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젤레 영지
젤레는 변방의 작은 영지였다. 처음에는 백작령이었는데, 갖은 풍파와 영지전을 거치면서 영지가 쪼그라들었다. 지금은 남작령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작은 영지였다.
그렇게 쪼그라든 영지가 결국 왕국에 귀속되며 직할령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그것이 벌써 100년이 넘었다.
지금까지는 몇 명의 관리가 알아서 영지를 다스렸다. 어차피 중요한 영지도 아니었기에 관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영지가 굴러갔다. 당연히 비리도 많았다.
한데 영주가 부임한다고 하니 처리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영주를 맞을 준비만 해도 간단치 않은 일이었다. 한데 거기에 더불어 비리도 철저히 감춰야 한다.
"젠장, 통보를 이제야 해 주면 어쩌자는 거야!"
젤레 영지의 영주가 확정된 건 벌써 몇 년 전이라고 했다. 한데 그동안은 일언반구도 없다가 갑자기 새 영주 부임을 통보하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행정적 일 처리란 말인가.
젤레 영지의 모든 관리를 통솔하는 관리장 파울펠츠 준남작은 눈앞에 놓인 서류를 분류하면서 연신 투덜거렸다.
새 영주가 부임하니 인수인계를 준비하라는 통보를 오늘 아침에 받았다. 날벼락이었다.
확인해 보니 새 영주는 이번 전쟁에서 공을 세운 귀족이었다. 또한 곧 전역할 예정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그나마 며칠이라도 시간이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젤레 영지는 작았기에 텔레포트 게이트가 없었다. 가장 가까운 게이트도 꼬박 하루 거리였다.
파울펠츠는 텔레포트 게이트에 끄나풀 하나를 심어 영주가 도착하면 자신에게 곧장 연락하도록 조치를 취해 두었다. 그래야 나중에 정 시간이 모자라면 손해를 좀 감수하고라도 비리를 감출 테니까 말이다.
"하여튼 속물들이야. 어차피 나중에는 다 쥐어짤 거면서 처음에 민심 좀 얻겠다고 비리 조사부터 시작하니, 원."
보통 새로 영주가 부임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비리 척결이었다.
이는 향후 영지를 다스리는 데 걸림돌이 될 만한 것들을 치우는 의미도 있었지만, 그동안 관리에게 수탈당한 영지민에게 보여 주기 위한 쇼의 성격이 훨씬 짙었다.
또한 그렇게 한 번 분위기를 잡아야 관리를 손아귀에 넣어서 다루기가 편해진다는 점도 중요했다.
파울펠츠는 몇 번이나 새 영주를 맞이했기에 그들의 속성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이번 영주는 좀 일찍 나가떨어졌으면 좋겠군."
이곳 젤레 영지는 돈이 될 만한 것이 많지 않고 신경 쓸 일은 많았다. 그렇기에 부임한 영주마다 골머리를 앓다가 이내 포기해 버리곤 했다.
영지를 왕국에 반납하고 그 대가로 돈을 받아가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만일 어떻게든 끝까지 버티려고 하면 뭔가 사고가 터져서 목숨을 잃곤 했다.
파울펠츠는 이번 영주도 분명히 그렇게 될 거라 믿었다. 그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스쳤다. 지독히도 잔혹한 미소였다.
이곳은 관리들에게 있어선 천국과 같은 곳이었다. 워낙 변방이었기에 감사도 거의 없었다.
가장 큰 문제이자 위기는 이렇게 영주가 새로 부임할 때뿐이었는데, 지금 비리로 끌려 들어가더라도 사실 큰 문제는 없었다. 사형당하지만 않으면 말이다.
"어쨌든 안 걸리는 게 중요하지."
파울펠츠는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분류한 서류를 한쪽으로 치웠다.
그 순간, 누군가가 그 서류 뭉치를 덥석 집어 들었다.
"누, 누구냐!"
파울펠츠는 너무 놀라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아무도 없는 자신의 집무실이었다. 물론 조만간 영주의 집무실이 되긴 하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자신이 이곳에서 일하고 있을 때는 누구도 안에 들이지 않도록 미리 명령을 내려 뒀다. 한데 이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아주 흥미로운 서류로군. 이런 걸 당당하게 서류로 만들어 보관을 하고 있었다니, 이거 담이 크다고 해야 할지,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그, 그것을 이리 내라! 당장!"
파울펠츠는 그렇게 외치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자신은 물론이고 동료 모든 관리의 비리까지 싹 정리된 거나 다름없는 서류를 낚아채려고 몸을 날렸다.
서류 뭉치가 위로 휙 올라갔다. 파울펠츠는 헛손질을 하며 허우적거리다가 꼴사납게 나뒹굴었다.
우당탕!
"크어억!"
파울펠츠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다가 독기 어린 눈으로 서류를 든 사내, 제론을 노려봤다.
"이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와서 행패를 부리는 것이냐! 이곳은 곧 백작님의 집무실이 될 곳이다! 너 같은 놈이 함부로 들어올 곳이 아니란 말이다!"
제론은 파울펠츠의 말에 피식 웃어 주고는 계속해서 서류를 찬찬히 확인했다.
파울펠츠가 발악하며 외쳤다.
"밖에 뭣들 하는 거냐! 경비병! 경비병!"
잠시 후, 집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영주성을 지키는 병사 일곱 명이 우르르 들어와 창을 겨눴다.
