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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세 영지 (2)
뤼그너 남작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너무나 혼란스러웠다. 설마 이런 제안이 또 들어올 줄은 몰랐다.
예전에 욕심 때문에 덜컥 제안을 받아들였다가 어찌나 호되게 대가를 치렀는지 아직도 치가 떨렸다. 한데 같은 제안이 또 들어왔다.
"나도 어쩔 수 없는 놈이야."
뤼그너 남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당해 놓고 또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거부할 수가 없었다.
에어스트 백작령과의 일 때문에 지금 뤼그너 남작령을 비롯한 세 영지는 상당히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고 있었다.
일단 당시 죽은 기사와 빼앗긴 병사 때문에 치안에 공백이 왔다. 또한 상납금을 준비하다 보니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
그러던 차에 달콤한 제안이 왔으니 그걸 덜컥 받아들인 건 꼭 자신이 멍청해서만은 아니리라.
"그래도 이번에는 기간트가 무려 오십 기야. 게다가 정당하게 영지전을 선포할 수가 있어."
지난번처럼 전쟁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우회하려면 또 같은 일을 겪을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당당하게 전쟁을 걸 수 있으니 성공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
뤼그너 남작은 당장이라도 쳐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참아야 했다. 진짜 이기려면 철저하게 준비를 해야만 한다.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뭐가 또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다.
지난번에도 난데없이 기간트가 튀어나와 얼마나 놀랐던가.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거세게 쿵쿵 뛰었다.
"그래도 이번엔 괜찮아. 이번에는……."
무려 오십 기의 기간트가 일제히 진군하는 상상만으로도 희열이 밀려왔다. 가슴 떨리는 광경 아니겠는가.
뤼그너 남작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아직 준비가 완전히 끝난 게 아니었다. 조금의 빈틈도 남기지 않기 위해 이번에 거금을 들여서 준비한 게 있었다.
세 영지의 영주가 돈을 모아서 준비한 것이었다. 가진 돈만으로는 모자라서 영지를 담보로 돈을 빌려 자금을 마련했다.
"지면 끝이야."
조력자의 힘만으로 이기기 어렵다는 걸 알기에 준비한 패였다. 아마 그것이 도착하면 나중에 웃을 수 있으리라. 그래서 꾹 참고 기다렸다. 조력자의 재촉이 이제는 거의 협박 수준에 이르렀는데도 말이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돼. 조금만 더……."
뤼그너 남작의 눈에 독기가 차올랐다.
마틴 준남작은 뤼그너 남작령과 에어스트 백작령의 경계 근방에서 눈에 띄지 않는 장소를 택해 높은 망루 하나를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을 호위할 기사 두 명과 그곳에서 두 영지의 상황을 지켜봤다.
"왜 이렇게 뜸을 들이나 했더니 저런 걸 준비했을 줄이야."
마틴 준남작은 사실 뤼그너 남작을 무시했다. 하지만 얼마 전 도착한 그것을 보고 나니 무시하던 마음이 대부분 사라졌다.
어쨌든 뤼그너 남작은 영지전을 신청했다. 명분은 있었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흉계로 뤼그너 남작령을 비롯한 세 영지가 파탄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주장은 받아들여졌다. 영지전 허가가 떨어진 것이다. 당연히 그 이면에 슈린 공작가의 압력이 있었다.
멀리서 뤼그너 남작령의 병사가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당연히 세 영지의 합동 병력이었다. 같은 날 영지전을 신청했는데, 다 받아들여진 것이다.
무려 오천 의 병사가 오와 열을 맞춰서 진군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리고 가장 앞에는 오십 명의 기사가 역시 줄을 맞춰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이 바로 기간트 라이더였다.
반면 반대쪽에서 나오는 에어스트 백작령의 병력은 그에 비해 보잘것없었다.
기사 복장을 한 자들은 고작 스물일곱 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병사는 백 명뿐이었다. 누가 봐도 뤼그너 남작령의 압승을 예상할 것이다.
