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7화 (38/217)

Chapter 3 네로

제론은 수로를 파는 한 달 내내 물의 정령에 관한 고민을 내려놓지 않았다.

수로는 최대한 평원 외곽에서부터 팠기 때문에 바이스조차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제론의 실력이 점점 늘어나면서 또 땅을 파는 일이 능숙해지면서 작업 속도가 날이 갈수록 빨라졌기에 막판에는 어마어마한 길이의 수로를 단번에 완성해 버릴 수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바이스도 이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이스가 보기에는 기적이었다.

그저 아무것도 없는 평원이었는데, 거기에 하루아침에 수로가 나타났으니 말이다.

물론 수로는 전체적으로 정비가 필요하긴 했다. 아무래도 기간트가 만들었기 때문에 섬세함이 조금 모자랐다. 물론 약간만 더 다듬는 수준이었기에 나중에 물이 채워진 다음에 작업을 해도 큰 문제가 없었다.

지금은 그 많은 평원에 농사를 지을 인력도 모자랐다. 일단 영주성을 중심으로 최대한 많이 농사를 짓고 그 뒤로 차츰 인원 수급 상황에 따라 농지를 더 넓혀 갈 계획이었다.

평원 곳곳에는 저수지가 있었다. 제론은 상당히 신경을 써서 수로를 팠다. 물이 부족하면 농사를 짓기 힘들다. 어떤 곡물을 심건 말이다.

혹시 가뭄이라도 들면 곤란하기에 그에 대한 대비를 충분히 해 둬야만 했다.

이렇게 해 놓으면 당장은 필요 없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쓰게 되어 있었다.

그 많은 저수지에 물을 꽉 채우고 수로에 물이 흐르게 하려면 정말 어마어마한 양의 물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 근방에는 수원이 없었다.

물론 영주성에는 우물이 있었다. 지하수가 솟아나는 우물이었다. 하지만 그건 영주성을 유지하기에도 빠듯했다. 농사까지 짓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그렇기에 제론은 끊임없이 물의 정령에 관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네모스."

휘류류류류룽!

바람의 정령인 아네모스가 나타나 제론 주위를 맴돌았다. 제론은 감각을 날카롭게 갈며 아네모스를 손으로 불러들였다.

제론이 처음 바람의 정령을 느낀 건 그냥 우연이었다. 그렇기에 당시 상황이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만일 그때의 기억이나 감각이 좀 생생했다면 물의 정령을 찾는 것도 좀 수월했을지 모른다.

아네모스는 제론의 손바닥 위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제론은 지그시 눈을 감고 아네모스로부터 전해지는 기운을 느끼려 애썼다.

지금까지 아네모스 자체를 느끼려는 노력은 거의 해 본 적이 없었다.

바람의 정령은 그냥 왔고, 유적의 도움을 받아 계약을 했다. 그래서 물의 정령을 찾을 때도 물을 떠 놓고 그 안에서 뭔가를 느끼려 애쓰거나, 아니면 물이 풍부한 곳으로 가서 특별한 느낌을 찾으려 했다.

제론은 좀 더 집중해 아네모스를 살폈다. 날카로운 감각이 아네모스를 낱낱이 해체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바람을 느끼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감각이 허공을 배회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거기서 포기하지 않았다. 이 방법이 아니면 안 된다는 심정으로 절박하게 매달렸다. 그동안 했던 수련의 결과로 집중력을 오래 유지하는 건 문제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또 흘렀다.

그렇게 3시간이 지났을 때, 제론은 어렴풋이 뭔가를 느꼈다. 바람 속에 알 수 없는 어떤 것이 머물러 있었다. 그 느낌이 너무나 가볍고 허허로웠기에 느낌이 지속되지 않았지만 분명했다.

제론은 확신을 가지고 그 느낌을 찾아 헤맸다.

또 시간이 흘렀다.

제대로 느낌을 잡아낸 건 3시간이 더 지났을 때였다. 제론은 그것이 바람의 정령이라고 확신했다. 아니, 바람의 정수였다. 그것이 바로 바람이었다.

제론은 곧장 우물가로 달려갔다. 이 느낌이 사라지기 전에 물의 정령을 찾아내야만 했다. 직감적으로 지금이 아니면 다시 물의 정령을 잡아낼 수 없다는 걸 느꼈다.

