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8화 (49/217)

Chapter 2 빈민굴의 바인

영지전이 끝난 뒤, 제론은 최대한 서둘러 영지를 병합했다. 전쟁이 마무리되었다고 위험이 사라진 건 아니었기에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일단 마틴 준남작과 호위 기사를 죽였기에 시간을 조금 더 벌 수 있었다.

세 영지의 영주는 마음 같아서는 다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가족, 그리고 그들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들과 함께 영지에서 추방했다.

제론이 가장 먼저 한 것은 행정의 통합이었다. 각 영지에서 일하던 인재를 파악해 적재적소에 밀어 넣었다. 물론 그 와중에 세작을 철저히 가려냈다.

영지전에서 상당히 많은 병사가 죽었기에 치안에 공백이 생겼다. 영지전에 나선 병사의 대부분은 슈린 공작가에서 지원한 자들이었지만, 세 영지의 병사도 제법 많았다.

세 영지에 남은 병사는 다 합해서 오백 명도 채 되지 않았다. 제론은 병사를 더 뽑고 치안대를 조직하여 치안의 공백을 메웠다.

나머지는 차츰 해결해 나가면 된다. 일단 돈을 많이 들이면 웬만한 문제는 다 해결이 가능했다.

행정과 치안을 해결하자 다음 문제가 닥쳐왔다. 전임 영주들이 영지를 담보로 빌린 돈에 관한 것이었다.

제론이 가장 먼저 한 것은 영지에 대한 담보 가치를 어느 정도로 책정했느냐 하는 점이었다. 만일 담보 가치 이상의 돈을 빌렸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갚을 의무가 없었다.

예전에는 영지를 담보로 돈을 빌리고 영지전을 통해 덤터기를 씌우는 식으로 악용하는 사례가 제법 많았다. 그래서 결국 그 부분에 관한 법이 만들어졌다.

제론이 파악한 바로 가치를 제대로 책정했고, 빌린 돈도 크지 않았기에 그냥 갚기로 했다. 사실 고작 베르를 사려고 빌린 돈이었기 때문에 제론에게는 거의 신경 쓰이지도 않는 금액이었다.

영지의 일은 그런 식으로 천천히 마무리되어 갔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영토는 기존에 비해 두 배나 늘어났다. 아니, 암석 지대까지 합하면 세 배는 더 늘어났다. 기존 에어스트 백작령의 영토가 워낙 넓었기에 세 개의 영지를 병합했는데도 늘어난 비율은 그 정도였다.

"일이 또 생겼군."

영지전에서 승리하면서 영지를 병합했지만, 늘어난 부분에 대해 수도 행정청에 신고를 해야만 한다. 관리를 보내도 상관없지만, 이런 경우 영주가 직접 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리고 제론이 가는 것이 가장 빨랐다. 유적을 통해 수도로 단번에 갈 수 있으니 말이다.

제론은 당분간 내치에 힘쓸 생각이었다. 돈을 잔뜩 쏟아부어서 영지민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고, 무력을 키울 계획이었다.

이제 더 이상 뒤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본격적인 행보를 시작할 때가 되었다.

제론은 집무실에서 마지막 남은 서류를 처리한 다음 기지개를 켰다. 거의 열흘 동안이나 서류 처리를 했다. 확실히 영지가 늘어나니 처리해야 할 일이 몇 배로 늘었다.

잠시 쉬고 있으니 바이스와 세나, 그리고 카이트가 집무실로 들어왔다.

"왔나?"

"부르셨습니까?"

세 사람의 안색도 과히 좋지 않았다. 지난 열흘 동안 제론만 힘들었던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더 힘들었다.

일단 바이스는 총관 역할을 병행하고 있기에 영지를 전체적으로 조율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다.

무려 네 개의 영지가 하나로 변하는 상황이었다. 그게 쉬울 리가 없었다. 바이스는 그 일을 하며 벌어지는 모든 일을 조율했다.

거기에 이번 영지전에서 썼던 마법을 완벽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연구와 공부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 모든 일을 하려니 잠잘 시간도 없었다. 몸을 두 개로 만드는 마법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틈날 때마다 할 정도였다.

