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4/217)

Chapter 10 뒤처리

젤레 영지의 폭동은 생각보다 큰 피해 없이 마무리되었다. 죽은 사람은 많았지만 대부분 움직임이 비교적 굼뜬 부랑아였고, 병사의 피해는 많지 않았다.

그래도 피해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는데, 바이스는 죽은 병사의 가족에게 충분한 보상을 지급해 주었다.

예산은 충분했다. 아직 돈은 넘쳐날 정도로 많았다. 게다가 성채가 완공되고 나면 어마어마한 곡물을 길러 낼 수 있으니 쏟아부은 모든 돈을 복구하고도 남았다.

황무지의 넓이는 엄청났다. 네 개의 영지에 걸쳐서 있던 곳이다. 그 모든 황무지를 에어스트 백작이 사들인 것이다.

만일 이 모든 땅에서 밀을 재배할 수 있게 된다면 여기서 나는 밀만으로 레늄 왕국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정도로 넓은 땅이었다.

물론 땅을 개간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지만 바이스는 그것도 다 해결할 자신이 있었다.

그걸 위해서는 지금 짓는 성채를 제대로 만들어야만 했다. 성은 물론이고 성을 중심으로 만들어질 도시 자체를 처음부터 계획해서 지어야만 했다.

일단 성을 다 짓고 나면 도시도 차츰 지을 계획이었다. 물론 지금이야 부지만 확보하고 정해 놓은 게 전부였다.

일단 바이스의 목표는 100만이었다.

100만의 인구가 충분히 살 수 있을 정도의 도시를 만드는 것이 1차 목표였다. 나머지는 그 이후에 생각하면 된다.

인구가 더 늘어나면 주변에 위성도시를 만들면 그만이다. 바이스는 그 문제에 관해서도 착착 계획을 세웠다. 물론 제론과 충분히 상의를 한 후 결정한 내용이었다.

폭동으로 인해 부서졌던 성채는 빠르게 복구되었다. 애초에 워낙 튼튼하게 지었기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달라붙어서 벽돌을 던지고 몽둥이로 내리쳤지만 심하게많이 부서지거나 무너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피해는 피해였다. 그걸 복구하는 데에만 무려 나흘이 걸렸다. 폭동 이후로 일꾼의 수가 상당히 줄었기에 복구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오히려 공사 진행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일꾼이 훨씬 많이 모였기 때문이었다.

이젠 인근 영지뿐 아니라, 더 먼 곳의 영지에 있던 부랑아까지 모여들었다.

사실 이는 전쟁의 여파 중 하나였다. 오랜 전쟁으로 인해 난민이 많아졌는데, 그 난민이 젤레 영지의 소문을 듣고 모여든 것이었다.

바이스는 그 모든 사람을 받아들였다. 일꾼의 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나중에 성이 완성된 이후에도 계속 필요했다. 성만 지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성을 완성하면 저택을 지을 것이고, 저택이 완성되면 상점가를 만들 것이다. 또한 상점가를 만든 이후에는 영지민이 살아갈 집을 지을 것이다.

도시 하나를 새로 만드는 일이다. 당연히 일꾼이 잔뜩 필요했다. 물론 그렇게 갑자기 모든 일을 처리할 생각은 없었다.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이뤄 나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성을 다 지은 뒤 창고만은 반드시 지어야 했다. 이 엄청난 영토에서 나는 곡물을 보관할 창고는 반드시 필요했다.

또한 그렇게 생산한 곡물을 내다 팔 상단도 꼭 필요했다. 이제 슬슬 그에 관한 일을 처리할 시간이 되었다.

물론 그것은 바이스가 아닌 제론이 해결할 문제였다.

☆ ☆ ☆

"크, 큰일 났습니다!"

쿠당탕!

허락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기사의 외침에 뤼그너 남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저런 무례를 저지른단 말인가.

"잠시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뤼그너 남작은 최대한 품위 있게 마틴 준남작에게 말한 뒤, 기사에게 다가갔다.

