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화 (44/217)

Chapter 9 도발

"이게 무슨 짓입니까!"

바이스의 외침에 운글릭이 빙긋 웃었다.

"제가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영주님께서는 아직 돌아가신 게 아닙니다."

"하지만 의식이 없으시죠."

운글릭은 능글능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도 바이스에게는 함부로 하지 못했다. 바이스가 말레피 가문의 사람이라는 걸 알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대단한 가문의 사람이 여기에 있다는 건, 이 영지의 가치가 그만큼 높다는 뜻이 분명했기에 오히려 즐거웠다.

"저도 엄연히 영주님께서 데려온 사람입니다. 왜 데려오셨을지는 명백하지 않습니까?"

바이스가 대답하지 않자, 운글릭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영주님의 유일한 친척입니다. 뭔가 영지의 중요한 일을 맡기려고 부르신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요?"

"당연히 총관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이스 님은 이제 슬슬 본연의 자리에 앉아야 하고 말입니다."

바이스는 명목상 영지의 수석 마법사였다. 또한 마탑주이기도 했다. 총관은 대체할 인재가 오면 즉시 인수인계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결코 운글릭에게 그 자리를 넘길 수는 없었다. 그 순간 모든 게 끝장일 테니까.

"영주님의 인가가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알고 돌아가십시오."

운글릭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입니다. 그러니 생각과 처신에 신경을 좀 쓰시는 게 어떻습니까?"

바이스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운글릭은 차갑게 웃으며 돌아섰다.

"이후 벌어지는 모든 일은 바이스 님의 책임입니다."

운글릭이 밖으로 나가자, 바이스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진짜 재수 없는 놈이로군."

앞으로 운글릭이 무슨 짓을 할지는 너무나 뻔했다. 바이스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스무 명의 기사와 천 명의 병사라…… 과연 몸값으로 얼마나 받아야 할까?"

그들은 운글릭을 움직인 사내가 제공한 병력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 누가 있는지는 아직 모른다. 그저 그 뒤에 있는 누군가의 자금으로 만들어진 병력이라는 것만 확실했다.

"카이트 경이라면 잘하겠지."

바이스는 카이트의 실력을 믿었다. 카이트는 체른산 방어군에서도 손꼽히는 실력을 가진 라이더였다. 그런데다가 익스퍼트이기까지 했다.

최근 제론으로부터 라이트닝 소드를 배운 뒤 어마어마하게 강해졌고, 기간트 실력도 한발 더 나아갔다.

어쩌면 운글릭의 기사 스무 명이 몽땅 덤벼도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카이트의 기간트는 아우틈이었다. 발굴형 기간트 중 최강이라는 히엠스 다음가는 기체였다.

무려 3.3의 출력을 자랑하는 기간트를 카이트가 모는 것이다. 그 어떤 기간트가 덤벼도 처참히 밟힐 게 분명했다.

"자, 그럼 난 슬슬 다음 준비를 해 볼까?"

아직 할 일이 많았다. 언제까지 운글릭에 대한 일에만 매달릴 수는 없었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발전은 아직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았다.

바이스의 눈이 빛났다. 조만간 마탑에 틀어박혀 진짜 마법사가 되겠지만, 그전까지는 총관 일에 충실해야만 한다. 또 그 일에 대단한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다가 마탑을 포기하고 총관이 되는 건 아닌지 몰라.'

바이스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었다. 물론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가 봐야 안다.

"일단 기사단부터 정리를 해야겠어."

운글릭의 말에 수행원이 옆에서 고개를 숙였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만일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쪽으로 살살 유도할 생각이었는데, 알아서 그렇게 해 주니 일이 줄었다.

"그다음 행정을 장악하시면 아주 완벽합니다."

군사와 행정을 장악하면 영지를 장악한 것과 다름없었다. 만일 그 일이 성공하면 당장이라도 영주인 제론을 죽여도 된다.

아무도 반발하지 못할 테니까 말이다.

어차피 이 영지를 크게 키우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이곳은 그저 식량 창고였다. 광활하게 펼쳐진 토지로부터 나오는 막대한 농작물은 거대한 힘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다른 일에는 아예 신경도 쓰지 않을 작정이었다. 영지의 노동력을 쥐어짜서 농사에 투입시키기만 하면 끝이다.

그렇기에 어떤 사람이 영주라도 상관없었다. 그저 이용할 수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어떻게 시비를 걸지 생각해 봐."

"어려울 거 없습니다. 그저 트집만 잡으시면 됩니다. 어차피 이 영지의 차기 영주가 되실 분 아니십니까. 정당한 지적을 하신다고 여기시면 됩니다."

