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6/217)

Chapter 2 슬라인 백작

제론이 기지로 돌아와 가장 먼저 찾은 것은 당연히 바이스와 세나였다. 제론 스스로도 나름대로 계획을 세울 수 있겠지만 두 사람의 머리도 빌려야만 했다.

그만큼 심각한 사태였다.

제론의 얘기를 들은 바이스와 세나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믿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동안 몇 번이나 비슷한 경우가 있었다. 제론은 무슨 방법을 썼는지 상당히 정확한 정보를 가져왔고, 그걸 이용해 그들은 막대한 공을 세우고, 또 엄청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전력 차가 너무 심한데요? 역시 사령관께 보고하면 안 되겠죠?"

바이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웬만한 차이라면 어떻게든 해 보겠는데, 850기의 적을 600기로 상대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일단 몰래 함정을 파서 적 전력 일부를 깎아 내는 것뿐이로군요."

"작전에 일부 개입해서 전투를 효율적으로 이끄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건 이번에는 어려울 거예요."

세나의 말에 제론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옳다. 이번에는 다른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지금은 귀족 가문의 호위 기사가 많다. 한두 명도 아니고 무려 100명이 넘는다.

그들까지 작전에 포함시킬 수는 없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싸울 것이다. 어쩌면 싸우지 않고 도망갈지도 모른다. 물론 도망갈 확률은 지극히 낮다. 어쨌든 군부에 한발 걸친 자들이었으니까.

"아무튼 난 적이 어디로 올지 예측해 볼 테니까 적절한 함정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해 봐."

제론의 말에 바이스가 손바닥을 비비며 기대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물론 긴장감도 가득했다.

힘든 상황이었지만, 제대로 이용할 수만 있다면 무수한 성과를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어마어마한 양의 포로스를 만들어 낼 수 있겠군요."

제론은 그런 바이스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풀이 죽은 것보다야 저런 모습이 훨씬 보기 좋았다.

"자, 그럼 부탁하지."

제론은 두 사람에게 그렇게 숙제를 남겨 주고 자리를 떴다. 아직 할 일이 많았다. 둘에게만 모든 걸 맡겨 둘 생각은 없었다.

지속적으로 정보를 확인해서 정확한 공격 시간을 알아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전에 그들을 막을 모든 준비를 끝내야만 했다.

'어떤 함정을 준비해야 할까?'

제론은 함정을 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다. 만일 적이 체른산을 통해서 온다면 쓸 수 있는 방법이 더 많아진다. 하지만 그쪽으로는 오지 않을 것이다.

체른산을 통해 진격할 때마다 제대로 공격을 시작하기도 전에 엄청난 손실을 입어야 했다. 그러니 그쪽을 또 이용할 리가 없었다.

'허를 찌른다고 여기면서 그쪽으로 오면 아주 감사할 일이긴 한데…….'

체른산 유적의 힘을 이용할 수 있다면 전투를 훨씬 더 쉽게 이끌어 갈 수 있었다. 거기에 바이스와 세나가 계획한 함정까지 곁들이면 훨씬 승산을 높일 수 있었다.

이번 전투는 딱 비기기만 하면 된다. 그것만으로도 승리한 거나 다름없었다.

제론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그게 전부였다.

'전쟁이 끝날지도 몰라.'

이번 전투의 규모를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레늄 왕국도, 벨룸 왕국도 더 이상 전쟁을 이어 갈 여력이 없었다.

전쟁이 더 길어지면 설사 완전히 승리해 한쪽을 먹어 치운다 하더라도 주변국에 의해 갈가리 찢겨질 가능성이 높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들을 방어할 힘은 남겨 둬야 하지 않겠는가.

또한 전쟁에서 승리한다 하더라도 각국에 남은 귀족을 병합하고 정리하는 데 또 힘을 소모해야만 한다. 그것 역시 전쟁과 마찬가지로 엄청나게 힘들고 시간도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그런 모든 상황을 생각하면 슬슬 전쟁을 마무리해야 한다. 그리고 이번 전투가 종전 협상의 중요한 카드가 될 것이다.

