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운글릭
운글릭은 제론이 잡아 준 방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서성였다. 제론이 당장이라도 돈을 줄 거라고 믿었는데, 돈은 안 주고 거처만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베니뉴스 호텔은 그냥 방이라도 하루 숙박비가 1골드가 넘었다. 운글릭이 머무는 방은 제법 좋은 방이었기에 최소 3골드는 줘야 묵을 수 있는 방이었다.
"젠장. 이렇게 비싼 방에 재울 정도로 부자면서 고작 1천 골드를 못 줘?"
운글릭은 500골드만 달라고 다시 말해 볼까 고민했다. 최소한 그거라도 받아야 빚을 갚을 거 아닌가.
솔직히 짜증이 났다. 현재 제론은 베니뉴스 호텔 최상층에서 지낸다. 하룻밤 숙박료가 무려 30골드에 달하는 곳이었다.
그런 쓸데없는 곳에는 돈을 쏟아부으면서, 비록 멀긴 하지만 친척인 자신에게 고작 1천 골드도 못 쓴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운글릭은 이를 갈았다. 눈빛이 점점 음침해졌다. 어차피 제론을 만난 것 자체가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였다. 달리 생각하면 이런 대단한 부자의 영지를 자신이 꿀꺽할 수 있다면 그때부터는 모든 고생이 끝이었다.
"일단 기한을 늘려 달라고 하는 수밖에."
운글릭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거짓말처럼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다. 가만 생각하면 그 독사 같은 놈들이 더 많은 돈을 뜯어낼 수 있는 기회를 그냥 날려 버릴 리가 없었다.
상당한 이득을 보장해 주면 기한을 얼마든지 연장해 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제때 일을 딱딱 처리하는 것이 깔끔한 법이었다. 마음이야 편해졌지만, 일말의 꺼림칙함이 남아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노크했다.
똑똑.
운글릭은 화들짝 놀라 하마터면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이 시간에 자신을 찾을 사람이 없었기에 정말로 깜짝 놀랐다.
사람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갑자기 겪으면 당연히 놀란다. 운글릭은 그 정도가 조금 심할 뿐이었다.
"후우.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네."
운글릭은 마음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그리고 그 순간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이번에는 처음처럼 놀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뛸 정도로 놀랐다. 운글릭은 일단 누군지 확인부터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물어보려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으허헉!"
막 문으로 다가가려던 순간이었기에 엄청나게 놀랐다. 처음 노크 소리가 들렸을 때보다 훨씬 혼비백산했다.
털썩.
운글릭은 뒤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리고 정신이 반쯤 날아가 멍한 표정으로 입가에 침을 주르륵 흘렸다.
문을 열고 방에 들어온 사내는 그 모습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이런 사람은 이용해 먹기가 정말로 좋다. 그 생각을 하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일어나라."
기이한 힘이 담긴 사내의 말에 운글릭은 정신을 번쩍 차렸다.
"누, 누, 누, 누, 누구요!"
사내는 일단 문을 닫고 뚜벅뚜벅 걸어갔다. 운글릭의 외침이 제법 컸는데도 방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운글릭은 두려움에 떨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앉은 채로 물러나려니 엉덩이가 바닥에 질질 끌렸다. 그리고 이내 균형을 잃고 바닥에 꼴사납게 쓰러졌다.
사내는 느긋하게 걸어 자빠진 운글릭의 얼굴 앞에서 멈췄다.
"일어나라고 했는데 내 말이 말 같지 않은가 보군."
운글릭은 그 말에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고는 억지로 일어났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서 제대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제법 시간을 들여 간신히 일어난 운글릭은 사내가 갑자기 가슴을 미는 바람에 뒤로 정신없이 물러나다가 소파에 턱 걸려 그대로 앉았다.
소파가 출렁거렸다.
사내는 그런 운글릭 앞으로 의자 하나를 끌고 와 털썩 앉았다. 어찌나 여유가 넘치는지 그것을 보는 운글릭의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내, 내게 원하는 게 대체 뭐, 뭡니까?"
"돈이 필요할 것 같아서."
"예?"
운글릭은 사내의 말에 마치 한 줄기 서광이 하늘에서 자신을 향해 비추는 것 같았다.
