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0화 (31/217)

Chapter 7 주변 영지

제론이 젤레 영지에 부임한 지도 3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젤레 영지는 정말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일단 영지민의 생활이 급격히 나아졌다.

3개월 동안 영지민은 끊임없이 공사 현장에 노동을 제공하러 나갔다.

별다른 일이 없었기에 농사를 짓는 인력과 상업에 종사하는 몇 명을 빼고는 다들 새로운 성채 공사에 동원되었다. 물론 자발적인 참여를 기본으로 했다.

하지만 웬만한 사람은 다 공사에 참여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일만 하면 밥도 주고 돈도 주는데 누가 마다하겠는가.

인근 영지에서도 일꾼이 몰려들었는데, 바이스는 그들도 결코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대우해 주었다.

그렇게 사람이 모이니 공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벌써 기초공사가 끝나고 기둥을 올리는 중이었다. 이 성채는 일단 거대한 마법진이 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도면이랑 한 치의 오차도 있어선 안 된다.

그 때문에 바이스는 매일매일 머리를 쥐어뜯으며 마법진과 도면, 그리고 실제로 벌어지는 공사 현장을 확인하며 무진 애를 썼다.

머리가 터져 나갈 것 같았지만, 이 공사가 끝나고 나면 자신의 마법 실력이 어마어마하게 높아질 거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 뒤로는 정말로 쉴 수가 없었다.

오늘도 유적 여기저기에 구멍을 뚫고 지반을 확인하고 땅을 파헤치고 하다 보니 하루가 다 가 버렸다.

"저걸 꼭 이용해야 하나?"

바이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유적을 바라봤다. 멀리서 보면 마치 높은 언덕 같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커다란 입구가 보이고, 안으로 들어가면 미로 같은 통로가 쭉 이어져 있었다.

사실 바이스는 유적 옆에 성채를 세우고 싶었다. 어차피 성채를 이용해 마법진을 만들 텐데 굳이 유적을 이용하면서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한데 제론이 한사코 이렇게 하자고 우기니 어쩔 수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큰 공사가 될 것이다. 유적 위에 성을 쌓거나 아니면 성채를 어마어마하게 크게 만들어 유적 자체를 완전히 포함해 버려야 한다.

바이스가 선택한 것은 후자였다.

어차피 이 근방의 황무지가 몽땅 옥토로 변한다면 그야말로 왕국 최대의 곡창지대가 될 텐데, 아예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도시까지 설계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바이스가 한창 골머리를 싸매고 도면과 마법진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그 옆으로 제론이 다가왔다.

"고생하는군."

"아, 영주님."

바이스의 입에서는 이제 너무나 자연스럽게 영주님이라는 말이 나왔다. 지난 3개월간 노력한 덕분이었다. 물론 그것은 세나도 마찬가지였다.

"보아하니 기초공사가 끝난 모양이군."

"네. 하지만 저 유적 때문에 문제가 상당합니다."

"유적을 성채에 포함시키려는 모양이지?"

"딱 저 위치에 성을 세우려면 어쩔 수 없습니다."

"문제가 좀 있겠군."

"예. 유적 일부를 무너뜨리고 내부에서부터 돌을 쌓아야 하는데, 아무래도 쉽지 않습니다."

"기간트를 이용해도 쉽지 않을까?"

"기간트를 쓸 수만 있다면야 공사 기간을 대폭 단축시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이스가 의아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과연 기간트를 쓸 수 있느냐는 의문이었다. 기간트가 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걸 탈 사람이 없다.

아직 젤레 영지에는 라이더가 없었다. 이제 차츰 라이더도 영입을 해야만 한다. 기사단 말이다.

"어떻게 할지 계획을 얘기하면 밤에 내가 처리해 놓지."

"예? 영주님이 말입니까?"

아무리 기간트를 동원한다 해도 한 대로는 어림없었다. 이 유적은 그 규모가 상당했다. 최소한 기간트 열 대는 동원해야 원활히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한데 그걸 혼자서 다 해내겠다니, 아무리 제론이라도 그건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바이스는 일단 제론의 말대로 계획을 설명해 주었다. 애초에 처음 성의 설계도를 만든 것이 제론이었기에 바이스가 하는 설명의 요지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바이스는 유적의 중심을 도려내고 외곽을 잘 꾸며 성의 방벽으로 쓸 생각이었다. 겉의 흙을 걷어 내면 모양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가운데를 도려내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이었는데, 제론은 그 얘기를 듣자마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내가 해결해 주지. 그럼 공사 기간을 얼마나 단축시킬 수 있겠나?"

