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9화 (40/217)

Chapter 5 백작의 검

세나는 긴장한 눈으로 아버지인 벨루스 백작을 바라봤다. 다른 사람은 다 밖으로 나갔고, 지금은 둘만 있었다.

벨루스 백작은 잠시 세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봤다.

"좋은 방이로구나."

이곳은 벨루스 백작령에 있는 세나의 방보다 훨씬 넓고 좋았다. 아마 레늄 왕국에 있는 그 어떤 귀족도 세나의 방보다 좋은 방에서 지내지 못할 것이다. 심지어 왕궁의 공주조차도 말이다.

벨루스 백작은 여유롭게 방을 둘러봤다. 하지만 세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잠시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 곳이다."

세나는 깜짝 놀라 백작을 바라봤다. 백작의 어투에 깃든 호의가 당황스러웠다.

"당황할 것 없다. 이곳 영지를 둘러보면서 옛날 생각이 좀 났을 뿐이니까."

세나의 눈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아버지가 하는 말에 담긴 의미를 찾으려 애썼다. 말에 호의가 담겨 있었다. 진의를 파악하지 않으면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다.

"넌 모르겠지만, 사실 우리 영지도 예전에는 그리 잘 사는 곳이 아니었다."

차분히 가라앉았던 세나의 눈빛이 다시 흔들렸다.

"우리 영지가 이 정도로 발전하게 된 건 내 대에 이르러서였지. 수십 년의 세월을 녹여 만든 영지다."

벨루스 백작은 놀란 눈을 한 세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참으로 따스했다.

세나는 그 미소를 보고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때는 저런 미소를 매일 볼 수 있었다. 예전의 일이 머릿속에 우후죽순처럼 불쑥불쑥 떠올랐다.

"내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내 할아버지가 영주일 때의 모습이 떠오르더구나."

벨루스 백작이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을 이었다.

"딱 이 영지 같았지. 땅은 척박하고, 영지민의 생활은 낙후되었는데, 표정은 밝았다. 희망이 있기 때문이었지."

세나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이런 얘기를 듣는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왜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사람은 말이다, 희망이 있다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웃을 수 있단다."

벨루스 백작은 그 말을 하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어릴 때의 일이었지만,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지만, 그는 그것 하나만은 확실히 기억했다.

당시 그가 보았던 영지민의 웃음은 그의 마음에 화인처럼 각인되었다. 그저 잔잔한 웃음뿐이었지만, 그 어떤 것보다 강렬하고 자극적이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영지를 위해 달려올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한데 한동안 그걸 잊고 있었다.

이곳 젤레 영지는 그때의 벨루스 백작령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영지 개간 사업이 막 끝나서 거대한 농지를 갖게 되었다. 척박한 황무지를 농지로 개간하는 데 들어간 노력과 희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은 해냈다. 그랬기에 희망이 담긴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당시 어린 벨루스 백작이 본 것은 농사를 짓기 위해 일터로 향하던 영지민의 모습이었다. 일을 할 수 있다는 즐거움, 그리고 그것을 통해 앞으로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행복이 응축된 미소였다.

오늘 백작은 농지로 향하던 젤레 영지의 영지민을 통해 추억을 보았다.

벨루스 백작이 표정에 어렸던 미소를 싹 지우고 세나를 바라봤다. 세나는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에 다시 긴장했다.

"미안하구나."

세나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리고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이 어떻든 벨루스 백작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세나의 손을 꽉 잡았다.

"더 이상 강요하지 않으마.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예?"

세나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얼떨떨한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이렇게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도 있는 건가?

"슈린 공작가에서 온 혼담은 일단 거절하마. 당분간 시간을 갖자고 하면 이해해 주겠지."

세나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전혀 생각도 못한 전개였다. 그녀의 시선이 아버지의 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벨루스 백작의 눈에 따스함이 깃들었다. 이렇게 마음을 터놓고 딸을 바라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 사람이 떠나기 전에는 종종 있었던 것 같은데…….'