사내가 품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내 휙 던졌다.
쩔렁!
제법 묵직한 쇳소리가 울렸다. 그것을 본 운글릭의 목울대가 꿀꺽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500골드다."
운글릭은 긴장한 눈으로 사내를 바라봤다.
"그걸로 일단 빚을 갚아라. 그리고 에어스트 백작에게 더 이상 손을 벌리지 마라. 싸 보인다."
운글릭은 주머니를 챙기며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 손을 벌리고 싶어서 벌렸겠는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그랬을 뿐이었다.
이제는 그렇게 하라고 해도 안 할 것이다.
"영주가 되기 위한 최소 요건을 알고 있나?"
운글릭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영주가 되는 데 그런 게 있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었다.
사내가 나직이 혀를 찼다.
"쯧쯧. 정말 생각이 아예 없는 놈이로군.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에게 유산을 상속할 거라 생각하나?"
"유, 유산이야 자동으로……."
"흥. 자동으로? 자동으로 왕국에 귀속되겠지."
운글릭이 크게 당황했다. 자신은 그저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만일 정말로 왕국에 귀속되어 버린다면 자신은 뭐가 되는가.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당한 유산 상속자로 등록을 해야지."
"등록을 어떻게 합니까?"
"행정청에 에어스트 백작과 함께 방문해서 허락을 받으면 된다."
"예?"
운글릭이 더 당황했다. 그런 짓을 제론이 해 줄 리가 없지 않은가. 자신을 뭘 믿고 해 주겠는가. 고작 1천 골드도 안 주는 사람인데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명망 있는 귀족의 보증을 받으면 되지."
"명망 있는 귀족? 예를 들면 어떤 분 말입니까?"
"왕족이나 공작?"
운글릭의 입이 쩍 벌어졌다. 세상에 어떤 미친 왕족이나 공작이 자신 같은 놈을 위해 보증을 서 주겠는가. 자칫하면 해가 될 수도 있는데 말이다.
"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 운글릭에게 내밀었다.
운글릭은 얼결에 그것을 받아 대충 읽었다. 계약서였다. 내용을 읽으면 읽을수록 운글릭의 표정이 창백해져 갔다. 이건 말이 계약서지 실제로는 노예 문서나 다름없었다.
"왜? 불만이라도 있나?"
"이, 이건 좀 너무하지 않습니까. 이대로라면 제가 영지를 얻어도 가져갈 게 없을 것 같은데……."
"가져갈 게 왜 없나? 영지 수익의 3퍼센트나 가져가는데 말이야."
운글릭은 멍하니 사내를 바라봤다. 정말 제정신이냐고 묻고 싶었다. 영지 수익금의 3퍼센트라니. 그걸로 대체 뭘 하란 말인가.
"아아, 뭔가를 좀 잘못 알고 있는 모양이군. 젤레 영지, 아니, 에어스트 백작령을 우습게보면 안 돼. 아마 3퍼센트라고 해도 족히 몇 만 골드가 넘을 테니까."
"예에?"
운글릭은 어안이 벙벙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고작 3퍼센트인데 그것이 수만 골드나 된다니, 그럼 대체 1년에 젤레 영지가 벌어들이는 수익이 얼마나 된단 말인가.
잠시 멍하게 있던 운글릭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 대단한 영지가 어떻게 에어스트 가문에 떨어진 겁니까? 전쟁에서 그렇게 큰 공을 세웠습니까?"
"공이야 제법 세웠지. 하지만 그 영지를 받을 때만 해도 그다지 대단치 않은 곳이었다."
"하면……."
"제론 폰 에어스트 백작이 그렇게 만든 것이지. 아니면 운이 좋았거나."
하지만 사내는 그것이 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제론의 능력이었다. 그런 정황이 정보를 통해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운글릭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그런 대단한 영지를 갖게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서명하겠습니다."
"탁월한 선택이다."
운글릭은 거침없이 계약서에 사인했다. 이제 그는 합법적으로 영지의 상속권을 갖게 되었다. 만일 제론이 죽으면 젤레 영지, 아니, 에어스트 백작령은 운글릭의 것이 된다.