"이게 지금 무슨 짓이냐! 경망스럽게!"

뤼그너 남작이 나직이 꾸짖었지만 기사는 그런 말을 머리에 새길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자, 작전이 실패했습니다!"

뤼그너 남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실패라고?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고해라!"

"철사자 기사단이 몽땅 사로잡혔습니다. 폭동은 실패로 끝났고, 폭동을 주도한 병사가 몽땅 감옥에 갇혔습니다!"

"뭐라고?"

마틴 준남작의 외침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철사자 기사단이 사로잡혔다는 말은 믿을 수가 없었다. 무려 스무 기의 기간트로 이루어진 기사단이었다. 한데 그들이 사로잡힌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 부분! 더 정확히 설명해 봐라!"

마틴 준남작의 서슬에 기사가 더듬더듬 말했다.

"그, 그러니까…… 폭동을 일으킨 병사 300명 전원이 죽거나 사로잡혔습니다. 젤레 영지의 병사들이……."

"그만! 그거 말고! 철사자 기사단 말이야!"

"기간트가 다 부서진 채로 영주성으로 이송되는 걸 분명히 확인했다고 합니다."

"웃기지 마라! 어디서 헛소리를 늘어놓는 것이냐! 네가 똑똑히 확인한 일이냐?"

"그, 그건 아닙니다만…… 세작이 분명히 확인했다고……."

"가서 직접 확인하란 말이다! 철사자 기사단이 당했다는 게 말이나 되느냐! 그들이 당하려면 젤레 영지에 그보다 훨씬 강하고 숫자도 많은 기간트 기사단이 있다는 뜻인데! 그게 말이나 되느냔 말이다!"

"예! 아, 알겠습니다!"

기사가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어찌나 당황하고 놀랐는지, 명령을 내린 사람이 뤼그너 남작이 아니라 마틴 준남작이라는 사실도 이해하지 못했다.

마틴 준남작은 씩씩거리면서 그 자리에 서서 숨을 골랐다. 그렇게 조금 마음이 안정되자, 그제야 냉정하게 상황을 따져 볼 수 있었다.

"남작님,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흥분해서 못난 모습을 보이고 말았군요."

"아, 아닙니다. 당연히 화가 나실 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보다는 일단 상황을 다시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동의합니다. 함께 가서 좀 더 면밀히 상황을 파악해 보시죠."

두 사람은 서둘러 방을 나섰다. 자칫하면 그동안 쏟은 돈과 노력이 물거품으로 변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둘 모두 기사의 보고를 완전히 믿지 않았다. 철사자 기사단이 당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아무리 젤레 영지의 영주인 제론에게 돈이 많아도 기간트를 단시간에 많이 구하는 건 불가능했다.

기간트는 전략물자다. 아무나 함부로 구입할 수 있는 무기가 아니었다.

방에서 나간 두 사람은 멀리 갈 필요가 없었다. 성의 집사가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 영주님!"

집사의 경망스러운 말과 행동에 뤼그너 남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딱히 그걸 나무라지는 않았다. 다만 조금 불안해졌다.

"무슨 일인가?"

"제, 젤레 영지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사람?"

"예. 일단은 정식 절차를 따르고 있습니다. 영주의 공문을 가져왔다고 합니다."

"공문?"

불안감이 더 커졌다. 뤼그너 남작은 마틴 준남작을 바라봤다. 마틴 준남작도 마침 뤼그너 남작을 보고 있었다.

"일단 함께 가 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마틴 준남작의 말에 뤼그너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지금은 마틴 준남작의 힘이 반드시 필요했다.

두 사람은 서둘러 집사를 따라 응접실로 향했다.

응접실에는 절제된 분위기를 풍기는 기사 한 명이 서 있었다. 카이트였다. 군부에서 오래 생활을 했기에 그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카이트는 뤼그너 남작이 들어오자 빙긋 웃으며 예를 취했다. 군례와는 조금 다르지만 기사가 영주에게 취하는 예와 비슷했다.