그리고 세나는 새로 생긴 기간트를 수리했다. 무려 쉰세 기의 기간트가 새로 생겼고, 그것도 모자라 아군 기간트도 수리할 일이 잔뜩 쌓였다.

그 모든 일을 처리하는데 열흘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아직 절반도 못한 상황이었다. 세나의 눈 밑에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카이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이트는 기사단장임과 동시에 모든 병력을 관리하는 총병관의 역할도 병행하고 있었기에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치안까지 카이트의 관할에 있었다. 병사를 재편하고 훈련시키며 치안까지 책임져야 하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 제론이 회의를 소집했다. 힘들었지만 올 수밖에 없었다. 회의가 반드시 필요했다. 이 힘든 상황을 타개하려면 말이다.

"힘들어 보이는군. 거기들 앉지."

세 사람이 각자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조용히 제론의 말을 기다렸다. 사실 지금은 머리가 멍할 지경이라 할 말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수도에 다녀와야 돼."

제론의 말에 다들 폭탄이라도 맞은 것처럼 놀랐다. 이 와중에 영주가 자리를 비운다면 얼마나 일이 많이 늘어날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아연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세 사람을 향해 빙긋 웃어 준 제론은 말을 이었다.

"이번에 수도에 가서 제대로 된 인재도 함께 데려올 테니까 조금만 더 참아."

그제야 세 사람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어두웠다.

"한데 무슨 일로 가시는 겁니까? 인재 포섭만으로 가시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영지가 늘어났으니 신고를 해야지. 병합한 영지와 그 뒤의 암석 지대까지 한꺼번에 다 신고할 생각이다."

제론의 말에 바이스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그렇게 되면 세금이 엄청나게 늘어날 겁니다."

애초에 제론은 10년간 세금을 면제받았다. 하지만 그건 처음 받은 영지에 한한다. 나머지 영지에 대해서는 반드시 세금을 내야만 했다.

늘어난 세 영지는 그렇다 치고, 그 뒤의 암석 지대까지 몽땅 영지로 받아들인다면 그 넓이가 어마어마했다.

암석 지대의 넓이는 에어스트 평원, 즉, 예전에 황무지였고, 중앙 유적이 있는 평원 정도의 넓이였다. 그러니 세금도 엄청날 것이다.

왕국에서 영지에 매기는 세금은 영토의 넓이에 따라서 달라진다. 또한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영토가 넓으면 식량이 많이 난다. 그걸 기반으로 세금을 책정했기에, 쓸모없는 땅이 많을수록 세금 부담이 점점 늘어나게 되어 있었다.

제론은 바이스의 걱정이 뭔지 다 안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곳도 싹 개간해야 돼. 그럼 세금 정도야 우습잖아."

"정말로 거길 개간하실 생각이십니까?"

바이스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예전에 그 계획을 들은 적이 있긴 하지만 그때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아직 경험이 부족했다.

이제 총관 일을 하고, 영지의 경영에 점점 깊이 들어가니 그 일이 얼마나 무모한 건지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걱정이 됐다.

"당연하지. 그게 아니라면 굳이 거길 영토로 삼을 이유가 없잖아?"

"하지만 거길 개간하는 건 거의 불가능합니다."

제론이 빙긋 웃었다.

"에어스트 평원에 수로와 저수지를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

바이스는 입을 다물었다. 영주성이 위치한 에어스트 평원은 황무지에서 그 어느 곳보다 뛰어난 옥토로 변하였다.

그곳의 땅은 훌륭했지만 물을 구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제론은 그걸 아주 짧은 시간에 해결해 버렸다.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지만 말이다.

'아마 숨겨 두신 기간트를 썼겠지.'

그것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어쨌든 그렇게 받아들이고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더 깊이 파고들기에는 정신적 여유가 너무 모자랐다.

"내일부터 병사를 더 모집해. 최소한 이천 명은 더 필요해."

"이천 명이나 말입니까?"

카이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이내 암담함으로 물들었다.

이천 명이나 되는 병사를 모집하려면 또 얼마나 힘들겠는가. 게다가 모집한다고 바로 병사가 되는 게 아니었다. 훈련도 시켜야 한다.