밤이었다. 어둠이 내려앉았지만, 제론에게는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젤레 영지성은 거대한 에너지를 받아들여 이용한다. 밤이 되어도 마법을 이용한 빛이 곳곳에 존재했다. 우물가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론은 우물가를 비추는 빛을 향해 내달렸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날려 우물에 뛰어들었다.

첨벙!

차가운 물이 온몸을 감쌌다. 이 우물은 식수로 사용된다. 원래는 이렇게 뛰어들어선 안 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일부러 그렇게 했다. 다급하기도 했고, 또 온몸으로 물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네모스의 정수를 파악한 감각이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 상황에 물에 뛰어들자 온몸으로 물의 감각이 느껴졌다. 바람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분명한 뭔가를 잡아냈다.

제론은 눈을 지그시 감고 손바닥을 오묵하게 만들어 물을 담았다. 그 안에 담긴 물이 빙글빙글 돌았다. 그게 바로 물의 정령이었다. 아니, 물의 본질이었다.

제론의 몸이 순식간에 솟구쳐 우물 밖으로 나갔다. 제론은 손에 든 물이 쏟아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빠르게 이동했다.

마음 같아선 아네모스를 불러 공간이동을 통해 유적으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간신히 잡은 물의 정령이 사라질까 봐 그렇게 하지 못했다.

최대한 빨리 달려 지하 연무장에 도착한 제론은 즉시 유적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반가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정령 확인. 계약을 진행합니다.

성공이었다.

바닥이 은은히 빛나며 거대한 마법진이 나타났다. 그 마법진 한가운데 제론이 손에 들고 온 정령이 갇혔다.

그리고 마법진이 강렬하게 빛나며 정령이 사라져 버렸다.

―계약 완료. 소환 명령 코드는 네로입니다.

제론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너무나도 만족스러웠다. 이런 충실한 느낌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네로."

쏴아아아!

제론의 눈앞에 물줄기가 쭉 솟아나며 한데 뭉쳤다. 그것이 바로 물의 정령, 네로였다.

일단 정령 계약에는 성공했다. 다음 문제는 과연 이 정령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점이었다.

바람의 정령은 아네모스 외에 푸르투나까지 계약했다. 아네모스와 푸르투나의 격차는 엄청났다. 푸르투나의 힘을 이용하면 하늘을 날아갈 수도 있으니 말이다.

하면 네로의 능력도 어쩌면 보잘것없을지도 모른다. 초고대 문명의 경우 정령을 그저 스위치 정도로 이용했으니 말이다.

제론은 일단 네로를 돌려보낸 뒤 유적에서 나갔다. 그리고 영주성에서 가장 가까운 저수지로 향했다. 저수지는 다른 수로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 저수지에 물을 가득 채울 수 있다면 급한 불을 끄는 게 가능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물이 많이 필요한 시기가 온다.

그전에 농지 근처의 저수지에 물을 가득 채워 둬야만 했다. 아니면 지속적으로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수원을 개발하거나 말이다.

제론은 저수지 한가운데에 서서 중얼거렸다.

"네로."

쏴아아아!

물의 정령, 네로가 나타났다. 제론은 즉시 명령했다.

"이곳에 물을 채워."

쏴아아아아!

네로의 몸체에서 물줄기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것을 보는 제론의 눈에 실망감이 떠올랐다.

물의 양이 터무니없이 적었다. 이 정도라면 아마 저수지를 꽉 채우는 데 며칠은 걸릴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물의 정령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하지만 제론은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았다. 초고대 문명의 유적을 발견한 뒤로, 제론은 단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었다. 어떤 상황에 처하건 말이다.

제론의 머릿속이 맹렬히 돌아갔다. 시도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떠올려 봤다. 오래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가능성이 가장 높은 방법 하나가 떠올랐다.

게다가 이 방법이 성공한다면 수로의 물을 가득 채우는 것도 어쩌면 가능할지 모른다.

제론은 네로를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이 방법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네로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 네로를 자유자재로 다뤄 보았다. 그리고 감각을 날카롭게 벼렸다.