적당히 무례하지 않게만 인사를 한 카이트는 품에서 문서 한 장을 꺼냈다.

"영주님께서 보내셨습니다. 반드시 답을 받아 오라고 하셨습니다."

뤼그너 남작과 마틴 준남작은 카이트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기사라기보다는 군인 같은 분위기가 훨씬 강했다. 하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제법 강해 보였다.

'젤레 영지에서 벌써 기사를 구했던가?'

뤼그너 남작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알기로 젤레 영지에는 기사가 한 명도 없었다.

물론 급하게 구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척 보기에도 상당한 실력을 가진 것 같은 기사가 덜컥 젤레 영지에 몸을 의탁했다는 점이 의심스러웠다.

뤼그너 남작은 일단 문서를 받았다. 그리고 그것을 쭉 읽었다. 내용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뤼그너 남작의 심기를 충분히 불편하게 하는 내용이었다.

마틴 준남작은 뤼그너 남작이 문서를 넘기자 단숨에 그것을 읽었다. 그의 표정 역시 일그러졌다.

"병사의 몸값을 지불하고 사과를 하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뤼그너 남작이 카이트에게 물었다. 그는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물론 연기였다.

카이트는 뤼그너 남작의 태도에 전혀 당황하지 않고 대답했다.

"귀 영지에서 보낸 병사 100명이 폭동을 주동하다가 잡혔습니다."

"허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우리 영지의 부랑아들이 그곳에 일거리가 있다고 이동한 건 알고 있지만 병사라니!"

"하면 그 병사들은 이곳 뤼그너 남작령의 병사가 아니라는 뜻입니까?"

"당연하지! 내가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감히 날 능멸하려는 것인가! 내 이 문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네! 단단히 따질 걸세!"

"공문으로 답을 주십시오."

카이트의 당당한 말에 뤼그너 남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이놈은 뭘 믿고 이리 뻣뻣하고 당당하단 말인가. 이따위 문서를 들고 왔으면 죽을 각오를 해야 할 텐데 말이다.

뤼그너 남작뿐 아니라 마틴 준남작도 눈을 가늘게 뜨고 카이트의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레더아머에 방패를 등에 메고, 옆구리에는 롱소드를 찼다. 사실 기사의 복장과는 살짝 거리가 있었다. 또한 기간트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기간트 라이더가 들고 다니는 검은 저런 롱소드가 아니라 커다란 양손검이었다. 기간트를 보관하기 위한 아공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들고 다니는 검이었다.

"용기가 대단하군. 담이 커."

뤼그너 남작이 슬쩍 떠봤다. 대체 뭘 감추고 있는지 궁금해서였다.

"칭찬 감사합니다. 하지만 제가 굳이 두려움에 떨 이유가 있습니까?"

카이트는 역시나 당당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당장 자네를 가둬 버릴 수도 있네. 또 목을 날려 버릴 수도 있고. 전령의 목을 자르는 일은 전장에서는 비일비재하다네. 혹시 알고 있나?"

카이트가 피식 웃었다. 지금 누가 누구 앞에서 전장 얘기를 하는 것인가. 전장에서 보낸 세월만 해도 10년이 훨씬 넘는다.

"물론 잘 알고 있습니다. 가끔 파렴치한 사령관이 그런 짓을 하지요."

뤼그너 남작이 카이트를 노려봤다. 자신을 파렴치한이라고 돌려서 말하는데 굳이 화를 참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뤼그너 남작은 당장 기사단을 부르려 했다.

혹시 실력이 있을지 모르니 수로 상대하게 할 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기간트를 가지고 있는 이상, 절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영주님뿐입니다."

"기, 기간트?"

뤼그너 남작이 흠칫 놀랐다. 설마 기간트 얘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그는 자신이 혹시 뭔가를 잘못 본 게 아닌가 해서 다시 한 번 카이트의 몸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기간트 장비라 여겨지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뤼그너 남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틴 준남작을 바라봤다. 그 역시 카이트의 몸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있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날 얼마나 무식하고 우습게 여겼으면 그따위 거짓말을 하는 것이냐!"