다행히 카이트를 비롯한 라이트닝 기사단은 대부분 군부 출신이었다. 비록 기간트 라이더이긴 했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군 생활을 하면서 얻은 경험이 상당했다.

그 경험을 살리면 충분히 병사를 훈련시킬 수 있었다. 카이트는 일단 그들을 이용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아마 기간트 훈련을 못 한다고 난리를 피우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도 살고 봐야지.'

바이스와 카이트는 또 무슨 말이 나올까 불안했다. 두 사람은 조심스러운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수도에 다녀온 다음에 기간트를 좀 팔아야겠어."

"예? 팔아요?"

세나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지금 그녀가 수리한 기간트를 그냥 팔면 절대 안 된다. 그 기간트에는 세나만의 특별한 기술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만일 그냥 팔면 자칫 그 기술이 유출될 수도 있었다.

"뭘 걱정하는지 알아. 하지만 걱정할 거 없어. 팔 기간트는 따로 줄 테니까."

세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다가 이내 창백하게 질렸다.

"서, 설마……."

"수리가 필요한 기간트를 공방에 가져다 놓을게. 아마 양이 좀 많긴 하겠지만 세나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

제론의 말에 세나는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말 안 해도 잘 알겠지만, 그 기간트는 세나의 기술이 들어가면 안 돼. 다른 기간트와 똑같아야 팔기 좋다는 거 알고 있지?"

세나는 대답도 못하고 멍하니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은 그런 세 사람을 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괜히 시간 끌 것 없이 지금 다녀올 테니, 그동안 영지 잘 부탁해."

제론은 그 말을 남기고 휑하니 나가 버렸다.

"여, 영주님!"

세 사람이 당황하며 제론을 불렀지만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어찌나 빨리 움직였는지 문이 아직 열린 채였고, 한 줄기 바람이 세 사람을 한차례 훑고 지나갔다.

바이스와 세나, 그리고 카이트는 한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앉아서 열린 문만 바라봤다. 하염없이.

☆ ☆ ☆

깁스 남작은 심각한 표정으로 5장의 보고서를 찬찬히 훑었다.

얼마 전 그림자 1호가 죽었다. 깁스 남작에게는 제법 많은 그림자가 있었고, 그들의 심장에 특별한 방법으로 마법을 걸어 삶과 죽음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게 가능했다.

또한 그들이 죽으면 그 사실을 바로 알 수도 있었다.

그림자 1호의 죽음은 너무나 의외였다. 깁스 남작이 내린 지령을 제대로 시작도 하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보고서를 보면 에어스트 백작령에 있던 그림자 1호의 모든 정보원이 싹 잡혔다. 아마 고문을 받다가 죽었을 것이다.

"이해할 수가 없군."

이건 내부 배신자가 있을 경우의 결과였다.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된다. 그래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부 배신자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던 건 오로지 그림자 1호뿐이었다. 즉, 그림자 1호가 내부 배신자라는 뜻이었다. 그러니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깁스 남작의 등을 소름 한 줄기가 쫙 훑고 지나갔다. 방금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상상 하나가 떠올랐다. 만일 그 상상이 진짜라면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깁스 남작은 보고서를 치우고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어떤 방법인지는 모르지만 그림자 1호에게 내가 내린 지령을 알아낸 거야."

일단 그걸 진실로 가정하면 내부 배신자 없이 그런 상황이 벌어진 걸 설명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두 가지 가정을 할 수 있지. 하나는 명령 체계의 중간에 구멍이 뚫린 거. 다른 하나는 그림자 1호가 지령을 정보원에게 전달하는 순간 들킨 것."

깁스 남작은 후자에 더 무게를 두었다. 즉, 그림자 1호가 감시당했다고 판단했다.

문제는 대체 어떻게 감시했느냐 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림자 1호의 존재를 어떤 식으로 파악했는가도 중요했다.

그림자 1호는 깁스 남작이 직접 키웠다. 그렇기에 그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림자 1호를 미행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그림자 1호는 수도 내의 모든 지리와 하수구를 빠삭하게 꿰고 있었다. 또한 상당히 민첩하기에 그를 그냥 뒤쫓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한데 어떻게 그림자 1호를 쫓아가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직접 한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부려서 했다는 게 더 문제야."

