둘러 따라 나갔다.

"영주님! 그냥 가시면 안 됩니……!"

거의 시차를 두지 않고 따라 나갔는데도 제론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마치 문을 통과하면서 그냥 사라진 것 같았다.

바이스는 졌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이내 피식 웃었다. 또 이런 게 제론의 매력 아니겠는가. 과연 혼자 파티에 가서 뭘 어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휴우. 옷이나 제대로 갖추실 수 있으시려나……."

파티까지는 아직 시간이 열흘 정도 남았다. 보통은 그동안 파티에 대한 준비를 하겠지만, 제론은 그러는 시간 자체가 아까웠다.

제론의 선택은 유적 13층 공략이었다.

검술이 정체된 지 제법 오래되었기에 13층 수련에 상당한 기대를 가졌다. 어쩌면 정체된 검술이 한 단계 나아가 진정한 소드 마스터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3층의 수련실에는 은색으로 빛나는 사람 모양의 인형이 검을 들고 가만히 서 있었다. 제론이 그 앞에 서자, 갑자기 온몸이 빛나더니 곧장 달려들었다.

검을 뽑고 자시고 할 시간도 없었다. 제론은 수련 시작 전에 잠깐 방심했다가 낭패를 당했다.

늘 이런 식이었다. 은빛 기사는 언제나 제론의 빈틈을 노렸다. 그것은 대련 중에도 수시로 나타났다.

제론은 이를 악물고 그와 싸우면서 점차 빈틈을 줄여 나갔다. 또한 방심이라는 단어를 뇌리에서 천천히 삭제해 나갔다.

은빛 기사의 공격은 지극히 단순했다. 화려함이라고는 전혀 없는 직선적인 움직임이 전부였다. 하지만 거기에 속도와 힘이 붙으니, 위력이 장난 아니었다.

또한 한 번 검을 찌르거나 휘둘러도 상상을 초월하는 궤적을 그렸다. 언제나 제론이 가장 막기 어려운 곳이나 빈틈을 정확히 공격했다.

제론은 은빛 기사를 상대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기초 검술만 쓰는구나!'

은빛 기사가 쓰는 검술은 놀랍게도 기초 검술이었다. 제론도 모두 아는 단순한 검술이었다. 기초 검술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검격과 마나의 흐름을 일치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이 완벽하게 일치되었을 때, 가장 큰 속도를 낼 수 있고, 또 가장 큰 파괴력을 가진다.

제론은 6일 동안 은빛 기사와 대결을 펼쳤다. 그리고 숙제 하나를 얻었다.

앞으로 기초 검술을 다시 처음부터 하나하나 뜯어서 확인하기로 했다.

유적 간 통로를 통해 단숨에 수도로 이동한 제론은 느긋하게 걸어갔다.

일단 마차를 구해야 한다. 텔레포트 게이트가 있음에도 이렇게 파티 일정을 일찍 알려주는 이유는 준비할 것이 제법 많기 때문이었다.

수도에서 먼 곳에 위치한 영지의 경우, 텔레포트 게이트로 이동하는 시간에서부터, 또 게이트를 몇 번이나 이용해야 수도에 도착이 가능했기에 여유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더구나 텔레포트 게이트로 마차를 함께 이동시키는 사람은 없었다. 불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어마어마한 비용이 필요했다.

수행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텔레포트를 이용할 때마다 들어가는 돈이 엄청났다. 그래서 아예 마차로 여행하듯 이동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보통 1개월 전에 일정을 잡아 초대장을 보내는 것이 관례였다.

보통 유력 가문의 경우 수도에도 저택이 있었다. 그렇기에 상당히 여유로웠다. 하지만 제론 같은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전혀 걱정할 건 없었다. 마차야 얼마든지 구입이 가능했고, 수행원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론은 수도의 용병길드로 향했다. 수도에서 인력을 구하기 가장 쉬운 곳이 바로 그곳이었다. 물론 정말로 쓸 만한 사람을 구하려면 비용이 상당했다.

용병길드에서 적당한 마부를 구한 제론은 마차까지 구입한 후, 그것을 타고 왕궁으로 향했다.

파티 일정이 잡히면 그때부터 초대장을 가진 가문의 경우 왕궁에서 머무를 수 있었다. 수행원까지 하면 한 가문에서 오는 인원이 상당했다.