그것은 마틴 준남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대로는 무조건 뤼그너 남작령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하지만 마틴 준남작은 그렇게 단정하지 않았다. 에어스트 백작령에는 숨겨진 기간트가 있었다. 그것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 엄청난 발굴형 기간트가 말이다.
"무려 철사자 기사단을 혼자서 압도할 정도의 기간트란 말이지."
이번 전쟁에서 그 기간트를 제압하겠다거나 박살 내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한 번 확인만 하면 그걸로 족했다.
어차피 그 기간트는 다른 방식으로 얻을 것이다. 에어스트 백작령을 압박해 알아서 기간트를 토해 내도록 만들 작정이었다.
그에 대한 준비는 파인트가 착실히 진행 중이었다. 마틴 준남작은 파인트가 일을 진행시키는 동안 이렇게 에어스트 백작령을 흔들고 힘을 줄이면 된다.
그는 자신의 안전에 대해서는 추호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를 호위하는 두 기사는 기간틱 나이트였다. 익스퍼트의 실력에 엄청난 기간트 센스를 가졌다.
게다가 마틴 준남작도 기간트 장비를 가지고 있었다. 무려 베르였다.
어떤 상황이 오건 도망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자아, 어쨌든 나야 오랜만에 싸움 구경이나 즐겁게 해 볼까?"
마틴 준남작은 느긋한 표정으로 전장을 바라봤다. 누가 이기든 상관없었기에 마음은 더할 나위 없이 편안했다.
"오! 이제 기간트를 소환하려는 모양이군!"
뤼그너 남작령 측 기사들이 약간씩 흩어지며 공간을 확보했다. 그러자 에어스트 백작령 측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로 움직였다.
기사의 움직임은 같았지만 병사는 완전히 달랐다.
일단 뤼그너 남작령 측 병사들은 둘로 나뉘어 기사를 중심으로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전투가 시작되면 기간트의 싸움에 말려들지 않고 진군하기 위함이었다.
반면 에어스트 백작령 측 병사들은 뒤로 쭉쭉 물러났다. 아무리 잘 봐줘도 도망치려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쯧쯧, 병사 싸움은 완전히 포기한 건가? 이러다가 성이라도 점령당하면 아주 곤란할 텐데?"
성을 점령하는 와중에 중간에 보이는 영지민은 혹독한 취급을 받는다. 더구나 병사가 오천 명이나 된다. 그것도 이쪽 영지 사람이 아니라, 외부에서 들여온 병사였다.
그 병사들이 피와 광기에 취하면 어떤 짓을 할지는 너무나 자명했다. 무수한 영지민이 죽어 나갈 것이다. 또한 여자들은 더 험한 꼴을 당할 것이다.
마틴 준남작은 그것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예상했던 그대로야. 영지민이 당하는 건 지켜봐도 성이 무너지는 꼴은 못 보겠지?"
마틴 준남작은 오천의 병력이 에어스트 백작성에 도착하면 비밀 기간트가 등장할 거라고 예상했다. 병사들에게는 미리 은밀히 지령을 내려 두었다.
기간트가 나타나면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라고 말이다. 굳이 이런 곳에서 목숨을 잃을 필요는 없었다.
키이이이이잉!
일제히 기간트가 나타났다. 뤼그너 남작령 측의 기간트는 대부분 카타락타였다. 그리고 몇 기의 크라테르가 있었다. 그렇게 오십 기의 기간트가 일제히 나타나는 광경은 장엄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마틴 준남작의 시선은 그쪽에는 아예 가지도 않았다. 그는 부릅뜬 눈으로 에어스트 백작령 측 기간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 뭐야!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해!"
마틴 준남작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도 그럴 것이 에어스트 백작령의 기간트 중 무려 여섯 기나 되는 발굴형 기간트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무려 아우틈이었다. 그리고 베르가 다섯 기나 있었다.
나머지도 보통이 아니었다.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열 기나 되는 임베르가 있었다. 크란 제국의 기간트인 임베르는 돈이 있다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데 대체 어디서 저걸 구했단 말인가.
