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벨루스 백작의 방문
세나는 제론으로부터 베르를 받은 이후로 그야말로 충실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베르를 분석하고 수리하는 동안 무수히 많은 것을 얻어 냈다.
고대 문명의 기술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았으며, 또 그들의 마법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제론이 오래전 그녀에게 전해 준 기간트에 관한 지식은 그보다 더 대단하다는 점이었다.
세나는 허리를 펴고 기지개를 한 번 켰다. 그리고 이리저리 관절을 돌리며 몸을 풀었다.
몸을 푼 세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이곳 세나의 공방은 기간트 수리나 제작에 있어서는 최고의 시설을 자랑했다.
기간트를 양산하는 공장처럼 기간트를 빠르게 쏟아 낼 수는 없지만, 정성을 들여 제대로 된 기간트를 제작하는 데에는 최고의 환경이었다.
공방은 상당히 넓었다. 또한 기간트가 꼿꼿이 서도 한참이나 남을 만큼 높았다.
세나는 공방의 한쪽 벽으로 걸어갔다. 공방의 벽은 각종 기이한 문양으로 꽉 채워져 있었다. 하얀 바탕에 검은 선으로 이루어진 문양이었다.
세나는 익숙하게 그 문양 중 하나를 찾아 손바닥을 갖다 댔다.
후웅.
벽이 좌우로 열렸다. 열린 벽 안에는 칸칸이 나뉜 공간이 있었다. 수백 개가 넘는 칸이 있었는데, 일부는 비어 있었고, 일부는 뭔가가 놓여 있었다. 기간트 무구였다.
세나는 수리가 끝난 기간트를 아공간에 담아 이곳에 보관했다. 물론 처음 수리한 열다섯 대의 실바는 아공간이 따로 없었기에 이곳에 놓을 수 없었다.
그 실바는 제론이 몽땅 가져가 버렸다.
"정말 대단해……."
세나 역시 바이스와 마찬가지로 이곳 젤레 영지에 온 이후 놀라는 일이 잦았다.
제론이 한 번씩 찾아와 수리할 기간트를 쏟아 낼 때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기간트 중 몰레스가 섞여 있어서 또 놀라야 했다.
이렇게 멋진 공방을 만들어 준 것에 다시 놀랐고, 이번에는 베르를 수리할 기회를 주어서 놀랐다.
그것도 한 대가 아니었다. 무려 다섯 대의 베르를 놓고 갔다.
이제는 은근히 기대 중이었다. 과연 이 베르를 다 고친 다음에는 어떤 걸 내려놓을지 말이다.
세나는 차분히 자신이 수리해 놓은 기간트 무구를 쭉 둘러본 뒤, 다시 문을 닫았다. 문을 닫는 것 역시 여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양에 손바닥을 갖다 대면 된다.
후웅!
문이 닫히자, 어디에 그런 공간이 있었냐는 듯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대체 이 많은 기간트는 어디서 난 걸까?"
예전부터 갖고 있던 의문이었다. 제론은 대체 어디서 이런 기간트를 가져온단 말인가. 몇 기 정도야 어찌어찌 구할 수 있다고 해도 이건 너무 많았다.
어쨌든 이 정도 기간트가 있다면 젤레 영지는 이미 영지 수준을 넘어선 무력을 보유한 거나 다름없었다.
벨루스 백작령에도 기간트 라이더로 이루어진 기사단이 있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보통 백작령이 보유한 기간트는 삼십 기 정도였다. 벨루스 백작령의 경우 좀 더 많아 약 육십 기의 기간트를 보유했다. 그 정도면 웬만한 후작가나 공작가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았다.
그러니 백 기가 넘는 기간트를 보유했다는 건 그들을 월등히 넘어선다는 뜻이었다.
세나는 잠시 자신이 작업하던 곳을 바라봤다. 거대한 기간트가 조각조각 해체된 체 허공에 떠 있었다. 마법으로 부품과 강판을 허공에 띄운 것이다.
"정말 대단해."
세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허공에 뜬 부품을 이리저리 돌렸다. 이렇게 허공에 떠 있으면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아도 부품을 구석구석 살필 수 있었다.
이곳은 기간트 엔지니어에게는 꿈과도 같은 공간이었다.