하지만 왕궁은 크고 넓었다. 그쯤은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제론을 실은 마차가 힘차게 왕궁으로 달렸다. 용병길드에서 파견 나온 마부는 목적지가 왕궁이라는 걸 안 순간부터 긴장으로 덜덜 떨었다.

그리고 왕궁에 초대될 정도의 귀족이 대체 왜 마부 따위를 구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제론을 태운 마차는 무사히 왕궁으로 들어갔다. 물론 수문 기사의 비웃음 어린 눈빛을 좀 받긴 했지만 말이다.

왕궁의 제4 시종장은 살짝 의심스러운 눈으로 눈앞에 선 사내를 바라봤다. 하지만 말로 그 의심을 끄집어낼 수는 없었다.

보통 시종장은 귀족이었다. 하지만 작위를 가진 귀족에 비할 수는 없었다. 왕궁에는 총 일곱 명의 시종장이 있었고, 그중 제1 시종장이 나머지 시종장을 거느렸다.

각각의 시종장은 수백 명의 시종을 손끝으로 부리는 위치에 있었다. 또한 왕궁에 들락거리는 귀족을 만나 그들에게 시종과 거처를 분배하는 역할도 했다.

4시종장은 비교적 관심도가 높은 귀족을 주로 맡았다. 한데 눈앞에 선 사내는 아무리 잘 봐줘도 몰락귀족에 가까웠다.

하지만 몰락귀족을 왕궁의 파티에 초대할 리가 없었다. 그러니 둘 중 하나였다.

상부의 실수로 초대장을 보낼 사람을 잘못 선정했거나, 몰락귀족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

물론 4시종장은 그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열어 두었다. 어떤 상황이건 냉정하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정중히 요청했다.

"초대장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만일 유력 가문의 가주나 자식들에게 같은 행동을 했다면 상당한 결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4시종장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닐 거라고 판단했다.

제론은 대수롭지 않게 초대장을 건넸다. 사실 이런 상황이 결례가 된다는 것쯤 제론도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론은 그래도 상대의 사정을 이해할 만한 아량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정작 제론은 그런 것이 그다지 중요치 않다고 여기기도 했고 말이다.

이는 가문이 몰락하고 유적을 발견했으며 전쟁을 겪고, 영지를 경영하는 모든 일을 거치며 서서히 확립된 가치관이었다.

4시종장은 초대장에 적힌 제론 폰 에어스트 백작이라는 이름에 속으로 헉 소리를 삼켰다.

에어스트 백작은 최근 가장 뜨겁게 떠오르는 이슈였다.

그가 이번 전쟁의 영웅이나 다름없는 붉은 학살자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최대 이슈였는데, 최근 영지전을 통해 주변 영지를 병합하면서 레늄 왕국에서 가장 넓은 영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영지전 후 제론이 주변의 산맥이나 암석 지대와 해변까지 영지로 신청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매년 납부해야 할 세금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났지만, 어쨌든 왕국 최대의 영지를 소유하게 된 것이다.

그 외에도 자잘한 소문이 그를 잔뜩 따라다녔다. 당연히 왕궁에서 초대할 만한 사람이었다.

4시종장은 더없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초대장을 돌려주었다. 우아하면서도 군더더기 없는 행동이었다.

"환영합니다, 에어스트 백작님.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시종장은 그렇게 말하며 제론의 수행원이 혹시 있나 살폈다. 처음 제론을 만나면서 다 확인했지만 어쩌면 자신이 잘못 봤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의 마음을 알았는지 제론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수행원은 없으니 나 혼자 적당히 지낼 수 있는 방이면 되오."

제론의 말에 시종장은 속으로 뜨끔했다. 사실 처음 제론을 보자마자 그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표정에 그걸 드러낼 수는 없는 일.

"제가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수행원이 없으면 불편하실 테니 제가 최대한 시종을 많이 보내드리겠습니다."

시종장은 물 흐르듯이 그렇게 말하고는 서둘러 제론을 거처로 안내했다.

제론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상당히 감탄했다. 역시 왕궁의 시종장은 달랐다. 속마음이 전혀 얼굴에 드러나지 않으니 말이다.

만일 제론에게 왕궁 파티의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 보이는 시종장의 모습이 진심이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어쨌든 시종장은 제론을 제법 그럴듯한 거처로 안내했다. 그리고 지내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열 명이나 되는 시종을 붙여 주었다.