에어스트 백작가에 내려진 공신 가문의 특혜인 세습 백작 위는 사라지겠지만, 그래도 영지에 내려진 포상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당분간 세금도 면제라는 뜻이었다.
사내는 계약서를 다시 품에 넣었다. 이제는 제론을 죽일 시간이 되었다.
운글릭은 정중히 인사를 하고 방에서 나가는 사내를 바라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그의 눈동자에 탐욕이 뚝뚝 흘러넘쳤다.
☆ ☆ ☆
제론이 다시 호텔로 들어간 것은 새벽이었다. 날이 새기 전이었기에 여전히 깜깜했다.
귀족 중에는 새벽의 유흥을 즐기는 사람이 제법 많았기에 누구도 호텔 로비로 들어선 제론을 이상한 눈으로 보지 않았다.
제론은 곧장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웠다.
유적을 찾은 덕분에 그곳의 시설을 이용해 몸도 깨끗이 씻었고, 오랜만에 수련도 충실히 했다.
그리고 마티를 이용해 주변 정보도 확인했다.
침대에 누운 제론의 표정은 심각했다. 제론이 유적을 찾아 마티를 얻은 뒤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이 바로 운글릭이었다.
그리고 운글릭이 정체불명의 사내를 만나는 모습을 똑똑히 확인했다. 당연히 그들의 대화도 몽땅 들었다. 운글릭이 계약한 서류까지 몽땅 읽었다.
'정말 다행이로군.'
만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운글릭을 영지로 끌어들였다고 생각하면 끔찍했다. 운글릭은 제론의 먼 친척이라는 걸 제외하면 결코 영지에 들여선 안 되는 인물이었다.
어쨌든 적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는 다 알아냈다. 그리고 그들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운글릭을 만난 사내에게 마티를 붙여 두었다.
향후 사내가 만나는 사람을 조사하다 보면 배후가 확실히 드러날 것이다. 물론 누군지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수도 유적의 정보 수집 범위는 체른산 유적보다 더욱 넓었다. 체른산 유적은 100킬로미터 범위를 커버한다. 한데 이곳 수도 유적은 무려 150킬로미터 범위를 커버한다.
그 정도 넓이라면 수도 전체는 물론이고 그 근방까지 싹 파악할 수 있었다.
유적이 수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어서 사실 모든 범위를 관장할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범위가 넓어서 다행이었다.
유적의 정보 커버 범위가 넓으니 당연히 폴타를 이용할 수 있는 범위도 그만큼 방대했다.
이번에 유적을 무사히 빠져나온 것도 폴타 덕분이었다.
제론은 유적과 빈민굴 깊숙한 곳을 게이트로 연결했다. 너무나 손쉽게 유적을 빠져나왔다. 당연히 빈민굴을 헤매지도 않았다.
마티를 가지고 있으니 길을 찾는 건 눈을 감고도 할 수 있었다.
제론은 새삼 초고대 문명의 위력을 실감했다. 두 지역을 잇는 게이트를 만들다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그냥 일반적인 텔레포트 게이트와는 차원이 다른 기술이었다. 말 그대로 양쪽에 입구와 출구를 만들어 연결시킨 것이다.
어떤 물건이든 사람이든 제한 없이 통과시킬 수 있으니 이용하기에 따라서 정말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공성전을 할 때, 게이트를 열어 성 내부로 기간트를 이동시키면 어떻게 되겠는가.
또 거리에 제약이 없다면 물건을 운송해 엄청난 이득을 얻을 수도 있었다. 해산물을 내륙 깊은 곳으로 이동시켜 판매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 외에도 머리만 굴리면 쓸 일이 무궁무진했다.
폴타의 가장 큰 단점은 거리에 제약이 있다는 점이었다. 고작 150킬로미터 영역 안에서만 쓸 수 있으니 실용성이 살짝 떨어지긴 한다.
하지만 제론은 실망하지 않았다. 폴타를 쓰면서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중앙 유적을 계속 클리어하다 보면 새로운 폴타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내일부터는 조금 바빠지겠군.'
제론은 미소를 지으며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내일부터는 마티를 이용해 정보를 수집할 것이다. 인재를 모으는 건 생각보다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제론은 마지막으로 운글릭과 그를 만난 사내를 어떻게 할지 찬찬히 계획을 세우며 잠들었다.
