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화 (28/217)

Chapter 4 전후 처리

대승이었다. 그냥 대승이라고 표현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압도적인 승리였다. 또한 어마어마한 전리품까지 얻은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역시 붉은 학살자였다. 또한 그와 함께 함정을 파서 미리 전쟁을 준비한 바이스와 세나였다.

바이스는 예전과 달리 그 사실을 감추지 않았다. 자신이 새로운 마법진을 개발했다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알리고 공적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당당히 나섰다.

적 기간트 700기를 박살 냈으며, 150기를 상처 하나 없이 포획했다.

적은 이번 작전에 무려 850기의 기간트를 출격시켰다. 한데 그걸 모두 잃었으니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것이다.

바이스의 공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바이스는 미리 가문의 힘을 움직여 다른 전선의 정보를 확인토록 했다. 그래서 적의 빈틈을 찾아 공략했다.

그 전투에서의 성과도 엄청났다.

결과적으로 벨룸 왕국은 패배의 수렁에 빠져들었다. 그 모든 것이 이번 전투로 인해서였다.

결국 종전 협상을 위한 사절단이 파견되었다. 그리고 상당히 불평등한 협상이 시작되었다.

벨룸 왕국은 체스터 공국의 힘까지 빌렸다. 체스터 공국은 결국 한발 뒤로 빠지긴 했지만 벨룸 왕국이 무릎을 꿇은 이상, 그냥 넘어갈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레늄 왕국도 체스터 공국을 심하게 압박하지는 않았다. 긴 전쟁으로 인해 레늄 왕국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제부터는 내실을 다져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왕국 자체의 존망이 흔들릴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전쟁을 하는 동안 슈린 공작을 비롯한 공작파 귀족들은 착실히 힘을 키워 왔다.

전쟁에 소홀했기에 전리품을 얻기는 어려웠지만, 충실히 다진 내실로 인해 오히려 힘이 훨씬 커졌다.

아무튼 그렇게 전쟁은 끝으로 치닫고 있었다.

☆ ☆ ☆

"정말 놀랍군요."

"전 더 놀랐습니다. 직접 눈앞에서 그 광경을 봤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안슈트의 눈빛이 몽롱해졌다. 생각만 해도 황홀한 광경이었다. 붉은 실바가 하늘을 나는 광경을 몇 번이나 봤는지 모른다.

클레는 그런 안슈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안슈트 경의 말씀을 듣다 보니 묘하게 익숙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렇습니까?"

"예. 꼭 언젠가 한 번 들었던 말 같아요."

거기까지 말한 클레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는지 떠오른 탓이었다.

"꼭 예전 제론이라는 사람이 저녁을 먹으며 떨었던 허풍과 같네요."

"저도 그가 떠올랐습니다."

"그럼 그가 붉은 학살자일까요?"

"반반입니다."

안슈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 역시 전투에 함께 참여했다면 그런 광경을 수도 없이 보지 않았겠습니까? 제가 그랬던 것처럼."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네요."

클레는 안슈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전 안슈트 경의 감을 믿어요. 경의 감은 어떤가요?"

안슈트는 머뭇거렸다. 최근 자신의 감을 믿지 못하게 되어서 함부로 단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왠지 자신의 감이 맞을 것 같았다.

"전 제론이라고 생각합니다."

클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하면 그를 영입하겠어요."

안슈트의 눈이 커다래졌다. 어찌 고작 자신의 감만 믿고 그런 일을 결정할 수 있단 말인가.

"확실치 않습니다! 만일 그러다가 진짜 붉은 학살자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클레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어요. 제가 지켜본 바에 따르면 제론이라는 사람, 꼭 붉은 학살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충분히 영입 가치가 있어요."

"하지만 그는……."

제론에 대해 나름 충실히 조사를 했다. 하지만 제론을 끌어안기에는 위험 부담이 너무 심했다. 군부에 들어오기 전까지 슈린 공작가가 노리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디아만트 후작가의 정보망을 통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군부에 들어간 이후에도 음모에 개입시켜 제론을 없애려 했다. 물론 그 음모가 어떤 건지는 확인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런 제론을 영입한다면 슈린 공작가의 견제를 피할 수 없었다. 지금 상황에 그건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어쨌든 전 그렇게 결정을 내렸어요. 그러니 그에게 영입 의사를 전해 주세요."