그들은 제론이 왕궁에서 지내는 동안 수족이 되어 움직일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그야말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지낼 수도 있었다.

열 명의 시종은 알아서 할 일을 찾아 움직였다. 제론은 그저 침실에 있는 끈 하나만 당기면 끝이었다. 그러면 언제든 시종 하나가 달려왔다.

제론은 거처에서 한 발도 나가지 않았다. 그저 침실에서 끊임없이 검을 휘둘렀다.

아직 파티가 시작되려면 며칠 더 있어야 한다. 만일 제론이 은빛 기사와의 싸움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면 유적에서 수련해야겠지만, 지금은 딱히 장소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침실을 나가지 않았다.

밥은 때가 되면 알아서 갖다 줬다. 또한 밤이 되면 시종들이 알아서 목욕물도 준비를 했다. 제론은 딱히 그들을 제약하지 않았다.

이곳에 있는 열 명의 시종은 제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역할도 함께하고 있었다. 그걸 알고 있었지만 제론은 딱히 감출 게 없었기에 그냥 내버려 뒀다.

제론은 그렇게 파티 전날까지 기초 검술을 연마했다.

처음에는 누구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사람이 다시 걸음마를 연습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기초 검술을 마스터한다는 것은 검의 흐름과 마나의 흐름을 일치시키는 것이었다. 제론은 분명히 그렇게 했다고 믿었다.

한데 그게 아니었다. 검과 마나가 일치되었다고 느낀 건 제론의 착각이었다. 아니, 그때의 수준으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경지가 높아지지 않으면 그걸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니까.

그래서 다시 기초 검술을 연마하는데도 모든 것이 새로웠다. 검과 마나가 미묘하게 흐트러지는 걸 알아차리는 것도 쉽지 않았고, 알아차리더라도 그걸 일치시키는 건 더 힘들었다.

요는 마나를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컨트롤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제론에게는 아직 그 정도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제론은 실망하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이걸 이뤄야 검술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파악했기에 오히려 의욕에 불탔다.

기초 검술은 결코 복잡하지 않다. 가장 정직한 검격으로 이루어진 검술이었다. 물론 그건 겉모습뿐이었다. 기초 검술에서 검술의 형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나의 흐름이었다.

그렇기에 식사나 목욕물을 가져다준다는 핑계로 가끔 제론이 수련하는 모습을 훔쳐본 시종들도 그저 열심히 검을 휘두른다고만 생각했다.

☆ ☆ ☆

"그러니까 아직도 침실에서 검만 휘두르고 있단 말이냐?"

"예. 가끔은 밥도 거를 때가 있습니다."

시종의 보고에 4시종장은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뛰어난 기사라도 그렇게까지 열심히 검을 수련하지 않는다.

아무리 검술이 뛰어나도 결코 기간트를 이길 수 없다. 그렇기에 검술 수련을 하는 것보다는 그 시간에 기간트를 훈련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한데 하루 종일 검술 수련이라니, 기도 차지 않았다.

"사교라는 단어를 알고 있긴 한 건가?"

파티 시작 전에 미리 다른 귀족을 만나서 인사도 나누고 대화를 통해 친목도 다져야 향후 영지를 경영하거나 가문을 이끌어 나가는 데 도움이 된다.

"애송이는 애송이로군. 군에서 제대한 지 얼마 안 된 티가 팍팍 나."

시종은 시종장의 말에 그저 고개만 살짝 조아린 채 서 있었다. 시종장은 그런 시종에게 손을 휘휘 내저었다.

"다시 계속 지켜봐라. 혹시라도 누굴 만나는지, 또 가능하다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알아봐. 어쩌면 알아서 그쪽으로 찾아가는 귀족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시종이 물러가자 시종장은 즉시 어딘가로 향했다. 그에게 언제나 활동비를 두둑이 챙겨 주는 슈린 공작가의 영식, 파인트 폰 슈린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물론 그 외에도 몇 명 더 만나야 한다. 다들 그에게 활동비를 챙겨 주는 귀족이었다.

그렇게 제론에 관한 소문이 또 여기저기로 흘러들어 갔다.

☆ ☆ ☆

파티가 열리기 전날, 제론은 뜻밖의 손님을 맞았다.