☆ ☆ ☆
운글릭은 멍하니 호텔 방에 앉아 있었다. 제론은 자신을 이 방에 넣은 이후, 단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
벌써 5일이 지났다. 그동안 운글릭이 한 일이라고는 먹고 자는 것이 전부였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날 영지로 데려가긴 할 건가?"
운글릭은 제론이 뭘 하고 다니는지, 아니, 호텔에 머물기는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호텔 측에서 나가라는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면 돈을 계속 지불하고 있다는 뜻이니 그걸로 미루어 아직 영지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짐작할 뿐이었다.
"내가 직접 찾아가 봐야 하나?"
일단 운글릭의 가장 큰 목표는 영지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영지에 입성해 어떻게 운영되는지도 파악하고, 또 일하는 사람들도 장악해야만 한다.
그래야 향후 영지를 물려받았을 때, 잡음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한데 아예 제론을 만나지도 못하고 있으니 점점 불안해졌다. 이러다가 아예 영지로 따라가지도 못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운글릭이 방 안을 서성이고 있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으헉!"
열린 문으로 사내가 들어왔다. 얼마 전 찾아와 계약을 하고 간 자였다.
"노, 노크라도 좀 하십시오!"
운글릭이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러자 사내의 입가에 냉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닥쳐라."
운글릭은 깜짝 놀라 입을 꾹 다물었다. 속에서 딸꾹질이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사내는 운글릭에게 작은 병 하나를 휙 던졌다.
운글릭은 병과 사내를 번갈아 바라봤다. 투명한 병 안에서 푸른색 액체가 찰랑거렸다.
"독이다."
"예?"
우글릭은 화들짝 놀라 병을 손에서 놓쳤다.
탱그랑!
병이 바닥에 떨어져 또르르 굴러갔다. 사내가 그것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네 몸값보다 비싼 독이다. 다시 구하기도 어려우니까 잘 간수해라."
"예. 아, 알겠습니다."
운글릭은 다시 병을 들어 조심스럽게 품었다. 그리고 두려운 눈으로 사내를 바라봤다.
"뭘 해야 할지는 알겠지?"
운글릭이 대답도 안 하고 멍하니 있자, 사내가 인상을 쓰며 말을 이었다.
"그 독으로 에어스트 백작을 죽여라. 할 수 있겠지?"
"예? 제, 제, 제가 말입니까?"
사내가 차갑게 웃었다.
"그럼 누가 죽인단 말이냐?"
"그, 그건 그쪽에서 해 주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지?"
"지, 지난번에……."
사내가 운글릭을 노려봤다. 그리고 한껏 위압감을 담아 천천히 말했다.
"잘 알아 둬라. 에어스트 백작은 상당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 익스퍼트의 끝자락에 이른 기사를 단숨에 죽일 정도야."
"헉!"
운글릭은 깜짝 놀랐다. 설마 제론이 그렇게 강한 사람일 줄은 몰랐다. 그저 운 좋게 공을 세워 영지를 물려받은 애송이라고만 여겼다.
"그러니 암습이 제대로 먹힐 리가 있겠느냐?"
"그, 그럼……."
"그래. 제일 좋은 방법이 방심했을 때 찌르는 거지."
"이, 이 독으로 말입니까?"
"독을 쓰는 법은 아주 간단해. 그저 깨뜨리면 된다."
사내가 그렇게 말하고는 붉은색 액체가 찰랑이는 병을 던졌다.
"해독제다. 미리 그것을 먹으면 중독될 일은 없을 것이다."
운글릭은 정신이 없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제론 앞에서 병을 깨뜨리면 제론이 그걸 그냥 구경만 하고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런 운글릭의 마음을 알았는지 사내가 피식 웃었다.
"머리를 써라. 꼭 목표 앞에서 병을 깨라는 법은 없지 않느냐. 미리 깨서 액체를 몸에 묻힌 채 백작을 만나면 다 해결되는데 뭘 그리 망설이는 것이냐!"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는 운글릭을 보며 말을 이었다.
"단, 병을 깨고 독이 공기에 닿는 30분 이내에 목표와 마주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독성분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니까."
