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6화 (37/217)

Chapter 2 발전

폭동은 아주 간단히 끝났다.

폭도 중에는 기간트를 몰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기간트가 없으니 진압도 아주 간단했다.

제론은 폭도를 몽땅 사로잡아 젤레 영지로 데려왔다. 그 수가 무려 육백 명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가족까지 싹 끌고 왔다. 미리 약속한 대로였다. 폭도 한 명당 세 명에서 다섯 명까지의 가족을 데리고 있었다. 많은 경우는 일곱 명의 가족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

가족까지 다 하니 그 수가 엄청났다. 삼천 명이 넘는 대인원이 일제히 젤레 영지로 몰려들었다.

물론 그럼에도 뤼그너 남작령을 비롯한 세 영지에는 많은 영지민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젤레 영지로 넘어간 사람들의 질이 문제였다.

뤼그너 남작은 주먹을 꽉 쥐고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영지에 대장장이가 고작 두 명 남았단 말이냐?"

"그, 그렇습니다."

"그래서 무기를 못 만들고 있단 말이냐?"

"만들고는 있습니다만…… 속도가……."

"끄응!"

뤼그너 남작은 짜증이 확 솟았다. 이번에 폭동이 일어나면서 병사와 기사의 무구가 싹 사라져 버렸다. 폭동을 제압하면서 젤레 영지의 병사가 싹 쓸어가 버린 것이다.

강하게 항의했지만 젤레 영지 측에서는 딱 잡아뗐다. 그런 식으로 부정하는 이상 뤼그너 남작이 뭘 더 해 볼 여지가 없었다.

지금 뤼그너 남작령은 철저한 약자의 입장이었다. 그나마 기간트를 되찾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그래서 병사와 기사의 무구를 새로 제작하기로 했는데, 이런 문제가 터진 것이다.

"주변 다른 영지에 도움을 청해 봐!"

"이미 해 봤습니다만, 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뭐?"

뤼그너 남작의 표정이 싸악 굳었다. 다른 영지도 마찬가지라니. 이건 좀 이상하지 않은가.

"하면 다른 영지에서도 대장장이들이 폭도에 끼어 있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뭐? 뜸 들이지 말고 말해 봐."

"대장장이뿐 아니라 다른 직종도 많이 사라졌습니다."

"다른 직종?"

"다양한 방면에서 오랜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 대부분 폭도와 관계가 있었습니다."

뤼그너 남작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이만 물러가라."

보고를 하던 행정관이 물러가자, 뤼그너 남작은 집무실 안을 서성이며 생각에 잠겼다.

이번 일은 젤레 영지에서 계획적으로 벌인 게 틀림없었다. 사실 자신이 하려고 세웠던 계획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때는 하는 입장이었고 지금은 받는 입장이었다.

"이놈을 대체 어떻게 응징하지?"

너무 화가 나서 당장이라도 젤레 영지로 쳐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젤레 영지는 3년간 영지전이 금지된 곳이었다. 또한 실제 영지전이 벌어지더라도 이길 자신이 없었다.

어쨌든 이번 폭동으로 인해 뤼그너 남작령은 수십 년이나 퇴보해 버렸다. 영지의 숙련자들이 대부분 사라졌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그리고 그것은 뤼그너 남작령뿐 아니라 다른 두 영지도 마찬가지였다.

☆ ☆ ☆

"어때? 새로운 사람들은 잘 적응하고 있나?"

제론의 물음에 바이스가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마치 원래 우리 영지 사람인 것처럼 적응하고 있습니다."

"잘됐군. 인력은 아직도 많이 부족하지?"

"예. 지속적으로 난민을 받아들이는 중입니다만, 이제 그것도 슬슬 한계입니다."

전쟁이 끝난 지도 제법 시간이 지났다. 이제 난민의 수도 확 줄어들었다. 전쟁의 피해를 한창 복구하는 중이기에 곳곳에서 사람이 많이 쓰였다.

또한 각 영지에서 영지민 관리를 더욱 철저히 하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당분간은 난민을 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일단 이번에 경험 많은 자들을 받아들였으니, 그들을 이용해서 필요한 조직을 구성해 봐."

"그렇게 하겠습니다."

바이스가 대답하자 제론은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거기에는 세나가 서서 제론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수리는 다 끝났나?"