수도 내의 정보 조직은 깁스 남작이 모두 꿰고 있었다. 각 귀족가 소속의 정보 조직이 아니라면 대부분 깁스 남작의 입김이 닿았다.

그렇기에 만일 정말로 그랬다면 제론이 비밀스러운 정보 조직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건 정말로 말이 안 된다.

"내 눈을 피해서 수도에 비밀 조직을 만들었다고? 말도 안 되지."

깁스 남작은 불안해졌다. 어쩌면 제론의 비밀 정보 조직의 감시망에 자신도 들어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주로 수도에 집중되어 있는 것 같으니 다행인가?"

상식적으로 그 짧은 시간 동안 왕국 전역을 커버하는 정보 조직을 만들 수 있을 리 없었다. 기껏해야 수도와 에어스트 백작령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그렇다면 안심이었다. 깁스 남작의 저택은 수도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자그마치 텔레포트 게이트를 타고 이동해야 하니 말이다.

깁스 남작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이번 일은 실패했다. 제론에 대해 좀 더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었다.

"결국 보고를 해야겠군. 짜증 나지만 말이야."

깁스 남작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보고가 너무 늦었다. 슈린 공작도 이미 에어스트 백작령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있을 공산이 컸다.

"질책을 피할 수 없겠군."

깁스 남작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방에서 나갔다.

☆ ☆ ☆

수도에 도착한 제론은 천천히 빈민굴을 거닐었다. 이번 일정은 최대한 짧게 잡았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크기가 갑자기 커지는 바람에 할 일이 산더미였다.

하지만 행정적인 절차부터 완벽하게 처리하는 것이 나중을 위해서도 좋았다.

수도 행정청의 일이 다 그러하듯 간단히 신청한다고 끝나지 않는다. 몇 번은 반복해서 방문하고 서류를 작성해야만 한다.

특히 이렇게 영지에 관한 부분은 나중에 왕국에 내는 세금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훨씬 더 빡빡하게 처리한다.

제론은 수도에 도착함과 동시에 행정청에 서류를 넣었고, 내일 다시 방문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사실 백작쯤 되면 행정청에서 상당한 편의를 봐주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제론은 그런 편의를 전혀 받지 못했다. 행정청의 요직 몇 개를 슈린 공작가에 줄을 댄 귀족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만일 슈린 공작가가 행정청 전체를 장악하고 있다면 제론에게 엄청난 행정적 불이익을 안겼을 것이다. 하지만 행정청은 슈린 공작이 영향력을 미치는 데 상당한 제약이 따랐다.

지금은 그저 최대한 일 처리를 늦추고, 제론이 밟는 행정절차에 관한 정보를 넘기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제법 제론을 귀찮게 만들 수 있었다.

그저 귀찮음을 좀 감수하고 늘어지는 시간이 아깝긴 했지만 그래도 일은 제대로 처리되었다. 그조차 하지 않으면 행정청에 간신히 만든 끈이 사라질 수도 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어쨌든 하루를 기다려야 하기에 제론은 이곳으로 왔다. 그동안 마티를 통해 꾸준히 인재를 찾고 있었는데, 그중 몇 명이 이곳에 있었다.

사실 제론이 찾는 대부분의 인재는 최소한의 교육을 받은 자들이었다. 행정 일을 할 사람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에 행정 쪽으로 공부를 한 인재가 필요했다.

그게 아니라면 라이더로 쓸 기사를 들여야 하는데, 어느 쪽이건 빈민굴에서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제론이 이곳, 빈민굴에 온 이유는 꼭 필요한 다른 방향의 인재를 영입하기 위함이었다.

빈민굴은 좁은 골목이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렇기에 처음 가는 사람은 아예 길을 찾을 엄두도 내지 못한다. 하지만 제론은 마치 이곳에 사는 사람처럼 능숙하게 길을 찾아갔다.

미리 마티를 통해 충분히 길을 파악해 뒀다. 예전 수도 유적을 얻으러 갈 때도 감시를 피하기 위해 이곳 빈민굴을 이용한 적이 있었다.