"그거 편하군."

운글릭의 입가가 기분 좋게 말려 올라갔다. 기사단에게 호령하는 것은 꼭 한 번쯤 해 보고 싶었던 일이었다.

"당장 시작하지. 뜸 들여서 뭐해?"

"화통하시군요."

수행원은 끊임없이 운글릭을 치켜세웠다. 운글릭은 콧대를 세우고는 당당하게 기사단의 훈련장으로 향했다.

훈련장은 두 군데가 있었는데, 하나는 기간트 훈련장이었고, 다른 하나는 검술 훈련장이었다. 하지만 두 군데 모두 기간트를 풀어서 자유롭게 훈련할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운글릭이 도착한 곳은 검술 훈련장이었다.

최근 카이트는 베샤이덴과 슈빅을 훈련시키는 데 푹 빠져 있었다. 그들은 마치 솜이 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가르침을 몸에 새겼다.

처음 카이트가 예상했던 시간이 1년이었다. 하지만 요즘 실력이 늘어나는 추세를 보면 6개월로도 충분할 것 같았다.

그러니 카이트가 푹 빠져 지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머지 기사도 카이트의 심정을 이해하기에 그런가 보다 했다. 그들은 그것보다 새로 익힌 검술을 몸에 새기는 게 훨씬 즐거웠다.

라이트닝 소드는 정말로 엄청난 검술이었다. 그들은 수련을 할 때마다 이런 고급 검술을 아낌없이 전수해 준 제론과 카이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리고 그 마음은 고스란히 충성심으로 전환되어 차곡차곡 쌓였다.

그렇게 다들 구슬땀을 흘리며 검을 휘두르고 있을 때, 운글릭이 스무 명의 기사를 몽땅 이끌고 훈련장에 도착했다.

"호오. 다들 열심이로군."

"없는 실력을 키우려면 먹고 자는 시간도 아깝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하하하! 그 말이 옳다!"

운글릭과 수행원의 대화가 워낙 컸는지라 수련하는 라이트닝 기사단의 귀에도 똑똑히 들렸다.

일부 기사가 수련을 멈추고 운글릭이 있는 쪽을 노려봤다. 하지만 도발에 말려들지는 않았다. 그들은 모두 카이트의 인맥을 통해서 왔다. 즉, 기사라기보다는 군인에 더 가까웠다.

레늄 왕국은 상당히 오랫동안 전쟁을 했다. 그렇기에 군부에서 잔뼈가 굵은 라이트닝 기사단은 다양한 경험을 많이 쌓았다.

이런 어설픈 도발에 넘어갈 리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도발이라는 걸 알아도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는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걸 모르는군. 오늘부터 내가 데려온 기사와 합동 훈련을 할 테니 그리 알도록."

운글릭이 앞으로 몇 발 다가오며 말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말은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라이트닝 기사단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기사가 나서서 말했다.

"거절하겠소."

"뭣이? 지금 내 명령에 따르지 못하겠다는 말인가?"

"당신 명령을 들을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우리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분은 오직 영주님뿐이오."

운글릭이 피식 웃었다.

"영주님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몰라서 그러나? 그럼 영주님이 다시 일어나시기 전까지는 그저 이렇게 시간만 죽이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작정인가?"

운글릭은 비웃음을 담아 라이트닝 기사단을 쭉 둘러봤다. 몸에 걸친 장비를 보니 기간트도 없어 보였다. 훈련장을 아무리 둘러봐도 기간트 장비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훈련장은 넓은데 쓸 일이 없겠군. 이 정도 훈련장이라면 기간트 훈련도 너끈히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운글릭이 아쉬운 듯 말했다. 하지만 표정에 드러난 것은 아쉬움이 아니라 비웃음이었다.

"어떤가? 내 기사들이 곧 기간트 훈련을 할 텐데 지켜보겠나?"

앞으로 나선 기사가 그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것도 거절하오. 이곳 훈련장을 쓰고 싶으면 사용 허가서를 받아 오시오. 그전에는 어떤 공간도 내줄 수 없소."

기사의 강경한 태도에도 운글릭은 오히려 기쁜 듯이 웃었다. 싸울 명분이 차근차근 만들어지고 있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내가 누군지 못 들었나? 엄밀히 따지면 나에게도 이 성에 대한 권리가 있어."

"그건 영주님께서 결정하실 일이오."

"영주님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왕국법이 결정하는 거지. 내게도 영지의 상속권이 있다네. 법에 명시되어 있지."