"후우. 아무래도 오늘은 집중이 안 되네."
세나는 오늘 작업은 여기서 마무리하기로 했다. 왠지 계속 마음이 싱숭생숭하고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이대로는 더 작업을 해 봐야 의미가 없었다.
세나는 공방을 나섰다. 공방은 영주성 지하에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원하면 햇빛을 직접 공방으로 들이는 것도 가능했다.
이런 성을 설계한 제론도 대단했고, 또 이렇게 멋지게 완성시킨 바이스도 정말로 대단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자신만 뒤처지고 있는 것 같았다.
"더 열심히 해야지."
세나는 그렇게 다짐하며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기간트 공방은 사실 비밀스러운 장소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정확한 위치는 극비 사항에 속했다.
그곳을 정확히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제론과 세나뿐이었다.
계단 끝에는 막다른 장소가 있었다. 바닥에 마법진이 새겨진 곳이었는데, 두세 명이 서면 꽉 찰 정도로 좁았다.
세나는 마법진 위에 섰다. 그리고 손가락을 튀겼다.
딱!
그 순간, 그 자리에서 세나의 모습이 사라졌다. 다시 세나가 나타난 장소는 그녀의 방 한가운데였다.
세나의 공방은 그녀의 방과 공간이동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다.
방에 도착한 그녀는 일단 샤워부터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은 좀 다른 기분으로 편히 쉬고 싶었다. 그동안 채 구경하지 못했던 영주성 곳곳을 가 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밖으로 나간 세나는 묘하게 분위기가 들뜬 것 같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의 분위기가 평소와 많이 달랐다.
'영주님은 어디 계시지?'
제론을 떠올리니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요즘 들어 제론에 대한 마음이 더욱 깊어졌다.
세나는 걸음을 빨리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해졌다. 어쩌면 그저 기분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리고 제론이 보고 싶었다.
"흥. 손님 대접이 형편없군. 대체 여기 주인은 얼마나 기다려야 나오는 건가?"
벨루스 백작이 비꼬며 말했다. 그를 시중드는 시녀와 시종, 그리고 집사는 안절부절못했다. 이렇게 높은 사람을 손님으로 맞아 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죄, 죄송합니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지만 기다린다고 성에 없는 영주가 금방 올 수 있을 리 없었다. 집사는 일단 바이스에게 연락을 넣었다. 영주인 제론은 오늘 수도로 떠났다. 그래서 더 난감했다.
"영주가 있긴 있는 건가?"
집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사실 영주가 없을 수도 있다. 먼저 무례를 저지른 건, 기별도 없이 다짜고짜 찾아온 벨루스 백작이었다.
하지만 집사는 전혀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왕국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벨루스 백작의 심기를 어지럽혀선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집사는 서둘러 문가로 걸어가 그곳에 대기하던 시종에게 물었다.
"어떻게 되었느냐?"
"총관님께서 오고 계십니다."
젤레 영지의 총관은 바이스였다. 물론 적당한 인재가 들어오면 내줘야 할 자리였다. 그리고 바이스는 마탑주가 될 것이다.
집사는 소식을 듣고도 문가를 정신없이 서성였다. 그래선 안 되지만 지금은 그런 것조차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사실 이는 벨루스 백작이 의도적으로 만든 분위기였다. 끊임없이 기세를 내뿜으면서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압박했다.
일단 이렇게 흔들어서 차근차근 빈틈을 만들어 가야 나중에 원하는 걸 얻기가 더 쉬워질 테니 말이다.
'영주라는 놈도 이렇게 간단했으면 좋겠는데…….'
물론 그저 바람일 뿐이었다. 실제로는 절대 이렇게 간단히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벨루스 백작은 당당했다. 자신 있었다. 자신에게는 힘이 있으니 말이다.
잠시 후, 응접실 문이 열리고 바이스가 나타났다.
바이스는 벨루스 백작을 향해 정중히 예를 취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바이스 폰 말레피입니다."
벨루스 백작의 표정이 묘하게 뒤틀렸다. 말레피 후작가의 후계자 중 하나가 여기 있다는 얘기는 들었다. 한데 지금 보니 영지 일에 꽤 깊이 관여하는 듯하지 않은가.
