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3/217)

Chapter 9 폭동

철사자 기사단의 부단장인 펠은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단장님, 우리가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명령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저 마틴이라는 놈의 머리에서 나온 것 아닙니까. 마틴의 명령이지 주군이신 백작님의 명령이 아닙니다!"

"그래도 해야 한다. 백작님께서 시키신 일이나 다름없다. 그분이 원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도 해야만 한다. 너도 잘 알 텐데?"

펠은 대답하지 못했다. 단장의 말이 옳았으니까.

'나중에 마틴 그 개자식은 꼭 한 번 손봐 주고야 만다.'

어쨌든 지금은 시킨 대로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펠은 한숨을 내쉬며 공사가 벌어지는 현장을 멀리서 지켜봤다.

젤레 영지의 새로운 성이었다. 워낙 큰 규모의 공사인지라 아직 제대로 성채의 모습이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몇 달 안에 분명히 공사가 끝날 것이다.

수백 명이나 되는 인부가 달라붙어 자재를 나르고 벽돌을 쌓고 있었다. 인부의 수는 매일 늘어났다. 인근 영지에서 몰려든 부랑아가 대부분이었다.

게다가 어디서 소문이라도 듣고 왔는지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사람이 왔다.

밥은 물론이고 천막까지 제공하니 근처에서 숙식 해결이 가능했기에 다들 좋아했다.

펠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의 시선이 이 모든 공사를 지휘하는 바이스에게 닿았다.

펠을 비롯한 철사자 기사단이 있는 곳은 공사 현장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바이스나 다른 인부에게는 들키지 않았다.

하지만 철사자 기사단은 공사 현장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의 시야는 보통 사람에 비해 훨씬 넓고 멀었다.

"대체 말레피 후작의 아들이 왜 여기서 저따위 일을 하고 있는 거지?"

펠의 중얼거림에 단장이 고개를 돌렸다.

"말레피 후작가? 그 말이 정말이냐?"

"예. 한 번 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습니다. 저기서 공사를 지휘하는 자가 바로 말레피 후작의 아들입니다."

단장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문제가 조금 생겼다. 물론 계획에는 전혀 지장이 없을 것이다. 다만 이대로라면 후환이 반드시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일단 마틴에게 알려야겠다."

기사 중 하나가 득달같이 달려갔다. 뤼그너 남작령도 이 황무지에 경계를 맞대고 있었기에 그리 멀지는 않았다.

2시간 정도 지나자 기사가 돌아왔다. 어찌나 빨리 뛰어갔다 왔는지 숨을 제대로 쉬지도 못했다.

"허억! 허억! 그, 그냥 진행하랍니다. 허억! 허억!"

단장의 표정이 굳었다. 펠은 분통을 터트렸다.

"생존자를 남길 수 없는 상황인데 그냥 진행하라니! 그놈 생각이 있는 놈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단장은 그렇게 말하고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무거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폭동이 시작되고 병사가 몰려오면 모두 죽이고 성을 무너뜨린다. 생존자는 한 명도 용납하지 않는다."

그 명령의 무거움을 아는지라 다들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그들도 어쩔 수 없었다. 일단 명령이 떨어진 이상, 무조건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철사자 기사단의 마음은 점점 무거워져 갔다.

"계획이 제대로 굴러가겠습니까?"

뤼그너 남작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마틴 준남작의 표정에는 한 치의 불안감도 나타나지 않았다.

"걱정 마십시오. 처음 계획과는 조금 달라졌지만, 어차피 결과는 같을 테니까요."

"그럴까요?"

뤼그너 남작의 걱정이 전혀 사라지지 않는 걸 보고는 마틴 준남작이 변경된 계획에 대해 설명할 필요를 느꼈다.

"일단 예정대로 폭동이 벌어질 겁니다."

"하지만 젤레 영지에는 500명이나 되는 병사가 있습니다. 폭동이 일어난다 해도 충분히 막을 수 있습니다."

"막긴 하겠죠. 하지만 그게 전부입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폭동을 막기 위해 모인 병사가 몽땅 죽을 거라는 뜻입니다."

"예?"

뤼그너 남작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대체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있단 말인가.

"아무리 500명이나 되는 병사라 하더라도 기간트의 힘을 이겨낼 수는 없을 테니까요. 20기나 되는 기간트가 모든 걸 짓밟을 겁니다."

뤼그너 남작의 얼굴에 어린 불안감이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철사자 기사단이 그런 일을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거기에는 보는 눈이 많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보는 눈이 있을 리가 없지요."

