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0화 (51/217)

Chapter 4 문두스

제론은 바인을 위해 빈민굴에 제대로 된 거처를 하나 만들어 주었다.

마티로부터 받은 화면을 보여 주는 아티팩트도 훨씬 크게 여러 개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보기 편하게 배치해 주었다.

아무리 빈민굴의 주인이 되었다고 하지만 모든 빈민을 노예처럼 부릴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빈민도 엄연히 왕국의 백성이었다.

하지만 빈민들 위에 군림하는 건 분명했다. 게다가 바인은 이전의 다른 두목들과 달리 그들을 힘으로 다스리지 않았다.

대부분의 빈민은 바인의 말에 충실히 따랐다. 노예처럼 부리지는 않지만, 그들은 바인의 노예나 다름없었다.

제론은 바인에게 일단 수도의 정보를 맡겼다. 수도의 정보를 통해 레늄 왕국 전반에 걸친 모든 일을 파악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그 판단은 실로 정확했다.

제론은 수도 유적에 있는 마티를 바인이 사용할 수 있게 허락해 주었다. 물론 제한을 걸어서 제론을 직접 확인하는 건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빈민굴의 일도 있고 해서, 제론은 자신을 중심으로 반경 10미터 안은 볼 수 없게 만들었다. 물론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충분히 바인은 모든 걸 알 수 있을 테지만, 그래도 직접 보지만 않으면 상관없다고 판단했다.

"주인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입니다."

바인은 제론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절대 배신하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가 보기에 제론은 아직도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 주지 않았다.

'그게 모두 나오면 대체 어떤 힘을 발휘하실지…….'

상상만으로도 두려웠다. 그리고 또 짜릿했다. 제론이 가진 바 힘을 마음껏 발휘해서 세상을 휘젓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다.

"받아라."

제론은 바인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주머니 하나를 툭 던졌다.

바인은 발치에 떨어진 주머니를 보고는 대번에 그것이 무언지 알아챘다. 돈이었다. 정보 조직을 운영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별로 대수롭지 않게 주머니를 들어 안을 확인한 바인은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주머니를 떨어뜨릴 뻔했다.

"허억! 주, 주인님!"

"왜? 너무 적나?"

"아닙니다! 많습니다!"

주머니에 들어있는 돈의 액수는 무려 100만 골드였다. 이 정도면 빈민굴 전체를 정보 조직으로 만들고도 남을 정도의 액수였다.

물론 제론이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고, 바인도 그렇게 할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모자라면 바로 말해라. 또 줄 테니까."

"아, 알겠습니다."

바인은 그렇게 대답을 했지만 모자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 돈으로 정보 조직을 만들고 나면 향후의 운영비는 모조리 정보 조직을 통해 조달할 수 있었다.

바인은 이 말도 안 되는 스케일을 가진 주인을 멍하니 바라봤다. 갑자기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수도의 정보 조직을 장악하는 것만이 아니다.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제론의 말에 바인은 바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굳은 표정으로 눈을 빛냈다.

바인도 고작 레늄 왕국의 수도를 장악하는 걸로 끝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여길 시작으로 왕국 전체, 더 나아가 대륙 전체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을 작정이었다.

최소한 정보 쪽에서는 최고의 조직으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주인님께서 이름을 정해 주십시오."

"이름?"

제론은 바인을 쳐다봤다. 바인의 눈빛이 열망과 야망으로 일렁였다. 그 눈빛을 무시할 수 없었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제론이 입을 열었다.

"문두스. 세상이라는 뜻이다."

"문두스……."

바인은 몇 번이고 문두스라는 말을 되뇌었다. 이름 그대로 세상을 모조리 장악해 버리겠다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빈민굴의 인구는 어느 정도지?"

"아직 정확히 파악하지는 않았지만 오십만 명이 넘습니다."

"호오. 제법 많군."

"수도 전체의 인구가 삼백만 명입니다. 사실 많은 수는 아닙니다."

빈민굴에는 말 그대로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만 모여서 산다. 그런 사람이 무려 오십만 명이 넘게 있다는 뜻이다.

수도에 삼백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이 살고 있다지만 그중에서 그래도 비교적 사람답게 사는 사람은 삼십만 명도 안 될 것이다.

또 그 삼십만 명 중에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사람은 채 일만 명도 안 될 것이다.

나머지는 매일매일을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게 수도의 현실이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이었다.

