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7/217)

Chapter 3 적습

슬라인 백작과의 결투로 제론은 확실히 자신의 존재를 모두에게 각인시켰다.

붉은 학살자를 찾기 위해 모인 여러 귀족이 제론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조건만 맞으면 자신의 가문으로 영입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기지 내의 동료 역시 제론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제론은 평소와 똑같았다. 마치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무덤덤하게 지냈다.

물론 제론은 그들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을 하는 중이었다. 다가오는 전투를 위해 치밀한 함정을 준비했다.

차라리 사령관에게 보고를 하면 좋겠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자신의 정보망이 조금이라도 드러나는 걸 원치 않았다. 물론 드러난다고 해서 그 정체를 알아차릴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계속 흘러갔다. 그리고 사기 진작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와서 붉은 학살자를 찾던 귀족들이 돌아갈 시간이 다가왔다.

☆ ☆ ☆

"이제 하루 남았네요."

클레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결국 붉은 학살자는 찾지 못했다. 하지만 성과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 사람은 뭘 하고 있던가요?"

"제대로 감시가 되지 않습니다. 워낙 감이 뛰어나서 근처에 다가가기가 쉽지 않은데다가, 멀리서 지켜보다 보면 언제 이동했는지 유령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당연히 쉽지는 않겠죠."

"한데 왜 그리 그에게 신경을 쓰십니까? 검술이 뛰어나긴 해도 그게 전부인 듯합니다만……."

"슬라인 백작을 옭아매는 거 보셨잖아요? 절대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그야 그렇습니다만……."

안슈트는 여전히 납득하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정도야 디아만트 후작가에도 널렸다. 검술 실력을 빼면 굳이 클레가 신경을 써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검술이 상당히 뛰어나니 호위로 쓰신다면 찬성입니다."

만일 그렇게 결정되면 뒷조사를 철저히 해서 만에 하나라도 클레가 잘못될 가능성을 완벽하게 잘라 내면 그만이다.

"글쎄요. 과연 그 사람을 호위로 쓸 수 있을까요?"

안슈트는 대답하지 못했다. 오늘 200만 골드를 번 사람이다. 돈이 아쉽지 않을 텐데 백작이라는 작위까지 가진 귀족이 굳이 후작가 여식의 호위를 설 이유가 없었다.

클레가 눈을 반짝였다.

"전 아무래도 그 사람이 붉은 학살자 같아요."

"으음, 그건……."

얼마 전이라면 절대 아닐 거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안슈트도 내심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으니까.

하지만 그가 붉은 학살자일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만일 그렇다면 사령관이 그 대결을 그냥 내버려 뒀을 리가 없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사령관도 제론의 실력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한데 그런 대결을 그냥 내버려 뒀다는 건 제론이 붉은 학살자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붉은 학살자가 자칫 다치기라도 하면 향후 전쟁 상황이 완전히 달라질 테니까 말이다.

"어렵네요. 그래도 그 사람 분명히 뭔가 있어요. 그러니 절대 감시를 게을리하지 마세요."

"예."

안슈트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이제 고작 하루 남았다. 그동안 뭘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시간만 보내다 갈 뿐이었다.

"그래도 여기서 100만 골드나 얻었으니 아주 시간을 낭비한 건 아니라 다행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클레의 말에 안슈트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건 아니다. 디아만트 후작가 입장에서 100만 골드는 그저 그런 돈이다. 그 정도 돈은 클레가 마음먹고 하루만 일에 열중하면 벌 수 있는 돈이었다.

한데 무려 열흘이 넘는 시간을 낭비했으니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2천만 골드를 갖다 버린 셈이었다.

"아무튼 그 사람은……!"

꽈앙!

우르르르!

클레는 갑작스러운 굉음과 진동에 말을 하다가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무슨 소리죠?"

안슈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래도 적습인 것 같습니다."

"적습? 벨룸 왕국이 공격하는 거라고요?"

"예. 마법으로 인한 폭발 소리가 분명합니다."

"마법이라고요?"

클레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현대 전투는 기간트가 주축이 된다. 기간트가 밀고 들어오면 웬만한 마법은 거의 쓸모가 없다.

한데 마법이라니, 뭔가 좀 이상하지 않은가.

"마법으로 절벽을 무너뜨린 모양입니다."

"아아."

클레는 그제야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이쪽에서 만든 함정인 모양이었다.

"어쨌든 전투가 벌어졌으면 그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죠. 우리도 가 보도록 해요."

물론 상황을 봐서 도망쳐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조건 달아나선 안 된다. 만일 그냥 달아났는데, 전투에서 승리하기라도 한다면 귀족의 명예에 큰 흠집이 난다.

클레와 안슈트가 밖으로 나가자, 함께 온 호위 기사가 모두 따라 나갔다. 클레 역시 열 명의 호위 기사를 데려왔다. 하나같이 뛰어난 실력을 가졌고, 좋은 기간트를 소유한 자들이었다.

