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2/217)

Chapter 8 로트 산맥 토벌

드디어 젤레 영지에 용병 모집 공고가 붙었다. 성문 옆에 붙은 공고를 읽고자 수많은 용병이 모여 몸싸움까지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공고를 모두 읽은 용병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예상과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보수가 좀 짠데?"

"그러게. 이 정도 돈을 받고 목숨을 걸기에는 좀……."

"이번에 새로 부임한 영주가 돈이 많다는 소문에 기대했는데, 이건 뭐, 너무한데?"

"돈 많은 놈이 더 아끼는 법이지. 특히 우리 같은 용병 나부랭이의 목숨을 누가 생각해 주겠어?"

"그래서 어쩔 건데?"

"포기해야지. 이 돈으로는 죽었다 깨나도 못해."

"로트 산맥 몬스터는 질기기로 소문난 놈들이야. 나도 이 정도 돈으로는 안 돼."

공고를 읽은 대부분의 용병은 비슷한 말을 했다. 이 정도 보수를 받고 일하느니 차라리 옆 영지로 가서 운송 일이나 거드는 게 훨씬 나았다.

"그러고 보니 이 영지 옆에 있는 황무지에 새로 성채를 짓는다고 하던데, 거긴 사람이 필요 없으려나?"

"왜? 막노동이라도 하게?"

"아니, 자재를 지킬 사람도 필요할 거 아냐? 혹시 알아? 용병으로 그 자리를 채울지?"

"너 같으면 용병한테 그런 걸 맡기겠냐?"

"안 맡기지."

"크하하하핫!"

그렇게 한동안 떠들던 용병들이 하나둘 흩어졌다. 일부는 옆 영지로 넘어갔고, 또 일부는 다른 일을 찾아보겠다고 수도 쪽으로 올라가 버렸다.

그렇게 젤레 영지에 모였던 용병이 조금씩 흩어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떠나지 않은 용병이 제법 많았다.

그리고 제론은 그들을 주시했다.

"정보가 너무 모자라."

제론은 최근 정보의 부족을 실감했다. 군에 있을 때는 체른산 유적에 있는 정보 수집 능력을 잘 이용했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걸 이용할 수 없기 때문에 정보 수집에 문제가 컸다.

"마티가 필요해."

정보 수집 아티팩트인 마티가 절실히 필요했다.

체른산 유적에 있는 마티는 지금도 꾸준히 정보를 보내고 있었다. 어디든 제론이 원하는 곳에서 체른산 근방의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그 한계가 너무나 뚜렷했다. 사방 100킬로미터 안의 일은 마음만 먹으면 뭐든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마티는 100킬로미터 밖을 넘어갈 수 없었다.

통제실에서 마티를 제어할 수 있는 거리적 한계가 딱 100킬로미터였다.

제론은 문득 왜 중앙 유적에는 마티 같은 아티팩트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체른산 유적에 갔을 때를 생각하면 중앙 유적의 주인인 자신을 즉시 마스터로 받아들였다. 즉, 중앙 유적이 모든 유적의 중심이 된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중앙 유적에도 마티와 같은 아티팩트가 있을 확률이 높았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대단한 아티팩트가 있을 수도 있었다.

제론이 용병의 보수를 낮게 책정한 것은 그럼에도 남는 용병을 감시하고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분명히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 벌인 일이었는데, 막상 일을 벌이고 나니 그들을 감시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하긴, 마티가 있었다면 굳이 이런 방법을 쓸 필요도 없었겠지."

마티를 이용하면 영지 내부의 정보는 물론이고 인근 영지의 정보까지 싹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이 벌이는 음모 따위, 샅샅이 파헤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마티가 없었다. 제론은 정보가 막힌다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 일인지 절감하는 중이었다.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신했다. 용병에게 누군가 수작을 걸었다. 그 박한 보수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수의 용병이 이번 로트 산맥 토벌에 참가 신청을 했다.

제론은 이번 로트 산맥 토벌과 동시에 일이 벌어질 거라고 예상했다. 그게 무엇이든 젤레 영지에는 치명적인 일이 될 것이다.

영지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막아야만 했다. 그러려면 적이 무슨 일을 꾸몄는지 알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이래저래 또 정보로 귀결되는군."

결국은 정보였다. 뭔지 알아야 대처를 할 것 아닌가. 제론은 일단 최대한 머리를 굴려 보았다. 예상한 것 중 하나는 부랑아를 이용한 폭동이었다.