그만큼 제론은 이곳 지리에 익숙했다.

제론이 찾아간 곳은 빈민굴에서도 가장 깊은 곳이었다. 빈민굴 내의 공터였는데, 그곳에는 삼십 명 정도의 사내가 여기저기 뒹굴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눈에 독기가 가득했다. 건드리면 다 죽여 버리겠다는 눈빛으로 제론을 힐끗힐끗 훔쳐봤다.

제론은 그들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이미 마티를 통해 여러 번 확인한 자들이었다. 어떤 성격이고,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세세히 파악했다.

공터에 누워 있던 사내 중 하나가 일어나 건들거리며 제론에게 다가갔다.

"보아하니 귀족 나리 같은데, 이런 더러운 시궁창에는 왜 오셨나?"

명백히 도발하는 말투였다. 보통 귀족은 이런 곳에 오지 않는다. 혹여 온다 하더라도 호위 기사를 대동하고 온다.

하지만 여기 있는 빈민들은 그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무리 기사라도 칼에 맞으면 죽는 건 똑같다.

빈민은 항상 죽음을 마주하고 살기 때문에 오히려 죽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다. 작은 빈틈 하나 만들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쯤 이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물론 빈민 중에서도 가진 자가 있고 그렇지 않은 자가 있다. 이렇게 시궁창에서 뒹구는 자들 중에도 남을 부리는 사람이 있고, 또 부림을 당하는 사람이 있다.

이곳에 있는 사내들은 몽땅 후자였다. 그렇기에 죽음에 대한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이곳은 빈민굴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 설사 귀족이 여기서 죽어도 그 사실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는다.

다만 왕국에서 군대를 보내면 일이 커지고 복잡해지기 때문에 조금 조심할 뿐이었다.

아무리 복잡한 골목을 가지고 있어도 기간트가 나서면 끝이었다. 한 대만 나서도 이런 빈민굴은 완전히 끝이었다.

하지만 빈민들을 다스리는 몇몇은 그런 일이 벌어질 리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빈민은 거지가 아니었다. 그저 지독히 가난한 사람들일 뿐이었다. 이들이 없으면 수도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수도에서 가장 비천한 일을 하는 사람이 모인 곳이 바로 빈민굴이었다.

물론 거지도 있었다. 하지만 그 수는 극소수였다. 오히려 거지는 빈민굴에서 살아남기가 어려웠다.

그렇기에 이렇게 혼자서 여기까지 온 귀족은 이들의 먹잇감이었다. 입고 있는 옷만 팔아도 한동안은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제론은 다가온 사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이었다.

사내는 순간 움찔 놀랐다. 눈빛에 주눅이 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무서워한다는 걸 들키기 싫어 오히려 더 강하게 나갔다.

"귀족 모독이니 하는 어설픈 얘기를 할 생각이라면 관두쇼."

제론은 여전히 아무 말도 없이 사내를 쳐다보기만 했다. 그냥 보기만 하는 건데도 그 위압감이 엄청났다.

사내는 이를 악물고 주머니에서 칼을 슬그머니 꺼냈다. 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그냥 돌려보내면 오히려 더 일이 복잡해진다.

귀족이 돌아가 병사와 기사를 잔뜩 끌고 오면 결국 죽는 건 자기뿐이었다. 다른 빈민들이 의리를 지킬 리 없으니까. 일을 저지른 사람만 죽으면 깔끔하게 끝나지 않겠는가.

"그걸 꺼내면 넌 죽는다."

제론의 무심한 목소리에 사내는 몸이 굳었다. 그리고 주머니 속에서 쥐고 있던 칼을 놓았다. 본능이 어서 도망치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가서 바인을 데려와라."

제론의 말에 사내가 인상을 팍 썼다. 하지만 말을 거역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믿을 수 없지만 상대는 자신을 눈빛 한 방에 제압해 버렸다.

제론이 손가락을 튀겨 동전 하나를 던졌다.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던 동전을 사내가 휙 낚아챘다.

동전을 확인한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그마치 금화였다.

"자,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사내의 말투가 바뀌었다. 사실 예전 같으면 이런 돈을 봤으면 당장 달려들어 칼부터 휘두르고 봤을 것이다. 금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 줄 정도면 얼마나 많은 돈을 가지고 있을 것인가.

