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화 (30/217)

Chapter 6 유적 11층

영지가 안정을 찾자마자 제론은 곧장 유적으로 향했다. 지금 그곳은 공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막대한 자재가 쌓였고, 인부들이 꾸역꾸역 모였다. 영지의 유휴 인력뿐 아니라, 인근 영지에서까지 사람이 모여들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서민의 생활이 조금씩 어려워졌다. 그 여파가 지금 나타나는 중이었다. 다들 배를 곯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밥 먹여 주고 돈까지 주는 일거리가 있다는데 오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 모든 일을 지휘하는 사람은 바이스였다. 또한 바이스는 임시로 젤레 영지의 재무관까지 맡았다. 제론은 바이스에게 200만 골드를 맡겼다. 일단 그 정도면 당분간은 충분할 거라 판단했다.

또한 바이스가 가지고 있는 제론의 돈도 있었다. 당연히 포로스 판매를 통한 이익금이었다.

제론은 어느 정도 시간을 벌었다고 판단했다. 드디어 유적에 들어갈 시간이 되었다. 이제부터 진짜 실질적인 힘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바로 기간트였다. 조금 전 세나가 수리하고 있는 열다섯 기의 실바 옆에 부서진 카타락타 다섯 기를 새로 놓고 왔다. 세나의 한숨이 아직까지 들려오는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 정도는 있어야 최소한의 자구책을 마련할 수 있으니 말이다.

아마 조만간 이 영지는 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이 영지의 적은 너무나 많았다.

일단 슈린 공작가가 있다. 그들이 그냥 손을 놓고 있을 리 없었다. 또한 세나의 아버지인 벨루스 백작이 있다. 그쪽도 분명히 뭔가 손을 쓸 것이다.

게다가 젤레의 주변 영지 역시 크게 좋은 관계가 아니었다. 전부 잠재적인 적이었다.

조만간 황무지가 옥토로 바뀌고 그 위에 황금빛 밀밭이 펼쳐지면 그들이 가만히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어떻게든 트집을 잡아 그 땅을 차지하려 할 것이다.

그 모든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당연히 힘이었다. 힘을 가지고 있어야 모든 일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은 이 유적 지하에 있었다.

제론은 유적 안으로 들어갔다. 유적 내부는 한산했다. 아직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 않았기에 여기까지 사람이 들어올 일이 없었다.

하지만 조만간 이곳은 사람으로 꽉 찰 것이다. 유적 곳곳에 구멍이 뚫리고 거대한 건물이 세워질 것이다. 또한 바닥 깊은 곳까지 파헤쳐져 지하로도 구조물이 착착 들어설 것이다.

예상 공사 기간만 무려 1년이 넘게 걸리는 대공사였다. 하지만 무조건 해내야만 했다. 이 영지성은 앞으로 에어스트 백작가의 상징이 될 것이다.

제론은 팔뚝에 채워진 팔찌를 쓰다듬었다. 그것은 에어스트 백작가의 가보이자, 인장이었다. 또한 중앙 유적으로 들어갈 열쇠이기도 했다.

새삼 즐거운 기분이 들었다.

"아네모스."

휘류류류륭!

바람이 모여들어 정령이 되었다. 그리고 명령에 따라 팔찌로 들어갔다.

제론은 그대로 순간이동해 중앙 유적 로비에 도착했다.

"후욱."

심호흡을 한 제론은 눈을 빛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허리띠에 매달린 버클을 쓰다듬었다. 이 안에 테오스가 잠들어 있다. 주인이 자신을 불러 주기만 기다리면서.

오늘 드디어 테오스를 탈 시간이 되었다.

제론은 즉시 11층으로 이동했다.

11층은 거대한 공간이었다. 얼마나 거대하냐 하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천장도 보이지 않았다. 곳곳에 거대한 바위가 있었고, 어딘가에서 물소리도 들려왔다.

"이건 마치…… 지하 유적이 아니라 어디 딴 장소에 와 있는 것 같군."