벨루스 백작은 바이스의 인사를 대충 받아 주었다. 물론 자기소개도 잊지 않았다. 그건 기본적인 예법이었다.
"혹시 이 영지, 말레피 후작가에서 뒤를 봐주고 있나?"
의심 한 자락이 일어나 벨루스 백작의 머릿속을 마구 휘저었다. 어쩌면 그 새로운 기간트도 말레피 후작가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우리 가문은 이곳 영지와는 아무 상관 없습니다. 그저 제가 우리 영주님께 충성을 맹세했을 뿐입니다."
벨루스 백작의 눈가에 어린 의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말레피 가문의 후계자 중 하나가 굳이 이런 궁벽한 곳에 와서 바닥을 길 이유가 없지 않은가.
반드시 후계자가 될 필요도 없다. 이런 곳에 올 바에야 차라리 후계자 구도에서 한발 물러나 이득만 취하면 된다. 그래도 지금 이것보다는 훨씬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말레피 후작가는 레늄 왕국 최고의 마법 가문이었다. 그 후광만으로도 웬만한 영지는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못한다.
"내 딸을 만나러 왔네."
벨루스 백작은 당당하게 말했다. 이보다 더 좋은 명분이 어디 있겠는가. 바이스도 그 말에는 그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을 보냈으니 곧 이리로 올 것입니다."
하지만 세나는 지금 공방에 있었다. 공방에 있는 세나를 부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저 세나의 방 앞에 미리 시녀를 대기시키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벨루스 백작은 바이스를 유심히 살폈다. 그가 판단하기에 이 영지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바이스였다. 그 의문의 기간트에 관해서 알아내는 데에도 가장 걸림돌이 될 만한 사람이었다.
바이스는 벨루스 백작이 왜 여기에 왔고, 또 자신을 이렇게 열심히 살피는 이유도 대충 짐작했다. 하지만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묘한 대치를 하고 있을 때, 응접실 문이 벌컥 열렸다. 둘의 시선이 일제히 문으로 돌아갔다. 그곳에는 세나가 서 있었다.
"아버지……."
세나는 살짝 굳은 표정으로 벨루스 백작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정중히 예를 취했다.
평소와 전혀 다른 태도에 벨루스 백작은 큰 거리감을 느꼈다. 이는 백작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고얀 녀석. 이 애비가 보고 싶지도 않더냐?"
벨루스 백작의 말에 세나가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절 데려가려고 오신 건가요?"
벨루스 백작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말할 필요 없다. 가자."
세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가겠어요."
벨루스 백작이 눈을 부라렸다. 안 그래도 몰래 체른산 방어군으로 지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뒷목을 잡았었다. 한데 또 이런 식으로 나오니 화가 치밀었다.
"너 때문에 우리 가문이 얼마나 곤란한 상황인지 아느냐!"
"가문이 곤란한 게 아니라 아버지가 곤란하신 거겠죠. 왜요? 슈린 공작가에서 왜 빨리 딸을 안 주냐고 압력이라도 넣고 있나요?"
"끄응."
막상 그 말을 듣고 나니 할 말이 없었다. 냉정하게 따지면 그 말이 옳다. 슈린 공작가의 압력은 별것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자존심이 문제였다.
고작 딸 하나 마음대로 못하는 못난 부모라는 말이 돌아다니는 걸 참을 수 없었다.
"넌 내 말만 잘 들으면 돼. 다른 생각은 할 필요 없다."
"가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어요."
세나의 단호한 말에 벨루스 백작이 사나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너 하나 때문에 이 영지가 어떻게 되어도 좋단 말이냐?"
세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철사자 기사단이 여기서 무슨 일을 벌였는지 알고 있기에 불안했다. 자신 때문에 이 영지에 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그 순간 응접실 문이 벌컥 열렸다.
일제히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열린 문으로 제론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제론은 천천히 걸어 벨루스 백작 앞에 섰다.
벨루스 백작은 순간적으로 기세를 확 끌어 올렸다. 그 역시 익스퍼트에 이른 기사였다. 또한 지금까지 하루도 수련을 거른 적이 없었다. 애송이 하나 압박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당연히 그 압박이 제론에게 통할 리 없었다. 제론은 이 시대의 기준으로 소드 마스터였다.
"지난번 보내 주신 선물은 잘 받았습니다."