"백작님, 어쩐 일이십니까?"

"내가 못 올 곳에 온 건가?"

"당연히 아닙니다."

찾아온 사람은 벨루스 백작이었다.

"거기 앉아도 되겠지?"

벨루스 백작은 수행원도 없이 혼자서 제론을 찾아왔다. 제론은 그 점이 좀 의아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자리에 앉은 벨루스 백작이 제론을 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 세나는 잘 지내고 있나?"

일단 딸의 안부를 묻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한 벨루스 백작은 소소한 대화를 계속 이어 갔다.

제론은 벨루스 백작이 그저 인사나 하자고 찾아온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계속 이렇게 말을 빙빙 돌리고 있는 이유를 찾아봤다.

'아, 저놈들 때문이로군.'

이 방을 주시하는 자들이 너무 많았다. 일단 열 명의 시종이 일을 하는 내내 귀를 크게 열어 두고 있었다. 아마 이 방 근처에도 있을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천장에 숨어 소리를 모으는 마법진까지 이용해서 도청을 하는 자도 있었다. 이 방에서 무슨 말을 하건 다 누군가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한동안 방 안에 틀어박혀 있었더니 답답하군요. 정원 산책이라도 함께하시지 않겠습니까?"

제론의 제안에 벨루스 백작이 제법이라는 듯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좋지."

두 사람이 밖으로 나간다고 하자, 시종은 물론이고 천장에 숨어 있던 자도 크게 당황했다. 일단 정원으로 나가면 그들이 손을 쓸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벨루스 백작은 정원을 한 바퀴 돌며 유심히 주변을 살폈다. 제론과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기 위해 호위 기사까지 두고 왔다.

"일단 당장은 정원에 아무도 없는 것 같군요. 이제 말씀하셔도 됩니다."

벨루스 백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 조심성이 지나친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네. 사실 나보다 더 조심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수도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네."

그렇게 말하는 벨루스 백작도 영지에 있지 수도에서 지내지 않는다. 물론 수도에 저택은 가지고 있지만 말이다.

"내가 수도에 오지 않고 영지 경영만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세. 난 답답해서 그런 건 싫더군."

그래서 수도의 귀족들에게 이용당하지 않으려고 항상 신경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그들은 눈 감으면 코를 싹둑 베어 갈 정도로 잔인하고 냉정했으며, 음흉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마틴 준남작이 도망쳤네."

제론은 놀라지 않았다. 마틴 준남작을 죽인 것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그자가 슈린 공작가에 붙은 것 같네. 얼마 전 자네 영지에서 벌어진 영지전도 그자가 슈린 공작가에 붙어서 부린 농간일세."

"알고 있습니다."

벨루스 백작은 깜짝 놀라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말에 벨루스 백작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마틴 준남작을 죽인 게 접니다."

"그게 정말인가?"

"전 그보다 슈린 공작가에 그 정도 여력이 남았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습니다."

무려 오십 기의 기간트를 지원했다. 그런데도 슈린 공작가는 전혀 무리 없이 돌아가고 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저력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슈린 공작가의 손발이 되고 싶어 안달 난 귀족이 얼마나 많은 줄 아나?"

제론이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벨루스 백작을 쳐다봤다.

"슈린 공작가의 저력은 그들이 보유한 기간트의 수가 아니라는 뜻일세. 슈린 공작을 따르는 귀족들이 알아서 조금씩 기간트를 내놓기만 해도 오십 기 정도는 금방 모을 수 있네."

제론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역시 슈린 공작가였다. 그 정도니 레늄 왕국을 집어삼킬 생각을 하는 것 아니겠는가.

현재 제론은 마티를 이용해 슈린 공작가의 저택 곳곳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얻은 정보도 상당했다. 그중 가장 대단한 것은 슈린 공작가가 새로운 기간트의 설계도를 얻어서 그것의 양산화에 들어갈 준비가 거의 끝나 간다는 사실이었다.

아직 설계도를 어디 보관하고 있는지 알아내지 못했지만, 시간문제였다. 의심스러운 장소 몇 군데를 선정해서 집중적으로 살피는 중이었다.

"아무튼 마틴 준남작이 죽었다니, 더 이상 할 말이 없군."

