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1 마틴 준남작의 선택
벨루스 백작은 에어스트 백작령을 방문한 뒤로 완전히 달라졌다.
일단 얼굴에 웃음을 띠는 경우가 많아졌다. 분위기도 훨씬 부드러워졌다. 예전처럼 주변 사람을 윽박지르거나 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다들 적응을 하지 못했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 아닌가.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차츰 그것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백작의 변화를 너무나 기뻐했다. 백작이 변하니 영지 분위기도 변해 갔다.
벨루스 백작령은 다시 오래전의 그 밝고 진취적인 분위기를 서서히 되찾아 갔다.
백작의 가족부터 시작해 심지어는 휘하 기사들조차 백작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는데, 딱 한 사람 그렇지 못한 자가 있었다.
바로 마틴 준남작이었다.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백작을 찾아갔다. 하지만 원하는 반응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 오늘도 벨루스 백작과 만나 애타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백작님, 이대로 기간트만 잔뜩 잃고 물러나선 안 됩니다. 또한 아가씨를 그냥 그곳에 두실 생각이십니까? 슈린 공작가는 어쩌시려고 이러십니까?"
마틴 준남작이 열을 올렸다. 하지만 벨루스 백작은 그저 시큰둥한 표정을 지었다.
그곳에 가서 제론과 영지의 모습을 보며 초심을 되찾았다. 그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자신과 영지를 이끌고 있었다. 굳이 이런 상황에서 또 일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또한 제론과 그 영지가 은근히 마음에 들었다. 딸의 모습도 그 어느 때보다 빛나는 걸 분명히 확인했다. 역시 딸을 슈린 공작가의 망나니에게 보내선 안 된다는 걸 확신하고 돌아왔다.
그러니 마틴 준남작의 말에 반응을 할 리 없었다.
"그쪽은 이제 됐네. 자네도 영지 일에 신경을 쓰게나."
마틴 준남작은 입을 쩍 벌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그 새로운 기간트를 찾는 걸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백작님, 새로운 기간트를 이대로 놓칠 수는 없습니다. 자그마치 철사자 기사단을 홀로 물리친 기간트란 말입니다!"
그런 기간트이니 당연히 발굴형일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나왔던 그 어떤 발굴형 기간트보다 뛰어날 것이다.
그걸 얻게 된다면 벨루스 백작령은 단숨에 위로 치고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그 기간트가 거기 있다고 확신하나?"
"그럼 아니겠습니까? 대대적으로 수색을 하면 반드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벨루스 백작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그만 포기하게. 그리고 잊게. 다른 사람의 귀에 이 일이 흘러가지 않도록 입단속을 하란 뜻일세."
"백작님!"
"내가 허투루 조사를 했을 것 같나? 영지를 샅샅이 뒤졌네. 그래도 찾지 못한 기간트일세. 어쩌면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 만났을 수도 있네. 아니면 다른 영지의 조력자이거나."
"하지만 백작님의 동선을 파악해 계속 숨겼을 수도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아공간 탐지 아티팩트는 범위가 정해져 있으니까요."
"그건 아닐 걸세."
벨루스 백작이 고개를 젓고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난 그 영지가 괜한 일로 들쑤셔지는 걸 원치 않네. 그러니 이쯤에서 잊게나. 우선 철사자 기사단이 잃어버린 기간트부터 차근차근 구입하는 게 중요하지 않겠나?"
마틴 준남작은 더 이상 자신의 주장을 펼치지 못했다. 벨루스 백작의 말과 태도에 어린 단호함을 읽은 것이다. 이래서는 아무리 말을 해 봐야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정말 실망스럽군.'
위로 올라갈 방법이 눈에 확연히 보이는데도 그걸 그냥 놔 버리다니,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었다. 최소한 영주라면 결코 그래선 안 된다. 그것이 마틴 준남작의 생각이었다.
"알겠습니다. 백작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벨루스 백작이 환하게 웃으며 마틴 준남작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잘 생각했네."
마틴 준남작이 밖으로 나가자, 벨루스 백작은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 마틴 준남작의 집요함은 유명했다. 그의 고집을 꺾었으니 이제 당분간 그는 영지 일에 몰두할 것이다.
그 집요함은 영지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도 상당한 두각을 나타냈다. 벨루스 백작은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눈앞에 딸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백작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마틴 준남작은 곧장 성을 나섰다. 그리고 자신의 저택으로 향했다.