로트 산맥 토벌과 맞물리면 그 일은 상당한 파괴력을 낳는다.

산맥의 몬스터를 토벌하기 위해서는 병사를 잔뜩 내보내야만 했다. 현재 젤레 영지에는 기사가 없다. 기사도 없는 마당에 병사를 아끼면 몬스터 토벌은 불가능했다.

기사를 모으는 게 시급했다. 또한 라이더도 양성해야만 했다. 기간트는 있지만 라이더가 없는 상황이었다. 충성을 바칠 라이더를 먼저 양성하지 않으면 곤란했다.

"급한 대로 한 명만 있어도 좋을 텐데……."

제론이 나직이 투덜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 집무실 문을 노크했다.

똑똑!

제론이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문을 열었다. 보통 영주는 시종을 두는 법이지만, 제론은 시종을 두지 않고 대부분 직접 일을 처리했다.

문을 여니 집사가 서 있었다.

"영주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예. 일단 응접실에 모셔 뒀습니다."

집사의 차분한 말에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접실로 가도록 하지."

딱히 할 일도 없이 머리만 복잡했는데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한 제론은 즉시 응접실로 향했다.

만일 주변 영지에서 찾아온 사람이라면 그들의 속이라도 떠볼 수 있을 것이다. 제론은 내심 기대하며 걸음을 빨리했다.

응접실에 들어간 제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이트!"

"하하! 제론! 내가 너무 늦은 건 아니지?"

카이트는 그렇게 말하며 다가가 제론을 힘껏 끌어안았다.

잠깐 해후의 기쁨을 나눈 두 사람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제론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여긴 웬일이야? 이렇게 갑자기."

"자리 하나 있으면 얻으려고 왔지."

제론이 어이없는 눈으로 카이트를 쳐다봤다. 카이트는 진급에 진급을 거듭해서 이대로 조금만 더 버티면 사령관 자리에 앉을 가능성도 있었다.

한데 그 모든 걸 내던지고 이런 궁벽한 시골 영지로 오다니 제정신이라면 뭔가 사고가 있었음이 분명했다.

"솔직히 말해. 무슨 일이야?"

카이트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어. 그저 너와 함께하고 싶었을 뿐이야."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고?"

"안 믿으면?"

"앞으로 1, 2년 더 버티면 부사령관은 문제없어! 그리고 거기서 5년 정도만 자리를 지키면 사령관도 할 수 있다고! 한데 그 모든 걸 버리고 나왔다고?"

"어차피 내 힘으로 얻은 자리도 아니잖아?"

카이트의 말에 제론이 입을 꾹 다물고 카이트를 노려봤다. 카이트는 그런 제론의 눈빛을 담담히 받아넘기며 말을 이었다.

"네 공에 힘입어 올라간 자리야. 거기 안주할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네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어."

"물론 노력이 중요하지. 하지만 나만 노력했나? 다른 라이더는 노력 안 한 것 같아?"

"그래서 그게 불만이라는 거야?"

카이트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오히려 고마운 일이지. 덕분에 돈도 제법 벌었거든. 이번 전쟁 포상금으로 얼마나 받았는지 모르지?"

카이트는 얼굴에 어린 웃음기를 지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제 슬슬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을 뿐이야."

"때? 무슨 때?"

"은혜를 갚을 때."

"은혜?"

"내 목숨을 구해 줬잖아. 그거 갚아야지. 안 갚으면 아마 평생 잠자리가 불편할 것 같아서 못 견디겠더라고."

제론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카이트를 쳐다봤다. 전장에서의 목숨은 서로 주고받는 것이다. 그렇게 따지면 제론도 카이트로부터 목숨을 받은 적이 있었다.

"어쨌든 자리 있지? 설마 없는 건 아니겠지? 말석 기사라도 좋으니까 자리 하나 줘."

제론이 피식 웃었다.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있는가. 마침 라이더가 필요했다. 마침 기사가 필요했다. 한데 마치 연극 대본이라도 쓰는 것처럼 딱 맞아떨어지는 사람이 등장했다.

"자리야 많지."

카이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정중히 군례를 취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영주님."

너무나 정중한 말과 태도에 제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카이트는 카이트였다.

그런 제론을 보며 카이트가 씨익 웃고는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설마 정말로 말석 기사 자리는 아니겠죠? 하하하하."

결국 제론도 피식 웃고 말았다.

제론은 일단 카이트를 창고로 데려갔다. 당연히 세나가 기간트를 수리하는 창고였다.

