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권 - 35화 (36/217)

4권

Chapter 1 응징

젤레 영지의 새로운 영주성 중심에는 높은 첨탑이 하나 서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첨탑이었지만, 사실 고도의 마법적 기법이 들어간 일종의 아티팩트였다.

성 자체가 거대한 마법진을 이루는데, 그 중심이 되는 장소이기도 했다.

제론은 첨탑 꼭대기 층에 서서 사방으로 뚫린 창을 통해 영지 전체를 쭉 둘러봤다.

사방으로 끝없이 평지가 펼쳐져 있었다. 사실 중간 중간 거대한 바위가 있었지만, 몽땅 내다 버리거나 성을 건축할 때 재료로 써 버렸다.

"이제 물 문제만 남았군."

농사를 지으려면 물이 필요하다. 유적을 중심으로 하는 황무지는 어마어마한 넓이였다. 그 모든 곳에 작물을 심으려면 충분한 물이 필요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수로를 파는 것이었다. 거미줄 같은 수로를 깔아 곳곳에 물을 대서 편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가장 좋았다.

다만 그렇게 하려면 어마어마한 노동력이 필요했다. 물론 제론은 그 문제에 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테오스가 나서면 한 달 안에 모든 작업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문제는 어디서 물을 끌어오느냐였다.

일단 파종을 시작했다. 황무지 전체에 한 건 아니지만 웬만한 영지에서는 꿈도 꿀 수 없을 정도로 넓은 땅에 파종을 했다.

그리고 제대로 작물이 자라게 하려면 물을 공급해야만 한다.

제론이 떠올린 방법은 정령이었다.

현재 제론은 바람의 정령인 아네모스와 푸르투나를 다룰 수 있다. 한데 꼭 바람의 정령만 존재하란 법은 없었다. 물의 정령도 있고 불의 정령도 있었다.

그중 물의 정령을 이용하면 급한 대로 물을 공급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일단 바람의 정령을 다루는 건 문제가 없었는데, 과연 제론이 물의 정령까지 다룰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제론은 최근 태블릿을 들고 다니며 정령에 대해 열심히 조사 중이었다.

'일단 물의 정령을 불러낼 수 있어야 돼.'

제론은 결론을 내렸다. 물의 정령을 불러낸 뒤, 유적에 가져가면 된다. 그러면 아네모스를 얻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물의 정령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할 일이 너무 많군."

아직 정보 수집 아티팩트 마티도 못 찾았다. 한데 이제는 물의 정령까지 불러내야 한다. 그러려면 물가에서 한동안 애를 써야 한다.

그뿐 아니라 주변 세 영지에 응징을 준비하는 것도 살펴봐야 한다. 주된 계획을 제론이 세워야 했기에 손을 뗄 수가 없었다.

거기에 인재도 찾아야만 한다. 라이더도 필요했고, 행정가도 필요했다. 마법사도 있으면 좋고, 병사도 많으면 좋다.

또한 상단을 운영하려면 상업적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필요했다. 제대로 된 상단을 만들어야 이 광활한 영토에서 곡물을 키운 뒤 제값을 받고 팔 수 있다.

"차근차근하자. 차근차근."

제론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어쨌든 게으름 피우지 않고 한 발 한 발 나아가다 보면 모든 게 끝나 있을 것이다.

제론은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봤다. 제국 황제 검술과 마나 호흡을 수련하며 향상된 그의 시력으로도 황무지의 끝을 볼 수 없었다. 그 정도로 넓은 땅이었다.

제론이 한창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며 영지를 둘러보고 있을 때, 첨탑에 오르는 세 사람이 있었다. 바이스와 세나, 그리고 카이트였다.

"영주님, 역시 여기 계셨군요."

바이스의 말에 제론이 고개를 돌려 세 사람을 보고는 빙긋 웃어 주었다.

"생각할 게 많을 때는 여기보다 좋은 장소가 없거든."