마틴 준남작은 그렇게 말하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뤼그너 남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거기에는 우리 병사도 있습니다! 설마 그들까지 몽땅 죽이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대의를 생각하십시오. 그깟 병사 100명, 얼마든지 다시 얻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뤼그너 남작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설마 이런 식으로 일을 진행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반발을 할 수는 없었다. 어쨌든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 지금 와서 내리다간 온몸의 뼈가 부러져 죽거나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테니까.

"자, 그렇게 병사가 싹 사라진 젤레 영지에 두 번째 폭동이 벌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폭동을 벌인 자들이 전부 죽었는데 두 번째 폭동이 일어난다고요?"

마틴 준남작이 씨익 웃었다.

"용병이 있지 않습니까. 영주의 부당한 계약에 희생당한 용병 말입니다."

뤼그너 남작은 마틴 준남작의 미소가 이제는 무서워졌다. 이 사람과 계속 엮이면 큰일 나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완전히 손을 끊어야겠어.'

그렇게 속으로 결심을 굳힌 뤼그너 남작을, 마틴 준남작이 묘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봤다. 이미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꿰고 있었다.

'그렇게 쉽게 놔줄 수야 없지. 한 번 낚은 고기를 다시 물에 놔주는 멍청한 짓을 내가 할 리 없잖아? 큭큭큭.'

의미를 알 수 없는 마틴 준남작의 미소에 뤼그너 남작이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불길했다.

☆ ☆ ☆

제론은 유적 로비를 찬찬히 살폈다. 몇 번 유적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11층 공략을 시작하겠냐는 물음뿐이었다.

지금 제론이 원하는 건 11층 공략이 아니었다. 이곳 중앙 유적에 내재된 기능을 알고 싶었다.

그저 끝없이 아래로 내려가며 수련만 하는 곳은 아닐 것이다. 분명히 만들어진 의도가 있을 것이고, 체른산 유적에서 겪은 바에 따르면 분명히 이곳, 중앙 유적에는 뭔가 의미가 있었다.

제론은 그동안 유적에서 지내면서 로비의 기능 몇 가지를 알아낸 상태였다.

처음 로비에 왔을 때, 불쑥불쑥 올라왔던 기둥의 사용법도 알고 있었다. 그 기둥은 유적이 보관하는 물품을 주인에게 전해 줄 때 사용하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기본 물품을 지급했지만, 그 뒤로 식사를 대신할 수 있는 에너지 캡슐이나 한 번 쓰면 사라져 버리는 복사 카드 같은 것들을 계속해서 공급받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제론은 더더욱 정보 수집 아티팩트, 마티도 있을 거라고 믿었다.

문제는 어떻게 그것을 받아 내느냐였다.

체른산 유적에는 한 층 전체가 마티로 꽉 채워져 있었다. 그 정도 양이 있어야 사방 100킬로미터의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

젤레 영지를 중심으로 인근 영지까지 다 살피려면 고작 그 정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젤레 영지만 해도 반경 30킬로미터가 넘는다. 한데 그와 비슷한 수준의 영지가 인근에 세 개나 있었다. 거기에 로트 산맥까지 확인해야 한다.

체른산 유적에 있는 마티 정도로도 솔직히 모자랐다.

로비 곳곳을 돌아다니며 뭔가 새로운 것이 없나 찾아보던 제론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투명한 천장을 통해 밖이 보였다. 유적을 이미 파냈기 때문에 새파란 하늘만 보였다. 하지만 제론은 그 하늘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위를 본 건 그저 반사적인 행동이었고, 실제로는 강렬하게 흐르는 투기를 느끼는 중이었다.

투기는 천장을 통해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다른 곳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유적의 천장은 확실히 특별했다. 시야나 소리뿐 아니라 기운의 흐름까지 전달해 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어쨌든 이제 슬슬 시작하나 보군. 역시 폭동 쪽인가?"

제론은 즉시 밖으로 나갔다. 여전히 유적 내부에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은 다들 성채의 벽돌을 올리는 공사에 매달려 있었다.

이곳은 지하실을 만드는 작업을 할 때에나 사람이 드나들게 될 것이다.

유적에서 밖으로 나간 제론은 심장의 마나링을 맹렬히 회전시켰다. 제론 주변의 마나가 착착 움직이더니 이내 제론의 모습을 감춰 버렸다.

마나링이 여섯 개가 된 이후부터 쓸 수 있는 마법이었다. 모습과 기척을 차단시켜 주기 때문에 이렇게 숨어서 뭔가를 지켜볼 때 아주 유용한 마법이었다.

아직 일이 벌어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투기가 엄청나게 올라간 걸로 봐서 곧 시작될 것이 분명했다.

제론은 차분한 눈으로 상황을 지켜봤다.