밖으로 나간 클레는 곳곳에서 등장하는 귀족과 그 귀족을 호위하는 기사를 볼 수 있었다. 다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설마 이 와중에 벨룸 왕국이 공격할 거라고는 예상치 못한 것이다.

"우리 정보망이 느슨해진 건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벨룸 왕국이 신경을 좀 쓴 모양입니다."

"정보망을 교란시키면서 기간트를 추가로 이동시켰군요. 아무래도 이번 전투 쉽지 않겠는데요?"

클레의 정확한 분석에 안슈트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죽어 나갈 수 있었다.

쿵쿵쿵쿵쿵!

기간트가 달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축이 흔들렸다. 수십 기의 기간트가 일제히 달려갔고, 그 뒤를 이어 또 수십 기의 기간트가 달려갔다.

"일단 귀족을 한데 모아야 할 것 같지 않나요?"

클레가 눈을 빛내며 안슈트를 바라봤다. 안슈트는 맡겨 달라는 듯 자신만만한 눈으로 고개를 꾸벅 숙이고 달려갔다.

"호락호락 당해 줄 수는 없잖아요?"

클레의 입에서 묘한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벨룸 왕국 사령관은 발을 쾅 구르며 소리 질렀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진격로가 갑자기 푹 꺼지면서 진군하던 기간트 부대의 선두가 처박힌 것이다.

물론 많지는 않았다. 고작 30기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진군이 멎었다. 전격적인 기습전이었는데 기습 효과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뭣들 하는가! 어서 기간트를 끌어내고 바닥을 메우지 않고!"

기간트는 점프를 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한 효과적인 함정이었다. 기간트 피해는 거의 없다시피 한데, 함정을 대충이라도 메우지 않고는 진격이 불가능했다.

함정은 깊지 않았다. 하지만 기간트가 혼자서 빠져나오기는 쉽지 않았다. 다른 기간트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기간트가 워낙 무거웠기에 두 기의 기간트가 각각 한쪽 팔을 잡고 당기는 식으로 기간트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서둘러라! 빨리 이곳을 지나가야 해!"

사령관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이곳은 양쪽으로 절벽이 늘어선 곳이었다. 적진으로 가는 가장 짧은 길이었기에 기습의 묘를 살리기에는 제일 좋은 길이었다.

하지만 만일 적이 기습을 미리 알고 있다면 방어가 가장 용이한 지형이기도 했다.

양쪽으로 절벽이 늘어서 있으니 길목이 좁았고, 또 절벽을 일시에 무너뜨리기라도 하면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물론 그렇게 절벽을 무너뜨리는 것이 그리 쉬울 리 없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함정까지 준비했으니 절벽에 아무 짓 안 했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사령관의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절벽 중간 부분이 일제히 터져 나갔다.

꽈앙!

함정이 있는 위치에서부터 순차적으로 쫙 터져 나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자신이 거기에 관련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꽈과과과과광!

꽈르르르릉!

엄청난 돌무더기가 벨룸 왕국 기간트 부대를 덮쳤다. 피할 틈도 없었다. 그들은 그대로 무너진 절벽에 깔려 버렸다.

자욱한 흙먼지가 절벽을 꽉 메웠다.

☆ ☆ ☆

"일단 첫 번째 작전은 성공했군."

허공에 띄운 마티를 통해 상황을 확인한 제론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벨룸 왕국군은 총 세 방향에서 진격했다. 그중 절벽 길을 통해 오는 부대가 바로 기습을 위한 전력이었다.

그들로 기습을 해서 정신을 빼놓은 뒤, 대부대가 차근차근 진격해 완전히 쓸어버린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기습 부대는 일단 막았다.

제론은 절벽 중간에 수없이 많은 마법진을 새겼고, 또 마법을 이용해 중간에 함정을 팠다.

기간트를 이용할 수는 없었다. 아무에게도 들켜선 안 되기 때문이었다.

며칠 밤을 샜지만, 충분히 보람이 있었다. 제론은 마티를 조종해 두 번째 함정이 설치된 지역을 확인했다. 아직 적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조만간 적이 그 지역을 통과할 것이다.

정보가 전쟁에서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절벽에 파묻힌 기간트의 수는 총 150기에 달한다. 이렇게 처리하고도 남은 적이 700기나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들은 아직 완전히 처리된 게 아니다. 기간트는 고작 절벽이 무너진 정도로 부서지지 않는다. 맨몸으로 있던 사람은 모두 죽었겠지만, 기간트는 아마 단 한 기도 완벽히 파괴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대로 그냥 내버려 두면 그저 기습을 막은 것 외에는 아무런 효과도 없다. 그렇기에 제론은 다른 것을 준비했다.

우우웅!

바닥에 거대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제론이 절벽에 설치한 마법진과 함께 틈틈이 준비한 마법이었다.