어쨌든 빈민이 오십만 명이나 된다는 건 충격적인 일이었다. 오랜 전쟁이 이렇게 만든 것이었다.

"빈민들 중에서 품성이 괜찮은 사람을 골라 봐라."

"품성 말입니까?"

"되도록 사고를 치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을 만한 사람을 모아서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보내라."

제론의 말에 바인이 난색을 표했다.

"사람을 모으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함부로 수도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 건 문제가 완전히 다릅니다."

"지금 당장 하라는 말이 아니다. 조직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다음에 해도 된다. 그들을 인솔할 사람도 필요할 테니까."

바인은 난감한 눈으로 대답했다.

"아무리 빈민이라도 성문을 마음대로 나가는 건 곤란합니다."

"수도에서 나가기만 하면 어떻게든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일단은 그렇습니다."

제론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쯤이야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었다. 제론에게는 폴타가 있었다. 마티가 활동하는 범위 안에서 두 군데를 잇는 게이트를 생성할 수 있는 아티팩트였다.

폴타를 이용해 만든 게이트의 존재를 타인이 알게 되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그거야 바인과 잘 상의하면 얼마든지 방법을 만들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텔레포트 게이트로 위장한 건물을 만든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제론의 영지인 에어스트 백작령에는 엄청난 인구가 필요했다. 그곳은 아직 개발할 곳도 많으며, 그렇게 개발한 곳을 이용해 농사를 지을 노동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아직 영주성 근방의 평원도 다 못 쓰고 있었다. 금년이야 이렇게 넘어간다 하지만, 내년부터는 그 모든 땅을 이용해 농사를 지을 것이다.

그러려면 막대한 인력은 필수였다.

그뿐인가. 슬슬 개발을 시작할 예정인 암석 지대에도 막대한 인원을 투입해야만 한다. 개발이야 기간트를 이용한다 하지만 농사에는 사람의 손이 필요했다.

암석 지대를 개간하면 그 뒤로 이어지는 바닷가에 항구도시를 만들어야 한다. 거기에도 막대한 인력이 필요했다. 항구도시를 만드는 것도 문제지만, 그곳을 채울 사람도 필요했다.

도시만 만들면 뭐 하는가. 거기에서 살아갈 사람이 있어야 한다.

제론은 그렇게 필요한 사람을 빈민굴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당장은 어려워도 정보 조직인 문두스가 자리를 잡으면 지속적으로 꾸준히 빈민을 조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에어스트 백작령은 인구를 얻어서 좋고, 빈민은 가난을 벗어던지고 사람답게 살 수 있으니 서로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 이걸 익혀라."

제론은 양피지 한 장을 건넸다. 바인은 그것을 받아들고 찬찬히 읽었다.

놀랍게도 바인은 글을 알고 있었다.

"이게 뭡니까?"

바인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충 뭔가를 훈련하는 방법을 써 놓은 것 같은데,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정보원이 익히면 좋은 거다. 너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익힐 수 있을 테니, 다 익히고 확실히 믿을 만한 사람에게만 가르쳐라."

제론이 준 것은 고대의 수련법 중 하나였다. 은밀한 움직임에 도움이 되는 수련법이었다. 또한 단검을 이용하는 전투법도 함께 있었다. 물론 아주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이었다.

바인은 이 양피지 한 장이 그야말로 엄청난 보물이라는 것을 즉시 깨달았다. 어쩌면 이것은 이 방 안을 가득 채운 저 아티팩트 만큼이나 대단할지도 모른다. 그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대체 뭘 믿고 이렇게 자신에게 많은 걸 해 준단 말인가.

"그럼 이곳의 일은 네게 모두 맡기마."

제론은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바인은 밖으로 나가는 제론의 등을 존경과 경탄이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이를 악물었다. 이제부터는 자신의 능력을 보여 줄 차례였다.

저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다. 그리고 저 사람의 길을 밝혀 주고 싶었다. 나중에 저 사람이 최고의 자리에 우뚝 섰을 때, 그 거친 길을 닦아 준 사람이 바로 자신이 되고 싶었다.

바인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묵묵히 돌아서서 방 안을 가득 채운 화면을 바라봤다.

일단 문두스를 최고의 정보 조직으로 만드는 것이 먼저였다.

☆ ☆ ☆

수도의 일을 모두 끝낸 제론은 곧장 영지로 돌아갔다. 영지로 돌아가는 건 제론에게 있어서 가장 쉽고 간단한 일이었다.