그 말이 맞다는 듯 세 사람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가끔 일이 잘 안 풀리거나 생각의 흐름이 막혔을 때 이곳을 찾곤 했다.

그러면 거짓말처럼 묶인 매듭이 술술 풀렸다.

사실 그건 첨탑에 깃든 마법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걸 아는 사람은 이곳에서는 제론뿐이었다. 첨탑의 마법진은 오로지 제론의 힘으로 새겼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야?"

제론의 물음에 세 사람이 긴장했다. 그리고 바이스가 대표로 입을 열었다.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제론의 눈이 강렬하게 빛났다.

"준비가 끝났다고? 그럼 언제부터 시작할 수 있지?"

"내일이라도 당장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제론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 많았어. 그럼 적당한 시기를 한번 잡아 보자고. 확실한 타이밍을 잡아야 돼."

"알겠습니다."

네 사람은 심각한 표정으로 논의를 계속했다. 그 논의는 밤이 늦도록 계속되었다.

☆ ☆ ☆

뤼그너 남작은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서성였다. 예전 젤레 영지에 수작을 걸다가 실패한 이후, 한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물론 그 뒤로 다른 영지와 손을 잡고 공동 대응하기로 밀약을 맺었다. 그렇게 해서 기간트까지 구입했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벨루스 백작가가 뒤를 봐주기로 했는데, 그때 일 이후로 연락 한 번 없었기 때문이었다.

뤼그너 남작은 손에 들린 보고서를 다시 한 번 읽었다.

"달라진 건 공사를 하던 일꾼이 몽땅 농사로 돌아섰다는 것뿐인가?"

한 달에 한 번씩 보고를 받았다. 하지만 지난 몇 달 동안 젤레 영지는 한결같았다.

오로지 공사뿐이었다. 성을 세우는 데 목숨이라도 건 것처럼 사람을 모아 몽땅 공사에 투입했다.

겨울이 되면서는 더 심해졌다. 영지민까지 싹 동원한 것이다. 물론 젤레의 영지민은 다들 그 상황을 좋아했다.

겨울이 되어 농사도 지을 수 없는데 일거리가 생긴다는 건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그렇게 해서 결국 봄이 오기 직전에 성이 완공되었다. 솔직히 놀랐다. 그렇게 거대한 규모의 성을 고작 몇 달 만에 완성시킬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으니까.

하지만 젤레 영지가 보여 준 그 이후의 행보는 뤼그너 남작의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었다.

젤레 영지에 새로 지은 성은 광활한 황무지 한가운데 위치했다. 그 황무지는 씨를 뿌려도 싹조차 나지 않는 죽은 땅이었다.

한데 성을 완공하자마자 거기에 씨를 뿌려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어쨌든 그런 일을 계속 진행하려면 전쟁을 벌일 여유는 없겠군."

세 영지가 함께 돈을 모아 기간트를 두 기나 구입했다. 한 기는 실바였지만, 다른 한 기는 크라테르였다.

기간트 구입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벨루스 백작가의 도움으로 제법 수월하게 기간트를 구할 수 있었다.

막대한 돈이 지출되었지만 덕분에 어느 정도 불안감을 떨쳐낼 수 있었다.

당시 크라테르 한 기가 보여 준 위용은 어마어마했다. 기간트를 왜 일인 군단이라고 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마 그때 영지전으로 번졌다면 분명히 뤼그너 남작령을 비롯한 세 영지는 무너졌을 것이다.

그 이후 부랴부랴 기간트를 구입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현재 크라테르는 뤼그너 남작령에서 보관 중이었고, 실바는 나머지 두 영지에서 번갈아 쓰고 있었다.

"농사라, 농사……."

뤼그너 남작은 문득 그 황무지에 농사를 지을 수 있다면 어떻게 될지 떠올렸다.

황무지의 넓이는 어마어마하다. 거기서 곡물이 난다면 양이 엄청날 것이다.