아련함과 함께 씁쓸함이 밀려왔다. 아내가 죽은 뒤로 미친 듯이 영지 일에만 전념했다.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에 몰두하면서도 문득문득 떠오르는 아내의 모습에 자신이 얼마나 그녀를 사랑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렇게 아내가 생각날 때마다 더욱 일에 집중했다. 그래도 참기 어려우면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오로지 일과 수련으로 점철된 생활이었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고 믿었다. 자신이 올바로 서야 모든 것이 잘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이제야 깨달았다. 자신은 틀렸다.

중요한 것은 아내만이 아니었다. 아내 외에도 가족이 있었다. 누가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소중했다.

벨루스 백작은 어느새 훌쩍 커 버린 자신의 딸을 다시 한 번 바라봤다. 얼굴 곳곳에 아내의 흔적이 깊게 남아 있었다.

'닮았구나.'

그냥 얼굴만 닮은 것이 아니었다. 한 번 옳다고 믿으면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의지를 꺾지 않는 모습까지도 닮았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은 아직도 그걸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벨루스 백작은 딸의 모습을 보면서 더욱 많은 생각을 했다. 수많은 깨달음이 물결처럼 가슴에 파문을 일으켰다.

삶과 인생에 대한 고찰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최근 벽에 부딪히기라도 한 듯 아무리 수련해도 성과가 없는 검술에까지 이어졌다.

백작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의 몸에서 은은한 마나의 파동이 흘러나왔다.

세나는 깜짝 놀랐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던 아버지가 갑자기 눈을 감더니 무방비 상태로 마나를 흘려 내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직감적으로 지금 아버지에게 너무나 중요한 순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또한 너무나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도 말이다.

세나는 조용히 앉아 아버지를 바라봤다. 지금 여기서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위험으로부터 아버지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세나가 바라보고 있는 사이 벨루스 백작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의 파동은 점점 강렬해졌다.

그렇게 하염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 ☆ ☆

금사자 기사단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문을 지켰다. 백작이 다시 나오거나 따로 명령을 내리지 않는 한, 끝까지 자리를 뜨지 않겠다는 결의가 느껴졌다.

열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금사자 기사단은 벨루스 백작령 최강 기사단이자, 기간트 부대였다.

모두 크라테르를 가졌으며, 기사단장의 경우 크란 제국에서 특별히 수입한 임베르를 보유하고 있었다.

임베르는 크란제국의 범용 기간트였다. 출력이 무려 2.0이나 되는 강력한 기체였다.

그저 출력만 높은 게 아니었다. 기간트에 사용된 기술은 그 어떤 왕국이나 마탑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그들은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금사자 기사단은 전원이 익스퍼트로 이루어져 있었고, 또한 라이더로서의 능력도 뛰어났다. 즉, 기간틱 나이트였다.

그들은 복도를 거의 장악하다시피 했다. 젤레 영지성의 복도는 상당히 넓었지만 그들이 있는 곳은 누구도 지나갈 수 없었다.

꼭 이 복도를 쓸 필요는 없었기에 시종이나 시녀는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고 다른 복도를 이용했다.

그렇게 위압감을 뿌려 대며 기다렸지만 백작은 쉽게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또 흘러갔다.

사실 백작은 지금 방 안에서 중요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주변 마나가 사정없이 요동쳤다. 하지만 그 요동은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았다.

젤레 영지성의 모든 벽은 마나의 흐름을 감춘다. 차단하는 게 아니라 흐름을 안정적으로 유지시킨다. 특별한 마법진을 벽마다 설치한 게 아니라, 영지성 자체가 거대한 마법진이었기에 발생하는 현상이었다.

금사자 기사단은 대체 안에서 무슨 얘기가 이렇게 길어지나 궁금했다. 하지만 함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조금씩 짜증이 났다. 아무리 충성심이 높다지만 그들도 사람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물론 그 짜증은 문이 열리고 백작이 등장하면 말끔히 사라질 것이다.

또한 그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어쨌든 벨루스 백작은 이 영지에 호의를 가지고 오지 않았다.