안슈트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제론은 느긋하게 기지를 거닐었다. 제대 신청도 했으니 이젠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사실 제론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전쟁을 승리로 이끌지 못했을 것이다.

사령관은 최대한 제론의 편의를 봐주었다. 붉은 학살자에 관한 정보는 제론이 제대한 다음에도 일정 기간 보호해 주기로 했다.

하지만 일단 제론이 제대하고 나면 어떻게든 정보가 샐 수밖에 없었다. 사령관 혼자의 힘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제론은 그 모든 걸 예상하면서도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헤쳐 나갈 자신이 있었다.

'일단 체른산 유적부터 해결해야지.'

지금 제론이 가장 신경 쓰고 있는 것은 바로 체른산 유적이었다.

그곳에는 제론이 그동안 쌓아 둔 전리품이 잔뜩 있었다. 처음 유적을 이용한 함정으로 전멸시킨 200기의 기간트가 고스란히 유적 창고에 남아 있었다.

워낙 강렬한 충격을 받았는지라 기간트와 연결된 아공간이 다 끊어져 버려 그 부피가 어마어마했다.

제론은 그걸 그냥 내버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개중에는 쓸모없어진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 조금만 손보면 멀쩡하게 쓸 수 있는 것들이었다.

또한 그동안 전투를 벌이며 몰래 수거할 수 있는 전리품을 최대한 모아 뒀다. 그 모든 것이 다 창고에 들어 있었다. 창고는 그걸 다 넣고도 자리가 남을 정도로 거대했다.

지금 당장 체른산 유적에 락을 걸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락은 제대한 뒤 천천히 시기를 봐서 거는 편이 낫다.

어쩌면 마법사가 떼거리로 몰려와 연구를 한답시고 덤빌 수도 있었다. 그들을 모두 죽일 수는 없으니 제대로 락을 걸어야만 했다.

아마 그렇게 되면 유적에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제론과 2왕자가 유일할 것이다.

2왕자는 유적의 가디언이 되었으니 출입이 자유로운 게 당연했다. 하지만 2왕자와 함께 누군가가 들어가려 한다면 그는 유적으로부터 출입을 거절당할 것이다.

제론은 유적의 방어 시스템을 확실히 통제해 그런 식으로 만들 작정이었다. 그게 가장 안전한 방식이었다. 제론에게나 유적에 접근하려는 다른 사람에게나.

현재 체른산 방어군은 지난 대승으로 인해 여기저기서 흥청망청 난리였다. 낮부터 곳곳에서 술판이 벌어졌고, 이번 전쟁의 최고 공로자 중 하나로 떠오른 바이스에 관한 얘기가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가장 많은 화제의 중심이 되는 것은 단연 붉은 학살자였다.

그 분위기를 통해 정보 차단이 더 이상 쉽지 않다는 걸 제론도 슬슬 깨닫고 있었다.

그렇게 제론이 기지를 돌아보며 유적에 있는 기간트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안슈트가 다가왔다.

제론은 안슈트가 어느 정도 다가왔을 때부터 기척을 느꼈기에 걸음을 멈추고 그를 기다려 주었다. 자신에게 할 말이 있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안슈트는 뜸 들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용건을 꺼냈다.

"영입 제안을 드리러 왔습니다."

"영입?"

"그렇습니다. 우리 디아만트 후작가의 라이더로 와 주시겠습니까?"

제론이 아무런 대답 없이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자, 안슈트는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일단 매월 10,000골드를 지급하겠습니다. 또한 발굴형 기간트도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발굴형 기간트? 그건 좀 끌리는군요."

제론은 그렇게 말했지만 사실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돈이야 지금도 얼마든지 있다. 물론 영지를 개발하다 보면 모자랄 수도 있지만, 그걸 충분히 보충할 방법이 있었다.