뤼그너 남작령에서 키우는 곡물 정도로만 자라 준다고 해도 왕국의 식량 값을 크게 바꿀 수 있을 만한 양이 나올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뤼그너 남작이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 황무지가 쓸모없는 땅이라는 사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증명이 되었다. 또한 자주 다시 증명되어 왔다.

멀쩡한 땅을 놀릴 이유가 없으니 농사가 가능한 땅을 찾아 무던히도 애를 썼다. 하지만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 땅은 정말로 죽은 땅이었다.

"그나저나 벨루스 백작가는 완전히 손을 뗀 것인가?"

뤼그너 남작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만일 벨루스 백작가가 조금만 힘을 보태 준다면 얼마든지 젤레 영지를 집어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철사자 기사단이 당했다는 사실은 뤼그너 남작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 당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저 외부의 힘이 작용했다는 정도가 전부였다. 벨루스 백작가가 발 벗고 나서서 정보를 차단한 결과였다.

그렇기에 더 아쉬웠고, 서운했다. 필요할 때는 와서 모든 걸 다 해 줄 듯하더니, 이제 와서 입을 싹 씻고 모른 척하니 말이다.

뤼그너 남작이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영주님! 큰일입니다!"

뤼그너 남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일인데 그러느냐!"

묻고 나니 불안해졌다. 지금 이렇게 큰일이라고 할 만한 일은 딱 하나뿐 아닌가. 다급한 기사의 표정을 보니 더욱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뤼그너 남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폭동이라니. 이건 또 무슨 일이란 말인가.

"자세히 고해라!"

"파종을 하던 놈들이 갑자기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제압을 위해 출동한 병사까지 폭동에 합류해 일이 커지고 있습니다!"

"뭐라고?"

뤼그너 남작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감히 폭동이라니. 자신을 얼마나 우습게 여겼으면 이따위 일을 벌인단 말인가.

"몇 놈이나 폭동에 가담했느냐?"

"대략 이백 명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흥, 병사를 풀어 싹 잡아들여라. 그놈들을 몽땅 노예로 팔아 버리겠다."

안 그래도 영지 재정이 휘청거리는 상황이었다. 이백 명이나 되는 노예를 판매한다면 당분간 돈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노, 노예로 말입니까?"

뤼그너 남작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내가 명령을 다시 내려야 하느냐?"

"아, 아닙니다! 즉시 시행하겠습니다!"

뤼그너 남작령에는 오백 명의 병사가 있었다. 또한 기사단까지 있었다. 고작 이백 명의 폭도 따위 반나절도 걸리지 않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뤼그너 남작은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많이 달랐다.

"부대 정렬!"

기사단장의 외침에 병사가 줄을 맞춰 섰다. 그리고 창을 앞으로 살짝 내밀었다. 언제든 달려들 수 있는 준비를 마친 것이다.

그리고 말을 탄 기사 열 명이 폭도를 꿰뚫어 버리겠다는 듯 기세를 내뿜었다.

반면 이백 명에 달하는 폭도는 흉흉한 눈을 빛내며 손에 든 몽둥이를 꽉 쥐었다. 그 사이사이에 병사가 섞여 있었는데, 다들 검을 뽑아 들고 눈앞에 보이는 병사와 기사를 노려봤다.

병사의 수는 사백 명이었다. 폭도 안에 백 명이나 되는 병사가 섞여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예전 젤레 영지에 포로로 잡혔던 자들이었다.

"전진!"

기사단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자 병사가 일제히 걸음을 내디뎠다.

척! 척! 척!

발을 맞춰 한 발 한 발 전진하는 사백 병사의 위압감은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그들과 맞서는 폭도의 눈빛은 여전히 흉흉하기만 했다. 전혀 겁먹거나, 기세에 눌리지도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충실히 훈련을 받아 온 병사들은 창을 앞으로 겨눈 채 발 맞춰 걸어갔다.