촤악!

마법진이 산산이 부서지며 물기둥이 쭉 솟아났다. 물을 만들어 내는 마법진이었다.

마법 자체가 간단했기에 마법진의 규모를 키우는 것만으로 어마어마한 양의 물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쏴아아아!

무너진 절벽이 촉촉이 젖어들어 갔다. 그리고 그 순간 제론이 손가락을 튀겼다.

딱!

우우웅!

조금 전보다 몇 배나 더 거대한 마법진이 허공에 떠올랐다. 이것 역시 미리 준비한 마법진이었다.

샤아아아아!

쩌저저저적!

강렬한 냉기가 휘몰아쳤다. 어찌나 차가웠는지 땅을 촉촉이 적신 물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샤아아아아!

마법진은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허공에 떠 있는 동안 끊임없이 냉기의 바람을 절벽에 불어 넣었다. 바닥은 점점 더 꽝꽝 얼었다.

"이걸로 시간은 제대로 벌었고."

제론은 확신 어린 눈으로 무너지고 얼어붙은 절벽을 쳐다봤다. 그리고 돌아섰다.

최소한 2시간 정도는 시간을 벌었다. 아마 저 냉기는 아무리 기간트라도 쉽게 움직이게 하지 못할 것이다. 돌과 흙만 얼어붙은 게 아니다. 기간트의 관절도 얼어붙었다.

아마 그걸 제대로 녹여 움직이려면 기간틱 나이트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다. 그중에서도 더욱 뛰어난 센스를 가진 라이더가 마나 코어를 자유자재로 움직여 열기를 만들어 내지 않으면 쉽게 녹지 않는다.

그게 아니라면 자연스럽게 얼음이 녹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제법 오랜 시간 기다려야 기간트의 힘으로 얼음을 부수고 절벽을 밀어 올릴 수 있었다.

어쨌든 그 시간이면 충분했다. 전황을 다시 제자리로 돌리기에는 말이다.

제론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 물론 그러면서도 두 번째 함정을 살피는 걸 게을리하지 않았다.

☆ ☆ ☆

절벽 무너지는 소리가 워낙 컸기에 체른산 방어군에는 즉시 비상이 발동되었다. 수많은 병사가 정신없이 움직였고, 기간트를 보관한 격납고가 열렸다.

아공간이 없는 기간트가 격납고에서 나왔다. 다들 붉은색을 칠한 실바였다.

50기의 실바가 지축을 울리며 움직이자, 사방에서 하나둘 기간트를 소환했다. 물론 미리 정해진 자리에서 소환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기간트에 깔려 죽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었다.

체른산 방어군의 훈련 태세는 현재로서는 왕국 제일이었다. 가장 험한 격전지였기에 훈련에 만전을 기해야 했다.

사령관은 기간트가 도열하는 광경을 보며 다급히 물었다.

"적이 어디쯤 오고 있나?"

"아직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굉음이 울린 곳은 절벽 길 쪽인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사령관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절벽 길이 무너지는 소리일 수도 있겠군."

"일단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만, 정확한 것은 확인을 해 봐야 합니다."

부관의 대답에 사령관이 굳은 표정으로 앞을 바라봤다. 척후병은 사방에 깔아 두었다. 그들에게는 마법 통신구를 지급했기에 조만간 상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이 당할 경우에 대비해 새로운 척후병을 보냈으니 어떻게든 확인이 가능했다.

"통신이 들어왔습니다!"

부관의 외침에 사령관이 다급히 통신기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세 가지 소식을 동시에 들을 수 있었다.

―절벽이 무너졌습니다! 그쪽으로 진격하던 적군이 몽땅 깔린 것 같습니다!

"몽땅 깔려?"

―이동 흔적만 남았습니다. 정황으로 보면 확실합니다! 한데…….

"뭔가? 정확히 말해! 얼버무리지 말고!"

―무너진 절벽이 꽁꽁 얼어붙어 있습니다!

"뭐야? 얼어? 지금 날씨가 어떤 줄이나 알고 말하는 건가? 그리고 얼려면 거기 물이 있어야 하는데, 절벽 길 근처에는 시냇물도 없다는 거 모르고 말하는 건가!"

―그, 그래서 이상합니다! 정말로 얼어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설사 기간트가 깔려 있어도 당분간은 움직이지 못할 것 같습니다!

사령관과 부관이 서로를 바라봤다. 대체 이 공교로운 일은 뭐란 말인가. 마치 누군가가 레늄 왕국을 도와주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좋아! 다음!"

일단 다음 보고를 위해 통신 채널을 돌렸다. 그러자 다급한 척후병의 보고가 쏟아졌다.

―적입니다! 북동쪽 평원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추정 병력 350기의 기간트입니다!

"350기? 고작 그걸로 우리를 어찌 해 보겠다는 건가?"

