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8 두 기사
"성공했나?"
사내의 물음에 운글릭이 두려운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서 심장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걸 똑똑히 봤습니다."
사내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맺혔다.
"잘했다."
"하면 전 이제 어찌하면 됩니까?"
"어쩌긴, 이걸 들고 영지로 가야지."
운글릭은 사내의 손에 들린 서류를 바라봤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화, 확인서?"
그것은 에어스트 백작령의 상속권에 대한 확인서였다. 정당한 상속권을 증명하는 서류였다. 물론 행정청에서 발급한 진짜 서류였다.
"그걸 가지고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가라."
만일 영주가 멀쩡하다면 이건 쓸모없는 종이 쪼가리에 불과하다. 상속에 대한 사항은 영주 고유의 권한이었다. 영주가 휘하 기사에게 모든 걸 물려주겠다고 공식 서류를 남기면 그 기사가 물려받는다.
하지만 영주가 상속에 관한 아무 문건도 남기지 않고 죽으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그때부터는 왕국법에 의거해서 상속이 결정된다.
상속인이 몇 명인가, 또 영주와 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되는가에 따라 적합한 비율이 정해진다.
하지만 지금처럼 상속인이 유일한 경우는 한 명이 모든 걸 갖게 된다.
운글릭은 서류를 보물처럼 소중히 감싸 품에 넣었다. 이것만 있으면 에어스트 백작령을 얻을 수 있다.
'불리한 계약이 있지만 언제까지 끌려다니지는 않을 테니 상관없지.'
처음에는 도움을 받아야 하니 끌려다니겠지만 결국은 에어스트 백작령을 혼자 독식할 수 있을 것이다.
운글릭은 꿈에 부풀었다.
"지금 당장 내려가겠습니다."
"그럴 줄 알고 미리 준비를 했다. 호텔 밖에 기사단과 병사를 세워 놨으니 데리고 가도록."
"병사까지 지원해 주시는 겁니까?"
사내가 씨익 웃었다.
"제법 큰 영지인데 완벽히 장악하려면 최소한 병사가 천 명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천 명의 병사라는 말에 운글릭의 눈에 경악이 담겼다.
'대체 이자의 정체가 뭐지? 천 명이나 병사를 동원할 수 있다니!'
천 명의 병사를 보유하려면 영지의 규모가 상당해야만 한다. 한데 이자는 천 명의 병사를 지원해 주었다. 즉, 원래 보유한 규모는 그보다 훨씬 크다는 뜻이다.
'최소한 후작!'
후작령은 되어야 그 정도 지원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공작일지도 모른다.
운글릭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해낼 수 있어!'
운글릭은 사내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사내는 그런 운글릭을 보며 차갑게 웃었다.
"건방진 놈. 벌써 자기가 뭐라도 된 것처럼 구는군."
운글릭은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걸어갔다.
그리고 그 뒤를 스무 명의 기사가 마치 호위하듯 따라갔고, 천 명의 병사가 질서 정연하게 행군했다.
그 위세가 어찌나 대단했는지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쳐다봤다.
운글릭은 그 시선을 한껏 즐겼다. 정말로 기분이 좋았다. 마치 왕이라도 된 것 같았다.
'고작 천 명의 병사를 이끄는 것만으로 이럴진대, 진짜 왕은 어떤 기분일까?'
물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이 정도면 충분했다. 가슴이 뿌듯하게 차올랐다.
"텔레포트 게이트에 도착했습니다."
운글릭 옆에서 따라가던 수행원이 보고했다. 운글릭은 그저 가볍게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러자 수행원이 알아서 병사를 나눴다.
텔레포트 게이트는 한 번에 이동시킬 수 있는 인원에 제한이 있었다. 그리고 비용도 상당히 비쌌다.
그렇기에 병사가 천 명쯤 되면 직접 걸어서 이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운글릭은 서둘러야 하는 상황이라 모두 텔레포트 게이트를 통해 이동하기로 했다.