하지만 사내는 그런 생각을 아예 떠올리지도 못했다.

사내가 골목으로 사라지자, 제론은 나머지 사내들을 둘러봤다. 여전히 눈빛은 무심했다.

바닥에 늘어져 있던 사내들이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들도 조금 전의 광경을 다 지켜봤다. 뒷일 따위는 원래 생각지도 않는다. 그저 눈앞의 돈을 취할 뿐이었다.

사내들 중 둘이 조금 전 금화를 들고 골목으로 달려간 자의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나머지 사내들이 제론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들의 눈에서는 하나같이 살기가 넘실거렸다.

제론이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심장에서 맴도는 일곱 개의 마나링이 주변 마나를 장악했다. 제론은 다가오는 사내들은 그냥 내버려 뒀다. 대신 골목으로 막 들어가려던 두 명의 사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덜컥!

뭔가가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막 골목으로 접어들려던 두 사내가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그들은 당황한 눈으로 뒤를 돌아보려 했다. 하지만 그조차 할 수 없었다. 몸이 완전히 굳어 버린 것이다.

그러고 있는 사이 나머지 사내들이 제론에게 가까이 붙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손에 칼을 쥐고 있었다.

슉슉슉슉!

일제히 칼을 내질렀다. 그대로 죽여 버리겠다는 듯 살기 넘치는 공격이었다.

물론 제론의 몸은 고사하고 옷자락 하나 찌르지 못했다. 허망하게 허공을 가른 칼이 잠깐 멈춘 사이 강렬한 타격음이 연달아 울렸다.

퍼버버버버벅!

"크억!"

"카악!"

달려들어 칼을 찌른 사내 전부가 뒤로 나가떨어졌다. 놀랍게도 그렇게 쓰러진 자들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죽은 건 아니었지만 앞으로 생활하기가 어려울 정도의 타격을 입었다.

제론은 나가떨어진 사내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움직이지 못하는 두 사람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꿀꺽!"

두 사람은 침을 꿀꺽 삼켰다. 발소리로 누군가가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누구인지는 너무나 뻔했다.

조금 전까지 동료의 비명이 처절하게 울렸다. 당연히 동료를 그렇게 만들고 자신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자가 다가오는 것 아니겠는가.

제론은 두 사람의 목덜미를 콱 움켜쥐었다.

"으악!"

"크악!"

상상을 초월한 격통에 두 사람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여전히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제론의 손에 목을 붙잡힌 채로 대롱대롱 매달려서 공터 한가운데로 올 수밖에 없었다.

쿠당탕!

바닥을 꼴사납게 나뒹군 두 사람은 갑자기 몸이 움직이는 걸 깨닫고 비틀비틀 일어났다. 잘못 굴렀는지 온몸이 쑤셨다. 하지만 그에 대한 항의도 불만도 표할 수 없었다.

"거기 앉아서 기다려라. 도망가고 싶으면 가도 좋다."

하지만 도망치면 어떻게 될지 뻔히 아는데 도망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두 사람은 얌전히 앉아 불안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잠시 후, 제론의 심부름을 떠났던 사내가 헐레벌떡 돌아왔다. 그의 뒤에는 만신창이가 된 청년 하나가 비틀거리며 따라오고 있었다.

"데, 데려왔습니다!"

사내가 환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마치 잘했으니 상을 달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주변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 이게……!"

제론이 무심하게 발을 들어 올렸다.

뻐억!

"크악!"

사내가 뒤로 쭉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쿵!

"쿨럭!"

사내가 피를 토했다. 그리고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아직 멀쩡한 두 사람은 그 광경을 보고는 벌벌 떨었다. 정말로 무서웠다.

제론은 가만히 눈을 돌려 만신창이가 되어 따라온 청년, 바인을 쳐다봤다.

바인의 눈에는 두려움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그 아래 깊은 곳에서 넘실대는 독기가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것처럼 일렁였다.

제론은 바인을 보고는 다짜고짜 말했다.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 봐라."