그것은 이 영지의 영주 또한 백작에게 호의를 가지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했다.

금사자 기사단은 언제든 기간트를 불러낼 수 있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췄다. 성의 복도가 제법 넓고 높긴 했지만 아마 기간트를 불러내면 상당히 많이 부서질 것이다.

또한 성 자체가 많이 무너지게 될 것이다. 무려 열다섯 기의 기간트가 나타나 휘젓는다고 생각하면 성이 버티는 건 불가능했다.

기간트 하나의 무게는 족히 10톤이 넘는다. 조금만 움직여도 벽이 부서지고 바닥이 무너지는 게 당연했다.

그들은 이 아름다운 성이 무너지면 조금 안타까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필요한 상황이 오면 망설임 없이 기간트를 꺼낼 것이다.

그들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기간트를 소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이다.

사실 성 자체가 마법진이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은 벽 너머로 마나의 흐름이 안정되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성 내부에서는 결코 기간트를 꺼낼 수 없었다. 아공간이 봉인되는 것이다. 아니, 아공간뿐 아니라 웬만한 마법은 대부분 봉인된다고 보면 된다.

물론 초고대 문명의 마법은 얘기가 좀 달라진다. 그렇기에 현재 성에서 기간트를 꺼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제론뿐이었다.

어쨌든 금사자 기사단은 백작이 나오기만을 끝까지 기다렸다.

그렇게 날이 새 버렸다.

그쯤 되자 그들도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만일 백작이 방에서 잠을 자려고 한다면 자신들에게 알렸어야 한다. 한데 아직까지 아무 소식이 없다는 건 분명히 안에서 뭔가 일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단장님, 들어가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사 하나가 나서서 물었다. 단장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사실 끝까지 기다리려고 했다. 하지만 너무 오래 기다렸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게 아니고서야 어찌 지금까지 말 한 마디 없을 수 있단 말인가.

기사단장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간다."

아마 문을 부숴야 할 것이다. 성에 있는 모든 것은 아름다웠다. 문도 아름다웠다. 심지어는 문고리마저도 예술품 같았다.

그런 아름다운 문을 부순다는 것이 조금 아깝긴 했지만 어쨌든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단장의 말에 기사 하나가 나섰다. 익스퍼트의 실력자이니 그저 주먹질 한 번만 해도 문이 부서질 것이다. 물론 혹시라도 문이 잠기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 확인이 먼저였다.

철컥!

문은 단단히 잠겨 있었다. 혹시라도 방해받지 않기 위해 세나가 문을 잠근 것이다.

"잠겼습니다."

"부숴라."

기사단장의 명령에 기사가 주먹에 힘을 꾹 주었다. 이대로 마나를 흘려 문을 후려치면 문이 박살 날 것이다.

기사가 막 문을 후려치려는 순간, 제론의 목소리가 울렸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제론의 목소리에는 마나가 담겨 있었다. 아무리 익스퍼트라도 목소리에 마나를 담을 수는 없었다. 아니, 설사 소드 마스터라 해도 방법을 모르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아무도 제론의 목소리에 마나가 담겼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다만 마치 귓가에 대고 소리친 것처럼 고막이 터질 듯한 느낌에 깜짝 놀랐을 뿐이었다.

당연히 문을 후려치려던 기사는 목적을 이룰 수 없었다. 목소리에 놀라 주먹에 모은 마나가 흩어져 버렸다.

금사자 기사단 전원이 긴장한 눈으로 제론을 노려봤다. 어쨌든 그들 입장에서 제론은 방해꾼이었다. 다른 무엇도 아닌 주군의 안위를 확인하고자 하는 일이었다. 그걸 방해한다면 절대 물러날 수 없었다.

제론은 아무렇지도 않은 태도로 저벅저벅 걸어 문을 가로막고 섰다. 누구도 제론을 제지하지 않았다. 왠지 알 수는 없었지만 금사자 기사단은 아무도 움직이지 못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

기사단장이 분노를 담아 외쳤다. 하지만 그의 외침에 대한 제론의 반응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말을 가려 하라!"