당연히 그 비용은 운글릭에게 모든 걸 준비해 준 사내로부터 나왔다.
그렇게 기사와 병사를 이끄는 운글릭이 젤레 영지, 아니, 에어스트 백작령으로 향했다.
에어스트 백작령에는 텔레포트 게이트가 없었다. 사실 돈만 있으면 텔레포트 게이트를 설치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왕국 소속 마탑에 신청을 하면 된다.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을 지불하면 원하는 장소에 텔레포트 게이트를 설치해 주고, 왕국의 각 게이트에 위치와 명칭을 등록해 준다.
사실 실제로 마탑을 설치하고 관리하는 것은 크란 제국 마탑이었다. 그들이 텔레포트 게이트에 관한 모든 것을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제론은 당분간 텔레포트 게이트를 설치할 계획이 전혀 없었다. 게이트를 설치하는 건 영지가 완전히 자리를 잡은 이후여야만 했다.
슈린 공작가와 정면으로 싸워 이길 수 있을 정도가 아니라면 최대한 외부에 영지를 드러내지 않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렇기 때문에 운글릭은 병사와 기사를 이끌고 직접 걸어서 이동을 했다. 마차라도 구했으면 좋았겠지만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위세를 떨치며 물려받을 것이 확실한 영지로 간다는 생각에 들떠 아무것도 고려치 못했다.
수행원은 마차에 대해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았다. 그는 운글릭의 수행원이지만 그의 사람이 아니었다. 최대한 돈을 아끼는 쪽으로 선택하는 게 당연했다.
더구나 이번 일로 상당한 지출을 했기에 앞으로는 되도록 돈을 아끼는 편이 좋았다.
"얼마나 더 가야 영지가 나오는 거지? 이거 변방은 변방이로구나."
운글릭은 슬며시 의심이 들었다. 매년 수백만 골드를 벌어들일 수 있는 영지에 텔레포트 게이트도 없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하지만 운글릭에게는 아무리 의심스러워도 그것을 입 밖으로 낼 권리가 없었다.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한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한참을 이동하니 드문드문 집이 보였다. 한숨이 나올 정도로 낙후된 곳이었다.
수많은 병사와 기사가 지나가니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불안한 눈으로 쳐다봤다. 운글릭은 그 시선에 기분이 한껏 달아올랐다.
"서둘러라. 어서 내 성을 보고 싶구나."
운글릭의 말에 행군 속도가 조금 더 빨라졌다. 최대한 서둘렀지만 결국 성에 도착하지 못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성이 너무 먼 곳에 있었다.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면 그날 도착했겠지만, 걸어서 성까지 하루 만에 가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게 하루를 노숙한 뒤에야 영주성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운글릭은 멀리 우뚝 서 있는 성을 보며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마어마한 성이었다. 규모나 화려함이 그동안 봐 왔던 그 어떤 성보다 대단했다.
운글릭의 발이 점점 빨라졌다. 저 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힘이 쭉쭉 솟아났다.
한참 걸어가던 운글릭의 눈에 성 뒤쪽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푸른 물결이 들어왔다. 운글릭은 눈을 비볐다. 뭔가 잘못 본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정말로 초록빛 물결이 성 뒤쪽으로 쫙 펼쳐져 있었다.
성이 워낙 크고 화려해 처음에는 눈에 안 들어왔지만 차츰 주변으로 시선이 확장되자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적당히 자란 곡물이었다. 아직 익지 않아 푸르렀지만 나중에는 누렇게 익어서 새로운 빛깔의 물결을 만들 것이다.
운글릭은 곡물을 키우는 영토가 얼마나 되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높은 곳에서 봐야 한다.
"더 서둘러라!"
그 말을 남기고 운글릭은 거의 뛰다시피 해서 성으로 향했다. 성의 한가운데 높이 솟은 첨탑에 올라가면 아마 드넓은 영토의 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성문으로 가는 길 중간에 곳곳에서 공사를 벌이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도로와 건물을 건설하는 중이었는데, 수많은 사람이 달라붙어서 구슬땀을 흘렸다.