그 외 나머지 열한 기의 기간트는 전부 크라테르였다. 실로 어마어마한 전력이었다. 이건 단순히 수의 우위로 승부를 점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마틴 준남작은 불안한 눈으로 뤼그너 남작령 쪽을 바라봤다. 그쪽에 서 있는 카타락타와 크라테르가 참으로 초라해 보였다.
"이래서야 준비한 게 전혀 쓸모가 없지 않은가!"
뤼그너 남작령의 기간트 가장 뒤에 서 있는 베르가 참으로 외로워 보였다. 만일 에어스트 백작령 측 기간트가 전부 크라테르로 이루어져 있다면 베르가 정말로 큰 위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압도하는 상황에서 날카로운 칼 한 자루가 가지는 의미는 크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는 상대적으로 의미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사실 기간트라는 것이 사고 싶다고 마음대로 살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기간트를 사려면 왕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건 오래전 이야기였다. 요즘은 많이 느슨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왕국에 보고하지 않고 기간트를 보유하는 영지가 너무 많았다.
그걸 일일이 찾아내 처벌하다 보면 대부분 영지의 공분을 사게 될 것이다. 그건 왕국 분열의 지름길로 이어진다.
더구나 지금처럼 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각 영지가 보유한 기간트의 수가 급격히 변하기 마련이었다. 그걸 일일이 통제하는 건 불가능했다.
기간트의 수가 엄청나게 많다면 모를까 고작 삼십 기 정도라면 공론화시켜 봐야 먹히지도 않는다.
지나칠 정도로 좋은 기간트가 많다는 걸 걸고넘어질 수도 있지만, 그것 역시 안 하는 편이 나았다.
기간트에 관한 한 어느 정도 돈이 있는 영지라면 아무도 자유롭지 않았다. 괜히 들쑤셔 봐야 오히려 뭇매만 맞을 공산이 컸다.
"종잡을 수가 없군."
마틴 준남작은 눈살을 찌푸리며 간신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쨌든 전쟁의 승패는 상관없었다. 하지만 성과가 줄어들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양측의 기간트가 일제히 달려갔다. 그리고 그 순간 마틴 준남작은 이마에 손을 짚으며 앓는 소리를 흘렸다.
"끄응!"
달려가는 모양새가 완전히 달랐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기간트는 일정한 진형을 이루면서 정확히 발을 맞춰서 이동했다. 달리는 속도가 느리지 않은데도 진형이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반면 뤼그너 남작령 측은 질서가 별로 없었다. 처음에는 그나마 진형을 유지했지만 달려가는 동안 완전히 흐트러져 버렸다.
집단전을 벌인 경험의 차이였다. 또한 훈련의 차이이기도 했다.
꽈앙!
굉음이 울렸다. 양측의 기간트가 부딪친 것이다. 당연히 진형을 제대로 이루지도 못한 뤼그너 남작령 측의 기간트가 월등히 불리하게 전투를 시작했다.
마틴 준남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기간트 전투는 아예 승산이 없었다. 이제 믿을 건 병사들뿐이었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병사 쪽으로 옮겨졌다.
오천 명의 병사가 일제히 진군을 시작했다. 병사는 그래도 기간트에 비해 진형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기간트는 사람처럼 정교하게 움직이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진형을 맞추려 애써도 흐트러지기 일쑤였다. 정말로 많은 훈련이 필요했다.
뤼그너 남작령의 오천 병사 중 상당수는 슈린 공작가가 지원했다. 그들은 원체 훈련 상태가 좋았기에 진군 도중 진형이 흐트러지는 일은 없었다.
오천 명의 병사가 둘로 나뉘어 진군했다. 그들은 기간트 전투가 벌어지는 곳을 크게 우회하며 나아갔다. 자칫 말려들면 병력이 아무리 많아 봐야 소용없었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병력은 고작 백 명이었다. 그걸로 오천 병사에게 돌진하면 계란을 바위에 던진 것과 똑같은 꼴이 된다.