제론의 호통에 기사단장이 입을 꾹 다물었다. 확실히 이번에는 과했다. 아무리 못마땅해도 한 영지의 영주였다. 게다가 백작 위를 가진 귀족이었다.

자칫 이를 문제 삼고 나오면 벨루스 백작의 이름에 누가 될 수도 있었다.

기사단장은 즉시 한발 물러나 정중히 사과했다.

"내가 실언을 했소. 용서해 주시오."

금사자 기사단의 단장은 자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다. 일반적인 기사와는 많이 달랐다. 그렇기에 제론도 문제를 더 키우지 않았다.

"받아들이겠소."

제론이 사과를 받아 문제가 일단락되었지만 진짜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금사자 기사단은 제론을 향해 압박감을 쏟아 냈다.

제론은 그 막대한 압력 속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만일 문을 막고 선 사람이 제론이 아닌 보통 기사였다면 다리가 후들거려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비켜 주시오."

기사단장이 단호히 말했다. 비키지 않으면 베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기사단장 역시 익스퍼트였다. 하지만 그는 다른 기사와 달랐다. 익스퍼트가 된 지 20년이 넘었다. 익스퍼트의 끝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누구든 벨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상대가 소드 마스터만 아니라면 누구든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제론은 그저 문을 막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이들에게 구구절절이 설명해 봐야 아무 소용없었다.

방 안에 있는 벨루스 백작이 지금 중요한 순간이고, 문을 부수고 들어가면 방해가 되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을 해 봐야 누가 믿겠는가.

"당장 비키시오!"

기사단장이 소리치며 검을 뽑았다.

챙!

보통 기간트를 보유한 기사는 두 자루의 검을 가지고 다닌다. 하나는 아공간 마법이 새겨진 거대한 검이고, 다른 하나는 진짜 자신의 검이었다.

기사단장은 제론에게 롱소드를 겨눴다.

제론은 담담한 눈으로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슬쩍 쥐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어떤 공격이 오더라도 발검과 동시에 막을 수 있었다.

"비키라고 했소!"

기사단장이 검을 푹 찔렀다. 위협이었다. 목 바로 앞에서 멈출 요량으로 내지른 것이다.

쉭!

내지른다 싶은 순간 검 끝이 제론의 목에 딱 닿았다. 피부에는 생채기도 나지 않았다.

지켜보던 기사 전원이 깜짝 놀랐다. 기사단장의 검이 아예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강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최근 기사단장과 함께 수련을 하거나 대련을 한 적이 없어서 얼마나 강해졌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비키시오."

기사단장이 나직하지만 위협을 가득 담아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제론의 표정은 평안하기 그지없었다.

조금 전에도 굳이 막을 필요를 느끼지 않아 가만히 있었다. 그 어떤 살기나 투기가 없는데 어찌 사람을 상하게 할 수 있겠는가. 실력이 없는 자도 아니고 말이다.

"날 믿고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오. 아마 오래 걸리지 않을 거요."

제론의 말은 해석하기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었다. 기사단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의 눈에 살기가 넘실거렸다.

기사단장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았다. 즉시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대로 목을 찌르는 것이 가장 빠르지만 아무리 그래도 백작을 죽일 수는 없었다. 검을 틀어 일단 어깨를 찔렀다.

쉭!

기사단장의 눈이 경악으로 커다래졌다. 분명히 어깨를 노리고 찔렀다. 한데 빗나갔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검은 제론의 어깨를 살짝 빗겨난 채로 문에 닿아 있었다.

이를 악문 기사단장이 검을 회수하며 다시 휘둘렀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니 이제는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쉬이익!

기사단장의 검이 이번에 노린 곳은 허벅지였다.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로 호선을 그리며 움직인 검이 제론의 허벅지를 베어 갔다. 이번에는 실수를 할 여지가 없었다.

후웅!

