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5/217)

Chapter 10 배후 캐기

제론은 유적에 도착한 즉시 12층으로 향했다. 일단 11층에서의 수련 덕분에 테오스에 확실히 적응할 수 있었다. 또한 마티를 얻었다.

그렇기에 제론은 12층에서의 수련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했다.

―테오스를 소환하십시오.

제론은 안내에 따라 테오스를 소환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테오스에 탑승한 제론은 일단 마티를 불러들였다. 몽땅 부르는 건 불가능했고, 이 공간을 확실히 장악할 수 있을 정도의 수를 불러들였다.

마티는 바늘구멍만 한 통로를 타고 이 안으로 스며들어 왔다.

수많은 화면이 허공에 떠올랐다.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엄청난 수의 구슬이 테오스를 향해 쏘아졌다.

콰과과과광!

제론은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족히 수백 발은 되는 검은 구슬이 테오스의 몸에 작렬했다. 테오스는 멀쩡했다. 하지만 제론은 멀쩡하지 않았다.

"크으윽!"

바늘로 살을 푹푹 파고드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물론 몸이 상한 건 아니었다. 그저 아프기만 했다.

제론은 그 속에서도 정신을 바짝 차렸다. 고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또 날아올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수백 개의 검은 구슬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제론은 일단 테오스를 움직여 손으로 구슬을 쳐 냈다.

"크으윽!"

정말로 아팠다. 다 쳐 내지도 못했을뿐더러 손으로 쳐 내니 손에 집중적으로 많은 구슬이 부딪혔다. 마치 손이 마비되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대체 뭘 어쩌라는 거지?'

남은 건 검이었다. 제론은 재빨리 검을 뽑았다. 구슬이 또 쏟아졌다.

"젠장!"

검을 미친 듯이 휘둘렀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검이 사방을 장악했다. 하지만 검은 구슬은 그보다 훨씬 빨랐다. 게다가 사각을 파고드는 것이 워낙 많아 거의 막아 내지 못했다.

"크윽!"

몇 번이나 반복해 같은 고통을 느끼는데도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아니, 구슬을 맞으면 맞을수록 더 통증이 심해졌다.

제론은 그 뒤로 2시간을 더 버텼다. 하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검은 구슬은 심지어 직선으로 날아오지도 않았다. 구슬의 궤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검으로 막아 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제론은 온몸을 바늘로 푹푹 찌르는 고통을 얻은 채 유적에서 나왔다.

그 고통은 유적에서 나온 이후 2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간신히 사라졌다.

"알 수가 없군."

제론은 고개를 저었다. 어느 하나 만만한 게 없었다. 유적은 유적대로 고생이었고, 배후를 캐는 것도 진척이 거의 없었다.

사실 이쯤 되었으면 운글릭의 배후인 사내가 뭔가 행동을 취해야만 했다. 한데 그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심지어는 아직 그의 이름조차 알 수 없었다.

"혹시 아직 실패한 걸 모르는 거 아냐?"

제론은 그런 생각까지 했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상황을 속속들이 파악하고서 계획을 세운 사람이 그런 정보 하나 얻지 못했을 리 없었다.

어쩌면 그도 당황하고 있을지 모른다.

제론은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운글릭을 직접 만나 볼 생각이었다. 그 수행원도 함께 말이다. 나머지 병사와 기사는 사실 만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으니까.

지금까지 제론이 알아낸 것은 병사와 기사의 주인이 바로 그 사내라는 점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들조차 사내의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제론은 내성에서 나가 성벽에 바로 붙어서 지어진 커다란 탑으로 향했다. 그 탑은 평소에 병사와 기사가 머무는 막사였다. 또한 지하에 감옥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항상 병사와 기사가 있으니 따로 병력을 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감옥을 지키게 되어 있는 구조였다.

제론은 지하 감옥으로 들어갔다. 만나는 병사와 기사마다 인사를 했지만 그것을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곧장 운글릭이 갇힌 곳으로 갔다.

운글릭은 초췌한 얼굴로 감옥에 앉아 있었다. 또한 그의 수행원은 바로 옆방에 있었다.