"앞으로 6개월이면 완성시킬 수 있습니다."

"6개월?"

기초공사에만 3개월이 걸렸는데 남은 공사가 6개월이라니 너무 짧게 잡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바이스는 제론의 시선에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6개월이면 충분합니다. 그 이후에도 힘쓸 일이 있으면 영주님께서 도와주실 것 아닙니까?"

제론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앞으로 최대한 도와주지. 그나저나 주변 영지 반응은 제대로 살피고 있나?"

"예.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주변 영지는 계속 젤레 영지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영지전 허가가 나지 않기에 트집을 잡아 공격할 수도 없어서 그저 지켜보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물론 이곳이 왕국 최대의 곡창지대가 된다면 얘기가 많이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지금은 자기의 영지민이 젤레 영지로 넘어가 일을 하고 오는 상황이지만 다들 그냥 내버려 두고 있었다.

젤레 영지에서 벌어오는 돈의 일부를 세금으로 받아먹고 있으니 솔직히 그들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었다. 그래서 거리의 부랑아들을 그쪽으로 은근슬쩍 내몰기까지 했다.

그들 입장에서는 일석이조였다.

"이쪽으로 온 부랑아들이 안 돌아가는 경우도 많은가?"

"대부분 안 돌아가고 있습니다.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 이대로라면 영지에 분명히 문제가 생길 것 같습니다."

바이스는 잠시 숨을 돌리고 말을 이었다.

"그래서 공사장 주변에 천막을 치고 임시 거주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당분간은 문제가 없겠지만 날이 추워지면 문제가 될 것 같습니다."

"하긴 이곳의 겨울은 제법 혹독하지."

이곳은 왕국의 북서쪽에 위치한다. 겨울이 길지는 않았지만 강렬한 추위를 동반했다. 그 추위를 허술한 천막으로 막는 건 불가능했다.

"겨울까지는 얼마나 남았지?"

"이제 두 달이 남았습니다."

사실 벌써부터 기온이 살짝 내려가 쌀쌀해지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버틸 만했지만 조금 더 지나면 견디기 어려워질 것이다.

"일단 알았다. 저들을 다 얼려 죽일 수야 없지. 어쨌든 소중한 우리의 영지민이 될 사람들인데."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강렬한 눈빛으로 바이스를 쳐다봤다.

"일단 나중에 뒷말 나오지 않게 저 부랑아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해 놔야 돼. 인근 영지에서 딴소리가 나오면 곤란하니까."

"물론입니다. 조만간 서면으로 확답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바이스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하지만 사실 그 문제는 애매한 구석이 많았다.

돌아가지 않는 부랑아를 받아들이겠다는 건데, 타 영지에서 그들이 부랑아가 아니라고 우기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그 문제까지 완전히 정해 놔야 하는데,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돈이 생겨 먹고 살 만해진 영지민을 가만히 앉아서 빼앗길 영주가 어디 있겠는가. 다 자신의 재산이나 다름없는데 말이다.

아무튼 제론은 그건 바이스에게 맡기기로 하고 오늘 밤 해야 할 작업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걸 혼자서 한다고 했으니 바이스가 기함하는 것도 이상할 것 없었다. 하지만 자신 있었다. 제론은 살짝 올라가는 입가를 억지로 제자리에 놓으며 버클을 쓰다듬었다.

그날 밤, 제론은 홀로 유적 앞에 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직까지 공사 현장을 지키는 병력을 투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만간 병력을 투입해 지켜야 할지도 모른다. 이곳이야 워낙 황무지 한가운데에 있어서 뭔가를 훔쳐 달아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부랑아를 위한 천막을 멀리 친 게 이럴 때는 도움이 되는군."

천막을 칠 때, 철저히 도시 계획에 맞게 위치를 잡았다. 성채를 위한 터나 수로 시설을 위한 길 위를 피해, 되도록이면 집터에 천막을 세웠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 공사 현장에서는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 천막을 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때문에 사실 부랑아나 그곳을 이용하는 일꾼의 불만이 제법 쌓여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바이스나 제론은 그 방식을 끝까지 고수했다. 사실 지금 천막을 친 곳에는 먼저 집을 지어 줄 것이다.