오늘은 인부의 행동이 평소와 조금씩 달랐다. 뭔가 평소와 달리 묘하게 날이 선 듯했다. 긴장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바이스는 그걸 보며 표정을 굳혔다. 직감적으로 지금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날카로운 눈으로 일을 시작하는 인부를 하나하나 확인한 바이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상한데, 하나하나 따로 떨어뜨려 놓고 보면 이상한 점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오전은 그렇게 바이스가 인부를 살펴보는 걸로 끝났다. 문제는 점심 식사가 끝나자마자 터졌다.

"에이! 젠장! 이따위 걸 먹고는 도저히 일 못하겠다!"

누군가의 외침이 터졌다. 바이스가 날카로운 눈으로 소리가 들려온 쪽을 노려봤다. 순간,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씨익 웃었다.

바이스는 순간 저놈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바이스의 생각보다 다른 인부의 행동이 더 빨랐다.

"맞아! 도저히 못 참겠어!"

"그리고 이렇게 부려 먹으면서 돈은 고작 그게 다라니 말이 돼?"

"최소한 두 배는 더 줘야지!"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대부분 돈이 모자란다는 것과 음식이 형편없다는 불만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어리둥절한 눈으로 보는 인부도 분명히 있었다. 아니, 그런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하지만 그들은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뭔가 분위기가 묘했기 때문이다. 선동하는 사람 몇 명이 떠드는 소리가 기대심을 자극했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안 그래도 300명이나 되는 주변 영지의 병사가 부랑아로 변해 섞여 있었다.

실제 부랑아의 수는 500명에 달하니 모두 800명이나 되는 엄청난 숫자였다.

선동한 것은 몇 명이었지만 300명이나 거기에 동조를 해 버리니 나머지 500명이 휩쓸리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그들은 분위기에 취해 버렸다. 다수가 하나로 움직일 때는 개인의 성향이 사라져 버린다. 단체의 흐름에 뒤섞여 버리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그렇게 되어 버렸다.

"악덕 영주를 몰아내자!"

"우와아아아아! 몰아내자!"

8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외치는 소리는 천둥처럼 쩌렁쩌렁 울렸다. 그들은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에 취해 주먹을 하늘로 치켜들며 외쳤다.

"악덕 영주를 몰아내자!"

그 모든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바이스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거 대체 뭐가 어찌 된 건지 모르겠군."

분명히 처우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하루에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부랑아들에게 세 끼 꼬박꼬박 먹이고 돈까지 줬다.

영지의 공사를 할 때 이 정도 대우를 해 주는 영주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데도 이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처우를 개선하라면서 말이다.

바이스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거 뒤에 누가 있군!'

누군가가 이번 폭동 자체를 조작했다. 그게 아니라면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제야 오늘 아침부터 느꼈던 그 이상한 위화감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모두 이 일 때문이었다.

"병사를 데려와! 어서!"

바이스는 마나 스틱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허공에 정신없이 마법진을 그렸다. 일단 시간을 벌어야만 했다. 병사가 올 시간을 말이다.

우우우웅!

푸르게 빛나는 마법진이 허공에 떠올랐다. 그리고 투명한 반구가 바이스를 감쌌다.

상당히 수준 높은 실드였다. 이로써 당분간 저들은 바이스를 건드릴 수 없게 되었다.

바이스는 심각한 눈으로 폭동을 일으킨 인부들을 쳐다봤다.

처음에는 그저 허공에 주먹질을 하며 소리치더니 이제는 진정한 폭도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한창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성채를 향해 벽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단단하게 지어진 성채가 조금씩 부서지고 무너져 갔다. 그것을 보는 바이스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의 표정도 함께 무너졌다.

"저걸 짓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

바이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 성채는 그냥 짓는다고 끝이 아니었다. 도면대로 정확하게 지어야만 했다. 또한 마나의 흐름을 파악해 도면을 조금씩 고치는 작업도 병행해야만 했다.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바이스는 최근 흰머리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한데 그런 노력을 퍼부은 성채가 무너지고 있으니 가슴이 아픈 게 당연했다.

이곳에서 병사들이 머무는 영주성까지는 제법 거리가 멀었다. 아마 짧은 시간에 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다.

"저놈도 죽여!"

누군가의 외침이 울렸다. 그러자 폭도들이 우르르 몰려와 바이스를 공격했다. 하지만 아무도 바이스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팅! 팅! 팅!

몽둥이를 아무리 휘두르고 벽돌을 던져 봐야 바이스가 쳐 놓은 실드에 막혀 다 튕겨 나가 버렸다.

"마, 마법사?"

폭도들이 당황했다. 마법사가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 자신을 지휘해 성채 공사를 맡은 책임자가 설마 마법사일 줄은 몰랐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없어질 거야! 계속 공격해!"