사령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었다. 벨룸 왕국이 이렇게 어설픈 공격을 할 리 없었다. 설사 절벽 길을 이용해 기습을 시도한다 해도 말이다.

"다음!"

부관이 채널을 돌리자, 이번에도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동쪽 평원으로 적이 진격 중입니다! 기간트 350기입니다!

그 보고에 사령관이 경악했다.

"말도 안 돼! 그럼 총 700기나 되는 기간트가 출격했단 말 아닌가!"

정보망으로 확인한 바에 따르면 그들의 병력은 500기에서 600기 사이였다. 아무리 잘해도 600기가 전부였다.

한데 난데없이 700기라니! 게다가 절벽 길의 기간트를 생각하면 그보다 훨씬 많다는 뜻 아닌가.

사령관은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만일 절벽 길이 무너지지 않았다면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졌을 것이다.

체른산 방어군이 무너지는 건 물론이고, 현재 이곳에 있는 귀족까지 몽땅 당했을 것이다. 벨룸 왕국은 마치 그들을 노리기라도 하듯 공격했다.

이쯤 되면 뭔가 흑막이 있다고 보는 게 맞다. 사령관은 강한 음모의 냄새를 맡았지만, 지금은 거기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적은 700기 아군은 500기였다. 사령관이 고개를 돌려 귀족들을 쳐다봤다. 그들은 각자의 호위 기사와 함께 있었다. 그들이 도와주기만 하면 100기의 전력이 충원된다.

'하지만 과연 도움이 될까?'

총 600기라면 어찌어찌 해 볼 만하다. 붉은 학살자가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귀족들이 어떻게 나올지 아직 확신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사령관의 고민은 클레가 해결해 주었다.

"이곳에 모인 귀족들이 모두 돕기로 했어요. 다만 우리는 함께 훈련받지 않았기 때문에 군부의 라이더와 섞이면 오히려 문제가 생길 테니 따로 움직이죠."

클레의 말에 사령관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만 해 줘도 충분하다. 일단 병력을 한군데로 집중할 수가 있을 테니 말이다.

"남동쪽 평원을 막아 주시겠소? 적의 발만 묶으면 되오."

"군부에서 몇 기나 보내실 생각이시죠?"

"150기를 보내겠소."

"150기요? 그럼 우리와 합해 봐야 250기인데, 너무 불리하지 않나요?"

"그러니 버티기만 하라는 거요. 시간만 끌면 반드시 이길 수 있소."

사령관의 단호한 말에 클레는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사령관의 말에 따르면 귀족이 보유한 기간트의 수가 확 줄어들 것이다.

그건 향후 공작파의 귀족을 상대할 때 치명적인 빈틈으로 작용할 것이다. 무조건 피해가 적은 쪽에 붙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승리는 반드시 필요했다. 군부가 단단히 버텨 주지 않으면 공작파에 완전히 밀려 버릴 테니까.

"우리 쪽에 붉은 학살자를 넣어 주세요. 그럼 받아들이죠."

클레의 말에 사령관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붉은 학살자는 방어보다는 공격에 특화되어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귀족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이번 전쟁은 수행이 불가능했다.

"좋소. 하면 북동쪽 평원을 맡아 주시오. 최대한 빨리 그들을 물리치고 남동쪽 평원으로 이동해야 하오. 늦으면 이번 전투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는 걸 부디 명심해 주시오."

자신의 생각대로 일이 이루어지자, 기분이 좋아진 클레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염려 마세요. 우리는 생각보다 단합이 잘 되어 있답니다. 아마 상당한 성과를 얻을 수 있을 테니 기대하세요."

클레는 그 말을 남기고 서둘러 귀족들 사이로 들어갔다. 그러자, 호위 기사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선 호위 기사가 한 명씩 기간트를 소환했다.

순식간에 100여 기의 기간트가 나타났다.

그들을 통솔하는 것은 안슈트였다. 클레는 돈을 미끼로 모든 귀족으로부터 호위 기사의 통솔권을 얻어 냈다. 안슈트의 능력이라면 그들을 데리고 상당한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사령관은 그 모습을 보며 굳은 표정으로 명령을 내렸다.

"각자 예정된 지역으로 출발!"

사령관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간트가 일제히 기동했다.

우우우웅!

쿵! 쿵! 쿵! 쿵!

각각 250기의 기간트가 북동쪽 평원과 남동쪽 평원으로 움직였다. 250기로 350기의 적을 막아야 하는 남동쪽 평원의 경우 모든 기간트 라이더가 비장한 표정이었다.

남동쪽 평원은 그래도 방어가 용이한 편이었다. 완전히 허허벌판인 북동쪽 평원에 비해 군데군데 거대한 바위도 있고, 늪도 있어서 나름 지형을 이용한 작전을 짤 수도 있었다.

사령관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멀어져 가는 두 기간트 부대를 바라봤다. 그의 시선은 최종적으로 붉은 실바에게로 향했다.