당연히 지금 천막을 쓰고 있는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그 집을 내줄 계획이었다. 공짜는 아니었다. 하지만 꾸준히 일을 한다면 비록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어렵지 않게 갚을 수 있을 정도의 가격이었다.

제론은 천막이 있는 쪽을 한 번 쳐다봤다. 거리는 상당했다.

성에서 가장 가까운 쪽의 터는 귀족을 위한 저택을 지을 것이고, 그 뒤에 바로 이어서 상점가를 만들 계획이었다. 영지민을 위한 집은 그 뒤부터 있었기에 거리가 꽤 멀었다. 그러니 멀다고 불만이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제론은 일단 버클에 마나를 불어 넣으며 테오스를 불렀다.

"테오스."

테오스가 소환되었다. 어느새 제론은 테오스에 탑승한 채였고, 훨씬 높아진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테오스가 아무리 크다고 해도 유적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겉으로 드러난 유적의 높이는 테오스의 다섯 배가 넘었다. 물론 가장 높은 곳이 그러했다.

이런 곳을 파내고 성을 세우고자 했으니 바이스가 난감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제론은 테오스를 몰고 유적 가장 꼭대기로 올라갔다.

그곳에 서서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검을 뽑았다. 아공간에서 거대한 검이 쑥 나타났다.

지잉!

검에 마나가 흘렀다. 날카롭기 그지없는 마나의 날이 검신을 타고 흘렀다.

제론은 망설임 없이 검을 바닥에 쭉 그었다.

서걱! 서걱!

바닥이 썩둑썩둑 잘려져 나갔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제론이 검을 몇 번 움직이기 무섭게 벌써 유적의 상층부는 사라지고 없었다.

제론은 그렇게 잘라 낸 잔해를 커다란 아공간을 열어 그 안에 담았다. 이건 나중에 또 유용하게 쓸 일이 있을 것이다.

제론에게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아공간이 있었는데, 모두 허리띠에 줄줄이 달린 아공간이었다.

하나하나의 아공간이 거대한 기간트를 넣고도 한참이나 남을 정도로 넓었는데, 그런 아공간이 허리띠에 촘촘하게 새겨져 있었다.

제론은 그 모든 아공간에 유적의 잔해를 꽉꽉 눌러 채웠다. 거의 언덕 하나를 통째로 아공간에 담은 셈이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제론은 유적 내부를 파냈다. 유적 내부의 기초공사도 필요했다. 아니, 가장 중요했다. 이곳이 바로 성의 지하가 될 것이고, 영주의 개인 연공실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연공실을 만드는 것이 바로 목표였다. 제론이 굳이 유적 옆에 성을 만들지 않고 유적 자체를 성으로 만들려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제 이 성이 완성되면 언제든 원하는 때에 중앙 유적 로비로 갈 수 있게 된다.

그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제론은 더욱 열심히 검을 휘둘렀다.

서걱! 서걱!

바닥이 잘려 나갔고, 땅이 깊이 파였다.

다음 날, 바이스는 쩍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체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어때? 이 정도면 됐나? 더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어느새 다가온 제론의 말도 제대로 듣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빠져 버렸다. 어떻게 하룻밤 만에 이런 거대한 공사를 끝낼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기간트를 움직인 것도 아니고…….'

만일 기간트를 움직였다면 들키지 않았을 리 없었다. 기간트는 그 크기만큼이나 소음이 엄청나다. 고작 발소리만으로도 한밤중의 적막을 깨는 데에는 충분했다.

"영주님, 이건 대체 무슨 마법입니까?"

제론이 씨익 웃었다. 더 이상의 대답은 필요치 않았다.

놀람을 뒤로한 채 다시 일을 독려하기 시작한 바이스를 두고 제론은 영지로 돌아갔다. 이렇게 시간이 났을 때 반드시 만나 줘야 할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영지에는 활기가 넘쳤다. 돈이 풀리니 그 돈을 빨아먹기 위해 제법 많은 상단이 영지에 들어왔다.

상단이 많아지면 상거래가 활발해지고, 사람이 늘어난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활기가 생겨났다. 사람들의 얼굴에 생기가 어렸고, 또 조금씩 영지민의 생활이 윤택해졌다.