제론의 의념을 받은 네로가 땅으로 푹 스며들었다.

제론은 눈을 지그시 감고 네로와 의념의 끈을 이었다. 감각을 날카롭게 벼린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제론의 의념을 실은 네로가 땅속으로 넓게 스며들었다. 덩어리로 다니는 게 아니라 비가 땅에 스미듯 쫙 퍼지며 내려갔다.

제론의 감각에 차가운 느낌이 확 닿았다.

'찾았다!'

제론은 드디어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네로를 이용하면 지하수를 찾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걸 땅 위로 끌어 올리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지하수에 섞여 들어간 네로는 지하의 물줄기를 따라서 빠르게 이동했다. 그와 동시에 제론의 뇌리에 지하 수로의 지도가 선명하게 새겨졌다.

일단 물에 섞여 들어간 네로의 힘은 굉장했다. 점점 주변으로 영향력을 넓혀 가더니 조금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커졌다.

'역시 물이 있어야 힘이 커지는구나.'

제론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물의 정령은 네로 이상의 정령을 찾을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물만 많으면 힘이 커질 테니 말이다.

네로의 힘이 커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그 한계는 바로 제론이 만들었다. 제론이 가지는 정신력과 마나, 그리고 가진 바 힘이 네로의 한계였다.

제론의 머릿속에 지하수가 다니는 대부분의 길이 새겨졌다. 제론은 그것을 어떻게 이용할지 생각을 해 봤다. 일단 수원을 만들어야만 했다.

굳이 물을 땅에서 밖으로 빼낼 필요는 없었다. 수원을 만들 만한 장소만 찾으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그 장소는 날이 밝을 무렵 찾아낼 수 있었다.

제론의 시선이 어슴푸레하게 밝아 오는 산맥으로 향했다. 지금은 거의 쓸모없이 버려진 곳, 로트 산맥이었다.

그곳에 제법 괜찮은 수원이 있었다. 물론 상당한 공사가 필요했지만 제론에게는 전혀 상관없었다. 혼자서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었으니까.

그날 밤, 로트 산맥 아래에 거대한 저수지 하나가 생겨났다. 당연히 젤레 영지의 영토에 속한 곳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로트 산맥 아래의 저수지에서 이젠 평원이 된 젤레 영지의 황무지까지 이어지는 수로가 생겨났다. 그 수로에는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지금은 그저 시냇물이나 다름없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물줄기가 커질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젤래 영지의 모든 저수지와 수로를 가득 채워 줄 것이다.

☆ ☆ ☆

벨루스 백작령의 분위기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다. 영지의 주인인 벨루스 백작의 심기가 좋지 않으니 그 영향이 영지 전반에 미치는 것이다.

하지만 벨루스 백작은 그런 것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지금 그는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물론 그 중요도는 벨루스 백작만의 기준이었다.

"요즘 분위기가 어떤가?"

벨루스 백작의 물음에 마틴 준남작이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영지성이 완공되었다고 합니다."

"돈을 낭비하는군."

"아직 영지 경영이 뭔지 모르는 애송이의 한계 아니겠습니까?"

"흥. 그런 애송이에게 뭐 볼 게 있다고 거기 있는 건지, 원……."

벨루스 백작은 불만 어린 목소리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자신이 얼마나 딸을 사랑하는지 왜 몰라준단 말인가. 사랑만으로 행복할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에 딸의 선택을 용납할 수 없었다.

"슈린 공작가의 분위기는 어떤가?"

"파인트 공자의 고집에 대해서야 유명하지 않습니까. 아마 최소한 2년은 더 기다려 줄 것 같습니다."

"그나마 그건 다행이로군."

아마 조만간 슈린 공작가가 직접 나설지도 모른다. 슈린 공작은 위험한 부분에 대해서는 일말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는 사람이니 말이다.

그전에 최대한 빨리 세나를 그곳에서 빼내야만 했다. 또한 그전에 의문의 기간트에 관한 정보를 얻어 내고 말이다.

"그래, 뭔가 얻어 낸 정보가 있나?"

"아직 명확한 건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엔 정황 증거가 제법 많습니다."

"정황 증거?"