"멈춰라!"
경비조장은 일단 그렇게 외친 뒤 상황을 살폈다.
제론은 가만히 서서 서류만 읽고 있을 뿐, 특별히 파울펠츠를 핍박하지 않았다. 그저 파울펠츠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으니 뭔가 일이 있었구나 짐작할 뿐이었다.
"저놈을 당장 잡아라!"
경비조장이 파울펠츠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제론을 바라봤다. 제론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서류만 팔락팔락 넘기고 있었다.
"감히 이곳에 무단 침입한 놈이다! 어서 잡지 않고 뭘 하고 있느냐!"
그제야 경비조장이 표정을 굳히며 제론을 향해 창을 겨눴다. 나머지 병사도 경비조장을 따라 일제히 창을 겨눴다.
파울펠츠는 그것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끄응."
가만히 앉아서 오랫동안 서류 작업을 하다가 갑자기 움직인 데다 바닥에 넘어지기까지 해서 그런지 욱신욱신 안 쑤시는 곳이 없었다.
"뭣들 하느냐. 그놈을 당장 꿇리지 않고!"
파울펠츠의 외침에 병사가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병사보다 제론의 행동이 조금 더 빨랐다.
펄럭!
제론이 품에서 꺼낸 서류 한 장이 허공에 휘날렸다. 한쪽 끝을 잡고 있기에 날아다니진 않았지만, 활짝 펼쳐졌기에 누구나 확인할 수 있었다.
그 타이밍이 워낙 절묘해 병사들은 미처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고 멍하니 서류를 쳐다봤다.
글을 아는 병사가 많을 리 없다. 이 방 안에서 글을 아는 사람은 제론을 제외하면 파울펠츠뿐이었다. 파울펠츠는 제론의 손에서 펄럭이는 서류를 정신없이 읽어 내려갔다.
파울펠츠의 몸이 사정없이 덜덜덜 떨렸다.
"여, 여, 여, 여, 영주님!"
제론이 씨익 웃었다.
"그래, 잘 아네. 이 서류는 고마워. 영지 운영에 아주 큰 참고가 되겠어."
제론은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이제 내가 누군지 알았으면 다 물러가도록. 방 안에 있는 서류는 단 한 장도 건드리지 말고."
파울펠츠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제론은 폭풍처럼 움직였다. 파울펠츠를 비롯한 모든 관리를 한방에 가둬 버렸다. 그리고 그들의 서류를 몽땅 압수했다.
상식적으로 한 명이 그 모든 서류를 다 확인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제론은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제론에게는 태블릿이라는 사기에 가까운 아이템이 있었으니까.
모든 서류를 태블릿에 입력하는 데 걸린 시간이 제일 길었다. 서류가 워낙 많아서 그걸 한데 모으고 거기에 태블릿의 빛을 투영해 내용을 복사했다.
제론은 군대에 있는 4년 동안 태블릿의 방대한 기능을 제법 능숙하게 쓸 수 있게 되었다.
일단 서류를 몽땅 입력한 뒤에 그것을 분류하고 문제가 있는 걸 뽑아내는 건 제론이 거의 신경을 쓸 필요도 없었다.
작업을 모두 끝내고 모든 관리의 비리를 샅샅이 정리한 제론은 여유롭게 집무실에서 나갔다.
영주성 내의 분위기는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새 영주가 도착한 뒤로 모두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지냈다.
모든 관리가 한데 갇혀 있다는 소문은 이미 전 영지를 뒤흔들고 있었다. 언제 자신도 같은 신세가 될지 몰라 다들 전전긍긍했다.
죄를 지었건 안 지었건 상관없었다. 어차피 영주가 벌을 주려고 마음먹으면 어떤 죄든 갖다 붙이기 나름이었다. 갓 태어난 아기도 영주가 원하면 죄목을 붙일 수 있었다.
그래도 레늄 왕국은 그나마 다른 왕국에 비해서는 평민에 대한 처우가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변방 영지의 경우는 중앙 영지와는 많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제론은 나가자마자 일단 병사부터 찾았다. 직할령의 경우에는 기사가 없었다. 기사는 부임하는 영주가 데려오는 것이 관례였다. 아니면 부임 후 차츰 영입하거나.
"그래도 병사는 제법 많군."
영지의 인구에 비해 병사의 수가 많은 편이었다. 그 모든 것이 관리가 수탈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었지만, 제론은 병사의 수를 줄일 생각이 없었다.
향후 젤레 영지는 훨씬 더 커질 것이다. 그러면 인구도 급격히 증가할 확률이 높았다. 그때를 대비하면 병사를 더 늘리면 늘렸지 줄여선 안 된다.
제론은 영지를 크게 키울 자신이 있었다.
돈도 넘쳐났고, 기간트도 잔뜩 보유했다. 게다가 초고대 문명의 지식까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지를 키우지 못하면 그건 멍청이였다.
게다가 이제 며칠 더 있으면 아주 유능한 인재가 이곳에 온다. 그 둘이 도우면 훨씬 더 빨리 영지를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제론은 일단 50명의 병사를 차출해 끌고 영주성에서 나갔다. 제론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파울펠츠의 저택이었다.
"내가 보기엔 영주성보다 더 큰 것 같은데, 너희들 생각은 어때?"