백 명의 익스퍼트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물며 그저 병사일 뿐이니 결과는 명약관화했다.
당연히 그들은 계속 후퇴했다. 질서 정연하게 뒤로 물러났는데, 양측의 거리가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서 상당히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었다.
병사 간의 전투도 쉽게 벌어질 것 같지 않자, 마틴 준남작은 다시 시선을 기간트로 돌렸다. 그의 표정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기간트 전투는 수의 우위가 가장 강력한 힘이 된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하지만 다른 조건 역시 상당히 중요했다.
뤼그너 남작령은 기간트의 숫자만 앞섰지 나머지 조건은 완전히 압도당했다.
일단 기간트의 성능이 월등히 모자랐다. 다음으로 집단전에 관한 경험과 훈련이 부족했다. 마지막으로 개개인의 기량도 너무 큰 차이가 났다.
그로 인해 수적 우위를 전혀 살리지 못하고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병사가 진군할 시간을 벌어 준다는 것이었다.
무너지고 있긴 하지만 그 속도가 빠르지는 않았다. 수의 차이가 워낙 심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하나이긴 하지만 베르의 존재가 상당한 힘을 실어 주었다.
"후우. 이래서야 제대로 타격을 줄 수나 있을지 모르겠군."
마틴 준남작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병사들을 바라봤다. 아직도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슬슬 긴장감이 떨어지고 있었다.
☆ ☆ ☆
제론은 마티를 통해 마틴 준남작이 뤼그너 남작령에 도착한 순간부터 감시했다. 그리고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기 위해 벨루스 백작가로 은밀히 연락을 넣었다.
벨루스 백작가도 마틴 준남작 때문에 발칵 뒤집힌 상태였다. 배신하고 도망친 마틴 준남작 때문에 영지의 행정이 반쯤 마비되어 버린 것이다.
마틴 준남작은 혹시 모를 추적을 방지하기 위해 그런 일을 벌였다.
또한 행정을 정상화하는 도중 마틴 준남작이 그동안 저지른 비리가 하나둘 발견되기 시작했다. 실로 막대한 금액을 꿀꺽 삼킨 정황이 계속해서 발견되었다.
그 일로 벨루스 백작가는 난리가 났다. 그리고 마틴 준남작이 슈린 공작령으로 도주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래서 현재 벨루스 백작가는 슈린 공작가에 정식으로 항의를 한 상태였다. 양 가문 사이에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물론 전쟁으로 번지지는 않을 것이다. 두 영지는 너무 멀러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긴장 상태가 제법 오랫동안 유지될 거라는 점은 확실했다.
그 모든 상황을 전해 들은 제론은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대번에 파악했다. 마틴 준남작이 슈린 공작가에 붙어서 에어스트 백작령을 노리는 것이다.
당연히 목적은 테오스였다. 물론 제론은 그것을 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 압박을 하든 능히 헤쳐 나갈 자신이 있었다.
지금도 제론은 마틴 준남작이 만든 망루를 그보다 훨씬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소환한 테오스에 탑승한 채로 말이다.
"좀 아슬아슬하게 만들어 볼까?"
제론은 일단 전투에 깊이 개입할 생각이 없었다. 수적 우위를 앞세운 적을 상대하는 것도 라이트닝 기사단에게는 훌륭한 경험이 될 것이다.
하지만 너무 시간을 오래 끌도록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오천 명이나 되는 병사도 손을 봐야 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병사를 상대할 방법을 준비하긴 했다. 하지만 그걸로 완벽히 병사를 막아 낼 수 있다고 확신하지 못하기에 기간트 전투가 늘어지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자아, 어디 이 정도면 되려나?"
테오스가 주변에 널린 둥그런 바위 하나를 들었다. 한 손으로 쥘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지름이 약 50센티미터쯤 되는 바위였다.
이 바위는 제론이 미리 준비한 것이었다. 이렇게 쓰려고 말이다.
후우웅!