"예. 기간트를 이용하지 않으면 거의 불가능한 공사를 뚝딱뚝딱해낸 흔적이 무수합니다."

마틴 준남작은 엄청난 돈을 들여 다량의 정보원을 젤레 영지 곳곳에 심어 두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많은 정보를 받고 있었다.

그 정보를 분석한 결과 분명히 그 기간트는 젤레 영지에 직, 간접적으로 관계가 있었다.

벨루스 백작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마틴 준남작의 보고는 거의 틀림이 없을 것이다. 거기에 자신의 목숨이 걸렸으니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철사자 기사단의 기간트를 몽땅 잃어버리고 온 마틴 준남작을 지금까지 살려 둘 이유가 없었다.

철사자 기사단은 아직도 기간트 없이 그저 맨몸으로 훈련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기간트를 지급하려면 제법 시간이 걸릴 것이다.

"내가 직접 가 봐야겠군."

"예?"

마틴 준남작이 깜짝 놀라 벨루스 백작을 바라봤다. 하지만 벨루스 백작의 고집스런 표정을 보고 나니, 더 이상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기간트를 감춰 두려면 아공간이 필요할 것 아닌가."

"그, 그렇습니다만……."

"아공간을 확인하면 그만 아닌가."

"하면……."

"아공간 감지 아티팩트를 가져가겠네. 범위가 가장 넓은 걸로 준비하게."

마틴 준남작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준비하겠습니다."

벨루스 백작은 마틴 준남작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마틴 준남작은 정중히 예를 취하고 물러갔다.

"골치 아프군."

벨루스 백작은 이마를 짚었다.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린 것처럼 뭔가가 껄끄러웠다.

고민이 계속되었다. 자신은 확신하지만 끊임없이 가슴 깊은 곳에서 작은 의문이 일어났다. 과연 지금 잘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어쨌든 가장 중요한 것은 딸의 행복이었다. 볼 때마다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쩌면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한 아내를 딸에게 투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어쨌든 세나는 행복해질 것이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렇게 만들어 줄 테니까.

파인트의 인간 됨됨이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세나에게 함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 역시 그렇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벨루스 백작령은 충분히 그럴 역량을 갖춘 영지였다. 또한 그 정도 힘을 가지고 있었다.

백작의 입매가 고집스럽게 휘었다.

☆ ☆ ☆

"정말 얼마나 더 놀랄 일이 남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바이스는 혀를 내둘렀다.

현재 젤레 영지를 관통하는 수로에는 물이 졸졸 흐르고 있다. 수로의 수원은 하루아침에 나타난 로트 산맥 아래의 거대 저수지였다.

호수의 물은 산맥 곳곳에서 흘러내린 물이었고 말이다.

로트 산맥에는 당연히 수원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제론은 상당한 수의 수원을 산맥 아래에 조성한 저수지로 흘려보냈다.

말이 저수지지 사실상 호수나 다름없었다.

그곳에서 시작되어 젤레 영지를 관통해 영주성이 있는 평원으로 흘러가는 물의 양은 끊임없이 늘어나고 있었다.

아직 호수가 완전히 채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조만간 호수가 꽉 채워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수로를 따라 흐르는 물의 양도 상당히 많아질 것이다.

젤레 영지에서 가장 중요하고 부족한 한 가지를 완벽하게 해결해 버린 것이다. 그것도 제론 혼자서 말이다.

그러니 바이스가 감탄하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그가 보기에 제론은 사람 같지도 않았다.

'그 비밀 기간트를 이용한 것이 분명하군.'

당시 철사자 기사단을 단번에 무너뜨린 그 기간트의 위용은 어마어마했다. 그때의 충격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 기간트를 이용했다면 아예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적어도 바이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정도로 당시에 받은 충격은 굉장했다.

"이제 큰 문제는 다 해결된 건가?"

"일단은 그렇습니다. 한데 주변 영지는 어떻게 할까요?"

제론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일단 그냥 내버려 둬."

바이스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뒤통수가 간질거릴 것 같습니다."

"괜찮아. 적절히 지켜보기만 해. 명분을 만들어야지. 알아서 달려들 때까지 차분히 기다려."

제론의 말에 바이스의 눈이 살짝 커졌다.