아직 팔찌의 아공간에 처리하지 못한 테페룸이 잔뜩 남아 있었다. 또한 테페룸 동전도 있다. 그걸 경매로 내놓으면 예전만큼은 못해도 상당한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도 많은 방법이 있었다. 초고대 문명의 지식을 이용해 돈을 버는 것도 가능했다. 초고대 문명의 기술이 들어간 물건을 만들 수만 있다면 떼돈을 버는 것도 문제가 아니리라.

그리고 기간트는 더더욱 흥미가 떨어졌다. 제론에게는 테오스가 있다. 아직 제대로 움직여 보지는 못했지만 그에 관한 지식은 충분히 섭렵했다.

테오스는 현존하는 그 어떤 기간트보다 뛰어난 기간트였다. 또한 라이더의 실력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훨씬 더 강해지는 궁극의 기간트이기도 했다.

"그럼 와 주시겠습니까?"

제론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거절합니다."

"예? 하지만 방금 끌린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보다 훨씬 좋은 조건으로 영입하려는 분들도 계시는데 굳이 응할 이유를 못 느끼겠군요."

제론의 말에 안슈트가 당황했다. 대체 또 누가 제론에게 손을 뻗었단 말인가. 더구나 매월 10,000골드라는 거금을 지급한다는 조건은 아무나 내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0,000골드면 보통 사람은 평생 만져 보지도 못할 정도로 큰돈이었다. 그걸 매월 지급하는 건 아무리 부유한 가문이라 하더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만일 제론이 붉은 학살자라는 확신이 있다면 그 정도 투자쯤이야 과감히 할 수 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보다 더한 투자를 할 만한 가문을 아무리 떠올려도 찾을 수 없었다.

"정말 다른 가문에서 영입 제안을 했습니까?"

안슈트의 물음에 대한 답은 뒤에서 들려왔다.

"사실이라네, 안슈트 경."

뒤돌아본 안슈트는 침음을 삼켰다.

"위버 백작님……."

"오랜만일세. 3년 전 결투 이후 처음인가? 같은 곳에 머물면서도 이렇게 만나기 어려울 줄은 몰랐군."

위버 백작은 그렇게 말하며 빙긋 웃었다.

"디아만트 후작가에 진 빚을 이런 식으로라도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떨리는군."

안슈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위버 백작가와 디아만트 후작가는 같은 국왕파이긴 했지만 서로 앙금이 많았다.

3년 전 광산 채굴권 하나를 놓고 결투까지 벌인 사건으로 인해 그 앙금은 더더욱 깊어졌다.

디아만트 후작가에 비하면 상당히 모자랐지만 위버 백작가도 돈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당연히 방금 안슈트가 제안한 것보다 훨씬 좋은 조건을 내걸 수 있었다.

위버 백작은 제론을 바라보며 말했다.

"조건을 수정하겠네. 매월 3만 골드를 지급하지. 또한 발굴형 기간트 중 제법 성능이 뛰어난 아우틈을 주겠네. 거기에 광산을 두 개나 가진 영지도 함께 주지. 어떤가? 이 정도면 더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너무나 파격적인 대우에 안슈트의 입이 벌어졌다. 지금 위버 백작이 말한 조건은 아무리 디아만트 후작가라 하더라도 섣불리 내밀 수 없을 정도로 과했다.

'뭔가 확신이 있는 건가?'

안슈트의 눈이 강하게 빛났다. 그에게 주어진 권한으로 할 수 있는 선을 이미 넘었다. 하지만 그의 감이 맹렬히 외치고 있었다. 여기서 질러야 한다고.

"우리 디아만트 후작가에서도 같은 조건을 제시하겠습니다. 거기에 덧붙여 영지 지원금 50만 골드를 일시에 지급하겠습니다."

안슈트의 말에 위버 백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슈트가 이런 식으로 지를 거라고는 전혀 예상도 못했다. 안슈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또한 그 정도 일을 결정할 자격이 있을 리도 없었다.