놀랍게도 하늘에 태양이 떠 있었다. 어쩌면 시간이 지나면 달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제론은 주위를 둘러봤다. 여기서 뭘 하라는 건지 파악하려고 애썼다.

쿵! 쿵! 쿵! 쿵!

어딘가에서 땅이 울렸다. 이건 명백히 거대한 물체가 다가오는 소리였다. 예를 들면 기간트 같은.

제론은 다급히 테오스를 소환했다. 이제야 이곳에서 뭘 할지 알 수 있었다.

"테오스!"

후아앙!

생각해 보면 테오스를 소환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제론은 크게 당황했다. 그동안 겪은 다른 기간트와는 방식이 전혀 달랐다.

소환과 동시에 탑승했다. 테오스는 마치 제론의 몸을 감싸듯 나타나 쭉 자라났다.

새까만 광택이 흐르는 몸체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테오스는 자신의 존재감을 사방으로 뿌리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제론은 이를 악물고 테오스를 조종했다. 테오스의 조종 방식은 오로지 마나였다.

테오스의 마나 코어는 바로 라이더였다. 아니, 라이더와 조종석 자체가 마나 코어였다.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를 기반으로 몸체를 움직였다.

물론 테오스의 몸 곳곳에는 에너지 코어라 불리는 것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실질적인 에너지는 그곳에서 나온다. 하지만 그 에너지 코어를 활성화시키지 않으면 테오스를 움직일 수 없었다.

그것을 활성화시키는 방법이 바로 마나였다.

제론은 10층에서 수련한 대로 마나를 뿜어냈다. 목을 움직이려면 목에서 마나를 뿜어내야 했고, 손을 움직이려면 손으로 마나를 뿜어내야 했다.

테오스를 제대로 타려면 마나를 얼마나 능숙하게 잘 뽑아내 다루느냐가 중요했다. 물론 기간트 센스는 필수였다. 몸의 움직임과 기간트의 움직임은 다르다. 테오스는 그것이 최소로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달랐다.

제론은 자신의 센스를 최대한 발휘해 테오스를 움직였다.

쿠웅!

첫발을 내디뎠다. 발을 타고 육중한 충격이 몸으로 스며들었다. 물론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그저 땅을 밟았다는 감각만 느껴질 뿐이었다.

그 감각이 온몸에 퍼진 제론의 감각을 짜릿하게 깨웠다.

달랐다! 다른 기간트와는 완전히 달랐다.

훨씬 섬세했고, 복잡했다. 움직임에 들어가는 집중력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

하지만 그로 인해 예전에는 아예 불가능했던 동작이 가능해졌다. 관절도 훨씬 유연했고, 발상에 따라서 인간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동작을 해낼 수도 있었다.

제론은 일단 테오스에 적응하려 애썼다. 점점 커지는 울림을 통해 짐작하건대, 더 이상 시간이 없었다.

후웅!

팔을 휘둘렀다. 팔뚝이 매끄러운 호선을 그리며 옆의 거대한 나무를 후려쳤다.

꽈앙!

나무가 박살 났다. 그저 부러진 것이 아니라 팔뚝에 부딪힌 곳을 중심으로 거의 가루가 되다시피 했다.

나무를 부수는 감촉이 생생히 느껴졌다. 마나를 끊임없이 불어 넣어서 그런지 감각 하나는 정말 최고였다.

제론은 그 뒤로 몇 가지 동작을 더 했다. 기간트를 몰기 전에 기본적으로 하는 준비운동이었다.

그쯤에 땅울림의 정체가 드러났다. 거대한 오우거였다.

"크워어어어!"

양손을 크게 펼치며 포효하는 오우거의 몸에서 어마어마한 투기가 뿜어져 나왔다. 보통 오우거와는 완전히 달랐다.

보통 오우거는 신장이 5미터 정도 된다. 하지만 지금 나타난 오우거는 신장이 무려 10미터가 훨씬 넘었다. 변종 오우거였다.

덩치도 크고 눈에 흐르는 흉광이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가끔 입에서 불길이 훅훅 나왔다.