나머지 병사와 기사는 더 아래층에 가둬 두었다. 기사는 바로 아래층에 그리고 병사는 그 아래층에 가뒀다. 물론 이 감옥에도 각종 마법이 사용되었기에 그들이 빠져나갈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운글릭은 멍하니 앉아 있다가 감옥으로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확인했다. 그리고 눈을 부릅떴다. 믿을 수 없었다.

"대, 대체 어떻게……!"

운글릭만 놀란 게 아니었다. 그의 수행원은 그보다 더 놀랐다. 그는 운글릭이 쓴 독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 독에 당하고도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왜? 내가 살아 있어서 놀랐나?"

두 사람은 너무 놀라서 대답도 못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애초에 독에 당하지도 않았지. 누가 내 뒤통수를 치려는지 알고 싶어서 당한 척했을 뿐이야."

제론의 담담한 말에 운글릭이 처참한 얼굴로 고개를 푹 떨궜다. 하지만 이내 독 오른 눈으로 고개를 쳐들고 제론을 노려봤다.

"고작 그것 때문에 날 농락했단 말이냐!"

"고작이라고 하긴 좀 그렇지 않나? 날 죽이려 했잖아? 내 영지를 꿀꺽하려고 말이야."

제론의 말에 운글릭이 흠칫 놀라며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의 앞에 서류 몇 장이 휘날렸다. 제론이 품에서 꺼내 던진 것이다. 그것은 운글릭이 수도 행정청에 신청한 서류들이었다.

"서류까지 치밀하게 준비했더군. 덕분에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어. 그 부분, 고맙게 생각한다. 앞으로 좀 더 조심하려고."

제론의 담담한 말에 수행원이 이를 부득 갈았다. 이번 일로 인해 에어스트 영지를 공략할 방법 하나가 완전히 사라지게 생겼다.

"슬슬 배후를 부는 게 어때? 슈린 공작가가 배후에 있는 건 확실한데, 그 연결 고리를 아직 못 찾았거든."

확신에 찬 제론의 말에 수행원이 깜짝 놀랐다. 설마 거기까지 조사를 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중간 연결책이 드러나지 않았다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리고 제론은 수행원의 반응에서 확신을 얻었다. 이 일의 배후에는 슈린 공작가가 있었다. 즉, 슈린 공작가를 처단하면 다시 이런 일을 겪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난 아무것도 모른다. 그냥 죽여라."

수행원의 단호한 말에 운글릭이 깜짝 놀랐다. 그는 이렇게 죽을 생각이 없었다. 살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살고 싶었다.

"주, 죽이지 마십시오! 그 중간은 제가 압니다!"

"그래?"

제론이 눈을 빛내며 운글릭을 쳐다봤다. 하지만 운글릭을 보는 척하면서 대부분의 신경은 수행원 쪽에 두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나 눈빛이 어떻게 변하는지 확인해 운글릭이 제대로 된 정보를 토해 내는지 알아내기 위함이었다.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수행원은 마치 말할 테면 말해 보라는 듯 담담했다.

그것을 본 제론은 운글릭에게 쓸 만한 정보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수행원뿐이었다.

하지만 수행원으로부터 정보를 뽑아내는 건 쉽지 않아 보였다. 또한 운글릭의 배후에 있던 사내 외에는 모를 확률이 높았다.

'어찌 그렇게 철저할 수가 있는 건지…….'

그 사내는 정말로 철저했다. 모르는 사람이 계속 주변에서 살폈다면 사내의 뒤에 누구도 없었을 거라고 믿었을 것이다.

제론도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럼 대체 어떻게 지령을 받는단 말인가.

'시간이 더 필요해.'

어쩌면 아직 제론이 감시한 이후로 한 번도 지령을 받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한 가지 임무가 끝나기 전에는 결코 지령을 주지 않는 방침을 고수하는 것이다.

제론은 냉정히 돌아섰다. 얻을 것도 없고 해악만 되는 자들이다. 이런 자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것은 비참한 죽음이었다.

운글릭은 제론의 태도에서 뭔가를 느꼈는지 창살을 붙잡고 소리쳤다.

"살려 줘! 살려 달라고! 뭐든 다 말한다니까! 살려 줘!"