더구나 빈민굴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바인이 이미 제론이 아니면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장소를 만들어 둔 것이다. 또한 누구도 그곳을 감시하지 않았기에 제론이 언제 그곳에 들어가는지 또 나오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영주성 지하에 있는 중앙 유적의 로비에 도착한 제론은 곧장 위로 올라가려다가 이내 고개를 젓고는 몸 상태를 점검했다.

수도에서의 일정은 보름에서 한 달 정도로 계획했다. 다들 그렇게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때까지 침식을 잊고 수련에 몰두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물론 늦으면 늦을수록 다른 사람들이 고생하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12층을 공략하는 쪽이 낫다고 판단했다. 우선 제론이 강해져서 유적의 힘을 제대로 받아야 뭐든 편해질 테니 말이다.

제론은 마티와 마찬가지로 폴타도 이곳 중앙 유적에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아니, 만일 다른 유적에 새로운 아티팩트가 존재한다면 그 모든 것이 이 중앙 유적에도 있을 것이 분명했다.

중앙 유적은 말 그대로 모든 유적의 중심이었다. 또한 모든 유적의 주인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새로운 걸 얻기 위해서는 각 층을 클리어하는 수밖에 없었다.

유적 로비에서 새로운 걸 찾으려 해 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걸 이번에 절실히 느꼈다. 뭔가가 있다면 유적이 알아서 내줄 것이다.

마음을 정한 제론은 곧장 12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대로 수련에 푹 빠져들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구슬을 테오스 내에 떠 있는 화면을 통해 단숨에 파악한 다음, 마력탄을 만들어 구슬을 맞추는 일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시간이 필요했다. 이건 깨달음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수련이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갔다.

슈슈슈슈슉!

쩌저저저저정!

새까맣게 쏟아지던 구슬이 일제히 박살 났다. 연달아 열 번이나 반복된 일이었다.

그 한가운데 테오스가 있었다.

12층 역시 다른 층과 마찬가지로 클리어 조건이 지독했다.

처음에는 구슬을 한 번만 부수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든 구슬을 마력탄으로 부쉈는데도, 또 구슬이 쏟아진 것이다.

구슬을 일제히 모두 부수는 건 굉장한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또한 모든 화면을 동시에 파악할 수 있는 시야도 중요했다.

그 모든 것이 하나로 맞아떨어져야만 간신히 이뤄 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연달아 구슬이 쏟아지면 그걸 몽땅 막아 내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실제로 제론은 다시 12층 공략을 시작한 지 고작 이틀 만에 모든 구슬 부수기에 성공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이 안에 들어온 지 정확히 한 달 하고도 이틀이 지난 것이다.

제론은 이제 언제 어떻게 구슬이 쏟아진다고 해도 몽땅 부숴 버릴 자신이 있었다. 지금도 열 번이나 반복해서 구슬을 부쉈다.

구슬은 매번 나올 때마다 속도나 위력이 달랐다. 게다가 어느 때는 흔들리며 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제론은 그 어떤 구슬도 놓치지 않고 잡아냈다.

위이이이잉!

나직한 소음과 함께 기둥 하나가 솟았다. 그것을 본 제론은 그제야 긴장을 풀고 테오스를 돌려보냈다.

"후우. 하여튼 쉬운 수련이 없군."

확실히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수련을 통해 제론은 정말로 큰 것을 얻었다. 많은 화면을 통해 전장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은 것이다.

이는 혼자서 여러 적을 효과적으로 상대할 수 있는 능력이기도 했다.

제론은 상념을 접고는 기둥을 향해 걸어갔다. 테오스를 얻을 때를 제외하고, 기둥의 모습은 언제나 같았다. 물론 마티가 나왔을 때는 기둥이 없었다.

이번에도 기둥은 똑같았다. 제론의 허리에 오는 높이, 그리고 가운데에 물건이 놓일 공간이 있었다.

"이게 뭐지?"

그 안에는 인형이 들어 있었다. 은색 금속으로 만들어진 인형이었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기괴했다. 인간 모양이었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얼굴에 눈코입도 없었고, 옷도 없었다. 그저 은을 녹여 인간 모양의 틀에 넣어 만든 인형 같았다.