"농담이 과하군. 정말로 그 말에 책임을 질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제가 책임질 수 없는 말을 할 것 같습니까?"

위버 백작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씹어 뱉듯 말했다.

"거기에 영지 지원금 50만 골드를 더 얹지. 총 100만 골드를 지원해 주겠네."

위버 백작은 그렇게 말하고 제론을 바라봤다. 어서 결정을 내리라는 압박이었다.

제론은 두 사람이 벌이는 신경전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하지만 대층 이쯤에서 결론이 난 듯했다. 안슈트는 더 지를 엄두가 안 나는 모양이었다.

"절 그렇게 높게 평가해 주시는 건 감사한 일이지만, 제안은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제론의 말에 위버 백작이 어금니가 부서져라 이를 갈았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자네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닌가? 이런 후한 조건으로 자넬 영입할 곳이 또 있을 것 같은가?"

제론이 빙긋 웃었다.

"전 어디에도 갈 생각 없습니다. 제 영지를 두고 어딜 가겠습니까? 그리고 저도 백작입니다. 백작이 백작 아래로 들어간다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위버 백작은 마땅히 대답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영지가 있다면 할 말이 없다. 더구나 제론의 말대로 백작이 백작을 휘하에 두는 건 모양새가 너무나 이상하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나기에는 뭔가 억울했다.

"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자네에게는 영지 따위가 없을 텐데? 아, 설마 그 황무지를 말하는 건가? 영지민이 단 한 명도 없고 폐허가 된 유적만 덩그러니 있는 곳 말일세."

제론의 웃음이 차가워졌다.

"조사를 아직 제대로 다 안 하셨군요. 제 영지는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저도 백작이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말투에 좀 더 신경 써 주시죠. 아니면 명예를 지키기 위해 부득이하게 결투를 신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냉기가 풀풀 날리는 제론의 말에 위버 백작은 흠칫 놀랐다. 심장을 옥죄는 살기에 자신도 모르게 몸이 부르르 떨렸고, 공포가 깊은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얼마 전 있었던 제론의 결투를 떠올린 위버 백작은 굳은 표정으로 한발 물러났다.

그때 제론은 혼자서 열 명의 기사를 처참하게 죽여 버렸다. 위버 백작도 호위 기사가 있었다. 하지만 슬라인 백작이 데려온 호위 기사와는 많이 차이가 났다.

슬라인 백작의 호위 기사는 강하기로 유명했다. 그런 기사 열을 혼자서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이겼으니 제론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었다.

지금 당장은 절대 결투로 이길 수 없었다. 슬라인 백작처럼 결투에 부당한 사항을 내걸지 않으면 괜찮지만 그래도 호위 기사를 잃을 게 뻔한 일을 벌이기 싫었다.

"내가 실수를 했군. 미안하게 되었소."

위버 백작은 바로 사과를 하고 물러났다. 하지만 그냥 깔끔히 상황을 여기서 끝낼 생각은 없었다. 나중에 어떤 방식으로든 분풀이를 할 생각이었다.

그조차 못 한다면 사교계의 웃음거리가 되리라.

"재고하실 수는 없습니까?"

위버 백작이 물러나자, 안슈트가 나섰다. 제론이 그런 안슈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당신보다 훨씬 좋은 조건도 거절했는데, 굳이 그쪽의 조건을 고려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안슈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클레에게 실망을 안겨 줄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제론은 그런 안슈트를 한 번 힐끗 쳐다보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 ☆ ☆

디아만트 후작가와 위버 백작가가 제론을 영입하려 했다는 소문이 기지 내에 파다하게 돌았다.

당시 두 사람이 제론에게 접근하던 광경을 지켜본 사람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만으로 소문이 이렇게 퍼졌다고는 보기 힘들었다.

이 상황은 제론이 만들어 낸 것이었다. 바이스와 세나까지 동원해서 소문을 퍼트렸다.

소문이 퍼지자 당장 다른 귀족이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은 눈에 불을 켜고 제론을 찾으려 했다.

사실 기지에 들어온 귀족 모두가 돌아갔어야 하지만, 예상 밖의 전투가 벌어지는 바람에 남아 있을 수 있는 명분을 얻었다.