기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왕국법이 그렇게 되어 있다는데 뭐라고 한단 말인가.

만일 조금만 그에 대한 상식이 있었다면 상속권은 영주가 죽은 이후에 적용되는 거라고 맞섰겠지만, 군부 출신 기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기사가 한발 물러났다. 더 이상 운글릭을 막을 명분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운글릭은 그것을 보며 득의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일제히 기간트를 꺼내 기사들을 압박하면 된다. 그리고 더 도발하고 더 명령할 것이다. 그렇게 기사의 반감을 끌어내 덤벼들도록 만드는 것이 운글릭이 노리는 바였다.

하지만 운글릭의 계획은 채 시작되기도 전에 삐끗했다. 기사가 물러나자마자 나선 어린 소년 때문이었다.

"상속권이 있다고 성에 대한 권리가 있는 건 아닐 텐데요?"

운글릭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리고 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봤다. 어리 티가 확 나는 소년이 서 있었다. 장비와 검을 보니 수련 기사나 종자쯤 되는 모양이었다.

"애들이 낄 자리가 아니다."

"왕국법을 얘기하는 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죠? 왕국법에 의하면 허락 없이 기사단의 훈련장에 들어오는 것은 금지되어 있어요."

"이미 허락을 받았다."

운글릭은 짜증이 났다. 일이 갑자기 꼬이는 기분이 들었다.

"영주님께서는 의식이 없으신데 어떻게 허락을 받았다는 거죠?"

소년의 당찬 말에 운글릭은 말문이 턱 막혔다. 소년의 말에는 한 치의 빈틈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운글릭이 잘못하고 있었으니 제대로 된 지식을 가진 자가 나서면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운글릭은 자신이 저런 꼬맹이에게 당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다.

"애들이 낄 자리가 아니라고 했다!"

운글릭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하지만 소년은 시종일관 당당했다. 그리고 그런 소년의 앞을 처음 나섰던 기사가 막아섰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사태를 막기 위함이었다. 기사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이제 대충 알았으니 돌아가시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침입으로 간주하겠소."

"침입?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것이냐?"

운글릭이 이를 갈았다. 그리고 슬쩍 수행원을 돌아봤다. 어떻게 해야 할지 의견을 묻는 것이다.

수행원은 속으로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었다. 고작 저런 꼬맹이에게 말로 밀려서 뭘 어쩌잔 말인가.

하지만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었다. 어쨌든 이 사태를 마무리해야만 한다. 감정이 격해진 상황이니 무력으로 해결해도 큰 문제가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이럴 때는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잘못이 되도록 만들면 안 된다. 조금이라도 쌍방의 실수가 인정되어야만 한다. 그게 아니라면 몽땅 죽여 버리거나 말이다.

'차라리 그게 편할지도 모르겠군.'

당장 기간트를 소환해 밀어 버리면 이곳의 기사를 싹 죽일 수 있을 것이다.

수행원의 눈이 음험하게 빛났다. 그는 운글릭에게 다가가 나직이 귓속말을 했다.

"다 죽여 버리십시오."

운글릭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리고 그것을 본 기사들이 낌새를 느끼고는 서둘러 훈련장 구석으로 달려갔다. 그곳에 그들의 기간트 장비가 있었다.

라이트닝 기사단의 기간트는 제론과 바이스에 의해 특별히 개조된 상태였다. 다른 기간트 장비와 달리 거대한 양손검이 아니라 비교적 가벼운 롱소드였다. 또한 다른 장비 역시 일반 기간트 장비에 비해 가볍고 작았다.

그래서 운글릭이나 그와 함께 온 기사들이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제압해!"

운글릭의 명령을 받은 즉시 그의 기사들이 기간트를 소환했다.

무릎을 굽힌 채 소환된 기간트의 조종석에 기사들이 올라탔다. 그리고 즉시 라이트닝 기사단을 쓸어버리려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뭐, 뭐야!"

무려 스물다섯 기의 기간트가 서 있었다. 그것도 전부 크라테르였다.

카타락타라면 모를까 크라테르는 비싼데다가 구하기도 어려웠다. 또한 무려 스물다섯 기나 되는 크라테르를 구입했다면 어떤 식으로든 정보가 흘러 다니기 마련이었다.

한데 그들은 그 어떤 정보도 받은 적이 없었다.

문제는 또 있었다. 분명히 자신들이 기간트를 먼저 소환했다. 한데 전투 준비는 라이트닝 기사단 쪽이 먼저 끝났다.

운글릭은 벌어진 입에서 침이 흘러나오는 줄도 모르고 멍하니 스물다섯 기의 크라테르를 바라봤다.