누군가의 외침이 울렸다. 마법사가 펼친 마법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그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외친 것이다.

바이스는 방금 전 소리친 사람을 확인했다. 그는 결코 그냥 부랑아가 아니었다. 마나 스틱이 허공에서 부드럽게 움직였다.

다른 마법사와 바이스는 큰 차이가 있었다. 바로 마나 스틱의 차이였다. 바이스의 마나 스틱은 끊임없이 마력을 뿜어낼 수 있었다.

무려 통짜 테페룸으로 만든 마나 스틱이었다. 기간트의 마나 코어와 비슷했다. 다만 기간트는 동력원으로 마나를 뽑아내고, 바이스는 마법을 쓰기 위해 마나를 뽑아낼 뿐이었다.

게다가 마나 스틱에 들어간 테페룸의 양은 실제 기간트와 비교해서 거의 차이가 나지 않았다. 물론 실바의 경우였지만 말이다.

허공에 푸른 선이 죽죽 그려졌다. 마법진이었다. 완성된 마법진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

샤아아아아!

푸른색 빛 가루가 실드로 스며들었다. 실드가 잠깐 동안 은은하게 빛났다.

"말도 안 돼! 실드를 강화했다고?"

또 그 사람이 소리쳤다. 마법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분명했다. 그러고 보면 저 사람이 가장 먼저 나서서 선동을 한 것 같기도 했다.

마나 스틱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마법진의 크기도 작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결코 작지 않았다.

번쩍!

"크악!"

지금까지 소리치던 사람이 가슴을 움켜쥐며 뒤로 벌렁 자빠졌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갑자기 푸른빛이 번쩍하더니 사내가 쓰러졌다. 확인해 보니 죽었다. 그제야 사람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굳이 여기서 위험하게 마법사를 상대하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일단 성부터 부숴!"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러자 사람들이 우르르 성채를 향해 달려갔다.

"와아아아!"

"다 박살 내!"

사람들이 개미 떼처럼 성채에 달라붙었다. 성채가 또 부서지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바이스는 이를 갈며 마나 스틱을 움직였다. 마나는 얼마든지 있었다. 반드시 주동자를 다 색출해 죽여 버리겠다고 결심했다.

푸른 마법진이 나타났다가 빛과 함께 사라졌다.

번쩍!

"크악!"

조금 전 선동했던 사내가 펄쩍 뛰더니 바닥에 쓰러졌다. 또 정적이 흘렀다.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이 차올랐다. 상대는 마법사다. 갑자기 겁이 덜컥 났다.

하지만 그건 500명의 부랑자에게 해당하는 생각이었다. 300명의 병사는 그들과는 달랐다. 무조건 폭동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된다. 이건 명령이었고, 임무였다.

"다 부숴!"

열 명쯤 되는 병사가 서로 눈을 맞춰 동시에 외쳤다. 그러자 다시 우르르 성채에 달라붙었다. 이번에는 설사 누군가 죽더라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300명 병사의 눈에는 결연함이 감돌았다.

그쯤 되니 바이스도 더 이상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빨리 병사가 와서 폭동을 진압하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한참이 지난 후, 수백 명의 병사가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은 몹시 지쳐 있었는데, 먼 거리를 쉬지 않고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훈련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아서 도착하자마자 오와 열을 맞춰 섰다. 진형을 이루는 것이 폭도를 진압하는 데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병사들은 방패를 들어 앞을 막은 채 한 발씩 걸음을 옮겼다. 동시에 움직이니, 발 구름 소리가 쿵쿵 울렸다.

쿵! 쿵! 쿵!

그제야 성채를 부수던 폭도들이 다가오는 병사 무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일부는 두려움에 가득 차 있었고, 또 일부는 눈에 독기를 담았다.

"모두 멈춰라! 그리고 손에 든 것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 무릎을 꿇어라!"

커다란 외침이 울렸다. 실드로 몸을 가린 바이스가 마법을 통해 소리를 증폭시킨 것이다.

"웃기지 마라! 그럼 다 죽일 거잖아!"

누군가가 외쳤다. 그러자 폭도가 다시 웅성거렸다. 그들은 덜덜 떨면서도 손에 든 몽둥이와 벽돌을 놓지 않았다.

"어차피 수는 우리가 더 많아! 이길 수 있다!"

"게다가 저놈들 지쳐 있어! 지금 치면 이긴다!"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하는 자들이 섞여 있었다. 분명히 주변 영지나 아니면 다른 곳에서 몰래 심은 자들이었다.

바이스는 마나 스틱을 움직였다. 푸른 마법진이 나타났다. 엄청나게 큰 마법진이었다.