테오스가 팔을 크게 휘두르며 바위를 던졌다.
콰우우우!
공기를 찢으며 바위가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실로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테오스의 힘과 제론의 기간트 센스가 만들어 낸 광경이었다.
텅!
돌은 정확히 뤼그너 남작령의 기간트에 명중했다. 물론 거리가 워낙 멀어 파괴력이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돌에 맞은 기간트는 순간적으로 균형이 흔들렸다. 그리고 라이트닝 기사단은 그런 큰 빈틈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콰직!
카타락타의 조종석을 검이 뚫고 지나갔다.
쿠웅!
기간트가 쓰러지며 진형이 잠깐 흐트러졌다. 그리고 라이트닝 기사단의 베테랑들은 그 빈틈조차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꽈과광!
기간트와 기간트가 부딪치며 굉음이 울렸다. 자욱하게 피어나는 흙먼지 사이로 검광이 번득였다.
꽝! 꽝! 꽝!
다시 치열한 접전이 펼쳐졌다. 그리고 그렇게 균형을 되찾으려는 순간 또 돌 하나가 날아왔다.
콰우우우!
텅!
콰직!
마치 약속 대련이라도 하는 듯했다. 미리 짜 맞춘 것처럼 돌에 맞고, 흔들리고 조종석이 꿰뚫리는 일련의 과정이 물 흐르듯 연결되었다.
사실 라이트닝 기사단은 이에 대한 훈련도 충분히 했다. 제론이 생각해 낸 훈련이었고, 영지전이 시작되기 사흘 전부터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 훈련을 했다.
그렇기에 훨씬 큰 효과를 내는 게 가능했다.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돌이 날아왔고, 그때마다 균형이 무너지며 뤼그너 남작령 측 기간트가 우수수 쓰러졌다.
이내 기간트 수가 같아졌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완전히 일방적으로 라이트닝 기사단이 적을 몰아붙였다.
기간트 전투는 그렇게 끝을 향해 치달았다.
오천 명의 병사는 뤼그너 남작의 아들이 직접 이끌었다. 그는 이번에 큰 공을 세울 작정이었다. 이들을 효과적으로 지휘해 에어스트 백작령의 성을 점령하면 그 누구보다 큰 공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둘로 나뉘어 진군하던 병사가 하나로 모였다. 그리고 뤼그너 남작의 아들은 병사의 가장 뒤에서 큰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진격! 걸리는 건 다 쓸어버려라!"
그는 오천 명의 병사라면 성 하나 점령하는 건 지극히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자신 있었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병사는 계속 후퇴하다가 멈춘 상태였다. 그 뒤로는 더 이상 후퇴하지 않고 전의를 불태웠다.
다들 창을 겨누고 있었는데, 당장이라도 달려 나올 것만 같았다.
뤼그너 남작의 아들은 그것을 보고는 비웃었다. 고작 백 명이 달려들어 봐야 뭘 어쩌겠는가. 오천 명의 병사가 그냥 달려가기만 해도 깔려서 죽을 것이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병사 백 명은 눈에서 독기를 뿜어냈다. 정말로 독한 마음을 먹었다. 포로는 필요 없었다. 다 죽여야만 했다.
불과 얼마 전에 잡은 포로도 아직 처리를 하지 못했다. 여기서 더 포로를 잡아 봐야 가둘 공간도 없었다.
또, 이들은 언제든 다시 위협이 될 존재였다. 이 병사는 뤼그너 남작령 소속이 아니었다. 더 큰 적이었다. 그렇기에 기회가 되면 싹 죽여 버리는 게 나중을 위해 좋았다.
그걸 다들 인식하고 있기에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아무리 철저하게 훈련이 되었고, 사람을 죽여 본 경험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수천 명의 적을 몰살시키겠다는 마음을 먹는 건 쉽지 않았다.
양측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뤼그너 남작령 측 병사들은 처음에는 진형도 갖추고 무리하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이동했지만, 점점 빨라지면서 나중에는 진형이 많이 흐트러졌다.