뤼그너 남작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는 즉시 밖을 향해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다들 들어와 이놈을 잡지 않고!"

뤼그너 남작의 명에 응접실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기사단이 우르르 몰려왔다. 무려 스무 명이나 되는 기사가 안으로 들어와 카이트를 포위했다.

카이트는 그들을 슥 둘러보고는 씨익 웃었다. 그 표정에는 일말의 불안감조차 없었다.

"여기서 기간트를 소환하면 성이 망가질 수도 있는데, 남작님이 먼저 이렇게 나오셨으니 제 책임은 아닙니다."

카이트는 그 말과 동시에 기간트를 소환했다.

후우우우웅!

강렬한 마나의 폭풍이 몰아쳤다. 그리고 거대한 기간트가 즉시 소환되었다. 크라테르였다.

꽈과광!

거대한 기간트가 소환되는 바람에 응접실이 완전히 망가졌다. 그뿐 아니라 성 자체가 흔들렸다.

우르르르르르.

카이트는 가볍게 기간트에 올라탔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꽈르르릉!

성의 일부가 무너졌다. 응접실이 성 가장자리에 위치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기둥이 부서져 성 자체가 무너질 수도 있었다.

카이트는 크라테르를 움직여 일단 응접실에서 나갔다.

꽈과광! 쿵! 쿵!

성 일부가 허물어졌다. 카이트가 움직이기 위해 부숴 버린 것이다. 카이트는 성 밖으로 나와 자신 때문에 뚫린 구멍을 통해 응접실을 확인했다.

뤼그너 남작과 마틴 준남작은 무사했다. 하지만 기사는 그렇지 않았다. 스무 명의 기사 중 멀쩡히 서 있는 사람은 고작 열 명뿐이었다.

기간트가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깔리고 부딪쳐 죽고 다친 것이었다.

뤼그너 남작은 물론이고 마틴 준남작도 턱이 빠질 정도로 입을 크게 벌렸다. 그리고 멍하니 크라테르를 바라봤다.

"어, 어찌 기간트가……."

믿을 수 없었다. 분명히 기간트용 장비가 없었다. 한데 어디서 기간트가 나왔단 말인가.

"계속하시겠습니까?"

카이트의 말에 뤼그너 남작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맹렬히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라면 성이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더구나 살아남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카이트는 즉시 기간트에서 내렸다. 그리고 소환을 해제했다. 그는 당당했다. 자신은 전혀 잘못이 없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뚫린 벽을 통해 다시 응접실로 들어간 카이트는 당당하게 다시 요구했다.

"답을 공문으로 주십시오."

뤼그너 남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는 카이트를 노려봤다.

"기간트까지 소환해 날 협박한 건가? 이건 절대로 그냥 묻어 두지 않겠네."

"먼저 시작한 것은 남작님입니다. 전 미리 경고해 드렸습니다."

카이트의 말에 뤼그너 남작이 이를 뿌드득 갈았다. 지금 더 신경을 자극해 봐야 좋을 게 없었다. 일단 자신에게는 기간트가 없었다. 이대로 싸우면 시작도 하기 전에 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뤼그너 남작은 종이를 준비해 즉시 서류를 작성했다. 화가 치밀어 생각했던 것을 모두 문서에 쏟아부었다. 욕만 안 했을 뿐이지 어찌 보면 그보다 더 심했다.

옆에서 그걸 지켜보고 있던 마틴 준남작이 서류 위에 손을 슬그머니 올렸다. 뤼그너 남작이 마틴 준남작을 올려보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좋지 않소. 일단 시간을 더 벌어야 하오."

그제야 뤼그너 남작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깨달았다. 이대로 공문을 전달해서 젤레 영지를 도발하면 자칫 영지전으로 번질 수도 있었다.

기간트가 없는 상황에서 당장 영지전이 시작되면 뤼그너 남작령은 끝장이었다. 오랜 역사를 가진 가문이 사라질 수도 있었다.