확실히 당장 무리하게 영지전을 벌이는 것보다는 걸어온 싸움으로 적을 무너뜨리는 편이 훨씬 모양새가 좋긴 했다.

'그래서 굳이 이번에도 일을 복잡하게 만드신 거였군.'

이번에 일어난 폭동으로 인해 인근 세 영지의 힘이 크게 약화되었다. 또한 다시 일어나는 것도 쉽지 않게 되었다. 매년 젤레 영지에 피해 보상금을 지급해야 하는데, 그들 입장에서는 피 같은 돈이었다.

인근 세 영지는 사실상 레늄 왕국의 끝에 위치했다. 세 영지의 동쪽은 거대한 암석 지대였다.

그곳에는 상당한 수준의 채석장이 있었지만, 위치가 좋지 않아 운반이 어려웠기에 영지 재정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암석 지대에 있는 바위는 어마어마하게 거대해서 기간트를 동원해도 처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바위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으니 그곳이야말로 황무지나 다름없었다.

그 암석 지대를 지나면 바로 바다가 나온다. 세 영지는 넓게 분포된 암석 지대 때문에 바다를 이용하는 것조차 못하고 있었다.

만일 바다에 인접해 있고, 제대로 된 항구도시가 있었다면 세 영지의 사정은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암석 지대가 사라지지 않는 한,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암석 지대는 바다까지 이어져 있기에 설사 바다까지 길을 뚫는다 해도 그곳에 항구를 건설하려면 어마어마한 노동력과 자금이 필요했다.

그것은 세 영지가 감당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아니, 설사 돈이 많은 대영지가 나선다 하더라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세 영지를 복속시키고 나면 암석 지대를 정리한 다음 항구를 만들 테니까 미리 준비해 둬."

"예? 그 암석 지대를 정리하실 생각이십니까?"

"정리해야지. 넓잖아."

사실 암석 지대는 쓸모없는 땅이어서 그렇지 상당히 넓었다. 레늄 왕국에는 이렇게 영지보다 넓은 땅이 심심치 않게 있었다.

다만 그런 땅의 경우 쓸모가 없기에 사실상 영토 취급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영토에 관한 세금은 반드시 납부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제론이 거대한 황무지를 얻었을 때, 그 세금 문제로 남은 영지까지 팔아 버리지 않았는가.

물론 그 경우는 슈린 공작가의 입김이 작용해 세금이 다소 과하게 책정된 경우였다. 뤼그너 남작령을 비롯한 세 영지의 경우 암석 지대에 부과되는 세금은 지극히 낮았다.

"쉽지 않으실 겁니다."

"기간트를 동원하면 돼."

"아무리 기간트를 동원해도 어렵습니다. 바위가 너무 많습니다. 그걸 다 정리하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립니다."

"전부 정리할 필요는 없어. 한쪽에 쌓아 놓을 테니까."

잠시 말문이 막혔던 바이스가 질린다는 듯한 눈으로 말했다.

"설마 그곳의 바위를 내다 파실 생각이십니까?"

"남으면."

제론의 말에 바이스의 머리로 몇 가지 계획이 슥슥 스쳐 지나갔다. 생각해 보면 암석 지대의 바위를 그냥 내다 버리는 건 바보짓이었다.

젤레 영지만 해도 돌을 가져다 쓸 곳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아예 영지를 새로 건설하다시피 할 테니 말이다.

영주성 외에는 제대로 지어진 곳이 하나도 없었다. 차츰차츰 저택도 지어야 하고, 상가도 지어야 한다. 또 집도 잔뜩 지어야 한다.

광장도 만들어야 하고, 영지성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의 길은 돌로 쫙 깔아 버릴 생각이었다.

그걸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돌이 필요했다. 그 돌을 암석 지대에서 가져다 쓰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비용이 절감될 것이다.

또한 만일 정말로 항구도시를 짓는다면 거기에 들어가는 돌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암석 지대의 바위는 엄청나게 많았다. 아마 잘 개발해 놓으면 향후 영지의 상당한 수입원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물론 항구를 만든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바다를 이용해 운송하지 않으면 운송비를 감당할 수 없다. 석재는 무겁기 때문에 나르기가 쉽지 않다.