전리품의 분배 때문에 전투에 가문의 기사를 내보낸 귀족의 경우 정당한 몫을 얻을 때까지 남을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그리고 그 기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제론은 그들이 쫓아다니는 걸 대충 피하면서 조금씩 접근을 허용했다. 한 번이라도 제론과 접한 귀족은 상당히 혼란스러워했다.

제론은 적당히 자신의 능력을 자랑해 몸값을 올렸다. 그러고 상당히 거들먹거렸다. 마치 자신이 붉은 학살자이니 알아서 대접하라는 듯한 태도를 아낌없이 내보였다.

그러면서도 기간트에 타 보라거나 하는 얘기만 나오면 교묘하게 말을 돌렸다.

당연히 그것은 제론의 기만책이었다. 제론의 그런 태도를 본 사람은 대부분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제론의 사정과 상황을 알지만 붉은 학살자라는 이미지와 너무 맞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제론이 붉은 학살자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붉은 학살자가 아닌, 그저 검술이 뛰어날 뿐인 귀족은 그들 입장에서 영입하기가 상당히 껄끄러운 사람일 뿐이었다.

제론을 찾는 귀족의 수가 차츰차츰 줄어들었다.

"왔군. 거기 앉게."

제론은 사령관이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이제 내일이면 군부를 떠난다. 그전에 반드시 마무리할 것이 있었다.

"부서진 기간트는 5천 골드, 멀쩡한 기간트는 10,000골드로 책정했네. 이의 있나?"

"없습니다."

사실 지나칠 정도로 헐값이었지만 대부분 받아들였다. 이걸로 조금이라도 이득을 남겨야 군부가 전비를 보충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동안 많이도 잡았군. 자네의 공에 대한 포상금은 모두 265만 골드일세."

"그럭저럭 괜찮군요."

사령관은 제론의 말에 혀를 내둘렀다. 265만 골드나 되는 돈을 받게 되었는데도 저렇게 담담한 걸 보면 새삼 얼마나 대단한지 되새길 수 있었다.

그러니 붉은 학살자라는 별명을 달고 종횡무진 전장을 누비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이것이 국왕 폐하로부터 내려온 임명장일세. 이것이 명령서고."

제론은 두 장의 서류를 받았다.

하나는 젤레 영지의 영주로 제론을 임명한다는 문서였고, 다른 하나는 제론이 젤레 영지에 부임한 해를 포함해 10년 동안 세금을 면제한다는 명령서였다.

둘 모두 제론이 혁혁한 공을 세웠을 때, 받은 포상이었다. 사실 조금 더 힘을 썼으면 승작도 가능했다. 제론은 그 정도로 이번 전쟁에 굉장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제론이 포기했다. 승작 대신 본래 5년이던 세금 면제 기간을 10년으로 늘렸다.

이는 젤레 영지에만 국한된 것이었다. 향후 제론이 영지전으로 주변 영지를 병합하거나 혹은 돈으로 다른 영지를 산 경우, 그 영지에 관한 세금은 반드시 내야만 했다.

"알다시피 이제 전쟁이 끝난 거나 다름없네."

사령관은 그렇게 말하고는 제론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제론의 표정이나 눈빛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물처럼 고요했다.

그 고요한 수면에 돌이라도 던지고 싶은 것인지 사령관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자네에 관한 자세한 사항을 정리해서 국왕 폐하께 올리기로 결정됐네."

아주 중요한 말이었지만 제론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하기만 했다.

"결정한 게 아니라 됐다고 하시는 걸 보면 상부의 압력이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군요."

폐부를 찌르듯 정확한 말에 사령관이 씁쓸하게 웃었다. 압력이 너무 심했다. 그동안이야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정보를 차단할 수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그게 불가능했다.

"폐하께 계속 감추는 건 반역의 의도가 숨은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는 마당이니 우리도 어쩔 수가 없었네."

"괜찮습니다. 익히 예상했던 일이니까요. 하지만 이왕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편의를 좀 봐주십시오."