50기나 되는 붉은 실바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든든해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붉은 실바는 체른산 방어군에 있어서는 양날의 검이었다. 실바는 확실히 성능이 떨어진다. 일대일로 다른 기간트와 싸우면 필패였다.

하지만 그중 붉은 학살자가 있다는 점이 중요했다. 붉은 학살자는 비록 실바지만, 상대편 기간트 세 기를 무리 없이 상대할 수 있었다.

실로 어마어마한 실력이었다.

"대체 왜 다른 기간트에 타지 않으려는지 모르겠지만……."

사령관은 몇 번이나 제안을 했다. 기간트를 바꿔 주겠다고 말이다. 만일 그 정도 실력을 가진 라이더가 카타락타나 크라테르를 탄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한데 그는 한사코 그것을 거부했다. 지금까지 자신의 실바 외에 다른 기간트를 탄 적이 없었다. 그 기간트에 무슨 비밀이 있는지 모르지만, 분명히 뭔가 이유가 있었다.

"그걸 못 밝히고 끝나는군."

어제 사령관은 제대 신청서를 받았다. 바로 처리가 되지는 않겠지만, 조만간 붉은 학살자는 군부에서 사라진다. 물론 몇 번은 그 사실을 이용해 작전을 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너무나 아쉬웠지만, 그래도 사령관은 충분히 수긍했다. 그는 할 만큼 했다. 또한 이번 전투가 마무리되면 아마 전쟁은 끝날 것이다.

이곳 체른산 방어군이 밀리든 아니면 벨룸 왕국군이 공격에 실패하든, 심각한 피해를 입을 것이다.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여유가 사라진다.

"이럴 때가 아니로군. 어서 통신을 해야지."

이곳에 잔뜩 몰려왔으니 어딘가는 분명히 구멍이 생겼을 것이다. 거길 공략하면 적에게 이중으로 피해를 강요할 수 있다.

그것은 종전 협상에서 상당히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다.

남동쪽 평원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 높다란 망루가 세워져 있었다. 사실 평원보다는 기지에 훨씬 더 가까운 장소였다.

예전에는 망루가 제법 쓸모 있었지만 지금은 거의 쓰지 않은 채 방치된 상태였다.

그 망루 위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세나와 바이스였다.

"함정은 확실히 설치되었겠지?"

"당연하지. 날 뭐로 아는 거야?"

"뭐긴, 어설픈 바이스지."

"허어. 어설프다니.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거야? 지금은 완벽한 바이스라고 불러야지."

"훗, 그냥 막 갖다 붙이면 말이 되는 줄 아는 모양이네."

세나의 말에 바이스가 피식 웃었다.

"너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 제론 선배도 알아?"

세나가 바이스의 눈앞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당연히 모르지. 알면 네가 여기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었겠어?"

"허어. 제론 선배가 이 모습을 봤어야 하는데. 이렇게 폭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걸 봐야 여자에 대한 생각이 조금 달라지실 텐데 말이야."

"닥치고 마법이나 걸어."

"멋진 어휘 선택이야."

바이스는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고는 마나 스틱을 꺼냈다.

아주 특별한 마나 스틱이었다.

보통 마법사가 쓰는 마나 스틱은 마나가 잘 흐르는 재질의 막대기에 마나 스톤을 박아서 만든다. 그걸 잘 가공하고 거기에 마법을 곁들이면 마나 스틱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바이스의 마나 스틱은 그 재질부터가 완전히 달랐다. 아무도 몰랐지만, 심지어 바이스조차 모르는 일이었지만 이 마나 스틱의 기본 재질은 테페룸이다.

테페룸에 포로스를 발라 만든 마나 스틱이었다. 그렇기에 누구도 이것이 사실은 테페룸이라는 걸 몰랐다.

테페룸을 이 정도로 정교하게 가공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제론뿐이었기에 설사 이게 테페룸이라고 말해 줘도 믿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게 테페룸으로 막대기를 만들고, 거기에 특수한 방법으로 가공한 마나 스톤을 촘촘히 박았다.

바이스는 마나 스틱을 들어 올려 허공에 그림을 그렸다. 당연히 마나 스틱의 마나를 활성화시켰다.

샤아아!

바람을 긁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푸른 선이 그려졌다. 그 선은 이내 간단한 마법진을 이뤘다.

커다란 원 안에 다섯 개의 직선이 이리저리 교차된 마법진이었다.

우우웅!

마법진이 은은히 진동했다. 바이스는 마법진에 마나 스틱을 갖다 댔다.

쩡!

마법진이 산산이 부서지며 가루로 변했다. 마법이 발동한 것이다.

이 마법진은 일종의 스위치였다. 미리 준비한 마법진을 일제히 발동시키는 역할이었다.

후웅!