제론이 씨익 웃으며 함께 온 병사들에게 물었다. 다들 머뭇거리며 차마 대답을 하지 못했다. 뭐라고 말이라도 했다가 나중에 무슨 꼴을 당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경험을 보면 관리에게 저항하는 것은 정말 쓸데없는 일이었다. 관리는 언제나 끝까지 살아남았다.
"자, 일단 들어가서 닥치는 대로 다 압수한다."
"예?"
제론의 명령에 놀라 병사 하나가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하지만 이내 그 병사는 얼굴이 시퍼렇게 질리며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감히 영주의 명령에 한 글자이긴 해도 토를 달았으니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었다.
제론이 그 병사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뭘 그렇게 떨어? 안으로 들어가서 싹 압수하라고. 오늘부로 더 이상 파울펠츠 준남작의 재산은 없다."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는 검을 뽑아 문을 향해 가볍게 슥슥 두 번을 그었다.
쩌정!
그 거대한 문이 정확히 네 토막으로 잘라졌다.
꽈과광!
바닥에 쓰러지며 자욱한 흙먼지가 일었다. 하지만 제론의 가벼운 손짓 한 번에 흙먼지가 싹 날아갔다. 제론은 저벅저벅 안으로 들어갔다.
병사들이 머뭇거리며 제론을 따라 들어갔다.
"무슨 일이냐!"
저택 안에서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이건 또 뭐야? 설마 사병을 키우는 건가?"
병사의 복장이 영지병과는 많이 달랐다. 훨씬 고급스러웠고, 또 들고 있는 무기도 좋았다.
"저놈들이 입은 옷과 무기도 싹 수거하도록."
제론은 그렇게 명령을 내리고는 앞으로 성큼 한 발 내디뎠다. 그 순간 제론의 모습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쉬이익!
쩌저저저정!
어느새 제론은 파울펠츠의 사병들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리고 강렬한 기파가 사방으로 몰아치더니 모든 사병을 바닥에 눕혔다.
한 번 쓰러진 파울펠츠의 사병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고통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뭐해? 무기 뺏고 옷 벗기지 않고!"
제론의 호통에 병사들이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우르르 달려들어 사병의 무기를 빼앗고 옷을 벗겼다. 순식간에 발가벗겨진 파울펠츠의 사병은 사이좋게 정원 한구석에 밧줄로 꽁꽁 묶여 눕혀졌다.
제론은 그들에게 빼앗은 무구와 옷이 쌓인 모습을 힐끗 쳐다보고는 고개를 크게 한 번 끄덕였다. 그리고 느긋하게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50명의 병사는 그때부터 조금 더 당당해졌다. 영주의 힘이 상상 이상이라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했다. 조금 더 용감해지는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묘한 기대감이 싹텄다.
어쩌면 이번 영주는 이 영지의 썩어 빠진 관리를 몽땅 없애 버릴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 ☆ ☆
제론의 폭풍 같은 행보는 영지를 몇 번이나 들썩이게 만들었다.
일단 모든 관리의 재산을 압류했다. 관리들이 그동안 쌓아 둔 재산은 어마어마했다.
제론은 관리와 결탁해 비리를 돕거나 함께 가담한 자들의 재산도 압류했다. 다만 이때는 철저히 계산을 해서 그들이 비리로 해 먹은 금액만큼만 압류했다.
물론 그 금액도 엄청났다. 대부분 그렇게 한 번 털리고 나면 거의 거지꼴에 가깝게 변했다.
당연히 반발이 일어났다. 비리에 많이 가담해 해 먹은 게 많은 사람일수록 반발이 거셌다.
하지만 제론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제론의 무력은 막대했다. 혼자 나선 제론을 아무리 떼로 몰려가도 어쩌지 못했다.
그렇게 비리를 저지른 자들의 재산을 한 차례 털어먹은 제론은 영지민을 달래기 시작했다.
영주성의 창고를 열어 일단 식량부터 잔뜩 풀었다. 한 끼라도 배불리 먹으라는 배려였다.
당연히 폭발적인 호응을 끌어냈다. 항상 배를 곯았기에 한 끼라도 푸짐히 먹으니 세상을 다 얻은 듯한 기분이 든 것이다.
제론의 행보는 거기서 끊어지지 않았다. 비리 때문에 압류된 재산을 영지민에게 거의 무상에 가깝게 풀어 버린 것이다.
워낙 막대한 재산이긴 했지만 영지민의 수도 제법 많았기에 한 가구당 돌아가는 돈의 액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영지민은 모두 환호했다. 제론이 내려 준 돈은 가뭄의 단비 같았다.
그렇게 제론은 어려운 사람의 마음을 한 차례 어루만져 준 뒤, 영지민이 지속적으로 굶지 않고 배불리 먹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바이스와 세나가 젤레 영지에 들어서면서 주변을 유심히 살폈다. 어떤 영지인지 알아야 향후 어떻게 제론을 도울지 계획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사람들 표정이 생각보다 밝은데? 좋은 영지인가 봐."
"표정은 밝지만, 행색은 안 그런데? 나쁜 영지에 좋은 영주가 막 부임한 거지."
세나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네. 역시 제론 선배님이셔."
"사람들 행색을 보니 정말 지독하게 당한 것 같은데 저런 표정으로 만들어 놓다니, 그것도 고작 며칠 만에. 확실히 대단하신 분이긴 해."