제론은 그 한가운데를 걸으며 씁쓸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전쟁 한 방이면 이 모든 활기가 싹 사라져 버릴 것이다.

일단 전쟁을 피할 수는 없다. 슈린 공작이 자신을 그냥 내버려 둘 리 없었다. 또한 벨루스 백작도 뭔가 수를 쓸 것이다. 그것이 전쟁으로 흐를 확률은 상당히 높았다.

어쩌면 이들은 이 터전을 모두 잃을지도 모른다. 제론은 그 생각을 하며 그들을 지나쳐 성으로 향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성의 창고로 향했다.

창고 안에는 열다섯 기의 실바가 위풍당당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그 실바 옆으로 기사가 차는 장비 일체가 또 나란히 놓여 있었다.

제론이 창고에 들어서자, 세나가 깜짝 놀라며 달려왔다.

"영주님! 설마 또 일거리를 가져오신 거 아니죠? 이제 기간트는 끝났죠? 제발 그렇다고 말씀해 주세요!"

세나는 그야말로 기간트 다루는 솜씨가 일취월장했다. 연달아 몇 기의 기간트를 손봤는지 모른다.

실바 열다섯 기를 고치기 무섭게 카타락타 다섯 기를 넘겨주었고, 또 그것을 다 고치기 무섭게 몰레스 일곱 기를 놓고 나왔다.

세나는 지금도 몰레스를 다 마무리 짓지 못하고 이렇게 애쓰고 있었다.

"영주님, 한데 이 몰레스는 어떻게 하실 거죠? 아무래도 그냥 쓰기에는 좀 꺼림칙한데……."

몰레스는 벨룸 왕국의 기간트이다. 비록 지금이야 전쟁이 끝났다지만 그걸 공공연하게 쓰는 건 상당히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이걸 가져왔어."

제론은 창고 한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세나는 설마설마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불안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지난번 몰레스를 내놓을 때도 딱 이 패턴이었다. 제론이 창고 한구석으로 가서 뭔가를 확 당기니 천 하나가 사라지면서 그곳에 부서진 기간트가 나타났다.

대체 언제 그곳에 그런 천이 있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 이후 창고 구석구석을 뒤졌다. 또 천에 감춰진 기간트가 있는지 몰라서 말이다.

하지만 찾아봐도 덮인 천조차 찾을 수 없었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제론은 세나의 불안감을 채워 주려는 듯 창고 구석으로 가서 뭔가를 확 당겼다.

펄럭!

천 하나가 걷히며 그 안에서 부서진 크라테르 다섯 기가 나타났다.

세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간신히 끝이 보이고 있었는데……."

세나는 절망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하겠다고 했으니 끝까지 해내야만 했다.

그리고 이 와중에 엔지니어로서 자신의 실력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벗어날 마음을 먹지도 못했다. 그것은 엄청난 중독성을 가져왔다.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성장하다 보면 그 성장 자체에 중독된다. 지금 세나와 바이스가 딱 그 상태였다.

이러다가 어느 순간 벽을 만날 것이다. 그때부터는 극심한 슬럼프에 빠질 것이다. 그 슬럼프를 극복할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쉬운 것이 근성이었다.

이렇게 성장에 중독되어서 애쓰다 보면 결국 근성까지 생긴다. 제론이 세나에게 원하는 건 이보다 훨씬 높은 경지였다. 세나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부탁해."

제론이 세나를 슬쩍 끌어안아 주었다. 순간 세나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지금까지 제론이 자신에게 이런 행동을 한 적이 없어서 더더욱 그랬다.

제론은 세나를 한 번 그렇게 꼭 안아 주고는 떨어졌다.

세나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만 주세요! 제가 싹 고쳐 놓을 테니까! 얼마든지 더 가져오세요!"

의욕에 넘치는 세나를 보며 제론이 빙긋 웃어 주었다, 그리고 손을 한 번 흔들어 주고는 창고에서 나갔다.

☆ ☆ ☆

"돈이 썩어 나는군."

뤼그너 남작은 나직이 투덜거렸다. 바로 옆에 있는 젤레 영지에서 얼마나 많은 돈을 퍼붓고 있는지 알기에 배가 아플 지경이었다.