운글릭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런 신비한 독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이거야말로 증거를 일체 남기지 않는 독살 아닌가.
"몸에 흡수된 독도 사라지는 겁니까?"
"목표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죽으면 30분 내에 사라져 버리지."
운글릭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이 독이 왜 그리 비싼지, 또 어째서 자신에게 이걸 가져왔는지 말이다.
이 독을 쓰기 위해선 타이밍이 생명이었다. 그리고 그 타이밍을 가장 잘 맞출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 바로 운글릭이었다.
운글릭은 생각을 정리하며 더듬더듬 말했다.
"그, 그런데 제게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통 만나 주지를 않아서……."
"끝까지 널 외면하지는 않을 것 아니냐?"
그건 그렇다. 어쨌든 한 번은 만나 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생각보다 기회가 많을 수도 있었다. 운글릭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죽이겠습니다."
사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허튼짓은 하지 마라. 그저 독만 쓰면 돼. 독이 제대로 작동하면 심장이 멈춰서 죽게 되니 금방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절대 시체를 만지지 마라. 그게 증거로 남을지도 모르니까."
운글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표정이 펴지지 않았다. 어쨌든 친척을 죽이는 일이었다. 그런 일을 앞두고 기분이 상쾌할 리 없지 않은가.
"아, 그보다 제가 영지로 내려가기 전에 죽어도 괜찮은 겁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
"그러니까…… 영지 업무를 좀 알아보고 사람도 장악하고 한 뒤에……."
사내가 피식 웃었다.
"내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네게 일을 맡긴 줄 아느냐? 그깟 지방 영지 하나 장악하는 건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넌 그저 새로운 영주로 취임만 하면 돼."
"아, 알겠습니다."
운글릭은 사내의 말을 들으며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했다. 하긴, 생각해 보면 자신을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기사단을 보내실 겁니까?"
운글릭이 조심스럽게 묻자, 사내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영지를 제대로 장악하려면 최소한 라이더가 열 명은 포함된 기사단이 있어야 한다."
운글릭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라이더가 열 명이나 포함된 기사단이라니. 그럼 기간트를 보내 주겠다는 뜻 아닌가.
"그 영지에도 기간트가 있는 겁니까?"
변방의 영지라 했다. 한데 기간트라니. 운글릭은 그제야 3퍼센트만으로도 수만 골드를 챙길 수 있다던 사내의 말이 조금씩 실감 나기 시작했다.
"몇 대가 있는지 모르지만 확실히 있다. 하지만 걱정할 건 없다. 아무리 그래도 영주를 함부로 해할 수는 없으니까."
그건 그렇다. 또한 영지의 기사가 가진 기간트는 엄밀히 따지면 영주의 것이었다. 조력자를 충분히 모아 가면 갖은 핑계를 통해 기간트를 압수해 버릴 수도 있었다.
"어쨌든 넌 제론 폰 에어스트를 죽이는 일만 생각해라. 그러면 모든 게 끝난다."
운글릭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내의 말을 듣다 보니 친척을 죽인다는 죄책감이 슬그머니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탐욕이 고스란히 들어찼다.
"반드시 성공하겠습니다."
사내는 운글릭을 믿는다는 듯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운글릭은 가슴을 진정시키며 어떻게 제론에게 접근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 ☆ ☆
이틀 후, 운글릭은 최상층에 위치한 제론의 숙소로 찾아오라는 전갈을 들고 온 종업원의 방문을 받았다.
뛸 듯이 기뻤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고서 종업원의 뒤를 따라 최상층으로 이동했는데, 가는 내내 품에 넣은 유리병을 만지작거렸다.
이건 타이밍이 중요하다. 또한 해독약을 미리 복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데 지금은 종업원의 뒤를 따라가야 하니 그것이 불가능했다. 일단 종업원에게 의심을 받아선 안 된다. 누구라도 갑자기 뭔가를 마시고 병을 깨면 이상한 눈으로 볼 것 아닌가.
'젠장. 병을 이따위로 만들면 어떻게 해?'
독이 든 병은 완벽하게 밀봉되어 있었다. 깨뜨리지 않고서는 안에 든 독을 꺼낼 방법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공기와 닿으면 일정 시간 후에 독성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취한 조치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짜증이 났다.