그는 즉시 서류를 박박 찢었다. 그리고 정성을 들여 새로운 서류를 작성했다. 완전히 발뺌하는 내용으로 꼼꼼하게 쓴 것이다.

카이트는 그런 뤼그너 남작과 마틴 준남작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확인하고는 서류를 받아 인사 후, 응접실에서 나갔다.

벽에 뚫린 구멍을 통해 멀어져 가는 카이트의 모습이 너무나 잘 보였다.

"끄응.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뤼그너 남작은 앓는 소리를 흘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도 파악이 불가능했다.

"이제 어쩌면 좋겠습니까?"

뤼그너 남작의 물음에 마틴 준남작이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은 그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일단…… 다른 영지의 상황도 좀 알아보는 게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뤼그너 남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떴다. 일단 주변에 있는 두 영지에 사람을 보내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분위기를 보면 그들도 같은 문서를 받았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같이 손을 잡고 대응하면 된다.'

뤼그너 남작이 마틴 준남작의 눈치를 힐끗 살폈다. 그가 도와주기만 한다면 승산이 있었다.

어쩌면 젤레 영지가 알아서 영지전을 걸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아무리 기간트를 보유했다고 하지만, 벨루스 백작가에 비할 수는 없었다.

세 영지가 힘을 모으고, 벨루스 백작가에서 도와준다면 영지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젤레 영지를 편입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제론의 재산을 모두 빼앗고 말이다.

그것이 모두가 행복해지는 길이었다. 물론 젤레 영지만 제외하고 말이다.

사실을 확인하면 할수록 입만 벌어졌다. 기사의 보고는 모두 진실이었다. 정말로 철사자 기사단 전원이 사로잡혀 감옥에 갇혀 있었다.

마틴 준남작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다.

조사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공사에 참여했던 사람을 찾아보면 되니 말이다.

부랑아의 경우 한 번 공사장에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오히려 더 만나기 어려웠다. 하지만 뤼그너 남작령이나 다른 영지의 영지민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주기적으로 영지로 돌아와 가족을 만났다.

매일 왕복하는 건 거리가 너무 멀어 힘들기에 한 번 오면 최대한 오래 버티다가 돌아갔다. 그래도 어쨌든 공사를 하며 번 돈을 집에 전해 줘야 하기에 주기적으로 반드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만나 당시의 일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리고 경악했다.

철사자 기사단이 단 한 기의 기간트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어찌 혼자서 스무 기의 기간트를 물리칠 수 있단 말인가. 그건 누구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사 뛰어난 성능을 가진 발굴형 기간트라 해도 말이다.

한데 묘한 말을 들었다. 기간트의 생김새를 듣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모습이 너무나 생소했다.

'새로운 기간트!'

갑자기 머릿속이 팽팽 돌았다. 새로운 기간트가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젤레 영지에!

마틴 준남작은 이를 바탕으로 뭔가를 꾸밀 수 있지 않을까 궁리했다. 이대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냥 돌아가면 아마 자신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마틴 준남작은 젤레 영지에 나타난 기간트에 대해 좀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였다.

☆ ☆ ☆

"어때? 내 예상대로지?"

"예. 한 치의 오차도 없었습니다."

카이트는 그렇게 대답하며 제론을 바라봤다. 사실 적지 않게 감탄했다.

세 영지를 돌아다니며 제론이 작성한 문서를 전달했다. 그리고 각 영지의 반응을 확인하고 답을 받아 왔다. 한데 그 반응이 제론이 처음 말했던 것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한데 정말로 병사 모두를 사형시키실 겁니까?"

"그럴 리가. 이 문서를 보여 줘야지."

"문서를 말입니까?"

"그들은 더 이상 영지에 충성하지 않을 거야."

제론의 말에 카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와 비슷한 방법은 전쟁에서도 흔히 쓰인다. 포로로 잡힌 적병을 세뇌한 뒤 돌려보내면 적에게 혼란을 줄 여지가 생긴다.