하지만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50 대 1의 싸움이었다. 오십 명이 무슨 헛짓을 해도 한 명에게 질 리가 없지 않은가. 설사 실력이 아무리 차이가 난다 해도 말이다.
양측의 거리가 100미터도 남지 않았을 때, 눈이 멀 것 같은 섬광이 일었다.
번쩍!
"으악!"
"안 보여!"
빛이 어찌나 강했는지, 다들 순간적으로 눈이 멀어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에어스트 백작령의 백인장이 외쳤다.
"공격!"
백 명의 병사가 일제히 앞으로 내달렸다. 그렇게 달리면서 몸을 뒤로 크게 젖혔다. 뒤로 쭉 뻗은 손에는 창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힘을 하나로 응축시켜 창에 모아 던졌다.
슈슈슈슉!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창이 오천 명이나 되는 병사를 향해 비스듬하게 떨어졌다.
퍼버버버벅!
"크악!"
"으아악!"
"막아!"
"죽여!"
눈이 멀어 아무것도 안 보이는 오천 명의 병사는 적이 돌격한 걸로 착각을 했다. 그들은 반 공황 상태에 빠져 검을 휘두르고 창을 내질렀다.
퍽! 퍽! 퍽! 퍽!
갑자기 시력이 상실된 공포는 엄청나다. 그런데 죽고 죽이는 전장에서 그 일을 겪었으니 상상을 초월하는 두려움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정신없이 검과 창을 휘둘렀다. 좀처럼 시력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희미하게 주변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들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적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아군끼리 창검을 휘두르며 죽고 죽였던 것이다.
사실 이럴 때는 지휘관의 역량이 중요했다. 지휘관이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해 적절한 명령을 내려야만 한다. 하지만 지휘관인 뤼그너 백작의 아들은 한마디도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병사들과 함께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다. 근처에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검에 죽은 병사가 무려 삼십 명에 이를 정도였다.
"크윽! 다들 정신 차려! 일단 저놈들부터 죽여라!"
뤼그너 남작의 아들이 외쳤다. 자신의 실책을 감추기 위해서는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여야 한다.
병사들은 반사적으로 달렸다. 그들도 동료를 죽인 죄책감을 덜기 위해 적에게 모든 원망과 분노를 돌렸다.
"으아아아!"
거대한 함성과 함께 남은 병사들이 달려갔다. 오천 명이었던 병사는 이제 고작 사천 명 정도가 남았을 뿐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무려 천 명이 죽은 것이다.
그들의 돌격은 길지 않았다. 고작 20미터를 달려갔는데, 고막을 뒤흔드는 굉음이 울린 것이다.
꽈아아아아앙!
병사들이 밟은 대지가 폭발했다. 수많은 병사가 온몸에 돌조각을 박고 죽어 갔다.
땅 아래에 있던 수백 개의 바위가 일제히 폭발한 것이다. 그 피해는 한 번에 그치지 않았다.
요행히 폭발의 범위에서 벗어난 사람도 하늘 높이 솟구쳤다가 떨어지는 바위 조각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퍼버버버버벅!
아비규환의 지옥도가 펼쳐졌다. 폭발의 범위는 어마어마했고, 뤼그너 남작령의 병사들은 대부분 그 영역 안에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폭발로 인해 그들의 지휘자인 뤼그너 남작의 아들은 즉사했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백인장이 외쳤다.
"투창!"
아직 창은 많이 남아 있었다. 백 개의 창이 하늘을 날았다.
슈슈슈슈슉!
퍼버버버버벅!
"아악!"
"크아악!"
아직도 많은 병사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연달아 창이 쏟아졌다.
슈슈슈슈슉!
퍼버버버벅!
병사 한 명당 열 개가 넘는 창을 준비했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병사들은 창을 하나만 남기고 몽땅 던져 버렸다.
그렇게 처참하게 당했는데도 뤼그너 남작령의 병사는 아직도 천 명 가까이 남아 있었다. 물론 절반 이상이 상당한 상처를 입긴 했지만 백 명이 상대하기에는 버거웠다.