저 모든 건물이 완성되었을 때를 떠올리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진짜 멋진 영지가 될 것 같았다.
성문 앞에 도착하자, 수행원이 서둘러 병사에게 다가갔다.
"운글릭 폰 슈돌츠 경입니다. 현 에어스트 백작님의 먼 친척 되십니다."
"예?"
병사가 당황했다. 하지만 영주의 친척이라는데 마냥 기다리게 할 수는 없었다. 얼른 정신을 차리고는 안에 기별을 넣었다.
'그나저나 먼 친척이라니, 대체 얼마나 먼 거야?'
병사가 후다닥 움직이자, 운글릭은 거만한 자세로 기다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더 마음에 들었다. 아마 성 안으로 들어가면 훨씬 멋질 것 같았다.
'이게 내 성이란 말이지. 훌륭해.'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던 운글릭은 다시 돌아온 병사의 정중한 안내를 받으며 성안으로 들어갔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내부는 더 대단했다. 운글릭은 이 성이 정말로 마음에 쏙 들었다.
"당분간 이 방에서 머무시면 됩니다. 함께 데려온 병사와 기사는 근처에 다른 방을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운글릭은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 가장 궁금했던 걸 물었다.
"이 성에는 총관이 없나? 이만한 영지를 운영하려면 꼭 필요할 것 같은데 말이야."
"아직까지는 없습니다. 지금은 바이스님께서 총관 일도 함께하고 계십니다."
"바이스?"
"예. 우리 영지의 마법사님이십니다."
"마법사?"
운글릭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법사는 보통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머리는 좋을지 몰라도 행정 쪽으로는 완전히 꽝인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자신이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어차피 나중에 영지를 물려받으면 모든 체재를 개편하고, 사람도 싹 바꿔 버릴 테니까 말이다.
'과연 얼마나 걸릴까?'
영지를 물려받는 건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는다. 영지 운영에 차질이 생기지 않아야 하기에 행정 절차가 비교적 간단하고 빨랐다.
"일단 오늘은 푹 쉬고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해 볼까?"
할 일이 많았다. 일단 영지 전반에 대해 파악하는 게 먼저였다. 그리고 영지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한다.
영지민과 병사, 기사에게 얼굴을 알리는 것도 중요했다.
그걸 다 하려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운글릭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얼마든지 기쁜 마음으로 할 자신이 있었다.
'돈이 많은 영지라야 할 텐데…….'
운글릭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잠에 빠져들었다. 오늘은 밥이고 뭐고 다 귀찮았다. 그저 쉬고 싶었다. 모든 게 끝났다는 생각을 하니 그나마 남아 있던 긴장감이 풀어져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다음 날, 운글릭은 자기 마음대로 성을 활보하고 다녔다. 그가 움직이면 항상 기사 세 명과 수행원이 따라붙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성에서 가장 눈에 띄었다.
"복잡하기도 하군."
운글릭은 성을 돌아다니는 내내 입이 찢어질 것 같았다.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정말 대단한 성이었다.
마법을 이용한 편의 시설은 이곳에서 처음 봤다. 이런 게 가능하다는 사실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한데 그런 것이 성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이런 대단한 성을 갖게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한참 돌아다니던 운글릭의 눈에 아름다운 여인 한 명이 보였다. 드레스가 아닌 간편한 옷을 입은 여인이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웠는지 운글릭은 자신이 걸음을 멈춘 것조차 모르고 멍하니 바라봤다.
"저, 저 여자를 불러와라. 어서!"
여인이 멀어지자, 운글릭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옆에 선 수행원에게 명령을 내렸다.
수행원은 입가에 비웃음을 띄우며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서둘러 여인을 쫓아갔다. 이상적인 진행이었다. 운글릭이 주색잡기에 빠져 영지를 돌보지 않으면 않을수록 좋았다.