제론은 정신없이 머리를 굴리며 서둘러 걸었다. 적이 진군할 확률이 높은 길목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사실 증원군을 요청하는 게 가장 좋다. 하지만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차라리 이번 일을 기회로 적 전력이 약화된 것이 분명한 지역을 공략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렇게 한창 걸어가고 있을 때, 누군가 제론의 앞을 막아섰다. 제론은 걸음을 멈추며 자신이 너무 정신없이 생각에 몰두했다는 것을 깨닫고 정신을 차렸다.

길을 막은 자들을 확인하니 상당히 낯이 익었다. 슬라인 백작의 호위 기사였다. 다섯 명이나 되는 호위 기사가 흉흉한 눈빛으로 제론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시나?"

느물느물한 미소를 지은 슬라인 백작이 호위 기사 틈으로 나타나 제론을 깔아 봤다. 그의 눈빛에는 경멸과 조소가 가득했다.

제론은 그의 눈빛을 보고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렇지 않아도 시간이 없는데 이런 식으로 발목을 잡으니 짜증이 살짝 솟았다.

제론은 한심하다는 듯 슬라인 백작을 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광경에 슬라인 백작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감히 그따위 눈으로 날 쳐다보다니! 죽고 싶은 것이냐!"

제론이 서늘한 눈으로 슬라인 백작을 노려봤다.

"죽인다고? 군부의 라이더를 죽인다고 했나, 지금?"

순간적으로 슬라인 백작이 흠칫 놀랐다. 하지만 이내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노발대발했다.

"이놈이 어디서 그따위 망발이냐!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백작이면 다 같은 백작인 줄 아느냐!"

제론이 눈을 빛냈다.

"호오. 그걸 알고도 나한테 그따위로 말하는 건가?"

"흥! 슈린 공작에게 들킬까 봐 꼬리를 말고 군부에 숨은 놈이 말은 잘하는군. 에어스트 백작가 같은 떨거지를 내가 무서워할 것 같으냐?"

제론의 눈빛이 변했다. 그것을 본 슬라인 백작이 계획대로라는 듯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왜? 분한가? 분하면 덤벼 보든가. 덤비지 못하겠지? 그러니 떨거지 가문이라는 거다. 가문이 모욕을 당했으니 응당 목숨을 걸고서라도 결투를 신청했어야지. 쯧쯧쯧."

제론이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후우욱. 지금 네가 하는 말로 인한 모든 책임을 반드시 져야 할 것이다."

제론의 말에 슬라인 백작이 피식 웃었다.

"난 항상 내 말에 책임을 진다. 넌 그렇게 하고 있나? 내가 보기엔 전혀 안 그런 것 같은데?"

제론은 슬라인 백작이 왜 이러는지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제론을 도발해 결투를 걸게 만들 작정이었다.

자신이 먼저 결투를 걸면 모양새가 우스워진다. 또한 아무리 같은 편이라고 하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다들 능구렁이 수십 마리를 속에 키우는 귀족이다. 나중에 이 일이 어떤 칼날로 되돌아올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말 몇 마디로 도발해 상대가 결투를 걸게 만들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이 결투에 조건을 걸어 제론으로부터 정보를 뽑아낼 생각이었다.

제론이 담담히 말했다.

"결투를 신청한다. 시간이 없으니 지금 해결하지."

슬라인 백작이 반색했다.

"결투라. 좋지. 한데 공증인으로 내세울 만한 사람이 있느냐? 나야 여기 지인들이 많지만……."

슬라인 백작은 주위를 둘러보며 함께 여기까지 온 다섯 귀족을 쭉 둘러봤다. 그들은 슬라인 백작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고개를 끄덕여 언제든 공증인이 되어 줄 거라는 뜻을 내보였다.

"사령관님을 모셔 오지."

제론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슬라인 백작이 옆에 선 호위 기사를 쳐다봤다. 그러자 호위 기사가 빠르게 사령관실로 달려갔다. 여기서 멀지 않으니 금방 돌아올 것이다.

모든 조치를 취한 슬라인 백작이 제론을 보며 씨익 웃었다.

"정말 멍청한 놈이로구나. 귀족 간의 결투에 관한 법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야."