병사와 폭도의 간격이 점점 줄어들었다. 폭도는 창을 앞세운 병사가 밀려오는데도 전혀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이내 양측의 간격이 스무 걸음 정도가 되었다. 그러자 폭도 중 하나가 소리쳤다.

"지금이야! 던져!"

그와 동시에 폭도 사이에서 어린아이 주먹만 한 구슬이 휙휙 날아갔다. 새까만 구슬이었는데, 정확히 다섯 개였고, 모두 병사들 앞에 떨어졌다.

퍽! 퍽! 퍽! 퍽! 퍽!

번쩍!

강렬한 섬광이 일어났다. 그 섬광은 병사와 기사를 완전히 삼켜 버렸다.

"크아악!"

"아악! 눈이!"

섬광이 사라졌다. 섬광에 노출된 병사와 기사가 두 눈을 감싸고 괴로워했다. 문제는 말이었다. 말조차 섬광 때문에 난동을 피웠다.

"지금이다!"

폭도가 일제히 뛰어나갔다. 몽둥이를 든 그들의 기세는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퍽! 퍽! 퍽!

"컥!"

"끄악!"

폭도의 몽둥이질에 병사들이 무기력하게 쓰러졌다. 아무리 빛 때문에 시력을 잃었다지만 지나치게 쉬웠다. 게다가 기사들도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백 명의 폭도가 사백 명의 병사와 열 명의 기사를 몽둥이로 제압하는 데에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병사와 기사가 순식간에 쓰러졌다.

"우리가 이겼다! 다들 묶어!"

폭도의 움직임은 일사불란했다. 마치 잘 훈련받은 사람 같았다. 순식간에 병사와 기사에게 달려들어 무기를 압수하고 손발을 묶었다.

팔다리가 꽁꽁 묶인 병사와 기사는 멍하니 폭도들을 바라봤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기사는 병사와 차원이 다른 무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데 그런 기사조차 힘 한 번 못 쓰고 당해 버렸다. 고작 폭도에게 말이다.

"기간트가 올 수도 있으니 준비해라!"

누군가의 외침에 폭도들이 우르르 움직여 꽁꽁 묶인 병사와 기사를 어딘가로 옮겼다.

폭도에 의해 팔다리를 붙들린 병사와 기사는 결국 기겁을 했다. 그들의 눈에 구덩이가 보였다. 사람 하나 누울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서, 설마……."

다들 믿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죽이지도 않고 산 채로 땅에 파묻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온몸이 덜덜 떨려 왔다.

툭! 툭!

곳곳에서 사람을 구덩이에 던져 넣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하는 병사와 기사는 그 순간 온몸이 경직되었다. 하지만 이내 조금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뭐지? 구덩이가 너무 얕아.'

구덩이에 누워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밖이 살짝 보일 정도였다. 가만히 누워 있으면 흙을 채워도 얼굴이나 가슴, 배 정도는 드러날 것 같았다.

잠시 후, 몇몇 사람이 와서 구덩이를 흙으로 채웠다. 예상했던 대로 얼굴이 밖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고개를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귀까지 흙에 덮여 고개를 움직이면 바로 흙이 코와 입으로 쏟아질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상황이 영주성으로 보고되었다.

뤼그너 남작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려 사백 명이나 되는 병사와 열 명의 기사가 사로잡혔다. 이는 뤼그너 남작령의 모든 병력이었다.

만일 그들에게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면 갑작스런 병력의 공백에 남작령을 다스리는 일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었다.

아니, 지금 이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면 남작령이 무너져 버릴 것이다.

물론 결국은 왕국 차원에서 나서서 해결해 주긴 하겠지만, 그때는 이미 늦다. 영지는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질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 폭동에 의해 자신이 죽을 수도 있었다.

뤼그너 남작은 위기감을 느끼며 말했다.

"기간트를 써야겠군."

기간트를 쓴다면 이 모든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었다. 기간트는 그 정도로 대단한 힘을 가졌다.