어차피 영지를 차지하면, 중요한 자리에는 몽땅 그들의 사람을 앉힐 것이다. 영주가 무능해야 비리를 저지르기가 편하지 않겠는가.
수행원은 단숨에 여인과의 거리를 좁혔다.
"잠깐 멈춰 주십시오."
수행원은 순간적으로 반말을 하려다가 말을 바꿨다. 여인이 손에 낀 반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웬만한 재력으로는 구경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싸 보였다.
여인, 세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무슨 일이죠?"
그녀는 몇 가지 일을 처리하고 공방으로 가는 중이었다. 아직도 수리가 필요한 기간트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얼마 전 제론이 웃으며 잔뜩 안겨 준 기간트였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 작업을 해야 하니 마음이 조금 급했다.
"제가 모시는 분께서 아가씨를 잠시 뵙고자 하십니다. 시간을 좀 내주시겠습니까?"
수행원은 정중히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모시는 사람이 누구인지 눈짓과 손짓을 통해 자연스럽게 소개했다.
세나는 슬쩍 시선을 돌려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운글릭과 세 명의 기사를 쳐다봤다.
"관심 없어요."
세나는 한마디로 거절한 다음 다시 돌아섰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다시 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향후 이 영지의 주인이 되실 수도 있는 분입니다. 한번 만나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가씨께 결코 손해가 가는 일은 아닐 텐데요,"
"영지의 주인이라고요?"
세나는 어이가 없는 눈으로 운글릭과 수행원을 번갈아 쳐다봤다. 제론의 나이가 몇인데 영지를 물려준단 말인가. 그리고 저 사람이 대체 누구인데 영지의 주인이 되네 마네 한단 말인가.
"어쩌시겠습니까? 한번 만나 보시겠습니까?"
세나는 뭔가가 꺼림칙했다. 하지만 일단 상황을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한번 얘기나 나눠 보죠."
수행원이 즉시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어쩌면 영주 부인이 될 수도 있는 여자였다. 그러니 미리 잘 보여 둬서 나쁠 건 없었다. 아무리 허수아비 영주라 할지라도 말이다.
수행원은 세나를 정중히 운글릭에게로 모셔 갔다.
운글릭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세나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수도에서 제법 오래 생활을 했기에 아름다운 여인을 볼 기회도 많았다. 왕국에서 가장 미인이 많은 곳이 바로 수도 아니겠는가.
하지만 수도의 그 어떤 여인도 세나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달빛 아래 반딧불이었다. 심지어 먼발치에서 본 공주조차 세나보다 못했다.
"운글릭 폰 슈돌츠요."
운글릭은 나름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를 어필하기 위해 소개를 덧붙였다.
"이곳 영주이신 에어스트 백작님의 친척이기도 하오."
제론의 친척이라는 말에 세나가 눈을 반짝였다. 만일 그렇다면 친하게 지내야 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세나는 수행원이 했던 말을 잊지 않았다.
"세나 폰 벨루스에요."
순간 운글릭이 멈칫했다.
"베, 벨루스? 혹시……."
세나가 환하게 웃었다. 눈이 부셔서 제대로 뜰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벨루스 백작님이 제 아버지랍니다."
벨루스 백작가는 상당히 유명한 가문이었다. 레늄 왕국에는 천여 개의 가문이 있었다. 그렇기에 들어도 모를 가문이 부지기수였다.
벨루스 백작가는 그런 가문 중에서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대단하고 유명했다. 그런 백작가의 여식이 왜 이 영지에 있단 말인가.
운글릭은 한편으로는 불안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영지에 대한 기대감이 생겼다.
벨루스 백작가에서 딸을 보낼 정도면 이 영지에 뭔가 대단한 구석이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눈앞에 서 있는 세나를 갖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
"바, 반갑소. 혹시 시간이 괜찮다면 가볍게 티타임이라도 갖는 게 어떻겠소?"