기사단장은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또 실패였다. 분명히 허벅지를 베었다고 생각했는데 검이 그냥 지나쳐 버렸다. 마치 유령을 벤 것처럼.

"후욱!"

기사단장은 숨을 내뱉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흥분은 금물이었다.

다시 검을 겨눈 기사단장은 이를 악물고 다시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연격을 염두에 두었다. 상대의 실력이 상상 이상이었다.

쉬쉬쉬쉭!

챙챙챙챙!

기사단장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숨을 참고 죽어라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제론은 그저 평온한 표정으로 언제 뽑았는지 모를 검을 가볍게 흔들며 모든 공격을 차단했다.

마치 제대로 검을 휘두르지도 못하는 느낌이었다. 아무리 계속 공격해도 상대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을 것 같아 아득해졌다.

쩡!

검과 검이 강하게 충돌했다. 그 틈을 이용해 기사단장이 뒤로 훌쩍 물러났다. 그의 표정은 심각하기 그지없었다.

'일부러 물러날 틈을 만들어 줬다.'

기사단장은 믿을 수 없었다. 그가 알기로 제론의 나이는 이제 고작 27세였다. 한데 이 믿을 수 없는 강력함은 대체 뭐란 말인가.

분명히 어떤 계기만 있으면 소드 마스터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즉, 소드 마스터 바로 아래라는 뜻이다. 한데 그런 자신이 제론에게 농락당하고 있었다.

'그럼 저자가 소드 마스터라도 된단 말인가?'

그건 더 믿을 수 없었다. 고작 27세에 소드 마스터라니. 그게 말이나 된단 말인가.

대륙을 통틀어 소드 마스터는 단 세 명뿐이었다. 한데 그중 가장 어린 나이에 소드 마스터가 된 사람도 50살이 넘어서야 간신히 그 자리에 올랐다.

삼 인의 소드 마스터는 다들 입이라도 맞춘 듯 말했다. 소드 마스터가 되려면 최소한의 세월이 필요하다고. 그것은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니 제론이 소드 마스터일 리 없었다. 기사단장은 그렇게 스스로에게 믿음을 강요했다.

기사단장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그리고 다시 달려들었다. 어쨌든 이 의심스러운 상황에서 우선 방 안에 있는 주군의 모습을 확인해야만 했다.

스릉!

기사단장의 눈에 지금까지보다 더 큰 경악이 담겼다. 제론은 온 힘을 다한 기사단장의 일격을 그냥 흘려 버렸다.

아니, 그저 흘리기만 한 게 아니라 공격 방향을 크게 바꿔 버렸다. 기사단장은 다급히 발을 뒤로 치웠다.

쩡!

기사단장의 검이 방금 전 발이 있던 자리를 찔렀다. 더 놀라운 건 마나가 가득 담긴 검으로 바닥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기사단장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혼자서 당해 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기사단장의 시선이 근처에서 멍하니 서 있는 단원들에게로 향했다.

"뭣들 하고 있나!"

기사단장의 호통에 금사자 기사단은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지금 뭘 해야 하는지 단번에 깨달았다. 무수히 훈련한 상황 중 하나이기도 했다.

척척척척!

열네 명의 기사가 기사단장을 중심으로 쫙 퍼졌다. 그들은 제론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크게 포위망을 형성했다.

제론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금사자 기사단이 움직이는 모습을 가만히 살피며 빈틈을 찾았다. 제론의 눈에 확연히 보이는 빈틈만 해도 세 군데나 있었다.

"계속할 거요?"

제론이 무심한 눈으로 물었다. 기사단장은 순간적으로 움찔했지만 이내 이를 악물고 검을 겨눴다.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쳐라!"

기사단장의 외침과 동시에 열네 명의 기사가 일제히 검을 찔렀다. 상대가 피할 방향까지 미리 선점해 공격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기사단장은 혹시라도 나타날 빈틈에 대비해 제론을 노려봤다.

제론은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그저 손목을 가볍게 몇 번 움직이는 것만으로 모든 공격을 차단해 버렸다.

채채채채채챙!