한데 문제는 그 인형을 어디에 쓰는 건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인형의 사용법이 담긴 카드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제론은 일단 인형을 집었다. 크기는 사람 팔뚝만 했다. 작은 크기는 아니었다.

인형을 집자, 기둥이 사라졌다. 제론은 인형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살펴봤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인형이었다.

제론은 잠깐 고민하다가 인형을 든 채, 13층으로 내려갔다. 이동은 즉시 이뤄졌다.

화아악!

강렬한 빛이 제론을 감쌌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나타난 광경은 참으로 단출했다.

13층은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이었다. 천장이 제법 높았고, 사방 100미터쯤 되는 넓이의 방이었다.

제론은 이곳은 뭘 하는 공간인가 궁금해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높이를 생각하면 테오스를 소환하는 곳은 아니었다. 몸으로 수련하는 곳이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주위를 둘러보고 있을 때, 손에 든 인형에서 갑자기 빛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파아아앗!

인형이 갑자기 요동치며 손아귀를 빠져나가려 했다. 제론은 순순히 인형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기에 힘을 꽉 줬다.

하지만 결국은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인형이 갑자기 커진 것이다.

빛이 사라졌다. 그리고 제론만큼이나 커져 버린 은빛 인형이 보였다.

"뭐지?"

위이잉!

인형의 손이 쭉 늘어나며 검처럼 변했다. 아니, 그렇게 늘어난 검을 인형이 꽉 쥐고 있었다. 인형은 제론에게 검을 겨눴다.

제론은 즉시 아공간에 있던 검을 꺼냈다. 황제 검술을 수련하던 테페룸 검이었다.

역시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12층을 클리어하고 얻은 인형은 13층 수련에 필요한 것이었다.

제론이 검을 겨누자 인형이 달려들었다.

쩡!

어마어마한 파장이 사방을 휩쓸었다. 인형의 검격은 엄청나게 강력했다. 제론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며 여력을 해소했다.

그 뒤로 인형의 파상 공세가 시작되었다. 제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이를 악물고 그것을 막고 피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끝없이 수련이 이어졌다.

수련은 제론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온몸의 마나를 바닥까지 긁어서 써 버렸다. 마법은 일부러 쓰지 않았다. 왠지 마법을 쓰면 안 될 것 같아서였다.

"후우. 이거 힘들군."

제론은 가만히 서서 검을 겨누고 있는 인형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어차피 검술 수련을 이곳에서만 할 수 있다면 굳이 가지고 갈 필요가 없었다.

제론은 곧장 로비로 올라갔다. 그리고 몸을 깨끗이 씻고 영주성 지하 수련장으로 이동했다.

한 달이 훨씬 넘게 자리를 비웠던 영주의 복귀였다.

☆ ☆ ☆

"영주님!"

바이스가 소리쳤다. 제론은 살짝 미안한 표정으로 바이스를 못 본 척 집무실로 슥 들어가 버렸다.

"영주님! 그냥 가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바이스가 후다닥 제론의 뒤를 따라 영주의 집무실에 들어갔다.

"좀 늦었지?"

"한 달 하고도 보름이나 지났습니다! 어떻게 그게 조금입니까!"

"하하. 별일은 없었지?"

제론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 했다. 하지만 바이스는 집요했다. 제론이 없는 동안 얼마나 힘들었던가.

"대체 그동안 뭘 하신 겁니까? 영주님이라면 그저 헛된 시간을 보내지는 않으셨을 텐데요."

"정보 조직 하나 만들었어."

바이스가 흠칫 놀랐다. 고작 한 달 좀 넘는 시간이었다. 그런 짧은 시간 동안 대체 어떻게 정보 조직을 만든단 말인가.

하지만 제론은 그런 일로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다. 즉, 진짜로 그걸 해냈다는 뜻이었다.

바이스는 입을 다물었다. 더 할 말이 없었다. 그 정도라면 한 달이 아니라 두 달, 세 달이라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걸 제대로 써먹을 수 있는지는 차치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하면 수도에 만드신 것입니까?"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우리의 적이 슈린 공작가니, 수도에 본거지를 두고 차츰 슈린 공작령 쪽도 손을 댈 예정이다."

"알겠습니다."

바이스는 일단 그렇게 넘어갔다. 확실히 슈린 공작가에 대한 일은 미리 준비해야만 한다. 또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얼마 전 있었던 영지전도 슈린 공작가의 작품이었다. 그때야 간신이 넘어갈 수 있었지만, 만일 다시 훨씬 큰 힘으로 일을 벌이면 막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영주님, 며칠 전에 왕궁으로부터 초대장이 왔습니다."