운글릭의 제안에 세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쉽지만 시간이 없네요. 그보다 궁금한 게 있어요."
"뭐든 물어보시오."
운글릭이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강하게 보이고 싶은 욕망이 들끓었다.
"어쩌면 이곳 영주님이 되실 수도 있다고 들었어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운글릭이 빙긋 웃었다. 드디어 제대로 자신을 드러낼 기회를 얻었다.
"에어스트 백작님의 유일한 친척이 바로 나요."
"그래서요?"
"이곳 영지의 유일한 계승권자가 바로 나라는 뜻이오."
세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영주님과 나이 차이가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은데요?"
운글릭은 당장이라도 영주가 죽어서 어차피 이 영지는 자신의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꾹 눌러 참았다. 아무리 그래도 함부로 그런 말을 해선 안 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한데 아직도 영주님을 뵙지 못했소. 혹시 영주님께서 어디 가셨소?"
운글릭은 세나에게 넌지시 물었다.
"글쎄요. 곧 오시겠죠? 수도에 다녀오신다고 하셨는데, 아직 소식이 없네요."
운글릭은 내심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지 너무나 궁금했다.
그 기회를 노려 슬며시 접근하면 세나를 차지하는 일도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하면 아쉽지만 이만 가 보겠소. 조만간 꼭 시간을 내주시오."
운글릭의 말에 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세나는 그 뒤로 미련 없이 돌아서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온통 헝클어져 있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제론이 영지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3일 후였다. 놀랍게도 혼수상태로 돌아왔다.
목숨은 붙어 있는데, 의식은 없었다. 숨을 쉬고 심장은 뛰지만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일어나지도 못했다.
영지의 모든 사람들이 당황했다.
제론을 데려온 것은 두 명의 기사였다. 또한 제론이 영입한 수많은 인재들이 함께 영지에 도착했다.
가장 당황한 사람은 운글릭이었다. 그는 설마 제론이 죽지 않았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자신이 영지를 물려받고 싶어도 일단 영주가 죽어야 가능하다. 아니면 그저 기다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운글릭은 일단 도움을 요청했다. 수행원을 통해 자신을 여기까지 오게 한 사내에게 연락을 취한 것이다.
자신의 방에서 모든 문을 잠그고 통신 수정구를 작동시켰다. 놀랍게도 수행원이 마법사였다. 그가 통신 수정구를 작동시켜 주었다.
물론 수행원의 마법 실력은 바닥이었다. 그저 아티팩트를 작동시키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운글릭은 수정구에 사내의 모습이 떠오르자 다급히 현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사내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 설명을 끝까지 들었다.
"이제 어쩌면 좋겠습니까?"
운글릭의 물음에 사내가 차갑게 웃었다.
"어쩌긴. 영지를 장악해야지."
"예? 하지만……."
"어차피 그 영지의 차기 영주는 너다. 말이 좀 나오긴 하겠지만 큰 무리는 없을 거다."
"그, 그럴까요?"
"당연하지. 게다가 내가 보내 준 기사와 병사는 장식품이 아니야. 그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알겠습니다."
운글릭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수정구를 치웠다. 그의 표정은 한껏 굳어 있었다. 어쩌면 자신의 손으로 다시 영주를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
"병사와 기사를 집합시킬까요?"
수행원의 물음에 운글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가 없었다.
☆ ☆ ☆
"영주님!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바이스가 외쳤다. 지금 이 자리에는 바이스 외에도 몇 명이 더 있었는데, 그중 두 명이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바로 제론을 데리고 온 기사였다.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지 않아도 들려."
누워서 눈을 감은 제론의 말에 바이스가 깜짝 놀라 뒤로 한 발 물러났다. 바이스뿐 아니라 함께 있던 세나와 카이트도 크게 놀랐다.
평온함을 유지하는 사람은 새로운 기사 두 명뿐이었다.
제론은 천천히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아직 몸통을 못 찾았어."