고작 이백 명의 폭도 따위 기간트가 나서기만 하면 금방 쓸어버릴 수 있었다.

설사 이백 명의 기사가 달려들어도 기간트 한 대를 어쩌지 못할 텐데 고작 폭도 이백 명이 뭘 어쩔 수 있겠는가.

"가자! 내가 직접 그놈들이 짓밟히는 모습을 봐야겠다."

뤼그너 남작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러자 그 뒤를 남은 기사 두 명이 황급히 따라갔다. 물론 그 두 기사는 정식 기사가 아니라 견습이었다.

정식 기사는 이번 폭동을 수습하러 갔다가 몽땅 사로잡힌 것이다.

그나마 라이더는 따로 분리해 둬서 다행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자칫 기간트까지 폭도에게 빼앗길 뻔했다.

뤼그너 남작령에 배당된 크라테르의 라이더는 기사단의 부단장이었다. 라이더의 경험을 가진 기사가 그뿐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다른 영지에서 라이더로 내세운 자들보다는 기간트 센스가 뛰어났기에 크라테르를 받을 수 있었다.

소식을 들은 듯 그는 이미 크라테르에 탑승해 폭도에게 달려갈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뤼그너 남작은 즉시 마차에 탔다. 마차가 출발하자, 크라테르가 마차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걸어갔다.

쿵! 쿵! 쿵! 쿵!

이내 마차가 폭동이 벌어진 곳에 도착했다. 뤼그너 남작은 서둘러 마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봤다.

경작지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여기저기가 파헤쳐졌고, 수백 명이나 되는 병사가 왔다 갔다 하는 바람에 파종을 하려면 다시 땅을 한 번 갈아엎어야만 했다.

그 상황을 확인한 뤼그너 남작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서두르지 않으면 금년 농사가 잘못될 수도 있었다.

그건 곤란했다. 기간트를 사느라 얼마나 무리했는데 농사까지 망치면 뤼그너 남작령은 빚의 수렁에 빠져들고 말 것이다.

"서둘러라!"

뤼그너 남작의 외침에 크라테르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쿵! 쿵! 쿵!

그렇게 몇 발 걸어간 크라테르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뤼그너 남작이 그것을 보고 소리쳤다.

"서두르지 않고 뭘 하는 것이냐!"

"영주님! 앞에 사람이 있습니다!"

뤼그너 남작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사람이 있는데 뭘 어쩌란 말인가.

"그냥 밟고 지나가!"

뤼그너 남작의 외침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 외침을 들은 자들, 즉, 바닥에 얼굴만 내놓고 파묻힌 사람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들은 기간트가 다가오는 소리만 들었지 정작 기간트를 볼 수 없었다. 시야에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두려웠다. 만일 기간트가 자신을 밟고 지나가기라도 하면 완전히 눌려 터져 버릴 테니 말이다.

"하지만 영주님! 저들은 분명히 우리 병사들이 분명합니다. 앗! 단장님!"

크라테르에 탄 부단장이 바닥에 묻힌 자들 중 기사단장을 발견하고 소리쳤다.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뤼그너 남작도 부단장과 마찬가지로 깜짝 놀라고 당황스러웠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그렇다면 폭도가 병사와 기사를 사로잡아 땅에 파묻었다는 말 아닌가.

"이놈들! 설마 기간트의 진격을 막으려고 이따위 짓을 했단 말인가!"

뤼그너 남작은 다급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일단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을 만한 장소가 필요했다. 예를 들면 높은 탑 같은 것 말이다.

장소는 쉽게 발견했다. 뤼그너 남작은 열심히 달려 근처에서 비교적 지대가 높은 언덕으로 향했다. 언덕 위에 서 있는 나무를 타고 올라가면 분명히 상황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체통도 잊고 나무에 기어올라 간 뤼그너 남작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저런 나쁜 놈들!"

사백 명의 병사와 열 명의 기사가 바닥에 얼굴만 내놓고 묻혀 있었다.