제론은 운글릭의 외침을 뒤로하고 지하 감옥에서 나갔다. 앞으로 저들을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 ☆ ☆

화려한 방에 한 명의 사내가 커다란 침대에 앉아 있었다. 나른한 표정으로 비스듬히 앉아서 문을 바라봤는데,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아름다운 여인 세 명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막대한 돈을 받고 여기까지 왔다. 여기서 벌어지는 일을 무조건 함구하기로 하고 온 여인들이었다.

사내는 손가락을 까딱여 여인들을 불렀다. 표정은 여전히 나른했지만 눈에 욕망이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다.

여인들은 받은 돈이 있기에 사내의 욕망에 충실히 반응해 주었다. 어차피 몸을 팔아 살아가고 있었다. 그저 입을 다무는 조건이 하나 붙었을 뿐이었다.

옷자락이 하나하나 떨어져 나갔고, 이내 사내의 품에 안겼다.

사내는 세 여인을 마음껏 농락했다. 2시간이 넘게 방 안이 열락과 교성으로 가득 찼다.

세 여인이 결국 소파에 축 늘어졌다. 사내는 그러고도 힘이 남았는지 세 여인의 온몸 구석구석을 쓰다듬고 괴롭혔다.

잠시 후, 또 한 번 뜨거운 바람이 몰아쳤다.

세 여인은 결국 비틀거리며 나갔다. 세 시간 동안이나 괴롭힘을 당해 제대로 서 있는 것도 힘들 지경이었다. 사내 역시 힘을 다 써 버렸는지 침대에 누워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잠들어 버렸다.

사내의 방에서 나온 세 여인은 다시 거처로 돌아갔다. 그녀들에게 남은 것은 여전히 같은 삶이었다. 계속해서 새로운 사내가 찾아왔고, 그때마다 같은 일을 반복했다.

그녀들은 꿈에도 모를 것이다. 자신이 무슨 일을 했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

또 그녀들의 몸을 거쳐 간 사내 중에 결코 평범치 않은 사람이 섞여 있다는 사실도 말이다.

깁스 남작은 눈살을 찌푸린 채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주로 하는 행동이었다.

"꼬이는군."

일의 진행 상황을 봤을 때, 분명히 어딘가에서 정보가 샜다. 그게 아니라면 제론 폰 에어스트 백작이 그런 식으로 행동할 리가 없었다.

일단 새로운 명령을 내리긴 했다. 깁스 남작이 수하에게 지령을 내리는 방식은 결코 들킬 리가 없었다. 그러니 지령 이후에 정보가 샜다고 보는 것이 옳다.

깁스 남작의 지령은 몇 단계에 걸쳐서 전달된다. 그중 가장 마지막 단계가 바로 창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수하에게 지령과 함께 쾌락을 내리는 방식이었기에 다들 그것을 기대하곤 했다.

깁스 남작의 지령을 몸에 새기고 수하를 찾아가는 여인은 아주 특별한 능력을 가지게 된다. 깁스 남작이 가진 능력이기도 했다. 상대에게 최상의 쾌락을 온몸으로 제공한다.

그 맛을 한 번 보면 결코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 또한 그 여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온갖 방법으로 사내를 만족시킨다. 사내가 원하는 건 뭐든 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불합리한 명령이라도 말이다.

어쨌든 이번에도 그런 방식으로 지령을 전달했다. 이번에는 몇 군데를 동시에 움직였다. 어떤 식으로 정보가 새 나갔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만일 이번에도 정보가 새 나갔는데, 그것을 밝혀내지 못한다면 한동안 수하를 움직이는 일은 중지해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깁스 남작은 미련 없이 에어스트 백작에게서 손을 떼기로 작정했다.

"이래서야 보고할 말이 없는데……."

슈린 공작을 달래는 일이 가장 문제였다. 지금까지 깁스 남작은 슈린 공작의 총애를 받아 왔다. 단 한 번도 그를 실망시킨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최근 제론에 관한 일을 실패하긴 했지만, 그건 깁스 남작이 잘못했다기보다는 제론의 악운이 강했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한데 이번에 또 제론에 관한 일을 실패한다면 슈린 공작의 신임이 한 걸음 멀어지게 될 건 자명했다.

안 그래도 최근 슈린 공작 주변에 능력 있는 귀족이 대거 등장해서 어필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시기가 별로 좋지 않았다.

"어쨌든 차분히 지켜보는 수밖에."