"저놈이랑 싸우라는 거로군."

제론은 긴장을 풀며 무기를 찾았다. 테오스에는 각종 아공간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제론은 능숙하게 허리춤의 아공간을 열어 검을 꺼냈다.

아공간을 여는 건 간단했다. 의념을 보내 정확한 위치에 마나를 흘려보내면 된다.

테오스가 오우거를 향해 검을 겨누자, 오우거가 본능적으로 먼저 덤벼들었다.

쿠웅!

오우거가 높이 점프했다. 거의 테오스의 두 배 높이였다. 육중한 몸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함에 제론은 깜짝 놀랐다.

오우거가 깍지를 끼고 테오스의 머리를 후려쳤다.

꽈앙!

테오스가 간신히 팔을 들어 오우거의 공격을 막았다. 그 충격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제론은 본능적으로 그 충격을 싹 받아들여 몸을 한 바퀴 휘돌아 오우거에게 돌려주었다.

쩌엉!

"크어엉!"

오우거가 날아왔던 것보다 세 배나 빠른 속도로 나가떨어졌다.

콰과광!

바닥에 나뒹굴며 나무건 바위건 닥치는 대로 다 쓸어버린 오우거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달려갔다.

쿵쿵쿵쿵!

오우거의 두 주먹이 정신없이 몰아쳤다.

제론은 차분히 검을 들어 그 주먹을 막고 후려쳤다. 그리고 차근차근 오우거의 팔다리를 잘라 내고 목을 쳐 냈다.

그러자 오우거가 먼지처럼 흩어져 버렸다.

"뭐야? 설마 환상?"

그럴 리가 없었다. 이렇게 생생한 환상이 어디 있단 말인가.

어쨌든 제론은 테오스의 상태를 세심히 살폈다. 확인은 간단했다. 온몸으로 마나를 흘려 보면 된다. 마나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않은 곳에 이상이 있는 것이다.

고작 오우거 한 마리와 싸웠는데 이상이 있을 리 없었다. 제론은 상태를 확인한 뒤 심각한 표정으로 상황을 점검했다.

테오스의 성능이 과연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파괴력은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처럼 엄청난 수준이 아니었다. 마나를 뿜어내 조종하는 제론의 실력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기대에는 훨씬 못 미쳤다.

하지만 그 모든 걸 감안해도 테오스가 가진 기능은 정말로 엄청났다. 단적으로 오우거의 일격을 받아 그 충격을 증폭시켜 되돌린 그 기술은 정말로 엄청났다.

물론 제론이 기술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면 아예 사용이 불가능한 기능이긴 했다. 하지만 제론은 감각적으로 그 기능을 자연스럽게 쓸 수 있었다.

조금만 더 갈고닦으면 실전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것이다.

"그나저나 벌써 힘들군."

가장 걱정했던 문제가 터졌다. 마나가 모자라는 것이다. 테오스를 움직이기 위해선 끊임없이 마나를 뿜어내야만 했다. 한데 그렇게 하기에는 마나가 너무 모자랐다.

상당히 높은 수준의 익스퍼트인데도 그러했으니, 테오스를 제대로 쓰기 위해선 적어도 마스터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일단 마스터가 되면 몸에 쌓는 마나의 양도 어마어마하게 늘어나지만, 마나를 다시 흡수해 보충하는 속도도 엄청나게 빨라진다.

그때가 되면 다른 기간트를 타는 것처럼 테오스를 몰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무적이지."

그때는 아무리 많은 적이 몰려와도 전혀 두렵지 않을 것이다. 테오스는 다른 기간트와 완전히 달랐다. 시야도 사방이 열려 있었다.

게다가 감각 자체가 달라서 누가 근처에 다가오면 금방 느낄 수 있었다.

문제는 파괴력인데, 왠지 거기에도 뭔가 답이 있을 것 같았다.

유적 11층을 꾸준히 수련하다 보면 그 답을 발견할 수 있을 듯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예감과 함께 마나가 바닥났다.