"너보다는 많이 알고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

슬라인 백작은 제론의 말투에 발끈했다. 하지만 화를 내려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놈의 뻔한 도발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발해서 내가 직접 나서게 만들 셈인가? 뭐, 제법 쓸 만한 생각이로군. 하지만 내게는 호위 기사가 무려 열 명이나 있는데 굳이 나설 이유를 느끼지 못하겠어. 안 그런가?"

슬라인 백작은 주위 귀족을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다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모두 슬라인 백작의 승리를 확신했다.

"자, 그럼 슬슬 결투에 조건을 걸어야지? 물론 진 쪽이 명예를 담아 정중히 사과해야 하는 건 알고 있겠지? 난 거기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린다는 조건을 추가하고 싶은데 혹시 이의 있나?"

제론이 고개를 저었다. 이의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런 부가적인 조건 말고 실질적인 조건을 빨리 말하는 게 어때? 시간도 없는데."

슬라인 백작의 입가가 쭉 올라갔다.

"내 조건은 간단하다. 네놈이 알고 있는 체른산 방어군에 대한 모든 정보를 토해 내라는 것이다. 붉은 학살자에 관한 것까지 몽땅 포함해서."

그런 조건을 걸 거라고 충분히 예상했기에 제론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울 것 없는 조건이로군. 그럼 이번에는 내 차례인가? 300만 골드."

"뭐?"

"어려운가? 300만 골드를 달라고."

"이런 미친!"

"어려운가? 그럼 조건을 조금 조정해 줄까?"

슬라인 백작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300만 골드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액수란 말인가!

슬라인 백작가가 비록 제법 부유한 가문이긴 했고, 비옥한 영지를 가진 곳이긴 했지만 300만 골드를 마련하려면 가문의 기둥을 뚝 분질러야만 한다.

그 정도로 거금이었다. 어쩌면 영지를 팔아 치워야 할지도 모를 정도로 막대한 금액이었다.

한데 그런 어마어마한 돈을 고작 결투 한 번에 걸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말이다.

물론 가끔 영지전을 대신해서 결투로 영지를 내거는 경우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건 아주 특별한 경우에 행해지는 일이었다.

"아까는 그렇게 큰소리 펑펑 치더니 이제 보니 형편없군. 말뿐이야."

승낙을 유도하는 도발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렇게 하자는 말이 목구멍까지 튀어 올라왔다. 하지만 슬라인 백작은 그 말을 꿀꺽 삼켰다.

상대가 너무 자신만만했다. 허세일 가능성이 99퍼센트가 넘었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결투의 상례를 너무 벗어난 조건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군부의 정보를 팔아먹으라는 건 괜찮은 조건이고?"

"300만 골드보다야 훨씬 낫지."

"그 조건을 총사령관님께 전해 볼까? 정말로 그런지."

슬라인 백작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건 곤란했다. 군부와의 관계가 깊은 만큼 총사령관의 힘이 슬라인 백작가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했다.

"숨겨둔 기사라도 있는 모양이지? 이렇게 날 도발하는 걸 보면."

제론이 피식 웃었다.

"그런 게 어딨어? 날 믿을 뿐이지."

결투에 직접 나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슬라인 백작의 표정이 조금 편해졌다.

사실 귀족의 결투라는 것이 특별한 조항을 덧붙이지 않으면 지극히 불평등한 방식이었다. 휘하의 기사를 얼마든지 결투에 참여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현재 슬라인 백작은 열 명의 기사를 데려왔다. 자신을 호위하기 위함이었기에 가문에서 최고의 실력을 가진 열 명을 뽑아온 것이다.

무려 열 명을 상대해야 한다. 물론 일대일로 차례차례 싸우지만, 결투인 만큼 상대의 목숨을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기에 지극히 흉험한 싸움이 될 것이다.

'익스퍼트의 기사를 아무런 피해 없이 이기는 건 불가능하지. 설사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어도 말이야.'

슬라인 백작은 그렇게 생각하며 제론을 노려봤다. 나이가 너무 어렸다. 아무리 검술의 천재라 해도 한계라는 게 있는 법이었다.