병사를 밟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도록 교묘하게 사람을 깔아 두었다. 뤼그너 남작은 이를 갈았다. 마음 같아선 그냥 밟고 지나가라고 명령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리 영주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다고 하지만 민심을 완전히 잃으면 곤란했다.

자신을 죽이려는 영주를 위해 어떤 병사가 창을 들어주겠는가.

물론 기간트로 협박해 공포로 다스리면 되긴 한다. 하지만 그건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다. 그 방법은 가장 나중에 써먹어야만 했다.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인상을 쓰던 뤼그너 남작의 눈에 빈 공간이 들어왔다. 마치 그리로 들어오라는 듯 사람이 전혀 깔리지 않은 공간이었다.

함정이 분명했다. 하지만 기간트를 상대로 인간이 무슨 함정을 팔 수 있겠는가.

'기껏해야 땅을 파는 건데…….'

뤼그너 남작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인간들이 구덩이를 파 봐야 얼마나 깊게 팔 수 있겠는가. 크라테르의 키는 무려 11미터에 달한다. 팔을 위로 올리면 그보다 훨씬 길다.

그런 크라테르를 완벽히 함정에 빠트리려면 기어오르기 어렵게 절벽처럼 땅을 파 내려가야만 한다. 게다가 최소 20미터는 파 줘야 크라테가 빠져나오기 어려워진다.

아무리 인원이 많다고 하지만 그 정도 깊이의 구덩이를 파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폭동이 일어난 건 오늘이었다.

미리 준비를 했다면 누군가의 눈에 띄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보고를 받은 적은 없었다.

뤼그너 남작은 속으로 모든 계산을 끝낸 뒤 크라테르에게 명령했다.

"저쪽에 빈 공간이 있다! 그쪽으로 들어가!"

부단장은 생각도 하지 않고 남작의 말을 따랐다.

쿵쿵쿵쿵!

폭도가 모여서 눈을 빛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남작의 말대로 사람이 깔리지 않은 곳도 보였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땅을 파내서 사람들을 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그 정도로 섬세한 조종은 불가능했다. 그건 경력이 10년쯤 되는 라이더나 할 수 있을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부단장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쿵쿵쿵쿵!

뚫린 길을 통해 달려가는 크라테르의 기세가 흉흉했다. 당장이라도 폭도를 박살 낼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결국 기세는 기세일 뿐이었다.

꽈앙!

예상대로 구덩이 함정이 있었고, 크라테르가 거기에 빠졌다. 예상과 다른 건 딱 하나 깊이였다.

뤼그너 남작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땅이 푹 꺼지며 크라테르가 빠졌는데, 모습이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대체 저런 구덩이를 언제 팠단 말인가.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언덕 나무 위에서도 크라테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은 구덩이였다. 정말로 20미터가 넘는 깊이인 모양이었다.

꽈릉! 꽈르릉!

크라테르가 구덩이 안에서 나오려고 발버둥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쉽진 않겠지만 결국은 나오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폭도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었으니까.

크라테르가 구덩이에 빠지기 무섭게 폭도들이 우르르 달려갔다. 일부는 마차로 향했고, 일부는 뤼그너 남작이 있는 언덕으로 향했다.

뤼그너 남작은 크게 당황했다. 설마 폭도가 자신을 노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당연히 기간트가 쓸어버릴 거라고 생각했으니 당연했다.

"어어……."

뤼그너 남작이 나무에서 내려오지도 못하고 당황할 때, 사백 명이나 되는 폭도가 나무 아래에 도착했다. 그들 중 한 명이 도끼를 들고 나왔다.

도끼를 든 사내가 나무 위를 올려봤다. 뤼그너 남작과 눈이 마주치자 씨익 웃어 주고는 손바닥에 침을 퉤퉤 뱉었다.

그리고 도끼를 불끈 쥐고 나무를 패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나무가 파이면 파일수록 뤼그너 남작의 안색이 점점 창백해졌다.