"어차피 다 남작님의 돈이 되지 않겠습니까?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마틴 준남작의 말에 뤼그너 남작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그 썩어 날 정도로 많은 돈이 몽땅 자신의 것이 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배가 불러왔다.

그 돈이면 더 이상 이런 궁벽한 곳에서 살 이유가 없었다. 당장 수도로 달려갈 것이다. 그곳에 그럴듯한 저택을 구입해서 떵떵거리고 살 생각이었다.

"계획은 얼마나 진행되었습니까?"

"일단 부랑아로 위장한 병사를 70명쯤 보냈습니다. 조만간 100명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훌륭하군요. 확실히 경험이 없는 영주라서 그런지 너무 어수룩합니다. 한 명도 잡아내지 못한 걸 보면 말입니다. 하하하하."

마틴 준남작이 호쾌하게 웃었다. 계획이 제대로 굴러가고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이젠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사실 마틴 준남작이 손을 뻗은 건 뤼그너 남작뿐만이 아니었다. 근방의 모든 영지에 손을 뻗었다.

제론이 가진 막대한 돈은 그들의 욕망을 건드릴 미끼로는 차고 넘쳤다.

슈린 공작가에서 파악한 제론의 재산만 해도 수백만 골드에 달하니 그걸 욕심내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이런 변방의 작은 영지에서 말이다.

뤼그너 남작이 다스리는 이 영지의 1년 세수가 고작 20만 골드에 불과하다. 그러니 제론의 재산이 얼마나 대단한가. 뤼그너 남작이 탐을 낼만 했다.

젤레 영지와 맞닿은 영지는 모두 세 곳이었다. 마틴 준남작은 그 세 군데 모두와 접촉해 그들 모두를 움직였다. 물론 그중 가장 주가 되는 곳이 바로 이곳 뤼그너 남작령이었다.

"이제 슬슬 철사자 기사단의 힘을 보여 주셔야 할 때가 아닙니까?"

뤼그너 남작의 말에 마틴 준남작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아닙니다. 철사자 기사단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합니다."

"만일의 사태라 하심은……."

"혹시라도 젤레 영지에서 폭동 진압에 기간트를 이용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예? 기간트요? 설마 젤레 영지에 기간트가 있겠습니까?"

기간트라는 말에 뤼그너 남작은 화들짝 놀랐다. 기간트라니 그게 갑자기 왜 튀어나온단 말인가. 이런 변방 영지에서 말이다.

1년 세수가 고작 20만 골드에 불과하다. 그중 절반 정도를 왕국에 세금으로 납부하고 나면 나머지는 고작 10만 골드, 그걸로 1년을 꾸려 가려면 그나마도 빠듯했다.

그러니 기간트를 보유한다는 건 사실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뤼그너 남작령에도 기간트가 있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실전에서 과연 써먹을 수 있을지 확신도 서지 않는 낡은 실바 세 기에 불과했다.

"뭘 그리 걱정하십니까? 제가 데려온 철사자 기사단이 어떤 존재인지 잊으신 건 아니시겠죠?"

"아아, 철사자 기사단이 있었군. 기억하다마다요. 정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뤼그너 남작이 연신 고개를 숙였다. 마친 준남작은 그런 뤼그너 남작의 인사를 당연하다는 듯 받았다.

철사자 기사단은 스무 명 전원이 기간트 라이더였다. 비록 카타락타이긴 했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웬만한 영지의 전력으로는 결코 막아 낼 수 없었다.

"한데 과연 그들이 정말로 폭동을 못 막아 내겠습니까? 만일 막아 내면……."

"폭동은 한 번만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부랑아들이 배고파서 일으킨 폭동입니다. 아마 모든 걸 파괴할 겁니다."

뤼그너 남작이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마틴 준남작은 그의 표정을 보고는 씨익 웃었다.

"그들은 무조건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폭동을 진압할 병력이 없으니까요."

"하하하하! 아주 명쾌하군요. 한데 병력이 없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의 뜻입니다. 폭동이 일어날 때쯤, 젤레 영지에는 남은 병력이 없을 것입니다. 산맥에 몬스터 토벌을 하러 가야 하거든요."

"아하!"

뤼그너 남작이 감탄한 얼굴로 무릎을 탁 쳤다.