제론의 말에 벨루스 백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설마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전혀 타격이 없다는 뜻 아닌가.
"선물이라니?"
벨루스 백작이 전혀 모른다는 듯 말하자, 제론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기간트 말입니다. 스무 기나 보내 주셨더군요. 덕분에 재정이 튼튼해졌습니다."
벨루스 백작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갑자기 속이 쓰렸다. 하지만 그 미지의 기간트를 얻으면 그 정도 손해쯤이야 몽땅 벌충하고도 남는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벨루스 백작은 화를 가라앉히며 생각을 정리했다.
"내 딸을 데려가겠네."
"안 됩니다."
벨루스 백작이 눈을 부릅뜨고 제론을 노려봤다. 감히 누구 앞에서 안 된다는 말을 한단 말인가.
"우리 영지의 소중한 수석 엔지니어입니다. 절대 보낼 수 없습니다."
"내 딸을 구금하고 있다는 뜻인가?"
"오해하셨군요. 본인의 의사를 철저히 지켜 주겠다는 뜻입니다."
벨루스 백작은 코웃음을 쳤다. 그 싸움이라면 이미 조금 전에 끝나다시피 했다. 그의 시선이 다시 딸인 세나에게로 향했다.
"이제 네 말을 들어 보자. 정말로 여기 남겠느냐?"
세나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남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젤레 영지에 해코지를 하는 것도 싫었다. 젤레 영지는 이제야 간신히 자리를 잡았다.
세나가 머뭇거리자 벨루스 백작이 호통을 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한 호흡 빠르게 제론이 말했다.
"영지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 우리가 지난 시간 동안 뭘 했는지 벌써 잊은 거야?"
제론의 말에 세나의 머릿속이 갑자기 환해졌다. 그렇다. 생각해 보면 이런 고민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지금 젤레 영지에는 무려 백 기가 넘는 기간트가 있다.
라이더가 없는 게 문제지만, 라이더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단지 벨루스 백작령과 젤레 영지가 싸운다는 사실이 껄끄러웠지만, 지리적 문제를 생각해 보면 단순히 전쟁을 하는 건 어려웠다.
"남겠어요."
세나의 대답에 제론이 환하게 웃었다. 세나는 그 웃음을 보며 가슴이 뿌듯해졌다. 저 미소를 볼 수 있다면 뭘 못하겠는가.
"그 결정, 절대 후회하지 않겠느냐?"
벨루스 백작이 화난 표정으로 말했다. 세나는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회하지 않아요. 그럴 자신도 있고요. 아버지, 젤레 영지는 생각보다 강하답니다."
"훙. 고작 변방의 영지 따위 강해 봐야 얼마나 강하겠느냐? 그리고 슈린 공작가에서 가만히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슈린 공작가가 본격적으로 나서면 이따위 영지쯤 입김 한 방에 흩어져 버릴 게다."
"쉽지 않을 겁니다."
제론이 나서서 말했다. 그러자 벨루스 백작이 기회가 왔다는 듯 불쑥 속에 있던 말을 꺼냈다.
"특별한 기간트를 너무 믿고 있는 것 아닌가?"
바이스와 세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벨루스 백작이 갑자기 그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 하지만 제론은 이미 예상하던 상황이었기에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특별한 기간트라니요?"
"흥! 그렇게 모른 척해도 소용없네. 우리 철사자 기사단을 무너뜨린 그 기간트가 정말 없단 말인가?"
제론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모르겠군요. 하긴, 저도 그 기간트에 관한 보고를 받긴 했습니다만…… 너무 허황된 보고라서 믿지 않았는데, 백작님께서는 그걸 믿고 오신 모양이군요."
벨루스 백작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하면 내가 이 영지를 좀 조사해 봐도 되겠나?"
"어떻게 조사하겠단 말씀이십니까?"
벨루스 백작이 품에서 커다란 금속판 하나를 꺼냈다. 마법진이 가득 새겨진 금속판이었는데, 곳곳에 마나 스톤이 박혀서 빛을 내고 있었다.
"아공간 감지 아티팩트일세. 이걸로 알아보면 되지 않겠나?"
제론이 빙긋 웃었다.
"그 정도라면 좋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하시지요."
제론이 너무나 자신만만하게 나오자 벨루스 백작은 순간 의심이 들었다.