금사자 기사단은 쉴 틈을 주지 않으려 숨까지 참고 검을 찔러 댔다. 하지만 아무리 공격해도 제론의 옷깃 하나 건드릴 수가 없었다.

동시에 열네 군데를 노리는데도 제론은 그 모든 공격이 채 힘을 발휘하기도 전에 차단해 버렸다.

결국 기사단장까지 가세했지만 상황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동안 공격하던 금사자 기사단은 제풀에 지쳐 뒤로 물러났다.

다들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숨을 헐떡였다. 그리고 경악이 가득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대체 어떻게 이런 실력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열다섯 명의 기사와 싸워 그들을 이기는 건 정말로 실력이 뛰어나다면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공격을 한자리에 서서 모조리 막아 내는 건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제론은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마치 전혀 움직이지도 않은 것처럼 고요했다.

금사자 기사단은 더 이상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제론이 많이 봐주고 있다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너무 지쳐서 당장 달려들 수도 없었다.

그렇게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금사자 기사단은 숨을 고른 뒤 다시 기회를 노려 달려들 계획이었다. 물론 제론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기사단장은 호흡을 완전히 가다듬은 뒤 제론을 노려봤다. 금방이라도 다시 달려들 것처럼 검을 꽉 쥐었다.

하지만 더 이상의 공방은 없었다. 언제까지라도 열리지 않을 것처럼 굳게 닫힌 문이 열린 것이다.

딸깍.

문이 천천히 열렸다. 금사자 기사단 열다섯 명의 시선이 일제히 그쪽으로 향했다.

문이 활짝 열렸고, 벨루스 백작이 나타났다. 너무나도 멀쩡한 모습이었다. 그는 상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무슨 일이냐!"

벨루스 백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상황이 묘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자리에 제론이 있는 것도 의심스러웠고, 또 금사자 기사단이 검을 뽑은 사실도 기분 나빴다.

"괜찮으십니까?"

기사단장의 물음에 벨루스 백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느 때보다 좋다."

벨루스 백작의 시선이 이번에는 제론에게로 향했다.

"설명이 필요한 것 같네만."

제론은 돌아서서 벨루스 백작을 쳐다봤다. 그리고 고개를 한 번 끄덕인 후, 정중히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그러자 벨루스 백작이 흠칫 놀랐다. 그는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세나를 쳐다봤다. 세나는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선망의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벨루스 백작의 눈빛이 묘해졌다. 그의 시선이 세나와 제론을 번갈아 오갔다. 백작의 시선이 최종적으로 향한 곳은 금사자 기사단장이었다.

"아직도 그러고 서 있는 건가?"

기사단장은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서둘러 납검했다. 그리고 난감한 표정으로 조금 전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설명하는 내내 제론의 실력에 대한 순수한 감탄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벨루스 백작의 표정이 더욱 묘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제론을 바라봤다.

"고맙네."

짧은 말이었지만 진심이 담겨 있었다.

만일 제론이 아니었다면 금사자 기사단이 문을 부수고 방 안으로 난입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중요한 순간에 방해를 받아 마나가 역류해 몸이 크게 상하거나, 심하면 죽을 수도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새로운 경지에 들지 못하고 좌절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벨루스 백작의 말에 금사자 기사단이 동요했다. 뭔가 상황이 이상했다. 하지만 일단은 그냥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금사자 기사단이 한발 물러나자, 벨루스 백작은 몸을 돌려 세나를 바라봤다. 백작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잘 자거라. 내일 다시 얘기하자꾸나."

금사자 기사단의 입이 일제히 쩍 벌어졌다. 너무나도 생소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주 오래전에는 가끔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 오래되어서 이젠 기억마저 가물거렸다.

한데 그걸 지금 본 것이다.

"크흠!"

벨루스 백작은 자신이 하고도 쑥스러운지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서둘러 움직였다.

금사자 기사단이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제론과 세나는 그 모습을 보며 빙긋 웃었다.

"영주님. 그런데 궁금한 게 있어요."