벨루스 백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마틴 준남작이 분탕질을 치고 도망친 바람에 영지가 흔들린 걸 생각하면 화가 치밀었다.

침묵의 시간이 잠깐 지나갔다. 제론은 그러고 있는 내내 감각을 최대한 날카롭게 벼려서 주변에 혹시 누가 다가오지 않는지 확인했다.

물론 마법도 병행했다. 제론은 심장에 맴도는 일곱 개의 마나링을 통해 상당한 수준의 마법을 즉시 펼칠 수 있었다. 탐지 마법 정도야 숨 쉬는 것처럼 간단했다.

아마 조만간 이곳에도 귀를 연 사람이 등장할 것이다. 할 말이 있으면 그전에 모두 끝내야만 했다.

"그나저나 내 딸은 대체 어쩔 셈인가?"

"예? 무슨 말씀이신지……."

제론은 벨루스 백작의 갑작스러운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난데없이 세나 얘기가 왜 나온단 말인가.

"확실히 해 달라는 말일세. 풍년 기원 파티는 상당히 전통이 깊은 행사일세. 사교계에 등장하기 적당한 파티이기도 하고."

제론은 그제야 벨루스 백작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 자신이 너무 무심했다.

"세나가 이 파티에 참석을 안 했다고 뭐라 하는 게 아닐세. 만일 자네가 그 아이를 책임지겠다면 아무런 상관없는 일 아니겠나. 하지만 만일 그게 아니라면 그 아이의 기회를 빼앗지는 말아 주게."

제론은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너무 앞만 보고 달렸다. 아무리 목표를 위해서라지만 사람은 앞만 보고 달리면 결국은 넘어질 수밖에 없다.

가끔은 발밑도 확인해야 하고 양옆도 살펴야 한다. 지금까지는 그 일에 너무 소홀했다.

세나도 세나지만 바이스도 에어스트 백작령에 갇혀서 썩어 가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보면 둘 다 나이가 적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세나도 슬슬 결혼할 나이가 되어 가는구나.'

레늄 왕국은 타 왕국에 비해 비교적 결혼을 늦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아무래도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군대에 가는 것이 의무로 정해져 있기에 일찍 결혼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세나와 바이스는 그래도 조기 졸업을 해서 다른 사람에 비해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건 관심을 가지고 배우자를 찾았을 때의 얘기였다.

지금처럼 영지에 매여 있다면 언제 결혼을 할지 장담할 수 없었다.

"자, 생각할 게 많은 모양이니 난 이만 가 보겠네."

벨루스 백작은 제론을 향해 빙긋 웃어 주고는 거처로 돌아갔다. 정원을 나가자마자 멀찍이 떨어져서 따라다니던 호위 기사들이 우르르 다가왔다.

"하하. 이럴 필요 없다니까, 괜한 짓들을 하는구나."

벨루스 백작은 그렇게 말했지만 기분 좋은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론은 정원에 서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생각할 것이 더 많아졌다.

파티는 상당히 화려했다. 왕궁의 체면이 걸린 일인지라 풍년 기원 파티에는 상당한 예산이 배정된다.

제론은 한쪽에 서서 삼삼오오 모여 있는 사람들을 찬찬히 둘러봤다. 왕궁에서 여는 파티는 엄청난 인맥을 쌓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곳에는 그 기회를 잡기 위해 발버둥 치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왕궁에서 여는 파티이기에 당연히 국왕이 얼굴을 비춘다. 하지만 국왕은 파티에 남아 있지 않는다. 자신의 존재감만 잔뜩 뿌리고 돌아간다. 왕자와 공주만 남겨 놓고 말이다.

국왕이 젊었다면 귀족들과 함께 파티를 즐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국왕은 노년으로 넘어가는 중이었다. 이제부터는 다음 세대를 밀어줘야만 했다.

그렇기에 왕자와 공주만 남기고 돌아간 것이다.

현 국왕에게는 두 명의 딸과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딸은 권력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으니 비교적 사이가 괜찮았지만 아들은 그렇지 않았다.

사실 저울추는 1왕자 쪽으로 많이 기울어졌다. 하지만 2왕자에게도 아직 기회가 있었다. 2왕자의 뒤에는 일단 슈린 공작가가 있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승산이 있었다.

제론은 그런 역학 구도를 알고 있기에 더 흥미롭게 파티를 살폈다. 아마 이렇게 있으면 조만간 자신에게 접근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많기도 하군.'