가벼운 바람이 일었다. 그리고 두 사람 앞에 흐릿한 창문이 떠올랐다. 그 창문은 놀랍게도 먼 곳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두 사람의 앞에 떠오른 창에 수백 기의 기간트가 빠르게 진군하는 모습이 보였다.

"거의 다 온 거 같은데?"

"맞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바이스에게는 확실히 보였다.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마법진의 모습이.

이 광범위한 마법을 까느라고 얼마나 오랫동안 애썼는지 모른다. 더구나 이번 일을 위해 그동안 모은 포로스를 거의 다 써 버렸다.

포로스를 이용하지 않으면 원하는 정도의 파괴력이 결코 나오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도 효과는 확실할 거야.'

바이스는 자신했다. 이번 마법은 그동안 연구한 마법의 정수라 할 수 있었다. 자신이 군에서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며 얼마나 많이 발전했는지 이번에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징징징징!

마법진에서 푸른빛이 터져 나왔다. 바이스가 발동시킨 마법이 이제야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애초에 이 타이밍을 다 재고 스위치를 넣었다.

번쩍!

어마어마한 빛이 터졌다. 마법진이 산산이 부서지며 그 모든 것이 태양처럼 밝은 빛으로 변했다.

희미한 창을 통해 그곳을 보던 바이스와 세나는 눈을 감거나 피할 필요가 없었다. 두 사람에게는 전혀 그 빛이 밝게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마법의 창이 강한 빛을 대부분 차단해 버린 것이다.

"됐어!"

바이스가 기쁨에 찬 외침을 토해 냈다. 마법이 완벽하게 성공한 것이다.

"정말 다행이야. 그럼 빨리 우리 제론 선배님이 계시는 곳으로 방향을 바꿔!"

"나도 그러려고 했어."

바이스는 그렇게 말하며 마나 스틱을 움직였다. 마법진이 떠올랐고, 창의 방향이 휙 하고 바뀌었다.

그곳에는 수백 기에 달하는 기간트 대군이 양측으로 나뉘어 당장이라도 싸울 것 같은 기세로 대치 중이었다.

진짜 전투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250기의 기간트를 이끌고 전장에 도착한 카이트는 멍한 눈으로 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봤다.

카이트는 3년 동안 제론의 도움으로 진급을 거듭했다. 그래서 지금은 기간트 부대를 이끄는 대장의 직위에 올랐다.

지금도 남동쪽 평원의 방어 책임자로 오게 되었는데, 그만큼 사령관이 믿고 있다는 뜻이었다. 카이트라면 어떻게든 필요한 만큼 시간을 끌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카이트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아니, 할 게 없었다.

그의 눈앞에 드넓은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호수 너머 수백의 기간트 부대가 보였다. 그간의 경험으로 어림잡아 보면 200기는 되는 듯했다.

'350기쯤 된다고 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원래 가장 먼저 떠올랐어야 마땅한 생각이었지만 눈앞의 광경에 너무 놀라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생각할 수 있는 건 딱 하나다. 나머지 150기는 저 호수에 잠긴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진 건지는 모르지만 그게 확실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어쨌든 시간을 끄는 일은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호수에 빠진 기간트가 다시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기간트에게 가장 치명적인 약점 중 하나가 바로 무게였다. 그 말은 깊은 물을 건너지 못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기간트의 조종석이 외부와 완벽하게 격리되어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숨을 쉬려면 공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저런 물속에서는 안정적으로 공기를 공급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 물속에서 빨리 나와 공기를 공급받아야 하는데 기간트의 무게 때문에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긴장을 풀지 마라! 언제 상황이 바뀔지 알 수 없다!"

카이트는 그렇게 명령을 내리고는 호수 너머에 있는 적을 살폈다. 우왕좌왕 정신이 없었다. 그들도 갑작스러운 사태에 당황한 것이 분명했다.

'이건 어쩌면 기회 아닌가?'

카이트는 갈등했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의 임무는 시간을 끄는 것이다. 여기서 더 힘을 낭비할 이유가 없었다. 전력을 최대한 보존한 상태로 시간을 끌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최선의 선택이었다.

안슈트는 100여 기의 기간트를 이끌고 북동쪽 평원에 도착했다. 군부의 250 기간트가 질서 정연하게 도열해 그 뒤를 따랐다. 물론 둘은 따로 움직였다.

적 기간트 350기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은 압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아군도 그 못지않다.

'문제는 실바인데…….'

아군과 적군의 병력은 같지만 질에서는 엄연히 차이가 난다. 아군에는 실바가 50기나 섞여 있는 것이다.

안슈트는 과연 실바와 함께 저 강대한 적을 상대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일단 지금은 적을 물리칠 생각만 하자. 서두르지 않으면 안 돼.'

적은 여기 말고도 또 있다. 이쪽에서 최대한 빨리 승리를 쟁취한 뒤, 남동쪽 평원으로 달려가야 한다. 하지만 과연 그게 가능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니,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다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는 점은, 이곳에 붉은 학살자가 함께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승산을 찾는다면 그게 유일했다.