세나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제론을 바라봤다. 그리고 제론이 채 뭐라고 반응을 하기도 전에 질문을 이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설마 제 방을 훔쳐보신 건 아니시죠?"

세나가 생긋 웃었다. 제론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마나 유동을 느끼고 짐작한 것뿐이야."

세나의 표정이 금세 실망으로 물들었다. 농담으로라도 그렇다는 대답을 듣고 싶었다.

"이만 쉬도록 해. 피곤할 텐데."

제론이 그 말만 남기고 돌아가자, 세나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아. 진도 나가기 정말 어렵네."

세나의 한숨이 복도를 따라 흘렀다.

☆ ☆ ☆

벨루스 백작은 숙소로 돌아와 의자에 몸을 기댔다. 금사자 기사단은 바로 옆방에 머물렀다.

의자에 앉아 주위를 슬쩍 둘러봤다. 새삼스럽게 방 안 구석구석이 눈에 들어왔다. 상당히 좋은 방이었다. 벨루스 백작령에 있는 자신의 침실보다 훨씬 좋았다.

이런 방이 성 곳곳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벨루스 백작은 슬쩍 손을 들어 손바닥을 쳐다봤다. 그리고 주먹을 꽉 쥐었다.

오늘 검술에 대한 뭔가 중대한 깨달음을 얻었다. 한데 그게 정확히 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벨루스 백작은 이미 익스퍼트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익스퍼트에서 벗어난 건 절대 아니었다.

"뭔가 변한 건 분명한데……."

그것이 무엇인지 실체가 명확하지 않았다. 이럴 때는 그저 검을 휘둘러 보면 훨씬 간단히 알 수 있었다. 벨루스 백작은 벌떡 일어나 방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제법 공간이 넓었기에 가볍게 검을 수련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스릉.

백작이 검을 뽑았다. 그리고 천천히 휘두르기 시작했다.

쉭! 쉭! 쉭! 쉭!

집중하니 검을 타고 마나가 흘렀다. 그것은 익스퍼트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예전과 달라진 점은 전혀 없었다. 마나는 분명히 그러했다.

달라진 것은 검술 자체였다. 검을 휘두르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워졌고, 검이 지나는 길이 예전보다 훨씬 명확하게 보이고 느껴졌다.

한바탕 검을 휘두른 벨루스 백작은 기분 좋게 흐르는 땀을 닦으며 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바닥을 다시 한 번 쳐다봤다.

한동안 그렇게 손바닥을 보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야 어렴풋이 뭘 얻은 건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멀었다. 완전히 자신의 것이 되지 않았다.

벨루스 백작은 앞으로 많은 시간을 들여 수없이 노력해야 이것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스릉.

다시 검을 뽑았다. 그리고 검을 휘둘렀다.

쉭! 쉭! 쉭! 쉭! 쉭!

백작은 그렇게 밤이 되고 다시 날이 밝아올 때까지 쉬지 않고 끊임없이 검을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똑똑.

노크 소리에 벨루스 백작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동쪽에 난 창을 통해 햇빛이 쫙 들어오고 있었다. 아침이 된 것이다.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느라 밤이 지나가고 다시 아침이 온 것도 모르고 있었다.

잠을 전혀 못 잤지만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충족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아직 멀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은 지금 분명히 보통 익스퍼트의 한계를 넘어섰다. 물론 그렇다고 소드 마스터가 되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저 검의 길을 하나 깨달았다는 것이 맞았다.

벨루스 백작은 뚜벅뚜벅 걸어가 문을 열어 주었다. 열린 문 사이로 세나의 모습이 보였다.

"왔구나. 어서 들어오너라."

벨루스 백작이 따뜻하게 그녀를 맞아 주었다. 세나는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지 약간 얼떨떨했다.

안으로 들어간 세나는 잠시 아버지의 모습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몸은 좀…… 어떠세요?"

벨루스 백작이 환하게 웃었다.

"아주 좋다. 네가 날 그렇게 열심히 지켜 줬는데, 괜찮지 않을 리 있겠느냐?"