슬라인 백작이 데려온 열 명의 기사는 익스퍼트에 오른 지 꽤 오래된 베테랑이었다. 그들은 같은 익스퍼트라 해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실력자였다.

아무리 계산을 해도 자신이 질 확률이 없었다. 하지만 300만 골드라는 액수가 계속 발목을 잡았다.

"부담되면 200만 골드로 할까?"

그렇게 말하는 제론의 입가에는 비웃음이 가득 맺혀 있었다. 마치 '너 따위가 그렇지' 하고 말하는 듯했다. 슬라인 백작은 또 발끈했다.

아무리 계산해도 질 리가 없으니 걸린 액수가 300만이든 30만이든 무슨 상관이랴. 괜히 제론의 말에 놀아났다고 생각하니 더욱 화가 치밀었다.

"좋아. 하지, 300만."

제론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 300만에 하겠다고 결정할 줄은 몰랐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걸 본 슬라인 백작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스쳤다.

"공증인이 도착하면 즉시 결투를 시작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난 내 기사들을 내보내지."

제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직접 싸운다."

슬라인 백작은 호위 기사를 보며 굳은 얼굴로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러자 열 명의 호위 기사가 자신의 검을 꽉 움켜쥐었다. 제론이 하는 양을 지금까지 지켜보며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최소한 팔다리 중 하나는 잘라 놔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제론은 허리춤에 매단 검집을 툭툭 두드리며 슬라인 백작과 그의 호위 기사를 쭉 둘러봤다. 그저 보며 감각을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경지가 딱딱 보였다.

'호오. 저 사람은 상당한데? 익스퍼트에 오른 지 제법 된 모양이야. 나머지는 다 비슷하군.'

눈빛이 남다른 한 명만 경지가 높고 나머지는 고만고만했다. 다른 익스퍼트와 붙으면 압도적인 힘을 발휘할 것이고, 그들 사이에서도 높낮이가 분명히 있었지만, 제론이 보기에는 그게 그거였다.

하지만 경지가 높은 한 명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소드 마스터가 되려면 요원하지만, 그래도 상당한 경지임에는 분명했다. 아마 이대로 열심히 노력하면 10년쯤 후에 소드 마스터로 가는 가능성을 붙잡을 수도 있을 것이다.

'죽이긴 좀 아깝군.'

하지만 그래도 죽일 것이다. 어차피 슬라인 백작과는 완전히 틀어졌다. 향후 관계가 좋아질 가능성조차 남지 않았다.

300만 골드라는 거금을 결투의 대가로 빼앗기게 되면 슬라인 백작가도 거의 끝이라고 봐야 했다. 물론 제론이 한 줌 자비를 베풀면 순차적으로 나눠서 돈을 갚게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제론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300만 골드에 관한 차용증을 받은 뒤, 그걸 다른 상단에 팔아 버릴 작정이었다. 300만 골드를 즉시 지급해 줄 수 있는 부유한 상단에 말이다.

"저기 오는군."

누군가의 말에 슬라인 백작과 제론의 시선이 같은 방향으로 돌아갔다. 기사 한 명이 사령관과 함께 오고 있었다. 사령관도 사태를 미리 전해 들었는지 상당히 다급한 발걸음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인가!"

오자마자 제론을 향해 대뜸 소리친 사령관은 정중한 얼굴로 슬라인 백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 결투, 물러 주실 수 없겠습니까?"

슬라인 백작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귀족의 명예가 걸린 결투네. 취소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사령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제론이 나섰기 때문이다.

"물러나십시오. 결투는 제가 먼저 신청했습니다. 가문이 모욕을 당했는데 그냥 넘어가면 앞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제론은 그렇게 말하고 담담한 눈으로 사령관을 쳐다봤다. 사령관은 그런 제론의 눈빛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아무런 긴장감이나 두려움을 느낄 수 없었다. 아니, 기본적으로 싸움을 앞둔 사람이 가져야 할 투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사령관님께서는 공증만 서 주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제론의 말에 사령관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후우. 나도 모르겠군. 조건은 어떻게 되나?"

결국 해 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너무나 걱정이 되었다. 제론은 정말로 중요한 사람이었다. 만일 제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심각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당장 총사령관님의 문책을 어찌 견딜지…….'