그렇게 고민하며 걸어가다 보니 어느새 최상층에 도착했다. 종업원이 더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도 종업원은 운글릭에게 정중히 인사를 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운글릭은 의아한 표정으로 서둘러 돌아가는 종업원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아, 그 사람이……!'
본래 종업원은 기별을 넣어 주고 운글릭이 방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원칙이었다. 한데 이렇게 그냥 도망치듯 가 버렸다는 건 뭔가 조치가 있었다는 뜻이었다.
운글릭은 자신을 여기로 보낸 의문의 조직이 가진 치밀함에 감탄했다.
"좋아. 그럼 준비를 해 볼까?"
운글릭은 일단 해독제를 꺼내 마셨다. 온몸으로 해독제가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상쾌했다.
그리고 푸른색 액체가 출렁이는 병을 꺼냈다. 지금 깨면 자칫 타이밍이 안 맞을 수도 있었다. 운글릭은 노크부터 했다.
똑똑!
"들어와!"
제론의 목소리였다. 운글릭은 망설이지 않고 병을 깼다.
쨍그랑!
푸른 액체가 촤악 튀었다. 운글릭은 바닥에 쏟아진 액체를 손으로 닦아 옷 여기저기에 묻혔다.
그리고 깨진 병의 잔해를 한쪽으로 치운 뒤, 심호흡을 하고는 문을 열었다.
과연 최상층의 방이었다. 어마어마하게 넓고 화려했다.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도 제론이 보이지 않았다.
운글릭은 다급히 움직였다. 서둘러 제론을 만나야 한다. 그래야 공기 중으로 퍼진 독 기운이 제론의 몸을 잠식할 테니까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제론을 금방 만날 수 있었다. 응접실 한가운데 있는 소파에 느긋하게 앉은 제론을 본 운글릭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독 기운이 소리 없이 스멀스멀 퍼졌다.
"부르셨습니까?"
운글릭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일단은 최대한 정중함을 잃어선 안 된다. 그동안 깎아 먹은 이미지를 다시 세우는 척 노력할 생각이었다.
"내일 영지로 내려갈 생각이다."
"내, 내일입니까?"
"그래. 그러니 대충 준비를 하도록. 아침에 떠날 테니까 오늘 짐을 싸 두는 게 좋을 거야."
"알겠습니다."
운글릭은 긴장한 눈으로 대답하며 제론을 바라봤다. 대체 언제 독에 당해 쓰러질지 궁금했다. 이대로 결과를 확인하지도 못하고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어떻게 시간을 끌지?'
운글릭은 그렇게 고민하며 제론을 빤히 바라봤다. 제론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할 말이라도 있나?"
운글릭이 대답할 말을 못 찾아 당황하는 순간, 제론이 갑자기 인상을 썼다.
"윽!"
제론은 가슴을 꽉 움켜쥐고 고통을 호소했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눈으로 운글릭을 노려봤다.
운글릭은 덜덜 떨며 제론을 바라봤다. 이윽고 제론이 바닥에 툭 쓰러졌다.
운글릭은 뭘 어째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갑자기 밖에서 소란이 일었기 때문이다.
"백작님! 백작님!"
"괜찮으십니까!"
쾅쾅쾅쾅!
문을 거세게 두드리는 소리와 제론을 부르는 소리가 뒤엉켜 운글릭의 뇌리를 복잡하게 휘저었다.
운글릭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소파 아래에 있는 공간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그곳에 숨었다.
꽈앙!
부서질 듯 문이 열렸고, 두 기사가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쓰러진 제론을 발견하고는 크게 외쳤다.
"백작님!"
두 기사는 일단 제론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리고 서둘러 제론을 안고 밖으로 나갔다.
운글릭은 소파 아래에 숨어서 그 광경을 고스란히 확인했다. 하지만 기사가 나간 뒤에도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무려 1시간이 지난 뒤에야 덜덜 떨면서 소파 밖으로 나온 운글릭은 황급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억지로 잠을 청했다.
그렇게 소란스러웠던 하루가 지나갔다. 그날 밤, 운글릭은 꿈에 영주가 되어 영지를 호령했다. 잠든 운글릭의 입가에 황홀한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