하지만 백 명의 병사는 망설임 없이 창을 꼬나 쥐고 달려갔다. 그들의 눈빛에는 조금도 두려움이 없었다. 자신감만 가득했다.
오히려 그들을 맞이하는 뤼그너 남작령의 병사들이 더 두려움에 떨었다. 그들은 억지로 검을 들고 에어스트 백작령의 병사에 맞섰다.
억지로 용기를 짜냈다.
"수는 우리가 더 많다! 아직 이길 수 있어!"
누군가가 처절하게 소리쳤다. 그 말에 몇몇이 호응했다.
"이길 수 있어!"
"죽여라!"
뤼그너 남작령의 병사들이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다. 그대로 양측이 충돌했다.
채채채챙!
퍼버벅!
"크아악!"
믿을 수 없는 결과가 나왔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병사는 마치 익스퍼트라도 되는 것처럼 힘차고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은 뤼그너 남작령의 병사를 압도했다.
아무리 부상자가 많이 섞였다지만 거의 혼자서 열 명을 상대해야 하는데, 에어스트 백작령의 병사는 그것을 해냈다.
고작 백 명의 병사가 천 명의 병사를 말 그대로 쓸어버렸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병사는 한 명도 죽지 않았다. 물론 부상은 입었다. 하지만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하지는 않았다.
전투가 끝나자, 병사들은 다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멀리 떨어져서 기간트 전투가 어찌 되었는지 확인했다. 그곳도 이미 전투가 끝나 있었다.
압승이었다.
☆ ☆ ☆
마틴 준남작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렇게 압도적으로 영지전이 끝날 줄은 몰랐다. 기간트고 병사고 에어스트 백작령이 뤼그너 남작령을 박살 낸 것이다.
"어,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 거지?"
마틴 준남작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에어스트 백작령에 저렇게 대단한 기간트가 잔뜩 있는 것도 이해 불가였고, 병사의 실력이 저렇게 대단한 것도 믿을 수 없었다.
"대체 그 섬광과 폭발은 뭐야?"
상황을 보아하니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함정을 준비한 것이 분명했다. 한데 대체 어떤 식으로 만든 함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마법을 이용하지 않았을까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마틴 준남작은 심각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전쟁이 끝났으니 이걸 슈린 공작가에 알려야 했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저력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어야 향후 대처가 편해진다.
"그나저나 그 비밀 기간트는 아예 등장도 안 했군. 그건 좀 아쉬운데?"
마틴 준남작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망루에서 내려가려 했다. 그 순간,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쉬울 필요 없다. 이렇게 왔으니까."
마틴 준남작은 깜짝 놀라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새까만 기간트 한 대가 망루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어, 어, 어,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소리조차 나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단 말인가. 마틴 준남작은 너무 놀라 자신의 기간트를 소환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를 호위하는 두 기사는 달랐다. 그들은 재빨리 기간트를 소환했다. 아니, 소환하려고 했다.
퍼벅!
두 기사의 머리가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테오스가 손가락을 한 번 튀긴 결과였다.
주르륵.
마틴 준남작은 그대로 오줌을 지렸다. 이 상황이 꿈이었으면 싶었다. 하지만 그럴 리 없지 않은가.
퍽!
마틴 준남작의 머리가 날아가 버렸다.
콰직!
테오스가 단숨에 망루를 부쉈다.
제론은 테오스를 아공간으로 돌려보낸 뒤, 시체가 입고 있는 기간트 장비를 벗겼다.
아주 간단하게 세 기의 기간트가 생겼다.
"전리품까지 하면 제법 짭짤하겠군."
짭짤한 정도가 아니었다. 사실 기간트의 수가 너무 많았다. 앞으로 라이더를 더 양성해야만 했다. 그것도 최대한 빨리. 그래도 남는 기간트가 있으면 내다 팔면 된다.
제론의 뇌리에 암시장이 떠올랐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용병 펠젠의 모습이 함께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