'혹시 다른 곳에 숨겨 놓은 게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아공간 감지 아티팩트를 보고서도 눈빛 하나 변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어쨌든 벨루스 백작은 제론의 허락이 떨어진 이상 지체하지 않고 아티팩트를 작동시켰다.
우우웅!
기이한 파장이 방 안을 쫙 훑고 지나갔다. 아티팩트가 작동하며 범위 안을 스캔한 것이다.
"흐음. 이 근처에는 없군."
벨루스 백작은 내심 실망을 감추며 말했다. 사실 그는 제론이 그걸 소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데 아티팩트에 아무것도 감지되는 게 없었다.
"음? 이쪽에 아공간 하나가 있군."
벨루스 백작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금속판 위의 한 공간을 짚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백작이 가진 아티팩트가 아공간을 감지할 수 있는 범위는 반경 500미터였다. 한데 그 끝자락에 아공간 하나가 감지된 것이다.
벨루스 백작이 이동하자, 제론을 비롯한 나머지 사람도 그 뒤를 따랐다.
결국 벨루스 백작이 도착한 곳은 성의 연무장이었다. 그곳에는 열심히 검을 수련하는 카이트가 있었다.
벨루스 백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공간 반응은 카이트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기간트 라이더가 있었군."
제론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조만간 몇 명 더 생길 겁니다."
벨루스 백작은 대꾸하지 않고 카이트에게 다가갔다. 사실 예의에서 벗어난 일이었지만 제론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것은 카이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간트를 소환해 볼 수 있겠나?"
카이트가 수련을 멈추고 잠시 벨루스 백작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씨익 웃더니 바로 기간트를 소환했다.
후아앙!
크라테르가 나타났다. 가슴의 해치를 열고 당당히 서 있는 모습에서 위압감이 넘쳤다.
카이트는 훌쩍 뛰어 크라테르의 무릎과 허리를 디디고 조종석에 올라탔다.
생각해 보면 최근 검술 수련에 매진하느라 기간트 훈련을 너무 등한시했다. 마침 이렇게 되었으니 간단히 움직여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쿵! 쿵! 쿵!
크라테르가 자유롭게 움직이며 연무장 곳곳을 돌아다녔다. 검을 휘두르고 발을 차올리는 동작이 엄청나게 부드러웠다.
벨루스 백작은 그 광경을 잠시 지켜보다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돌아섰다. 그리고 다시 아티팩트에 눈을 돌렸다. 아무래도 금방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제론은 그런 벨루스 백작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쳐다봤다. 반면 세나와 바이스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제론을 바라봤다.
그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분명히 성 안에는 기간트가 존재했다. 세나의 공방에 보관 중인 기간트가 대체 몇 기인가.
한데 그 모든 기간트가 단 한 기도 아티팩트에 걸려들지 않았다.
그 모든 의문의 답을 가진 제론은 그저 담담히 벨루스 백작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세나와 바이스도 결국 제론이 답을 줄 때까지 그렇게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다.
"영주님이 갑자기 나타나셔서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바이스가 깊이 가라앉은 눈으로 제론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옆에 앉은 세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영주님이 어디 가셨었나요?"
"어제 수도로 가신다고 영지를 떠나셨거든."
"예? 수도에요? 거긴 왜요?"
"왜긴, 인재가 필요하니까 둘러보러 갔지."
제론의 대답에 이번에는 바이스가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돌아오신 겁니까?"
"텔레포트 게이트로 돌아왔지."
"그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바이스가 강렬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의문이 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간이 맞지 않았다.
제론은 벨루스 백작이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왔다. 연락은 바로 했다. 연락 수단이 없었다면 바이스도 그렇게 흔쾌히 제론을 수도로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제론은 바이스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그저 웃기만 했다. 이 성에 있는 초장거리 텔레포트를 이용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을 굳이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나저나 벨루스 백작님은 지금 뭘 하고 계시지?"
제론이 말을 돌리며 세나를 쳐다봤다. 세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영지 곳곳을 돌아다니고 계세요."
"영지민이 조금 놀랄 수도 있겠군."
"아마도요. 하지만 별일은 없을 거예요. 생각보다 영지민을 아끼는 분이시거든요."