마차를 박살 낸 나머지 폭도가 언덕으로 올라왔다. 그들의 눈빛은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뤼그너 남작의 목젖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일이 다른 두 영지에서도 동시에 벌어지고 있었다.

☆ ☆ ☆

제론은 느긋하게 응접실로 향했다. 동시에 세 명의 손님이 왔다고 하나,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누구인지 목적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었다.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기다리던 세 사람이 일제히 벌떡벌떡 일어났다.

"영주님을 뵙습니다."

세 사람이 정중히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제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아 주고는 소파에 앉아 등을 기댔다.

제론이 아무 말 없이 쳐다보기만 하자 세 사람은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 없으니 어떻게든 말을 해야만 했다.

"저…… 도와주십시오, 영주님."

한 사람이 먼저 용기를 내서 말하자, 나머지 두 사람도 저마다 말했다.

"도와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론이 씨익 웃으며 그들을 쳐다봤다.

"뭘 어떻게 돕길 바라나?"

그들은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현재 저희 영지에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는 들은 것 같군. 그래서? 설마 폭동을 제압하지 못해서 병력을 빌려 달라는 얘기는 아니겠지?"

세 사람의 얼굴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들은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으며 더듬더듬 말을 이어 갔다.

"저…… 그…… 영주님 말씀이 맞습니다. 폭동을 제압하지 못했습니다."

제론이 피식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지만 할 말이 없었다. 고작 영지민의 폭동 하나 제압하지 못해 도움을 요청했으니 비웃음을 당해도 쌌다.

"그래. 어떻게 도우면 되겠나? 가서 폭도를 싹 죽여 주면 되나?"

세 사람이 반색했다.

"그렇게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데……."

"뭔데? 말해 봐라."

"저희 영주님이 폭도들에게 잡혀 계십니다."

제론의 입가에 걸린 비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세 사람은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얼굴도 시뻘게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영주까지 구해 달라?"

"제발 부탁드립니다!"

세 사람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세 영지의 후계자였다. 이번에 도움을 청하면서 젤레 영지의 영주인 제론과 안면도 익힐 겸 온 것이었다.

또한 그들 정도가 움직이지 않으면 제론을 설득하기 어려울 거라고 예상했다.

"좋아. 도움을 주지. 한데 그럼 내게 뭘 줄 텐가?"

"예?"

세 사람은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그냥 이웃을 도와주신다고 생각하시면……."

제론이 피식 웃었다.

"훗. 웃기지도 않는군. 얼마 전에 우리 영지에 무슨 짓을 했는지 내가 다 아는데 그따위 말을 하다니 말이야."

세 사람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솔직히 할 말이 없었다. 결국 그들은 제론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제론이 손가락 하나를 들고 말했다.

"일단 포로로 잡은 폭도와 그의 가족을 몽땅 내가 가지겠다."

세 사람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어차피 폭도를 몽땅 죽여 버리려고 했다. 한데 그런 자들을 대가로 가져가겠다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제론이 손가락 하나를 더 들었다.

"보상금으로 향후 5년 동안 매년 1만 골드를 바쳐라."

"예? 그, 그건……."

"왜, 어렵나?"

세 사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아닙니다. 대신 최대한 빨리 처리해 주십시오."

"물론 오늘 당장 처리해 주겠다."

세 사람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제론에게 매달리지 않으면 정말로 위험한 상황이었다. 영주가 사로잡히는 바람에 기간트까지 폭도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만일 폭도 중에 라이더라도 있다면 영지는 완전히 풍비박산이 날 것이다.

폭동이니 왕국 자체에서 해결해 줄 수도 있지만, 그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그동안 영지는 완전히 망가지고 말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제론에게 매달린 것이다. 너무나 다행이었다. 빠르게 해결할 수 있게 되어서 말이다.

적어도 세 사람은 그렇게 생각했다.

제론은 그런 세 사람을 보며 또 한 번 씨익 웃었다. 모든 건 계획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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