후웅!

테오스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제론은 어느새 바닥에 서 있었다.

진한 아쉬움이 제론의 온몸을 휘감았다.

☆ ☆ ☆

벨루스 백작가는 폭풍 전야의 긴장감이 가득했다. 가주인 백작의 분노가 어디에 있건 느껴질 정도였다. 특히 이곳 가주의 집무실은 그 분노의 농도가 더더욱 짙었다.

"뭐라고? 어디?"

"젤레 영지에 계시다고 합니다."

"젤레 영지? 그게 어디지?"

"전선과는 정반대 쪽에……."

"그러니까 그 중간에 있는 우리 영지에는 아예 발도 안 들이고 바로 그리로 갔다 이건가?"

"그, 그렇습니다."

보고를 하는 마틴 준남작도 죽을 맛이었다. 자기라고 이런 말을 하고 싶었겠는가. 언제나 좋은 소식만 알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슈린 공작가에서는 어쩌고 있나?"

"그 정보도 슈린 공작가에서 보내 준 것입니다. 일단 지켜본다고 했습니다. 다만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고……."

쾅!

"웃기는 소리! 도움? 누가 그따위 말을 듣고 오라고 했느냐!"

벨루스 백작 앞에 놓은 탁자에 쩍 금이 갔다. 백작은 익스퍼트에 이른 기사이기도 했다. 그의 주먹질이 평범할 리 없었다. 더구나 분노에 가득 찬 주먹질 아닌가.

"젤레 영지가 어디 붙어 있고, 어떤 놈이 영주인지 싹 알아와! 어서!"

"여, 여기 준비했습니다."

마틴 준남작은 서둘러 품에서 서류를 꺼내 내밀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최대한 싹싹 그곳의 정보를 모았다. 오래된 정보부터 최신 정보까지 전부 말이다.

서류를 한 장 한 장 읽던 벨루스 백작의 눈썹이 크게 꿈틀거렸다.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 하나가 거기 적혀 있었다.

"제론 폰 에어스트?"

"현 영주가 그자라 합니다."

"나도 읽어서 알고 있다. 한데 넌 이놈의 이름을 봤으면서도 내게 아무 말 안 한 것이냐?"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 세나가 아카데미에 다니는 내내 쫓아다니던 놈이 바로 이놈이라는 사실, 정말 몰랐다고 하는 것이냐!"

마틴 준남작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걸 자신이 어찌 안단 말인가. 하면 세나가 사랑을 좇아 젤레 영지로 갔다는 말 아닌가.

'이런 상황인데도 슈린 공작가에서는 손을 놓는다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마틴 준남작은 일순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금세 수긍했다. 어차피 이쯤 되는 고위 귀족 간에는 결혼도 정치의 연장에 있을 뿐이었다. 상대의 순결 같은 건 어차피 중요치 않았다.

그러니 그렇게 많이 바람을 피우고 결투를 하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

"하면 이제 어찌할까요?"

"어쩌긴, 빼앗아 와야지."

"직접 군대를 보내실 생각이십니까?"

벨루스 백작가에서 작정하고 기사단을 보내면 젤레 영지 따위야 순식간에 무너뜨릴 수 있었다. 명분도 나쁘지 않다. 딸을 되찾기 위함이니까.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야 없지. 철사자 기사단이면 충분하겠지?"

"차고 넘칩니다."

"네가 직접 그놈들을 데리고 다녀와. 정식으로 영지전 선포하는 것 잊지 말고."

"염려 마십시오. 좋은 결과를 들고 오겠습니다."

마틴 준남작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이런 일을 맡으면 떨어지는 부수입이 짭짤하다. 자그마치 영지전 아닌가.

'잘하면 영지 하나를 꿀꺽할 수도 있겠어.'

마틴 준남작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영지전 준비를 서둘렀다.

그리고 절망해야 했다. 젤레 영지는 국왕의 칙령으로 3년간 영지전 선포가 금지된 영지였기 때문이었다.