바인의 눈에 순간 의문이 담겼다. 하지만 이내 눈빛이 다시 원래대로 변했다. 스스로를 감추는 데 능한 자였다.

"저, 저같이 비천한 놈에게 그런 건 없습니다."

제론이 피식 웃었다.

"정말 없나? 이 지긋지긋한 빈민굴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도, 막대한 돈을 벌고 싶은 욕심도 없나? 귀족이 되고 싶다거나 하는 바람도 없다고?"

바인이 어색하게 웃었다. 일단 감추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은 이상 다시 드러나지 않았다. 물론 제론은 그의 진면목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헤헤헤. 언감생심 그런 마음을 품어 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요. 헤헤헤헤."

바인이 비굴한 표정과 자세로 멍청하게 웃었다.

제론은 그 웃음을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어딘가 섬뜩해 보여 바인은 하마터면 얼굴에 떠오른 웃음기를 지워 버릴 뻔했다.

"빈민굴의 왕이 되고 싶었잖아. 아닌가?"

바인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마치 얼굴에 균열이라도 가는 듯했다. 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할 수는 있나?"

바인이 굳은 표정을 풀지 못하고 더듬더듬 대답했다. 너무 정곡을 찔려서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앞으로 더 이상 이런 실수를 해선 안 된다.

"제, 제게 그, 그런 능력이 있을 리 어, 없지 않습니까. 헤헤헤."

제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익스퍼트 열 명만 수하로 부릴 수 있으면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바인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다시는 놀라지 않으려 했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대체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제론이 피식 웃었다.

"고작 그 정도 꿈이 전부인가? 좀 더 큰 꿈은 없나?"

"크, 큰 꿈 말입니까?"

바인은 어느새 제론의 분위기와 대화에 말려들었다. 얼떨떨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예를 들어 대륙의 밤을 지배하겠다거나, 아니면 대륙의 정보를 한 손에 쥐고 흔들겠다거나 하는 것 말이야."

"대, 대륙?"

바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륙이라니,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떠올려보지 못했다. 아니, 꿈도 꿀 수 없는 단어였다. 빈민굴도 아니고, 수도도 아니고, 왕국도 아닌 대륙이라니 말이다.

"어때? 생각이 좀 있나?"

바인이 두근거리는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지금 들떴다가는 그대로 먹혀서 죽는다. 방심하는 순간 그렇게 된다는 걸 지금까지 너무나 많이 봐 왔다.

"제, 제가 그런 걸 어떻게 하겠습니까?"

"벌써 같이 일할 사람을 열 명이나 모았잖아? 아닌가?"

"저까지 고작 열한 명입니다. 대체 무슨 수로 대륙의 밤을 지배한단 말입니까."

제론이 씨익 웃었다.

"할 마음은 있다는 뜻이로군?"

"하, 할 수만 있다면야 누가 그걸 거부하겠습니까."

"빈민굴에 대한 모든 정보를 속속들이 알고 있다면 장악하는 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

바인은 순간 이것이 바로 시험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걸 넘지 못하면 자신은 끝까지 빈민굴의 쥐새끼로 살아야 한다. 하지만 넘으면 정말로 왕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밤을 지배하는 어둠의 왕이.

지금까지 한 번도 그렇게 맹렬히 머리를 굴려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바인은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렸다. 수많은 작전이 떠올랐다가 사라져 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 작전에 걸리는 시간을 계산했다.

"보름이면 끝낼 수 있습니다."

"보름?"

의외였다. 제론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인을 쳐다봤다. 제론이 마티를 통해 바인을 발견한 건 제법 오래되었다. 사실 수도의 유적을 장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발견했다.

그동안 바인의 능력을 차근차근 확인해 왔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앞으로 제론이 만들 정보 조직에 바인보다 적합한 사람은 없다고 말이다.

"빈민굴의 모든 정보를 속속들이 파악할 수 있다는 가정하에 나온 결론입니다."

"그러니까 예상보다 더 깊고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있다면 시간을 단축할 수도 있다는 뜻인가?"

바인의 눈이 커다래졌다. 설마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 자신이 예상한 정보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도 아직 듣지 않고서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제론이 피식 웃으며 돌아섰다.