파티가 열리는 홀은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모인 귀족의 수도 엄청났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을 다 살핀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귀족만 온 게 아니라 호위 기사까지 대동하고 왔기에 더 복잡했다. 물론 홀이 워낙 넓어 서로 부대끼는 경우는 없었지만 말이다.

멀리 벨루스 백작의 모습도 보였다. 몇 명의 귀족에게 둘러싸여 입가에 미소를 짓고 대화를 주도해 나가고 있었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대화는 나중에 싹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 이곳에는 사람과 똑같은 수의 마티가 들어와 모두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의 모든 대화와 행동은 고스란히 제론의 태블릿에 담길 것이다.

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을까. 갑자기 누군가 제론을 향해 다가왔다. 제론은 다가오는 사람을 보며 눈에 이채를 띠었다.

"이게 누구야. 그 유명한 에어스트 백작님 아니신가."

다가온 사람은 파인트였다. 제론과는 상당한 악연으로 이어진 사이였다. 물론 둘 사이에 벌어졌던 모든 일은 파인트의 패배로 끝났다.

파인트는 아직도 그때의 패배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제론은 파인트를 딱 보자마자 그것을 알아차렸다.

"오랜만이군."

제론의 말에 파인트가 이를 부득 갈았다.

"그래. 오랜만이지. 아주 오랜만이야. 그나저나 내가 준 선물은 마음에 들었나?"

파인트의 말에 제론이 빙긋 웃었다. 이 말 하나로 뒤에서 이번 영지전을 일으킨 자가 파인트라는 걸 알아냈다.

"글쎄. 그럭저럭 괜찮았지. 덕분에 기간트가 오십 기나 생겼고, 영지도 몇 배나 커졌으니까."

파인트의 눈에서 불똥이 파바박 튀었다.

"갑자기 영지가 늘어나면 잡음이 많이 생기기 마련이지. 아마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제론이 피식 웃었다.

"충고 고맙군. 더 할 말 있나?"

파인트는 본전도 못 찾고 돌아섰다. 제론 앞에만 서면 흥분해서 원하는 대로 대화를 끌어가지 못하는 건 여전했다. 돌아선 채로 몇 번 심호흡을 한 다음 표정을 풀고는 다른 곳으로 갔다.

제론은 그런 파인트를 보며 머리가 복잡해졌다.

'저놈이 뒤에서 그런 짓을 했단 말이지?'

슈린 공작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파인트를 상대하는 것이 훨씬 쉽다. 물론 상대적일 뿐이지 실제로 파인트와 맞붙는다면 어려운 점이 상당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파인트를 먼저 건드리는 편이 나았다. 그것이 더 편하게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 테니까.

'슈린 공작가와 자멸해선 안 돼. 압도적으로 이겨야 돼. 지금의 나라면 할 수 있다.'

제론은 자신 있었다. 다만 시간이 필요할 뿐이었다. 검술을 가다듬고, 테오스의 힘을 개발하고, 또 영지를 발전시킬 시간 말이다.

잠시 그곳에 서 있자, 일단의 무리가 다가왔다. 각자 큰 상단을 가진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제론과 인사를 하고 소소한 대화를 나누었다. 가끔 에어스트 백작령의 새로운 농지에 대한 얘기도 오갔다. 그들은 소문과 정보를 다루는 데 능했다.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상당한 곡물을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미리 거래를 해서 가격을 후려치려는 자들이었다. 당연히 제론은 그들을 적당히 상대했다.

제론이 생각보다 쉽게 넘어오지 않자, 그들은 다음을 기약하며 멀어졌다. 당연히 이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시작으로 상당히 많은 사람이 제론에게 접근했다. 현재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사람다웠다. 주변에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제론은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그들을 적당히 상대했다. 영양가는 거의 없었다.

몇 차례에 걸쳐 사람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떠나갔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을 때, 상당히 낯익으면서도 반가운 얼굴이 다가왔다.

"오랜만이네요."

먼저 다가와 인사를 한 사람은 클레 폰 디아만트였다. 제론에게 300만 골드의 채권을 200만 골드에 사 간 사람이기도 했다.