창고에 들어선 카이트는 상상 이상의 광경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이게 대체 몇 기야?"

일단 보이는 건 열다섯 기의 실바가 전부였지만, 그 옆에 놓인 기사의 장비를 카이트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가 쓰던 종류의 장비도 있으니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당연했다.

"저건 크라테르로 보이는데, 아닙니까?"

카이트는 제론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일단 제론의 기사가 되기로 한 이후, 카이트는 항상 제론을 조심스럽게 대했다. 언제나 정중히 말했고, 자신이 아랫사람이라는 걸 항시 강조하는 태도를 보여 주었다.

제론은 그것이 카이트답다고 여기면서 한편으로는 예전의 그 살가운 관계가 되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아쉽기도 했다.

하지만 말투가 달라졌을 뿐, 사람이 달라진 건 아니었다. 카이트는 여전히 제론의 가장 중요한 전우 중 한 사람이었다.

"어? 카이트 님?"

카이트는 옆에서 들려온 소리에 그제야 고개를 돌려 세나를 확인했다.

"누가 이렇게 정비를 확실하게 해 놨나 궁금했는데, 역시 그랬군."

카이트가 이제야 수긍한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나는 군부에서도 상당히 주목받는 엔지니어였다. 그녀가 일단 한 번 손대면 헌 기간트도 새 걸로 변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여긴 웬일이세요?"

"여기서 기간트 좀 타려고."

"예? 정말요?"

"왜? 안 돼?"

"그럴 리가요! 카이트 님이라면 아마 우리 영지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그나저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사령관, 되고 싶어 하셨잖아요."

카이트가 씨익 웃었다.

"그보다 좀 더 괜찮은 꿈을 발견했거든."

말을 잇지 못하는 세나를 향해 한 번 더 웃어 준 카이트가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내가 쓸 만한 기간트도 있나?"

"물론이죠!"

세나는 막 수리가 끝난 기간트 장비를 내밀었다. 그러다가 아차 하고는 제론을 바라봤다.

여기 있는 모든 건 엄연히 제론의 것이었다. 자기 마음대로 카이트에게 기간트를 내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세나가 움찔해서 눈치를 살피자, 제론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솔직히 그 정도는 알아서 해도 된다고 생각했다. 세나에게는 충분히 자격이 있었다.

"받으세요!"

세나가 힘차게 말했다. 카이트는 그 장비를 받으며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세나의 정성이 장비 곳곳에서 느껴졌다. 아마 이 안에 잠들어 있는 기간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거 정말 내가 받아도 되나?"

크라테르가 들어 있는 아공간이었다. 장비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크라테르는 상당히 비싼 기간트였다.

"물론이죠! 카이트 님이 아니라면 누가 이 기간트를 몰겠어요?"

"그 말이 맞아. 일단 그걸 쓰도록 해. 나중에 내가 훨씬 좋은 기간트를 구해 줄 테니까."

크라테르보다 훨씬 좋은 기간트라는 말을 들으려면 최소한 발굴형 기간트는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발굴형 기간트는 크라테르 같은 양산형 기간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쌌다.

"하하.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어쨌든 이렇게 기간트도 생겼으니 기동 훈련이라도 좀 하고 싶은데, 마땅한 장소가 있습니까?"

카이트의 말에 제론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기동 훈련 겸해서 몬스터 좀 잡아 보지 않겠어?"

"몬스터 말입니까?"

카이트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몬스터를 잡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갑자기 제론이 이렇게 부탁을 하는 건 분명히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일단 나가서 얘기하자고. 기간트도 받았으니까."

제론은 카이트를 데리고 창고에서 나갔다. 물론 나가기 전에 세나에게 기운을 북돋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세나는 한동안 광분해서 일을 해 줄 것이다.

제론은 창고를 나서며 좀 더 체계적으로 기간트를 관리할 필요성을 느꼈다.

지금이야 세나가 알아서 다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뭘 하든 사람이 필요하군.'

인재가 너무나 모자랐다. 하지만 구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어떻게든 구할 수 있었다. 문제는 믿을 만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앞으로 젤레 영지는 엄청난 발전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발전의 기반에는 초고대 문명의 기술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걸 외부로 반출시키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어야 다른 사람과 함께 일을 진행할 수 있다.

제론은 창고에서 나와 집무실로 향했다. 일단 가장 믿을 만한 장소가 거기였다. 몇 가지 마법을 이용해 소리를 차단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우리 영지가 처한 상황을 말해 주지."