"따라와라. 재미난 걸 보여 주지."

바인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제론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광경을 모두 듣고 본 두 사내는 침을 꿀꺽 삼키며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이건 정말로 일대 사건이었다. 빈민굴은 물론이고 수도 전체가 발칵 뒤집힐 수도 있을 만한 사건 말이다.

"이, 이걸 어떻게 하지?"

두 사람은 안절부절못했다. 대체 뭘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 사실을 누구에게 말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빈민굴에서 어깨에 힘주고 사람들 괴롭히는 것만 할 줄 알았지, 실제로 뭔가를 꾸미거나 생각하는 일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이, 일단 자리를 뜨자."

두 사람은 황급히 자리를 뜨려다가 주위에 널브러진 동료들을 쳐다봤다.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눈빛에 지독한 살기가 흘렀다.

잠시 후, 두 사내는 도망치듯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진 공터에는 피비린내만이 가득했다. 그곳에는 단 한 점의 생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바인은 할 말이 없었다. 대체 이 장소는 어떻게 알아냈단 말인가.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이곳은 바인이 비밀리에 만든 공간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땅을 파내서 만들었기 때문에 누구도 알지 못할 거라 자신했다. 한데 제론이 너무나 당연하게 그곳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혼자서 만든 것치고는 제법 잘 만들었군."

제론은 바인이 이미 이곳을 만든 다음 수도 유적을 연결시켰다. 그렇기에 어떤 식으로 만들었는지는 몰랐다. 그래서 더 놀랐다.

이곳은 바인이 자신의 집 바닥을 파내서 만든 공간이었다. 상당히 교묘하게 만들었기에 미리 알고 있지 않는 한,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대체 어떻게 안 겁니까?"

바인이 기가 막혀 물었다. 물론 제론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대신 커다란 석판을 꺼냈다.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한쪽 벽을 꽉 채울 정도로 커다란 석판이 나타나자, 바인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두려운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감히 딴 마음을 품어선 안 된다는 경각심이 뇌리를 계속 때렸다. 또한 일단 이렇게 엮였으니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확실하게 한다.'

바인은 무조건 이번 시험을 멋지게 통과하고 말 거라고 다짐했다. 자신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면 가능할 것이다. 벌써 빈민굴을 장악할 계획은 네 가지나 세워 놨다.

그중 무엇을 쓸지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정보의 정도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거기서 멍하니 서 있지 말고 이리 와라."

제론의 말에 바인이 서둘러 제론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한쪽 벽에 세워진 석판을 볼 수 있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석판이었다.

"이게 뭡니까?"

"네게 정보를 줄 물건이지."

"예?"

바인이 어이없는 눈으로 제론과 석판을 번갈아 바라봤다. 이 돌덩이에서 어떻게 정보를 뽑아낸단 말인가.

혹시 뭔가 자신이 모르는 마법이라도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인은 석판에 다가가 조심스럽게 만져 봤다. 하지만 별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이제부터 사용법을 알려 줄 테니 똑똑히 기억하도록."

제론이 석판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심장의 마나링이 맹렬히 가속했다.

위이잉!

제론은 석판에 손을 갖다 댔다.

번쩍!

바인은 너무 놀라 입을 쩍 벌렸다. 침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빛나는 석판을 바라봤다. 맹세코 이렇게 놀란 적은 평생 처음이었다.

석판에 수십 개의 작은 화면이 떠올랐다. 각각의 화면은 빈민굴 곳곳을 비추고 있었다.

"이, 이, 이게 뭡니까? 대체 뭘 어떻게 한 겁니까?"

제론이 바인을 쳐다보며 씨익 웃었다.

"말했잖아? 빈민굴을 속속들이 확인할 수 있는 정보를 주겠다고."

바인은 홀린 듯이 석판을 바라봤다. 만일 이 화면이 비추는 장소를 자기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면, 혹은 사람을 임의로 지정해서 계속 따라다닐 수 있다면 보름이 아니라 열흘 안에 빈민굴을 장악할 자신이 있었다.

바인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리고 눈앞에 선 제론이 신으로 보였다. 그에게 있어서 제론은 신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었다.

또한 꿈을 이뤄 줄 사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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