크라테르의 가슴에 팔찌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에어스트 가문의 문장이었다.

"마, 마, 말도 안 돼!"

운글릭 옆에 선 수행원이 경악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에어스트 가문에서 크라테르를 스물다섯 기나 구입했다면 자신이 모를 수가 없었다.

에어스트 백작에게 돈이 많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돈이 많아도 크라테르 스물다섯 기를 구입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운글릭과 수행원이 침을 꿀꺽 삼키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들이 데려온 기사는 절반이 카타락타였고, 절반이 크라테르였다.

질과 양 모두 밀리니 이길 확룰이 급격히 떨어졌다. 하지만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는 않았다. 그들이 데려온 기사는 전부 뛰어난 실력을 가진 라이더였으니까.

라이트닝 기사단 측으로부터 크라테르 한 기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쿵! 쿵! 쿵!

"당장 기간트를 돌려보내고 이곳에서 나가시오! 조용히 영지를 떠나면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소!"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운글릭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황을 이끌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대로라면 저들을 다 죽이는 건 무리였다.

"어쩔 수 없습니다. 양동작전을 펼치셔야 합니다."

수행원이 옆에서 운글릭에게 말했다.

"양동작전?"

"훈련장 밖에 천 명의 병사가 대기 중입니다. 그들이 성을 점령하면 모든 상황이 끝납니다."

운글릭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 상황이 점점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그렇게 성을 점령하면 그 뒤로 뭘 어쩐단 말인가.

"최악의 상황이 오면 영주만 죽여도 됩니다. 어쨌든 운글릭 경은 합법적인 영주의 주인이 될 유일한 분 아닙니까."

수행원은 그렇게 만드는 데 슈린 공작가를 비롯한 수많은 귀족 가문이 힘을 보탤 거라는 말은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영주만 죽여도 어찌어찌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처음 계획보다는 이권이 많이 줄어들겠지만 말이다.

'그 광활한 농지가 없다면 모를까 일단 그 정도 식량을 확보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힘을 끌어낼 수 있지.'

수행원의 생각은 단순했다. 일단 운글릭을 영주로 만들 수 있는 상황을 꾸민 다음, 위에서 힘으로 눌러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었다.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였다. 과연 라이트닝 기사단을 이길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아니, 버텨서 시간을 벌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공격!"

운글릭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공격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스무 기의 기간트가 굉음을 내며 달려갔다.

키이이이이잉!

쿵쿵쿵쿵쿵!

라이트닝 기사단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들은 군부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 온 사이였다. 게다가 실전 경험도 엄청나게 풍부했다.

쿵쿵쿵쿵!

꽈앙!

양측이 충돌했다. 당연히 라이트닝 기사단이 우위를 점했다. 질과 양이 모두 뛰어나니 밀릴 이유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운글릭과 수행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시간이 없습니다!"

"병사에게 연락을 넣어!"

"이미 넣었습니다. 일단 자리를 피하시죠."

수행원은 마법 통신을 이용해 병사를 지휘하는 천인장에게 미리 연락을 넣었다. 성을 점령하라고 말이다.

그는 점령에 성공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에어스트 백작령에는 병사가 많지 않았다. 게다가 그나마 있는 병사도 영지의 치안을 위해 대부분 나가 있었다.

성에 머무는 병사의 수는 백 명도 채 안 되었다. 당연히 천 명의 병사를 당해 낼 수 없을 것이다. 수행원도 운글릭도 그렇게 믿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카이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라이트닝 소드를 익힌 이후로 감각이 훨씬 예민해졌다. 그의 청각에 뭔가가 울리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무슨 소리가 들리십니까?"

베샤이덴과 슈빅은 의아한 눈으로 카이트를 바라봤다. 그리고 한껏 굳은 카이트의 표정을 보고는 긴장감을 끌어 올렸다. 무슨 일이 터진 게 분명했다.

카이트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소리로 판단하건대 기간트 간의 전투가 벌어진 게 분명했다.

제론에게 들은 말이 있으니 어떤 상황인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운글릭이 데려온 기사와 라이트닝 기사단이 붙은 것이다.

갑자기 걱정이 좀 사라졌다.

"그럼 난 다른 쪽을 걱정해야겠군."

운글릭이 데려온 건 기사뿐이 아니었다. 천 명이나 되는 병사도 데려왔다. 그리고 지금 이 성안에서 그 병사를 막을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가자."

카이트의 갑작스런 말에도 베샤이덴과 슈빅은 전혀 의문을 표하지 않고 즉시 따라나섰다.