"편의? 뭔가? 뭐든 말만 하게. 다 들어주지."

"제대일을 앞당겨 주십시오. 오늘로."

"오늘?"

사령관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자신이 충분히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었다. 더구나 제론의 제대 신청서는 이미 총사령부로 들어갔다.

인가가 떨어지면 그때부터는 오로지 사령관의 재량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쯤 처리됐겠지?'

아직 모르니 일단 확인하고, 처리가 안 되었으면 서두르라고 재촉하면 그만이다. 얼른 처리하면 누가 태클을 걸 수 있겠는가.

"좋네. 자네는 지금부로 제대했네. 물품을 챙겨 나가도 좋네."

제론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군례를 취했다. 아마 사령관에게 취하는 마지막 군례가 될 것이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사령관도 일어나 최대한 정중하게 마주 군례를 취하며 대답했다.

"오히려 내가 고마웠네. 아, 이제 제대를 했으니 백작님이 되신 건가? 하하하."

두 사람의 시선이 뜨겁게 얽혔다. 함께 죽음을 넘나든 전우만이 공유할 수 있는 눈빛이었다. 둘은 그렇게 한동안 가슴에 주먹을 얹은 채 들끓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인사가 너무 길었군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제론은 그 말을 남기고 사령관실에서 나갔다.

사령관은 제론이 밖으로 나갔는데도 한참이나 가슴에 얹은 주먹을 내리지 못했다. 아마 저런 라이더를 휘하에 두고 지휘할 일은 다신 없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아쉬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뿌듯했다.

"예? 지금 가신다고요?"

세나와 바이스는 느닷없는 제론의 말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왜, 왜요?"

"내 정보가 새기 시작했거든. 하루라도 빨리 피신해야 돼."

"하지만 정보가 새기 시작했다면 여길 빨리 나가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내 영지에 있는 편이 무슨 일이 있든 대처하기가 훨씬 편해."

세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반박할 말이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반박을 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젤레 영지로 가는 겁니까?"

바이스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군에 있는 3년 동안 누구보다 많은 성장을 이뤘다. 일신의 마법 실력도 엄청나게 키웠고, 또 재물도 어마어마하게 모았다.

모든 것이 제론 덕이었다. 이제부터 그 보답을 할 차례가 되었다.

"저도 곧 제대하니 그리로 찾아가겠습니다."

"저도요!"

제론이 얼른 대답을 하지 않자, 세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전 제대하면 바로 가문으로 끌려가서 강제로 결혼하게 될 거예요. 그 재수 없는 놈 하고요! 선배님은 정말 절 그렇게 되게 내버려 두실 거예요?"

"3년이나 지났는데, 그놈도 결혼하지 않았을까?"

"그놈도 아카데미 출신이라고요! 졸업 후에 군부에서 3년 동안 굴러야 해요!"

"그렇군. 그럼 그놈은 이미 군부에서 나갔겠군."

"제대하자마자 또 매파를 보낸 모양입니다."

"그놈도 정말 어지간하네."

"그만큼 매력적이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바이스가 그렇게 말하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자, 제론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뭔가 딴 꿍꿍이가 있겠지."

"예? 딴 꿍꿍이요?"

"벨루스 백작가와 손을 잡으면 할 수 있는 일이 몇 가지 있잖아."

"에휴. 선배님, 그래도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바이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제론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슈린 공작가가 벨루스 백작가와 손을 잡으려는 이유는 제법 많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말을 꼭 그렇게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바이스는 슬그머니 세나의 눈치를 살폈다. 한데 의외로 세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어쨌든 제대한 다음 바로 젤레 영지로 갈게요. 괜찮죠?"

제론은 특별히 거절할 명분도 이유도 찾지 못했다. 그저 세나가 조금 걱정될 뿐이었다.

제론의 눈빛을 느꼈는지 세나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걱정하실 거 없어요. 저도 나름대로 충분히 준비를 하고 갈 테니까요. 다만……."

세나가 걱정하는 건 벨루스 백작이 진짜 막무가내로 나올 경우였다. 여차하면 제론에게 영지전을 걸 수도 있었다.