약간의 빈틈이 승패를 결정할 수도 있기에 몇 번 써먹었던 방법이었다. 물론 그로 인해 상당한 성과를 얻었다.

빈틈을 만들었을 때, 그 빈틈을 파고든 것이 붉은 학살자였으니까.

"한데 저들을 정말로 그냥 내버려 둬도 되겠습니까?"

"그럼?"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서 쓸어버리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마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될 것입니다."

제론은 카이트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그렇게 되겠지."

"아마 지금쯤 서로 힘을 모아 대적하자고 모의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겠지."

"하니 지금 당장 쓸어버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저들에게는 기간트도 없습니다. 저 혼자 나서도 다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

제론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저들의 뒤에는 벨루스 백작가가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돼."

그 말을 들은 카이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두렵지는 않았다. 자신과 제론이 나선다면 아무리 벨루스 백작가가 기간트를 잔뜩 몰고 와도 다 박살 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그로 인해 영지가 피폐해지고, 또 누가 어떻게 죽을지 알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전쟁에서 이겨도 이긴 게 아니게 된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영지를 운영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면 전쟁에서 이긴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럼 이제 어쩌실 겁니까?"

"일단 라이더를 양성해야지."

"라이더 말입니까?"

카이트는 라이더라는 말에 눈을 빛냈다. 젤레 영지의 전력을 단시간에 끌어 올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카이트는 창고 안에 서 있던 열다섯 기의 실바를 떠올렸다.

'그걸 탈 놈만 있어도 아무도 쉽게 못 건드리겠지?'

아무리 실바라도 기간트는 기간트였다. 열다섯 기나 되는 기간트가 있는 영지에 덤비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아무리 전력이 훨씬 뛰어나다 하더라도 말이다.

열다섯 기의 기간트를 상대하려면 그만한 손실을 감수해야만 한다. 이기더라도 막대한 손해를 볼 가능성이 있기에 누구도 쉽게 싸움을 걸지 않는다.

"라이더에 관한 문제는 제게 맡겨 주십시오."

카이트의 말에 제론이 빙긋 웃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단발로 그치면 안 된다는 것 알겠지?"

"물론입니다."

카이트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즉시 밖으로 나갔다. 여기서 말로 떠드느니 한 발이라도 직접 뛰는 게 나았다. 카이트는 그런 사람이었다.

카이트가 나가자, 제론은 잠시 의자에 기대 휴식을 취했다. 최근 너무 열심히 움직이느라 몸에 쌓인 피로가 장난 아니었다.

제론은 일단 마나 호흡을 통해 피로를 조금 풀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첫 도발은 잘 넘겼지만 아직 마무리가 덜 되었다. 다독여야 할 사람이 남아 있었다.

제론은 집무실에서 나가 영주성 근처에 서 있는 커다란 창고로 향했다.

"죄송해요."

세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자신 때문에 젤레 영지에 위험이 왔다고 생각하니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인 벨루스 백작이 원망스러웠다.

제론은 그런 세나의 머리를 헝클어 주었다. 세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들고 제론을 바라봤다.

"왜 네가 죄송해.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세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다. 제론은 담담한 눈으로 세나를 보면서 말했다.

"내가 널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겠지."

세나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뇨. 선배님이 끌어들인 게 아니에요. 제가 스스로 여기까지 온 거죠."

제론은 그런 세나를 가만히 안아 주었다. 세나는 갑작스러운 제론의 행동에 정말로 깜짝 놀랐다.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갈 정도로 말이다.

"내가 끌어들인 거야. 너희와 함께하고 싶은 욕심에 내가 그렇게 만들었어."

세나는 그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제 뭐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녀의 손이 슬며시 올라가 제론의 등을 감싸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끝을 보지 못했다. 어느새 제론이 그녀를 놓고 뒤로 물러났기 때문이었다.

세나는 아쉬운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당분간 좀 쉬도록 해. 마음 추스르기가 쉽지 않을 테니까."

세나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일이 다 끝날 때까지는 안 쉴 거예요. 이렇게라도 해야 제가 도움이 될 테니까요."