세 사람은 빠르게 내성 입구로 달려갔다. 가는 도중 천 명의 병사가 질서 정연하게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카이트는 다리에 마나를 흘리며 속도를 높였다.

쉬이익!

카이트는 바람처럼 빠르게 병사를 앞질러 내성 입구를 막고 섰다.

베샤이덴과 슈빅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대체 뭘 어쨌기에 저렇게 빠르단 말인가.

'라이트닝 소드의 힘인가!'

두 사람은 눈을 빛내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들의 속도도 더욱 빨라졌다. 하지만 병사를 쫓아갈 수는 없었다.

카이트가 두 사람을 향해 손짓을 했다. 멈추라는 뜻이었다. 베샤이덴과 슈빅은 대번에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둘은 그 자리에 멈춰서 병사의 뒤를 점했다.

어느새 천 명의 병사가 내성 입구에 도착했다. 그들은 카이트를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아무리 기사라 하더라도 천 명의 병사를 어찌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상황에 천 명의 발이 일제히 멈췄다.

키이이이잉!

쿵!

내성 입구에 기간트 한 기가 나타났다. 그리고 카이트가 순식간에 조종석에 올라탔다.

기간트가 나타나 가동 준비까지 눈 몇 번 깜박일 시간 만에 이루어졌다. 엄청난 실력을 가진 라이더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아우틈이었다. 일반 기간트가 막아도 작전이 불가능한데 발굴형 기간트가 막았으니 목적을 이루는 건 절대 불가능했다.

병사들이 상황을 포기하고 도주를 결심했을 때, 뒤에서도 같은 소리가 들렸다.

키이이이이잉!

쿵!

두 기의 기간트가 나타나 병사의 뒤를 막았다. 모든 병사의 얼굴에 일제히 절망이 어렸다.

세 기의 기간트를 상대로는 싸우는 것도 도망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잠시 후, 천 명의 병사가 일제히 무기를 버리고 손을 들었다.

☆ ☆ ☆

제론은 자신의 방에서 태블릿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태블릿에 떠오른 화면에 훈련장의 전투와 내성 입구의 상황이 동시에 떠올랐다.

태블릿은 수십 개의 화면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렇게 작은 화면인데도 세세한 상황이 다 보였다. 너무나 선명하게 말이다.

"일단 병사와 기사 쪽은 문제가 없고……."

사실 그쪽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제론은 그들이 이렇게 어설프게 일을 처리할 리 없다고 판단했다.

마티로부터 영지 곳곳의 영상이 전달되었다. 제론은 점점 그 범위를 넓히며 영지를 살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눈을 빛냈다.

"찾았다."

예전 운글릭과 사내의 대화를 통해 그들이 에어스트 영지에 대해 상당한 조사를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한데 그렇게 조사를 한 것치고는 보낸 병력이 적어 분명히 숨겨둔 뭔가가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영지에 도착하자마자 끊임없이 주위를 살폈다. 마티의 수가 엄청나게 많았기에 영지 내의 정보를 얻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제론은 외부적으로 의식을 잃은 걸로 되어 있기에 정보 수집에 충분한 시간을 쓸 수 있었다.

열 명이나 되는 기사가 영지에 들어와 있었다. 확실히 마티로 혼자서 정보를 다루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들락거리는 모든 사람을 확인할 수도 없고, 또 영지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마티를 붙여 놓을 수도 없지 않은가.

특히 요즘처럼 상단이 활발히 영지를 들락거리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상단을 주시하긴 하지만 상단을 통해 들고 나는 모든 사람을 일일이 확인하는 건 불가능했다.

"뭔가 방법을 강구하긴 해야 하는데……."

제론은 정보 조직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역시 혼자서 정보를 주무르는 것보다는 여럿이 일을 나누는 것이 효과적이다.

"움직이는군. 그럼 내가 나서야 하나?"

이들은 분명히 에어스트 백작령의 숨겨진 전력을 상대하기 위해 온 자들일 것이다. 그렇기에 쓰는 기간트도 좋은 것일 확률이 높았다.

아마 최소한 임베르 급 기간트를 쓸 것이다. 임베르는 크란 제국의 범용 기간트였다. 또한 다른 왕국에 수출하는 유일한 기체이기도 했다.

2.0이나 되는 출력을 자랑하는 기간트였기에 가격도 상당히 비쌌다.

물론 발굴형 기간트에 비하면 많이 떨어지지만, 가격대 성능비를 생각하면 그보다는 나았다.