제론은 차분히 젤레 영지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설명을 듣는 내내 카이트의 눈이 반짝였다.

모든 설명을 들은 카이트가 자신의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맡겨만 주십시오. 용병 쪽에서는 그 어떤 일도 벌어지지 않게 하겠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야. 일단 당분간 넌 용병 행세를 했으면 좋겠어."

카이트의 눈이 커다래졌다. 하지만 이내 그 의미를 파악하고는 씨익 웃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이 장비가 너무 튀지 않을까요? 누가 봐도 기간트라는 걸 알 수 있을 텐데."

"조금 바꿔야지. 아마 웬만한 눈썰미로는 알아보기 어렵게 될 거야."

제론의 말에 카이트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전쟁이 끝나며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또한 제론을 찾아오면 이 감정을 다시 끌어낼 수 있을 것 같았기에 여기까지 온 것이기도 했다.

바로 살아 있다는 느낌이었다.

카이트는 기대감 어린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그의 분위기에서 벌써 피 냄새가 풍기는 듯했다.

☆ ☆ ☆

로트 산맥 토벌의 날이 밝았다. 수많은 용병이 영주성 앞에 모였다. 이번 토벌에 참가 신청을 한 용병의 수는 모두 200명이나 되었다.

"뭐야? 아직 아무도 없는 거야? 모이라고 해 놓고 이거 뭐 하자는 거야?"

용병 중 하나가 불만을 토해 냈다. 영주성 앞에는 용병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용병 사이를 웅성임이 훑고 지나갔다. 그러자 성문이 천천히 열렸다.

열린 성문으로 열 명의 병사가 나왔다. 그게 끝이었다.

용병들은 어이없는 눈으로 열 명의 병사를 바라봤다. 이게 뭐 하자는 건가. 그들이 알기로 젤레 영지의 병사는 500명이나 된다. 한데 그 모든 병사를 두고 고작 열 명이라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책임자는 어디 있는 거요!"

용병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그러자 병사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선임 병사였다.

"내가 책임자요."

용병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이런 애송이 병사를 책임자로 두고 몬스터 토벌을 보내려 하다니, 장난도 아니고 이게 뭐란 말인가.

"기사님이 나서야 하는 것 아니오?"

최소한 기사는 되어야 책임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선임 병사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나도 충분히 할 수 있소. 그리고 우리 영지에는 기사가 없소."

"뭐? 기사가 없다고? 기사 없는 영지가 어디 있소!"

선임 병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이런 상황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영지의 상황이 이런 것을.

"아무튼 지금 출발하겠소."

선임 병사의 말에 용병들이 인상을 썼다.

"설마 젤레 영지에서는 병사를 전혀 지원하지 않는단 말이오?"

"그렇소."

용병 사이에서 웅성임이 커졌다. 설마 이런 식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들은 여기서 의뢰를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반드시 토벌에 나가야 할 이유가 있었다.

'이런 상황은 전해 듣지 못했는데…….'

용병들의 뇌리에 공통적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원래의 계획은 이게 아니었다.

젤레 영지의 병사를 이리저리 휘둘러서 시간을 끄는 것이 목적이었다. 최대한 오랫동안 토벌을 하며 병사의 진을 쏙 빼놓는 것이 원래의 계획이었다.

한데 그렇게 할 병사가 없으니 어쩌란 말인가.

용병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열 명의 병사가 절도 있는 걸음으로 나아갔다.

결국 용병들도 병사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들은 원치 않는 로트 산맥 토벌을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 틈에서 카이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적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게 두는 것이 전투에서 승리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었다.

'역시 제론이야.'

카이트는 발걸음도 가볍게 용병의 걸음에 흐름을 맡겼다. 그리고 몸에 걸친 장비를 다시 한 번 점검했다.

참으로 놀라웠다. 기간트 장비를 이렇게 고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본래 흉갑과 방패, 양손검으로 이루어진 세트가 기간트 장비였다. 각각에 빼곡하게 새겨진 마법진이 바로 기간트를 보관하는 아공간 마법이었다.

한데 지금 카이트가 착용한 장비에는 전혀 마법진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또한 모양도 많이 달라졌다.

흉갑은 가죽을 덧대 마치 가죽 갑옷을 입은 것 같았고, 방패도 크기가 작고 날렵해져서 용병이 흔히 몬스터 토벌을 할 때 쓰는 것과 거의 비슷했다.