세나의 당찬 말에 제론은 빙긋 웃었다. 역시 이래야 세나다웠다.

'어쨌든 마음이 많이 안 다친 것 같아 다행이군.'

제론은 세나가 강한 여인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보통은 이런 상황이 되면 마음을 추스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가문의 기사들이 자신이 머무는 영지를 부수러 기간트까지 몰고 왔으니 말이다. 물론 실제는 좀 달랐지만 받아들이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다.

제론은 사로잡은 철사자 기사단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답은 쉽게 나왔다.

제론은 세나에게 수고하라는 말을 남기고 창고에서 나왔다. 그리고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철사자 기사단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단장은 기간트 전투로 인한 충격이 생각보다 커서 아직 거동을 못했기에 부단장인 펠이 나서서 탈출 계획을 세웠다.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야 뭔가를 해도 할 것 아니겠는가.

"누군가 옵니다!"

망을 보던 기사의 말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탈출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면 어떤 꼴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지금이야 이렇게 한데 모여 있지만, 뿔뿔이 흩어지기라도 하면 탈출의 길은 요원해진다.

저벅! 저벅!

지하 감옥을 울리는 발소리가 점점 커졌다. 감옥에 들어온 누군가가 자신들을 향해 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펠은 긴장을 풀고 휘하 기사들에게 눈짓을 했다. 다들 감옥 곳곳에 흩어졌다.

나타난 사람을 본 펠이 눈을 빛냈다. 영주가 온 것이다.

"좀 지낼 만한가?"

제론이 감옥의 창살 앞에 서서 말했다.

펠은 앉은 채로 그런 제론을 올려봤다. 무수한 갈등이 일어났다. 그들의 몸에는 그 어떤 금제도 없었다. 하다못해 족쇄라도 채워져 있다면 움직이기가 힘들겠지만 그런 것조차 없었다.

펠은 마음속으로 계산을 했다. 만일 창살을 단번에 잘라 버리고 달려들면 영주를 제압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만일 영주를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많은 일이 해결된다. 영주를 인질로 탈출하는 건 물론이고, 원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도 있다. 이곳 영주를 죽이면 세나 폰 벨루스가 다시 가문으로 돌아갈 확률이 높았다.

"왜? 덤비면 쉽게 이길 수 있을 것 같은가?"

제론의 물음에 펠이 흠칫 놀랐다. 마치 마음속에 들어왔다 나간 것 같지 않은가. 잠깐 놀랐던 펠은 이내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표정에 모든 게 나타나는데 그걸 못 알아차릴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굳이 그렇게 애쓸 필요 없다. 어차피 풀어 줄 생각이었으니까."

펠이 고개를 번쩍 들고 제론을 바라봤다. 그리고 방금 한 말의 진위를 파악하려 애썼다. 설마 아무 조건도 없이 그냥 놔줄 리는 없지 않은가.

"그런 눈으로 볼 것 없다. 아무 조건 없이 놔줄 테니까."

"그게 정말이오?"

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론은 그런 펠을 보며 피식 웃었다.

"말투가 마음에 안 드는군. 난 백작이다. 너희들의 주군과 같은 작위를 가지고 있지."

하지만 백작이라고 다 같은 백작이 아니었다. 힘을 가진 백작은 대우를 받지만 그렇지 않은 백작은 오히려 웬만한 기사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

그것을 잘 아는 펠은 속으로 비웃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것을 내색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몸을 낮춰서라도 원하는 걸 얻어 내야만 했다.

"원하는 게 무엇입니까?"

"없다. 그냥 몸만 돌아가면 된다."

"정말입니까?"

"그래."

제론은 더 말을 끌기 싫다는 듯 열쇠를 꺼내 철창의 문을 열었다.

철컹! 끼이이익!

철문이 열렸다. 제론은 한 발 뒤로 물러나 턱짓을 했다. 어서 나가라는 뜻이었다.