제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테오스가 출격할 시간이 되었다. 일단 테오스를 드러내는 이상, 저들을 그냥 살려 보낼 수는 없었다.

이를 꽉 다물고 굳은 표정을 지은 제론은 창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푸르투나."

휘이이이잉!

푸르투나의 바람을 타고 하늘로 쭉 솟구친 제론은 그대로 목표가 있는 쪽을 향해 날아갔다. 상황을 잘 살펴야 한다. 그들이 최대한 인적 없는 곳에 도착했을 때 순식간에 제압하는 것이 좋다.

'운이 좋으면 기간트를 꺼내기 전에 처리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만일 상대가 소드 마스터가 아니라면 고작 열 명의 기사 정도는 기간트를 채 소환할 틈도 없이 없애 버릴 수도 있었다.

제론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속도를 높였다.

푸른 매 기사단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기사단이었다. 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것에 비하면 굉장한 실력과 장비를 가진 기사단이었다.

수도 상당히 많았지만 주로 열 명이 조를 이뤄 작전을 수행했다.

열 명의 푸른 매 기사단이 빠르게 이동 중이었다. 그들은 조금 전 작전이 난항을 겪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원래 작전은 운글릭이 에어스트 백작령에 분탕질을 치면 숨어 있다가 에어스트 백작의 숨은 힘이 등장하는 순간 그것을 박살 내는 것이었다.

한데 작전이 미묘하게 비틀렸다. 에어스트 백작령의 힘이 예상보다 강했다. 그래서 운글릭 쪽으로 지원을 나가야만 했다.

기회를 봐서 운글릭을 구할 생각이긴 했지만 여차하면 운글릭의 목숨쯤은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었다.

만일 에어스트 백작의 숨은 힘이 없다면 이대로 싸움을 종결시켜 운글릭을 이용해 영지를 집어삼킬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기간트를 꺼내라!"

가장 앞에 달려가던 기사가 외쳤다. 그가 바로 조장이었다. 미리 기간트를 꺼내야 속도를 더 내서 빠르게 성에 도착할 수 있다.

키이이이잉!

기간트가 가동되는 소리가 벌판을 가득 메웠다. 인가가 멀리 있긴 했지만 아마 앞으로 달리기 시작하면 다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게 될 것이다.

순식간에 열 기의 임베르가 나타났다. 제론이 예상한 대로였다. 이들은 크란 제국 밖에서는 하나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은 임베르를 모두 보유하고 있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출발!"

모두 기간트에 탑승하는 데 걸린 시간은 눈 몇 번 깜빡일 정도에 불과했다. 다들 베테랑 중 베테랑이었다.

쿵쿵쿵쿵쿵!

열 기의 임베르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금세 성에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그들은 얼마 달리지 않아 멈췄다.

새까만 기간트 한 대가 앞을 막고 서 있었다. 처음 보는 형태의 기간트였다.

푸른 매 기사단의 조장은 직감적으로 이 기간트가 에어스트 백작령이 숨겨 둔 힘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새로운 기간트라니!'

분위기나 느낌을 보면 발굴형 기간트임이 분명했다. 즉,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의 기간트를 발굴해 낸 것이다. 에어스트 백작이 말이다.

조장은 레늄 왕국과 벨룸 왕국의 전쟁이 유적 때문에 커졌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마 에어스트 백작이 그 유적에서 이 기간트를 얻은 모양이었다.

그는 거의 확신했다. 그래서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 대비해 상부로 지금 자신이 얻은 정보를 보내기로 작정했다.

푸른 매 기사단의 조장은 특별한 아티팩트를 항상 가지고 다녔다. 그것은 유사시에 순간이동을 통해 정보를 상부로 보내는 아티팩트였다.

하나 만드는 데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가는 고가의 물품이었지만 푸른 매 기사단은 돈에 구애받지 않을 정도로 부유했다.

조장은 품에서 꺼낸 아티팩트에 핵심 정보를 적은 쪽지를 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꽉 쥐었다.

콰직!

아티팩트가 부서지며 환한 빛무리에 휩싸였다. 그리고 빛이 사라지자, 부서진 아티팩트의 잔해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조장은 무거운 표정으로 그것을 확인했다. 그 순간 그의 안색이 변했다. 정보로 보내야 할 쪽지가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티팩트가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이 아티팩트는 가격이 비싼 만큼 그 효과는 확실했다. 한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조장은 이를 악물고 앞을 바라봤다. 어쨌든 임무에 성공하면 다 필요 없는 일이긴 했다. 검은 기간트는 왠지 불길해 보였다. 하지만 자신감이 흩어지지는 않았다.