딸이 걸려 있으니 명분도 훌륭하지 않은가.

제론이 세나의 머리를 헝클며 빙긋 웃었다.

"너야말로 걱정하지 마라. 영지전쯤이야 얼마든지 버틸 수 있으니까. 내 저력을 아직도 모르나?"

"아뇨. 알죠. 너무나 잘 알죠."

세나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에 어린 걱정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제론도 더 이상 그녀에게 뭐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스스로 극복할 일이다. 괜히 참견해 봐야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무튼 난 이제 가 볼 테니, 너희도 슬슬 준비를 해 둬라."

"예. 걱정 마십시오. 돈 잔뜩 들고 갈 테니까 환영 준비나 해 두시죠. 하하하하."

바이스의 자신만만한 말에 제론이 빙긋 웃어 주었다.

제론은 두 사람에게 손을 한 번 가볍게 흔들어 준 뒤 밖으로 나갔다. 이별은 길어 봐야 좋을 게 없다. 어차피 조만간 다시 만날 테니까.

제론은 은밀히 움직여 인적이 없는 장소로 향했다. 젤레 영지는 중앙 유적을 둘러싼 황무지 바로 옆에 위치한다. 곧장 유적으로 이동하면 아주 빠르고 쉽게 이동이 가능했다.

만일 텔레포트 게이트를 이용한다면 자신의 행적이 그대로 드러날 것이다. 제론은 인적이 없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즉시 중앙 유적으로 이동했다.

사실 제론은 수도로 가서 승전 퍼레이드에 참여하고 승전 파티에도 참석해 자리를 빛내야 한다. 하지만 제론은 그 모든 걸 거절했다.

그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제론은 중앙 유적 로비를 한 번 둘러봤다. 앞으로 이곳에서 주로 생활할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수련에 돌입할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을 무한정 쏟기는 어렵겠지만."

영지를 다스리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리해야 할 서류도 엄청나게 많다. 그 모든 걸 하면서 유적의 수련까지 병행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제론은 희망에 불탔다. 아무리 그래도 아카데미에 있거나 군대에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까 말이다.

로비에서 위로 슉 올라간 제론은 훨씬 더 심하게 파헤쳐진 유적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자명했다.

"포로스의 비밀이 엄청나게 탐났던 모양이군."

포로스에 대해서는 바이스 외에는 말한 적이 없지만 바이스도 가문의 힘을 빌리기 위해 그 비밀을 조금이나마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바이스가 알아온 정보에 따르면 슈린 공작가가 발칵 뒤집혔다고 한다. 유적의 유물을 다 모아 봐야 포로스의 비밀 하나보다 못하다. 포로스의 존재는 마법진의 역사를 새로 쓰게 만들 정도로 대단하니까 말이다.

제론은 각오를 다졌다. 아마 조만간 슈린 공작가가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 포로스를 만드는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놈들이었으니까.

"일단 힘을 키운다."

당분간은 말레피 후작가가 막아 줄 것이다. 그들로서도 포로스의 제조법이 슈린 공작가로 넘어가는 상황이 달가울 리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슈린 공작가의 압박이 한계를 넘어서면 어찌 될지 모른다. 또 말레피 후작가도 완전히 믿어선 안 된다. 바이스는 믿어도 말레피 후작가는 믿지 않는다.

제론은 그렇게 마음을 다지며 유적에서 나갔다. 유적에는 남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이미 파헤칠 대로 파헤치고 더 이상 나올 게 없다는 판단을 열 번이 넘게 한 뒤에 모두 철수한 것이다.

"여길 제대로 꾸며야겠군."

이 유적을 개조해 영주성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큰 공사가 되겠지만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제론은 위풍당당하게 젤레 영지를 향해 걸어갔다. 가는 내내 끝없이 펼쳐진 황무지가 더 이상 황무지로 보이지 않았다. 조만간 이곳은 황금빛 물결로 가득 찰 것이다.

그렇게 제론은 변방의 작은 영지, 젤레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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