"네. 완벽하게 끝났습니다. 근데…… 설마 더 있으신 건 아니죠?"

세나의 얼굴에 불안감이 떠올랐다. 지금까지 수리한 기간트만 해도 벌써 수십 대였다. 조금만 더 하면 과장 좀 보태서 백 대는 될 것이다.

대체 그 많은 기간트를 어디서 가져오는지 불가사의할 지경이었다.

제론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이제 슬슬 좀 더 좋은 기간트에 도전해 보고 싶지 않아?"

"예? 좀 더 좋은 기간트요?"

"예를 들면 베르라거나……."

"베, 베르요?"

세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베르라니! 발굴형 기간트 중에서는 최하위 기체라고 하지만 그래도 다른 양산형 기체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성능을 자랑하는 기간트였다.

"저, 정말 베르가 있나요?"

"일단 시험 삼아 두 기만 수리해 보지."

"조, 좋아요!"

세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대답했다. 너무 힘들다는 생각은 저만치 달아나 버렸다. 자그마치 베르였다.

그동안 크라테르나 몰레스까지 수리해 봤다. 하지만 그 이상의 기체는 한 번도 수리한 적이 없었다.

크라테르나 몰레스 위에도 몇 가지 기체가 더 있었다. 주로 크란 제국에서 생산하는 기체였는데, 출력이 2.0을 넘어서는 기체였기에 수리조차 아무에게나 맡기지 않을 정도로 철저한 보안을 유지했다.

그동안 수많은 기간트를 수리하면서, 내심 그런 기체를 보기만 해도 뭔가 배울 점이 많고 좋은 경험이 되겠다고 생각해 왔다.

한데 느닷없이 베르라니. 기뻐서 펄쩍 뛰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럼 오후에 갖다 놓을 테니까 며칠 쉬고 시작해."

세나가 거세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당장 시작할게요!"

기세가 워낙 대단했기에 제론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회의 끝나면 같이 작업실로 가지. 내려 줄 테니까."

성을 옮기면서 세나의 작업실도 새로 지었다. 예전처럼 어두침침한 창고에서 지낼 필요가 없었다.

세나의 작업실은 거대했으며, 상당한 장비가 갖춰져 있었다. 실력과 부품만 제대로 공급되면 당장 기간트 한 대 뚝딱 만드는 것도 문제없을 정도였다.

그 작업실에 초고대 문명의 기술이 일부 적용되었다는 건 제론만 아는 비밀이었다.

"자, 그럼 다음."

제론의 시선이 카이트에게 닿았다. 카이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환하게 웃었다.

"무려 스무 명이나 구했습니다."

"스무 명?"

"한 달 후에 도착 예정입니다. 군부에 정리할 것들이 좀 남아서 당장 오기는 어렵습니다."

제론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 많았다. 드디어 제대로 된 기사단을 만들 수 있겠군."

카이트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일반적인 기사단과는 많이 다를 겁니다. 그들은 군부의 라이더일 뿐입니다. 아무리 기사 작위를 내려도 진짜 기사와는 여러 가지로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실은 제론도 익히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카이트가 섭외한 스무 명의 라이더는 제론이 처음 군에 입대했을 때부터 겪은 자들이었다.

그들에 대해서는 어쩌면 카이트보다 더 빠삭하게 꿰고 있을지도 모른다. 항상 그들과 기간트 대결을 하고 그들의 실력을 키워 왔다.

그렇기에 그들의 장단점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군부의 라이더는 일반적인 기사 출신 라이더보다 기간트 운용이 조금 더 뛰어났다. 그리고 집단전에서는 훨씬 뛰어나다.

반면 실제 몸으로 하는 검술은 기사에 비해 현저히 모자랐다. 검에 쏟는 시간을 오로지 기간트에 쏟아부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냥 군부에 뼈를 묻는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이렇게 기사가 되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기사는 반드시 기간트 라이더일 필요는 없었다. 물론 기간트 라이더라면 더 좋겠지만 세상 모든 기사가 라이더일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기본적인 기사로서의 소양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주군에 대한 충성이었고, 두 번째가 검술이었다.

기간트 소환 자체가 금지된 곳이 존재하는데, 거기서 무력을 쓸 일이 있으면 오로지 본신의 실력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기간틱 나이트가 좋은 대우를 받는 것이다.

"검술이야 익히면 그만이지. 너도 슬슬 검을 익히는 게 좋지 않을까?"