깁스 남작은 계속해서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며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가 내린 지령으로 인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기다리면서 말이다.

"그래도 추궁하지는 않으셔서 다행이군. 뭐, 이번 지령을 수행하다 보면 어차피 죽으니 굳이 그럴 필요를 못 느끼셨나?"

사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 어차피 이름도 가지지 못한 삶이었다. 그런 그를 여기까지 키워 주고 행세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사람이 바로 깁스 남작이었다.

그러니 이제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었다.

"그나저나 타격이 정말로 크군."

사내에게 주어진 병력 대부분을 소진했다. 거기에 기간트까지 하면 그 손해가 얼마인지 계산하기도 벅찰 정도였다.

"푸른 매 기사단을 잃어버린 게 제일 문제야."

푸른 매 기사단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했다. 그에게 허락된 힘 중 가장 큰 것이 바로 푸른 매 기사단이었다. 비록 한 개 조에 불과했지만 모두 임베르를 타기에 그 힘이 어마어마했다.

푸른 매 기사단이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뭔가를 만나서 싸웠다는 정황만 어렴풋이 파악했다. 그나마도 에어스트 백작령에 있던 정보원이 기간트 소리를 들었기에 짐작할 뿐이지, 어쩌면 사실과 다를지도 모른다.

그래서 답답했다. 어떻게 당했는지 알면 대비를 할 것이고, 또 깁스 남작에게 보고할 정보가 생기는데, 그걸 할 수 없으니 짜증이 났다.

깁스 남작은 그동안 자신에게 어마어마한 돈을 썼다. 그래서 죄송스런 마음이 컸다. 물론 그동안 자신이 해 왔던 일로 인해 깁스 남작이 얻은 이익은 이번의 실패보다 훨씬 대단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사내는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든 이번 지령은 성공하고 말 것이다. 어차피 이번에 깁스 남작과의 관계가 끊어질 것이다. 도마뱀 꼬리를 싹둑 잘라 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 정보원을 움직여 볼까?"

사내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맺혔다.

☆ ☆ ☆

태블릿을 통해 사내를 지켜보던 제론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게 뭐지? 대체 언제 어떻게 지령을 받은 거야?"

제론은 태블릿을 조작해 과거를 되짚었다. 의심 가는 상황이 거의 없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모든 상황이 다 의심스러웠다.

일단 사내가 만난 모든 사람에게 마티를 붙이긴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걸 살펴봐도 지령을 주고받은 상황은 찾을 수 없었다.

제론은 감탄했다. 이렇게 옆에서 지켜봐도 모를 만한 방법으로 지령을 내렸으니 이 사내에서 정보가 꽉 막힌 것도 이해가 갈 법했다.

"일단 이 여자들이 제일 의심스럽긴 한데……."

사내와 몸을 섞었던 세 여자가 가장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그녀들 역시 마티를 붙이고 있었고, 별다른 특이한 일은 벌이지 않았다. 즉, 아무런 관계가 없는 여자일 확률이 높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지령을 주고받았단 말인가.

제론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역시 정보를 다루는 조직이 필요했다. 절실하게.

"어쨌든 이놈이 뭔가 일을 벌이려는 모양이긴 하군. 그럼 사전에 막아 줘야지."

어차피 사내는 가만둘 생각이 없었다. 일단 이 윗선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결국은 슈린 공작가로 이어질 것이다.

"슈린 공작가만 무너뜨리면 모든 게 다 끝나."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내는 정보원을 움직인다고 했다. 그렇다면 에어스트 백작령 내에 있는 정보원이 움직여 혼란을 조장할 가능성이 제일 높았다.

그걸 막으려면 사내가 정보원을 움직이기 전에 막으면 된다. 그리고 제론은 그렇게 할 자신이 있었다.

제론은 곧장 유적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수도 유적으로 단숨에 이동했다. 그곳에서는 폴타를 이용해 사내가 홀로 머무는 저택 한구석에 게이트를 연결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환한 대낮이었기에 게이트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다. 물론 게이트를 만든 자리 자체가 인적이 없는 곳이기도 했다.

제론이 게이트를 통해 나오자, 게이트가 즉시 사라졌다.