벨루스 백작을 주군으로 모신 지 벌써 15년이 넘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이 영지에 평생을 바치겠다고 마음먹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재산도 언제든 처분이 가능한 방식으로 축적했다. 그의 저택에는 비밀 공간이 있었고, 그 안에 최대한 값어치가 많이 나가는 물품을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
마틴 준남작은 비밀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커다란 가죽 배낭이 있었다. 배낭 안에는 적당한 크기의 금속 상자가 차곡차곡 채워져 있었다.
놀랍게도 상자는 모두 금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황금을 녹여 상자로 만든 것이다. 당연히 그 무게가 상당했다.
상자 안에는 각종 보석이 가득했다. 어떤 상자에는 테페룸괴가 채워져 있기도 했다.
이 배낭에 마틴 준남작이 가진 대부분의 재산이 들어 있는 것이다. 다만 저택은 좀 아까웠다. 시간을 들여서 처분하면 상당한 가격을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뭐, 미리 포기할 필요는 없지. 보아하니 날 철석같이 믿는 모양이니까."
하긴 믿지 않는다면 그런 임무를 맡겼을 리가 없었다. 마틴 준남작은 15년 동안 상당한 신뢰를 쌓았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신뢰를 배신하는 날이었다. 지금보다 훨씬 높은 곳을 향해 날아오르는 순간이기도 했다.
마틴 준남작은 일단 배낭을 멨다. 물론 그전에 그동안 모은 돈으로 준비한 기간트 장비를 착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것은 발굴형 기간트인 베르의 아공간 장비였다. 아무리 발굴형 중에서 가장 떨어지는 성능을 가지고 있다지만, 적어도 수십만 골드는 줘야 살 수 있는 것이 베르였다.
마틴 준남작은 15년 동안 벨루스 백작령에서 아무도 모르게 수많은 비리를 저질렀고, 그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럼 가 볼까?"
아마 벨루스 백작이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는다. 슈린 공작가에 자리를 잡은 자신을 어쩔 것인가.
마틴 준남작은 자신의 판단만으로 이렇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슈린 공작가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았다. 아주 오래전부터 은밀히 말이다.
조용히 저택을 빠져나간 마틴 준남작은 서두르지 않고 텔레포트 게이트로 향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게이트를 탄 마틴 준남작은 곧장 슈린 공작령에 도착했다. 모든 기록이 게이트 관리소에 남겠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슈린 공작령에 도착한 마틴 준남작은 바로 성으로 향했다. 현재 슈린 공작령을 다스리고 있는 사람은 공작가의 후계자인 파인트 폰 슈린이었다.
☆ ☆ ☆
"어서 오시오. 하하하하."
파인트는 군에 다녀오는 동안 한층 성장을 했다. 또한 마음 깊은 곳에 품은 음험함도 한층 더 깊어졌다.
마틴 준남작이 정중히 예를 취했다.
"이렇게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하. 오히려 내가 감사할 일 아니겠소? 마틴 경 같은 인재를 품게 되었으니 말이오. 하하하하."
마틴 준남작은 송구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살짝 조아렸다.
"제게 특별히 부탁까지 하셨는데, 그걸 제대로 이루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순간 파인트의 눈빛이 스산해졌다. 하지만 마틴 준남작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그것을 보지 못했다.
"어쩔 수 없다는 거 잘 알고 있소. 그러니 이만 고개를 드시오.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지 않겠소? 또한 벨루스 백작가보다는 우리가 훨씬 강력한 힘을 쓸 수 있으니 아마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거요."
"다시 한 번 사죄드립니다. 대신 제가 아주 좋은 정보 하나를 가져왔습니다."
"정보?"
파인트가 눈을 빛냈다. 자신이 부탁했던 일은 세나를 부인으로 맞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 것이었다. 한데 그걸 실패했으니 웬만한 정보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
당연히 마틴 준남작도 그걸 알고 있을 테니 파인트는 은근히 기대되었다.
또한 정보력은 슈린 공작가가 벨루스 백작가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러니 그저 그럴듯한 정보일 뿐이라면 마틴 준남작이 아예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건 극비 정보입니다. 아마 아는 사람이 벨루스 백작과 저, 그리고 그 일을 겪었던 철사자 기사단 외에는 없을 것입니다."
"호오. 극비 정보치고는 아는 사람이 좀 많은 것 같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일을 직접 겪은 자들이 워낙 많아서……."
마틴 준남작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정보에 대한 자신감이 워낙 대단했기에 언제 그런 표정을 지었냐는 듯 당당해졌다.
그 변화를 옆에서 지켜본 파인트의 눈에 기대감이 어렸다. 왠지 정말로 대단한 정보일 것 같았다.
"제 정보는 새로운 발굴형 기간트에 관한 것입니다."
"새로운 기간트?"
파인트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직 판단할 수는 없지만 상황에 따라 정말 엄청난 정보가 될 수도 있었다.