카이트 역시 다른 군부의 라이더와 마찬가지로 기간트 조종 실력에 비해 검술이 약했다. 그 점을 지적하니 카이트로서는 그저 뒷머리를 긁적이는 수밖에 없었다.

제론은 그런 카이트를 향해 책자 하나를 휙 던져 주었다.

"이게 뭡니까?"

책자를 받아 든 카이트는 그렇게 물으며 책을 펼쳤다. 그 안에는 검을 든 사람의 그림이 가득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매 페이지 가장 아래에 작은 글씨로 '라이트닝 소드'라고 적혀 있었다.

"라이트닝 소드라는 검술이다. 가장 첫 페이지에 있는 것이 검술과 가장 잘 맞는 마나 호흡법이다. 그걸 익히도록."

카이트가 의문 가득한 눈으로 제론과 책자를 번갈아 바라봤다. 대체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라이트닝 소드라는 검술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또한 마나 호흡법이라니. 그게 대체 뭐란 말인가.

"내가 고대 유적에서 얻은 게 있다고 말 안 했던가? 고대의 검술과 몸에 마나를 쌓는 법이다."

제론의 설명에 카이트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몸에 마나를 쌓는 법이라니. 그럼 익스퍼트가 되는 방법이라는 뜻 아닌가.

"장담하는데, 검술의 자질이 바닥을 기지 않는 한, 세 달 안에 익스퍼트가 될 것이다."

"그게 정말입니까?"

제론의 말은 폭탄이나 다름없었다. 그 말을 들은 바이스와 세나까지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을 정도였다.

세 달 만에 익스퍼트로 만들어 주는 검술이라니. 그게 가능한 일인가? 그리고 그렇다면 이 검술을 제대로 익히면 소드 마스터가 되는 것도 가능하다는 뜻 아닌가.

"말하지 않아도 잘 알겠지만, 이 일은 무조건 비밀이다. 외부에 새 나가는 순간 우리는 끝이야. 알고 있겠지?"

세 사람이 동시에 침을 꿀꺽 삼키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보물을 가진 건 죄가 되지 않지만, 보물을 가진 자가 힘이 없는 건 죄가 된다.

젤레 영지는 아직 작다. 아마 라이트닝 소드에 관한 내용이 외부로 조금만 흘러 나가도 흔적도 없이 쓸려 나가고 말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영지 근처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예전 영지를 구해 준 의문의 기간트 때문이었다.

거기에 라이트닝 소드까지 더해지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하면 이 라이트닝 소드를 기사 전원이 익히는 것입니까?"

카이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제론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미리 익히고 있는 게 나을 거야. 기사단장이 다른 기사보다 약하면 좀 그렇지 않겠어?"

제론의 말에 카이트의 몸이 순간 굳었다. 그는 이내 이를 악물었다. 생각해 보니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남은 시간은 고작 한 달,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 책은 서둘러 외우고 태워 버리도록."

"예? 하면 다른 기사는……."

"네가 익히고 가르쳐야지."

그제야 카이트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하지만 다급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남을 가르치려면 자신이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알겠습니다. 그럼."

카이트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아마 지금부터 연무장에 틀어박혀 쉴 새 없이 검을 휘두르리라. 물론 그 와중에 기간트 센스를 잃지 않기 위한 노력도 틈틈이 하고 말이다.

"자, 이제 대충 회의를 마무리하지. 아마 조만간 내가 수도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수도에요?"

세나의 눈이 동그래졌다. 바이스 역시 놀란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두 사람의 표정에 약간의 불안감이 담겼다.

"인재를 찾아야지. 기사만으로는 영지를 이끌어 갈 수 없다는 거 잘 알잖아."

"그야 그렇습니다만……."

"그리고 바이스는 정말 말레피 후작가의 후계자 자리에는 관심이 없는 건가?"

바이스가 생각조차 하지 않고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전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다."

그렇게 말한 바이스는 제론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나중에는 말레피 후작가의 가주가 되는 것보다 영주님 아래에 있는 게 훨씬 영광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바이스의 말에는 포부와 야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제론은 그런 바이스의 태도가 싫지 않았다. 제론 역시 사내였다. 포부와 야망이 없을 리 없었다.

다만 지금은 그 앞에 생존과 복수가 놓여 있을 뿐이었다.