빠르게 그림자로 숨어든 제론은 주위를 둘러본 뒤 다른 그림자로 순식간에 이동했다. 그런 식으로 그림자를 이용해 저택에 접근한 다음, 사내가 있는 방의 위치를 확인하고는 훌쩍 뛰어올랐다.

저택에는 경비병이 잔뜩 있었지만 누구도 제론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곳은 예전 유적처럼 무지막지하게 인원을 배치하지 않았고,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모든 곳에 시야를 두기에는 저택이 너무 컸다.

창에 착 달라붙은 제론은 조용히 창문을 열었다. 잠겨 있었지만, 손가락 하나를 까딱하는 것만으로 간단히 잠긴 걸 풀었다. 마법의 힘이었다.

창으로 스며든 제론은 다시 창문을 닫고 몸을 낮췄다. 제론의 움직임은 지극히 빠르고 은밀했다. 그리고 감각이 활성화되어 근처에서 움직이는 모든 사람을 체크하고 있었다.

제론이 있는 곳은 집무실이었다. 아직 아무도 없었지만 곧 그 사내가 이리로 올 것이다. 정보원에게 지령을 내리려면 준비를 해야 할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누군가 방으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제론은 일단 몸을 숨겼다.

철컥.

문의 잠금장치가 풀렸다. 그리고 벌컥 열렸다. 사내는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왔다. 물론 문을 다시 닫는 건 잊지 않았다. 잠그지는 않았지만.

제론은 빠르게 움직여 일단 문을 잠갔다.

철컥!

잠금장치가 움직이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울렸다. 사내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봤다. 그리고 제론을 발견하고는 눈을 커다랗게 치켜떴다.

"어, 어떻게……!"

"그게 정보원에게 보내는 암호인가?"

제론은 사내의 손에 들린 종이를 보고는 말했다. 사내는 어떤 대응도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저 머리만 팽팽 돌아갔다.

사내의 무력은 그리 대단치 않았다. 하지만 알려진 제론의 힘은 엄청났다.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어차피 죽을 각오를 했으니까.'

어차피 모든 정보원과 함께 죽으려 했다. 깁스 남작으로 이어진 꼬리를 자르고, 에어스트 백작령에 피해를 강요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지금 곧장 정보원에게 지령을 보내면 모든 상황이 종료된다. 문제는 그럴 시간이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사내는 정보원에게 정보를 보내는 아티팩트를 들키지 않으려고 그쪽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작은 항아리였는데, 그 안에 지령을 적은 쪽지를 넣고 작동시키면 곧장 정보원이 그 쪽지를 받아 볼 수 있었다. 어마어마한 고가의 아티팩트였다.

넣고 작동하는 건 하도 많이 했던 거라 자신 있었다. 문제는 항아리까지 가려면 일단 한 발을 걸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사내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기회를 봐서 항아리 쪽으로 움직이려 했다.

제론이 그것을 보며 피식 웃었다.

"어설프군."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제론의 몸이 사내 옆에 나타났다. 거의 순간이동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빨랐다. 사내는 제론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난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헉!"

사내가 놀라는 틈에 제론이 항아리를 들었다.

"이게 지정된 장소에 지령을 보내는 아티팩트지? 한 쌍으로 이루어진 건가?"

제론이 아티팩트를 바로 알아본 건 항아리 표면을 타고 흐르는 마나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 쌍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안 것은 마티를 이용해 영지 내를 살피다가 똑같이 생긴 항아리를 봤기 때문이었다.

"자, 여기까지다."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항아리를 들지 않은 다른 손을 들어 올렸다. 거기에는 방금 전 지령이 담긴 쪽지가 있었다.

사내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쪽지를 들고 있던 자신의 손과 제론의 손에 들린 쪽지를 번갈아 바라봤다.

"내가 이걸 어떻게 할 것 같아?"

사내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만일 제론이 저 항아리를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들고 간 다음 지령이 담긴 쪽지를 넣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정보원이 지령대로 움직일 것이다. 제론은 그 정보원을 뒤따르는 것만으로 영지 내의 모든 정보원을 일망타진할 수 있다.

"자, 이제 남은 건 네 뒤에 누가 있느냐인데……."

제론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사내의 입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그리고 눈을 까뒤집었다.

쿠웅!

사내가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제론은 그 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사내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뭔가 특별히 목숨을 끊는 방법이 있는 모양이었다.