"수가 많으면 이길 수 있다고? 이쪽에는 마법사가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곤란하지."

바이스의 음성은 여전히 증폭되어 크게 퍼져 나갔다. 모두의 시선이 바이스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다들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바이스의 머리 위로 집채만 한 불덩어리 하나가 떠 있었다. 닿기만 해도 온몸이 타 버릴 것 같은 열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뜨, 뜨거워!"

누군가가 외쳤다. 거리가 제법 떨어져 있음에도 뜨거움이 느껴졌다. 다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이대로라면 다 죽고 말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한쪽을 가리키며 외쳤다.

"저, 저길 봐!"

키이잉! 쿵!

굉음이 울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돌아갔다. 그리고 또 경악에 찬 눈으로 그곳을 바라봤다.

거대한 기간트가 서 있었다. 카타락타였다. 어깨에 맹수의 송곳니를 형상화한 그림 안에 검이 가로로 놓인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바로 벨루스 백작가의 문양이었다.

그 뒤로 다시 기간트가 나타났다. 전부 카타락타였다. 또한 벨루스 백작가의 문양을 어깨에 새기고 있었다.

그렇게 나타난 기간트의 수는 모두 스무 기나 되었다.

가장 먼저 나타난 기간트의 입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한 놈도 살려 두지 마라."

키이이이잉!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나머지 열아홉 기의 기간트가 일제히 울음을 토해 냈다.

"우와악! 뭐야!"

"우릴 다 죽이겠다고?"

"사, 살려 줘!"

병사와 기간트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일단 기간트가 다 죽이겠다고 마음먹으면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다들 공포에 질려 버렸다.

특히 타 영지에서 숨어든 병사의 경우는 배신감까지 더해져서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렇게 버려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열아홉 기의 카타락타가 빠르게 움직이며 포위망부터 넓게 만들었다. 아무도 놓쳐선 안 되기에 미리 도망갈 길을 차단한 것이다.

일단 포위망을 만들었으니 이제 이 안에 있는 자들은 독 안에 든 쥐였다. 아무도 도망갈 수 없을 것이다.

고작 1300명 정도였다. 열아홉 기나 되는 기간트가 동원되었는데 놓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검만 몇 번 휘둘러도 싹 죽어 버릴 것이다.

열아홉 기의 기간트가 병사와 부랑아를 포위한 사이 철사자 기사단의 단장이 탄 카타락타가 바이스를 향해 다가갔다.

쿵! 쿵! 쿵!

워낙 몸체가 큰지라 단숨에 거리가 좁혀졌다.

카타락타는 그대로 팔을 휘둘렀다.

후웅!

퍽!

바이스의 머리 위에 떠 있던 불덩어리가 그대로 꺼져 버렸다. 마나 코어에서 나와 기간트의 몸체에 흐르는 마나가 마법의 힘을 강제로 없앤 것이다.

카타락타는 불덩이를 없앤 뒤, 발을 들었다. 단숨에 바이스를 깔아뭉개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그 카타락타는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어딘가에서 날아온 거대한 바위가 그의 몸체를 직격했다.

꽈앙!

놀랍게도 카타락타는 바위에 맞아 뒤로 붕 날아갔다.

꽈과과과광!

바닥을 데굴데굴 구른 카타락타는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몸이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맞은 바위는 그냥 바위가 아니었다. 안에 마나가 담긴 바위였다. 바위에 맞는 순간 내부에 있던 마나가 기간트 안으로 스며들어 충격을 가했다.

그로 인해 마나 코어에서 흘러나가는 마나 로드 몇 군데가 끊어졌다. 그걸 고치지 않는 한, 끝까지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울 것이다.

키릭! 쾅!

억지로 몸을 일으키다가 다시 쓰러진 단장의 카타락타는 계속 일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이러다 보면 언젠가는 몸에 적응이 되어 일어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더 이상 싸움에 나설 수는 없었다.

"누구냐!"

단장이 움직이지 못하니 다음으로 부단장인 펠이 나섰다. 펠은 바위가 날아온 방향을 노려봤다. 그곳에 거대한 기간트 한 대가 서 있었다.

'저건 뭐지?'

생전 처음 보는 형태의 기간트였다. 아무래도 발굴형인 것 같은데, 처음 발견된 기간트인 모양이었다.

펠은 한편으로는 가슴이 두근거렸고, 다른 한편으로는 욕심이 생겼다. 발굴형 기간트는 모든 라이더의 꿈이었다.

한데 생전 처음 보는 발굴형 기간트였다. 현재까지 발견된 발굴형 기간트의 종류는 모두 네 가지였다. 펠은 그 네 가지 기간트를 모두 본 적이 있었다.