"우리는 상황을 봐서 적의 측면을 치겠소."

안슈트가 군부의 기간트를 향해 말했다. 어차피 함께 돌격할 거라고는 예상치 않았기 때문에 군부의 대장도 수긍했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지는 않았다.

"측면이 아니라 배후를 치시오. 아군과 섞일 우려가 있소."

안슈트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군부는 군부의 방식이 있을 테니까.

'그래도 되도록 빨리 치는 게 나을 텐데…….'

배후를 치려면 멀리 돌아가야 한다. 더구나 그동안 적이 충분히 대비를 할 테니 효과가 훨씬 떨어진다. 차라리 측면을 노리는 편이 더욱 빨리 대처할 수 있으니 기습의 효과도 있을 것 아닌가.

안슈트는 그 주장을 하려다가 말았다. 지금은 이런 일로 왈가왈부할 시간이 없었다. 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두르지 않으면 일을 그르칠 수도 있었다.

"가자!"

안슈트가 100여 기의 기간트를 이끌고 이동을 시작했다. 배후를 치려면 충분히 멀리 돌아야 한다. 그때까지 아군이 버티고 있기만을 바랐다.

함께 돌격하면 손발이 안 맞아서 오히려 더 큰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은 이게 최선이었다.

안슈트는 기간트 부대를 이끌고 달리면서도 시선을 놓지 않았다. 적군과 아군이 부딪치는 광경은 반드시 지켜봐야 했다. 또한 전황도 살펴야만 했다.

그저 배후로 돌아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공격할 계획은 없었다. 상황에 맞게 행동해야만 한다. 그래야 승리할 수 있었다.

열심히 달리던 안슈트는 긴장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드디어 아군이 돌격을 시작한 것이다.

크라테르 수십 기가 선두에서 달렸다. 당연했다. 일단 성능이 뛰어나니 달리는 속도도 빠르고 돌격 효과도 뛰어날 테니까.

꽈앙!

선두와 선두가 부딪쳤다. 전형적인 기간트 전투였다. 서로 힘으로 우직하게 밀어붙였다. 그러면서 검을 내리치고 방패로 그것을 막았다.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공격이었다. 또한 이대로라면 수가 많은 쪽이 당연히 승리하게 된다.

상황을 지켜보던 안슈트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갑자기 적군의 진형이 흐트러졌다.

"뭐지?"

안슈트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붉은 실바 한 기가 정신없이 적진을 유린하는 광경을 말이다.

붉은 실바가 한바탕 적진을 휘저으면 어김없이 수십 기의 기간트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면 붉은 실바를 바짝 따르던 다른 실바가 쓰러진 기간트를 검으로 찍었다.

그들은 오직 그것만 훈련한 것처럼 힘차게 기간트를 찍었다. 게다가 검에 체중을 완전히 실었기 때문에 위력이 엄청났다. 다만 속도가 조금 느린 것이 흠이었다.

"붉은 학살자!"

안슈트는 저 붉은 실바가 바로 붉은 학살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과연 소문이 날 만했다. 또한 이렇게 수많은 귀족이 애가 타도록 찾을 만했다.

붉은 실바의 움직임은 어마어마했다. 그렇게 한 번 휘젓고 나니 아군의 돌격 효과가 배가되었다. 엄청난 속도로 적진을 파고들어 진형을 무너뜨렸다.

안슈트는 이제야 아군 기간트 부대장이 자신에게 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일 이 상태에서 측면으로 돌격했다면 완전히 바보가 될 뻔했다.

어차피 진형이 무너졌는데, 거길 쳐서 뭐 하겠는가. 아직 진형이 흐트러지지 않은 배후를 쳐서 완전히 적을 무너뜨려야 하지 않겠는가.

"서둘러라!"

안슈트는 더욱 힘차게 달렸다. 더 늦으면 곤란했다. 배후를 제대로 쳐 줘야 이번 전투를 완벽한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된다! 양쪽 적을 모두 막을 수 있어!'

피해를 줄이는 것이 관건이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이대로라면 절반도 잃지 않고 적을 궤멸시킬 수 있을 듯했다.

안슈트는 상념을 접었다. 어느새 적의 배후였다.

꽈아앙!

굉음과 함께 적진 깊숙한 곳으로 들어왔다. 적은 제대로 배후를 방어할 겨를도 없어 보였다.

안슈트의 눈에 높이 뛰어오른 붉은 실바의 모습이 들어왔다. 마치 붉은 새가 하늘을 날아오르는 듯했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상황 종료! 역시 제론 선배님이야."

바이스의 말에 세나가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두 손을 맞잡았다.

"너무 멋져. 어떻게 실바를 저 정도로 다루실 수 있는 걸까? 역시 내가 정비를 잘한 덕분이겠지?"