"어쨌든 바이스는 원래 마법사라는 걸 잊지 마."

"알고 있습니다."

"성 중앙에 있는 탑. 어떤 용도인지 혹시 알고 있어?"

"마법진의 축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야. 그건 우리 영지의 마탑이기도 해."

"예?"

바이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탑을 영주성 중앙에 세웠다니 너무나 파격적이었다.

마탑은 일반적으로 마법사의 연구실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최근의 마탑은 국가적 지원을 받으며 기간트를 연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바이스가 마탑주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바이스의 표정이 결연해졌다.

"기대에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좋아. 기대해 보지."

제론은 씨익 웃었다. 바이스는 오늘 자신이 한 선택으로 인해 초고대 문명의 마법 지류 중 한 자락을 잡게 되었다는 사실을 아마 절대 모를 것이다.

"자. 이젠 정말로 여기까지 하자고. 난 조만간 수도로 갈 테니까 내가 사라지면 그런가 보다 하고."

바이스와 세나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알겠습니다, 영주님."

두 사람은 깍듯하게 대답하고는 물러갔다.

제론은 집무실에 혼자 남자, 마나 호흡을 통해 체력을 한 번 보충했다.

이제부터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일을 하러 갈 시간이 되었다.

바로 유적 방문이었다. 아직도 끝내지 못한 11층을 오늘 끝내고야 말 것이다.

이젠 정말로 끝이 보였다.

기존 유적은 완전히 사라지다시피 했다. 물론 유적의 가장자리 부분은 성의 외벽이 되어 방어를 단단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유적의 중앙 부분에는 마탑이 세워졌고, 유적의 끝 부분, 즉, 제론이 지하 유적으로 들어가던 장소에는 영주의 집무실과 침실을 비롯해 영주에 관한 모든 것이 위치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곳은 침실과 집무실이었다. 물론 그건 제론을 제외한 다른 사람이 보는 관점이었다. 제론에게 가장 중요한 장소는 제일 아래층에 위치한 지하 연무장이었다.

유적 바닥을 최대한 파고들어 단단한 청석을 촘촘히 깔아 웬만한 충격에도 끄떡없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게다가 벽과 바닥 곳곳에 충격 흡수 마법진까지 새겨져 있었다.

지하 연무장도 제론이 마지막에 직접 손을 봤다. 이곳은 제론이 소드 마스터가 된 이후에도 계속 써야 하기에 최대한 튼튼하게 만들었다.

제론은 연무장 한가운데에 섰다. 영주 전용 연무장이었기에 제론이 들어온 이후에는 누구도 안에 들어올 수 없었다. 이는 마법적으로 처리되기에 설사 바이스나 세나라 하더라도 이곳에 들어오는 건 불가능했다.

오직 영주인 제론만이 출입 가능한 공간이었다.

제론은 연무장 한가운데에 서서 아네모스를 불렀다. 제론의 몸이 순식간에 아래로 쑥 내려갔다.

로비 한가운데 선 제론은 망설임 없이 11층으로 향했다. 마티를 찾는 것도 중요했지만 지금은 막바지에 이른 11층 수련을 마무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제론은 즉시 테오스를 불러냈다. 순식간에 테오스가 나타났고, 제론은 어느새 테오스에 탄 상태가 되었다.

테오스는 나타남과 동시에 아공간에서 검을 뽑아 내리그었다.

슈각!

변종 오우거 한 마리가 두 동강 났다. 너무나도 깔끔한 일격이었다.

그 뒤로 수많은 오우거가 달려들었다. 하지만 테오스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최소한의 동작만으로 깔끔하게 오우거를 베어 버렸다.

이내 수십 마리의 오우거가 달려들었다.

테오스는 여전히 깔끔한 동작으로 오우거의 목을 날려 버렸다.

오우거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결국 수백 마리의 오우거가 달려들었다. 하지만 테오스는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슈각! 슈각! 슈각! 슈각! 슈가각!

검을 한 번 휘두르면 오우거의 머리 하나가 어김없이 떨어졌다. 때로는 두 개가 동시에 떨어질 때도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때쯤 검에서 마나로 이루어진 날이 쭉 뿜어져 나왔을 텐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마치 마나가 전혀 서리지 않은 검으로 싸우는 듯했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마나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써서 딱 검날에 스며들 정도로만 조절을 한 것이다.