제론의 말에 바이스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 그럼…… 적을 찾기 위해 일부러 이러신 겁니까?"
제론이 피식 웃었다.
"얼마 전에 내 친척이라면서 온 놈 없었어?"
"있었습니다. 더럽게 먼 친척인 것 같은데, 수도 행정청에 확인해 봤더니 맞더군요."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어쨌든 그놈이 나한테 독을 풀었어."
"예?"
다들 깜짝 놀랐다. 독을 풀었다니. 그럼 제론을 죽이려 했다는 말 아닌가.
제론의 말에 세나는 그제야 얼마 전 운글릭과 그의 수행원이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영지를 물려받기 위해 제론을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일부러 당하는 척했지. 저기 있는 베샤이덴 경과 슈빅 경이 도와줘서 아주 간단히 속여 넘길 수 있었어."
제론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두 기사에게로 향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들은 다들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한데 영주님. 굳이 그렇게 하실 필요가 있었습니까?"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후가 좀처럼 드러나지 않더라고. 그래서 좀 크게 흔들어 보려고."
"크게 흔든다고 하심은……."
"병사 천 명이랑 기사단까지 하나 끌고 왔잖아. 그놈들을 제압해서 배후를 좀 캐 보려고."
"하지만 그냥 막무가내로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제론이 빙긋 웃었다.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어차피 저놈들 움직이지 않을 수 없을 테니까. 우리가 걱정할 건, 저놈들을 제압하는 일이야. 할 수 있겠어?"
제론이 카이트를 보며 물었다. 카이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기사단도 대충 정비를 했으니 누가 덤벼도 이길 수 있습니다."
카이트의 자신감에 제론이 눈을 크게 떴다.
"호오. 제법 많이 모았나 보지?"
"저까지 스물다섯 명입니다."
"그새 그렇게나 모았어? 기간트는?"
제론의 물음에 세나가 나서서 대답했다.
"제가 알아서 지급했어요. 다들 크라테르로 맞췄어요."
제론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제론은 슬슬 뭔가가 이뤄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 기간트 라이더로 이루어진 기사단도 만들었다. 남은 건 주변 영지를 병합하는 것뿐이었다.
'아니지. 그 이후에 더 일이 많지.'
암석 지대를 정리해야 하고, 항구도 만들어야 한다. 그 일만 해도 어마어마한 돈과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일단 만들어 놓기만 하면 그 효용성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했다.
제론은 손뼉을 짝 쳐서 시선을 모았다.
"자, 이제 슬슬 준비를 해 보자고."
제론의 말에 다들 밝은 얼굴로 물러갔다. 그들의 뒤통수에 제론의 외침이 꽂혔다.
"표정 관리 좀 해! 누가 보면 영주가 펄펄 날아다니는 줄 알겠다!"
제론의 말에 다들 움찔하고는 억지로 표정을 굳혔다. 그 모습이 조금 우스꽝스러웠지만 아무도 웃지 못했다. 이제부터는 긴장해야만 했다.
☆ ☆ ☆
베샤이덴과 슈빅은 카이트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카이트에게 상당히 신경을 썼다. 척 보기에도 굉장한 강자였다. 특히 기간트 쪽이 강할 거라는 느낌이 확 왔다.
"자, 일단 인사부터 하지. 난 라이트닝 기사단의 단장인 카이트일세."
"베샤이덴입니다."
"슈빅입니다."
베샤이덴과 슈빅의 나이는 28살로 똑같았다. 하지만 나이에 비해 실력이 상당했다. 이미 익스퍼트였다. 이런 인재가 왜 지금껏 주인을 못 만났는지 이상할 정도였다.
"익스퍼트로군?"
카이트의 말에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같은 익스퍼트라면 알아보는 게 당연했지만 그들이 보기에 카이트는 익스퍼트가 아니었다. 만일 익스퍼트라면 자연스럽게 마나가 흘러나와야 하는데, 그런 것이 전혀 없었다.