곧 겨울이 온다. 몬스터는 겨울이 오기 직전 식량 문제로 한 번 준동을 한다. 그에 대한 대비로 가을쯤 몬스터 토벌을 한 번 해야만 한다.

산맥의 몬스터에 가장 피해를 많이 입는 곳이 바로 젤레 영지였다. 산맥이 닿는 영지는 젤레뿐이었다. 타 영지는 그렇게 젤레 영지를 한 번 거쳐서 오는 몬스터뿐이었기에 비교적 피해가 적었다.

보통 이 시기가 되면 몬스터 토벌을 위해 주변 영지에 도움을 청한다. 주변 영지도 몬스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일정한 도움을 줘 왔다.

한데 금년에는 영주가 바뀌고 관리를 싹 갈아 치우는 바람에 그 과정이 빠져 버렸다.

"용병을 잔뜩 고용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돈이 많이 깨지겠군요."

"돈이야 많지 않겠습니까? 어떤 용병을 구하느냐가 더 문제 아니겠습니까?"

"이 시기에는 실력 있는 용병들이 이 근방에 많이 옵니다. 그들도 돈 벌 시기를 잘 알고 있는 것이지요."

마틴 준남작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과연 이번에 젤레에서 구한 용병이 그냥 용병이겠습니까?"

뤼그너 남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면……!"

"이미 손을 써 놨습니다. 철사자 기사단 중 절반이 용병으로 변해 섞였고, 충분히 돈을 먹인 용병들이 젤레 영지에 잔뜩 모여 있습니다."

짝! 짝! 짝!

뤼그너 남작은 크게 박수를 쳤다. 그의 표정에 어린 감탄이 사라질 줄을 몰랐다.

"정말 완벽합니다. 마틴 준남작님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은 아마 꿈도 못 꿀 것입니다. 정말 대단하십니다."

마틴 준남작은 자신을 찬양하는 뤼그너 남작의 말을 기분 좋은 표정으로 즐겼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한없이 음험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 슬슬 시작할 때가 되었다. 몇 달이나 기다리고 준비해 온 일을 말이다.

☆ ☆ ☆

제론은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사실 오늘 처음 느낀 게 아니었다. 며칠 전부터 조짐이 있었다. 다만 그때는 그리 큰 느낌이 아니었는데, 날이 갈수록 점점 느낌이 강해졌다.

이건 예전 제론이 군대에 있을 때, 전투 직전에 느끼던 감각과 비슷했다.

"이곳에서도 마티를 제대로 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좀 아깝군."

정보 수집 아티팩트 마티는 너무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잘 작동하지 않는다. 이곳에서도 몇 개 쓰고 있긴 하지만, 그건 원래 것이 아니라 조금 개조해서 만든 전혀 다른 것이었다.

태블릿으로 조종하고, 정보 수집 범위가 그리 크지 않아서 제대로 쓸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꼭 필요할 때 쓰기에는 아주 좋았다.

어쨌든 제론은 투기의 흐름을 느꼈기 때문에 영지전에 관해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변방의 영지라고 해도 3년간 영지전이 금지된 젤레 영지에 전쟁을 걸지는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뭔가 다른 게 있다는 뜻인데…….'

제론은 그 기묘한 느낌 때문에 유적에 수련하러 가지도 못하고 영지 내를 서성였다.

하지만 아무리 돌아다니고 투기의 흐름을 쫓아가 봐도 별다른 점이라고는 영지에 용병이 많아졌다는 것 외에는 없었다.

'용병이 늘어나서 그런가?'

용병은 기본적으로 전투와 가장 가까이 서 있는 직업이었다. 당연히 가만히 있어도 끊임없이 투기가 흘러나왔다. 그렇기에 서로 싸우는 일이 잦은 것이다.

일단 투기의 흐름에 항상 끼어 있는 존재가 바로 용병이었기에 그 흐름을 완전히 파악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하도 복잡하게 얽혀서 그걸 일일이 풀어내려면 밤을 새도 모자랐다.

제론은 일단 용병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다시 영주성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 있는 관리를 찾아갔다.

"여, 영주님!"

관리는 제론을 보자마자 사색이 되어 벌떡 일어났다. 그가 전임 관리를 어떻게 처리했는지 잘 알기에 조금이라도 빈틈을 보여선 안 된다는 압박을 받은 것이다.