디아만트 후작가는 대륙을 진동시키는 대상단을 보유했다. 당연히 에어스트 백작령에 대해서 소상히 조사했다. 또한 제론이 붉은 학살자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좀 늦긴 했지만 말이다.

"그때는 잘도 절 속이셨더군요."

제론이 빙긋 웃었다.

"난 속인 적 없소이다만."

너무나 뻔뻔한 태도에 클레가 입을 벌렸다. 어떻게 이리도 당당할 수 있단 말인가.

"붉은 학살자라는 사실을 숨기셨잖아요."

"난 분명히 내가 그라고 말하지 않았소? 어떤 공을 어떻게 세웠는지도 자세히 설명해 준 걸로 기억하는데, 내 기억이 틀렸소?"

클레는 할 말이 없었다. 기억을 더듬으면 확실히 그랬다. 제론은 당당하게 자신이 붉은 학살자라고 말했다. 그리고 과장이라고는 조금도 섞이지 않은 설명을 해 주었다.

문제는 듣는 사람이 모두 그걸 믿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제론은 진실을 거짓처럼 위장했다.

그걸 알기에 클레는 너무나 억울했다. 진실을 말했지만, 그건 엄밀한 의미로는 진실을 말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따질 수도 없으니 그저 억울하기만 했다.

"후우. 알았어요. 그 얘긴 이제 그만하죠."

클레는 일단 한발 물러났다. 괜히 얘기를 더 해 봐야 자기만 손해였다. 진실만 가지고 물고 늘어지면 불리한 건 클레였으니까.

"요즘 영지가 꽤 잘 나가신다는 얘기 많이 들었어요."

"별말씀을. 디아만트 후작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오."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키우는 곡물의 양이 엄청나다고 하던데요?"

"그래 봐야 디아만트 후작가에서 취급하는 곡물에 비하면 100분지 1도 안 될 거요."

"정말 그럴까요?"

클레의 말에 제론이 피식 웃었다. 조금 과장을 했다. 사실 이번에 기대하는 소출이 상당했다. 어쩌면 디아만트 후작가에서 취급하는 곡물의 양과 비슷할지도 모른다.

지력이 대단한 땅에서 자란 곡물이라 성장하는 모양새가 엄청났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뭐요?"

클레가 제론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반짝이는 그녀의 눈동자가 참으로 아름다웠다. 물론 제론에게 큰 감흥을 주지는 못했지만.

"원하는 걸 말하면 들어주실 건가요?"

"들어 보고 결정하겠소."

"피. 재미없어."

클레는 입을 한 번 삐죽이고는 다시 표정을 바꾸고서 말을 이었다.

"그 곡물의 유통, 우리 디아만트 상단에 맡겨 주시면 안 될까요?"

"생각해 보겠소."

제론은 애매하게 대답했다. 클레는 그것을 보며 일단 지금은 물러날 때라고 판단했다.

앞으로도 시간은 많고 기회도 많다. 제론의 분위기를 보면 단번에 그걸 결정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에어스트 백작가에서 당장 상단을 만들지 않는 한, 당분간은 다른 상단을 이용할 수밖에 없어.'

클레는 이번 거래를 절대 놓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식량은 때로는 무기보다 더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아무리 강한 군대라도 먹지 않으면 죽는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곡물을 장악할 수 있다면 대륙 최고의 상단이 되는 것도 꿈은 아니었다.

"이제 그런 딱딱한 얘기는 접죠. 그보다 백작님도 슬슬 결혼할 때가 되지 않으셨나요?"

"안타깝지만 아직 그럴 여유가 없소."

"마음만 먹으면 여유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혹시 마음에 둔 분이라도 있으신가요?"

클레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이런 가십은 대부분의 여자들이 좋아한다. 제론은 현재 가장 많은 관심을 받는 사람 중 하나였다.

제론에 관한 것 중 뭐 하나만 알아내도 큰 반향을 일으킬 것이다. 하물며 그것이 제론의 연인에 관한 것이라면 얼마나 짜릿하겠는가.

클레의 눈에서 일어나는 광채에 제론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전 이만 가 봐야 할 것 같소. 나머지 얘기는 다음에 합시다."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클레는 그런 제론의 모습을 황당한 눈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빙긋 웃었다.

"호기심을 일게 만드는 사람이네."

클레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아직 시간은 많다. 풍년 기원 파티는 무려 7일 동안이나 계속된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