"제론 선배님이 이 모습을 꼭 보셔야 하는데."

세나가 말없이 꽉 쥔 주먹을 위로 올렸다. 바이스는 '이크' 하며 뒤로 물러났다.

"어쨌든 이제 한쪽 전투가 끝났으니 이쪽도 슬슬 준비해야지."

바이스는 마법을 펼쳐 창의 방향을 바꾸었다. 드넓은 호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한 두 무리의 기간트 부대가 보였다.

"저게 다 환상이라는 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호수에 잠긴 사람들은 알지 않아?"

"알 수도 있겠지. 어쨌든 숨을 계속 쉴 수 있다는 걸 의심할 테니까. 그래도 다시 나오지는 못할 거야. 저 환상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언제쯤 사라지는데?"

"그냥 내버려 두면 반나절 정도? 하지만 내가 원하면 언제든 없앨 수 있지."

"제론 선배님은 알고 있지?"

"물론이지. 그게 이 함정의 핵심인데."

무려 150기나 되는 기간트가 호수의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만일 환상이 사라져 버린다 하더라도 그들이 바로 정신을 차려 상황에 대처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자, 이제부터가 진짜 중요해."

바이스가 마나 스틱을 움직였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움직임이었다. 그 결과 훨씬 복잡한 마법진이 허공에 나타났다.

쩡!

마나 스틱에 의해 마법진이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뿌연 창이 하나 더 떠올랐다. 그 창에 전투가 끝나 다시 달리고 있는 기간트 부대의 모습이 나타났다.

바이스는 긴장감 넘치는 표정으로 두 창을 번갈아 확인했다. 마법을 취소하는 데도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정확한 타이밍을 잡아내야만 했다.

"지금!"

세나가 외쳤다. 바이스는 망설임 없이 마나 스틱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쩌엉!

마나 파동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 나갔다.

안슈트는 당황했다. 앞서 달리는 붉은 실바를 쫓아가기가 버거웠다.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가 타는 기간트는 무려 크라테르였다. 크라테르는 출력 1.7에 13톤의 무게를 가졌다. 반면 실바는 고작 0.8의 출력에 무게는 12톤이나 된다.

절대 실바보다 크라테르가 늦게 달리는 상황은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한데 지금 그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안슈트는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더욱 힘차게 땅을 박찼다. 하지만 실바와의 거리가 좁혀지기는커녕 점점 늘어나기만 했다.

'말도 안 돼!'

속으로 그렇게 외치며 심장이 터져라 달렸다. 온몸이 삐걱거렸다. 하지만 그래도 꾹 참고 달렸다. 이건 기간트 라이더로서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을 자존심 문제였다.

안슈트뿐 아니라 움직일 수 있는 모든 기간트가 그렇게 붉은 실바의 뒤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현재 달리는 기간트의 수는 200기에 불과했다. 조금 전 싸움에서 150기가 부서졌다.

물론 완파된 것은 50기 정도였다. 대부분이 실바였다. 나머지는 전투에만 참여가 어려울 뿐 움직임에는 지장이 없었다.

그들은 지금 북동쪽 평원에 남아 전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곳에 널브러진 기간트는 모두 전리품이었다. 향후 공적에 따라 포상으로 주어질 것이다.

현재 달리는 200기의 기간트는 비교적 멀쩡했다. 하지만 완전히 괜찮은 건 아니었다.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건 절반도 채 안 됐다.

그들의 눈앞에 수백 기의 기간트가 늘어서 있는 광경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앞에 자리한 거대한 호수가 보였다.

"어?"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난데없이 저기 왜 호수가 있단 말인가. 여기는 남동쪽 평원이었다. 늪이 몇 군데 있긴 하지만 저런 호수는 없었다. 또한 저런 호수가 생길 만한 지형도 아니었다.

붉은 실바가 망설임 없이 호수에 뛰어들었다.

첨벙!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붉은 실바를 가장 가까이서 따라가던 사람은 안슈트였다. 그는 상당히 당황했다. 기간트와 깊은 호수는 상극이었다. 하지만 붉은 실바는 호수에 뛰어들었다.

안슈트는 이를 악물었다. 여기에서까지 질 수는 없었다.

첨벙!

안슈트가 뛰어들었다. 그러자 그 뒤를 따르던 기간트 역시 망설이지 않았다.

수많은 기간트가 호수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호수가 사라져 버렸다. 그 자리에 남은 건 멍하니 서 있는 150기의 벨룸 왕국 기간트뿐이었다.

꽈앙!

붉은 실바가 하늘 높이 떠올랐다.

꽈과광!

하늘에서 떨어지며 순식간에 세 기의 기간트를 무너뜨린 붉은 실바가 그림처럼 움직여 적을 베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안슈트를 비롯한 아군 기간트가 일제히 들이쳤다.

꽈과광!

그걸로 전투의 결과가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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