"지독하군."

보통 놈들이 아니었다. 이들의 뒤에 슈린 공작이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얼마나 대단한 자를 향해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지 다시 한 번 상기했다.

제론은 사내가 진짜 죽었는지 확인한 다음 항아리와 쪽지를 들고 조용히 창을 열었다. 그리고 심장의 마나링을 가속시켰다.

화르륵!

방 안 구석구석에 불이 붙었다. 불길은 이내 점점 커지며 방 안의 모든 걸 날름날름 삼키기 시작했다.

제론은 그 불길을 뒤로하고 창에서 뛰어내렸다.

이내 저택이 불길에 휩싸였다. 사방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고, 수많은 사람들이 물통을 들고 정신없이 움직였다.

그사이 한 명이 물건 하나를 들고 저택을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론의 집무실, 오랜만에 주요 인물이 모였다. 다들 표정이 심각했는데, 제론만 담담했다.

"영지에 그렇게 많은 세작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바이스가 자책하듯 말했다. 사실 이번에 제론이 가져온 항아리를 이용해 정보원을 색출하지 않았다면, 그들에 대해서는 끝까지 몰랐을 것이다.

"아니야. 그놈들 정말 대단한 놈들이야. 그래서 말인데 우리도 슬슬 정보 조직을 키워야 하지 않을까?"

"좋은 생각입니다."

바이스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즉시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영지에서 활동하는 세작을 파악하고 감시하고 제거하는 일에 한계를 느낀 지 오래였다.

이젠 그 일에서 슬슬 벗어나고 싶었다. 그거 말고도 할 일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현재 영지는 비교적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제론이 얼마 전 수도에서 데려온 인재는 하나같이 뛰어났다. 제론이 마티를 이용해 믿을 수 있고, 실력 있는 사람을 엄선해서 영입했으니 당연했다.

이것이 바로 정보의 힘이었다.

바이스는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이 나타나면 총관 자리를 물려주고 자신은 마탑에 틀어박힐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게 자꾸 미뤄지고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영지를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총관이라는 자리에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좋아. 그건 그렇게 하기로 하고, 라이트닝 기사단은 요즘 어때?"

"사기충천입니다. 지난 전투가 자극이 되어 다들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베샤이덴과 슈빅은?"

카이트는 두 사람의 이름을 듣자마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엄청납니다. 영주님, 대체 그런 자들을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재능이 제법이지?"

"제법인 정도가 아닙니다. 100년에 한 명 날까 말까 한 천재입니다."

제론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줄 알고 데려왔다. 또한 충성심도 깊은 자들이었다. 충분히 30만 골드를 투자할 가치가 있는 인재였다.

"잘 키워 봐. 새로 만들 기사단의 단장이 될 사람들이니까."

제론의 말에 카이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감탄했다. 정말 스케일이 엄청난 주군 아닌가.

"다음, 세나. 새로 준 기간트는 어때?"

세나의 눈에는 다크서클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최근 거의 쉬지 못하고 일만 했기에 피로가 너무 많이 쌓였다.

"훌륭해요. 크란 제국의 기간트를 살펴볼 기회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어요."

세나의 말에 제론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마. 얼굴이 많이 안 좋네. 오늘은 다른 생각 말고 푹 쉬어."

"예? 하지만 아직……."

"명령이야."

세나가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예."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바이스와 카이트가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저희는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정보 조직을 만들려면 준비할 것이 많아서……."

"저도 훈련이 남아서……."

두 사람이 후다닥 물러가자, 제론은 한 번 피식 웃고는 세나에게 다가갔다. 세나가 흠칫 놀랐지만 제론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살며시 안아 주었다.

세나는 제론의 품에 안겨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이내 살며시 눈을 감았다. 말도 못하게 편안하고 행복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제론이 마법을 이용해 재운 것이다.

제론은 세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초췌한 모습으로 잠든 세나의 모습이 제론에게는 그 어떤 여인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한 번 씨익 미소를 지은 제론은 그녀를 데리고 집무실 옆에 딸린 자신의 침실로 향했다. 그리고 침대에 그녀를 조심스럽게 눕혔다.

제론은 침대에 걸터앉아 잠든 세나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시간이 끊임없이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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