마틴 준남작은 자신과 철사자 기사단이 젤레 영지, 즉, 에어스트 백작령에서 겪은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리고 그 설명을 들은 파인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로 놀라운 일이었다. 무려 스무 기의 기간트를 장난감 가지고 놀듯 박살 냈다니 말이다. 그것도 혼자서 말이다.
"그게 정말이오?"
"확실합니다. 제가 직접 겪은 일입니다."
"한데 왜 벨루스 백작이 포기했소? 그 정도라면 영지를 완전히 뒤집어서라도 그걸 찾아내 가졌을 것 같은데."
마틴 준남작의 눈이 음험하게 빛났다.
"그 영지에 벨루스 백작의 딸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 적극적으로 찾지 않았습니다."
"그럼 찾긴 찾아봤단 말이로군?"
"아공간 아티팩트 하나를 가지고 영지 곳곳을 돌아다녔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그걸로는……."
파인트가 눈을 빛내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그 정도로 대단한 기간트를 감추고 있다면 고작 그 정도로 찾아낸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얼마나 철저히 감추고 다양한 방법을 통해 숨겼겠는가. 그런데 그렇게 어설프게 수색하다니.
'나 같으면 영지를 완전히 뒤집어 놨을 텐데.'
파인트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예전처럼 그냥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예전이야 아카데미에 있었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다. 이곳은 아카데미의 갇힌 세상이 아니라 피가 튀고 살점이 떨어지는 밖의 세상이다.
"아주 괜찮은 정보로군. 충분히 만족했소."
"감사합니다."
파인트의 눈이 번득이며 마틴 준남작에게로 향했다.
"하면, 이 일을 한번 마무리해 보시겠소?"
"마무리라 하심은……."
"영지전을 통해 그 영지를 흔드는 일이오."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그곳은 3년간 영지전을 선포할 수 없는 곳입니다."
"3년? 언제부터 3년이오?"
"그러니까 제론 폰 에어스트 백작이 부임한 뒤로 3년입니다."
파인트가 피식 웃었다.
"아직 제대로 조사를 하지 않은 모양이군. 얼마 전에 그 영지가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바뀐 것은 알고 있소?"
"물론입니다."
"그놈이 멍청한 짓을 한 거지. 국왕령으로 영지전이 금지된 서류에는 분명하게 젤레 영지라고 명시가 되어 있소."
마틴 준남작의 눈이 번득 빛났다. 만일 그렇다면 파고들 여지가 너무나 충분했다.
"하면 다른 모든 특혜가 사라진단 말입니까? 무려 4년 동안 전쟁에서 세운 공으로 얻은 특혜가 그렇게 쉽게 사라질 수 있다니 믿기가 어려워서 그렇습니다."
파인트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그저 파고들 여지가 있다는 뜻이오. 아마 다른 가문이라면 그런 힘을 발휘하기 어렵겠지만, 우리 슈린 공작가는 다른 가문과는 좀 다르지 않겠소?"
마틴 준남작의 얼굴이 희열로 물들었다. 그리고 즉시 고개를 숙였다.
"맡겨 주십시오! 결코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최신 정보에 따르면 그 영지의 전력이 결코 만만치 않다고 하니 각별히 주의하는 것이 좋을 거요."
"물론입니다. 최대한 자세히 조사한 뒤에 일을 벌이겠습니다."
"굳이 영지를 차지할 필요는 없소. 그저 흔들기만 하시오."
마틴 준남작의 눈에 의아함이 스쳤다. 그러자 파인트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영지전에서 최종적으로 에어스트 백작령이 승리를 해도 상관이 없다는 뜻이오. 주변에 영지가 세 개나 있지 않소?"
"그렇습니다."
"그 영지를 에어스트 백작령이 몽땅 병합한다고 생각해 보시오. 어떻게 되겠소?"
마틴 준남작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만일 그렇게 되면 에어스트 백작령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것이다. 병합한 영지까지 신경을 써야 하니 말이다. 더구나 미리 영지를 피폐하게 만들어 놓으면 훨씬 더 힘들어질 것이다.
전쟁으로 힘을 소진시키고, 또 무거운 짐을 안겨서 내정을 힘들게 만들면 반드시 혼란이 일어난다.
그 순간을 절묘하게 노리면 얼마든지 원하는 걸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마틴 준남작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파인트를 바라봤다.
'어수룩한 귀족가의 망나니라고만 여겼는데, 이거 좀 더 지켜봐야겠어. 만만치 않아.'
파인트는 그런 마틴 준남작을 보며 씨익 웃었다. 마치 그의 혼란을 즐기기라도 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