"설마 익스퍼트이십니까?"
슈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카이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왜? 못 믿겠나?"
"아닙니다."
슈빅은 즉시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익스퍼트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렸다면 상대도 익스퍼트일 확률이 높았다. 드물긴 하지만 익스퍼트 중에서는 자신의 마나를 감출 수 있는 사람도 있었다.
카이트는 베샤이덴과 슈빅의 표정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너희들도 조만간 이렇게 될 거다."
두 사람은 카이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세 사람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카이트는 두 사람을 훈련장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 일단 실력을 봐야 앞으로 어떤 식으로 훈련을 할지, 또 어떤 임무를 맡길지 결정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반쯤 갔을 때, 카이트가 지나가듯 물었다.
"실력도 있는 것 같은데 지금까지 떠돌아다니기만 했나?"
카이트의 질문에 베샤이덴과 슈빅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금세 평정을 찾았다. 어차피 제론도 자신의 과거를 모두 알고 있었다. 그걸 다 알고도 거뒀으니 두 사람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자신의 과거가 절대 부끄럽지 않았다. 그래서 당당하게 대답했다.
"한 번 모신 적이 있습니다."
"그래?"
카이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보통 기사는 주군을 한 번 정하면 죽을 때까지 바꾸지 않는다. 주군을 바꾸는 기사는 다른 가문에 가서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을 수 없었다.
"어쩌다가 나왔나?"
"쫓겨났습니다."
카이트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서서 두 사람을 쳐다봤다. 다른 주군에게서 쫓겨났다면 분명히 뭔가 문제가 있음이 분명했다.
"아무래도 자세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군."
슈빅이 앞으로 나섰다.
"영지민을 학살하는 주군을 말렸더니 우리에게로 검을 돌리더군요."
카이트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서?"
카이트도 엄밀히 따지면 기사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다른 기사에 비해 훨씬 현실적이었다. 그래서 일단 최대한 두 사람의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죽을 각오를 했습니다. 주군을 바른길로 이끄는 것도 기사의 덕목이라고 믿었습니다."
카이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기사가 거기까지 해야 하는지 말이다. 하지만 그 곧은 마음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목에 상처를 내더군요. 그리고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아니, 명령이었군요."
"나가라고?"
"예. 대신 영지민을 살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카이트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라면 충분한 명분이 된다. 하지만 이어지는 두 사람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한 사람당 100골드라고 하셨습니다."
카이트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돈을 받고 너희를 놔주었단 말인가? 한 사람에 100골드였으면 총 200골드였겠군."
200골드면 엄청나게 큰돈이다. 하지만 실력 있는 기사가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벌 수 있는 금액이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슈빅이 설명을 해 주었다.
"영지민 한 사람당 100골드였습니다. 당시 그곳에 있던 영지민의 수가 삼천 명이 넘었습니다."
100골드씩 삼천 명이면 무려 30만 골드나 되는 거금이었다. 그건 아무리 대단한 기사라도 버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용병이 되어 갚겠다고 한 뒤에 쫓겨났습니다."
카이트는 그제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제론은 무려 30만 골드나 되는 거금을 들여 이 두 기사를 영입한 것이었다.
말이 30만 골드지 그 정도 돈이면 허름한 영지 하나는 거뜬히 살 수 있었다. 그런 돈을 투자했으니 두 기사가 느끼는 감정은 아마 보통이 아니었을 것이다.
베샤이덴과 슈빅은 당시의 감정이 울컥 올라오는지 감회에 젖어 버렸다.
마음이 강한 사람이 오히려 정에 약한 법이다. 또한 감동도 훨씬 잘한다. 베샤이덴과 슈빅이 딱 그랬다.
카이트는 그런 두 사람이 마음을 다스리도록 충분히 기다려 주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두 사람이 마음을 추스르고 강렬한 눈빛을 되찾자, 카이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한 가지는 확실해. 너희들, 주군 하나는 제대로 만났어."