"초대장?"

제론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바이스가 품에서 화려하게 꾸며진 초대장을 꺼냈다.

이번에 왕궁에서 풍년을 기원하는 파티가 열리는데, 거기에 초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풍년 기원 파티?"

"매년 이맘때 열리는 전통 있는 파티입니다."

제론은 기억을 더듬어 봤다. 생각해 보니 예전에 몇 번 참석했던 것 같기도 했다.

"보잘것없는 가문의 경우 초대장을 받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풍년 기원 파티는 큰 농지를 가진 가문과 그걸 유통하는 상단을 보유한 가문 간의 친목을 다지는 자리이기도 했다.

"날 초대한 걸 보니, 우리 영지의 상황이 좀 퍼지긴 했나 보군."

"예. 언제까지 막을 수는 없으니까요. 쓸모없는 황무지를 개간해 농지로 만들었다고 사방에서 쏟는 관심이 상당합니다."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쯤은 처음 황무지를 개간하고 수로를 만들 때부터 예상했다.

더구나 이제 봄도 거의 다 지났다. 슬슬 여름으로 접어드는 시기였다. 평원에 심은 작물이 이제 제법 자라서 푸른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역시 지력이 상당한 곳이라서 그런지 작물이 자라는 속도가 엄청났다. 이대로라면 다른 지역의 작물에 비해 훨씬 많은 수확이 가능할 것이다.

"금년에 인력을 더 확보하면 내년에는 정말 어마어마한 양의 곡식을 거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이스의 말에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다. 새로 개척한 평원은 엄청나게 넓었다. 사실 웬만한 백작령보다 훨씬 넓었다.

그렇게 넓은 땅이 몽땅 농사가 가능한 평원이었다. 그것도 지력이 엄청난 옥토였다.

내년부터는 레늄 왕국 귀족 간의 판도가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농사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말이다.

"감시가 중요하겠군. 농지에 불이라도 나면 큰일이니까 말이야."

"그래도 수로가 곳곳에 있어서 불이 크게 번지기는 어려울 겁니다."

"작정하고 불을 지르면 아무리 수로로 나뉘어 있어도 소용없어."

"명심하겠습니다."

바이스는 그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영지가 갑자기 넓어지는 바람에 병력이 너무 모자랐다.

지속적으로 새로운 병사를 뽑고는 있지만 모이는 속도가 더뎠다. 이대로라면 필요한 병력을 모으는 데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인구도 문제였다. 아직까지는 꾸준히 난민을 흡수하고 있어서 괜찮지만, 나중에 왕국이 안정되면 대번에 인구 증가가 느려질 것이다.

"어쨌든 초대를 했으니 가 보긴 가 봐야 하는데……."

제론은 왠지 내키지 않았다. 파티에 참석해 봐야 슈린 공작가의 견제만 받을 것이다. 또한 그들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무력이야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제론은 소드 마스터였다. 레늄 왕국의 모든 기사가 달려들어도 두렵지 않았다. 얼마든지 상대하다가 몸을 빼서 도망칠 수 있었다.

수도에서는 기간트를 쓸 수도 없으니 제론을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고 봐도 된다.

하지만 꼭 무력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다른 비열한 방법을 동원하면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도 당할 수 있었다.

"참석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왕실의 심기가 불편해지겠지요."

그건 곤란했다. 나중에 영지를 제대로 발전시켜 큰 힘을 가지게 된 이후라면 모를까. 지금 당장은 몸을 사려야 한다. 아직 에어스트 백작령은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과연 왕실에서 내가 참석했는지 아닌지 알 수나 있을까? 엄청난 수의 귀족이 참석할 텐데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있는지도 모를걸?"

"잊으셨습니까? 영주님은 붉은 학살자입니다."

제론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자신에 대한 정보가 그대로 왕실로 들어갔을 것이다. 군부에서 보고를 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는 얘기는 다른 귀족들 역시 제론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웬만한 유력 가문에서는 다 안다고 보면 틀림이 없으리라.

"이번 파티를 기다리고 있었군."

"아마 그럴 겁니다."

제론은 파티에서 벌어질 상황을 대충 예상해 봤다. 아마 수많은 귀족들이 접근할 것이다. 또한 왕실에서도 접근할 것이다.