걱정하는 사령관의 귀로 담담한 말이 들려왔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제론이 조건을 읊은 것이다. 그 말을 들은 사령관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당장 안 된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조차 할 수 없었다. 제론이 절묘한 타이밍에 손을 들어 사령관의 말을 막았기 때문이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론의 말은 단호했다. 감히 사령관이 다시 입을 열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결투의 절차가 차근차근 진행되었다. 그리고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귀족과 기사, 그리고 군부의 라이더가 우르르 몰려왔다.

그들은 모두 이 결투에 걸린 조건을 듣고는 아연실색했다. 군부의 정보를 조건에 건 것도 놀랄 만한 일이지만 고작 결투 한 번에 300만 골드라는 거금이 걸렸다는 사실에 다들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놀랐다.

그중 가장 놀란 사람은 단연 클레였다. 누구보다 먼저 정보를 물어 여기로 달려온 사람이 바로 클레였다. 당연히 그녀에게 300만 골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군부의 정보가 걸렸다는 말에 더욱 신경이 쓰였다.

'얼마가 되었건 그 정보를 사야 해.'

그녀 역시 제론이 이길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다. 그녀뿐 아니라 이곳에 모인 누구도 제론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여기지 않았다.

상식이라는 잣대를 대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제론은 혼자였고, 상대는 열 명이나 되는 기사였다.

더구나 슬라인 백작의 호위 기사는 강하기로 소문났다. 웬만한 가문의 기사를 압도할 정도의 실력을 가졌다. 그런 기사 열 명을 어떻게 혼자 상대한단 말인가.

그것도 고작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말이다.

"자, 대충하고 시작합시다."

제론이 마치 놀러 가기라도 하듯 가볍게 말했다. 그 말은 결투 준비를 하던 슬라인 백작의 모든 호위 기사에게 기름을 끼얹은 결과를 가져왔다.

살기 담긴 시선이 일제히 제론에게로 향했다.

제론은 그것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며 검집을 툭툭 두드렸다. 제론의 눈빛이 한순간 서늘하게 빛났다.

구경꾼이 뒤로 조금씩 물러났다. 순식간에 넓은 공터가 생겼다. 그리고 제론이 그 한가운데에 섰다.

제론 앞으로 기사 한 명이 걸어갔다. 그의 눈빛이 스산하게 빛났다.

"검을 뽑아라."

"필요하면."

제론의 도발에 그대로 넘어간 기사가 거칠게 검을 뽑았다.

챙!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제론을 노려보던 기사가 발을 박찼다. 한순간에 거리가 사라져 버렸다. 이것이 익스퍼트의 실력이었다.

그리고 제론은 그 모든 광경을 무심한 눈으로 지켜보다가 기사가 지척에 이른 순간 검을 뽑았다.

쉬각!

검을 뽑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저 검의 궤적만 잔상처럼 남아 구경하던 사람의 뇌리에 자극적으로 박혔다.

툭!

검을 휘두르려던 모습 그대로 굳은 기사의 목이 바닥에 떨어져 데구르르 굴렀다.

"웃차."

제론은 가볍게 뒤로 뛰었다. 그 순간, 목 없이 서 있던 기사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았다.

촤아아악!

제론은 핏방울 하나 묻지 않은 모습으로 슬라인 백작을 쳐다봤다.

그 서늘한 눈빛에 슬라인 백작이 몸을 움찔 떨었다.

"다음."

무감정한 제론의 음성이 울렸다.

슬라인 백작의 호위 기사는 다들 먼저 나서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가장 나중에 나가기로 되어 있는 기사만 타오르는 눈으로 제론을 노려볼 뿐이었다.

그는 슬라인 백작을 바라봤다. 당장 자신이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슬라인 백작은 방금 전의 싸움을 보고 겁을 집어먹었다. 그는 자신과 눈이 마주친 기사단장을 보며 맹렬히 고개를 저었다.

"예정했던 대로 하게."

어쨌든 제론의 실력이 예상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걸 알았으니 오히려 더 작전대로 나가야 했다. 힘을 빼고 부상을 입히지 않으면 이 결투,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두 번째 기사가 앞으로 나갔다.