"영지에 용병이 많이 늘었는데, 알고 있나?"

"무, 물론입니다!"

관리는 크게 대답했다. 그리고 즉시 설명을 덧붙였다.

"조만간 로트 산맥에 몬스터 토벌을 하는데, 그 때문에 모인 자들입니다."

"로트 산맥?"

로트 산맥을 제론이 모를 리 없다. 영지에 붙은 산맥 아닌가. 광맥이고 뭐고 다 말라붙어서 거의 쓸모가 없는 산맥이었기에 더 잘 알고 있었다.

"난 몬스터 토벌 계획을 세운 적이 없는데?"

"매년 그렇게 해 왔기에 다들 또 하나 보다 생각하고 온 모양입니다. 사실 저도 아직 영주님께서 명령을 안 내리셔서 계획을 유보 중이었습니다."

"계획서는 만들었나?"

"예. 여기 있습니다."

관리는 즉시 미리 준비한 계획서를 꺼내 내밀었다. 어차피 매년 하는 일이었기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미리 보고서를 작성해 두었다.

"돈이 제법 많이 들어가는군."

"1년 예산에서 가장 많이 들어가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토벌하지 않으면 겨울부터 봄까지의 피해가 너무 극심해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제법 잘 정리된 보고서였다. 제론은 차근차근 보고서를 읽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제론이 막 부임한 영주라는 것을 감안해 최근 5년 동안 어떤 식으로 토벌을 했는지도 자세히 기술되어 있었다.

그걸 보고 나니 왜 몬스터 토벌을 하고, 얼마나 돈이 들고, 또 금년에는 어떤 식으로 하는 게 좋은지 일목요연하게 착착 정리되었다.

"토벌을 하긴 해야겠군."

제론은 보고서를 다 읽은 후, 그것을 들고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일단 이 부분에 대해 집중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묘한 예감이 들었다. 자신을 노리는 자들이 이번 로트 산맥 토벌을 그냥 지나 보낼 리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최근 느끼던 투기의 흐름이 예사로 보이지 않았다.

그 부분에 대해 집중적으로 생각하고, 또 대처법을 마련해야만 했다.

바이스와 세나의 도움을 바랄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지금 맡은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친 상황이었다. 이 일은 온전히 제론 혼자서 해결해야만 했다. 물론 자신 있었다.

제론이 밖으로 나가자, 그때까지 부동자세로 서 있던 관리가 허물어지듯 주저앉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아! 죽는 줄 알았네."

그렇게 잠시 앉아서 한숨 돌린 관리는 다시 일을 시작했다. 신입 관리로서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았다. 제론 영지는 서류상으로 손볼 곳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비리로 얼룩진 영지였으니 너무나 당연했다.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 만들다시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래서 더 보람이 느껴졌다. 일에 열중하는 관리의 표정에 어느새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제론은 집무실에 앉아 보고서를 다시 읽으며 손가락으로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기본적으로 제론은 감이 뛰어났다. 지금까지 그 감이 아니었다면 목숨이 몇 개라도 모자랐을 것이다. 한데 그 감이 맹렬히 경고를 내보내고 있었다.

제론은 그동안 주변 영지에 대해, 또 자신을 노리는 자들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안이하게 대처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입장을 바꿔서 자신이 적이 된다면 이 영지를 어떻게 노릴까 고민해 보니 답이 금방 나왔다. 빈틈이 너무 많았다.

그 모든 빈틈을 짧은 시간 동안 전부 메울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적이 선택할 가능성이 높은 빈틈을 선택해서 대비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처리하는 수밖에.'

지금으로선 방법이 그뿐이었다.

제론은 버클을 쓰다듬었다. 금세 마음이 든든해졌다. 만일의 사태가 벌어져도 테오스가 있으니 웬만한 일은 해결이 가능할 것이다.

물론 테오스를 쓴 이후의 파장도 충분히 고려를 해야 하지만 급하면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제론은 주변 영지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놔둬 봐야 계속 해악만 끼칠 것이다. 성채가 완공되어 황무지가 옥토로 바뀌고 나면 훨씬 지저분하게 나올 공산이 컸다.

그전에 모든 상황을 마무리하는 것이 속 편했다. 문제는 어떻게 정리하느냐였다.

제론은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눈을 번쩍 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론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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