"뭘 어떻게 하신 건지 궁금한데?"
"관리를 족쳤겠지. 그게 제일 쉽고 확실한 방법이니까."
"한데 고작 그것만으로 사람들 표정이 저렇게 좋아졌을까?"
"글쎄. 자세한 건 선배님을 만나면 다 알게 되겠지."
두 사람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사실 의문이 많았다. 비리 척결은 영주가 부임하면서 흔히 하는 민심 다스리기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민심을 되돌리는 건 쉽지 않았다. 특히 젤레 영지처럼 직할령이었던 경우는 더더욱 그러했다.
직할령의 관리는 모두 직접 국왕의 인가를 받고 등용된다. 즉, 국왕이 임명한 관리라는 뜻이었다. 그렇기에 함부로 처벌하기가 까다로웠다.
물론 처벌을 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결코 과한 처벌을 할 수는 없었다. 기껏해야 직위 해제와 감옥에 가두는 정도가 전부였는데, 영지민도 대부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머리로 아는 게 아니라 몸으로 겪어서 안다. 그렇기에 더욱 절실하게 와 닿을 수밖에 없었다. 민심 수습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였다.
두 사람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한시라도 빨리 제론을 만나고 싶었다.
영주성에 도착한 두 사람은 정문 바로 옆에 붙은 공고를 볼 수 있었다.
"벌써 뭔가를 시작할 모양이네."
공고를 발견한 바이스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걸어가 공고를 찬찬히 읽었다. 하지만 읽는 내내 바이스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이게 뭐지?"
"뭔데 그래?"
세나가 얼른 바이스 옆에 붙어서 빠르게 공고를 읽었다. 그녀의 표정 역시 읽으면 읽을수록 바이스와 비슷해졌다.
"이걸 정말 선배님이 쓰셨다고? 믿기 어려운데?"
"이 시국에 영지성 건설이라니."
"그것도 황무지 한가운데 있는 유적을 개조해서 말이야."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렇지. 이런 식으로 낭비하면 얼마 버티지 못해."
바이스는 고개를 저었다. 제론이 무슨 생각으로 이 일을 진행하는지는 추측이 가능했다. 공사를 시작해서 영지에 돈을 풀겠다는 뜻이리라.
젤레 영지에는 딱히 돈이 될 만한 것이 없었다. 농사도 그저 그렇고 특산물도 없었다. 제법 큰 산맥이 옆에 붙어 있었고, 그래서 중요한 광산도 몇 개 있었지만, 이미 광맥이 말라 버린 지 오래였다.
게다가 산맥에 서식하는 몬스터 때문에 주기적으로 토벌해 주지 않으면 생활이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에 공사를 하려면 차라리 산맥으로 통하는 길에 방벽을 세우는 게 훨씬 낫다. 아니면 영지의 도로를 정비하거나, 수로를 만들어도 되고 말이다.
그런 다른 모든 일을 제쳐 두고 성부터 짓는다는 건 그 유적에 미련이 남았다는 뜻이었다.
"일단 들어가서 선배님부터 만나는 게 낫겠어."
"아, 그전에."
세나가 서둘러 성으로 들어가려 하자, 바이스가 세나의 팔을 잡았다. 세나가 의아한 눈으로 바이스를 바라보자, 바이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앞으로 호칭을 달리할 필요가 있어."
"호칭? 그게 무슨 상관이야? 군대에서도 그냥 선배님이라고 했는데."
"그때야 상황이 특수했으니까. 우린 생각보다 많은 특혜를 받으면서 군부 생활을 했어."
세나도 그 말에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바이스의 보직 자체가 특수했고, 또 두 사람의 뒤를 받쳐 주는 가문, 특히 바이스의 가문인 말레피 후작가의 후광이 큰 영향을 미쳤다.
만일 그게 아니었다면 그렇게 편안한 군 생활을 하는 건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다른 유력 귀족의 자제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어쩌자고?"
"앞으로 깍듯이 영주님이라고 불러."
"영주님?"
세나의 표정에 불만이 잔뜩 어렸다. 선배님에서 영주님이라니, 너무나 극심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아니면 백작님이라고 하거나. 에어스트 백작님."
"뭐? 그건 안 돼!"
"그럼 영주님이라고 할 거야?"
"그, 그냥 제론 님은 안 될까?"
"당연히 안 되지. 우리가 그렇게 부르면 다른 사람이 영주님을 뭐라고 생각하겠어? 가장 가까운 우리가 먼저 권위를 세워 드리지 않으면 안 돼."
"아아……."
세나는 고뇌 어린 표정을 지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정말 너무 싫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결정했으면 가자."
바이스가 세나의 손목을 잡고 성큼성큼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오, 어서 와!"
제론은 두 사람을 정말 반갑게 맞아 주었다. 슬슬 혼자 일하는 것에 한계를 느끼던 시점이라서 그 반가움이 배가 되었다.
"왠지 반가운 느낌이 좀 다른 것 같지만 일단 그냥 넘어가죠."
바이스가 씨익 웃으며 말하자, 세나가 앞으로 나서서 최대한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전 언제든 팔 걷어붙이고 도와 드릴 준비가 되어 있어요. 얼마든지 부려 먹어 주세요."
제론은 그렇게 말하는 두 사람이 정말 고마웠다. 하지만 재회의 기쁨을 천천히 나누기에는 너무 시간이 없었다.