"어쨌든 그건 바이스만 알고 있도록 해. 아직 시간이 좀 걸릴 테니까."

"물론입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수로와 저수지에 대한 방비를 좀 더 철저히 할 필요가 있어."

제론의 말에 바이스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누군가 악감정을 가지고 일을 벌이면 수로에 공작을 할 가능성이 컸다. 또한 효과도 클 것이다.

수로에 독이라도 풀어 버리면 당장 난리가 날 것이다. 물론 그렇게까지 할 놈은 없겠지만 사람이란 모르는 것이다. 막판에 몰리면 어떻게 될지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 이 마법진을 좀 연구해 봐."

제론은 품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내밀었다. 바이스가 눈을 빛내며 그것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이럴 때 제론이 주는 것은 그의 입장에서 보물일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기대감을 숨길 수가 없었다.

바이스는 받자마자 책을 펼쳤다. 표지는 그저 백지였기에 내용을 보기 전에는 무슨 책인지 알 수가 없었다.

책을 펼친 바이스가 눈을 부릅떴다. 첫 장부터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마법진에 대한 설명이 보였다.

책장을 정신없이 넘겼다. 바이스는 마법진 옆에 쓰여 있는 간단한 설명만으로도 크게 흥분했다. 이 책에 있는 마법진을 모두 익혀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변형시킬 수 있다면 정말로 큰 힘이 될 것이다.

"이 책은 대체 어디서 구하신 것입니까?"

"어쩌다 보니."

바이스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왠지 알 것 같았다. 이 정도의 마법책이라면 소재지야 명확하다. 고대 유적이 분명했다.

바이스가 알기로 제론이 겪은 고대 유적은 딱 두 군데였다. 하나가 바로 이곳 성이 있는 유적, 그리고 또 하나가 체른산 유적이었다.

아마 이 책은 체른산 유적에서 얻었을 것이다. 바이스는 그렇게 짐작하고는 다시 관심을 책으로 돌렸다.

"어때? 마음에 들어?"

바이스가 책을 탁 덮으며 제론을 바라봤다.

"감사합니다. 이걸 연구하면 수로에 관한 문제를 대부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아. 그럼 이제 나도 홀가분하게 수도에 다녀와도 되겠군."

제론의 말에 바이스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수도에 가실 겁니까?"

"가야지. 인재가 더 필요해. 그리고 분위기도 살펴야 하고."

제론이 수도에 가려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아직 주인을 만나지 못한 인재를 찾기 위함이었고, 다른 하나는 최근 개방된 수도 근방의 유적에 찾아가기 위함이었다.

10년 동안이나 철저하게 통제되던 유적이었는데, 봄이 되면서 개방되었다.

제론은 내심 기대했다. 만일 그 유적 아래에도 초고대 문명의 유적이 있다면, 그리고 그 유적에 마티가 있다면 수도 근방의 정보까지 얻을 수 있게 된다.

수도 근방의 정보를 얻는다는 건 슈린 공작가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게 되면 얼마나 싸움을 유리하게 끌어갈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슈린 공작의 마수가 뻗어 올 것 같아 조금씩 나름의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부디 조심하십시오. 수도에는 슈린 공작의 영향력이 상당하다는 걸 잊으시면 안 됩니다."

걱정이 절절히 묻어나는 바이스의 말에 제론이 빙긋 웃었다. 가슴이 따스해졌다.

"걱정하지 마. 내 실력 잘 알잖아."

"실력의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알았어. 조심하지."

"꼭입니다."

"그래. 꼭."

제론은 그 뒤로 바이스와 몇 가지 주제로 대화를 나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 ☆ ☆

슈린 공작은 집무실에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서를 읽었다.

"후우. 이게 마지막인가."

오랫동안 서류와 씨름하느라 침침해진 눈을 주무른 슈린 공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몸을 풀었다.

"이제야 좀 여유가 생기는군."

슈린 공작은 이를 부득 갈았다. 아직도 잡지 못한 놈들 때문에 몇 년을 고생했는지 모른다.

자그마치 100킬로그램의 테페룸을 잃어버렸다. 거기에 그걸 다시 구할 때는 암시장을 통했기 때문에 훨씬 비싼 값에 살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슈린 공작가의 방대한 재정이 휘청거릴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

그냥 테페룸만 구입했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슈린 공작가는 새로운 기간트 제조를 시작했다.