테오스는 마치 검을 휘두르며 춤이라도 추는 것처럼 움직였다. 갑자기 검이 수십 개로 늘어난 것 같은 환상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그리고 수십 개의 목이 동시에 치솟았다.

촤촤촤촤!

사방이 피로 얼룩졌다. 수백 마리 오우거가 피를 뒤집어쓴 채 달려들었다.

하지만 테오스는 여전히 검을 휘두르며 춤을 추었다. 수십 개로 불어난 검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사방을 난자했다.

촤악! 촤악! 촤악!

수십 개의 목이 떨어지자마자 또 수십 개의 목이 떨어졌다. 그렇게 연달아 목이 떨어지니 수백 마리나 되는 오우거가 순식간에 죽어 버렸다.

그런 광경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그리고 제론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한 순간이 찾아왔다. 지금까지 한 번도 넘지 못했던 벽이었다.

천 마리의 변종 오우거가 일제히 달려들었다.

수백 마리와 천 마리는 차원이 달랐다. 검으로 베고 베도 끝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의 테오스는 예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촤악! 촤악! 촤악!

테오스의 검은 여전히 수십 개였고, 검을 들고 추는 춤도 그대로였다.

백 마리든 천 마리든 똑같았다. 아마 수천 마리가 동시에 덤벼도 똑같았을 것이다.

천 마리 오우거가 바닥에 눕는 시간은 지극히 짧았다. 제론은 테오스를 멈추고 가만히 서서 아랫배에서 출렁이는 마나를 점검했다.

아직 얼마든지 더 싸울 수 있었다. 마나를 채 반도 쓰지 않았다. 제론의 입가에 씨익 미소가 어렸다. 얼마 전 얻은 깨달음이 아니었다면 이런 성과를 얻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갑자기 사방에 펼쳐진 모든 자연경관이 싹 사라져 버렸다. 테오스는 새하얀 방 안에 홀로 서 있었다.

제론은 11층을 클리어했다는 걸 깨닫고는 테오스를 아공간으로 돌려보냈다.

이제는 그 새하얀 공간에 제론 혼자 서 있었다.

지잉!

방 한가운데에서 기둥 하나가 솟았다. 11층 클리어 보상이었다. 제론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기둥으로 다가갔다.

기둥 안에는 작은 보석이 하나 놓여있었다. 새까만 보석이었는데, 크기가 작은 콩알만 했다. 이걸 어디에 쓰는지도 알 수 없었다.

"뭐지? 설명 카드도 없고."

생각해 보면 검술이나 마법의 경우가 아니면 요즘은 클리어 보상에서 설명 카드가 함께 나오지 않았다. 알아서 스스로 파악하라는 뜻이리라.

"음?"

제론은 문득 보석의 모양이 조금 낯익다는 걸 깨달았다. 보석은 정밀하게 세공되어 있었는데, 모양이 마치 태양을 형상화한 것 같았다.

이렇게 작은 보석을 이런 모양으로 세공하는 것도 보통 힘든 일이 아닐 것이다.

"아!"

제론은 왜 모양이 익숙한지 알아냈다. 벨트의 버클에 있던 문양과 똑같았다.

일단 벨트를 푼 제론은 버클을 살폈다. 버클 한가운데에 보석과 똑같은 문양이 있었다.

문양을 보니 보석을 어떻게 쓰는지 딱 알 수 있었다. 이 문양은 애초에 보석을 위한 자리였다. 문양의 모양에 맞춰 홈이 파여 있었다.

제론은 망설이지 않고 보석을 홈에 끼웠다.

철컥!

화아악!

뭔가가 딱 맞물리는 소리가 났고, 그와 동시에 강렬한 섬광이 일었다. 버클에서, 아니, 보석에서 나는 섬광이었다.

제론은 눈이 멀어 버릴 것 같은 섬광 속에서 보석이 버클에 녹아들며 완벽하게 하나가 되는 광경을 확인했다. 참으로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이내 섬광이 사라졌다. 이제 버클 한가운데에는 처음부터 만들어진 것 같은 검은 태양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게 어떤 선물인지가 중요하지."

제론은 일단 테오스를 소환했다. 그리고 조종석에서 과연 뭐가 달라졌는지 살펴봤다.

일단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시야였다. 평소보다 왠지 시야가 훨씬 넓어진 듯했다. 하지만 선물이 고작 그거 하나라면 너무 모자라지 않은가.