"오, 이게 여기 지도인가요?"
바이스가 눈을 빛내며 집무실 한쪽 벽을 가득 메운 커다란 지도를 향해 다가갔다.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바이스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리고 이내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이걸 누가 그린 겁니까? 이렇게 정교한 지도라니!"
바이스의 외침에 세나도 지도로 달려가 확인했다. 그리고 바이스와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은 지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정도로 놀라운 지도였다.
마치 하늘에 떠서 그림을 그린 듯했다. 그것도 말도 못하게 정교한 그림을 말이다. 머리카락 한 가닥으로 그린 듯 어떤 부분은 눈을 크게 뜨고 봐야 선이 보일 정도였다.
젤레 영지를 비롯해 옆에 위치한 산맥과 황무지, 그리고 황무지 한가운데 있는 유적까지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뿐 아니라 주변 영지까지 자세히 나온 정말 굉장한 지도였다.
"이런 지도를 판매할 리는 없고, 젤레 영지에서 보유하고 있었을 리는 더더욱 없고…… 설마 선배님, 아니, 영주님께서 직접 그리신 건가요?"
세나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제론을 바라보며 물었다.
제론은 두 사람의 너무나 격렬한 반응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원래 있던 지도라고 하기에는 너무 정교했다.
사실은 태블릿과 정보 수집 아티팩트인 마티를 이용해서 그린 지도였지만, 그걸 그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초고대 문명에 관한 것들은 혼자만 가지고 가야 할 비밀이었다.
"제법 정교하지?"
"그냥 정교한 정도가 아니에요! 전 이런 지도 처음 봐요!"
세나는 그저 호들갑을 떨 뿐이었지만 바이스는 깊은 눈빛으로 지도를 유심히 살폈다. 그는 제론이 말을 돌리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굳이 부담스러운 얘기를 계속할 생각은 없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감추고 싶은 부분이 있는 법이니까. 아무리 제론과 친하다고 해도 그의 모든 걸 속속들이 알 필요는 없었다.
고작 그런 걸로 서로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그건 확신했다.
"아무튼 그렇지 않아도 이걸 보면서 향후 영지를 어떻게 발전시킬지 계획을 세우고 있었어. 마침 잘됐네. 너희도 한번 생각해 봐."
제론의 말에 그제야 성문 옆에 붙어 있던 공고가 떠오른 바이스와 세나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선배님! 아니, 영주님!"
두 사람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제론은 대체 무슨 일로 이러는지 궁금해졌다.
"왜?"
"굳이 지금 영주성을 다시 지어야 합니까?"
"그것 말고도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요!"
"아아, 그것 때문에 그랬군?"
제론이 너무나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자, 바이스와 세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어쩌면 제론은 생각보다 훨씬 더 영지 경영에 재능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일단 영지에 돈을 좀 풀려고."
"영지에 돈을 푸는 건 길을 닦아서 상단을 이쪽으로 끌어들인 다음에 해도 됩니다."
"다른 상단을 끌어들이는 것보다는 상단을 새로 하나 만드는 게 더 빨라."
"하지만 그러려면 상단을 통해 팔 만한 물건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 영지에는 그런 게 없습니다."
"있다."
"예? 있다고요? 그게 뭡니까?"
바이스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이곳에 오기 전에 상당히 많은 조사를 했다. 앞으로 제론이 몸담게 될 젤레 영지가 어떤 곳이며 어떻게 다스려야 키울 수 있을지 고민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젤레 영지에서 딱히 뭔가를 내다 팔 만한 것은 없었다.
아니, 젤레 영지는 사실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영지를 유지하며 먹고 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지만, 뭔가 다른 일을 도모할 힘을 키울 장소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이스가 생각한 방법이 바로 영지전을 통한 주변 영지의 통합이었다.
영지전을 거는 것 자체가 복잡한 일이긴 하지만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몇 가지 계략을 쓰면 주변 영지가 알아서 덤비게 만들 수도 있었다.
한데 제론이 하는 말을 들어 보면 자신의 생각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상단을 만들어 장사를 하겠다니. 그래서 언제 발전하고 언제 슈린 공작가의 마수에서 벗어나 복수까지 마무리하겠는가.
바이스가 답답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자 제론이 빙긋 웃었다. 그의 마음이 아주 절절히 와 닿았다. 자신을 얼마나 생각해 주는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식량."
"예?"
"식량이요?"
바이스와 세나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식량이라니. 젤레 영지에서 무슨 수로 식량을 내다 판단 말인가. 내부의 소비를 채우기에도 빠듯한 실정인데 말이다.
"아, 세금 중 일부를 내다 파실 생각이십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 상단을 만든다는 건 낭비입니다."
그게 가능하다면 지금까지 역대 영주 중 아무도 그걸 시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차라리 상단 하나를 끌어들여 그들에게 파는 것이 훨씬 나았기 때문이다.
"영주성을 완성하면 그 근방의 황무지를 기름진 땅으로 바꿀 방법이 있다."
제론의 말에 바이스와 세나는 대꾸도 못하고 눈만 크게 떴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 황무지는 벌써 수백 년 동안 개간에 실패한 곳이다.