세나의 말에 제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이미 느꼈다. 예전 벨루스 백작령을 방문했을 때 말이다.
"어쩌면 로트 산맥까지 헤집어 놓으실 수도 있어요. 집념과 고집이 상당하신 분인지라……."
제론이 빙긋 웃었다.
"뭐, 상관없어. 그나저나 로트 산맥에는 몬스터가 제법 많은데, 호위는 제대로 하고 있나?"
"기사단 하나를 끌고 오셨으니 아마 몬스터 정도는 문제가 안 될 거예요."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다행이군."
벨루스 백작과는 좋지 않은 관계로 시작했지만 사실 악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어찌 되었건 세나의 아버지 아닌가.
또한 제론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그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파악하고 있었다. 아마 예전 벨루스 백작령을 방문하지 않았다면 그런 생각을 못 했을 것이다.
당시 백작령을 보며 느낀 점이 많았다. 벨루스 백작은 분명히 지금과는 많이 다른 사람이었을 것이다.
제론은 세나를 슬쩍 쳐다봤다. 세나의 표정이 어두웠다. 그녀의 얼굴에 어린 걱정을 보고 있으니 왠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제론은 세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세나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고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은 세나와 눈을 마주치며 씨익 웃어 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괜찮을 테니까. 아마 백작님도 세나의 마음을 분명히 알아주실 거야."
세나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마음이 조금 풀리는 느낌이었다.
"고마워요."
방 안의 분위기는 더없이 훈훈했다. 세 사람은 제법 오랫동안 방에서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다졌다.
☆ ☆ ☆
벨루스 백작은 아티팩트를 손에 들고 영지 곳곳을 돌아다녔다.
사실 처음 성에 도착했을 때, 정말 깜짝 놀랐다. 성의 규모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게다가 모양은 또 어떤가. 그냥 보통 성과는 완전히 달랐다.
두 번째로 놀란 건 성 내부의 시설이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성을 방문해 봤지만 이곳의 성처럼 편의 시설이 잘된 곳은 처음이었다.
성 곳곳에 설치된 마법진을 통해 별의별 일이 다 가능했다. 방마다 설치된 샤워 시설과 깨끗하기 그지없는 화장실을 보고는 입이 쩍 벌어져서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군부에서 번 돈을 성에 몽땅 쏟아부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리고 오늘 세 번째로 놀랐다.
사실 제론을 보며 조금 놀라긴 했다. 자신의 기세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넘기는 걸 보면 제법 실력이 뛰어나다는 뜻이니까.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약간이었다. 성을 보면서 놀랐던 감정이나, 지금 느끼는 감정은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제법이군."
벨루스 백작의 말에 옆에서 나란히 걸어가던 금사자 기사단의 단장이 말을 받았다.
"다들 표정이 밝긴 하지만 생활 자체는 많이 낙후되어 있습니다."
"그야 그렇지."
"영지가 이런 상황인데 그런 거대한 성을 지었다니 제대로 된 영주는 아닙니다."
성을 떠올리니 괜히 탐이 났다. 자신의 성도 그렇게 지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영지 상태에 비해 영지민 표정이 좋다는 건 최근 뭔가 일이 있었다는 뜻이네."
"예. 아무래도 성을 지으려면 사람이 많이 필요하니 그렇지 않겠습니까?"
"보통 영주는 영지민의 노동력을 착취하지. 하지만 저들의 표정을 보니 이곳은 그 정도는 아닌 모양이야."
기사단장은 그제야 조금 다른 시선으로 영지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내심 벨루스 백작에게 감탄했다. 이런 경우 사감을 담는 게 보통이다. 한데 영지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조금도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조금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군. 영주가 부임하기 전에는 어땠는지 말이야."
"바로 알아오겠습니다."
기사단장이 즉시 대답하고 휘하 기사 중 한 명을 어딘가로 보냈다. 어디든 정보를 취급하는 곳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곳에 의뢰를 하면 영지의 상황을 금방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정보를 확인하는 사이 벨루스 백작은 영지 곳곳을 돌아다니며 아공간의 유무를 확인했다. 하지만 아무리 돌아다녀도 아공간을 찾을 수 없었다.