그 역시 제론이 받은 포상 중 하나였다.

제론은 군대에 있는 4년 동안 그야말로 무수한 공을 세웠고, 어마어마한 포상을 받았다.

사실 제론처럼 큰 적을 가진 사람이 변방의 작은 영지를 키우려면 걸리는 점이 너무 많았다. 제론은 포상을 이용해 그런 것들을 대충이나마 걸러 냈다.

결국 마틴 준남작은 다른 방식을 택해야만 했다. 물론 벨루스 백작에게 보고는 했다. 또 새로운 작전에 대한 허가도 받아 냈다.

그 뒤, 몇 가지 준비를 추가로 마친 마틴 준남작은 철사자 기사단을 이끌고 텔레포트 게이트를 탔다.

뤼그너 남작은 느닷없는 손님의 방문에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반갑습니다. 전 벨루스 백작님을 모시고 있는 마틴이라 합니다."

"저야말로 반갑습니다. 이런 궁벽한 곳을 찾아 주시다니……."

뤼그너 남작은 조심스럽게 마틴 준남작의 눈치를 살폈다. 대체 벨루스 백작가 같은 대영주가 자신에게 무슨 볼일이 있어 이렇게 찾아왔단 말인가. 그것도 기사단까지 대동하고 말이다.

"하하하. 그렇게 긴장할 것 없습니다. 그저 작은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 이렇게 찾아왔을 뿐이니까요."

"작은…… 도움이요?"

"예. 아주 작은 도움입니다. 옆에 있는 작은 영지를 한 번 쓸어 오는 작은 일인데, 어떠십니까? 관심이 생기시는지요."

"쓰, 쓸어 온단 말입니까?"

뤼그너 남작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것을 본 마틴 준남작의 얼굴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어렸다.

☆ ☆ ☆

유적 11층 역시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오우거 한 마리로 시작했지만 결국 두 마리, 세 마리로 늘어나더니 나중에는 수십, 수백 마리가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게다가 처음 나왔던 오우거는 가장 약한 놈이었다. 나중에 나온 오우거는 설사 웬만한 기간트와 싸워도 압도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르고 강했다.

가끔 입에서 뿜어내는 불길은 아찔할 정도의 고열이었기에 자칫하면 크게 당할 수도 있었다.

물론 아무리 부서져도 테오스는 아공간에서 착실히 스스로를 고쳤다. 테오스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에너지뿐이었다. 그리고 에너지는 제론의 허리띠가 무한정으로 공급해 주었다.

제론은 다른 모든 것에 신경을 끊고 유적 11층을 클리어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왠지 반드시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수백 마리 오우거를 동시에 상대하는 건 아무리 제론이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어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파괴력이 문제였다.

사실 제론은 테오스를 얻을 때만 해도 한 방에 수십 마리 오우거 정도는 날려 버릴 수 있을 줄 알았다. 한데 막상 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파괴력이 약한 건 아니지만 이대로는 좀 문제가 있었다. 그냥 보통 기간트면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이건 초고대 문명의 기간트 아닌가.

게다가 보아하니 초고대 문명에서도 아주 특별한 기간트였다. 흔히 볼 수 있던 그런 기간트가 아니었다. 이건 초고대 문명을 통틀어 단 한 대만 존재하는 희귀품이었다.

그럼 뭔가 특별함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제론은 분명히 그런 것이 있다고 믿었다. 아직 자신이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 것뿐이고 말이다.

어쨌든 11층 공략은 결코 쉽지 않았다. 다만 공략을 하면 할수록 점점 마나량이 늘어나고, 또 테오스 컨트롤에 능숙해지면서 가동 시간이 훨씬 늘어났다는 점이 고무적이었다.

오늘도 제론은 유적 공략에 실패하고 테오스의 가동 시간을 몽땅 쓴 뒤 로비로 올라왔다.

"후우. 이거 정말 힘드네."

오늘 무려 100마리가 넘는 오우거를 죽였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턱없이 모자랐다. 어쩌면 수백 마리의 오우거를 다 죽여도 11층이 끝날지 안 끝날지 알 수 없으니 아직도 까마득했다.