"곤란하게 됐군."

"곤란하실 건 없습니다. 그저 다 거절하시면 됩니다."

"그래도 되나?"

"어차피 백작령의 영주님을 옭아맬 수는 없습니다."

확실히 그건 그렇다. 게다가 제론은 아직 영지를 제대로 정비하지도 못했다. 그걸 핑계로 빠져나가면 명분도 충분했다.

"아, 그건 그렇고 한 가지 부탁할 게 있어."

바이스가 의아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어지는 제론의 말에 그 의아함이 두 배로 커졌다.

"유적에 대해서 좀 조사해 줘."

"유적 말입니까?"

"그래, 유적. 일단 우리 레늄 왕국에 존재하는 유적부터 조사한 다음, 다른 왕국의 유적도 차근차근 알아봐. 위치부터 시작해서 현재의 상황까지 전부."

바이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세상에 유적이 한두 군데인가. 더구나 아직도 유적 개발은 전 대륙에서 활발하게 진행 중이었다.

한데 그 모든 정보를 조사하라니, 대체 자신의 몸이 몇 개라고 생각하는 건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여, 영주님……."

"급하게 하란 말은 아니야. 일단 우리 왕국에 있는 유적은 금방 끝낼 수 있잖아. 그다음에 나머지는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해."

바이스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제론이 이렇게까지 부탁을 하는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알겠습니다. 일단 시작해 보겠습니다."

돌아서서 나가는 바이스의 어깨가 축 처졌다. 막대한 업무량에 지친 것이다.

제론은 더 많은 인재의 영입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바인에게 연락해 봐야겠어."

바인이라면 에어스트 백작령에 도움이 되면서도 배신하지 않을 든든한 인재를 구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제론은 일단 소파에 앉아 쿠션에 몸을 묻었다.

사실 유적을 알아보는 것은 너무 늦었다. 더 일찍 유적을 찾아 돌아다녔어야 했다. 하지만 여건이 허락치 않았다.

영지 일이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서 일단 이쪽에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여유가 생겼다. 바인이 인재를 더 찾아오면 훨씬 많은 시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일단 다른 유적을 돌아다니며 모든 유적의 지하에 초고대 문명의 유적이 있는지 확인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모두 얻을 계획이었다.

제론은 각 유적에 모두 마티가 있다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거대한 정보망을 만들 수 있었다.

그 모든 정보망을 바인이 아우를 수 있을지는 확신하지 못하지만 만일 대륙을 하나의 정보망으로 이을 수 있다면 어마어마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각 유적 간을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다는 점도 큰 매력이었다. 유적만 연결할 수 있다면 제론은 대륙 곳곳을 순식간에 옮겨 다니는 게 가능해진다.

하지만 제론이 이렇게 새 유적을 찾아내려는 이유는 그곳에 지금까지 없었던 뭔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수도 유적에 있던 게이트 생성기, 폴타 같은 것들 말이다.

새로운 폴타를 얻어도 좋고, 또 전혀 다른 뭔가를 얻어도 좋다. 그것이 무엇이건 정말로 유용한 아티팩트일 것이다.

"그나저나 유적이 모두 몇 개나 되는 걸까?"

이미 발견한 유적의 수도 상당하다. 제론이 아는 것만 해도 다섯 개나 된다. 그중 세 개는 이미 연결을 완료했다. 하지만 나머지 두 개는 가 보지도 못했다. 그저 이름만 들었을 뿐이었다.

워낙 막대한 유물이 나와 그것을 발견한 가문이 훨훨 날아오르고 있기에 레늄 왕국에 사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유적들이었다.

'기회가 되면 거기도 가 봐야겠군.'

발굴이 끝난 유적은 대부분 관광지로 활용한다. 물론 삼엄한 경계를 한다. 혹시라도 유적을 훼손하거나, 아니면 미처 발굴하지 못한 숨겨진 아티팩트를 누군가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제론에게는 별 상관없는 일이었다. 일단 유적에 들어가기만 하면 빠져나오는 건 전혀 문제가 없었으니까. 물론 그곳에 초고대 문명의 유적이 있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제론의 생각이 유적에서 파티로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풍년 기원 파티라……."

제론은 왠지 파티랑은 어울리지 않는 이름에 피식 웃었다. 그리고 파티에서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생각하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편안한 소파 쿠션의 감촉에 제론은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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