또한 거대한 양손검은 어떻게 했는지 그 크기가 대폭 줄어들어 롱소드가 되어 있었다.

카이트는 마법진을 축약했다는 제론의 말을 아직도 믿지 않았다. 그게 말이나 되는가. 그게 그렇게 쉽게 가능하면 다른 기간트 장비는 왜 다들 그렇게 만들겠는가.

아무튼 카이트는 살짝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 급히 장비를 받아 챙기느라 아직 테스트를 하지 않은 것이다. 만일 급박한 상황에 기간트 소환이 되지 않으면 그냥 죽은 목숨이었다.

'그래도 좋군.'

너무나 좋았다. 이 피부를 얇게 저미는 것 같은 날카로운 긴장감이 말이다. 카이트는 차갑게 웃으며 용병들과 함께 병사의 뒤를 따라 서둘러 걸어갔다.

젤레 영지의 상황을 거의 매시간 보고받던 뤼그너 남작의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뭐라고? 토벌에 병사 열 명?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뤼그너 남작은 역정을 냈다. 하지만 보고하는 병사는 죄가 없다. 그저 들은 말을 그대로 전했을 뿐이었다.

병사가 덜덜 떨며 고개를 깊이 조아리자, 뤼그너 남작이 손을 내저었다.

"물러가라. 앞으로 보고 시간은 30분 단위로 자르라고 해!"

"예, 알겠습니다."

병사가 물러가자, 뤼그너 남작은 난감한 표정으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옆을 돌아봤다. 그곳에는 심각하게 앉아 있는 마틴 준남작의 모습이 보였다.

"좋지 않군요. 계획이 시작부터 어그러지다니."

"이제 어쩌면 좋겠습니까? 병사가 그대로 남아 있으니 폭동을 일으켜도 원하는 성과를 얻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마틴 준남작은 인상을 쓰며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뭔가 싸한 느낌이 심장을 스쳐 지나갔다.

"일단 용병 쪽에 새로운 지령을 내려야겠습니다."

"어떻게 내릴까요?"

"산맥에 도착하면 일제히 계약을 해지해 버리라고 하십시오."

뤼그너 남작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예? 그렇게 하면 위약금을 내야 합니다!"

"어차피 보수가 작지 않습니까. 위약금이라고 해 봐야 얼마 안 할 겁니다. 그 정도 돈이야 제가 지불하지요."

"가, 감사합니다!"

자그마치 200명이나 되는 용병의 위약금이다. 통상적으로 위약금은 보수의 세 배를 지불하게 되어 있으니, 그 액수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영세한 영주인 뤼그너 남작 입장에서는 그 정도 돈도 엄청난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데 그걸 마틴 준남작이 내주겠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지만 용병에게 지불하기로 했던 보수는 꼭 챙겨주셔야 합니다."

"물론입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 돈만 해도 뤼그너 남작 입장에서는 엄청났다. 하지만 투자가 없으면 얻는 것도 없는 법이다. 그 돈을 투자해서 만일 젤레 영지를 한 번 쓸어 올 수 있다면, 수백 배 남는 장사가 될 것이다.

"한데 젤레 영지의 영주가 그렇게 돈이 많습니까?"

마틴 준남작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일단 전쟁에서 세운 공의 포상으로 받은 돈이 200만 골드를 넘었습니다. 또한 군부에 있을 당시 슬라인 백작과의 내기로 200만 골드를 얻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뤼그너 남작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것만 해도 무려 400만 골드 아닌가. 그 돈을 싹싹 긁어 올 생각을 하니 갑자기 배가 불러왔다.

"아무튼 용병 쪽은 그렇게 정리를 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아마 젤레 영지에 난리가 날 겁니다. 하하하하."

"정말 기대됩니다. 하하하하!"

두 사람은 크게 웃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상황 역시 그들의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계약을 해지하겠다는 말입니까? 이렇게 일방적으로 지금에 와서?"

선임 병사의 얼굴에 분노가 어렸다. 이대로라면 젤레 영지는 몬스터 토벌을 더 이상 진행할 수가 없다. 그렇게 되면 겨울과 봄에 영지민이 극심한 피해를 입을 것이다.

"솔직히 우리 입장도 생각해 주시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지 않소?"

선임 병사는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용병의 입장이 아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계약서를 썼으니 그만두려면 위약금을 내시오."

선임 병사가 한발 물러났다. 사실 그도 어쩔 수 없었다. 위약금만 내면 도의적인 문제만 남을 뿐 용병들에게는 그 어떤 문제도 없었다.