펠은 또 고민했다. 이대로 나가느냐 아니면 제론을 잡아가느냐를 가지고 말이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런 기회를 놓치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었다. 그들은 받은 명령을 충실히 이행할 의무가 있었다. 기회가 왔는데 버리는 건 명령을 거부하는 거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펠은 그렇게 생각하며 뒤로 손을 슬쩍 가렸다. 그리고 손가락 몇 개를 움직여 수신호를 보냈다.

적을 기습하라는 뜻의 신호였다. 그걸 본 기사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물론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다.

펠을 선두로 기사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왔다. 거동이 불편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단장은 기사 한 명이 업었다.

공격이 가능한 기사의 수는 모두 열여덟 명. 그 정도면 충분했다. 제론이 제법 강하다는 정보는 알고 있었지만 어느 정도인지는 몰랐다. 다만 일대일 대결은 승산이 없다는 것만 알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대일 대결이 아니다. 무려 열여덟 명이 한 명을 공격하는 것이다. 충분히 제압할 자신이 있었다.

더구나 펠을 비롯한 일곱 명은 익스퍼트였다. 그것도 익스퍼트에 오른 지 제법 오래된 능숙한 익스퍼트였다.

'승산은 100프로다.'

펠은 확신했다. 그가 달려드는 걸 신호로 일제히 기습하기로 했다.

'이런 곳에 혼자 와서 문을 열어 주다니. 멍청한 건지, 실력에 자신이 있는 건지…….'

펠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이 제론을 향해 날아갔다.

쉬익!

펠의 손끝이 제론의 명치를 노리고 쏘아져 나갔다. 손끝이 거의 명치에 닿는 순간까지 제론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펠은 성공을 확신했다. 역시 기습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었다.

턱!

펠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손끝이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제론의 명치에 딱 닿은 채로 멈춰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목이 꽉 잡혀 있었다.

제론이 씨익 웃었다.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무방비 상태로 서 있는데 기회를 놓치려 할 리가 있겠는가.

제론이 손을 휘둘렀다.

부웅!

펠이 허공을 날았다.

제론은 달려드는 기사들을 향해 펠을 휘둘렀다.

퍼버버벅!

펠의 몸이 허공에서 절묘하게 흔들리더니 달려드는 기사의 손을 피해 몸통을 가격했다. 펠의 다리가 기사의 어깨를 때려 날려 버렸고, 허벅지가 몸통을 때려 피를 토하게 만들었다.

콰콰콰콰!

마치 폭풍이 일어나는 듯했다. 그 좁은 지하 감옥의 복도에서 펠을 들고 휘두르니 피할 곳이 만만치 않았다.

결국 달려든 기사는 몽땅 바닥에 쓰러져 신음했다. 본의 아니게 무기가 되었던 펠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제론은 펠을 휙 던졌다.

털썩!

펠은 바닥에 널브러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죽은 건 아니었지만 기력이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다른 기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치 온몸의 뼈가 부러지기라도 한 듯 움직이지도 못하고 끙끙댔다.

"엄살 대충 부리고 알아서 나가도록. 어디로 가든 잡지 않을 테니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

제론은 그 말을 남기고 지하 감옥에서 나가 버렸다.

남은 스무 명의 기사는 바닥에 누워 계속 끙끙 앓았다.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그 고통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이곳에서는 나가야만 했다. 기회가 왔는데도 나가지 못하면 두고두고 웃음거리가 되리라.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펠이었다. 가장 많이 다쳐 제일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그가 먼저 움직였다. 부단장이라는 책임감의 무게가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펠은 일어나서 동료를 하나하나 일으켜 주었다. 펠의 노력에 다들 이를 악물고 움직였다. 하지만 그저 움직일 수 있다고 끝나는 게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아직 움직이지 못하는 철사자 기사단의 단장이 있었다.

결국 단장은 펠이 업었다. 펠은 이에서 피가 날 정도로 어금니를 악물고 움직였다.

그렇게 한 발 한 발 철사자 기사단이 지하 감옥에서 나갔다.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무사히 젤레 영지를 떠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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