"다행이네요."

세나는 몇 마디 대화를 나누며, 아버지와 자신 사이에 놓여 있던 벽이 조금씩 허물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어쩔 생각이냐?"

"제 꿈은 여기에 있어요."

벨루스 백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를 한 번 걸어 볼 만한 영지이긴 하더구나."

세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설마 아버지가 영지를 이 정도로 칭찬할 줄은 몰랐다.

"황무지를 어떻게 개간한 건지는 몰라도 향후 레늄 왕국의 곡물 시장을 완전히 뒤집어 버릴 수도 있겠더구나."

벨루스 백작은 그렇게 말하며 긴장한 표정의 세나를 바라봤다.

"아마 눈독을 들이는 자들이 많아질 것이다. 그걸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영지 성장의 분수령이 되겠지."

세나는 아버지의 판단에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에 관해서는 최근에도 제론, 바이스와 함께 몇 차례 논의를 거쳤다.

그리고 힘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카이트가 데려온 라이더가 여러 명 있고, 또 따로 키우기 시작한 라이더까지 있으니 만일의 사태에는 충분히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기간트야 엄청나게 많이 있으니까.'

세나가 수리한 것만 해도 백 기가 넘는다. 라이더가 모자라서 그 모든 기간트를 쓸 수는 없겠지만, 꾸준히 애쓰면 수십 기의 기간트 정도는 어떻게 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세나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것을 본 벨루스 백작이 빙긋 웃었다. 마음을 바꾸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처럼 그냥 밀어붙였다면 세나에게 저런 표정이나 눈빛을 기대할 수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이곳 영주와는 무슨 사이더냐?"

"예?"

세나가 크게 당황했다.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왜 대답을 못 하느냐? 예전 우리 영지에 방문하기도 했으니 보통 사이는 아닐 것 같은데, 그렇지 않느냐? 군부에서도 함께 지냈던 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야."

"그, 그러니까…… 아직……."

"아직? 설마 너 혼자 일방적인 감정을 주고 있는 건 아니겠지?"

벨루스 백작이 깜짝 놀라 물었다. 세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막상 이런 질문에 부딪히니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지금까지 제론은 자신에게 그 어떤 확신도 주지 않았다. 관계는 지지부진했고, 진도가 더 나가고 싶어도 그러지 못해서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한데 그런 말을 어떻게 아버지에게 한단 말인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허어. 이거 안 되겠구나. 내가 직접 영주를 만나 담판을 지어야겠다."

벨루스 백작의 말에 세나가 화들짝 놀랐다.

물론 백작은 세나와 제론의 관계를 이어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미지근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세나를 이용하려고 하는지 확인하고, 그게 아니라면 마음가짐을 조금 달리하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세나가 받아들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다급히 아버지를 말렸다.

"그, 그러지 마세요!"

벨루스 백작이 살짝 커진 눈으로 세나를 바라봤다. 세나는 아버지의 소매를 꽉 잡고 있었다.

"제,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러니……."

잠시 세나의 붉어진 얼굴을 들여다보던 벨루스 백작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러니 이만 이걸 놓고 앉아라."

세나의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

백작은 일단 화제를 돌렸다. 그냥 뒀다간 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오늘 오후에 떠날 생각이다."

"예? 벌써요?"

"그래. 일이 마무리되었으니 영지로 돌아가야지."

세나의 표정에 아쉬움이 어렸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간신히 좋아졌는데, 이렇게 금방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안타까웠다.

벨루스 백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세나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부드럽게 그녀를 안아 주었다.

"언제든 힘들면 돌아오도록 해라."

세나는 처음에는 눈이 동그래질 정도로 놀랐지만 이내 살며시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게 할게요."

벨루스 백작이 세나에게서 떨어지며 장난스런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다음에 좋아하는 남자와 함께 방문하면 좋겠구나."

세나의 얼굴이 다시 달아올랐다. 그녀는 터질 것 같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꼭 그렇게 할게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결연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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