결투가 시작된 이후, 제론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마치 한 자루 검이 그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얼굴에 어린 미소도 사라졌고, 온몸에서는 진지함만이 풍겼다.

그 기세를 느낀 기사가 침을 꿀꺽 삼키며 검을 겨눴다.

제론이 검을 든 채로 그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그대로 몸을 날렸다.

쉬각!

이번에도 검의 궤적만 구경꾼의 뇌리에 박혔다.

툭!

목이 떨어졌고, 제론은 어느새 원래 자리에 서 있었다.

촤아아악!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피 분수 너머로 보이는 제론의 모습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달랐다. 충격적이었다. 제론의 평소 모습을 생각하면 이런 검술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클레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녀가 지금 느끼는 감정은 너무나 복잡했다.

일단 가장 먼저 드는 감정은 속았다는 것이었다. 제론은 자신의 분위기를 일부러 가볍게 만들어 진면목을 속였다. 클레는 다른 무엇보다 그것이 제일 분했다.

"다음! 다음 나가라! 저놈이 쉴 시간을 주지 마!"

슬라인 백작이 살짝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건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짓이다. 평소라면 결코 하지 않을 행동이었지만, 자신의 기사가 연달아 목이 떨어지는 광경을 보고 있으니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다음 차례인 기사가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나머지 기사도 다들 같은 심정으로 검을 꽉 쥐었다.

이왕 이렇게 된 이상 최소한 몸에 생채기 하나는 남기고 싶었다. 그래야 마지막에 나올 기사단장이 저놈을 어떻게든 이길 수 있을 테니까.

기사단장의 실력은 확실하다. 조금만 빈틈을 만들어 줘도 분명히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그 뒤부터 더욱 악착같이 덤볐다. 그렇게 한 명만 남기고 모든 기사가 죽었다. 하나같이 목이 잘려서.

그 와중에 제론은 몸에 생채기 하나 생기지 않았다. 게다가 표정도 전혀 변하지 않았다. 과연 결투 전과 같은 사람인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꿀꺽!"

누군가 긴장감으로 침을 삼켰다. 이제 슬라인 백작 쪽에는 단 한 명의 기사만 남았다. 그리고 그가 천천히 검을 뽑으며 걸어갔다.

기필코 죽이겠다는 필살의 의지를 담아 검을 들었다. 그 순간 그는 검과 하나가 되었다.

극도의 긴장감을 승화시키며 순간적으로 단계 하나를 건너뛴 것이다.

제론은 살짝 커진 눈으로 기사단장을 쳐다봤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아무리 단계가 올라 봐야 제론과는 차원이 달랐다.

기사단장과 마찬가지로 검을 세운 제론은 독한 마음을 먹었다. 여기서 빈틈을 보여선 안 된다. 아무리 하수라도 방심하는 순간 당할 수도 있었다.

제론은 그대로 최선을 다해 검을 내리그었다.

촤아악!

기사단장의 몸이 정확히 절반으로 갈라졌다. 사방으로 피가 튀었다. 이번에는 제론도 그 피를 피하지 않았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제론의 모습은 모두의 마음에 공포를 심어 주었다. 제론은 무심한 눈으로 슬라인 백작을 쳐다봤다.

"히, 히익!"

제론과 눈이 마주친 슬라인 백작이 황급히 뒤로 물러나다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덤빌 건가?"

슬라인 백작이 맹렬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 나서면 반드시 죽는다. 자신은 아직 할 일이 많았다. 여기서 이렇게 죽을 수는 없었다.

"후욱."

제론이 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빙긋 웃으며 공증을 맡은 사령관과 귀족을 한 번씩 쳐다봤다.

"결투 끝났습니다. 집행하시죠."

사령관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제론에게 이런 면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지, 아니면 뭔가를 계기로 변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아, 알았네."

사령관은 공증을 선 귀족과 함께 슬라인 백작에게 다가갔다.

슬라인 백작은 한동안 혼이 나간 듯 멍하니 있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설마 결투에서 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대체 이를 어쩐단 말인가.

'300만 골드!'