그곳의 개간이 가능했다면 대체 지금까지의 모든 영주가 왜 그 시도를 하지 않았겠는가. 물론 그 땅의 소유 문제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그 황무지는 젤레 영지를 비롯한 주변 영지에 일부씩 지분이 있었다. 그러던 것을 슈린 공작과 에어스트 백작이 유적 개발을 위해 싹 구입했다. 황무지였으니 당연히 헐값이었다.
한데 제론은 그 황무지를 옥토로 바꿀 방법이 있다고 한다. 그것도 영주성을 지으면 말이다. 이 말을 누가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선배님. 제 생각에 그건 절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영주님이라고 부르라고 한 게 자기면서. 아무튼 제 생각도 그래요. 그 땅은 개간이 불가능해요."
제론은 두 사람을 묘한 눈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개간이 왜 불가능한지 알아?"
"그야 무슨 짓을 해도 작물이 자라지 않으니까요. 그곳은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사막이나 다름없는 땅입니다."
"왜 아무 작물도 안 자라는 걸까?"
"지력이 없으면 작물이 자라지 않습니다."
너무 기본적인 것을 물으니 바이스는 점점 더 답답해졌다. 하지만 제론의 태도는 여전히 담담했다.
"반대로 지력이 너무 많으면 어떻게 될까?"
"예? 그, 그야……."
거기까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답은 어렵지 않게 나왔다.
"지력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겠습니까? 지력이 높은 땅에서 자라는 작물이 훨씬 풍성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한데 내 말은 지력이 그저 높은 정도가 아니라 지나치게 많은 경우를 말하는 거야."
"글쎄요……."
제론이 손가락 하나를 올리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래도 작물은 자라지 않아."
"정말입니까?"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렇게 작물이 안 자랄 정도로 지력이 높은 땅을 찾기가 쉽지 않아."
"그렇군요. 한데 그 말씀은……."
바이스는 등줄기에 소름이 오싹 돋는 느낌에 멍하니 제론을 바라봤다.
"그 땅이 바로 그런 곳이야. 지력이 너무 높아서 작물이 아예 자라지도 않는 땅 말이야."
"그게 정말입니까?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곳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가 더 중요하지."
"하면 영주성을 세우신다는 건……."
"그래. 영주성을 이용해 주변 지력을 흡수하는 거지."
"그게 가능합니까?"
"가능해. 그 덕분에 우리 영주성은 대륙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 될 거야."
제론이 의미심장하게 씨익 웃었다.
바이스는 그저 멍하니 제론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것은 세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왠지 자신이 찾아오지 않았어도 아무 문제가 없는 건 아닌가 하는 자괴감까지 살짝 들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나타났던 것보다 훨씬 빨리 사라져 버렸다.
그런 게 어디 있는가.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자신의 힘이 아무리 미약해도 돕지 않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방해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영주성의 설계도를 볼 수 있겠습니까?"
제론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그 때문에 널 기다리는 중이었어. 영주성을 네가 책임지고 만들어 봐. 아마 큰 도움이 될 거야."
제론은 그렇게 말하며 책상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위에 펼쳐진 종이 수십 장을 집어 바이스에게 내밀었다.
바이스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받아 한 장 한 장 소중히 살폈다. 그의 눈에 강렬한 빛이 맴돌았다. 설계도를 넘기는 손길이 점점 빨라졌다.
사락! 사락!
바이스는 설계도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이건 그냥 성의 설계도가 아니었다. 그저 그런 건축도면이 아니라 거대한 마법진이었다. 아니, 마법진의 향연이었다.
"이건…… 이건 아마 모든 마법사의 꿈일 겁니다."
모르는 마법도 종종 있었지만 대부분은 바이스도 익히 아는 마법이었다. 또한 몇 번쯤 구상하고 상상해 본 적이 있던 것이었다.
구조 자체가 거대한 마법진이 되고, 또 그 안에 작은 마법진을 무수히 깔아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많은 편의를 제공하는 성이었다.
만일 바이스가 이걸 완성시킬 수 있다면 마법 실력이 최소한 지금의 두 배 이상 늘어날 것이다.
"정말…… 정말 제가 이걸 맡아도 되겠습니까?"
"그러려고 기다렸다니까? 그러니 부탁하지."
바이스가 정중히 허리 숙여 인사했다.
"부탁이야 제가 드려야죠. 솔직히 저도 짐작하고 있습니다. 선배님, 아니, 영주님이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지. 아마 직접 지휘하시면 훨씬 빠르고 정확하게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바이스가 강렬하게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제게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제론이 머리를 긁적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게 아니야. 정말로 네가 적임자라고 판단했을 뿐이야. 난 나대로 또 할 일이 있고."
바이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이런 일로 대화를 이어 갈 필요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아무튼 최선을 다해서 정말 멋진 영주성을 만들고 말겠습니다. 그런데……."
바이스는 긴가민가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로 황무지에 지력이 넘치는 게 맞습니까?"
이 성은 설계대로 만들면 마력을 어마어마하게 먹는다. 그것도 꾸준히 공급해 줘야만 한다. 즉 그런 마력을 공급할 방법이 있어야 하는데, 만일 황무지에서 그 마력을 모두 공급하지 못하면 큰 차질을 빚게 된다.
"그건 내가 장담하지. 걱정하지 마."
제론이 이렇게 확신하는 건 모든 확인을 마쳤기 때문이었다. 유적 근방의 땅이 황무지로 변한 건 중앙 유적에서 뿜어내는 에너지가 너무 강했기 때문이었다.