베샤이덴과 슈빅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사실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정말 훌륭한 주군을 만났다고 믿었다.
카이트는 그렇게 말하고는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가슴을 쿡 찔렀다.
"그리고 기사단장도."
그 말을 끝으로 카이트가 다시 돌아섰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두 기사는 점점 멀어져 가는 카이트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빙긋 웃었다. 왠지 이곳에서 지내는 게 정말로 즐거울 것 같았다. 설사 무슨 일이 벌어져서 목숨을 잃어버리더라도 말이다.
두 기사가 힘차게 걸음을 내디뎠다. 새로운 영지에서 진짜 주군을 모시고 시작하는 첫걸음이었다.
"걸음마도 제대로 못하나!"
카이트의 호통에 바닥에 널브러진 두 기간트가 삐걱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른다. 고작 걷는 것뿐인데 제대로 하기가 어려웠다.
두 기의 크라테르에 탄 것은 당연히 베샤이덴과 슈빅이었다. 두 사람은 훈련장에 도착하자마자 기간트를 지급받고서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얼굴은 이내 감격으로 물들었다.
설마 기간트까지 지급받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 감격과 환희가 절망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기간트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저 걷는 것뿐인데도 심각한 괴리감으로 인해 넘어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를 악물었다. 자신을 인정해 주고 알아봐 준 주군을 위해서라도 죽을 각오로 모든 걸 해낼 작정이었다.
"좋아! 일어났으면 걸어!"
쿵! 쿵! 쿵!
두 기의 크라테르가 발을 맞춰 걸어갔다. 상당히 넓은 훈련장이었는데, 오늘의 목표는 그 훈련장을 한 바퀴 도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상 기간트 초보에게는 불가능한 목표였다. 처음 기간트를 움직이면 걷는 것도 어렵다.
'대단하군. 정말 초보가 맞나?'
카이트는 내심 감탄했다. 베샤이덴과 슈빅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기간트에 타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오로지 검술만으로 기사가 된 경우였다.
두 사람이 머물던 영지도 작았기에 기간트를 보유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최소 사흘에서 나흘은 기간트 적응 훈련이 필요했다. 한데 두 사람에게는 기간트 적응 훈련 따위는 필요가 없었다.
쿵! 쿵! 쿵! 쿵!
처음에는 수없이 넘어지더니 이제는 제법 균형을 맞추면서 걷는다. 이대로라면 오늘 내로 빠르게 걷기도 가능할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달리기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타고났어.'
카이트는 정말로 신기했다. 대체 저런 인재를 어디서 구해 왔단 말인가. 새삼 제론이 얼마나 대단한지 깨달았다.
'좋아. 잘하면 물건 하나 나오겠어. 아니, 둘.'
정말 이 정도 속도로 꾸준히 발전할 수만 있다면 1년 안에 기간틱 나이트를 만드는 일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미 익스퍼트이니 기간트 센스만 키우면 되는데, 저렇게 빠르게 숙달된다면 문제없을 것 같았다.
쿵쿵쿵쿵!
카이트가 잠시 방심한 사이 두 기의 크라테르가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카이트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리고 이내 그 입이 더 크게 벌어졌다. 찢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쿵쿵쿵쿵쿵쿵!
두 기의 크라테르가 발맞춰 달려가고 있었다. 100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하는 재능이었다. 그런 사람이 무려 두 명이나 있었다.
기간트가 달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카이트는 그것을 보며 멈출까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지금이 중요한 순간일 수도 있었다.
기간트 라이더에게 평생 한 번 찾아올까 말까 하는 비상의 순간일지도 몰랐다. 물론 기간트를 처음 탄 사람에게 그런 게 가능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카이트는 꾹 참고 기다렸다.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달려가 사고를 막을 준비를 하면서 말이다.
그날, 두 기의 크라테르는 밤이 되서 사방이 어두워질 때까지 훈련장을 달리고 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