'무조건 이긴다.'

완벽하게 제압해 저 검은 기간트의 정체를 밝히고 말 것이다. 또한 어디서 어떻게 얻었는지도 확인해야만 했다.

"사자 사냥을 시작한다! 절대 방심하지 마라!"

조장의 외침에 아홉 기의 임베르가 조장을 중심으로 빠르게 진형을 펼쳤다.

쿵쿵쿵쿵!

진형을 만든 푸른 매 기사단은 일단 상대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강한 적인 경우 포위를 해야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다.

테오스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상대를 살피기만 했다. 솔직히 크란 제국의 기간트는 처음 보기 때문에 제론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관절의 움직임이 좋군.'

임베르는 크라테르나 몰레스와 비교하면 상대가 안 될 정도로 대단했다. 관절의 움직임이나 다른 세세한 부분이 최적화되어 있었다.

제론은 새삼 크란 제국의 힘에 감탄했다. 임베르는 크란 제국이 제한적이나마 수출을 하는 기간트였다. 그들은 이보다 더 대단한 기간트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아마 알려진 것보다 몇 배는 더 강할 것이다.

'그래도 테오스의 상대는 안 돼.'

제론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테오스를 슬쩍 움직였다.

테오스가 한 발 옆으로 이동하는가 싶더니 그대로 몸을 날리며 검을 뽑았다.

아공간에서 뽑았기에 그 어떤 기척도 소리도 없었다. 그저 어느새 손에 검이 들려 있었다.

콰직!

테오스의 검이 좌측에 있던 임베르의 조종석을 꿰뚫었다. 아무도 반응하지 못했다.

좌중이 경악에 휩싸였다. 물론 테오스를 조종하는 제론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건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쿠웅!

조종석이 꿰뚫린 임베르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와 동시에 테오스가 사라져 버렸다. 아니, 푸른 매 기사단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다들 당황했다. 특히 조장은 어찌나 눈을 크게 떴는지 눈가가 살짝 찢어져 피가 비칠 정도였다.

콰직!

그 소리와 함께 조장의 생각이 끊어졌다. 뒤에서부터 찌른 검에 조종석이 꿰어 그대로 절명한 것이다.

쿠웅!

이번에는 좌중을 공포가 휩쓸었다. 다들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상대는 괴물이었다. 이건 절대 상대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들의 뇌리에 도망이라는 두 글자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테오스가 또 사라졌다.

콰직!

쿠웅!

또 한 기의 임베르가 쓰러졌다. 그것을 신호로 나머지 임베르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일단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었다.

푸른 매 기사단은 보통 기사단과는 많이 달랐다. 그들은 명예보다 생존을 우선했다. 그들에게는 일단 살아남아 이 상황을 알리는 게 당당하게 싸우는 것보다 훨씬 중요했다.

테오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론은 사방으로 도망치는 임베르를 보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남은 임베르는 일곱 기. 자칫하면 놓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론이 타고 있는 건 보통 기간트가 아니라 테오스였다.

꽝!

테오스가 땅을 박찼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속도로 쭉 나아갔다. 순식간에 100미터가 넘는 거리를 낮게 점프하여 날아간 것이다.

그리고 도망치는 임베르의 등에 검을 그대로 꽂았다.

콰직!

꽈광!

조종석이 꿰인 임베르에 테오스가 부딪혔다. 테오스는 임베르를 그대로 밀치며 나아가는 힘을 죽였다. 그리고 방향을 틀어 다시 땅을 박찼다.

꽈앙!

테오스가 또 100미터쯤 날아갔다.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임베르가 채 멀리 흩어지지도 못한 채로 또 당했다.

콰직!

조종석을 검이 꿰뚫었다.

테오스는 그대로 임베르의 팔을 잡았다. 그리고 임베르를 축으로 몸을 회전시켰다.

콰드득!

임베르의 팔이 육포가 비틀리듯 볼품없이 배배 꼬였다.

꽈앙!

테오스가 또 멀리 날아갔다. 이번에는 한 번에 거리를 없애지 못했다. 벌써 제법 멀리 달아난 것이다. 물론 두 번 점프할 필요도 없었다.

쿵쿵쿵!

콰직!

테오스는 몇 발 달리며 조종석을 검으로 꿰뚫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속도를 죽이고 멈춰 섰다.

순식간에 세 기를 처리해 이제 남은 건 네 기뿐이었다. 그들은 동쪽으로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물론 서로 거리가 점점 멀어지도록 흩어졌다.