고대 유적의 지하에 초고대 문명의 유적이 있을 확률이 높은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고대 유적은 초고대 문명의 유적에서 흘러나오는 에너지를 이용해 움직였다. 하지만 고대 문명에서도 초고대 문명의 위치를 잡아내는 건 불가능했다. 그저 어딘가에서 에너지가 흘러나온다는 것만 알아냈을 뿐이었다.
그 결과 생긴 것이 고대 유적이었다. 마법사든 아니면 귀족가의 가문이든 특별한 것은 반드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 자리 위에서 만들었다.
하지만 중앙 유적의 경우는 그 에너지가 너무 강해서 문제가 되었다. 원래는 이곳의 유적도 훨씬 더 중요한 기능이 있었지만 그게 망가져 버리면서 에너지를 소모하지 못하고 방출하게 된 것이다.
제론이 설계한 성은 고대 문명에서 흔히 쓰던 방식 중 하나였다. 거대한 마법진으로 에너지를 흡수해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또 모아 뒀다가 필요한 일이 있을 때 쓰는 방식이었다.
그런 설계도를 봤으니 마법사인 바이스가 느끼는 감정이 어떻겠는가.
'무조건 지켜야 돼.'
제론에게 큰 비밀이 있다는 건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설계도를 뚝딱 만들어 내놓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건 누가 봐도 황무지 중심에 있는 유적을 염두에 둔 맞춤 도면이었다.
직접 만든 것이 분명했다. 그뿐인가. 포로스라는 신비의 물질 역시 제론이 만들었다. 그걸로 얼마나 많은 돈을 벌고 있는가.
그런 걸 보면 분명히 제론에게 뭔가 비밀이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이스는 일단 모른 척했다. 또한 그 비밀을 무조건 지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영주님, 저는요? 저는 뭐 할 일이 없을까요?"
세나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다. 그런 세나를 보는 제론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제론이 씨익 웃었다. 마치 토끼를 눈앞에 둔 맹수 같은 표정이었다.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만 같았다.
세나는 긴장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드디어 원하던 순간이 오는 것인가 하는 기대감이 조금씩 피어났다.
"세나에게 꼭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지."
세나는 몸을 파르르 떨며 제론의 말이 이어지기만을 기다렸다.
"따라와."
세나가 그 표정 그대로 제론을 따라갔다. 바이스는 그런 세나를 향해 힘내라는 듯 주먹을 꽉 쥐며 파이팅 포즈를 취해 주었다.
세나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맺혔다.
"이, 이게 뭔가요?"
"뭐긴. 보는 대로지."
세나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제론이 세나를 데려간 곳은 영주성 내에서 가장 큰 창고였다. 원래는 다른 목적으로 지은 곳이었지만 결국은 식량 창고로 쓰였고, 최근에는 아예 쓴 적이 없어 거의 텅텅 비다시피 한 곳이었다.
영지의 관리가 얼마나 안 되었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물론 제론 입장에서는 그래서 더 좋았지만 말이다.
"설마 이 기간트 다 선배, 아니, 영주님 건가요?"
"그래. 내가 뭘 부탁하려는지도 이제 잘 알겠지?"
세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흠칫 놀라 뒤로 한 발 물러났다.
"서, 설마 이 기간트를 몽땅 고치라는 건가요? 저 혼자?"
제론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제 혼자서도 이 정도는 충분히 하잖아. 안 그래?"
제론은 붉은 실바를 군부에 남겨 두고 왔다. 그렇기에 세나가 할 일은 사실 없었다. 세나도 그걸 알기에 뭔가 다른 부분에서 도움을 주고자 나름 궁리를 해 왔다.
한데 지금 보니 그런 궁리를 할 필요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냥 얼핏 보기에도 열다섯 기나 되는 거 같은데, 맞죠?"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교적 상태가 안 좋은 걸로 골랐으니 아마 세나가 놀랄 만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이 정도는 해 줘야 했다.
"다행히 기종은 전부 실바네요."
세나는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어차피 돕겠다고 여기까지 왔다. 방금 전 기대했던 육체의 향연이 아니라 조금 실망하긴 했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이렇게 선배님을 도울 수 있으니까.'
세나는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좋아요! 맡겨 주세요! 제가 아주 새것처럼 만들어 놓을 테니까요!"
세나는 다시 한 번 심호흡을 하고서는 널브러진 기간트를 쭉 둘러봤다. 그리고 제론을 바라보며 물었다.
"제가 가진 모든 실력을 다 발휘해서 고치면 되는 거죠?"
제론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안 돼. 이건 그저 보통 실바와 비슷하게 만들어야 돼."
"마나 코어는 멀쩡한 거겠죠?"
"물론이지."
마나 코어가 망가지면 아무리 세나라도 수리가 불가능했다. 그걸 수리할 수 있는 사람은 제론이 유일했다. 그런 경우 차라리 내부의 진흙을 긁어내 포로스를 만드는 편이 훨씬 나았다.
"알았어요. 맡겨 주세요."
세나는 의욕을 불태우며 기간트에 달라붙었다. 장비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어느새 제론이 다 준비해 뒀으니까.
제론은 의욕에 불타는 세나를 보며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수리해야 할 기간트가 200기 넘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떠올리니 미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도 할 일이 있지.'