한데 바위를 던진 저 기간트는 그 네 가지 중 어느 것과도 일치하지 않았다. 발굴형 기간트는 개조가 불가능하다. 아직 그것을 다룰 기술력도 마법도 모자라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저건 분명히 새로 등장한 기간트일 것이다.

지금까지는 늦게 발견된 발굴형 기간트가 더 강했다. 그러니 저 기간트는 발굴형 기간트 중 최강이라고 일컬어지는 히엠스보다 더 강할 것이다.

"이 영지의 기간트인가? 보물을 가지고 있었구나."

펠은 그렇게 말하며 바이스의 표정을 살폈다. 한데 바이스의 표정이 묘했다. 나타난 기간트를 보고 놀라고 있었다. 익숙함이 아닌 생소함이 담긴 표정이었다.

'뭐지? 그럼 이 영지의 기간트가 아닌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아닌 게 당연했다. 하지만 이 영지의 주인이 바로 제론 폰 에어스트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아리송해졌다.

'체른산 유적에서 얻은 걸 수도 있겠군.'

펠은 나름대로 그렇게 판단하고는 몸을 돌렸다. 혼자 상대할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발굴형 기간트라고 해도 카타락타 다섯 기 정도가 한꺼번에 덤비면 별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철사자 기사단은 혹독한 훈련 끝에 라이더로서의 능력을 엄청나게 끌어 올렸다. 카타락타로도 얼마든지 상위 기체를 이길 수 있었다.

실제로 가장 실력이 뛰어난 단장의 경우 발굴형 중 가장 성능이 떨어지는 베르를 이길 정도였으니까.

지금이야 단장이 저 꼴로 뒹굴고 있지만, 그거야 불시의 기습이었기에 그렇고, 실제로 싸우면 아마 저렇게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펠은 잠깐 계산을 했다. 그리고 일곱 기로 결정을 내렸다. 아쉬운 대로 열두 기면 병사와 부랑아를 몽땅 죽이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결정을 내림과 동시에 명령을 한 펠은 새로 나타난 검은색 기간트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쿵! 쿵! 쿵! 쿵!

펠의 뒤를 따라 여섯 기의 기간트가 포위를 풀고 움직였다. 남은 기간트가 자리를 조금씩 움직여 포위망을 다시 굳혔다.

열아홉 기에는 모자랐지만 열두 기만으로도 충분히 위압감을 줄 수 있었다. 누구도 그 사이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바위를 던졌던 기간트, 테오스가 다시 움직였다. 미리 준비한 바위를 다시 하나 들었다.

바위의 크기는 기간트의 머리통보다 조금 큰 정도였다. 하지만 기간트의 입장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설사 실바라 할지라도 그 정도 바위는 공깃돌 들 듯 할 수 있었다.

당연히 그런 바위에 맞는다 하더라도 거의 충격을 입을 일이 없었다.

하지만 다가가던 펠은 순간적으로 움찔 놀랐다. 그 바위에 맞은 단장이 아직도 저렇게 헤매고 있으니 조심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것은 펠뿐 아니라 다른 기간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렇게 걸음을 잠깐 멈췄다. 그리고 그 잠깐의 틈은 제론 입장에서는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이었다.

후웅!

바위가 바람을 찢으며 날아갔다.

펠은 맹렬한 기세로 날아오는 바위를 보며 피하려 했다. 하지만 한 발 옆으로 움직였을 때, 그대로 바위가 옆구리에 꽂혔다.

꽈직!

펠은 기간트가 기우뚱 쓰러지는 걸 느꼈다. 균형 감각이 순간적으로 흐트러졌다.

꽈앙!

바닥에 쓰러졌다.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피했다. 한데 바위가 갑자기 빨라졌다. 그래서 미처 다 피할 수가 없었다.

"끄응!"

펠은 흔들리는 머리를 안정시키려 애쓰며 몸을 일으켰다.

키리릭!

꽝!

다리를 분명 받친 줄 알았는데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넘어지고 말았다. 어이가 없었다.

'왼쪽 다리 마나 로드가 끊겼어!'

마나가 어떻게 이어지는지는 알 수 없었기에 다리가 움직이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왼쪽 다리로 몸을 지탱하려고 하는데 몸체가 전혀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고작 바위에 맞았다고 이렇게 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펠은 고개를 들고 테오스를 바라봤다.

마침 테오스가 또 바위를 던지고 있었다. 너무나 가벼운 동작이었다. 하지만 날아가는 바위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후웅!

콰직!

또 한 기의 기간트가 바위에 맞아 쓰러졌다. 그 뒤로 다섯 개의 바위가 더 날아왔고, 따로 나선 기간트 다섯 기가 모두 쓰러졌다.