푸른 매 기사단은 도망치는 것 역시 철저히 훈련한다. 지금 도망치는 것은 강력한 적이 나타났을 때의 대응 상황 중 하나였다.

제론은 당황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았다.

쿵쿵쿵쿵!

일단 달렸다. 테오스가 달리는 속도는 임베르보다 훨씬 빨랐다. 숨 몇 번 쉴 정도의 시간에 임베르 하나의 뒤를 잡았다.

테오스는 임베르의 옆으로 방향을 잡아 달렸다. 그러면서 검을 푹 찌르고 스쳐 지나갔다.

콰득!

콰광!

달려가던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임베르가 꼴사납게 나뒹굴었다.

그리고 테오스는 자연스럽게 크게 돌며 다음 임베르를 향해 달려갔다.

나머지 세 기의 임베르를 처리하는 데에도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테오스는 빠르고 강했다. 게다가 임베르는 도망가기만 했다.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는 임베르를 처리하는 건 아주 간단했다.

열 기의 임베르를 모두 처리한 제론은 그들을 번쩍 들어 한군데로 모았다.

"세나가 좋아하겠군."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임베르를 들고 중앙 유적으로 이동했다.

벨트에는 테오스를 보관하는 아공간 외에도 남는 아공간이 많았기에 거기에 임베르를 모두 넣어 나를 수 있었다. 순식간에 유적에 임베르가 쌓였다.

일단 이렇게 보관하다가 적당한 시기에 세나에게 넘겨줄 생각이었다.

제론은 모든 일을 마무리한 뒤, 테블릿을 꺼내 일단 현재 상황을 확인했다.

"대충 끝났군."

병사를 모두 포박해 감옥에 가뒀고, 기사의 기간트는 몽땅 압수했고, 기사 역시 포박해 감옥에 가뒀다. 운글릭과 그의 수행원 역시 마찬가지로 감옥에 가둬 버렸다.

이제 저들의 배후를 캐면 된다.

제론은 태블릿을 조작해 다른 마티가 보여 주는 화면을 띄웠다.

운글릭을 통해 음모를 꾸민 사내가 나타났다. 제론은 그가 그동안 뭘 했는지 슥슥 살펴봤다. 그동안의 행동은 모두 저장되어 있기에 조금도 남김없이 다 확인할 수 있었다.

수상한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누군가와 연락을 취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수상하고 이상했다.

모든 정보가 딱 저 사내에게서 막힌 것이다. 저 사내가 움직여 줘야 배후에 누가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는데, 저렇게 가만히 있으니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제론은 화면을 조작해 이번에는 슈린 공작가를 살폈다. 그곳도 별다른 게 없었다.

일단 슈린 공작가 사람의 경우 일인당 한 개의 마티를 붙여 두었는데, 아직까지는 에어스트 백작가와 관계된 정보는 얻지 못했다. 또한 운글릭의 배후가 슈린 공작가라는 증거도 못 잡았다.

다만 제법 쓸 만한 정보는 많이 얻었다. 슈린 공작가가 벌이는 사업에 관한 것이었는데, 잘 이용하기만 하면 막대한 이득을 얻으면서 슈린 공작가에는 타격을 줄 수 있는 정보도 여럿 챙겨 뒀다.

시간과 여건이 되기만 하면 즉시 슈린 공작가 공략에 나설 것이다. 물론 그전에 에어스트 백작가의 힘을 충분히 쌓아 두고 말이다.

"어쨌든 성과가 있을지도 모르니 심문은 해 봐야지."

제론은 아무리 고문을 하더라도 이들이 입을 열지 않을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다.

마음 같아서는 마티를 하나씩 붙여서 풀어 주고 싶지만, 마티의 활동 범위가 제한되어 있어서 그게 불가능했다.

제론은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며 유적에서 나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당분간은 외부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렇게 시간을 가지며 정보를 모아 더 먼 미래를 준비할 계획이었다.

"그나저나 유적에서 수련을 한 지도 제법 오래되었구나."

제론은 반성했다. 자신의 근간은 유적이었다. 만일 초고대 문명의 유적이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유적에 관한 것은 소홀히 해선 안 되는 일이었다.

"아직도 12층에 한 번도 안 가 봤다니. 정말 정신 제대로 차려야겠군."

유적은 제론에게 끊임없이 힘과 선물을 주는 공간이었다. 제론은 한 번 더 반성하며 다시 유적으로 향했다.

지금은 방으로 돌아가 성공할지 확신할 수도 없는 배후 캐기를 하는 것보다는 유적에 가서 12층 공략을 시작하는 게 훨씬 중요하게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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