선임 병사의 말에 계약을 해지하고 싶은 모든 용병이 앞다퉈 나섰다. 솔직히 이 상태로 몬스터 토벌을 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그런 지령이 내려온 건 말이다.

용병 틈에 있던 철사자 기사단은 한동안 고민을 했다. 하지만 그들도 용병 계약을 해지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용병으로 위장하느라 기간트 장비를 전혀 챙겨 오지 못했다.

만일의 사태가 벌어지면 따로 장비를 가진 동료가 합류하기로 했는데, 이런 상황이면 굳이 그렇게 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용병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그들은 위약금을 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왔던 길로 돌아갔다.

선임 병사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마지막으로 남은 용병을 향해 말했다.

"당신도 해지하려면 위약금을 내시오. 우리 빨리빨리 끝냅시다."

카이트는 빙긋 웃었다.

"걱정할 것 없다. 난 계약 따위 하지도 않았으니까."

선임 병사가 멍하니 카이트의 얼굴을 바라봤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소개하지. 난 이번에 젤레 영지에 새로 부임한 기사 카이트다. 참고로 난 라이더이기도 하지."

라이더라는 말에 그제야 선임 병사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라, 라이더라면……!"

"기간트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가자. 그깟 몬스터들 나 혼자 싹 쓸어 줄 테니."

"저, 정말입니까? 하지만 기간트가 있어야……."

"넌 딴 걱정 말고 길이나 안내해라.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아, 알겠습니다."

선임 병사는 서둘러 앞장서서 빠르게 걸어갔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얼떨떨했다. 그의 뒤를 정신없이 따라가는 동료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직 카이트만이 여유가 넘쳤다. 물론 이유 있는 여유였다. 카이트는 어서 빨리 새 기간트를 테스트해 보고 싶어 몸이 달아올랐다.

☆ ☆ ☆

"영주님! 큰일 났습니다!"

제론은 집무실에 앉아 느긋한 표정으로 집사를 쳐다봤다. 집사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요, 요, 용병들이!"

"용병들이 뭐?"

"용병들이 계약을 해지했습니다!"

"전부?"

"예! 몽땅 계약을 해지했습니다!"

제론이 피식 웃었다.

"위약금으로 제법 수입이 짭짤하겠군."

"지, 지금 위약금이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뭐가 문제지?"

"로트 산맥 토벌이 문제 아닙니까! 용병이 없으면 토벌이 불가능합니다!"

"토벌이 불가능하다고 누가 그래?"

"예?"

집사의 표정과 몸이 얼어붙었다. 대체 이 애송이 영주가 뭐라고 하는 것인가. 용병도 없이 토벌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고작 200명의 용병만 토벌에 보낼 때부터 알아봤다. 일이 이렇게 틀어질 거라고 말이다.

이제 금년 영지 운영은 완전히 끝장이었다.

몬스터 토벌을 제대로 못하면 산맥 인근 마을의 피해가 극심해질 것이고,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을 것이다.

마을의 피해를 줄이고자 병사를 파견하면 또 병사까지 잃게 된다. 그렇게 중첩되는 피해에 영지 경영이 어려워질 것은 불을 보듯 훤했다.

"몬스터 토벌에 나간 병사도 돌아왔나?"

"그, 그건 아닙니다만…… 용병들이 돌아왔습니다!"

"어차피 할 마음도 없는 놈들이었어. 그런 놈들이 돌아왔다고 달라질 게 있나?"

"……어, 없습니다."

집사의 표정이 침중해졌다. 그리고 왠지 눈앞에 있는 영주가 무서워졌다. 시종일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자신을 상대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사람 같지가 않았다.

'역시, 관리를 그렇게 단호하게 처리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돼.'

관리로부터 압수한 재산을 풀어 영지민을 배불리 먹인 걸 보고 참으로 괜찮은 영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데 지금 보니 그게 아니었다. 이 영주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더 할 말이 있나?"

"없습니다."

제론이 손을 한 번 내저었다. 집사는 공손히 인사하고 밖으로 나갔다.

집무실 문이 조용히 닫혔다.

제론이 씨익 웃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제부터 그들이 어찌 나올지 벌써부터 기대되었다.

"오늘은 유적에 가 봐야겠어."

11층을 클리어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있을 게 분명한 마티의 존재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했다. 제론은 중앙 유적에 정보 수집 아티팩트, 마티가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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