그리고 그제야 테오스가 앞으로 나섰다.

쿵! 쿵! 쿵!

테오스는 천천히 걸어 가장 앞에 있는 단장의 카타락타 앞에 멈춰 섰다. 단장은 여전히 일어나려 애쓰고 있었다. 이제는 처음과 달리 제법 많이 몸을 일으킬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테오스의 손이 카타락타의 배를 쿡 찔렀다.

콰득! 꽈지직!

테오스의 손에 마나 코어가 딸려 나왔다. 테오스는 놀랍게도 배를 뚫고 마나 코어를 직접 뜯어낸 것이다.

단장의 카타락타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테오스는 마나 코어를 배가 뚫린 카타락타 옆에 툭 던지고 다음 기간트를 향해 걸어갔다.

그렇게 여덟 기의 기간트가 차례로 무너졌다. 모두 같은 꼴이었다. 마나 코어가 뜯어져 나가 옆에 나뒹굴고 있었다.

펠은 시야가 완전히 사라지자 절망감에 빠졌다. 마나 코어가 뜯어졌으니 기간트의 생명이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그가 평생 벌어도 살 수 없을 정도로 비싼 것이 기간트였다.

그런 기간트를 잃었으니 이제 라이더로서의 삶은 거의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펠은 일단 해치를 열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힘주어 밀어도 해치는 열리지 않았다.

마나 코어가 떨어져 나갔으니 강제로 힘으로 열어야 하는데, 해치의 무게는 수백 킬로그램이나 나간다. 물론 그 정도 무게라도 그래도 기사인 펠이 그것을 못 들어 올릴 리 없었다. 하지만 해치는 열리지 않았다.

그제야 펠은 무슨 일인지 깨달았다. 기간트가 엎어져 있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절대 해치가 열리지 않는다. 기간트를 완전히 혼자 들어 올릴 정도의 힘이 없다면 말이다.

펠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당황하지 않았다면 몸이 아래로 쏠리고 있는데 기간트가 엎어져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한데 너무 당황해서 그런 기본적인 생각도 못한 것이다.

허탈한 표정을 지은 펠은 힘없이 조종석에 늘어졌다.

그리고 펠과 똑같은 입장에 처한 사람이 일곱 명 더 있었다. 그들 역시 허탈한 표정으로 조종석에 늘어져 있었다.

남은 열두 명의 철사자 기사단은 잠시 혼란에 빠졌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잠깐 어어 하는 사이에 단장과 부단장을 비롯한 동료 여덟 명이 마나 코어가 뜯어진 처참한 몰골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들은 이대로 처음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저 불길한 기간트를 공격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결론은 금방 내려졌다. 이대로 저 기간트가 난입하면 사람도 죽이기 어렵고 괜한 피해가 생길 우려가 컸다. 차라리 저 기간트를 먼저 제압하고 다음 일을 생각하는 편이 나았다.

단, 한꺼번에 덤벼야 한다.

열두 기의 기간트가 천천히 움직여 진형을 갖췄다. 당연히 근처에 있는 사람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갑자기 기간트가 움직이니 병사와 부랑아 사이에서 난리가 났다.

"으악!"

"밟힌다!"

"피해!"

사람들이 사방으로 개미 떼처럼 흩어졌다. 그 와중에 넘어져 서로가 서로를 밟아 다치고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그리고 기간트에 밟히는 사람도 무수히 나왔다.

쿵! 쿵!

열두 기의 기간트가 진형을 갖췄다.

그와 동시에 테오스가 달렸다.

쿵쿵쿵쿵쿵!

열두 기의 기간트가 달려오는 테오스를 보며 자세를 낮췄다. 일단 움직임만 봉쇄하면 끝난다. 상대가 아무리 대단한 성능을 가졌다 해도 말이다.

테오스를 조종하는 제론은 그것을 보고는 씨익 웃었다. 테오스를 다른 기간트와 똑같이 생각하고 있는 걸 보니 웃음이 나왔다.

쿵쿵쿵쿵!

테오스가 더욱 빨리 달렸다. 양측의 거리가 급격히 가까워졌다. 이윽고 양측의 거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서로 부딪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 순간 굉음이 울렸다.

꽈앙!

테오스가 땅을 박차는 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테오스의 속도가 몇 배나 빨라졌다.

서로 부딪치기 직전에 속도가 빨라지는 바람에 열두 기의 기간트는 아무도 거기에 반응하지 못했다.

테오스가 기간트의 진형 사이로 파고들었다.

콰직! 콰직! 콰직! 콰직! 콰직!

뭔가가 가볍게 부서지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테오스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검을 찔러 대는 소리였다. 검을 한 번 찌를 때마다 기간트 한 기의 마나 코어가 부서졌다.