제론이 그렇게 뭐가 달라졌는지 살피고 있을 때, 갑자기 새하얀 방 안 곳곳에서 시커먼 구멍이 나타났다. 수백만 개는 되는 듯했다.

그리고 그 구멍에서 검은 연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마치 폭포 소리 같았다. 연기가 흘러나오는 게 아니라 앞으로 쏘아지듯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어느 정도 앞으로 나오면 연기가 깨끗이 사라져 버렸다.

제론은 그 광경을 보다가 문득 뭔가가 달라진 것 같아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경악했다.

"뭐, 뭐야! 이게!"

사방이 열려 있었다. 테오스의 조종석만 허공에 붕 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은 분명히 테오스 안에 있었다.

제론의 감각이 날카로워졌다. 그리고 사방에 화면이 확확 떠올랐다. 작은 화면이긴 했지만 비치는 광경은 너무나 선명했다.

모든 화면이 비슷한 영상을 내보내고 있었다. 다름 아닌 이 방의 상황이었다.

검은 구멍에서 까만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 테오스가 서 있었다. 그것을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각도에서 비췄다.

제론은 이게 무엇인지 대번에 알았다.

"마티……."

11층 클리어 보상은 놀랍게도 정보 수집 아티팩트, 마티였다. 그동안 그렇게 찾아도 안 보이더니 여기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이내 방 안이 마티로 꽉 찼다. 그럼에도 구멍에서는 계속 마티가 쏟아져 나왔다.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 제론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체른산 유적에 있는 마티의 수보다 이곳에 있는 마티의 수가 최소한 수십 배는 많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제론은 즉시 로비로 이동했다. 그 와중에도 사방에 뜬 화면을 통해서 마티가 계속 쏟아져 나오는 광경을 지켜봤다. 마티는 정말 끝없이 쏟아졌다. 그리고 결국 그 방을 가득 채워 버렸다.

물론 조만간 그 방은 텅 빌 것이다. 이 마티는 젤레 영지 주변을 완전히 장악하기 위해 밖으로 나갈 테니 말이다.

제론은 테오스를 아공간으로 돌려보내고 로비 한가운데 서서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이제 마티를 얻었으니 이걸 쓸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정보를 확인할 때마다 테오스를 불러낼 수는 없지 않은가.

또한 자동으로 정보를 정리하는 기능도 필요했다. 사실 그 모든 걸 감안하면 태블릿을 이용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문제는 과연 태블릿으로 이곳의 마티를 다룰 수 있느냐는 점이었다.

모를 때는 해 보면 된다. 제론은 즉시 태블릿을 꺼냈다. 그리고 몇 가지 조작을 통해 이것으로 마티를 관리할 수 있다는 걸 알아냈다.

제론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한 번에 두 가지가 해결되었다. 이제 수로를 파고 물의 정령과 계약하면 정말 홀가분하게 수도로 올라갈 수 있을 것이다.

제론은 한 달 안에 그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다짐했다.

"영주님!"

제론은 자신을 부르며 집무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바이스를 힐끗 쳐다봤다. 왜 왔는지 알기에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바이스는 그런 제론의 태도를 보고 확신했다.

"영주님이 하셨습니까?"

"뭘?"

"영주님의 기간트였습니까?"

"뭐가?"

바이스는 제론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제론의 태도만 살폈다. 점점 확신이 짙어졌다. 바이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영주님. 그 기간트가 영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파장이 정말로 만만치 않습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바이스가 뭘 걱정하는지 알기에 제론은 싱긋 웃어 주었다.

"뭘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영주님……."

바이스가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지우고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아무리 믿는 사람이라도, 또 측근이라도 그런 일을 함부로 말해선 안 된다.

그것이 영지 전체를 위기에 빠뜨릴 수 있는 중대한 비밀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바이스는 일단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영주님. 평원에 수로가 완성되었습니다. 아마 그 수로에 물이 채워진다면 내년부터는 식량이 너무 많아 걱정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론이 바이스를 보며 씨익 웃었다.

"곧 채워질 거야."

그제야 바이스가 미소를 지었다. 제론은 방금 그 한 마디로 여러 가지 의미를 동시에 전해 주었다. 조금 굳어 있던 바이스의 마음이 눈 녹듯 풀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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