그래도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홀로 변종 오우거 수백 마리와 싸워서 그중 100마리를 물리친 것이다.

변종 오우거 한 마리의 힘이 웬만한 기간트를 뛰어넘을 정도였으니 만일 테오스를 동원할 수만 있다면 어떤 전쟁에 나가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문제는 테오스를 당장 꺼내서 쓰기가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테오스의 존재는 최대한 감춰야만 했다. 어쩌면 평생 감출지도 모른다. 그 존재를 감추고도 얼마든지 테오스의 힘을 이용할 방법이 많았다.

일단 테오스는 초고대 문명의 마법과 기술이 집약된 작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기간트가 가지는 한계나 약점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예를 들면 아공간이 그렇다.

기간트를 아공간에 보관할 수 있다는 건 전술적으로 엄청난 의미를 가진다. 기동력이나 은밀함이 갖춰지는 것이다.

아공간에 담긴 기간트를 적 수도 한복판에서 꺼낸다고 가정해 보자. 단번에 적 중추를 아수라장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 전쟁의 승패가 갈릴 수도 있는 문제였다. 사실 가장 먼저 아공간 기술을 개발한 크란 제국의 경우 그것을 이용해 전쟁에서 승승장구했다.

당시 소왕국에 불과했던 작은 나라가 결국 제국이 된 것의 바탕에는 아공간 기술이 있었다.

그 이후 아공간 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했다. 그 결과 지금은 기사의 장비에 아공간을 담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크란 제국에서는 거대한 검에 아공간을 담을 수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그 한계는 좀처럼 부서지지 않았다.

아공간 기술이 발전하면서 함께 발전한 것이 바로 아공간 감지 기술이었다.

현재 각국의 주요 시설에는 아공간을 감지할 수 있는 마법진이 깔려 있다. 어떤 곳은 아예 아공간 자체가 출입을 할 수 없도록 결계를 쳐 버리기도 했다.

왕궁이 그러하다.

각 왕국의 왕궁은 아공간 마법이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었다. 아공간 자체를 일그러뜨리는 힘이 감싸고 있기 때문에, 아공간을 지닌 채로 들어가면 그 아공간이 사라져 버리거나 아니면 비틀려 아공간에 보관한 물건이 완전히 부서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제론이 가진 아공간은 그 모든 법칙에서 벗어나 있었다.

초고대 문명의 아공간 기술은 현재 사용하는 아공간 기술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했다. 근본적인 법칙에서부터 달랐기에 그 어떤 기술로도 감지가 불가능했다.

그것은 고대 문명의 아공간 기술도 마찬가지였는데, 현재의 아공간 기술 자체가 고대 문명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렇듯 엄청난 힘과 가능성을 가진 기간트가 바로 테오스였다. 그렇기에 테오스에 관한 비밀은 무조건 지켜야만 했다.

제론은 로비 바닥에 누운 채로 마나 호흡을 통해 체력을 보충했다.

엄청난 마나가 온몸으로 유입되었다. 최근 테오스를 조종하면서 마나에 관한 능력이 훨씬 높아졌다.

마나를 흡수하는 양이나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졌다. 또한 마나를 조절하는 능력도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그게 안 되면 테오스를 세밀하게 조종할 수 없으니 당연했다.

체력을 채운 제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유적을 한 바퀴 둘러봤다. 왠지 감회가 새로웠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 또 이곳에서 각종 아티팩트를 얻었을 때, 얼마나 가슴이 떨렸던가. 그 뒤로 이 유적은 제론에게 끊임없이 힘을 주었다.

"그리고 기간트까지."

제론은 지그시 눈을 감고 허리띠의 버클을 쓰다듬었다. 이 안에 잠들어 있는 테오스를 떠올리기만 해도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좋아. 그럼 가 볼까?"

제론은 주먹을 불끈 쥐고 유적에서 나갔다. 이제 또 현실과 부딪쳐야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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