테오스의 검을 은은한 마나가 감싸고 있었다. 말도 못하게 날카로워진 검이 기간트의 몸체를 쑥쑥 파고들었다.

마치 손가락으로 두부를 푹푹 찌르는 듯했다.

사실 조종석을 찔렀으면 훨씬 더 나았을 것이다. 라이더를 죽임과 동시에 기간트를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노획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제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상대가 벨루스 백작가라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아무리 자신의 일을 방해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세나의 가문이었다.

그래서 일단 라이더를 죽이지 않았다. 하지만 기간트까지 그냥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마나 코어가 부서진 기간트는 폐기 처분된다.

지금 테오스의 검에 마나 코어를 잃은 기간트는 다시 쓸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은 이 정도로 끝내고자 마음먹었다. 벨루스 백작가에 한해서 말이다. 나머지는 그냥 둘 생각이 없었다.

제론은 속으로 그렇게 상황을 정리하면서 검을 거뒀다. 워낙 빨랐기에 테오스의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테오스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무려 열두 기의 기간트를 해치워 버렸다. 마나 코어만 박살 내서 말이다.

'변종 오우거를 상대하는 거에 비하면 애들 장난이로군.'

이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변종 오우거 열두 마리를 상대하는 게 훨씬 어려웠다. 변종 오우거는 이들보다 더욱 빠르고 강했다. 게다가 전투에 관한 한 너무나 영악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움직임의 자연스러움이었다. 이들의 움직임은 제론의 눈으로 보면 마치 움직임 자체가 딱딱 끊어지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웠다.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면 누구라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변종 오우거의 움직임은 이들과 완전히 달랐다.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변칙적인 움직임이 많았다. 더구나 점프까지 가능했다. 열두 마리를 동시에 상대하려면 얼마나 정신력 소모가 심한지,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였다.

제론은 가만히 서서 주위를 슥 둘러봤다. 총 스무 기의 기간트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다들 엎어진 채였다. 당연히 제론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제론은 무시무시한 속도로 검을 찔러 적을 무력화시킴과 동시에 균형을 흔들어 앞으로 넘어지게 만들었다.

'이제 확신이 드는군.'

철사자 기사단은 상당히 뛰어난 기사단이었다. 특히 라이더로서의 실력은 왕국에서 손가락에 꼽힐 정도였다.

그런 철사자 기사단의 기간트 스무 기를 혼자 제압했다. 그러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테오스의 성능은 최고였다.

딱 한 가지 문제가 바로 기동 시간이었다. 제론의 마나를 기본으로 움직이기에 기동 시간의 한계가 너무나 뚜렷했다.

지금의 제론은 테오스를 풀로 움직이면 1시간 30분이 한계였다. 그 정도 움직이면 온몸의 마나가 고갈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고갈될 정도로 움직여선 안 된다. 자칫 마나 역류로 몸이 상할 수도 있었다.

마나 역류가 일어나면 영영 마나를 못 쓰는 몸이 될 수도 있었다. 물론 초고대 문명의 기술은 그런 경우에도 몸을 되살릴 수 있는 방도를 마련해 놨지만, 그때까지 쌓은 마나는 모두 사라진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훈련을 하고 마나를 쌓으려 애쓰는 것이었다.

제론은 어렴풋하게 진정한 마스터가 되면 기동 시간의 한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남은 기동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아직도 충분했다. 싸운 시간 자체가 얼마 안 되니 당연한 일이었다. 기동 시간만 충분하다면 홀로 전장에 서서 적 기간트를 유린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제론은 테오스를 움직여 바닥에 쓰러진 기간트를 한데 모았다. 나중에 작업하기 편하게 만들어 둔 것이다.

거기까지 마무리한 뒤, 몸을 돌린 테오스가 천천히 멀어져 갔다. 테오스가 향하는 방향은 젤레 영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공사 현장에서 멀어지는 제론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테오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소문이 주위에 퍼져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수많은 시선이 젤레 영지로 향할 것이다.

'이제부터는 진짜 정보가 중요해진다. 어떻게든 새로운 마티를 찾아야 돼.'

제론은 굳은 표정으로 결심을 굳혔다.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았다. 또한 너무 늦으면 소용이 없었다. 젤레 영지가 가루가 되어 사라진 뒤에 발견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마음이 급해진 제론은 걸음을 빨리했다. 그렇게 사람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멀어진 뒤에야 테오스를 아공간으로 돌려보냈다.

제론은 그렇게 한 뒤 곧장 유적으로 향했다. 이러고 있을 시간도 아까웠다. 한시라도 빨리 정보 수집 아티팩트, 마티를 찾아내야만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