제론의 표정이 결연해졌다. 이곳을 지키려면, 그리고 자신을 믿고 온몸을 내던진 세나와 바이스를 지키려면 이대로 머물러선 안 된다. 훨씬 더 강해져야만 한다.
'최대한 빨리 소드 마스터가 된다.'
현시대의 기준으로 하면 제론은 이미 소드 마스터였다. 그것도 상당히 높은 수준의 마스터였다.
아마 대륙에 세 명 있다는 마스터와 비교해도 결코 꿀리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압도할지도 모른다. 제론은 그 경지에 오른 뒤에도 몇 번이나 벽을 넘었으니까.
벽을 넘을 때마다 만일 황제 검술이나 마나 호흡을 몰랐다면 결코 쉽지 않았을 거라고 느꼈다.
다른 소드 마스터가 어떤 천재성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결코 그 벽을 간단히 넘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제론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하지만 그 벽은 너무나 높고 두터워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을 다 합해도 넘기 어려울 거라는 점을 말이다.
'일단 테오스부터.'
제론의 표정에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이 드러났다. 그의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하지만 당장 유적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일단 지금은 영지 정비가 먼저였다. 관리부터 채우고 영지가 어느 정도는 돌아가게 만들어 놓아야만 했다.
'그러고 보니 관리들도 처리해야 하는군.'
재산을 압류하고 감옥에 가둔 관리를 처리해야 한다. 사실 원래는 그런 식으로 해선 안 된다. 엄연히 국왕이 임명한 관리이기 때문이었다.
제론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감옥은 어둡고 축축했다. 썩은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런 곳에서 오래 지내는 건 육체적 정신적으로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제론은 일단 간수를 내보내고 혼자서 내려갔다. 감옥에 갇힌 죄인은 딱 열한 명뿐이었다. 다른 죄수는 몽땅 놔주고 관리만 잡아넣은 것이다.
물론 아무 죄수나 다 풀어 주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제론은 나름대로 철저히 조사했다. 그리고 그 죄수가 모두 관리의 모함으로 인해 갇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당연히 그 일에 가담한 관계자를 모두 처벌했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처벌로 억울하게 갇힌 죄인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 줬다.
그리고 영주의 명으로 보상을 해서 마음을 달랬다.
그런 일이 있으니 영지민의 표정이 밝을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지금까지 이렇게까지 해 준 영주는 처음이었다.
제론은 감옥 깊은 곳으로 들어가 철창 안에 옹기종기 앉은 관리들을 슥 훑어봤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딱히 체벌을 가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 버렸다. 이미 재산이 몽땅 압류되었다는 사실을 들었다. 힘이 날 리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자신은 국왕이 직접 임명한 관리였다. 영주가 사사로이 처벌을 할 수 없었다.
재산도 분명히 다시 돌려받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확신했다. 그랬기에 버틸 수 있었다. 이 지독한 지하 감옥 생활을 말이다.
"제법 살 만한가 보군."
제론의 말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관리들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들의 눈에 광기가 맴돌았다. 하지만 발작을 하지는 않았다.
"영주님. 이건 법을 무시하시는 처사입니다."
"법을 무시해? 내가?"
"그렇습니다. 저희는 국왕 폐하께서 직접……."
"아아,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는 나도 다 알아. 너희가 그런대로 버티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 생각을 했지. 그래. 확실히 희망 하나로 버틸 만해."
제론은 거기까지 말하고 관리들을 다시 한 번 슥 둘러봤다. 그리고 씨익 웃었다.
그 웃음이 관리 입장에서는 어찌나 불길해 보였는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제론이 천천히 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냈다. 그리고 철창 앞에 쫙 펼쳤다. 가까이 다가오면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말이다.
"다들 글은 읽을 줄 알지?"
제론의 말에 불길함을 느낀 관리들이 앞다퉈 앞으로 기어 나왔다. 그리고 철창 앞에 펼쳐진 서류를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이, 이럴 수가……!"
"마, 말도 안 돼……!"
"어, 어찌 폐하께서……!"
그것은 허가서였다. 젤레 영지의 관리에 관한 모든 처벌 권한을 영주인 제론 폰 에어스트에게 허락한다는 문서였다.
제론은 이 허가서 한 장을 위해 포상을 두 개나 포기했다. 물론 전혀 아깝지 않았다.
"폐하 입장에서 너희는 그저 수천 명이나 되는 관리 중 한 명일뿐이야. 누가 가져가든 아쉬울 것 없는. 능력이 특별한 것도 아니잖아?"
그렇게 말한 제론은 허가서를 다시 품에 넣고 돌아섰다.
"이제 좀 더 절망하며 살아 봐. 지은 죄에 걸맞지 않게 희망을 품으며 살지 말고."
제론은 냉정하게 감옥에서 나가 버렸다. 그 뒤로 절망에 빠진 열한 명의 죄인이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 소리를 귀담아 들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론은 관리에 관한 처리 사실을 확실히 공표했다. 영지민 사이에 남은 불안감을 완전히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그 뒤에 바로 새 관리를 모집했다. 물론 뛰어난 인재가 나타날 확률은 적었다. 하지만 인재가 없으면 숫자로 메우면 된다.
제론이 현재 가진 가장 큰 무기는 아직 돈이 많이 남았다는 것과 그 돈을 아낄 생각이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젤레 영지가 차츰 자리를 잡아 갔다. 무지막지한 자금을 먹어 치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