갑자기 뇌리를 300만 골드라는 단어가 거세게 때렸다. 말도 안 되는 액수였다. 완전히 당한 것이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슬라인 백작은 복잡한 눈으로 제론을 바라봤다. 300만 골드를 눈 뜨고 빼앗기게 생겼다. 자칫하면 영지가 날아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건 절대 안 돼!'

슬라인 백작이 이를 악물었다. 이건 아니었다. 이의를 제기해서 시간을 끌어야만 했다. 좋은 방법이 떠오를 때까지 말이다.

슬라인 백작이 막 입을 열려던 찰나, 제론이 먼저 말을 꺼냈다.

"생각해 보니 300만 골드를 내가 받아 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것 같군요. 이 권리를 팔고 싶은데, 혹시 사고 싶은 분 없습니까?"

제론의 말에 슬라인 백작은 하려던 말이 쏙 들어갔다. 절대 안 된다. 이것만은 무조건 막아야 했다.

그 권리가 제론에게 있다면 뭔가 수를 써 볼 여지라도 남지만, 그게 아니라 어느 정도 힘이 있는 가문이 그 권리를 받으면 빼도 박도 못한다.

"얼마에 팔겠다는 거죠? 설마 300만 골드에 팔겠다는 건 아니겠죠?"

클레였다. 돈으로 대륙에서 손꼽힐 정도라는 디아만트 후작가의 딸답게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이다. 300만 골드짜리 권리를 300만 골드에 팔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당연히 더 싸게 팔 것이다. 클레는 진한 돈 냄새를 맡았다.

"200만 골드."

제론의 말에 클레가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즉시 말했다.

"제가 사죠."

제론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클레가 서둘러 말했다.

"대금을 지금 지불하고 권리를 사겠어요. 당장 위임장을 쓰죠."

200만 골드가 결코 작은 금액은 아니지만, 클레는 충분히 지불할 능력이 있었다. 디아만트 후작가에서 운영하는 상단의 채권으로 대금을 지불하면 되니 말이다.

디아만트 후작가의 상단은 대륙 곳곳에 지점이 있었다. 당연히 레늄 왕국에는 지점의 수가 가장 많았다. 레늄 왕국 구석구석 안 들어간 곳이 없었다.

디아만트 후작가의 상단이 레늄 왕국에서 시작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 지점으로 가서 채권을 돈으로 바꿀 수 있었다. 물론 200만 골드를 한꺼번에 지불할 수 있는 지점은 그리 많지 않겠지만 말이다.

제론과 클레는 누가 끼어들세라 순식간에 모든 일을 처리해 버렸다. 제론에게는 200만 골드 상당의 채권이 쥐어졌고, 클레에게는 제론이 써 준 권리에 대한 인수증이 들어갔다.

슬라인 백작은 그저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기만 했다. 막을 수도 없었다. 너무나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일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클레의 호위 기사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슬라인 백작을 주시했기에 아예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좋은 거래였습니다. 그럼 전 이만."

제론은 혹시 누군가가 또 발목을 잡을까 봐 서둘러 자리를 떴다.

클레 역시 슬라인 백작을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고는 숙소로 돌아갔다.

그녀의 머릿속은 맹렬히 회전 중이었다. 클레의 뇌리를 가장 많이 채우고 있는 것은 300만 골드짜리 인수증이 아니라, 그것을 자신에게 안겨 준 제론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렇게 한바탕 구경거리가 마무리되자, 지켜보던 사람 역시 하나둘 자리를 떴다.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슬라인 백작이었다. 그는 거의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쓰러진 호위 기사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그들이 몸에 걸치고 있던 장비를 벗겨 냈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챙겨 가야 했다. 기간트가 담긴 아공간이었으니까.

"크윽. 이걸 대체 어쩌지?"

기사단장이 차고 있던 장비가 정확히 두 동강 났다. 그 안에 있던 아공간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슬라인 백작은 그것도 일단 챙겼다.

사령관이 병사와 마차를 지원해 주었다.

그날, 슬라인 백작은 쓸쓸히 체른산 방어군을 떠났다. 사령관이 지원해 준 병사의 보호를 받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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