기간트 제조라는 것이 설계도만 있다고 뚝딱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과 공을 들여 수십 수백 번의 시행착오 끝에 만들어지는 것이 새로운 기간트였다.

그리고 슈린 공작가는 이번에 그 일을 성공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슈린 공작은 반사적으로 창밖을 쳐다봤다. 아직 깜깜한 밤이었다. 이 시간에 찾아올 만한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깁스 남작이었다. 슈린 공작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었고, 이젠 없어선 안 될 중요한 사람이었다.

"오, 남작, 어서 오게."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깁스 남작은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그리고 빙긋 웃으며 다가갔다.

"어떻게 되었나?"

"원하시는 부지를 얻었습니다."

"오오! 잘했네. 쉽지 않았을 텐데 용케 해냈군."

깁스 남작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약점이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하하하하! 역시 자네에게 맡기길 잘했군. 제대로 믿고 일을 맡길 만한 사람이 자네뿐이야."

"과찬이십니다."

새로운 기간트 공장은 수도 인근에 세워졌다. 수도 인근에 기간트 제조 공장을 짓는 건 사실 왕궁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껄끄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깁스 남작은 그 모든 난관을 뚫고 공장 설립 허가를 받아 냈다. 실로 대단한 성과였다.

"공장을 다 짓는 데 얼마나 걸리겠나?"

"최대한 서두르라고 지시를 내려 뒀으니 두 달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기간을 더 줄여 보게. 하루라도 빨리 라쿠스를 보고 싶군."

"최대한 애써 보겠습니다."

"기대하지."

슈린 공작은 그렇게 말하고는 탁자를 가리켰다.

"서 있지 말고 거기 앉게."

"예."

깁스 남작이 테이블 앞에 앉자, 슈린 공작도 그 앞에 앉았다. 그리고 시녀를 호출해 테이블 위에 술과 가벼운 안주를 세팅했다.

"이런 기쁜 날 술 한 잔이 없으면 안 되지."

슈린 공작은 기분 좋게 술잔을 채웠다. 두 사람은 그렇게 몇 잔의 술을 마셨다.

제법 독한 술이었기에 슈린 공작의 얼굴이 불콰해졌다. 하지만 깁스 남작의 얼굴은 처음 그대로였다.

"그나저나 요즘 조금 불쾌한 소식이 들려오더군."

"어떤 소식이 공작님의 심기를 어지럽혔는지요."

"에어스트 백작가의 떨거지가 아직도 살아서 펄펄 날뛰고 있다더군."

슈린 공작은 지나가듯 얘기를 꺼냈다. 하지만 이는 그의 마음속에 얼마나 깊이 남아 있는지 말해 주는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전쟁 중에 사라질 줄 알았는데, 그렇게 운이 좋은 놈이었는지 몰랐습니다."

슈린 공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자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지. 자네는 최선을 다했네. 그저 그놈이 거머리처럼 끈질긴 것뿐이지."

슈린 공작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책상으로 가 서류 한 장을 찾아서 가져왔다.

"읽어 보게."

깁스 남작은 서류를 받아 쭉 읽었다. 그 안에는 제론에 관한 정보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대단하군요."

"대단하지. 대단해. 군부에서 제대로 기반을 닦아서 나왔으니 대단한 놈이야."

슈린 공작은 그렇게 말하고는 깁스 남작을 바라봤다. 어느새 그의 눈빛이 더없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래서 더 신경이 쓰이네. 그놈이 날 잊었을 리 없으니까!"

깁스 남작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제가 다시 방법을 좀 찾아보겠습니다."

그제야 슈린 공작의 입매가 부드러워졌다.

"부탁하네. 자, 이럴 게 아니라 술이나 마시지. 어서 한 잔 더 받게."

슈린 공작은 깁스 남작에게 온갖 호의를 보이며 함께 술을 마셨다.

술자리는 날이 새도록 이어졌다. 그리고 슈린 공작은 다시 한 번 깁스 남작으로부터 확답을 받았다. 제론을 파멸시킬 방법을 찾겠다고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