지금까지 발견한 아공간은 카이트의 것, 하나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이상했다
벨루스 백작이 알기로 이곳 영주인 제론은 뛰어난 기간트 라이더였다. 군부에서도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었다. 한데 그의 기간트가 보이지 않는다.
"그나저나 저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건가?"
"알아보겠습니다."
기사 하나가 열심히 달려갔다. 수십 명에 달하는 사람이 어딘가로 우르르 이동하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도 더없이 밝았다. 벨루스 백작은 그들의 표정에서 희망을 읽었다. 희망을 가진 사람은 미소가 아름다운 법이었다. 지금 저 사람들처럼.
잠시 후 그들에게 갔던 기사가 돌아왔다.
"무슨 일이던가?"
"농사를 지으러 가는 중이라고 합니다."
"농사? 시간이 좀 애매하지 않은가?"
"농지에 숙소를 마련하고 거기서 머물 생각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이동만 하고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농사를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그래?"
벨루스 백작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또한 그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마치 뭔가가 떠오른 것처럼.
"뒤따라라."
벨루스 백작은 그 말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금사자 기사단은 불평 한 마디 없이 벨루스 백작의 뒤를 따랐다.
농사를 짓겠다고 모인 사람들은 어느 순간 마차에 올라탔다. 벨루스 백작도 미리 준비한 말을 타고 그 마차를 뒤따랐다.
마차의 속도는 상당히 빨랐다. 하지만 벨루스 백작이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그들이 이동한 곳은 영주성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영주성 뒤편이었다.
그리고 벨루스 백작은 또 놀랐다.
"이곳, 황무지라고 하지 않았나?"
젤레 영지에 오기 전에 그 근방에 대한 정보를 웬만큼 모아서 숙지했다. 또한 제론에 대해서도 상당한 조사를 했다.
그때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제론이 얻은 유적과 그 근방의 땅은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황무지였다. 농사가 아예 불가능한 땅이라고 했다.
한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이렇게 거대한 농지가 있다니 말이다.
농지는 영주성 뒤에 펼쳐져 있었기에 처음에는 아예 발견하지도 못했다. 아니,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확인하고 나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새파란 싹이 돋아난 농지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대충 넓이가 얼마나 될 것 같은가?"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끝이 보이지 않으니 넓이를 파악하는 건 불가능했다.
벨루스 백작은 제론이 유적과 함께 얻은 황무지에 대한 정보를 떠올렸다. 그 가공할 넓이를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보아하니 아직 황무지의 일부에서만 농사를 짓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조만간 황무지 전체를 이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되면 왕국의 식량 사정이 완전히 달라져 버릴 것이다. 황무지는 그 정도로 광활했다.
'왕국, 아니, 대륙의 곡물 값이 요동칠 수도 있겠군.'
이곳에서 난 곡물의 양은 대충 추정만 해도 레늄 왕국에서 다 소화시킬 수 없을 정도로 막대했다. 그러니 당연히 외국으로 수출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대륙의 곡물 값이 흔들릴 것이다.
"일단 성으로 돌아가자."
벨루스 백작은 더 이상 아공간을 찾는 건 쓸데없는 짓이라고 판단했다.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제론에 대해 좀 더 알아야만 했다.
잠시 후, 조사차 나갔던 기사가 돌아왔다. 벨루스 백작은 예전 영지민의 삶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날 한 번 더 놀랐다.
예전 젤레 영지에서 영지민의 삶은 가축과 다를 바가 없었다. 관리의 횡포로 삶이 엄청나게 팍팍했다.
한데 제론이 등장하면서 그 모든 것이 바뀌어 버렸다. 일 처리도 과감한 것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특히 관리를 처벌하고 재산을 싹 몰수해 영지민에게 베푼 것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이 영지, 미래가 기대되는 곳이로군.'
벨루스 백작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처음 이곳에 와서 하려고 했던 계획은 이미 사라져 버렸다.
"좀 더 알아봐야겠어."
벨루스 백작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그 모습을 본 금사자 기사단의 표정이 묘해졌다. 주군의 이런 모습을 본 것이 얼마 만인지 알 수 없었다.
백작 부인이 죽은 뒤,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사실 그동안 백작을 보고 있으면 어딘가 생기가 모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한데 지금은 마치 사라졌던 생기가 돌아온 듯했다.
벨루스 백작과 금사자 기사단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